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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 자리 잡고 있는 묘관음사(妙觀音寺)는 임제종 소속의 사찰로 운봉 대종사가 1941년에 창건하였다. 운봉 대종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는 제자인 향곡 혜림(1912~1978)이 중창하였고, 1967년 진제 스님이 법을 이어받았다. 묘관음사(妙觀音寺)는 임제종 선풍을 선양하면서 청담(靑潭), 성철(性徹), 서옹(西翁), 월산(月山) 등 당대의 선지식 승려들이 묘관음사에 수행 정진(爲法忘軀)하였다.

사찰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한국 불교의 선풍 맥을 잇는 사찰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서산 대사 이후 끊어진 선 맥이 경허 스님에 의해 되살아나 경허(鏡虛), 혜월, 운봉(雲峰), 향곡(香谷), 진제(眞際) 스님으로 이어졌다. 성철 스님도 이곳에서 생식하며 동안거를 보냈다. 이곳에서 성철 스님이 출가 전 두었던 딸 수경이 찾아오자 "만날 필요 없다"고 일갈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이 일화는 1949년 성철 스님이 향곡 스님과 함께 이곳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수경은 교사생활을 하다 이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는데, 법명을 불필(不必)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불도를 얻는데 필요 없는 딸이라는 뜻이다.

다리 위에는 동해선 경전철이 있어 전철이 수시로 달리고 있다.

향곡과 성철 스님은 불교 정화 운동을 하던 봉암사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향곡, 성철 스님과 절친한 사이였던 청담의 딸인 묘엄이 쓴 책 회색 고무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인연으로 성철은 묘관음사 길상선원에 머물면서 생식을 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 동안거(冬安居)를 하였다고 한다.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선종을 일으킨 이래  6조 혜능조사 이후 위앙, 임제, 조동, 운문, 법안종으로 갈라져 이른바 오가칠종(五家七宗)이라는 선종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특히 임제종은 양기방회와 황룡혜남이라는 걸출한 종장이 나타나서 양기종과 황룡종으로 외연이 확대되었다.

2층 건물로 1층은 금강문, 2층은 보화원
강당 역할을 하는 보화원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 선사(普愚禪師)가 중국 임제종 양기파의 석옥 청공 선사(石屋淸控禪師)로부터 정통 법맥을 이어받은 후 열반(涅槃)의 미묘한 이치와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석가모니의 깨달음[正法眼藏]’을 스승과 제자가 계속 이어 갔다. 이러한 깨달음은 청허당(靑虛堂) 휴정(休靜)과 환성(喚醒) 지안(志安)을 거쳐 경허(鏡虛), 혜월, 운봉(雲峰), 향곡(香谷), 진제(眞際)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묘관음사 경내를 둘러보면 조경이 매우 정갈하고 깔끔함이 느껴진다. 마치 군두더기가 없어 보이는 정원 같다. 동백나무, 대나무, 단풍나무, 소나무와 능소화 등이 조화롭게 경내를 감싸고 있어 깊은 산골 사찰과 비교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특히 선 수행을 하는 납자들에게는 사시사철 주야 함축되고 절제된 조경과 사찰공간이 어우러진 환경을 제공하여 득도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대웅전 중심으로 좌우 마노당과 산호당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마노당
산호당
종각

경내 전각은 대웅전, 조사전, 관음전, 삼성각, 종각 등이 있으며, 당우(堂宇)로는 금강문과 보화원,마노당, 산호당, 길상선원(吉祥禪院), 금모당 등 있다. 또 묘관음사를 창건하고 중창한 승려 운봉과 향곡의 부도와 탑비가 백화도장에 있다.

대웅전과 산호당

그리고 경내에 탁마정(琢磨井)이라는 샘이 있는데 향곡 스님과 성철 스님의 관련된 일화가 있다. 탁마는 옥 따위를 갈고 닦는 일 또는 학문, 기예, 정신 등을 향상시키는 과정이고 탁마정의 깊이는 약 6m로 물이 지표면까지 올라 차있다. 향곡, 성철 스님 두 스님이 수행을 하다가 더욱더 깊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한 스님이 다른 스님의 목덜미를 잡고 우물 속에 머리를 넣고 죽음의 직전까지 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한마디 하도록 하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다.

탁마정이라는 우물

혜림(蕙林) 향곡(香谷)

혜림(蕙林) 향곡(香谷, 1912~1978)1912년 음력 118일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아버지 김원묵(金元默), 어머니 김적정행(金寂靜行)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진탁(金震鐸), 법명은 혜림(蕙林), 법호는 향곡(香谷)이다.

능소화와 한 몸이 된 소나무

192716세에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하여 범어사 성월(性月)을 은사로 득도하고, 혜림(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31년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雲峯)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내원사 조실 운봉 문하에서 정진하다 크게 깨달은 후 인가를 받았다. 1960년대~1970년대에 북쪽에는 전강, 남쪽에는 향곡이란 뜻의 북 전강 남 향곡(北 田岡 南 香谷)’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혜림은 한국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참선 수행자였다.

조사전에는 경허(鏡虛 ),  혜월 ,  운봉(雲峰),  향곡(香谷)스님의 진영이 있다.
관음전에서 본 경내 전경
저 너머 임랑해수욕장을 품고 있는 동해바다가 보인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성철(性徹), 청담(靑潭), 보문, 자운(慈雲) 등과 함께 결사에 참여하였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지키고, 수행자의 본분대로 살아갈 것을 발원하여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이후 혜림은 제방선원에서 수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였다. 6·25 전쟁 직후인 1951년에는 부산 선암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1955년에는 정화불사에 동참하여 경주 불국사 주지 소임을 맡았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중창하였다. 정화불사 당시 중앙종회의장으로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관음전

1959년에 부산 묘관음사에 길상선원(吉祥禪院)을 개원하고 무차 대회(無遮大會)를 열어 법문을 펼쳤다. 이후 조계산 선암사, 경주 불국사, 팔공산 동화사의 조실 및 선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진제(眞際)에게 법맥을 물려주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1978년 음력 1218일 묘관음사에서 입적하였다. 세수는 67, 법랍은 57세로 부도와 비는 묘관음사 백화도장에 있다.

삼성각 가는 길
삼성각

혜림은 경허(鏡虛), 혜월(慧月), 운봉의 법맥을 계승하였고 후학을 가르칠 때는 부처를 절대자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부처에 대한 관념을 버리지 못하면 부처 또한 스스로를 얽어매는 쇠사슬에 불과하다.”고 강조하였다. 즉 스스로가 하나의 무위 진인(無位眞人, 도를 닦는 마음이 뛰어나서 지위를 달 수 없을 만큼의 위치에 오른 참된 인간)임을 자각하도록 하였다.

길상선원

또 혜림은 정법을 만나 공부하는 사람이면 먹고 입는 데 팔려서는 안 된다.”면서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간절히 공부해야 된다.”고 강조하였다. 편하고 잘 먹는 것만 생각하면 도심(道心)이 일어나지 못하고 망상과 분별과 번뇌만 일어난다. 신심과 분심과 의심을 갖고 정진해야 성과가 있다.”고 하였다. 저서로 1982년에 제자들이 편찬한 향곡 선사 법어집(香谷禪師法語集)이 있다.

금모당 가는 길
사찰 가장 상단에 위치한 금모당

묘관음사 입구 금강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면 운봉선사 발원문 표지석을 지나 백일홍 한 그루와 백화도장이 보이는데 그곳 백화도장에 향곡 대종사 행화비(香谷大宗師行化碑)와 부도 그리고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大宗師行化碑)와 부도가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백화도장의 바닥이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대리석에 경전내용을 새겨져 깔려있다.

백일홍과 백화도장

향곡 대종사 행화비(香谷 大宗師 行化碑)와 부도

19791218일 법제자 진제(眞際)가 세웠고  비신은 너비 63, 두께 32, 높이 174이다. 귀부는 가로 152, 세로184, 높이 93이다. 귀부는 연화문이었던 것을 최근에 거북 모양으로 바꾸었다.

향곡 대종사 행화비 ( 香谷 大宗師 行化碑 )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향곡은 1912118일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아버지 김원묵(金元黙)과 어머니 김적정행(金寂精行)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탁(震鐸)이며, 16세에 둘째 형을 따라 천성산 내원사에서 입산하였다. 18세에 조성월(趙性月)을 은사로 모시고 혜림(蕙林)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1930년 금정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 선사(雲峰禪師)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1944년 임제 정맥의 적전(嫡傳)이 되었고, 향곡(香谷)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에 크게 깨우치고 아래의 오도송을 읊었다.

왼쪽부터 향곡 대종사(香谷 大宗師) 부도와 행화비(行化碑), 진신사리탑,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 大宗師 行化碑)

홀연히 두 손을 보니 전체가 살아났네/ 삼세의 불조들은 눈 속의 꽃이요/ 천경만론이 모두가 무슨 물건이었더냐/ 이를 좇아 불조들이 모두 몸을 잃었도다. 봉암사의 한 번 웃음 천고의 기쁨이요/ 희양산 구비 구비 만겁토록 한가롭네. 내년에도 또 있겠지 둥글고도 밝은 달/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이후 묘관음사를 중건하고 선방을 열자 많은 제자들이 모였다. 묘관음사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19781215일 해운정사에서 열반게를 짓고, 1218일 입적하였다. 세수는 67세이고, 법랍은 50세였다.

운봉 대종사 행화비(雲峰 大宗師 行化碑)와 부도

원래 경상북도 선산 도리사에 있었는데, 문도들의 뜻에 따라 2000년 묘관음사로 옮겼다.  비신은 높이 81, 너비 66, 두께 33이다. 귀부는 가로 103, 세로 146, 높이 79이다.

운봉 대종사 행화비 (雲峰 大宗師 行化碑)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운봉은 1889127일 경상북도 안동 후남동 정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13세 때 일하 화상(一荷和尙)을 은사로 출가하였고, 15세 되던 해 삭발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이때 법명이 성수(性粹)이다. 사미계를 받고 본격적으로 불문에 든 운봉은 강백(講伯) 회응(晦應)의 문하에서 교법을 배우고, 23세 되던 해 범어사 만하 화상(萬下和尙)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25세에 상주 원적사의 석교 율사(石橋律師)로부터 계율을 배웠다. 금강산·오대산·묘향산 등의 거찰에서 정진하였다. 35세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 한 편의 게송을 읊었다.

운봉 대종사 (雲峰 大宗師) 부도

문 밖에 나왔다가 갑작스레 차가운 기운이 뼈 속에 사무치자/ 가슴속에 오랫동안 걸렸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자취가 없네. 서릿발 날리는 달 밝은 밤에 나그네들 헤어져 떠나간 다음/ 오색단청 누각에 홀로 있으니 산과 물이 다 공하도다.

운봉은 부산 선암사의 승려 혜월을 찾아가 인가(認可)를 받았다. 이로써 임제종의 법등(法燈)이 운봉에게 계승된 것이다. 이후 운봉은 통도사·범어사 등에서 조실을 맡아 후학을 가르쳤다. 계미년(1943) 월내포 묘관음사로 옮겼다. 병색이 깊어지자 제자 향곡에게 자신이 입적할 날을 미리 알리고 후사를 부촉(咐囑)하였다. 2월 그믐날 입적게(入寂偈)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운봉의 나이 58, 법랍 45세였다.

석가 달마삼천(釋迦達磨退三千) 후학 성철(性徹) 삼가 쓰다.

법자질(法資秩) 회암 조심(晦岩祖心), 향곡 혜림(香谷蕙林), 구옹 지우(瞿翁智宇), 구암 고현(龜岩古玄), 우하 도원(雨下道源), 진해 각현(震海覺玄), 낙산 병율(落山炳律)

묘관음사에는 조선후기에 제작 된 부산시 문화재 42호 오여래탱(五如來幀)46호 불자(拂子)가 있다.

전법(傳法)의 증표인 불자(拂子)

불자(拂子)는 승려가 수행할 때 마음의 티끌이나 번뇌를 털어 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불교 용구 중 하나이다. () 혹은 불진(拂塵)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먼지와 벌레 등을 쫓아내는 데 사용하였던 생활 용구로 그 모습은 총채와 유사하다. 불자는 선종에서 전법(傳法)의 증표이기도 하며, 선승의 문답 또는 주지가 설법할 때 상징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흰 말의 꼬리털로 만든 백불(白拂)을 불자 중 귀중하게 여겼는데, 묘관음사의 불자가 바로 백불이다. 선사[慧明禪師]], 운봉으로 이어지는 전법게를 전수받은 뒤 창건하였는데, 묘관음사불자는 혜월의 유품으로 향곡이 사용하였다.

모양은 흰색의 말총과 나무 자루로 이루어졌는데, 길이는 83이다. 말총은 유제(鍮製, 놋쇠)로 된 세 벌의 줄로 촘촘히 엮어 나무 자루에 단단히 묶어 연결하였다. 나무 자루에는 어떠한 장식도 하지 않았으나, 손잡이 부분에 붉은색의 띠를 묶고 그 끝에 2개의 수술을 매어 소박하게 장식하였다.

영가 천도를 위한 재()에 사용되는 오여래탱(五如來幀)

묘관음사 오여래탱(妙觀音寺五如來幀)은 다보여래(多寶如來), 묘색신여래(妙色身如來),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 등 다섯 여래를 각 폭에 따로 그린 탱화로, 영가 천도를 위한 재() 의식 때 사용하는 도량 장엄용 불화이다.

오여래탱은 부산 지역에서는 유일한 작품으로 5폭이 한 세트를 이루는데 각 폭의 크기는 세로 66.4, 가로 116.3의 액자 형태로 되어 있다. 원래 족자 형태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1폭씩 액자 형태로 개조해 재 표구된 상태이다. 다섯 여래의 전체적인 모습은 매우 흡사하다. 중앙에 정면을 향한 여래를 중심으로 좌우 각 2폭의 여래로 구성되어 있는데, 적색과 녹색의 구름문을 뒤로 한 채 두광과 신광을 갖춘 여래가 연꽃 위에 서서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래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뾰족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타원형에 이목구비가 다소 중앙으로 몰려있는 편이다. 전반적으로 채색은 적색과 녹색을 주조로 군청색을 가미하였는데, 일부 덧칠된 색채와 필선으로 원래의 가치를 다소 떨어뜨린다. 하단의 화기란(畵記欄)은 원위치를 상실한 채 액자 속에 따로 보관되어 있으며 화승으로 보이는 유성(有性)과 낙정(樂淨)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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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련산((金蓮山, 415m) 마하사골에 위치한 마하사(摩訶寺)는 부산 최초의 사찰이다. 1965~1970년 대대적인 중창불사 중 대웅전 건물에서 "상량문" 이 발견되었는데, 그 상량문에서 마하사를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창건시기를 신라 내물왕대로 추정하고 있다. 마하사의 마하(Maha)는 산스크리트로서 그 뜻은 "훌륭한" "존귀한" "위대한"이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훌륭한 사찰"이란 뜻이다.

마하사 초입의 나무터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누구인가?

아도화상 또는 묵호자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으로 아버지 아굴마, 어머니 고도녕 사이에서 태어났고 5세 때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로 갔다가 19세에 돌아왔다. 신라 미추왕 2(263)때 부터 불교 전파에 노력하였고 눌지왕 2(418) 일선현(현재 선산)에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된 계기를 만든 인물이 아도화상이다.

그리고 마하사의 터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에 자리 잡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명당자리이다오래전 금련산에는 마하사, 반야암, 바라밀다사(波羅密多寺) 등 세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하사만 남아 있고, 반야암과 바라밀다사는 마하사 입구의 맞은편 언덕에 사찰 터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마하사 약수터
중생들의 간절한 소원성취를 위한 곳인가?

옛날부터 마하사의 십육나한이 영험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지역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한전의 16나한의 불상이나 탱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적이고 해학적이며 소탈한 모습을 띄고 있다.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 참새를 쫓아낸 나한등 관련 설화를 보면 팥죽이 먹고 싶어서 황령산의 봉화대를 찾아 갔다는 것이나, 나한전의 불사를 하지 않자 종소리를 바꾸어 버린 것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어 웃음과 함께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인간적이고 소탈한 모습의 부처님
2층 누(樓) 건물양식에 천왕문과 범종각
좁은 산세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건물이다.

또한 수영팔경(水營八景) 중 하나인 연산모종(蓮山暮鐘)’이라 하여 마하사에서 해질녘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범종소리로 금련산 마하사골을 해탈 향기로 그윽하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초입에서 맞이하는 범종각의 청정한 종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마하사 창건 내력을 보면 임진왜란 때 봉수대를 지키는 호국불교 사찰이기에 건물이 모두 불탔고, 18~19세기 단계적으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1717(숙종 43) 초암(草庵) 형태의 대웅전과 나한전을 짓고 신도 박성우(朴聖祐)가 시주하여 16나한상을 조성하였다. 1729(영조 5) 승려 각찬이 주도하여 나한전을 중건하였다. 1773(영조 49) 승려 진우(震祐)와 쾌일(快一)이 나한전을 다시 중건하였다. 1791(정조 15) 승려 채정(采定)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1841(순조 14) 대방, 즉 마하대복연을 중건하였다. 1860(철종 11)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1876(고종 13) 요사와 식당을 중건하였다.

마하사의 터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에 자리 잡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명당자리이다.

1965년부터 1970년 사이 승려 문성이 대웅전·응진전·대방·요사·식당을 중건하였다. 1983년 승려 지환이 응진전을 중건하였고, 1984~1985년 승려 지연이 종각을 세우고 반야암을 중창하였다. 1987년 승려 지정이 설법전을 보수하였고, 대방을 지장전으로 개축하였다. 1995~1998년 승려 경민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여 현재의 마하사 모습을 갖추었다.

대웅전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2000년에 조성한 금동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과 목각 지장탱, 목각 신중탱이 있다. 오른쪽에는 조선 후기 제작한 목조 여래 삼존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창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솟을살 살대에 십장생 살대를 꾸며 놓은 살문구조다. 대웅전에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로 보는 재미가 솔솔한 창호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대웅전
대웅전 공포의 고풍스러운 맛은 크지 않다.
창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솟을살 살대에 십장생 살대를 꾸며 놓은 살문구조로 대웅전에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로 보는 재미가 솔솔한 창호다 .
십장생 중 학과 소나무
십장생 중 학과 사슴, 소나무

나한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세기 건물을 최근 중창하였다. 안에는 18세기 조성한 목조 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 협시하고 있다. 또 불단 좌우에 16나한상과 나한도는 석조로 목조 석가여래 좌상과 같은 시기 작품이다.

정면  3 칸 ,  측면  2 칸의 팔작지붕의 나한전
옛날부터 마하사의 십육나한이 영험하기로 유명하여 지역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대웅전 맞은편 대방(大房)은 일명 마하대복연(摩訶大福緣), 지장전으로 근래에 다시 고쳤다. 대방(大房)은 스님들의 수행, 식사, 회의 등이 열리는 곳으로 현재 마하대복연, 지장전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맨 좌측에는 지대방 현판이 걸려있는데 사찰의 큰 방에 딸린 작은 방을 칭하는 것으로 본 건물에 시멘트로 추가적으로 만든 것 같다.

지대방은 본래 스님들의 휴게실로 스님들의 신변잡기, 종단 소식 등을 주고받는 장소로 주로 별도의 방이 없는 스님, 갓 출가한 행자나 사미들이 주된 이용자다. 어원은 벽에 지댈 수 있는 방에서 유래했으며 현재는 창고로 쓰이는 것 같다.

지대방, 마하대복연 ( 摩訶大福緣 ),  지장전

십육나한의 설화,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과 참새를 쫓아낸 나한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어느 해 동짓날 밤에 마하사의 불씨가 모두 꺼져 버려 팥죽을 쑤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주지가 절 부엌에 가 보니 화덕에 불이 켜져 있어 놀라는데, 그때 황령산의 봉화꾼이 와서 하는 말이 어젯밤 이 절의 상좌 아이가 불을 얻으러 왔기에 불을 주고 팥죽을 먹여 보냈다고 했다. 주지는 그리한 일이 없기에 이상하게 여기고 팥죽을 쑤어 나한전에 올라갔는데 십육나한 중 오른쪽 세 번째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뒤 소문이 나 민가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아졌다.

어느 해에는 절 마당에 참새가 많이 찾아와 절에 피해가 크자 나한전에 빌었더니 참새 한 마리가 죽어 떨어지고, 그 후로 다시는 참새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느 해에는 불사를 거행하는데 돈이 부족하여 나한전의 불사를 행하지 않고 불사 종료 회향식을 올리려고 했다. 이때 범종을 치는데 종소리가 나무 소리로 바뀌어 신도들이 깜짝 놀라 나한전에 나가 내일 나한전 불사를 거행하겠다고 하니 종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16나한 설화의 영향인지 전반적으로 부처님 상이 정겹고 친밀감이 느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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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앵림산(鶯林山, 491m) 기슭에 위치한 안적사(安寂寺)는 신라 시대인 661(문무왕 원년)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초창에 관한 문헌 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해운대구 반송동 운봉 부락 뒤편에 있었던 운봉사(雲峰寺)가 연원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운봉사는 석탑 옥개석을 비롯해서 기와·토기·청자 파편 등이 발견되어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찰로 추정된다. 운봉사가 임진왜란으로 폐사되자 현재 지역으로 옮겨와 안적사가 되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계단따라 올라가면 맞이하는 원통문

1592(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이후 범어사(梵魚寺)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건하였다. 1873년에는 대웅전, 수선실 등을 경허(慶虛), 해령(海嶺)이 중수하였으나 광복 후 거의 폐사되고 소실되었다. 1973년부터 남곡덕명(南谷德明)이 대웅전, 삼성각, 수선실, 요사채, 종무소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가람 배치를 갖추었다.

일주문

현재 안적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삼성각, 설현당, 보림원 등 10동의 건물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1990년 무렵 지어졌으며, 아미타여래 좌상과 관음보살·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그리고 대웅전 에는 아미타여래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가 있는데 1874년에 제작 된 탱화로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0호이다. 보통 극락전의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나 감로 탱화 등의 상단탱화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천왕문
천왕문에서 바라 본 일주문
천왕문 겸 반야문 사방벽면에는 12지상이 벽화로 꾸며져있다.
공포가 아름다운 종각

특징은 화면 상단에 등장하는 나한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데, 아미타 삼존을 비롯한 문수·보현 동자의 표현이 조선 후기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면, 나한상 6위의 얼굴 표현은 주색(朱色) 바림의 음영을 통해 얼굴의 굴곡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어, 음영을 부각시켜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근대 불화의 성격으로 조선 후기 불화에서 근대 불화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변화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자료이다.

또한 중생의 사후 세계를 관장하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에서 중생들의 죄질을 심판하는 십대 명왕들, 그리고 그 권속들을 도설하고 있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있었으나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1919년에 제작된 작품이기는 하나 전통 기법을 가진 고식적인 구도, 독특한 표현 기법,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양, 유려한 선 처리 등 이 시대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작품으로 주목받는 문화재이다.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이다.

삼층탑에 진신사리3과를 봉안하여 여래진신사리보탑이라고 칭함

대웅전 바로 옆에 삼성각에는 칠성탱·산신탱·신중탱과 원효·의상(義湘동산(東山)의 진영이 있다. 대웅전 왼편에 요사인 설현당(說玄堂), 오른편에 보림원(寶林院)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 뒤편으로 삼소굴(三笑窟)이라는  선원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에 조성한 3층 석탑도 경내에 있다.

안적사 전경

안적사는 비록 건축물은 최근에 지어졌지만 신라 시대 승려 원효와 의상이 젊었을 때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신심이 깊은 신도와 수선납자가 꾸준히 이 절을 찾고 있다. 현재 범어사의 수사찰(首寺刹)이고 신라시대의 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앵림산(鶯林山)은 산속에 꾀꼬리 떼들이 모였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장산의 북쪽 연봉으로, 북서쪽 골짜기에서는 내동천이 발원해 내동 마을의 내리교를 가로질러 흘러내린다. 앵림산 주변에는 억새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고 해송이 주를 이루며, 사방으로 너덜겅이 있다. 그리고 2시간에서 7~8시간에 이르는 다양한 산행 코스와 시원하고 조용한 계곡도 있어 등산객과 여름철 가족 피서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앵림산(鶯林山)과 원효(元曉)와 의상(義湘)대사의 이야기

원효(元曉)대사와 의상(義湘)대사는 젊었을 때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을 깊이 연구하며 안적사에서 정진하였다. 안적사(安寂寺)가 있는 곳은 동해의 푸른 바다가 아른거리고, 숲이 울창하며, 기후가 따뜻하여 온갖 새가 지저귀고 있는 극락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더욱이 따뜻한 남쪽 나라에만 있는 꾀꼬리와 극락조가 짝을 지어 지저귀고, 사람들의 팔과 어깨에 앉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앵림산(鶯林山)이라 했다. 이 극락 같은 곳에서 원효대사는 안적사 자리에 토굴을 만들고, 의상대사는 꾀꼬리 떼가 많이 서식하는 그 아래에 토굴을 만들어 주석하였다. 의상대사는 탁발하지도 않고 선녀가 올리는 공양을 받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를 자랑하고 싶어 사형으로 모시고 있는 원효대가를 공양에 초대하였다. 그런데 이날 어김없이 공양을 올리던 선녀는 끝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기다리다 못해 되돌아 간 후에 나타난 선녀에게 의상대사는 무안을 당한 화풀이를 하였다. 선녀는 원효대사가 앉은 곳에 화광이 충전하여 접근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그때 의상스님은 원효스님이 금강 삼매에 들어 신통을 부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의상스님은 교만심을 버리게 되어 크게 득도하였다고 한다.

1973년 불사에 크게 기여한 신도의 무덤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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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처럼, 단풍 빛깔에 비치는 물결처럼, 이 모두 비단 빛의 물결이라서 비단 금(錦), 물 수(水)하여 금수(錦水)라고 하고 천년, 만년 동안 거울처럼 맑고 얼음처럼 차가운 금수가 사시사철 흐르는 골짜기가 금수동(錦水洞)이다. 금수(錦水)는 삼각산 박치골의 박천(朴川) 물과 불광산 백련암 계곡의 물이 합류한 청정한 물로써 이 아름다운 계곡인 금수동(錦水洞)이 장안사 계곡을 대표하고 있다.

금수동 각석

장안사(長安寺)로 가기 위해 통과하는 초입 골짜기가 금수동(錦水洞)이고 멋있게 맞이하는 것이 금수동(錦水洞) 각석이다. 상장안 마을 첫 주차장과 둘째 주차장사이의 도로변 암벽에 錦水洞 세 글자를 초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그 유려함이 매우 뛰어나나 누구 썼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옛날 금수동(錦水洞) 절경에 감탄한 유랑객이 필력을 다해 새겼으리라.
풍문에 의하면 이진순 현감, 본관이 능성 구씨인 선비 등이 썼다고 하며,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손가락으로 썼다고도 한다. 원효대사는 그만큼 이 지역에서 인연이 많다. 금수동 글자 오른쪽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산수계원(山水契員)과 사람이름 12명이 새겨져 있어 양반들의 계모임인 산수계에서 12명이 이곳에 놀러 와서 기념으로 새긴 것 같다.

금수동 글자 오른쪽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져 있다.
왼쪽에는 산수계원(山水契員)과 사람이름 12명이 새겨져 있어 양반들의 계모임인 산수계에서 12명이 이곳에 놀러 와서 기념으로 새긴 것 같다.

불광산(660m) 산록에 위치한 장안사(長安寺)는 673년(문무왕 13) 원효(元曉)가 척판암(擲板庵)과 함께 창건했다는 『송고승전(宋高僧傳)』의 기록이 있다. 처음 절 앞에 계곡이 양 갈래로 흐르고 있어서 쌍계사(雙溪寺)로 불리다가 809년(애장왕 10)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기장현 읍지(機張縣邑誌)』에는 선여사, 취정사, 안적사, 장안사 등을 원효가 창건한 4대 사찰로 기록하고 있다.

천왕문 통과하면 맞이하는 부처님

장안사(長安寺)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의 병화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631년(인조 8년)에 중창하였고 1638년(인조 16년)에는 태의대사(太義大師)가 중건하였다. 1660년(현종 1) 김방한(金邦翰)이 지은 「장안사 대웅전기(長安寺大雄殿記)」와 2009년 대웅전 지붕 밑에서 중수 연도가 적힌 상량문인 「순치 13년 종도리 묵서명(順治十三年記宗道里墨書銘)」이 발견되어 확인결과, 1654년(효종 5년)에는 박수(朴秀), 김억문(金億文), 최춘매(崔春梅) 등 72명이 시주하고, 1657년(효종 8) 학능(학능), 충묵(沖墨), 원정(元正)스님 등이 2월 4일에 불사를 시작하여 5월 12일에 기둥을 세우고, 6월 7일에 들보를 올리는 상량을 하였으며, 1658년에 중수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장안사 대웅전은 2012년 8월 6일 보물 제1771호로 지정되었다.

왼쪽의 나무는 수령이 200년 된 단풍나무로 보호수로 지정

1744년(영조 20)에는 대웅전 지붕 부분의 서까래 등을 교체·보수하였으며, 1951년에도 부분적으로 보수하였다. 1975년에는 처마를 다시 채색하였으며, 1987년에는 장안사 대웅전 지붕의 번와(翻瓦, 기와를 잇는 작업) 불사가 있었다.
현재 장안사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 명부전, 산신각, 설법전, 해동전, 불광전, 천왕문, 종각 등이 있으며 석조건축물에는 5층 석탑과 석등이 있다. 또한 경외 천왕문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대숲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절터 주변에 있었던 부도(浮屠) 5기(基), 탑비(塔碑) 2기(基)를 옮겨 한 자리에 봉안하였다.

장안사 경내의 백미는 보물 제1771호인 대웅전(大雄殿)이다. 부산 지역 가장 오래된 다포식 목조 건축물로 1658년에 중수를 완성한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둥과 대들보 등 주요 구조 부재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 건립 시기의 목조 건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 원형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건물 폭에 비해 건물 자체 높이가 높고 처마가 깊게 돌출한 팔작지붕을 갖기 있기 때문에 평면의 규모에 비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공포의 화려함에 이어 창호(窓戶)의 아름다운 미를 볼 수 있는데 살문 맨 아래에는 태극무늬, 중간 좌우에는 빗살(교살)과 솟을살(격자빗살), 그리고 맨 위에는 빗살과 원형의 꽃 살로 살문을 꾸며서 소목장의 뛰어난 미적안목과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웅전(大雄殿)은 부산 지역 가장 오래된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 겹처마의 다포식 목조 건축물로 1658년에 중수를 완성한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건물로 측면에서 볼 때 팔(八) 자 모양을 가진 팔작지붕의 다포(多包)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기둥 윗부분을 장식해 주는 공포는 기둥 윗부분 외에 기둥 사이에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전면 공포는 후면 공포나 좌우면 공포와도 양식의 차이를 나타내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공포의 보수·교체 흔적이 보인다.

대웅전 후면으로 겹처마와 돌담의 평행미가 돋보인다.
대웅전 측면으로 단청과 공포의 화려함을 느낄수 있다.

대웅전 內 삼존불 중앙에는 석가여래, 왼쪽에는 약사여래, 오른쪽에는 아미타여래로 구성되어 있고, 본존불인 석가여래는 1659년 대화원(大畵員) 녹원(鹿元)을 비롯하여 편수(片手)인 명자(明紫), 학륜(學崙), 각인(覺仁)이 참여하여 불신(佛身)은 불석(佛石, 제오라이트), 양손은 나무로 조성한 석조 석가여래삼불좌상(石造 釋迦如來三佛坐像)으로 보물 제1834호이다.

대웅전 창호(窓戶)에서 아름다운 미를 볼 수 있는데 살문 맨 아래에는 태극무늬, 중간 좌우에는 빗살(교살)과 솟을살(격자빗살), 그리고 맨 위에는 빗살과 원형의 꽃 살로 살문을 꾸며서 소목장의 뛰어난 미적안목과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턱이 짧은 방형의 얼굴에 콧날이 우뚝하며, 부드럽고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다. 이 불상은 조성연대와 작가가 밝혀져 있어 17세기 중·후반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 작이 될 수 있고, 불석 제 불상의 본격적인 유행 시점에 제작되어 불상 재료 연구에 중요한 불상으로 평가된다. 후불탱화는 석가영산회상도(釋迦靈山會上圖)로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7호이다.

대웅전 옆 산신각

응진전(應眞殿)은 맞배지붕 겹처마의 정면 3칸, 측면 2칸 익공양식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고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는데 공포는 전반적으로 장식적인 성향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겹처마를 통하여 공포 살미 초제공, 이제공의 연화 앙서형, 삼제공의 용두와 봉두의 화려함을 부각하였는데 19세기말 부산지역 사찰의 건축특성을 확인 할 수가 있다. 

응진전(應眞殿)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 익공양식으로 1899년에 건립되었다.

 

응진전 공포 살미의 초제공, 이제공은 연화 앙서형, 삼제공은 봉두로 조각되어 있다.

 

살미의 삼제공이 용두로 조각되어 있다.

중앙의 주불은 석가모니, 왼쪽에는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그리고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5호인 석조 석가 삼존 십육 나한상이 모셔졌다. 후불탱화인 석가 영산회상도(釋迦靈山會上圖)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8호이다. 나한은 석가여래가 열반한 후 미륵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한 분들이다.

중앙의 주불은 석가모니, 왼쪽에는 미륵보살, 오른쪽은 제화갈라보살

명부전(冥府殿)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3칸 익공양식으로 1744년 중건되었고 주불은 지장보살, 왼쪽에는 도명존자, 오른쪽은 무독귀왕을 모신 곳이며 지장전이라고 하고 지옥의 심판관인 모신 곳이라서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지장보살 뒷면에 봉안 된 지장보살도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9호이고 석조 지장 시왕상은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6호이다.
육도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죽으면 염마대왕 앞에 나가 자기가 지은 죄악에 대해 엄격하고도 공정한 재판을 밭게 되는데 그 재판은 10대왕이 하게 된다.

명부전(冥府殿)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3칸 익공양식으로 1744년 중건되었다. 왼쪽은 석등

설법전(說法殿)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최근에 지었다. 안에는 금동 와불상(臥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와불 복장(腹藏)에는 2001년 미얀마 마웅매이사(寺)의 승려 우뚜리야 사야도우가 기증한 진신 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

설법전(說法殿)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규모로 최근에 지었다.

삼층석탑에도 혜경선사가 태국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구해서 봉안하였다.

부처님 진신사리 7과가 봉안 된 삼층석탑

부도(浮屠)와 탑비(塔碑)
천왕문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대숲이 나타나는데 입구에 「원효 이야기 숲 안내도」 표지판이 있다. 이곳 원효 이야기 숲 초입에 고려말 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 5기(基), 탑비(塔碑) 2기(基)가 있다. 절터 주변에 있던 이들을 장안사 종루 왼쪽에 옮겨졌다가 현재는 위치로 다시 옮겨져 있다. 원효 이야기 숲은 조성 중인 것 같다.

원효 이야기 숲 입구

부도 가운데 문자가 새겨진 것은 선암당 명열대사(仙岩堂 明悅大師) 부도뿐이다. 명열대사 부도는 옥개가 생략되고 석종형으로 전면에 仙岩堂 明悅大師塔이란 명문이 있고 후면에는 가경(嘉慶) 3년(정조 22년, 1798년) 9월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딴 기록은 글자가 마멸되어 판독할 수가 없다. 이 이외의 부도는 8각의 옥개석을 얹은 것이 있고 중대석과 하대석이 한 돌로 구성된 부도도 있으며 높이 147㎝의 부도도 있으며 모두 5기의 부도가 있다.

선암당 명열대사(仙岩堂 明悅大師) 부도는 옥개가 생략되고 종형으로 전면에 仙岩堂 明悅大師塔이란 명문이 있고 후면에는 가경(嘉慶) 3년(정조 22년, 1798년) 9월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글자가 마멸되어 판독할 수가 없다.
석종형(石鐘形) 부도 (浮屠)로 중대석과 하대석이 한돌로 되어있다.

부도와 연관된 탑비(塔碑)는 2기가 있는데 그 하나는 1754년(영조 30, 건륭 19년)에 처음 세웠는데 1844년(현종 10, 도광 24년)에 다시 세운 「선교양종 월조당 대선사지탑비(禪敎兩宗 月照堂 大禪師之塔碑)」이고 다른 하나는 1775년(영조 51, 건륭 40년) 세운 「연파당대사 쾌주지비(蓮坡堂大師 快淍之碑)」다.
연파당 대사(蓮坡堂大師) 쾌주비(快淍碑)
蓮坡堂大師快淍之碑
乾隆四十年乙未九月日 上左錦察允澤
건륭 40년(1775) 을미년 9월 일 상좌 금찰 윤택

蓮坡堂大師快淍之碑
乾隆四十年乙未九月日 上左錦察允澤

선교양종(禪敎兩宗) 월조당 대선사(月照堂大禪師) 탑비(塔碑)
禪敎兩宗月照堂大禪師之塔碑
師諱克存 俗姓張氏 車成人也 幼從粹寬定師落髮 長隨香坡
선사의 휘는 극존(克存)이오, 속성은 장(張)씨로 거성(車成) 사람이다. 어려서 수관정사(粹寬定師)를 따라 머리를 깎았고, 커서는 향파(香坡)를 따르며
粗味敎亻又 後隨靑霄 更參禪旨 老而彌傳來祖焰淸虛七代 年臨稀二卒恙
대략 교종의 가르침을 맛보았다. 그 뒤 청소선사(靑霄禪師)를 따르며 참선의 뜻을 알았으며, 늙어서는 조사 청허(淸虛)의 7대 뒤를 뒤이었다. 나이 72세에 병으로 죽었다
皈寂三日 周維禪光亙天 灵骨二枚 形具五色 一安長安 一安雲興寺
선사가 입적한 지 3일 뒤에 선광(禪光)이 주위를 두르며 하늘에까지 닿았고, 사리 2매가 다섯 가지 색을 갖추고 있었다. 하나는 장안사(長安寺)에 안치하고, 또 하나는 운흥사(雲興寺)에안치하였다.
世稀有 故樹塔焉 □□ 哲海平順 平學性玉 最屹有侃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므로 탑을 세워둔다. 철해 평순, 평학 성옥, 최흘 유간.
(乾隆十九年)甲戌四月日立 都監通政眞札
건륭19년 갑술년(1754) 4월에 세우다. 도감 통정 진찰
道光二十四年甲辰二月日 改立 定林
도광24년 갑진년(1844) 2월 다시 세우다. 정림

禪敎兩宗月照堂大禪師之塔碑
師諱克存 俗姓張氏 車成人也 幼從粹寬定師落髮 長隨香坡 粗味敎亻又 後隨靑霄 更參禪旨 老而彌傳來祖焰淸虛七代 年臨稀二卒恙 皈寂三日 周維禪光亙天 灵骨二枚 形具五色 一安長安 一安雲興寺 世稀有 故樹塔焉 □□ 哲海平順 平學性玉 最屹有侃 (乾隆十九年)甲戌四月日立 都監通政眞札 道光二十四年甲辰二月日 改立 定林

청룡등(靑龍嶝) 절단에 얽힌 전설
청룡등(靑龍嶝) 대한 전설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혜통국사와 독룡 관련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스님들 이야기다. 혜통국사(惠通國師)와 독룡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효소왕 때 기장산(機張山=달음산)에 숨어 있던 독룡이 곰으로 화신하여 주민들에게 큰 해를 입히고 있었다. 당시 혜통국사(惠通國師)께서는 친히 기장산의 독룡을 퇴치하려고 기장현에 왔었다. 독룡은 동해용왕에게 빌고서 이곳 청룡등에 숨어 있었다. 혜통국사께서는 독룡이 청룡등에 숨어있는 것을 알고 밀단법(密壇法)으로서 독룡을 설유하였다. 그러면서 독룡이 다치지 않고 도망칠 수 있도록 청룡등의 기슭을 헐어주었다. 그러나 독룡은 황금 송아지로 변신하여 또 도망하였다. 그리고 다시 기장산 바위굴에 곰으로 화신하여 숨어 있는것을 찾아 곰에게 불살계의 자비설법으로 단속하였다.
그때 혜통국사께서 청룡등의 기슭을 헐어놓게 되자 두 갈래 쌍계는 한 갈래 계곡수로 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쌍계사를 장안사라고 고쳤고, 장안사는 독룡의 피해를 벗어나고 동해용왕의 가호를 받아 번성하고 있다고 한다.」

원효 이야기 숲 내 산책길

다른 하나인 스님들 이야기다
「장안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초기에는 쌍계사라 하다가 신라 애장왕께서 다녀간(809년) 후부터 장안사라 개칭되었다. 그때 이후부터 장안사는 찾아드는 방문객은 물론 치성 드리고 재 올리는 청탁이 날로 늘어나 매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따라서 식당을 담당하는 부중 취사 전담 말석 스님들은 너무나 바빠 허리 한 번 펼 사이도 없이 종일 식사 뒷바라지에 시달려야 했다. 피곤이 쌓여 몸은 매일 지쳐 있었고 밥 지을 땔나무도 산에서 채취해 와야 했다.
밥 짓고 반찬 만들고, 그릇 씻고, 그야말로 한시 반시도 쉴 틈이 없으니 몸은 파김치가 되어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기가 싫을 지경이었다. 짜증이 절로 나왔다.
“이놈의 절이 언제쯤이나 망할꼬?”
탄식조로 나오는 넋두리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과객이 늦게야 찾아들어 그들과 함께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부중들의 넋두리를 듣던 과객이 말했다.
“절을 망하게 할 방책이 한 가지 있기는 한데, 그대들이 과연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지?”
은근히 부중들을 충동질하였다. 그러나 부중들은 귀가 번쩍 띄었다. 그들은 정색을 하고 다그쳐 물었다.
“정말로 방책이 있기나 합니까?” 힘없던 눈망울들이 번쩍 빛이 났다.
“어서 좀 일러 주십시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
부중들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제야 과객이 방책을 일러주었다.

그것은 바로 절 앞을 감싸고 흐르는 청룡골 개천 물 때문이다. 청룡등(靑龍嶝) 끝자락 잘록한 부분을 절단하여 똑바로 직선으로 흐르게 하라. 그러면 절은 자연적으로 쇠퇴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청룡등 잘록한 부분이 비록 가늘기는 하나 장비라고는 괭이와 삽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여간 거창한 공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중들로서는 워낙 시달려왔기에 그런 저런 것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당장 그 다음날 밤부터 일에 착수하여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진행시켰다. 기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 달 밝은 날 밤 공사가 거의 완공단계에 이르렀을 때였다. 절단 부위에서 시뻘건 피가 터져 나오더니 이어서 황금송아지가 뛰어나와 슬픈 울음을 세 번 울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였다. 절로 찾아드는 손님이 하나 둘씩 줄어들더니 마침내 손님의 발걸음이 완전히 끊어지고, 절은 망해버렸다는 것이다.」

두 이야기의 결과는 서로 상반된 내용이다. 이 대목에서 청룡등(靑龍嶝)의 존재와 위치가 궁금하다.

신라 불교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승려인 원효(元曉)
원효(元曉, 617~686)는 성은 설씨(薛氏)이며,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불교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서로 다른 견해에 내재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차원 높은 통섭(通攝)의 원리를 추구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은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철학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뒤 당시의 선진적인 불교 사상을 섭렵하여 화쟁의 논리로 체계화하였다.
원효(元曉)]에게 경주가 자신의 역량을 펼친 곳이라면, 젊은 원효의 주요 활동지 가운데 하나가 울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보이는 낭지화상(郞智和尙)에게 불법을 배우는 장면이나 지통(智通)과 교유하며 수행한 곳이 울산의 반고사(槃皐寺)와 영축산 일대이다. 원효는 울주군 두동면 대곡리에 있던 반고사에서 지내면서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과 『초장관문(初章觀文)』을 저술한 뒤 울주 영취산에서 수행하던 낭지 화상에게 보내 비평을 부탁하였다.
남긴 저서는 약 80부 200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완본으로 현존하는 저서는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법화종요(法華宗要)』, 『열반경종요(涅槃經宗要)』, 『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이장의(二障義)』,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등 13부이다. 잔본(殘本)으로 현존하는 저서는 『화엄경소(華巖經疏)』, 『본업경소(本業經疏)』, 『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 『판비량론(判比量論)』, 『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등 6부와 『해심밀경소서(解深密經疏序)』, 『미타증성게(彌陀證性偈)』 등 총 20여 종이다.
불광산(660m)은 대동여지도(1861년)에 기장현 장안의 주산으로 표기돼 있고, 조선 후기에 지어진 '차성가'에도 「불광산 솟았으니 사문법계 없을 손가(이하 생략)」라고 이곳의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불광산의 다른 이름은 팔기산으로 '봉우리 8개로 이루어진 산'이란 뜻이다.
차성가(車城歌)는 기장의 명소·마을 등 140여 곳의 아름다움을 풍수지리에 맞춰 호방하게 노래한 기행가사다. 창작 연대는 1800년대 중반, 작자는 미상이다. 차성은 고려시대부터 불린 기장의 옛 이름. 차성, 즉 수레(車)와 성(城)은 나라의 해안 변경 군사상의 요충지를 암시하고 있다.
삼각산(425m)는 장안사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산봉우리는 왕릉처럼 둥그스레하나 산기슭은 가파른 편이다. 삼각산이란 삿갓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솟아 있는데서 비롯되며,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라고 한다. 즉, 이 삼각산을 삼신산으로 삼아 인근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꼭 단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고 한다.
박천(朴川)은 삼각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천으로 박천(朴川)은 밝내 로서 예부터 신선한 곳으로 인식해왔다. 옛날 이 삼각산 아래 박천물에서 삼각산의 산정으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는 제사를 올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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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불광산(佛光山, 659m)에 위치한 척판암은 673년(문무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장안사(長安寺)와 함께 창건하였다. 척반암에 가는 방법은 장안사 주차장에서 산길을 도보로 가면 20 ~ 30분 소요되고 포장 된 도로로 자동차로 가면 5분이 걸린다. 백련암에서 도보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면 15분이 소요된다. 산길은 소로를 따라 걸어가는 나름의 맛이 있고 자동차를 이용하면 크고 장대한 수림 속을 감상할 수가 있다.

산길을 도보로 척판암으로 가는 경우 초입의 안내판
산길로 가면 맞이하는 척판암 천왕문

척판암(擲板庵)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원효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 중 중국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고 있는 1천여 명의 승려들에게 위급한 사태를 알리고자 소반에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는 여덟 자를 적어서 운제사(雲際寺) 대웅전까지 하늘 높이 힘껏 던진 곳이라 하여 척판암(擲板庵)이라고 하였다. 위급한 사태라는 것은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 대들보가 썩어서 막 무너지려고 하는 것을 원효가 보고 소반을 던졌고 던져진 소반은 운제사의 대웅전 앞뜰 위에서 윙윙거리며 공중에 맴돌았다. 막 예불을 마친 승려들은 이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려고 모두가 재빨리 대웅전 앞뜰로 나왔다. 이때 굉음과 함께 대웅전이 폭삭 무너지고 공중을 맴돌던 소반도 땅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승려들은 땅에 떨어진 소반에 적힌 글자를 보고는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신라의 원효임을 알게 되었다.

1천여 명의 승려들은 이로 인하여 길을 떠나 양산군 천성산 석굴에 있던 원효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원효의 오묘한 법문과 가르침을 받고서 모두 성인(聖人)이 되었으며, 모두가 끝내 이곳에서 열반을 하였는데 열반한 육신은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산은 1천 명의 성인들이 나왔다는 뜻으로 천성산(千聖山)이라 하였고 천성산 바위들은 그 성인들의 변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척판암은 창건 이후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38년에 경허(擎虛)가 중수한 후 장안사의 부속 암자로 있다가 최근에 독립하였다.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천왕문, 척판암, 용왕당, 극락전, 산신각 등으로 구성 되어 있고 암벽 밑에 위치해 경내가 좁은 편이다.  ‘척판암(擲板庵)’이라는 현판이 있는 불전에는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과 근래 조성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과 용왕전은 2010년 건립하였고 독성각 또한 최근에 건립하였다.

척판암(擲板庵) 현판이 있는 불전에는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과 근래 조성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온화한 인상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척판암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석불로 높이가 37.5㎝로 당시 각 지역마다 작은 크기로 제작하여 소규모의 불전에 봉안하였다. 척판암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바닥 면에 복장공(腹藏孔)이 있고 범어가 적힌 한지로 막았으며 복장물(腹藏物)은 도난을 당해 없고 1996년에 개금 불사를 하면서 복장물을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2008년 4월 2일에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의 형태는 육계(肉髻)와 머리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며, 검은 모발을 칠하지 않은 채 도금한 색깔 그대로 정상 계주(頂上髻珠)를 표현하였다. 머리 중앙에는 흰색과 홍색의 원호를 넣은 중앙 계주(中央髻珠)를 표현하였다. 양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무릎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어깨와 무릎이 좁으며, 고개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입고 있으며, 승각기(僧脚崎)는 표현하지 않고 가슴 아래에서 두 줄의 평행 띠로 하의인 군의(裙衣)를 묶고 있다. 전체적으로 신체의 비율이 맞지 않아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지 못하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고 있는 상호(相好)는 비교적 온화한 인상을 준다.
신체에 비해 비교적 큰 방형의 얼굴, 대의를 입고 있는 모습과 배 부분에서 두 줄의 평행 띠로 군의를 묶은 모습 등에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 조각에서 나타나는 도식적이고 딱딱한 옷 주름 표현을 볼 수 있다. 또한 석조 재질에서 볼 수 있는 양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은 모습, 발과 옷 주름 표현이 두껍고 세밀하게 조각되지 못한 점 등에서 조각적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용왕전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멀리 보이는 대운산
극락전
극락전 앞 극락교
자동차를 이용하여 5분이면 도착하는 주차장에서 보이는 산신각 안내판
큰 바위 중간에 조성한 산신각

원효대사(617~686년)는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학자이자 사상가이다. 파계와 이적을 보인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고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은 설씨이고 원효는 법명이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에는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여권이나 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고승이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작이다.
또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종파주의적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다. 그것을 오늘날 화쟁(和諍)사상이라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 곧 귀일심원(貴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는 일심(一心)사상 그리고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뜻의 무애(無㝵)사상과 함께 원효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동차로 포장 된 도로로 척판암까지 도착하려면 5분이 걸린다.
백연암 앞에서 척판암 가는 안내판
자동차로 척판암 가는 중에 만나는 백련암 입구와 낮잠자는 백구 모습

 

백련암 지나서 만나는 안내판

불광산(佛光山)은 팔기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8개나 되는 봉우리를 올라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불광산의 명칭 유래에서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불광산은 북동쪽으로 대운산(大雲山), 남동쪽으로는 삼각산(三角山) 줄기와 이어져 장안읍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대운산과 이어지는 북동쪽 기슭에서는 대운천(大雲川)이 북동쪽으로 흐르고, 삼각산과 이어지는 남쪽 기슭에서는 장안천(長安川)이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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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경주분지의 남쪽에 위치하고 신라시대 불교유적의 보고(寶庫)이자 영산(靈山)이다. 7세기 초를 시작으로 신라가 국운을 다하는 10세기 초엽까지 끊임없이 사원이 건립되었고 고려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하나둘씩 쇠락의 길을 걸어 왔다. 현재 불상 118구, 탑 96기, 절터 147곳이 남아 있고 최대 절터는 용장사지이다. 신라시대 220개 사찰 중 약 70%가 남산에 있었다.

봉화골 칠불암 가는 길에 진달래꽃들이 산행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남산은 해발 494m로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남북길이가 8km, 동서 폭은 4km이고 동남산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지형이고 서남산은 경사가 급한 형태이다. 또한 남산은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악산으로 35개 내외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칠불암(七佛庵)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봉 동쪽 봉화골 기슭에 자리 잡고 있고 동남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터진 골짜기라서 계곡이 깊은 곳이다. 통일전(統一殿)에서 출발하면 약 3.5㎞로 1시간가량 소요된다.

절 이름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것은 1930년대 이후에 이곳에 암자를 새로 짓고 나서부터다. 이곳에   8세기 초, 통일 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7구의 마애불로 남아 있어 칠불암이라 했다 한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절 이름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실전(失傳)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사□사(四□寺)라는 명문이 있었다 하니 혹시 사불사(四佛寺)는 아니었는지 추정할 뿐이다.

칠불암 초입에서 만나는 시누대와 오솔길

칠불암(七佛庵)의 마애불상군은 남산에 있는 통일신라의 마애불상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르고 장대한 규모 그리고 석경(石經)의 파편(破片) 존재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막새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큰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경(石經)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등 불교의 경전을 화강암에다 새긴 것으로, 창림사지(昌林寺址)에서도 발견되었고 주로 불전 내부의 벽체를 장엄하게 위해 사용한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서 장식 된 석경을 볼 수 있으며 이곳 칠불암이 석경 사용의 기원이 된 곳이다.

칠불암의 석경 파편

 

칠불암 초입 계단 왼쪽에 있는 약수터는 경주지역 향토사학자들에 의하면 『三國遺事』, 「紀異」第一, 〈書出池〉條의 기록으로 미루어, 488년 정월 15일에 炤知王이 행차하고자 하였던 天泉亭의 ‘天泉’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三國遺事』, 「紀異」第一, 〈書出池〉條 기록의 488년 정월 15일 炤知王이 행차하고자 하였던 天泉亭의 天泉으로추정하고 있는 칠불암 약수터

칠불암 터는 동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하늘에 닿을 듯이 거대한 암봉(巖峰)을 배경으로 하고, 경사가 가파르고 험한 동쪽과 북쪽의 능선상은 절 터를 마련하기 위해 석축을 쌓았다. 석축은 북쪽에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15∼16단으로 높이는 8m이다. 동쪽은 잡목과 무너진 흙더미로 덮여 있어 정확한 절 규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남북 16.40m, 동서 13m의 대지(臺地) 위에 서쪽에는 3단으로 층계를 이룬 2m 높이의 석축을 쌓아 불전(佛殿)을 마련하였다. 불전의 서쪽 끝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반원형(半圓形) 바위가 놓여 있는데 동향(東向)한 부분에 삼존불이 부조(浮彫)되어 있고 삼존불 바위면에서 동쪽으로 석주(石柱)가 서 있는데 각 면마다 여래상을 새긴 사방불(四方佛)이 있다.

특히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의 배면(背面)과 측면(側面)에는 목조건축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방형공(方形孔)이 있는데 배면의 경우 윗부분에는 7개, 아래 부분에는 4개 아래위로 각 2개소씩 있고 측면은 남쪽에 4개, 북쪽에는 1개가 있다. 그리고 사방불에도 위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북쪽과 남쪽 두 곳이 있어 삼존불과 사방불이 놓여 있는 불전은 목조로 된 건물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불전 남쪽이 출입구로 생각된다. 따라서 삼존불과 사방불이 있는 불전은 벽면을 석경으로 구축하고 지붕은 가구(架構)한 반 석굴(半石窟) 형식(形式)으로 추정된다.
인도 굽타 양식의 마애삼존불
마애삼존불 중 본존불은 석가불상으로 추정되고 높이 5m, 너비 8m로 된 반원형 바위 면에 동향(東向)하여 높은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으며, 두 겹으로 핀 넓은 연꽃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다. 우견편단(右肩編袒)에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있는데, 항마촉지인의 경우 통일신라기인 8세기 초 새로이 유행하기 시작하는 수인이다. 불두(佛頭)는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육계(肉髻)가 끈으로 동여맨 듯이 나타나 있으며, 코는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삼존불과 사방불 중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은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본존불 대좌의 복련대(覆蓮帶) 꽃잎과 같은 모양의 연화대좌 위에 서서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집어 가슴 앞에 올려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보살은 몸을 약간 틀고 허리를 굽힌 삼곡(三曲)자세이며 얼굴과 시선이 본존상을 향하고 있다. 머리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을 하고, 왼쪽 어개에서 비스듬히 내려온 승기지(僧祗支)는 가슴을 감싸고 있으며 남은 자락이 아래로 물결을 그리며 흘러 내렸다. 두 어깨에는 보발(寶髮)이 덮여 있고 목에는 영락(瓔珞)이 걸려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과판(銙板)이 달린 띠로써 동여매고, 흘러내린 치마 자락은 발등을 덮고 양 옆으로 퍼지면서 가느다랗게 주름잡아 처리하였다. 넓은 천의(天衣)는 어깨에 걸쳐 두 팔을 감싸며 양 옆으로 흘러 내렸고 팔목에는 팔찌가 장식되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 중 본존불 석가불상과 오른쪽 협시보살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 사방불 중 북면의 세간왕불상(世間王佛像)과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오른쪽 협시보살은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으로 추정되며 복련꽃 대좌 위에 서서 오른손에는 보상화(寶相華)를 들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천의자락을 잡고 있다. 얼굴은 본존상 방향으로 반쯤 돌리고 있으며, 머리에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된 관을 썼고 두 어깨는 보발로 덮여 있다. 목에는 영락을 하고 있으며, 승기지(僧祗支)가 비스듬히 가슴을 감싸고 왼쪽 어깨에 걸쳐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끈으로 매었다. 어개에 걸친 천의가 두 팔을 감싸고 아래로 흘러내린 것과 발등을 덮고 있는 옷자락이 양 옆으로 퍼지면서 주름잡고 있는 모습 그리고 팔목에 간단한 팔찌가 끼어져 있는 것과 머리 뒤에 무늬 없는 보주형의 두광이 배치된 것 등은 오른쪽 보살상과 같다.
본존불과 보살상들은 두광(頭光)만 보주형(寶珠形)으로 각기 처리하였으며, 신광(身光)의 경우는 달리 표현하지 않고 바위 면을 그대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칠불암 마애불은 우리나라 촉지인(觸地印) 여래좌상(如來坐像)의 시원형식(始原形式)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고 촉지인의 수인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걸친 대의의 착의법(着衣法), 그리고 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챗살 모양으로 삐쳐 나온 옷자락의 형식 등은 이후의 석굴암 본존불에서 완전한 정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탄력성 넘치는 육체미를 통한 생명력의 구현으로 한 조형미는 인도 굽타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이다. 약간 모나면서 딱 벌어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로 인해 신체의 건장함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위엄 어린 표정의 네모진 얼굴은 약간 이국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신체 구조이다. 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챗살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게 삐쳐 나온 옷자락의 모습이나 연꽃 대좌의 연꽃잎이 두 겹으로 맞붙은 형태도 인도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협시보살 역시 양발을 옆으로 벌린 어정쩡한 자세에, 조각이 다소 투박하지만 가슴에 대각선 방향으로 걸친 천의(天衣)의 한 쪽 끝이 뒤로 돌려졌다가 다시 앞으로 늘어진 형태는 인도적인 요소이다.
사방을 평정하여 삼한통일로 천하의 주인임을 표방한 사방불(四方佛)
사방불(四方佛) 가운데 동면(東面) 약사불상(藥師佛像)은 밑으로 쳐진 복련과 앙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왼손은 약 그릇을 들어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집어 가슴에 올려 설법인(說法印)을 표시하고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육계가 솟아 있다. 불의(佛衣) 깃 사이로 길게 드러나 보이는 앞가슴에 비스듬히 승각기가 가려져 있고 옷끈 매듭이 부챗살 모양으로 드러나 보인다. 무릎을 덮고 흘러내린 옷자락이 대좌의 윗부분을 덮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는 보주형으로 삼존불과 같이 처리하였다.

삼존불 중 본존불 석가불상과 왼쪽 협시보살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사방불 중 동면의 약사불상 ( 藥師佛像 )과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서면(西面)의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은 불신(佛身)만 부조(浮彫)로 조각하였으나 연화대좌는 선각(線刻)으로 표현되었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집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엄지와 셋째․넷째․다섯째 손가락을 굽히고 둘째손가락만 펴서 무릎 밑으로 내린 설법인상(說法印像)을 하고 있다. 불의(佛衣) 깃 사이로 드러난 앞가슴에 승각기가 보이며 동여맨 옷끈은 저고리 옷고름처럼 매듭을 지었다. 왼쪽 팔에 걸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왼쪽 무릎 위에 얹혀 있는 오른발 끝을 덮고 있어 발은 일부만 드러나 있다. 머리 뒤의 두광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원형처럼 보인다.
남면(南面)의 보생불상(寶生佛像)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두 손은 서면의 불상과 같이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다.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발은 흘러내린 옷자락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단정히 솟아 있다. 두광은 무늬가 없는 보주형으로 되어 있다.

삼존불과 사방불 중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북면의 세간왕불상(世間王佛像)은 서쪽의 아래 부분이 결실된 까닭에 가장 좁은 면이다. 따라서 불상도 동쪽 윗면에 조그맣게 나타나 있다. 복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하는 모습과 무늬가 없는 보주형 두광으로 장엄된 것 등은 다른 상들과 같은 형태이다. 그러나 다른 불상들과는 달리 앞가슴의 승각기 아래로 보이는 옷근은 매듭을 지었고 두 무릎 위에는 두 발이 나타나 있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역시 주름이 잡혀서 연화대좌 위를 덮고 있다.
입방체형(立方體形)의 사방불은 사방을 평정하여 삼한통일로 통일신라를 이룩한 것을 천하에 표방한 것으로 이후 성행하는 석탑 사방불의 선구작으로, 네 면의 여래상은 수인과 앉은 자세, 연화좌의 형태가 서로 유사하다.

구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암 마애관음보살
칠불암 불전(佛殿) 오른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암반 사이로 약 150m 정도 오르면 봉화대봉(烽火臺峰, 476m) 정상과 신선암 마애관음보살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암반으로 형성된 절벽위로 가다 바위를 돌면 마애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절벽 아래로 보이는 칠불암이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지는데 약 40m 정도의 거리이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부속 암자였을 것으로는 짐작되지만, 근래까지 이곳에 신선암(神仙庵)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므로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으로 부르고 있다.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만난 풍광

절벽 위 중앙에 거대한 바위가 동쪽과 남쪽으로 전망 있게 위치하며, 그 바위 동쪽 암반에 난간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공(石孔) 6개소가 있다. 중앙에 놓인 바위의 남면에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부조(浮彫)로 나타내었다. 보살상 전면의 공간은 2∼3m 정도로 협소하며 그 앞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보살상이 조각된 바위 면은 비가와도 불상이 젖지 않도록 윗부분이 조금 앞으로 나오게 경사를 지어 깎아내고 그 아래로 보주형 광배를 감실(龕室) 모양으로 조성했다. 아울러 보살상 위에는 가로 1.54m, 세로 10.5㎝, 깊이 6㎝의 홈이 마련되어 있는데 창양 또는 바위 아래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보살상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관음보살상은 옷자락으로 덮여 있는 의자 위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설법인을 표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구름을 타고 속계(俗界)로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크게 들어 올리고 둘레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을 하였다. 장식을 동여맨 끈은 머리 좌우에서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두 귀의 언저리로 흘러내려 두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다. 두 귀에는 귀걸이가 달려 있고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걸려 있다. 두 어깨 위에는 연꽃송이로 장식된 수발(垂髮)이 덮여 있는데 수발에 연꽃을 장식한 것은 다른 불상에는 볼 수 없는 경우이다.

오른손에는 보상화(寶相華) 가지를 들었고 왼손에는 설법인을 표시하여 왼쪽 가슴에 들었으며, 중지와 넷째 손가락을 굽혀 엄지와 마주잡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여 들었다. 손목에는 팔찌가 끼여 있으며 손과 손 사이로 승각기 자락이 보인다. 허리에는 치마끈이 매어지고 그 자락의 의자 위로 흘렀는데 왼쪽 발은 그 자락 위에 편안히 얹어 놓고 오른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 걸터앉아 있는 유희좌(遊戱坐)의 자세로서 구름 속에서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뒤에는 신광과 두광을 둥글게 선각으로 나타내었고 얇은 감실은 그대로 주형(舟形) 광배(光背)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유희좌의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불보살상으로는 이 보살상이 유일하다.

봉화골은 동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가장 깊은 골짜기로 계곡의 명칭은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 시기부터 칠불암 동남쪽의 봉화대봉(烽火臺峰, 476m)에 있던 봉화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봉화대는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산(高位山, 490m)과 인접한 까닭에 ‘고위산 봉수’로 불렸다.
1940(소화 15) 경주 남산 칠불암과 신선암의 모습
일제 강점기 때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을 본 일본인 小場恒吉 氏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탑에 있어서도 기원을 대륙에서 받아서 이것을 표현하고 장식할 때는 오직 신라 독특의 취향을 표시하였기에 수에서 받아 수를 잊었고 당을 본떠서 당을 떠난 것에 신라의 불교예술은 어디까지나 신라문화 소산으로서의 생명을 볼 수 있다. 신라탑의 형식은 오늘 중국에서 볼 수 없고 특히 방형층탑의 균세의 미는 중국의 대탑에서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는 신라의 층탑은 당식의 직사가 아니며 신라의 예술적 두뇌에서 창안된 것이라 하겠고 저 조상에서 본 바와 같은 원인에 의해 남북조 혹은 수당의 불교예술도 한토에 들어서서는 한인의 것이 되어서 신라예술로 화한 사실을 증명 할 수 있으니 유쾌하다. 」

칠불암 삼존불과 사방불

그리고 1929년 조선총독부가 남산일대에 사방공사를 시행하려 할 때, 일본인 교수 黑板勝美는 공사를 최소 5년 연기를 요청하면서, 경주남산 유적의 우수성을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나는 반도 유수의 고적을 보존할 수 있어 조선통치 상 문화적 시설에 광채를 더함에 多大할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
「생각건대 경주는 오늘 홀로 조선의 경주가 아니라 일본의 경주이며 또 세계에 알려진 명승이 되었다. 年年雲集하는 내외인의 증가는 이 같은 사실을 여실히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경주를 위해 특히 남산의 장래를 우려하는 바이다」라 했다.

신선암 매애관음보살상

경주 남산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문화적 우수성을 일본 지식인도 간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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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도 여타 도시처럼 아름다운 풍광이 만발하여 밀양팔경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만어산(萬魚山, 고도 700m) 운해(雲海). 이곳 9부 능선에 위치한 만어사(萬魚寺)에서 새벽녘이나 봄비 내리는 날에는 운해(雲海)가 주변 천지를 뒤덮어 마치 백두대간 장관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맑은 소리 울리는 경석(磬石)이 유명하다.

만어사는 가야국 46년 김수로왕 때 창건되었고 고려 명종 1180년에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만어사의 대웅전, 범종각, 미륵전은 근래에 지어졌지만 절 마당에 고려중기 삼층석탑(보물 제466)이 있어 고색창연한 사찰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다.

만어사 미륵전 아래 산비탈에는 너비 100m, 길이 500m 규모의 너덜지대, 암괴류가 있는데 마치 물고기들이 무리지어 입질하는 모습이자 강물처럼 흘러가는 모습이다. 이곳 돌들을 만어석(萬魚石)이라고 불리는데 동해의 물고기들이 변한 것이라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암괴류는 3만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섬록암, 반려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는 거무스름하고 둥근 편이다. 이 바위를 두드리면 종소리처럼 맑은 소리가 난다하여 경석(磬石)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화강암 성분 차이에 따른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경석은 국악기 중 타악기인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돌이다. 옥돌이라고도 한다. 편경은 궁중제례악에 사용되는 돌로 된 유율 타악기로 자 모양의 돌 16개를 두 단으로 된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 악기이다. 특경은 편경과 달리 자 모양의 돌 1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 악기이다.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세종 7(1425) 경기도 남양에서 경()이 발견되어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남양 이외에 평안도 성천과 함경도 단천에서도 채취, 생산되는데 남양 경돌 품질이 가장 좋다고 한다.

어산불영(魚山佛影)어산(魚山)에 서린 부처님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삼국유사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 때 이 나라의 옥지라는 연못에 살던 독룡과 만어산에 살던 나찰녀(불교에서 말하는 사람 잡아 먹는 귀신)가 서로 사귀면서 번개와 우박을 내려 4년 동안 농사를 망쳤다.

수로왕이 주술로써 이들의 악행을 막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여 이들에게 오계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에 감동을 받아 만어산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만어사 앞의 어산불영이다. 이 바위는 두드리면 맑은 쇳소리를 내었다. 특히 서북쪽의 큰 바위는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전하는데, 멀리서보면 부처의 모습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고 한다.

경내 미륵전에는 미륵바위(미륵불상)으로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 바위가 있는데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은 마치 부처님 가사(袈裟)와 같다. 미륵전은 최근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지었다. 이 미륵바위는 사명대사 표충비처럼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한국전쟁, 4.19혁명 등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면 바위표면에서 땀을 흘렸다고 하다.

미륵전으로 가는 길

미륵전 옆에는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 무더기가 있는 바위의 아래쪽 틈에 작은 샘이 있는데, 이 샘물은 낙동강의 조수에 따라 물 높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는 너덜지대(암괴류) 아래에 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최근 노출 된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미륵전을 지었다

제작연도가 고려 중기인 삼층석탑은 절이 자리한 위치와는 떨어져 있으나 석탑의 뒤편에 건물터로 보이는 널찍한 대지가 있어 이곳이 본래의 법당터로 여겨진다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으나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바닥돌이 드러나 있고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어산불영(魚山佛影)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이것은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어를 말한 것이다)이니, 그 곁에 가라국(呵囉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가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이때 국경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고 못 속에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있어서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그런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익지 못했다. 왕은 주문(呪文)을 외어 이것을 금하려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說法)한 뒤에 나찰녀(羅刹女)는 오계(五戒)를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마침내 화()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이상은 <고기古記>에 있다).

또 상고해 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 1180)는 곧 고려 명종(明宗) 11년인데 이때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말했다. “이 산 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 부처의 영상(影像)과 서로 같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玉池)인데 여기에도 역시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구름 기운이 일어나서 산마루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影像)의 서북쪽에 반석(盤石)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모두 보림(寶林)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모두 참례(參禮)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골짜기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서 혹은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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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암 석굴사원에서 바라본 경관

미타암은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써 천성산 원적봉 8부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천애의 자연과 더불어 조망과 비경이 웅장하고 수려하다. 웅상, 덕계, 서창을 한눈에 조망을 할 수 있고 대운산, 달음산 등 인근 명산을 볼 수가 있다. 구름이 깔린 날씨 일 때는 가히 천상의 낙원인 것 같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도 깨달음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이런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을까?

그리고 미타암의 석굴사원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던 석굴 사원 조영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고 통일신라 8세기 중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998호인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있어 극락왕생과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처로서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어 여타 지역의 불교 신도들도 많이 찾는다. 특히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 719)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어 신라 아미타신앙의 전개 과정과 불교 고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발길이 잦다.

또한 이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은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나오는 포천산이 웅상읍의 천성산으로 추정되고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가 수도하던 석굴에 모셔진 불상으로 판단되어 더욱 그러하다.

미타암으로 가는 길은 국도 7호선에서 덕계와 서창의 중간 지점에 있는 양산시 웅상읍 주진마을로 가야한다. 주진마을은 지형이 배[] 형국이고, 옛날에 해일이 일면 나룻배를 매어 놓았다하여 주진(舟津)이라고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곳 주진저수지를 지나 천성산 임도를 이용하여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화장실과 천성산 안내문이 있는 첫 주차장을 만나고 여기서 미타암 가는 산길을 이용하거나 또는 지나서 화엄사 주차장에서부터 산길을 따라 미타암까지 가는 2가지 길이 있다. 미타암 가는 산길은 매우 가파른데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미타암 가는 산길은 매우 가파른데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미타암 초입에서 객을 맞이하는 부처님

미타암에 도착하여 둘러보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꽃이 만발한 화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준다. 장대한 나무 또한 높은 기상과 지난 옛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다. 휴식공간에는 커피, 숭늉, 사탕 등 무척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일반객에게 이용하기에 준 사찰에 감사할 따름이다.

미타암에 도착하여 둘러보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꽃이 만발한 화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준다.
장대한 나무 또한 높은 기상과 지난 옛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다.

미타암은 646(선덕여왕 15)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920(경명왕 4)에 지공대사가 중창하였고 1376(우왕 2)에 중창했으며, 1888(조선 고종 25)에 다시 정진(正眞)이 중창하였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1861~1937]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깨끗한 경내 안을 대웅보전과 옥불전을 지나서 계단을 따라 걸어가면 천애의 절벽 아래 비석 군을 만나고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이 봉안 된 석굴사원(미타굴)을 마주하게 된다. 석굴사원은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천연 동굴에 인공을 가해 조성한 것으로 길이 30m, 3~5m, 높이 2~3m이다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은 높이가 205cm로 입구에서 9m 정도 들어간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대웅보전
옥불전
미타암에는 일반 절에서 볼 수 없는 옥불전이 있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1861~1937]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불상(佛像), 광배(光背), 대좌(臺坐)가 모두 한 돌로 조각되었으며 시원스럽고 넓은 어깨의 당당한 체구에 정면관을 취하고 있는데 여러 점에서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즉 머리의 큼직한 육계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상호(相好)는 물론 왼손을 몸에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은 가슴에 댄 모습, 그리고 둥근 어깨선과 평판적인 가슴 및 대좌 위에 직립한 자세 등의 신체적 특징은 모두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부드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전신을 감싸고 있고, 양 팔을 걸쳐 지그재그 모양으로 내려간 옷자락은 발목에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특징들은 모두 감산사 불상과 직결되는 동일한 양식이지만 옷 주름이나 띠 매듭 표현 같은 세부기법에서는 경직된 면이 드러나고 있어 시대 하강에 따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전체적인 윤곽이나 3조선으로 이루어진 두광, 신광의 구분, 그 구획 안의 꽃무늬 배치, 그리고 외연부의 화염문(火焰文) 등 역시 감산사 불상 광배와 유사한 모습이다.

미암타은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써 천성산 원적봉 8부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천애의 자연과 더불어 조망과 비경이 웅장하고 수려하다. 웅상, 덕계, 서창을 한눈에 조망을 할 수 있고 대운산, 달음산 등 인근 명산을 볼 수가 있다.

대좌는 2단의 원형연화문대(圓形蓮花文帶)와 그 아래의 사각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각의 각 면에는 2구씩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연판(蓮瓣) 안에 꽃무늬가 새겨진 연화좌(蓮花坐)의 모습은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의 것과 거의 같다. 이렇게 이 불상은 세부표현에서 다소 이완된 면을 보이지만, 불신뿐만 아니라 광배와 대좌까지 모두 감산사 불상과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구름이 깔린 날씨 일 때는 가히 천상의 낙원인 것 같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도 깨달음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이런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을까?

 주목할 것은 이 석불이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나오는 포천산(布川山) 석굴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

「삽량주(歃良州)의 동북쪽 20리가량 되는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는데 석굴(石窟)이 기이하고 빼어나 마치 사람이 깍아 만든 것 같았다. 성명이 자세치 않은 다섯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여기에 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면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기 몇 십 년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머물러 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 왔다. 절의 중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 버리더니 큰 광명을 내비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중이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을 치루(置樓)라 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다.」

화엄사 주차장에서 위로 30m 정도 가면 1992년 혜문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봉안하고 건립한 화엄사 적멸보궁을 볼 수 있는데 꽃 창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곳 또한 오래 전 작은 토굴에서 시작하였고 수려한 산세와 감로수가 유명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또한 불교 신도들의 기도처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1992년 혜문스님이 석굴 암벽 속에서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석가모니 불상을 발견하였는데 복장 속에서 진신사리 6과와 부적 다라니경, 항마진언 등이 나왔었다. 그리고 복장 속에서 발견 된 글을 보면 1856년에 월석우해, 운거공시 두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복장 속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화엄사 주차장에서 위로 30m 정도 가면 1992년 혜문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봉안하고 건립한 화엄사 적멸보궁을 볼 수 있는데 꽃 창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천성산(千聖山, 고도 : 921m)은 원적산(圓寂山), 원효산(元曉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으로 알려졌다. 북쪽의 정족산에서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왔고 산 북사면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내원사가 위치하며 그 주변이 가지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양산)진산은 원적산(圓寂山)이다.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부르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료에는 원적산으로 기재되어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의 하북면에 천성산, 웅상면 소주동과 상북면 대석동에 원적산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양산)에 원효산(元曉山)과 천성산으로 분리·표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을 봉우리에 따라 분리해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시에서는 과거 원효산(921m)이라고 부르던 것을 천성산제1(주봉), 천성산(812m)이라 부르던 것을 천성산 제2봉으로 정정했다. ‘천성산(千聖山)’ 지명은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1,000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성인이[] 되게 한 곳이라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해우소 가는 길에서

 

나이 드신 할아버지 및 할머니를 위한 만든 모노레일로 화엄사 주차장에서 승차하여 올 수 있는 수송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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