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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련산((金蓮山, 415m) 마하사골에 위치한 마하사(摩訶寺)는 부산 최초의 사찰이다. 1965~1970년 대대적인 중창불사 중 대웅전 건물에서 "상량문" 이 발견되었는데, 그 상량문에서 마하사를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창건시기를 신라 내물왕대로 추정하고 있다. 마하사의 마하(Maha)는 산스크리트로서 그 뜻은 "훌륭한" "존귀한" "위대한"이란 뜻으로 글자 그대로 "훌륭한 사찰"이란 뜻이다.

마하사 초입의 나무터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누구인가?

아도화상 또는 묵호자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해동고승전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으로 아버지 아굴마, 어머니 고도녕 사이에서 태어났고 5세 때 출가하여 16세에 위나라로 갔다가 19세에 돌아왔다. 신라 미추왕 2(263)때 부터 불교 전파에 노력하였고 눌지왕 2(418) 일선현(현재 선산)에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신라 최초의 사찰 도리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신라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된 계기를 만든 인물이 아도화상이다.

그리고 마하사의 터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에 자리 잡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명당자리이다오래전 금련산에는 마하사, 반야암, 바라밀다사(波羅密多寺) 등 세 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하사만 남아 있고, 반야암과 바라밀다사는 마하사 입구의 맞은편 언덕에 사찰 터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마하사 약수터
중생들의 간절한 소원성취를 위한 곳인가?

옛날부터 마하사의 십육나한이 영험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지역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나한전의 16나한의 불상이나 탱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간적이고 해학적이며 소탈한 모습을 띄고 있다.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 참새를 쫓아낸 나한등 관련 설화를 보면 팥죽이 먹고 싶어서 황령산의 봉화대를 찾아 갔다는 것이나, 나한전의 불사를 하지 않자 종소리를 바꾸어 버린 것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어 웃음과 함께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인간적이고 소탈한 모습의 부처님
2층 누(樓) 건물양식에 천왕문과 범종각
좁은 산세 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건물이다.

또한 수영팔경(水營八景) 중 하나인 연산모종(蓮山暮鐘)’이라 하여 마하사에서 해질녘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범종소리로 금련산 마하사골을 해탈 향기로 그윽하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초입에서 맞이하는 범종각의 청정한 종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마하사 창건 내력을 보면 임진왜란 때 봉수대를 지키는 호국불교 사찰이기에 건물이 모두 불탔고, 18~19세기 단계적으로 사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1717(숙종 43) 초암(草庵) 형태의 대웅전과 나한전을 짓고 신도 박성우(朴聖祐)가 시주하여 16나한상을 조성하였다. 1729(영조 5) 승려 각찬이 주도하여 나한전을 중건하였다. 1773(영조 49) 승려 진우(震祐)와 쾌일(快一)이 나한전을 다시 중건하였다. 1791(정조 15) 승려 채정(采定)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 1841(순조 14) 대방, 즉 마하대복연을 중건하였다. 1860(철종 11) 대웅전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1876(고종 13) 요사와 식당을 중건하였다.

마하사의 터가 금학이 알을 품는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에 자리 잡고 있어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명당자리이다.

1965년부터 1970년 사이 승려 문성이 대웅전·응진전·대방·요사·식당을 중건하였다. 1983년 승려 지환이 응진전을 중건하였고, 1984~1985년 승려 지연이 종각을 세우고 반야암을 중창하였다. 1987년 승려 지정이 설법전을 보수하였고, 대방을 지장전으로 개축하였다. 1995~1998년 승려 경민이 대웅전과 삼성각을 중건하여 현재의 마하사 모습을 갖추었다.

대웅전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안에는 2000년에 조성한 금동 아미타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과 목각 지장탱, 목각 신중탱이 있다. 오른쪽에는 조선 후기 제작한 목조 여래 삼존 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창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솟을살 살대에 십장생 살대를 꾸며 놓은 살문구조다. 대웅전에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로 보는 재미가 솔솔한 창호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대웅전
대웅전 공포의 고풍스러운 맛은 크지 않다.
창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솟을살 살대에 십장생 살대를 꾸며 놓은 살문구조로 대웅전에 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로 보는 재미가 솔솔한 창호다 .
십장생 중 학과 소나무
십장생 중 학과 사슴, 소나무

나한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18세기 건물을 최근 중창하였다. 안에는 18세기 조성한 목조 석가여래 좌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좌우 협시하고 있다. 또 불단 좌우에 16나한상과 나한도는 석조로 목조 석가여래 좌상과 같은 시기 작품이다.

정면  3 칸 ,  측면  2 칸의 팔작지붕의 나한전
옛날부터 마하사의 십육나한이 영험하기로 유명하여 지역의 신도들이 많이 찾아와서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대웅전 맞은편 대방(大房)은 일명 마하대복연(摩訶大福緣), 지장전으로 근래에 다시 고쳤다. 대방(大房)은 스님들의 수행, 식사, 회의 등이 열리는 곳으로 현재 마하대복연, 지장전 현판이 각각 걸려있다. 맨 좌측에는 지대방 현판이 걸려있는데 사찰의 큰 방에 딸린 작은 방을 칭하는 것으로 본 건물에 시멘트로 추가적으로 만든 것 같다.

지대방은 본래 스님들의 휴게실로 스님들의 신변잡기, 종단 소식 등을 주고받는 장소로 주로 별도의 방이 없는 스님, 갓 출가한 행자나 사미들이 주된 이용자다. 어원은 벽에 지댈 수 있는 방에서 유래했으며 현재는 창고로 쓰이는 것 같다.

지대방, 마하대복연 ( 摩訶大福緣 ),  지장전

십육나한의 설화, 불씨를 구해 준 나한과 동지 팥죽」과 참새를 쫓아낸 나한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어느 해 동짓날 밤에 마하사의 불씨가 모두 꺼져 버려 팥죽을 쑤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주지가 절 부엌에 가 보니 화덕에 불이 켜져 있어 놀라는데, 그때 황령산의 봉화꾼이 와서 하는 말이 어젯밤 이 절의 상좌 아이가 불을 얻으러 왔기에 불을 주고 팥죽을 먹여 보냈다고 했다. 주지는 그리한 일이 없기에 이상하게 여기고 팥죽을 쑤어 나한전에 올라갔는데 십육나한 중 오른쪽 세 번째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뒤 소문이 나 민가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아졌다.

어느 해에는 절 마당에 참새가 많이 찾아와 절에 피해가 크자 나한전에 빌었더니 참새 한 마리가 죽어 떨어지고, 그 후로 다시는 참새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어느 해에는 불사를 거행하는데 돈이 부족하여 나한전의 불사를 행하지 않고 불사 종료 회향식을 올리려고 했다. 이때 범종을 치는데 종소리가 나무 소리로 바뀌어 신도들이 깜짝 놀라 나한전에 나가 내일 나한전 불사를 거행하겠다고 하니 종소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16나한 설화의 영향인지 전반적으로 부처님 상이 정겹고 친밀감이 느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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