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암(朱砂庵)은 경주시 서면 부산(富山) 정상 바로 아래 있는 암자로 주사사(朱砂寺)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은 바위로 되어있고 그 모습이 장수의 투구 형태다. 그리고 주사암(朱砂庵)은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다. 즉 ㄷ 자 바위가 주사암(朱砂庵)을 둘러싸고 있으며 대웅전 옆의 주사암(朱砂庵)이 투구의 중앙에 있다.
이러한 형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기운이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하여 명당 터 중에 하나다. 그리고 절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창건 시기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주암사(朱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설화에 의해서 절 이름이 주사암(朱砂庵)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富山)은 주사산(朱沙山, 朱砂山), 오봉산(五峰山), 오로봉산, 닭벼슬산 등으로 불리고 있다. 동경잡기의 기록에 의하면 품상촌(品上村)의 주산으로 그 산 위에 옛터가 있는데 속칭 장자(長者)의 터라 하였다. 또 용정(湧井)이 있으며 산허리에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10여 명을 수용한 수가 있다고 한다. 현재는 오봉산(五峰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시대의 한 도인(道人)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고 하였는데,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갑사(甲士)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러서 보니, 단사(丹砂)의 붉은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고, 늙은 승려가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괴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천 명을 보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번 주문(呪文)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 안에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후로 절 이름을 주사암(朱砂庵)이라고 한다.」
투구바위 뒷편에 있는 주사굴
또 다른 전설은 신라 문무왕 때 부산성富山城)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사암을 불사처(不死處)라 부르고 있다.
주사암(朱砂庵)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남아 있는 전각과 불상을 볼 때 조선 시대 후기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전각 및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 삼성각 · 종각 · 요사 등이 있고, 국가유산으로는 2007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경주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대웅전주사암(朱砂庵)이자 영산전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朱砂庵 靈山殿 石造三尊佛坐像)은 영조 1년(1725)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영산전 내에 도금 상태로 봉안되어 있다. 좌우로 협시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우협시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쓴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삼성각
주사암(朱砂庵) 마당에서 앞의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 오른쪽으로 200m 정도 가면 평평하고 장엄한 바위를 만난다. 넓이는 100여평 규모로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이 바위를 마당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또는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
김극기(金克己)의 시서(詩序)에 주암사(朱巖寺) 지맥석(持麥石)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지산(下枝山)은 세속에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산의 남쪽에 주암사란 절이 있고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는데 깍아 지른 듯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과 먼바다를 바라봄에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삼라만상을 내려보는 것 같다. 대석(臺石)의 서쪽에 지맥석(持麥石)이 있는데 사방이 깍아지른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듯 하지만 그 위에는 평탄하여 사람 1백명이 앉을 수 있다.
옛날 대서발(大舒發) 김유신(金庾信) 공이 여기에 보리를 가져와 술 재료를 공급하여 군리들을 대접하던 곳으로, 지금도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 9 보쯤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에서 본 풍광
마당바위는 CF, Drama 등 촬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부산성(富山城)은 『삼국사기』에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으로 성벽의 둘레가 9.7km이다. 『삼국유사』에도 부산성(富山城)을 쌓은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성 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당나라가 신라의 수도까지 침범할 경우 명활산성, 남산 성, 선도 산성 등과 함께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한 산성이었다. 그 이후에는 경주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 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주사암 주차장에서 20m 정도 올라가면 부산의 정상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산석성(夫山石城)으로 나오며, “둘레가 2,765보 3척이며, 안에는 시내가 넷, 연못이 하나, 우물과 샘이 아홉이 있으며, 또한 군창(軍倉)이 있는데, 영천과 영일의 군창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중요한 산성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성(富山城)으로 나오며, 이미 반이나 무너졌다는 내용이 있어 잘 관리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 터와 군의 창고 터,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 터, 우물 터, 못, 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 터 등이 남아 있다.
주사암에서 보살피고 있는 고양이세월의 흔적
여근곡(女根谷)은 부산 기슭의 골짜기로 여자의 성기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636년(선덕여왕 5) 두꺼비가 옥문지에 많이 모여 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이 서쪽변경의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에 백제 병사가 숨어 있다고 보아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근곡(女根谷) 옥문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機三事)에도 옥문곡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는데 두꺼비가 개구리로, 옥문지가 여근곡으로 바뀌어있고, 그 위치도 변경이 아니라 교외인 건천읍 신평리에 있는 부산 아래라고 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근곡이 부 중심지의 서쪽 41리에 있다고 하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덧붙였으며, 이후 조선 시대 거의 모든 경주부의 지리지에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분황사(芬皇寺)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한 신라시대 초기 사찰로서 창건 이래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는 사찰로써 백률사, 불국사, 기림사 정도이며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전불시대 칠처가람(前佛時代 七處伽藍 :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암사) 중의 하나로 「용궁 북 분황사(龍宮 北 芬皇寺)」라고 불렀으며, 국가차원의 절로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중요한 절이다. 전불시대 칠처 가람은, 석가모니불 이전의 부처님인 가섭불 시대에 신라 수도 서라벌에 만들어진 일곱 절터에 다시 지은 절을 말하는데, 신라가 인도보다 불교와의 인연이 깊다는 자주적인 종교관이다.
팔각석정(八角石井)과 보광전(普光殿)
분황사의 전각은 세 번의 중건을 하였다. 현재 중심 전각은 보광전(普光殿)으로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2칸의 주심포양식의 법당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조성하였다. 지금 절 모습은 정유재란 이후 계속 유지된 곳으로 추정된다.
보광전(普光殿)은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2칸의 주심포양식의 법당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조성하였다.
보광전 안에는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있는데 조선 후기 17세기 금동불입상으로 유일하고 규모가 가장 크다. 1998년 분황사 보광전 해체 수리과정 중 중도리 바닥에서 발견 된 1616년 「분황사상량기(芬皇寺上樑記)」 와 종도리에서 1680년 「부동명활성하분황사중창문(府東明活城下分皇寺重創文)」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이 약사여래입상이 1609년 5,360근의 동을 모아 제작한 불상으로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대형 불상이 대부분 소조(塑造, 진흙)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규모가 커 우람한 형태미를 보이고 있지만, 이와 달리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어깨가 왜소해 전반적으로 동안(童顔)의 형태미를 보여준다. 특히 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이목구비는 16세기 불상 양식이, 가슴과 복부가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 등 신체 표현은 17세기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신ㆍ구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의 종, 분황사(芬皇寺)의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의 종 기록에 따르면 「신라 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천보(天寶) 13년 갑오(甲午; 754)에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했는데, 또 이듬해 을미(乙未; 755)에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0만 6,700 근이요, 공장이는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未)이었다.」 이에 의거하여 분황사에는 신라 최대 불상인 약사여래동상(45m)을 만들었고 황룡사 장육존상(5m)의 9배 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분황사에는 신라시대 때 호국용이 살았다는 팔각석정(八角石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틀의 높이는 약 70cm이고 외부모양은 팔각이며 내부는 원형이다.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뜻한다.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하다.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 일컫는 팔각석정(八角石井)
원성왕 11년 하서국(河西國) 사신이 세 마리의 용(東池의 龍, 靑池의 龍, 분황사 우물의 護國龍)을 물고기로 변하게 해서 자기나라로 가지고 가려 했어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때 분황사에 있는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고 한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한 한 행태이다. 현재는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팔각석정(八角石井) 옆에는 고려 19대 명종(1170~1197) 때 원효대사를 기리기 위해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和諍國帥碑)가 있었으나 현재 차화쟁국사지비적(此和諍國師之碑跡)이라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이 새겨진 비석 받침만이 남아 있다. 화쟁국사(和諍國帥)는 고려 명종이 원효대사에게 내린 시호(諡號)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어느 때부터 파손되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의 위치는 원래 자리가 아니다.
차화쟁국사지비적(此和諍國師之碑跡)이라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이 새겨진 글자는 마모가 심해서 식별이 어렵다.
그리고 신라 고승 원효 대사가 상당 기간 머물렀던 곳으로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고 예배하니 돌아봤다는 원효의 고상(顧像)이 고려 말까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신라 경덕왕 때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분황사 좌전 북쪽 벽에 신라의 화성(畵聖) 솔거(率居)가 그린 천수천안관음보살 앞에서 이 아이를 안고 '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 라는 향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며 빌게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분황사에 대한 발굴조사는 1차 ~ 5차(1990년 〜 1995년), 6차(2000년 9월 22일 〜 12월 30일)에 걸쳐 시행하였고 1차 〜 5차 조사에는 「品」 字形인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 배치와 3회에 걸친 금당 변천과정, 회랑지, 석등지 등 다수의 유구를 확인하였다. 6차에는 현재 분황사 외곽담장 동편(황룡사지 전시관부지와 분황사 사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출토유물이 378점이며 기와 및 전돌이 338점으로 가장 많고 토기 및 자기류가 22점이며 청동제 이형장식구 등 금속류가 12점, 굽은 옥 등 기타 종류가 6점이다.
분황사 가람배치는 고구려 지역에서 볼 수 있는 「品」 자형 가람배치 즉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 배치로 중 금당, 동 금당, 서 금당이 탑을 향하며 동․ 서 금당이 탑을 마주보고 있는 배치이다. 금당이 창건 이후 최소한 같은 자리에서 3회에 걸쳐 확대 또는 축소되면서 절의 방향도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제4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기록에 따르면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여기에 左殿이란 右殿에 대응하는 것으로 경덕왕(A.D.742~765) 때는 좌․ 우전을 비롯한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배치인 것이다.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에서 일탑일법당식(一塔一金當式) 가람배치로 변하는 시기는 경덕왕 14년(755년)에 신라 최대 불상인 분황사 약사여래동상(45m)을 만든 후 이를 모시기 위해서 3법당을 하나의 법당으로 통합하여 중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차 중건과 3차 중건이 이루어지는데, 법당의 방향도 처음 남향에서서향으로 바뀌었고 바뀐 이유는 알 수 없다. 3차 중건은 정유재란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은 선덕여왕 때인 634년 창건 때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했으며 현재의 상태는 이때에 복원된 것이다. 이 탑은 한국 전탑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현재 탑신부는 3층만 남아 있으며 벽돌 같은 돌은 회흑색의 안산암이다.
1915년 수리당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각종 옥류와 패류, 금, 은제 바늘과 침통, 가위등과 함께 고려시대에 사용하였던 〈숭녕통보〉와〈상평오수〉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의 높이는 탑재들을 종합하여 분석 한 결과 원래는 9층임이 확인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이를 개축하려다 또 허물어졌다고 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올린 것으로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는데 내륙 방향에 있는 2마리는 사자상이고 동해 방향에 있는 2마리는 물개라고 전해지고 있다.
내륙 방향에 있는 사자상
확실하지 않으나 원래는 6마리의 석사자가 있었다고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입구에서 좌측정원에 2구가 있는데 규모가 작은 편이며 형태도 지금의 4마리 사자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헌덕왕릉으로 부터 옮겨온 것으로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석사자동해 방향에 있는 물개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이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감실이 있고 문을 만들었고, 그 양쪽에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해 놓았는데 현존하는 인왕상(仁王像) 가운데 조성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7세기 중엽 신라의 통일 이전에 완성되었다.
북쪽 인왕상동쪽 인왕상
인왕상(仁王像)이 모두 무기를 들지 않고 권법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6구의 상이 X자형의 천의를 입고 있는 古代의 인왕상(仁王像)으로 X자형의 천의는 북위시대 양식이다. 그러나 천의 밑으로 드러나는 근육의 표현과 볼륨 있는 양감의 표현, 어린이 같은 신체의 비례는 北齊. 周의 양식이다.
남쪽 인왕상서쪽 인왕상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삼국유사기이(紀異) 제2 원성대왕(元聖大王)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唐)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龍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龍)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龍)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나라의 세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삼국유사 의해(意解) 제5 원효불기(元曉不羈)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사라수(裟羅樹)밑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 속언俗言에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란 것을 속언에 이렇게 말한다. “스님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마침 이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였으므로 몹시 급한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라 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사라율(裟羅栗)이라 한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미 중이 되자 그 집을 희사(喜捨)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스님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상고해 보건대, 인덕(麟德) 2년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는데 하주는 곧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요, 압량군(押梁郡)은 본래 하주의 속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스님의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신당(新幢; 당幢은 우리말로 모毛라고 한다)이다.
석조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으며, 장차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 617)이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의 유방(遊方)의 시말(始末)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업적들은 <당승전(唐僧傳)>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모두 싣지 않고 오직 향전(鄕傳)에 있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을 기록한다.
스님이 일찍이 어느 날 풍전(風顚)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석등 하대석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것이다)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元曉)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니 사천沙川을 속담에는 모천牟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10현(賢) 중의 한 사람이다. 방언(方言)으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戒)를 잃어 총(聰)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 “일체의 무애인(無㝵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 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기둥 초석
어느 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분유(桑樞瓰牖) 확후(玃候)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陁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할 것이다.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모두 불교를 처음 빛나게 했다는뜻이다. 원효도 역시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의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그쳤다. 또 일찍이 송사(訟事)로 인해서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용의 권유로 해서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것은 또한 본시이각(本始二覺)이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이것을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종천(終天)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찬(讚)해 말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경(三昧境)>의 축(軸)을 열었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1만 거리 바람에 걸었네. 달 밝은 요석궁(瑤石宮)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芬皇寺)엔 돌아다보는 소상(塑像)만 비었네.」
삼국유사 감통(感通) 제7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아 밤낮으로 약속했다.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도록 하지.” 광덕은 분황(芬皇) 서리(西里; 혹은 황룡사皇龍寺에 서거방西去方이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에 숨어 살면서 신 삼은 것으로 업을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불태우고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다.
석등 하대석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마치고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자는데 관계하려 하자 부인은 이를 거절한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
부인은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륙관(十六觀)을 만들어 미혹(迷惑)을 깨치고 달관(達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기둥 초석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元曉法師)의 처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鍤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 되었다.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本傳)과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속에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 달아, 서방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말씀아뢰소서. 다짐 깊은 부처님께 두 손 모아, 원왕생(願往生)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원(四十八願)이 이루어질까.」
석재 파편들
경주 황룡사지 일대를 구황동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황룡사의 구층탑을 줄여서 구황동이라고도 한다. 또 황룡사, 분황사, 황복사 등 '황' 자가 들어가는 절이 아홉 개가 있었다고 해서 구황동이라고도 하고, 또는 진흥왕 때 황룡사터에 신궁을 지으려고 하는데 아홉 마리의 황룡이 나타나 승천하므로 궁궐 대신 절을 세우고 구황동이라 했다고도 한다.
백률사(栢栗寺)는 경주시 북동쪽 소금강산(小金剛山) 자락에 있는 절로 한자를 보면 잣나무 백(栢), 밤나무 율(栗) 字이다. 백률사 이름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백률사(栢栗寺) 편에 등장하는데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세한 내용을 보면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그 절에 부처의 상(像)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률사를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제3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猒髑滅身) 편에 법흥왕 14년(527)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순교(殉敎)한 이차돈(異次頓, 또는 박염촉[朴猒髑], 이차[異次], 이처[伊處])을 기리고자 지은 자추사(刺楸寺)로 추정하고 있다.
이유는 가시(刺)가 있는 호두(楸)가 「밤(栗)」이라는 뜻이므로 백률사와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자(刺)는 잣(栢)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며, 추(楸)는 밤의 일종으로 율(栗)과 통하므로 뜻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따라서 자추(刺楸)는 곧 백률(栢栗)이며 다만 같은 말을 표기할 때 빌린 한자가 달랐을 뿐이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문자가 없었던 신라시대 때 신라인이 사용한 향찰(鄕札)로써 한자의 음(소리)과 훈(뜻)을 빌려서 우리 국어의 문장 순서대로 적은 것이다. 주로 도솔가, 제망매가 등 신라의 노래인 향가(鄕歌)를 표현할 때 이용하였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제3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猒髑滅身) 기록에 이차돈이 순교할 때 내용을 살펴보면 법흥왕 14년(527)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으며 하늘은 사방이 어두워 저녁의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목은 북산(北山) 서쪽 고개(곧 금강산金剛山이다. 전傳에는, 머리가 날아가서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했다.)에 장사지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
백률사(栢栗寺) 범종각범종에 이차돈 순교비에 있는 순교장면을 묘사했다.
삼국사기 법흥왕 즉위 15년 기록을 보면 김대문의 「계림잡전」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을 벤 곳에서 피가 솟아 나왔는데, 그 색깔이 젖빛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하였다고 적혀있다.
그의 목을 베자 ,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으며 하늘은 사방이 어두워 저녁의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이차돈 순교비(국립경주박물관)
현재 백률사는 아담한 사찰이다. 백률사의 대웅전(大雄殿)은 약 3m 높이의 축대 위에 있으며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공포는 다포(多包)양식이고 좌, 우 협칸에 쌍여닫이문이 있다.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선조 때 다시 지었다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백률사 대웅전 내부
이곳 대웅전에 모셨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국보 28호)은 높이 1.77m의 금동불(金銅佛)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며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고 이 세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金銅佛)로 부른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대웅전에 있었으나 1930년에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립경주박물관)
대웅전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바위 면에 마애삼층탑이 새겨져 있고 당시 신라시대 때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앞에 간이 시설물을 만들어서 마애삼층탑을 보는데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동경잡기에 따르면 백률사에는 전단(栴檀)나무로 조각 된 불상이 있었고 백률사 누(樓)가 계림에서 최고였다고 한다. 또한 선유 정지상도 시가를 읊어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東川洞 魔崖三尊佛坐像)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東川洞 魔崖三尊佛坐像, 유형 문화재 제194호)은 소금강산(小金剛山) 정상 근처의 바위에 새긴 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가운데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상이 앉아 있고 그 양쪽에 협시보살이 있으나 얕게 된 선각으로 마멸과 손상된 부분이 많아서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백률사에서 정상방향의 등산길로 걸어가면 10분이면 도착한다.
아미타여래상은 넓적한 얼굴에 머리카락이 없고 육계의 윤곽도 분명하지 않다. 머리둘레에 두 겹의 선으로 두광(頭光)을 표시하였다. 오른쪽은 대세지보살상으로 본존불을 향해 꿇어앉아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는데, 보관(寶冠)에는 보병(寶甁)이 새겨져 있다. 왼쪽은 관음보살상으로 보관의 일부만 제대로 남았는데,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고, 두 겹으로 새긴 둥근 모양의 두광이 확인된다.
이 아미타삼존불좌상은 조각된 옷의 표현과 손의 모습 등 보아 만든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왼쪽에 있는 관음보살상으로 보관의 일부만 제대로 남았는데,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고, 두 겹으로 새긴 둥근 모양의 두광이 확인된다.
소금강산(小金剛山, 177m)은 경주시 북동쪽에 있는 용강동, 동천동과 천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금산(金山), 금강산(金剛山) 등으로 불리었다. 『삼국유사』에 신라 6촌 중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里村)에서의 금산이 “지금의 금강산으로 백률사 북쪽에 있는 산이다.”라는 기록과 “6촌 중 하나인 명활산 고야촌장인 호진(虎珍)이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금강산은 신라 수도의 중심지에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삼국사기』 이외에도 많은 기록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도 소금강산이 아니라 금강산으로 기록되어있다. 세주(細註)에는 “경주 중심지의 북쪽 7리에 있는데,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시대 초기 서라벌 수도의 중심지에서 북쪽에 있는 돌산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지도에도 금강산이 나오는데, 소금강산이라 기록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 이후 강원도에 있는 금강산이 알려지면서 소금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경주시 문무대왕면 안동리 함월산 자락에 있는 골굴암(骨窟庵)은 석굴로써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신이 그린 「골굴석굴」의 주인공인데 그림에는 목조건물로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 있다. 골굴(骨窟)은뼈처럼 생긴 바위굴이라는 뜻이다.
기림사 사적기에 의하면 골굴암(骨窟庵)은 기림사에 딸린 암자로 석굴암 보다 약 200년 먼저 조성되었다.숙종 12년(1686년)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목조 기와집에 고운 단청을 하여 무척 화려하며 석굴들이 많아서 마치 마을을 이룬 듯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숙종 12년(1686년)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도 석굴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석굴 앞면은 목조 기와집에 고운 단청을 하여 무척 화려하며 석굴들이 많아서 마치 마을을 이룬 듯하고 석굴도 법당굴과 설법굴로 구별이 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석굴은 감실을 파서 높이 4m, 폭 2.2m의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을 조성한 법당굴로 마애불은 오랜 풍화에 의해 마멸이 심하고 떨어져 나간 부분도 많다. 마애불의 훼손을 막기 위해 둥근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인근에 있는 기림사 사적기에 의하면 기림사에 딸린 암자로 함월산 반대편에 천생 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여 있다고 되어 있다. 골굴암은 석굴암 보다 약 200년 먼저 조성되었다.
삼국유사 의해(意解)제5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원효가세상을 떠나자 아들 설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었고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원효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호)은 높은 암벽 꼭대기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마애불로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추정된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호)은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 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감실을 파서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을 조성한 법당굴은 마애불의 훼손을 막기 위해 둥근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 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 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 동해안지질공원의 지질 명소에 경주에 3개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골굴암 타포니(Tafoni)이다. 나머지는 남산 화강암, 양남 주상절리이다. 골굴암 일대는 신생대에 폭발적인 화산분화로 나온 뜨거운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응회암은 뜨거운 화산재 상태에서 점차 식어가면서 갈라진 틈이 생기는데, 이 틈을 절리(節理, Joint)라고 한다.
절리 면에서 한쪽의 암석이 떨어져 나가면 절벽이 만들어지고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수없이 뚫려있다. 응회암 표면이 풍화에 의해 일부분 떨어져 나가면서 크기가 다양한 오목한 구멍이 생기고 오랜 풍화에 의해 점점 커지게 되는데 이를 타포니(Tafoni)라고 한다. 골굴암은 이러한 타포니를 활용하여 12곳의 법당굴과 설법굴을 조성하였고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을 새겼다.
골굴암은 선무도(禪武道) 수련 및 공연으로 유명한 절이다. 선무도(禪武道)는 불교무술로 1960년대에 범어사의 양익 대종사(2006년도 입적)가 승군들의 무예와 관법수행법을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정립한 한국 불교의 전통수행법이다.
골굴암 대적광전 앞에서 매일 오후 3시에 월요일, 화요일 제외한 날에 선무도 공연을 하는데 무척 인기가 많다. 특히 외국인의 위한 선무도 수행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선무도 수행자가 많다.
골굴암 대적광전 앞에서 매일 오후 3시에 월요일, 화요일 제외한 날에 선무도 공연을 한다.외국인의 위한 선무도 수행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행자가 많다.
안동리(安洞里)는 조선중엽에 강찬성(姜讚成)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지형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장차 이 마을이 평온하고 부유한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안동, 안골로 불렀다고 한다.
감산사(甘山寺)는 경주시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에는 사찰로 신라 성덕왕(聖德王) 18년(719년)에 중아찬(重阿湌) 김지성(金志誠 또는 金志全, 652∼720년)이 자신의 장전(莊田)을 희사(喜捨)하여 성덕왕과 이찬 김개원(金愷元, 645년∼720년 경)의 복을 빌고 그의 가족 안녕과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630년 경 ∼678년 경) 일길찬(一吉, 제7위 관등)과 어머니 관초리 (官肖里, 632∼698년 경)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김지성(金志誠)은 6두품 출신으로 집사부 시랑을 역임한 인물이며 67세에 성덕왕 17년(718년) 무오년에 벼슬을 버리고 장전(莊田)인 감산장(甘山莊)에 있다가 그 다음 해인 성덕왕 18년(719년) 기미년에 왕의 특명으로 다시 기용되어 나갈 때, 감산장(甘山莊) 자리에 절을 세우고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불사를 끝낸 다음 해인 성덕왕 19년(720) 경신 4월22일에 69세로 사망하였다.
김지성(金志誠)의 부모는 아버지 인장(印章) 일길찬은 나이 47세에 돌아가서 화장 후 동해 흔지(欣支, 지금 영일의 옛 이름) 해변에 산골하였고어머니인 관초리 부인은 나이 66세에 돌아가서 화장 후 또한 동해 흔지 해변에 산골하였다.” 그의 일가는 아우인 김양성(金良誠) 소사(小舍, 13위 관등)와 누님인 고파리(古巴里)와 전처(前妻)인 고로리(古老里), 후처인 아호리(阿好里), 서형(庶兄)인 김급한(金及漢), 일길찬 김총경(金聰敬) 대사(大舍, 제12위 관등), 누이동생인 수혜매리(首兮買里)이다.
이찬 김개원(金愷元)을 거명하고 있는 것은 김개원과 특별한 친족 관계거나 어떤 혈맹(血盟)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개원은 당시 정치실력자로 태종 무열왕 김춘추(604∼661년)와 문명부인과사이에 태어 난 6남 1녀의 막내아들로 효소왕(孝昭王, 687∼702년) 4년(695년)에 수상인 상대등에 올랐고 효조왕이 16세에 후사 없이 돌아가자 13세의 효소왕의 동생 성덕왕을 보위에 올려놓은 태종 무열왕계의 수장이다. 김개원의 누나들은 김흠운(金運, 631∼655년)의 처 요석공주(瑤石, 631년 경∼ ?)와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의 처 지소부인(智炤, 640년∼712년 이후)으로 각 가문의 혈손을 결속시켜 통일 신라왕국을 안정으로 이끌어간 인물이다. 그는 김흠운의 막내딸을 신문왕의 계비로 맞아들여 효소왕과 성덕왕 형제를 낳게 하였고 김유신 혈손 중에서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성덕왕 3년(704년) 5월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현재 감산사의 모습은 1300년 전의 감산사가 아니다.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 미륵보살입상이 발견 된 당시인 1915년에 감산사는 옛 절터의 대부분이 전답지이고 삼층석탑과 작은 불당2채만 있었다. 이후 지속적인 불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조계종 사찰로 비구니 스님이 운영하고 있으며 조경이 아담하고 깨끗하다. 템플 스테이도 운영하고 있다. 국보인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어 볼 수가 없고 삼층석탑과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만 볼수 있다.
대적광전.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은 석조불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되어 있다.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 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造 毘盧舍那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은 석조불상으로 대적광전(大寂光殿)에 봉안되어 있는데 머리 부분과 앞면의 훼손이 심하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도 없어진 것을 보수하였다. 머리에는 나발과 육계를 낮게 표현하였다. 양손은 파손되었던 것을 지권인(智拳印)으로 보수하였다. 그 외 신체부위는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어깨가 각이 지고 양쪽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양 무릎이 두텁고 넓어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모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감산사 창건과 연관지어 8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우리나라 비로자나불상 중에서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짐작된다. 이 석불(石佛)의 뒷면 왼쪽과 앞면 중앙하부의 띠 매듭과 뚜렷한 옷 주름(衣紋)은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륜대좌불,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석조 불상의 옷 주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 三層石塔, 문화재자료 95호)
대적광전에서 삼층석탑으로 가는 다리
감산사지 삼층석탑 (甘山寺址三層石塔)은 대적광전 뒤편에 있으며 무너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세웠으며 현재 높이는 약 3.3m이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고 1층 지붕돌위에 2층과 3층 지붕돌이 올려 진 삼층석탑이다. 기단은 2층으로 하였는데, 1층 기단은 4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 기둥을 각각 새겼다. 2층 기단의 각 면에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을 각각 새겼으며 갑석부연과 괴임 2단으로 구성하였다. 1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개의 돌로 하였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에는 4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윗면은 낙수면으로 되어 있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잘 보여 주며, 지붕돌의 추녀가 직선이고 전각(轉角)이 들려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감산사(甘山寺) 석조 아미타여래입상(石造 阿彌陀如來立像, 국보 82호)와 석조 미륵보살입상(石造 彌勒菩薩立像, 국보 81호) 두 불상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1916년 일본인 학자 도변창(渡邊彰)과 말송웅언(末松熊彦)이 경주지방 고적을 조사할 때 내동면(內東面) 신계리(薪溪里) 감산사 터 논바닥에 엎어져 있던 것을발견하여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 해 3월 조선총독부에서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열었을 때 총독부 안의 특설 미술관에 전시되었다.
석조 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석조 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감산사터에서 나온 석재들
이 특설 미술관은 경복궁 전각 일부를 헐어내고 지은 것인데 이때 경복궁을 일반에 공개했다.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12월에는 특설 미술관을 ‘조선총독부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고쳐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이 두 불상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수장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를 통해 경복궁 탈취를 기정사실화하고 다음 해인 1916년 7월에는 근정문과 광화문을 헐어내고 근정전 앞에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조선 민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따돌려 반발 기회를 주지 않고 경복궁을 빼앗은 것이다. 처음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의도는 조선 민심에 깊이 뿌리내린 풍수설을 이용하여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왕실로부터 탈취함으로써 일본의 통치를 기정사실화하자는 것이 그 첫째 목적이었다. 그리고 물산장려로 민생을 돌보는 것처럼 대내외에 선전하는 것이 그 둘째 목적이었다.
두 불상의 광배 뒷면을 보면 불상을 만든 경위를 자세하게 적은 조상기(造像記; 불보살상을 만든 연유를 밝힌 글)에 따르면, 미륵보살상의 조성 연대는 719년(성덕왕 18), 아미타상은 720년(성덕왕 19)으로 밝혀져 있다. 그리고 8세기 통일신라의 불교사상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두 불상이 만든 연대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불상 양식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조상기에는 당시의 장법(葬法), 개인의 사원 건립과 불상 조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금석학과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감산사(甘山寺)관련 삼국유사 제2권 탑상(塔像) 제 4 남월산(南月山, 또는 감산사甘山寺라고도 한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절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금당주미륵존상화광(金堂主彌勒尊像火光) 후기(後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개원(開元) 7년 을미(乙未; 719) 2월 15일에 중아찬(重阿飡) 전망성(全忘誠)이 그의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觀肖里) 부인을 위해서 공손하게 감산사(甘山寺)와 석미륵(石彌勒) 하나를 만들고, 겸하여 개원(愷元) 이찬(伊飡)과 아우 간성(懇誠) 소사(小舍)․현도사(玄度師), 누이 고파리(古巴里), 전처(前妻) 고로리(古老里), 후처(後妻) 아호리(阿好里)와, 또 서형(庶兄) 급막(及漠) 일길찬(一吉湌), 일당(一幢) 살찬(薩湌), 총민(聰敏) 대사(大舍)와 누이동생 수힐매(首肹買) 등을 위하여 이러한 착한 일을 했다. 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故人)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
극락전산신각
미타불화광(彌陀佛火光) 후기(後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중아찬(重阿飡) 김지전(金侍全)은 일찍이 상의(尙衣)로서 임금을 모시고 또 집사시랑(執事侍郞)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도로 바치고 집에서 한가로이 지냈다. 이때 국주(國主) 대왕(大王)과 이찬(伊飡) 개원(愷元), 죽은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 죽은 어머니, 죽은 동생, 소사(小舍) 양성(梁誠), 사문(沙門) 현도(玄度), 죽은 아내 고로리(古老里), 죽은 누이동생 고파리(古巴里), 또 아내 아호리(阿好里) 등을 위해서 감산(甘山)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절을 세웠다. 또 석미타(石彌陀) 하나를 만들어 죽은 아버지 인장 일길간을 위하여 모셨는데, 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유우 변산야(東海攸友 邊散也)라 했다.”(제계帝系를 상고해 보면, 김개원金愷元은 태종太宗 김춘추金春秋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愷元角干이며, 문희文熙가 낳은 이다. 성지전誠志全은 인장仁章 일길간一吉干의 아들이다. 동해유우東海攸友는 필시 법민왕法敏王을 동해東海에 장사지낸 것을 말한 것인 듯싶다)」
흰 구름이 떠도는 곳에 있다 하여 부르는 백운암은 통도사 內 20개 암자 중에서 유일하게 암자까지 차가 들어가지 않는 아담하고 소박한 암자이다. 영축산 팔부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수도처로 유명하고 특히 만공스님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백원암 산신각 앞에서 본 풍광
또한 백원암 금샘에서 나는 금수(金水)는 암벽아래 돌 사이에 솟아나는 석간수인데 물맛이 뛰어나고 일품이다. 금수는 일주문 지나서 1곳, 용왕각 좌측에 1곳 그리고 산신각 입구 1곳 등 3곳에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통도팔경 중 제6경 백운명고(白雲鳴鼓)라 하여 저녁 무렵 흰 구름이 영축산을 휘감는 백운암의 북소리가 매우 아름답고 청명하다고 한다. 사찰의 북은 법고(法鼓)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윤회에 의하여 현생한 축생을 위하여 치는 북이다.
극락암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비로암과 백운암의 갈림길
통도팔경은 영축산의 동쪽 산록을 따라 발달한 통도천 계곡의 자연 경관과 불교 문화 요소의 특성을 잘 표현한 것으로 제1경은 무풍한송(舞風寒松), 제2경은 안양동대(安養東臺), 제3경은 비로폭포(毘盧瀑布), 제4경은 자장동천(慈藏洞天), 제5경은 극락영지(極樂影池), 제6경은 백운명고(白雲鳴鼓), 제7경은 단성낙조(丹城落照), 제8경은 취운모종(翠雲暮鐘) 등으로 되어 있다.
백운암 아래 800m 지점의 주차장으로 매우 협소하니 가능하면 극락암 주차장을 이용하면 좋다.백운암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나르는데 사용하는 모노레일백운암의 가파른 길에 사용하는 지팡이오르막길을 따라 나무계단과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 일주문을 맞이할 수 있다.
백운암은 892년(진성여왕 6)에 조일대사(祖日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1810년(순조 10)에 침허대사(沈虛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조성되어 백운암에 봉안된 「백운암 지장탱화」가 당시의 중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백운암 지장탱화」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7호로 1804년(순조 4)에 조성된 불화이다. 화면의 맨 위쪽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 펼쳐져 있고 중앙에 지장보살이 석장(錫杖)과 투명 구슬을 쥐고 가부좌한 채 앉아 있다. 비단에 채색을 하였고 크기는 세로 158㎝, 가로 175㎝로, 조선 후기 불교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살며시 보이는 백운암
1970년대에 극락암에 주석한 경봉스님이 후원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 기능을 하는 백운암, 용왕각, 산식각, 요사채 등이 있다. 백운암은 통도사에서 약 6㎞ 정도로 떨어져 있는데, 승용차를 가지고 오면 극락암 주차장에 주차하거나, 백운암 아래 800m 지점의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백운암 아래 주차장은 협소하여 가능하면 극락암 주차장을 이용하면 좋다. 극락암 주차장에서 걸어서 출발하면 50분정도 이면 백운암에 도착한다. 비로암 방향의 갈림길을 지나서 오르막길을 따라 나무계단과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 일주문을 맞이할 수 있다.
백운암 일주문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은 19세기 조선의 사라져가는 선풍을 일으킨 선승 경허스님(1849~1912)의 세 제자 중 막내이다. 이른바 삼월(三月)이라 하여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月) 세 명의 스님으로 맏이인 수월스님을 상현달(上弦), 혜월스님을 하현달(下弦), 만공스님을 보름달인 만월(滿月)이라고 부른다.
백원암 금샘에서 나는 금수(金水)는 암벽아래 돌 사이에 솟아나는 석간수가 인데 물맛이 뛰어나고 일품이다. 금수는 일주문 지나서 1곳, 용왕각 좌측에 1곳 그리고 산신각 입구 1곳 등 3곳에 조성되어 있다. 이중 일주문 지나면 맞이하는 금수일주문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포대화상백운암용왕각과 백운암용왕각용왕각 좌측에 있는 금수
만공스님이 백운암에서 보름동안 선 수행을 하였는데 어느 날 새벽, 통도사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우치게 되었다. 이후 스승 경허 스님이 머무르고 있는 범어사를 향해 보은의 큰 절 세 번을 하고 천장사로 돌아갔다. 당시 백운암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홀로 거닐며 자재하였다. 」
나한전
만공스님은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속성은 宋氏로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어렸을 때 속명은 도암(道岩)이었다. 1871년(고종 8년, 신미년) 3월 7일 전북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휘(諱)는 신통(神通)이라 하였고 어머니는 金氏였다. 만공 스님이 13세 되던 1883년(신미년) 겨울, 도인 하나가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단명할 상으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에 놀란 어머니 金氏가 단명을 면할 방도를 묻자, 도인은 김제 금산사에 가서 올해를 넘기면 운명이 바뀌어 장수를 한다고 하였다.
산신각 입구에 있는 금수
만공스님의 부모님은 아들이 집안의 장자이기에 바로 금산사로 아이를 데려가서 그 해를 보냈다. 그리고 금산사에서 1년을 보내자 부모님 생각과는 달리 만공스님은 출가를 결심 하였다. 만공스님의 단명할 상이 출가를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1886년에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모시고, 경허(鏡虛, 1849~1912)를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았다. 이때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이후 10년간 천장암(天藏庵)에서 공양주를 보았다. 1893년 11월 천장암을 떠나 충청남도 아산 봉곡사에서 수행 중 1895년 7월 (24세)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산신각
1898년 스승 경허를 따라 동래 범어사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홀로 통도사 백운암에 들렀다. 이때 장마를 만나 보름을 지냈는데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1901년 7월 경허가 있는 서산 천장암으로 돌아왔다. 덕숭산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거쳐 금강산 유점사(揄占寺)에서 3년을 지냈다. 1904년(광무 7년, 33세)에 경허로부터 만공이라는 법호(法號)와 함께 전법게(傳法偈, 득도한 큰스님이 수행 과정을 점검하여 깨달음을 인정하는 것)를 받은 후 덕숭산 수덕사 부근의 금선대에서 설법을 열었고 선풍을 진작시키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1914년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의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고 예산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등의 중창에 관여하고 승려들을 길러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다. 1920년초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1927년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을 지었는데,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하여 임제종풍(臨濟宗風)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이 설립될 때 이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바로 이사장 선출에서 이사장은 송만공(宋滿空), 부이사장은 방한암(方漢岩)이 선임되었다. 1935년부터 3년간 마곡사 주지를 지내면서 대처(帶妻), 음주, 식육을 하는 일본 불교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 31본산(本山) 주지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불교의 일본 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1940년 5월의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3월 10일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조선 말살 정책을 펼친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의 회유도 거절하는 등 식민지배의 만행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800m 아래 주차장에서 올라온 생활용품을 내리는 곳
주로 예산 덕숭산에 ‘전월사(轉月舍)’란 띠집을 짓고 머물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이 사람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고생했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라는 유언을 남긴 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은 덕숭산 금선대 근처에 부도 만공탑을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었다. "부처님 사리로 모든 것은 넉넉하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 되어 있으니,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으며, 이후 덕숭산의 다비식에서는 어떤 스님이든지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문도들이 지켜야 할 전통이자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제자로는 춘성, 일엽(여류시인인 김일엽의 법명), 고봉, 혜암, 혜천, 원담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만해는 내 애인이야."라고 말했는가 하면, "지금 온 조선 땅에 사람이 하나 하고도 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만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공스님은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념과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스스로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여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나를 찾을 것을 강조하였다. ‘나’라는 개체의 나가 아니라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만유의 나로, 이는 곧 일심과 통한다고 설법하였다.
참선을 위해서는 행자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보조적 요건도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환경과 배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견해를 처음으로 설파하였다. 참선의 보조 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과 수도(修道)에 적절한 도량,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좋은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속세에서도 역시 배경과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에 걸맞은 배경과 환경적 요인도 사람을 만든다고 보았다.
경주 함월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기림사는 유서 깊은 사찰이자 지금까지 법통이 이어지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달을 머금고 있는 산인 함월산에 자리 잡고 있는 기림사는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천축국(天竺國;인도)에서 온 승려 광유가 임정사(林井寺)라는 이름으로창건하였고 이후 원효대사가 중창(重創)을 하면서 인도 2대 정사인 기원정사(祇園精舍)의 기(祇), 죽림정사(竹林精舍)의 림(林)자를 합쳐 기림사(祇林寺)라고 개명(改名)하였다.
2000년대 기림사
삼국유사 기이 편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따르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바다 이견대(利見臺)에서 동해용으로부터 대나무와 옥대를 얻고 감은사에서 하루 밤을 지낸 후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냇가(용연폭포)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최소 신문왕(682년) 때 기림사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림사는 광복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절로 불국사 등 60여개 말사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으나 불국사가 복원되어 대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사세가 역전하여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로 되었다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옛날부터 기림사 경내·외에는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샘물이 있어 오정수(五井水) 또는 오종수(五種水)라 하여 다섯 곳에 샘이 있었고 물맛이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맛볼 수 있는 샘이 없다.오종수(五種水) 종류와 내용을 살펴보면 명안수(明眼水)라 하여 눈이 밝아진다는 물, 오탁수(烏啄水)라 하여 기림사 동편 큰 바위 아래의 물로 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 장군수(將軍水)라 하여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물, 감로수(甘露水)라 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은 물, 마지막으로 화정수(和靜水)라 하여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물이 있었다.
일주문 초입
이렇게 물맛이 좋은 이유는 기림사가 위치한 양북면 일대가 규조토가 많이 생산되는데 이 규조토가 물의 정수 역할하기 때문이라고 지질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오탁수(烏啄水)라 하여 기림사 동편 큰 바위 아래의 물로 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로 위치는 알수가 없다.
기림사 오른쪽에 흐르는 천은 호암천(虎岩川)으로 양북면 호암리의 성황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동리에서 대종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 가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이곳 기림사까지는 수레를 타고 왔고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띄어 감은사까지는 대종천 뱃길을 이용하여 갔었다. 호암(虎岩)은 순우리말 이름인 범 바위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기림사 오른쪽에 흐르는 호암천(虎岩川)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 가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이곳 기림사까지는 수레를 타고 왔고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띄어 감은사까지는 대종천 뱃길을 이용하여 갔었다.
풍수가에 의하면 기림사 터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즉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국의 명당자리이기 때문에 몽고침입,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덕분에 기림사에는 보물이 4점이나 있다.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호),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제833호), 소조비로자나 삼존불(보물 제958호), 비로자나불 복장전적(腹藏典籍, 보물 제959호) 등 있다. 특히 흙, 종이, 돌, 나무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불상이 있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깨죽나무
천왕문 왼쪽 석축아래 오종수(五種水) 중 물을 먹거나 눈을 씻으면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明眼水)가 있다. 1990년대까지 물이 고여 있었으나 지금은 물이 말라버렸다. 소나무 뿌리 때문에 눈이 맑아진다는 견해도 있다.
천왕문천왕문 왼쪽 석축아래의 명안수(明眼水)
천왕문 좌우에는 불법승을 해치는 나쁜 무리인 마구(니)를 제압하고 있는 사천왕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구(니) 복장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있어 왜구임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당시 왜구는 해악한 무리이고 주민들을 많이 괴롭혔다. 마구(니)는 사찰마다 형태와 착용복장이 다른데 일반적으로 추풍령이북은 몽고와 만주족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천왕(四天王)은 고대 인도신화시대부터 사방을 지키는 호세신(護世神)으로 귀족 혹은 귀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나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는 동안에 차츰 험상궂은 무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불교에 흡수되면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아래 동서남북의 4州를 지배 하면서, 佛法을 수호하며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호법신 역할을 하고 있다.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받들고 밑으로는 팔부중(八部衆)을 거느리고 있다.
경전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0권에는 국가가 위태로울 때 사천왕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가장 대표적인 호국경전이다. 사찰에서는 천왕문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탑의 사방 동. 서. 남. 북을 수호하는 신장으로도 조성 되었다. 또한 외호신장이라고도 하여 불국정토의 외막 을 맡아보는 역할을 하며 동방은 지국천, 서방 광목천, 남방 증장천, 북방 다문천이다.
천왕문 좌우에는 불법승을 해치는 나쁜 무리인 마구(니)를 제압하고 있는 사천왕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구(니) 복장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있어 왜구임을 알 수 있다.
북방 다문천(多聞天)은 부처의 도량을 잘 지키며 부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신장으로 왼손에는 탑 또는 비파를 들고 있고 피부색은 水의 흑색이다. 서방 광목천(廣目天)은 죄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고통을 느끼게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道心을 일으키게 하는 신장으로 오른손에는 푸른 용, 왼손에는 붉은 여의주를 들고 피부색은 金의 백색이다.
남방 증장천(增長天)은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서 만물을 소생하게 하고 덕을 베푸는 신장으로 비파를 타고 있고 피부색은 火의 적색이다. 동방은 지국천(持國天)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며 인간을 보살피고 인간들의 국토를 지키는 신장이다. 왼손에는 칼,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고 왼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으며 피부색은 木의 청색이다.
기림사의 특징 중 하나가 진남루(鎭南樓)다. 맞배지붕에 앞면 7칸, 옆면 2칸의 긴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누각인데 지금은 누각의 형태가 아니고 18세기 중반에 중창(重創),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남(鎭南)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인데 남쪽은 왜구를 의미한다. 기림사 유물에 전적, 나팔, 목패 등이 있어 호국 사찰임을 이해할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 보이는 진남루맞배지붕 익공양식의 앞면 7칸, 옆면 2칸 진남루(鎭南樓)현재 진남루 일부를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겹처마 익공양식의 진남루진남루와 응진전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에 안산암(安山岩)으로 만들어진 높이 3m의 아담한 삼층 석탑이 있다. 통일신라말기 석탑으로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는 2층 기단으로 각 층은 한 개의 통돌로 2층 기단은 2개의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새겨서 조성하였다. 탑신부는 한 개의 통돌로 3층을 조성하였고 각 탑신석은 2개의 우주를 새겼고 옥개받침은 4단을 만들었다.
응진전과 삼층석탑
기림사 3층 석탑은 일반 석탑과 다르게 기단부와 탑신부에 이끼가 많이 있는데 이유는 옛날 오종수(五種水) 중 장군수(將軍水)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장군수를 메워버리게 된 이야기는 2가지가 전해진다. 하나는 자리에 석탑이 조선시대에 이 곳 물을 먹고 난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에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는 이야기가 하나고 또 다른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때 이 물을 먹고 장수가 되어 독립투사가 나올 것이란 생각에 일제가 우물을 메웠다는 이야기다. 고요한 밤에 탑에 귀를 대고 있으면 탑 아래 우물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응진전은 맞배지붕의 정면5칸의 다포양식의 조선후기 건축물이다. 500명의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나한상을 자세히 보면 돌로 만든 석불인 것으로 알 수 있다. 소위 불석(佛石)으로 하여 함월산에 있는 돌로 사암 계통의 부드러운 재질로서 조각이 쉽고 석재를 두부 자르듯이 결에 따라 자를 수 있어 옛 부터 불상 조각에 많이 사용해 왔던 돌이라고 한다.
함월산 불석(佛石)으로 만든 나한상응진전의 다포
약사전 앞에는 1기의 목탑터가 있다. 가운데 심초석(11×11×11cm)이 있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다.일반적으로 목탑이 단탑인 경우와 쌍탑인 경우에 따라 가람의 주 출입방향을 판단 할 수 있다. 목탑이 단탑이면 응진전 중심으로 동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고 쌍탑이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향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쌍탑이 있는 사찰이 많아서 기림사가 쌍탑일 가능성도 한번 정도 생각해볼 일이다.
목탑터가운데 심초석이 있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기림사의 목탑터가 단탑이면 응진전 중심으로 동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다
약사전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옆면 1칸의 다포양식의 건축물로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효종 5년(1654년)에 중창되었고 숙종 4년 중수했다. 주불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로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부처로써 7세기 중엽부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때 유행했던 부처이다. 보통 손에 약그릇또는 보주를 들고 있으나 기림사 약사여래불에게는 없다.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 월광보살로 이마나 보관에 해, 달 또는 손에 해, 달을 들고 있다.
맞배지붕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옆면 1칸 약사전주불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대적광전(大寂光殿)은 보물 제833호로 맞배지붕의 겹처마에 정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양식의 건축물이다. 창건이후 6차례 다시 지어졌다. 이중 5번째는 1629년(인조7년)에 지어졌고 마지막으로 1786년 경주 부윤 김광묵에 의해 지어져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단청은 색깔이 바래어 지나긴 긴 세월을 알려주고 다포공포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조각예술은 정갈함과 함께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또한 법당 출입문의 살문이 솟을 꽃살문인데 간결하고 아름답다.
보물 제 833 호로 맞배지붕 겹처마에 정면 5 칸 , 옆면 3 칸 다포양식의 대적광전(大寂光殿)법당 출입문의 살문이 솟을 꽃살문인데 간결하고 아름답다.
내부는 4개의 고주(高柱) 외에 따로 2개의 측면 고주를 세워 넓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하다. 그리고 빗천장과 우물 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대적광전의 다포
대적광전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인 삼존불 즉 비로자나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흙(규조토)으로 만든 소조불로 보물 제958호다. 규조토는 그 성질이 물을 머금으면 흙 반죽이 되나 마르면 돌처럼 딱딱 해지는데 이 성질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었다. 만든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이다.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
상체는 장대하나 하체는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에는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대적광전에 삼존불이 조성되면 일반적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 노사노불, 오른쪽 석가모니불이 일반적인 구도다. 특이하게 기림사 대적광전에는 노사노불 대신에 아미타불이 조성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의 복장에서 불경(책, 목판본과 사경)이 발견되었는데 비로자나불 복장전적(腹藏典籍)이라고 부른다. 보물 제959호로 제작 시기는 고려 11세기부터 조선 17세기로 고려시대 목판본(木版本), 사경(寫經)과 조선시대 목판본(木板本)이다. 전적(典籍)이 발견된 것은 1986. 9. 6 새벽 문화재 절도범들이 대적광전에 침입하여 비로자나불의 뒷부분을 파괴하여 복장유물을 꺼내어 도주하는 것을 잡아서 유물을 되찾았다.
왼쪽의 탱화는 기림사 삼불회도로 김림사의 창건설화를 표현하고 있다.내부는 4 개의 고주(高柱) 외에 따로 2 개의 측면 고주를 세워 넓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하다 ; 그리고 빗천장과 우물 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
관음전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11면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1986년 우리나라가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기념으로 열린 불교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다. 11면 관세음보살은 밀교의 관점에서 본 관세음보살상으로 제도하는 중생들의 형태에 따라 11가지의 얼굴모습을 나타낸다. 좌면(3면)은 분노 상으로 악한 중생을 꾸지람하여 악으로부터 구하려는 상이고 우면(3면)은 백아 상으로 착한중생에게 더욱 정진을 권하는 상이며 정면(3면)은 자비 상으로 선한 중생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칭찬하는 상이다. 그리고 뒷면(1면)은 대폭소상으로 착한중생, 악한중생 모두를 포섭하는 아량을 베푸는 상이고 맨 위(1면)는 아미타여래이다.
관음전관음전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11면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밀교의 관점에서 본 관세음보살상이다.
삼천불전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각 천불씩 조성되어 있는데 주불 석가모니는 한지로 1990년대에 제작되었다. 삼성각에는 독성신인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데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도를 이룬 분으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분으로 육당 최남선은 단군으로 보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나반존자를 십육나한을 대표하는 빈두로존자로 파악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입멸한 후 이 세상에 머물며 다음 세상의 미륵불이 나실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라” 는 부촉을 받았다고 한다.
삼천불전과거, 현재, 미래의 각 천불씩 조성되어 있는데 한지로 1990년대에 제작되었다.독성신인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 삼성각
기림사 명부전은 우리나라에서 영험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이곳에서 조상제사를 모시는 이가 많다.
명부전화정당절에서 조성하여 만든 화정당 앞의 화정수(和靜水)범종루사물인 운판, 목어, 범종, 법고(북)목어
기림사 성보박물관 입구에는 불두와 광배가 심하게 훼손된 불령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불령고개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 방형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오른 손은 무릎위에 놓고 왼손은 배 앞에 놓은 것으로 법의는 통견식이고 양 어깨를 걸쳐 내려와 두 무릎을 덮었으며 가슴에는 군의의 매듭이 보인다. 방형대좌의 하대는 복련, 중대는 안상 그리고 상대는 앙화를 조각하였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불령 석조여래좌상
기림사 성보박물관에는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으로 높이 91cm인 관세음보살반가상이 있다. 대좌의 글귀에 연산군 7년(1501)으로 되어 있어 제작연대로 추정하고 있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나 종이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 버리고 옻칠을 입힌 속이 빈 소상이다.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
머리에는 당초문을 새긴 보관을 썼고 얼굴은 남성적이며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목에는 화려한 장식의 목걸이를 하고 있어 눈에 띈다. 왼발은 대좌 위에 얹고 오른발은 대좌 밑으로 내렸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을 약간 뒤로하여 대좌를 짚고 앉아 있는 모습이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자세는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비슷하다. 이 밖에 석조치미, 불석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 명부전에 봉안되는 사자로써 죽은 사람의 죄를 적은 기록을 지옥세계에 전달하는 직부사자와 죽은 사람의 집에 가서 죽은 사람을 살피거나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감재사자 등 있다.
용마루 양쪽 끝에 설치하는 석조치미로 사찰의 규모 추측할 수 있다.불석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직부사자도감재사자도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이 있는데 김시습(金時習)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남산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5년(1868)에 훼철되었다. 고종 15년(1878) 경주유림이 경주부윤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고 1998년 경주시에서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이르렀다.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은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雪岑)이며 조선 초기 문인으로 생육신 중 한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유, 불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수많은 시와 저서를 남겼다. 생후 8개월에 글 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은 논어의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매월당 ( 梅月堂 )&nbsp; 영당 ( 影堂 )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보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관서, 관동, 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時四遊錄)에 그때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 금오산 용장사에서 37세 까지 성리학과 불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김시습 ( 金時習 )&nbsp; 영정
37세에 서울 성동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의 일기로 병사하여 일생을 마쳤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 2편 만파식적(萬波息笛)조」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龍)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년(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龍)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龍)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龍)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德)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비단과 금(金)과 옥(玉)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病)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서생면 해운산에 위치하고 있는 인성암(引聖庵)은 신라 무열왕(654~660)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고 북쪽 성인산(聖人山)이 있어 성자를 이끌어 들인다고 하여 유래가 된 이름이다. 서생팔경(西生八景) 중 성암모종(聖庵暮鍾)이라 하여 인성암의 저녁 무렵 종소리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알려졌다.
인성암 입구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서생포 왜성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여러 번에 걸쳐 담판을 하면서 이 사찰에 머물렀다고도 전해진다. 그럼 성자는 원효대사와 사명대사일까?
인성암 內 전각으로는 대웅전, 칠성각, 독성각, 산령각, 종각 등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일본인들로 구성된 울산군교육회가 일본어로 펴낸 ‘울산군향토지(蔚山郡鄕土誌)’에 조선인 불교 사찰은 9곳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백양사와 옥천암, 신흥사, 동축사, 월봉사, 인성암, 내원암, 문수암, 석남사 등이 당시에 존재했다. 건물 자체를 보면 근대에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칠성각독성각과 산령각종각
수령 400~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사찰의 긴 역사를 증명하듯 노거수의 장엄함이 보인다. 팽나무는 성암모종(聖庵暮鍾)의 저녁 종소리를 들었으리라. 지금은 사찰 방문객에게 귀속 말로 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는 듯하다.
수령 400~500년 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사찰의 긴 역사를 증명하듯 노거수의 장엄함이 보인다.
대웅전에 있는 청동금고의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때인 1927년에 대대적인 불사가 있었고 당시 주지스님은 법명은 재선이고 호는 벽허였다. 그때 서생면 진하에 살고 있는 근대 울산 최고의 갑부 이규현이 청동금고를 비롯하여 칠성도, 독성도, 산신도 조성에도 시주를 하였다.
1970년대 이규현의 아들 이근수(李根守)가 그의 고택 만석정의 행랑채를 헐어 대웅전을 짓는데 대들보 등 에 도움을 주었다. 2대를 거쳐 인성암 불사에 큰 보탬을 주었던 父子이다.
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17호 ‘신중도(神衆圖)’와 문화재자료 18호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이 있었으나 도난을 우려해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특히 석조보살좌상은 경주 불석으로 알려진 흰색의 석재로 제작되었다.
암자에서 나와 길을 따라 가면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와 비를 만날 수 있다. 무일당 선용대선사는 1925년 3월 9일 평안남도 용강군 대산면 해산리167번지에서 부친 김곽도와 모친 곽희운 사이에서 9대독자로 출생하여 신의주와 만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무일당(無一堂) 선용대선사(善用大禪師)의 부도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
6.25전쟁 때 켈로부대원으로 안강전투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고 국가유공자가 되었으나 참혹한 전투를 통한 인생무상을 절감하여 1960년경 금정산 범어사에서 하동산대종사 문하로 출가 득도하였다. 이후 보제루 보수, 종각 보수, 진입로 공사 등 범어사의 발전과 가람 수호를 위해 헌신한 공을 인정받아 1968년 종정 표창을 받기도 했다. 1988년에 인성암 주지로 부임한 이후 청풍가풍과 무소유적인 삶으로 정진하였고 형편이 딱한 학생들의 소식을 접하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세납 83세 법랍 47세에 원적하였다. 현대의학 발전을 위해 법구를 생전유언에 따라 동국대학교 의과대학병원에 기증하였고 유골은 대전국립현충사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