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가 아름다워 술잔이 된 작괘천(酌掛川)과 작천정(酌川亭)
울주군 삼남읍(三南邑) 교동리(校洞里)에 있는 작괘천(酌掛川)은 물이 맑고 주변 풍광이 뛰어난 언양의 명소다. 이로 인해 냇가의 바위에는 온통 사람 이름이 많이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리고 근래 이 일대에 벚나무가 심어져 꽃이 만발할 때는 울산 12경의 하나가 된다.
해발 1,068m의 간월산에서 발원해 태화강으로 흘러가는 작괘천(酌掛川)은 지도에는 작수천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지역주민들은 작괘천(酌掛川)으로 부르고 있고 줄여서 작천(酌川)이라고도 한다.
이름의 유래는 냇가의 수백 평이나 되는 바위가 오랜 세월의 물살에 깎여 움푹 파인 형상이 마치 술잔을 걸어 둔 것과 같다고 하여 작괘천(酌川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작괘천(酌川亭)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된 옥산과 봉화산 사이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강암에는 유리의 원료가 되는 형석(螢石)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자수정의 광맥도 이 형석인 어미 돌로 이어져 있는데 어미 돌을 따라 파 내려가면 단단한 화강암 속에 자수정 구덕이 형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작괘천(酌川亭)의 바위면은 형석이 많이 배겨 있어 달밤이면 반딧불이 불빛처럼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움푹 파인 형상으로 크고 작은 구덕은 자연적으로 자수정이 패여 나간 옥 구덕인 것이다
작괘천(酌掛川)에 작천정(酌川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1894년(고종 31년)에 언양 현감으로 부임해 온 정긍조(鄭肯朝)가 작천정 앞 냇가에서 시회(時會)를 열고 정각(亭閣)을 만들기로 여러 사람과 뜻을 모았으나 다른 곳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만들지 못하고 1902년 여름에 최시명(崔時鳴) 군수가 정비하면서 정각(亭閣)을 세우고 이름을 작천정(酌川亭)이라고 하였다.
작천정(酌川亭) 안에 들어가면 지역 문인들이 지은 글이 현판에 걸려 있는데 작천정기(酌川亭記), 오언율시 등 작품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부로산(봉화산)에 석수사(石水寺)가 있다고 하였 는데 절터가 작천정(酌川亭) 입구로 추측되며 절이 있었던 자리를 지금은 절터구미라고 부른다. 그리고 언양 향교의 주춧돌이 석수사(石水寺)의 것이라고 하며 작천정 (酌川亭) 자리는 수석암(水石庵)이라는 암자터였다고 한다.
작천정(酌川亭)에서 상류 쪽으로 20m 정도 걸어가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마애석각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0인의 후손들이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에 일본인의 눈을 피해 바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0인의 이름을 새긴 바위이다.
가로 5m, 높이 2m 크기의 바위에 가로로 선무원종공신이라고 새기고 세로로 직함, 이름, 출신지역을 새겼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군 김정서 강릉인(護軍 金廷瑞 江陵人), 대호군 선극례 보성인(大護軍 宣克禮 寶城人), 정 이언량 경주인(正 李彦良 慶州人), 부정 최환 경주인(副正 崔環 慶州人), 수문장 백근손 수원인(守門將 白斤孫 水原人), 수문장 김번수 경주인(守門將 金磻守 慶州人), 김언원 금녕인(金彦元 金寧人), 수문장 유문수 문화인(守門將 柳文守 文化人), 첨정 박연경 밀양인(僉正 朴延慶 密陽人), 사복 김응룡 금녕인(司僕 金應龍 金寧人) 등 이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마애석각 뒤쪽에는 1986년에 세운 비각이 있는데 안에는 귀부 위에 높이 2.52m의 비가 있다.
작괘천(酌川亭) 초입의 바위에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울주군 상북면 출신의 김영걸씨가 글씨를 쓰고 삼남면 출신 함석헌씨가 음각대자로 새겼는데 당시에 쉽지 않는 행동이다.
그리고 인내천(人乃天) 바위의 맞은 편 앞산 중턱에는 1935년 언양청년회장 신근수씨가 높이 2m, 넓이 100㎡ 부지에 민족자주 정신 청사에 남으리라는 뜻으로 청사대(靑史臺)를 축조하였고 글씨도 새겼다.
삼남면(三南面)의 삼남은 1933년 중남면(中南面)과 삼동면(三同面)을 통합하면서 삼동의 ‘삼(三)’자와 중남의‘남(南)’자에서 한 글자씩 따서 형성된 지명이다. 교동리(校洞里)는 언양 향교(鄕校)가 있어 붙은 지명이다. 언양 향교의 창건은 언제 지어 졌는지 알 수 없으나 네 번 짓고 세 번 옮긴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