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내 중심부인 동부동과 북부동, 서부동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 경주읍성(慶州邑城, 45,496㎡)은 1963년 1월 21일자로 사적 제96호에 지정되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석축성으로 둘레 4,075자, 높이 12자이며, 고려 현종 3년(1012)에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를 두면서 처음에는 흙으로 쌓았다가 고려 우왕 4년(1378)에 돌로 고쳐쌓았는데 내부에 군창이 있고 연못이 3곳, 우물 80곳이 있었는데 항상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경주읍성은 1902년 세키노 교수가 찍은 사진에는 거의 와전한 형태가 남아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신설과 노폭확장 등으로 대부분 헐리고 지금은 동부동에 동쪽 성벽 90m 정도만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읍성(邑城)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조선 시대 세종, 선조, 영조, 고종에 이르기까지 경주 읍성에 많은 증․개축 과정과 내, 외부의 구조 변경이 있었음을 문헌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조선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모신 집경전(集慶殿)과 관아(官衙) 그리고 우물 80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서·남·북에 향일문(向日門), 망미문(望美門), 징례문(徵禮門), 공신문(拱辰門)이 있었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자(垓子)도 갖추고 있었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 따르면 문종 원년(1451년)에 둘레 4,075척(약 1,904m), 높이 11척 6촌(약 5.4m) 등 비교적 정확한 성곽(城廓) 제원과 구체적인 구조가 잘 기록되어 있다.




세조 12년(1466)에 수리하면서 고쳐쌓았고 임진왜란 때 불타고 허물어져 인조 10년(1632)에 고쳐 수리하고 사대문을 다시 세웠으며, 영조 21년(1745) 남문루를 고쳐쌓고 옹성(甕城,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한 이중 성벽 역할을 하는 성), 치성(雉城 적을 양쪽 측면에서 공격하여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쌓은 성), 각루(角樓, 성벽 모서리 위에 지은 다락집으로 성을 지키는 보초병이 망을 보는 곳)를 덧붙여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
특히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이 성을 빼앗겼을 때 이장손(李長孫)이 발명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사용하여 다시 찾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문인 징례문(徵禮門) 밖 봉황대 옆에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종각에 걸려있는 신라 성덕대왕 신종이 매달려 있어 매일 시각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읍성 내부에는 객사와, 동헌, 부사, 군관청, 호적소, 교방 등 다양한 관아가 있었으며 발굴조사 결과, 신라시대 건축물의 장대석, 초석, 석탑의 탑신과 옥개석 등이 출토되었다.







관아건물(官衙建物, 중앙로 67-12)는 조선 정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읍내전도’와 경주의 과거기록을 개편 증보한 ‘동경통지’를 통해 경주읍성내의 관아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현재 관아의 내아에 해당하는 부지가 원형대로 잘 남아 있다. 여기에는 관아관련건물이었던 내아가 자리 잡고 있고, 양무당과 부사는 이곳으로 이축되어 잘 보존되고 있다. 현재 경주문화원이 이를 활용하고 있다.




조선시대 경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회화 지도가 있는데 ‘경주읍내전도(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산과 천(川)으로 두른 분지에 네모나게 구획된 읍성이 보인다. 읍성 주변으로 위로 북천이, 왼편으로 형산강이 흐르고 있다. 오른편 아래쪽에 반월성(半月城), 석빙고(石氷庫), 안압지(雁鴨池), 계림(鷄林), 내물왕릉, 경순왕릉, 첨성대, 분황사 등 있고 단일 무덤으로 가장 큰 봉황대(鳳凰臺)는 볼록한 봉분 위에 나무까지 그려 넣었다.
동문 옆으로 홍살문이 보이고, 비각(碑閣)과 구기(舊基·옛터)라고 적고 길쭉한 돌을 쌓은 석실(石室)을 그려놓았다. 홍살문과 그 옆에 하마비(下馬碑)로 보이는 비석도 함께 있다. ‘하마비(下馬碑)’는 여기부터 누구든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를 표하라는 의미로 국가의 중요한 공간 앞에 설치한다. 건물을 유독 크게 그려 넣어 중요한 건물임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이 집경전(集慶殿) 옛터다. ‘집경전(集慶殿)’은 조선 태조 초상인 어진(御眞)을 모신 건물이다.



어진(御眞)은 왕의 초상이자 왕처럼 권위를 가지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궁궐 안 문소전(文昭殿)과 궁궐 밖 주요한 도시에 보관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에 태조의 어진이 보관됐다.
어진(御眞)을 보낸 장소마다 의미가 있는데, 전주는 본관이고 함경도 영흥은 태조가 태어난 곳이다. 개성은 잠저(潛邸: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라서 세 곳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공간이다. 평양과 경주는 예로부터 서경(西京)과 동경(東京)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수도로 역사적 상징을 띠는 곳이다.


1398년(태조 7년) 3월 6일 임금의 초상을 계림부(경주)에 봉안한 기록이 있다. 이때 조정에서 경주에 임금의 초상을 봉안하기 위해 보낸 사람은 종1품의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였다. 설장수는 원래 위구르계 색목인이다. 원나라에서 활동하다가 아버지 설손이 정치적 위기에 처하자 고려에 귀화해 함께 왔다. 태조 이성계와는 위화도회군을 통해 정치적 뜻을 같이하며 조선 초기 외교를 담당했다.
1396년(태조 5) 태조가 설장수 요청으로 계림을 관향(貫鄕)으로 내려줬는데 설장수는 ‘경주 설씨’의 시조가 됐다. ‘설씨’는 원래 위구르족 발상지인 설연하(?輦河·세렝가 강)에서 따온 것을 한문식으로 바꾼 성씨이다. 설장수는 이듬해 조선 개국 공신으로 이름이 올랐다.


1442년 세종은 ‘집경전(集慶殿),’이라는 이름을 올렸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4월 21일 경주성이 함락되면서 집경전(集慶殿), 어진(御眞)은 경북 예안 청량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이황의 사당, 1597년 정유재란에 다시 안동에서 강릉으로 이전됐다. 강릉에 안착한 어진(御眞)은 1631년 3월 7일 그만 관리자의 실수로 불에 탔다.
이후 정조가 집경전(集慶殿), 옛터를 정비하였고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비석의 글을 내리고, 1798년 11월 22일 비석을 보관하는 전각인 집경전(集慶殿), 비각을 완성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집경전(集慶殿), 비각마저 불에 타고, 현재는 비석과 석실만 남았다.
1912년경 일본인들이 읍성구획을 정비하여 새 도로를 내면서 관아건물을 헐었고 그 안에 있던 선정비 등 많은 비석을 옮겼다. 일반적으로 비를 세우는 위치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가 또는 관아, 향교 등과 같은 중요한 건물이 있는 담장 내의 경역이거나 주변, 비를 건립한 백성들이 살고 있던 마을, 비를 세우게 된 동기가 부여 된 장소 등이다.
비(碑)란 각종 기록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나무. 돌, 쇠붙이 등에 새겨 놓은 것으로, 비문의 내용에 따라 묘비, 탑비, 신도비, 사적비, 송덕비, 공덕비 등으로 구분된다. 철로 비를 만드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과거 부의 상징이자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건립했다.

조선시대 철비(鐵碑)는 크게 현감, 관찰사 등 지방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와 사적(史蹟)비, 보부상 들이 세운 송덕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목비. 석비. 철비를 언급하면서 철비(鐵碑)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세운다는 기록을 남겼다.
포스코역사관이 조사 결과, 전국 23개 지역에서 현존 철비 (鐵碑)47기를 확인했으며, 이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철비는 1631년 제작된 충북 진천군 ‘현감이원명선정거사비’와 경북 경주시 ‘영장유공춘호영세불망비’이며, 다음으로 강원도 홍천군 ‘현감원만춘선정비(1661년)’가 있다.

특히 철비(鐵碑)는 17~18세기 들어 제작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선정을 베푼 수령의 증가가 아닌, 역설적으로 원성을 듣던 수령이 직접 세우는 사례가 증가하며,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꾼 후 조상의 정통성을 가공하기 위해 철비를 세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현재 경주시는 신라왕경 복원사업과 더불어 고려와 조선시대 성곽도시 경주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2009년 “경주읍성 정비복원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2018년 동쪽 성벽(324m), 동문(향일문 : 向日門) 복원 및 주변 탐방로 정비를 완료하였고, 앞으로 주변의 노후 불량주택을 매입 정비와 북쪽 성벽 등의 복원정비를 2030년까지 추진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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