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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은 대릉원(大陵園) 안에 있고 주변은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 12.4m, 직경 56.7m로 묘제는 인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이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이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으며 죽장릉 (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 미추왕의 사망 시기는 3세기인 284년으로 당시 묘제는 목곽묘로 대형의 고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조」에 의하면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장지는 능재흥륜사동(陵在興輪寺洞)인데 흥륜사(興輪寺)는 여기에서 서쪽 500m 지점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일원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내물왕의 왕비와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되어 있는데 17대 내물왕(~ 402년 2월)은 미추왕 사후 72년 만인 356년에 왕위에 올랐고, 실성왕(~ 417년 5월)은 118년 후인 402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는 후대 김씨 일족이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 사후 왕권이 김씨 일족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족보를 조작한 것이다.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삼문

36대 혜공왕 때, 미추왕을 김성시조(金姓始祖)로 추앙하기 위해 미추왕릉(味鄒王陵)을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五陵)보다 서열(序列)을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서동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및 대릉원에서 묻힌 선대 왕들의 능 위치는 실전했으나 의도적으로 미추왕릉을 지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반월성에서 나와서 대릉원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능이 미추왕릉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다. 능 앞쪽에는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다.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재위 기간 26212~ 28410, 2210개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미조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는데 성은 김씨이고 어머니는 박씨이며 갈문왕 이칠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이고 11대 조분왕의 딸이다. 미추의 조상 알지(閼智)가 계림에서 태어나자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閼智)가 세한(勢漢, 熱漢)을 낳고, 세한(勢漢)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阿道)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首留)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郁甫)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仇道)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즉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미추왕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으로 되어있다. 단지 삼국유사에서는 김알지의 아들 이름이 열한(熱漢)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세(勢)자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열(熱)자로 잘못 쓴 결과이다.

미추의 아버지인 구도(仇道)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로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왕비는 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아들이 없어 그녀의 남편인 미추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추대했고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정변으로 왕이 된 경우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261년 12월 28일 첨해왕(沾解王)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이는 첨해왕(沾解王)과, 왕비 및 가족이 살해된 것이다. 미추는 김씨 성을 가진 귀족이지 왕족은 아니고 11대 조분왕의 둘째 사위이다. 첨해왕(沾解王)이 아들이 없으면 그의 사위 중 누군가가 왕이 되는 것이 정상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왕의 사망일은 연도와 해당 월만 기록하지 일자를 기록하지 않는다.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은 백제와의 싸움에 일생을 바쳤고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였다. 재위 23년만인 284년에 죽으니 대릉(大陵)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유사에는 능의 위치가 흥륜사(興輪寺) 동쪽으로 되어 있다. 그의 능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 불리게 된 배경은 삼국유사 기이(紀異)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편에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 함)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이다. 대대로 현달(顯達)하고, 또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어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지금 세상에서 미추왕(未鄒王)의 능(陵)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金氏)로서 처음 왕위(王位)에 오른 때문이며, 후대(後代)의 모든 김씨 왕(金氏 王)들이 미추(未鄒)를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 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禮)王)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동원했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신라군을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군사와 힘을 합해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댓잎만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와 나라에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고 불렀다.

대릉원 내에 있는 검총으로 유일하게 무덤 옆에 대나무가 있다.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武器)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엇인가 진동(振動)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 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臣)은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한다. 왕은 대답한다.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公)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서 김유신공(金庾信公)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金公)을 위해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公)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平壤)을 토벌(討伐)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 : 내림(奈臨),골화(骨火),혈례(穴禮))과 함께 제사 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序列)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고 한다.」
삼국사기 新羅本紀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주요 일대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즉위 원년 3월, 대궐 동쪽 못에 용이 나타났다. 7월, 금성 서문에 불이 났고, 인가 삼백여 호가 연이어 불탔다.
2년 정월,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다.

3년 2월, 왕이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황산에 행차하여 노인 및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5년 가을 8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출격하였다. 적들은 패주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놓고 왕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으며, 또한 사신 다섯 명을 파견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11년 2월,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15년 2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고 여겨 이에 따르지 않았다.

17년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파진찬 정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19년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였다.
20년 정월, 홍권을 이찬, 양질을 일길찬, 광겸을 사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9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22년 9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10월에는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23년 2월, 왕이 서쪽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대릉(大陵, 죽장릉[竹長陵])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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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8대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은 경주 시내에서 동북방향 안태봉 남쪽 능선 현곡면 오류리 산48번지(해발 97.8m)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직경 14.2m, 봉분 높이 .4m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인데 199784일 도굴하려다 석실내부에는 진입하지 못하고 실패한 것을 발견되어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임을 확인됐다.

(陵)의 호석(護石, 둘레돌)은 면석(面石, 돌판)과 탱석(撑石, 버팀돌)으로 이루어져 있고 면석과 면석사이에는 24개의 탱석을 끼워 넣고 그 가운데 12개의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무복(武服)을 입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호석(護石) 밖에는 돌기둥, 석난간, 회랑 및 상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또한 능(陵)변에는 설치하는 석인상과 석사자(돌사자)도 설치되어 않았다. 앞에 있는 축대와 통로는 1975년에 만든 것이다.

축대와 통로는 1975년에 만든 것이다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 기법은 저부조로 거의 평면에 가깝게 조각하여 마치 선각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신라 미술에서 저부조 및 평면화는 9세기 중엽에 유행했으므로 이 시기에 조성된 능(陵)이다. 그리고 현재 확인 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진 능(陵) 중 시기적으로 마지막에 조성되었다.

경주 지역에 있는 신라 왕릉 가운데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은 것은 성덕왕릉에 처음 등장하였고 이후 김유신 묘,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구정동 방형분, 진덕여왕릉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량부(沙梁部)는 현재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이 능(陵)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4km 이상 떨어져 있다. 현재의 능(陵)은 조선 영조 6년 김씨 일족에 의해 비정되었다.

그럼 실제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은 어디에 있을까? 일부학자는 사량부(沙梁部)가 경주 남천 남쪽 서남산 일대이므로 남산 약수곡과 도당산 서북록 사이에 있는 도당산 고분(식혜곡 고분)을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형은 타원형으로 봉분 높이 6.5m, 긴 직경 19.8m, 짧은 직경 16.1m이다.

신상(申像)으로 오른 손에 칼을 잡고 있다.
오상(午像)으로 오른 손에 긴 창을 잡고 있다.
미상(未像)으로 왼 손에 긴 창을 잡고 있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한()나라 중기 때 방위(方位)와 시간에 대응시키고 자(), (), (), (), (), (), (), (), (), (), (), ()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당()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로 나타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능 주변에 있는 석재들

신라 28진덕여왕(眞德女王 : 재위기간 647년 정월 ~ 6543, 72개월)

그녀의 이름은 승만(勝曼)이며, 진평왕(眞平王)의 동복 아우 갈문왕(葛文王) 국반(國飯)의 딸이자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이다. 신라의 두 번째 여왕이면서 성골(聖骨)로서는 마지막 왕이다. 어머니는 박씨 월명부인이다. 승만은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척이었고, 팔을 늘이고 있으면 그 길이가 무릎을 넘었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이 갑자기 죽자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의 도움으로 왕이 되어 비담(毗曇)의 난을 수습했고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정치 안정을 도모했다. 김춘추(金春秋)는 당 태종(太宗)의 마음을 움직여 군사 지원을 받아냈고 이때부터 당으로부터 내정 간섭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의관을 중국식으로 하고 독자 연호인 태화(太和)를 당 고종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 조례(朝禮)를 행했고,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즉위 원년 647년 봄 정월 17, 비담(毗曇)을 목 베어 처벌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伊湌) 알천(閼川)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하고, 대아찬(大阿湌)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춘천)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당 태종(太宗)이 지절사(持節使)를 보내 전왕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했다. 그리고 왕을 주국(柱國)으로 삼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7,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은공에 사례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로 고쳤다. 10,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3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항하게 하였다.

그들은 악전고투로 기운이 다하였다. 그런 가운데 유신의 부하 비녕자(丕寧子)와 그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격렬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용감하게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11,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2,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3,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경을 침범하여 요거(腰車, 상주)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이를 걱정하여 압독주(押督州) 도독(都督) 유신(庾信)으로 하여금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유신(庾信)이 군사들을 격려하여 작전을 시작하려 하자 의직(義直)이 저항하였다.

유신(庾信)이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협격하자, 백제 군사가 패주하였다. 유신(庾信)은 도망가는 백제 군사를 추격하여 거의 모두 죽였다. 왕이 기뻐하면서 군사들에게 공훈에 따라 상을 주었다.

겨울, 감질허(邯帙許)를 당 나라에 보내 조회하도록 하였다. 태종(太宗)이 어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묻게 하였다. “신라가 신하의 자격으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당과 다른 연호(年號)를 사용하는가?” 질허(帙許)일찌이 대국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으므로, 선조 법흥왕(法興王)이래 우리 나름대로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다. 만약 대국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다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겠는가?”라고 말했다.

태종(太宗)이 이를 수긍하였다. 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汪)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조회케 하였다. 태종(太宗)은 광록경 유형을 교외까지 내보내 맞이하면서 그들을 위로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태종(太宗)이 춘추의 풍모가 영특하며 늠름한 것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春秋)는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요청하였다. 태종(太宗)이 이를 허락하고, 당의 황제가 지은 온탕(溫湯) 및 진사비(晉祠碑)의 비문과 새로 지은 진서(晉書)를 주었다.

태종(太宗)이 하루는 춘추(春秋)를 연회에 불러 황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면서 그대에게 무슨 소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춘추(春秋)가 무릎을 꿇고 신의 나라가 멀리 바다 한 구석에 있어, 대국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제가 강성하고 교활하여 침략을 일삼아 왔습니다. 더구나 지난해에는 대군을 거느리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수십 개의 성을 점령하여, 대국에 입조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사를 보내 그 흉악한 무리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육로와 수로를 거쳐 술직하는 일도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종(太宗)이 크게 동감하고 군사의 파견을 승낙하였다.

춘추(春秋)는 또한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 중국의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했다. 이에 태종(太宗)은 내전으로 하여금 진귀한 의복을 춘추(春秋)와 수행원들에게 하사하였다. 태종(太宗)은 조칙을 내려 춘추(春秋)를 특진에, 문왕(文汪)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에 제수하였다.

춘추(春秋)가 귀국할 때, 태종(太宗)3품 이상의 관리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그들과 전별하였다. 태종(太宗)이 그들을 우대하는 예절이 이와 같이 극진하였다. 춘추(春秋)는 황제에게 저의 자식이 일곱입니다. 원컨대 그 중의 하나인 문왕(文汪)으로 하여금 성상의 곁을 떠나지 않는 숙위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말하였다. 태종(太宗)은 곧 그의 아들 문왕(文汪)과 대감(大監)에게 숙위를 명하였다.

춘추(春秋)가 귀국하는 도중에 바다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다. 이렇게 되자 춘추(春秋)의 시종인 온군해(溫君解)가 큰 모자를 쓰고 대의를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다. 순라병(巡邏兵)은 그를 춘추(春秋)로 알고 잡아 죽였다. 춘추(春秋)는 작은 배를 타고 신라로 돌아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군해(君解)에게 대아찬(大阿湌)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3, 봄 정월에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였다 8,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石吐)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왕은 대장군 유신(庾信)과 장군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에게 대항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들은 장소를 옮겨 가며 열흘이 지나도록 싸웠으나 백제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도살성(道薩城) 밑에 진을 쳤다. 유신(庾信)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정탐을 하러 올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모르는 체 하고, 절대로 누구인가를 묻지 말라!” 유신 (庾信)은 곧바로 사람을 시켜 진중을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결연한 자세로 움직이지 말라. 내일 구원병이 온 후에 결전을 하겠다.”라고 말하도록 하였다. 첩자가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殷相)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

은상(殷相) 등은 증원병이 온다고 생각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庾信) 등이 진격하여 적을 크게 쳐부수고, 장령 백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군졸 8980명의 머리를 베고, 군마 만 필을 얻었다. 노획한 병기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4년 여름 4, 교서를 내려 진골로서 현직에 있는 자는 상아홀()을 들게 하였다. 6,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를 이긴 사실을 보고하였다. 왕은 비단에 5언시 태평송(平頌)을 써서, 이를 춘추(春秋)의 아들 법민(法敏)으로 하여금 당 나라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당 나라 왕업을 열었으니 높고 높은 황제의 앞 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학문을 닦아 백대에 이어지리라.

하늘의 뜻 받드니 은혜의 비 내리고 땅의 만물 다스려 빛나는 이치 얻었네.

어질음 깊고 깊어 일월과 어울리고, 시운도 따라오니 언제나 태평하네.

큰 깃발 작은 깃발 저리도 빛나며, 징소리 북소리 어찌 저리 쟁쟁한가?

외방의 오랑캐 황제 명령 거역하면, 하늘의 재앙으로 멸망하리라.

시골이나 도시에나 풍속이 순박하고, 멀리서 가까이서 좋은 일 다투어 일어나네.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오성이 만방을 도는구나.

산신의 뜻으로 재상이 보필하고, 황제는 충신 인재를 믿으시니,

삼황과 오제의 덕이 하나가 되어 우리 당 나라를 밝게 비추리로다.

고종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法敏)에게 대부경(大府卿)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이 해에 처음으로 중국의 연호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5년 봄 정월 초하루에 왕이 조원전(朝元殿)에 나아가 백관들의 신년 하례를 받았다. 신년 하례의 예식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2,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고, 파진찬(波珍湌) 죽지(竹旨)를 집사중시(執事中侍)로 임명하여 기밀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파진찬(波珍湌) 김인문(金仁問)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이어서 숙위(宿衛)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

6년 봄 정월에 파진찬(波珍湌) 천효(天曉)를 좌리(左理) 방부령(方府令)으로 삼았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711,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金總布)를 바쳤다.

83,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대상승(大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사절로 삼아, 황제의 신임표를 가지고 와서 조문케하였으며, 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비단 3백 필을 부의로 주었다.

시조 혁거세(赫居世)로부터 진덕왕(眞德王)28대 왕을 성골(聖骨)이라고 불렀으며, 무열왕(武烈王)으로부터 마지막 임금까지를 진골(眞骨)이라고 불렀다. 당 나라 영호징(令狐澄)신라기에는 그 나라에서는 왕족을 제 1골이라 부르고, 나머지 귀족을 제 2골이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1권 기이(紀異) 1 진덕왕(眞德王)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나라에 바치게 했다. ()나라 황제(皇帝)는 이것을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태평가(太平歌)의 가사(歌詞)는 이러했다.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 가는 초입

큰 당()나라 왕업(王業)을 세우니, 높고 높은 임금의 계획 장하여라.

전쟁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문치(文治)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좋은 비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人德)은 해와 달에 비기겠고, 돌아오는 운수는 요순(堯舜)보다 앞서네.

깃발은 어찌 그리 번쩍이는가, 징소리 북소리는 웅장도 하여라.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령 거역하는 자는 칼 앞에 자빠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淳厚)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두루 비치네.

산악(山嶽)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황제(皇帝)는 충량(忠良)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의 덕()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皇帝)를 밝게 해 주리.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 가는 초입에 있는 버들저수지

왕의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에 모여서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그를 수석(首席)에 앉혔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亏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조례(朝禮)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이때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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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42대 흥덕왕릉(興德王陵)은 안강 어래산(魚來山)의 동쪽 자락인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라 왕릉 가운데 경주 시가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직경 20.7m, 봉분 높이 6.4m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인데 호석(護石, 둘레돌)은 면석(面石, 돌판)과 탱석(撑石, 버팀돌)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무복(武服)을 입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안강읍 육통리 산4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42대 흥덕왕릉(興德王陵)

경주 지역에 있는 신라 왕릉 가운데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은 것은 십이지신상 첫 출현인 성덕왕릉을 비롯하여 김유신 묘,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구정동 방형분, 진덕여왕릉이 있다.

호석(護石) 밖에는 돌기둥을 세웠고 석난간은 모두 없어 졌으며, 호석과 돌기둥 사이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서 회랑을 조성하였다. () 주위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여 능()을 수호하고 있다.

호석(護石) 밖에는 돌기둥을 세웠고 석난간은 모두 없어 졌으며, 호석과 돌기둥 사이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서 회랑을 조성하였다.

()의 남쪽에는 상석(床石)을 설치하였는데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탁자형상석은 33대 성덕왕릉(聖德王陵)에 처음 등장했는데 이전에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조립하여 상석(床石)을 설치하였다. 탁자형상석은 흥덕왕릉(興德王陵)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능(陵) 주위 네 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 마리씩 배치하여 능(陵)을 수호하고 있다.

상석 옆면의 앞뒤, 좌우는 4매의 판석을 조립하였고 앞뒤 면에는 안상(眼象) 2개를, 좌우 면에는 1개를 각각 모각하였다. 안상(眼象)의 형상은 첨정(尖頂)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되게 각각 3개의 호형(弧形)을 수평적으로 모각하였다. 상석 윗면은 1매의 판석을 조립하였다. 안상(眼象)은 통일신라 초기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함에 처음 나타났고 탁자형상석의 안상(眼象)8세기 중엽 33대 성덕왕릉(聖德王陵)에 등장했고 흥덕왕릉(興德王陵)이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석(床石)은 제수(祭需)를 진설하는 공간, 제상(祭床)과 제사를 지내는 곳이자 능(陵)의 정면을 나타내는 방향 역할을 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제단(祭壇)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시대에서 정자각(亭子閣)이 등장하면서 상석(床石)은 혼유석(魂遊石)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정자각(亭子閣)에서 제수를 차리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용도와 기능이 상석(床石)에서 정자각(亭子閣)으로 바꿔졌다. 혼유석(魂遊石) 의미는 죽은 자의 영혼이 거처하는 곳이다.

상석의 방향은 적석목곽분과 중고기의 능에서는 동쪽에 설치하는데 이는 시신의 위치가 동서방향으로 머리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횡혈식석실분에서 남쪽에 설치되어 있는데 현실을 통하는 연도가 남쪽에 있기 때문이다.

능(陵)의 남쪽에는 상석(床石)을 설치하였는데 탁자형상석으로 두꺼운 큰 판석 5매를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의 초입에는 동서로 사이를 화표석(華表石) 1, 호인상(胡人像) 1, 문인상(文人像) 1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고 화표석(華表石)과 호인상(胡人像)은 원성왕릉(元聖王陵)에 처음 세웠다.

능(陵)의 초입에는 먼저 맞이하는 화표석(華表石) 1쌍

화표석(華表石)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도 아쇼카 석주 형식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서 받아들인 후 당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완성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화표석(華表石)은 죽은 자와 산자의 경계 표시로 죽은 자의 부활을 염원하고 후손들의 번창을 상징하는 것

호인상(胡人像)은 원성왕릉(元聖王陵)에 있는 호인상(胡人像) 처럼 서역인(西域人)의 모습을 하고 있다. () 앞 오른쪽에는 흥덕왕(興德王)의 비()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만 손상된 채 남아있고 비신(碑身)과 이수(螭首, 비석의 머릿돌)는 없다.

능 ( 陵 ) 의 초입에는  동서로 사이를 화표석 ( 華表石 ) 1 쌍 ,  호인상 ( 胡人像 ) 1 쌍 ,  문인상 ( 文人像 ) 1 쌍을 차례로 마주보도록 배치하였다.
호인상(胡人像)은 원성왕릉(元聖王陵)에 있는 것처럼 서역인(西域人)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인상(文人像)

()의 비, 즉 능비(陵碑)와 귀부龜趺)의 첫 등장은 무열왕릉에 등장했고 현재 까지 확인 된 능비는 있는 능과 묘는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흥덕왕릉, 김유신 묘, 김인문 묘 등 6기가 있다.

흥덕왕(興德王)의 비(碑)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19778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상당수의 비편이 발견되었고 그중에서 이수의 제액(題額)에서 흥덕(興德)이라는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흥덕왕릉(興德王陵)임이 입증되었다.

비신(碑身)과 이수(螭首, 비석의 머릿돌)는 없다.

삼국유사 왕력(王曆)에 흥덕왕(興德王)의 능()이 안강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있는데 왕비 장화부인(章和王妃)과 합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하였다고 되어있다.

1977년 8월 발굴조사에서 이수의 제액(題額)에서 흥덕(興德)이라는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흥덕왕릉(興德王陵)임이 입증되었다.

능원 내 석물배치는 당의 능묘제도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무열왕릉의 능비 이후 신라인의 뛰어난 조각수법과 창의적인 발상으로 예술적 경지로 완비 된 것이 원성왕릉이다. 이후 헌덕왕릉, 흥덕왕릉에 잠깐 계승된 뒤 쇠퇴기에 접어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십이지신상과 호인상을 호석과 능전에 배치한 것은 신라인의 창조적인 발상이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한()나라 중기 때 방위(方位)와 시간에 대응시키고 자(), (), (), (), (), (), (), (), (), (), (), ()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자상(子像)은 두 손이 칼을 잡고 있다.
축상(丑像)은 왼 손이 칼을 잡고 있다.
인상(寅像)은 오른 손이 칼을 잡고 왼쪽 어깨 위로 칼날을 사선으로 세우면서 왼손을 사용하여 칼날 끝을 잡고 있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당()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로 나타냈다.

묘상(卯像)은 오른 손이 양날을 가진 도끼를 잡고 있다.
진상(辰像)은 두 손이 보주를 잡고 있다.
사상(巳像)은 오른 손이 보주를 잡고 있고 왼손은 칼을 잡고 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오상(午像)은 두 손이 칼을 잡고 있다.
미상(未像)은 왼 손이 칼을 잡고 오른쪽 어깨 위로 칼날을 사선으로 세우면서 오른손을 사용하여 칼날 끝을 잡고 있다.
신상(申像)은 왼 손이 칼을 잡고 있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유상(酉像)은 두 손이 양날을 가진 도끼를 잡고 있다.
술상(戌像)은 오른 손이 무기를 잡고 있다.
해상(亥像)은 왼 손이 금강저을 잡고 있다.

신라 42흥덕왕(興德王 : 재위기간 82610~ 83612, 102개월)

이름은 수종(秀宗)이지만, 그 후에 경휘(景徽)로 바꾸었고 41대 헌덕왕의 동복 동생이다. 형인 헌덕왕(憲德王)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상대등(上大等)으로 국정을 주도하였고 헌덕왕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인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金氏)이고, 왕비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 金氏)인데,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하고 이를 그리워하여 이후로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골품(骨品)에 따라 복식(服飾) 착용에 제한을 두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하였다. 즉위 3(828) 궁복(弓福), 장보고(張保皐)가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하는데 중국 당나라 서주(徐州)에서 소장(小將)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게 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다.

즉위 826년 당해 12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사망하자,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追封)하였다. 왕은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말했다.

짝을 잃은 새에게도 자기의 짝을 잃은 슬픔이 있는데, 좋은 배필을 잃고 나서 어찌하여 무정스럽게도 바로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고,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내시뿐이었다.

즉위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당 문종은 헌덕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회를 폐지하고 태자좌유덕겸어사중승(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 원적(源寂)을 지절사(持節吊)로 파견하여 조의를 표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이어 새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使<新羅>)’으로 책봉하고, 어머니 박씨를 대비로,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3, 고구려의 중 구덕이 당 나라에 갔다가 불경을 가지고 오자, 왕이 여러 절의 중을 소집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8, 금성이 낮에 나타나고, 서울에 큰 가뭄이 들었다. 시중 영공이 퇴직하였다.

3년 봄 정월, 대아찬(大阿湌) 김우징(金祐徵)이 시중(侍中)이 되었다2,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4, 청해 대사(淸海 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였다(一名 保臯). 그는 당 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하였다. 그는 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지금의 완도[莞島])를 수비하게 되었다.

한산주 표천현(漢山州 瓢川縣)에 사는 요망스러운 자가, 빨리 부자가 되는 술수가 있다고 말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에 미혹되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옳지 않은 방도로 많은 사람을 미혹시키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 그 자를 먼 섬으로 쫓아 버리라라고 말하였다.

12,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문종(文宗)이 인덕전麟德殿에서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베풀어 주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당 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다.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善德王) 때부터 있었으나, 크게 유행한 것은 이 시기부터였다.

42, 당은군(唐恩郡)을 당성진(唐城鎭)으로 바꾸고, 사찬 극정(極正)을 파견하여 이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54, 왕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기도를 드리고 이어서 중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12,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고  시중侍中) 우징(祐徵)이 퇴직하고, 이찬(伊湌) 윤분(允芬)이 시중(侍中)이 되었다2, 왕자 김능유(金能儒)와 중 아홉 명을 당 나라에 보냈다7, 당 나라에 갔던 진봉사(進奉使) 능유(能儒) 등 일행이 귀국하다가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11,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땅의 빛깔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 왕은 정전(正殿)에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특사하였다. 7월에야 비가 내렸다8,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10월에 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8년 봄, 나라에 대 기근이 들었고  4, 왕이 시조묘(始祖廟)에 참배하였다. 10,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두 번째 꽃이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11, 시중(侍中) 윤분(允芬)이 사직하였다.

9년 봄 정월, 우징(祐徵)을 다시 시중(侍中)으로 임명하였다9, 왕이 서형산(西兄山)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10, 왕이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하면서, 노인과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과 베를 하사하였다.

102, 아찬(阿湌)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하였다. 시중(侍中) 우징(祐徵), 그의 아버지 균정이 재상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대아찬(大阿湌) 김명(金明)이 시중(侍中)을 맡았다.

11년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辛丑日)에 일식(日食)이 있었고 왕자 김의종(金義琮)을 당에 보내 사은하고, 아울러 숙위宿衛를 들게 하였다6,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7,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12,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合葬)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2권 기이(紀異) 2 흥덕왕(興德王)과 앵무새

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은 보력(寶曆) 2년 병오(丙午; 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자 홀로 남은 수놈은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는다.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에 거울을 걸어 놓게 했더니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는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앵무새를 두고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가사(歌辭)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 5권 효선(孝善) 9 손순매아(孫順埋兒) 흥덕왕대(興德王代)

손순(孫順)은 모량리(牟梁里) 사림이니 아버지는 학산(鶴山)이다. 아버지가 죽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運烏)였다. 손순에게는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손순은 민망히 여겨 그 아내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가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그런데 아이가 어머님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서 어머님은 굶주림이 심하시니 이 아이를 땅에 묻어서 어머님 배를 부르게 해드려야 겠소.” 이에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모량리牟梁里 서북쪽에 있는 산) 북쪽 들에 가서 땅을 파다가 이상한 석종(石鐘)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히 여겨 잠깐 나무 위에 걸어 놓고 시험삼아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은은해서 들을 만하다.

아내가 말했다.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필경 이 아이의 복인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남편도 이 말을 옳게 여겨 아이와 석종(石鐘)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종을 들보에 매달고 두드렸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이 이 소리를 듣고 좌우를 보고 말했다. “서쪽 들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도 멀리 들리는 것이 보통 종소리가 아니니 빨리 가서 조사해 보라.” 왕의 사자(使者)가 그 집에 가서 조사해 보고 그 사실을 자세히 아뢰니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郭巨)가 아들을 땅에 묻자 하늘에서 금솥을 내렸더니, 이번에는 손순이 그 아이를 묻자 땅 속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전세(前世)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순후한 효성을 숭상했다. 이에 손순은 예전에 살던 집을 희사해서 절로 삼아 홍효사(弘孝寺)라 하고 석종을 모셔 두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후백제의 횡포한 도둑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서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아 있다. 그 종은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지량평(枝良坪)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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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1대 헌덕왕릉(憲德王陵)는 분황사 동북쪽 소금강산과 북천(北川)사이 들판의 송림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직경 25.9m, 봉분 높이 6.3m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인데 호석(護石, 둘레돌)은 면석(面石)과 탱석(撑石, 버팀돌)으로 각각 48개로 이루어져 있다. 호석 밖에는 돌기둥을 54개를 세웠고 돌기둥 사이에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호석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서 회랑을 조성하였다.

호석(護石)의 탱석(撑石)에는 평복(平服)을 입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져 있고 쥐(), (), (), 토끼(), 돼지() () 5개만 남아 있는데 손에는 각종 무기를 들고 머리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다. 나머지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기록에 따르면 조선 영조 18(1742) 822일 태풍과 비가 몰아쳐 북천(北川)이 범람하면서 유실되었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당해 9월에 영조에게 사실을 아뢰었으며 그로 인해 경상도관찰사가 수축하였다.

분황사 동북쪽 소금강산과 북천(北川)사이 들판의 송림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제41대 헌덕왕릉(憲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에 사용 된 면석과 탱석(撑石)은 이전 시기의 왕릉보다 각각 12, 24개가 더 들어간 것으로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경주 지역에 있는 신라 왕릉 가운데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은 것은 십이지신상 첫 출현인 성덕왕릉을 비롯하여 김유신 묘,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구정동 방형분, 진덕여왕릉이 있다.

쥐 상(子像)은 암좌(岩座) 위에 왼팔은 조각하지 않고 옷소매 속으로 숨기고 오른 손은 금강저를 들고 있는데 S자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소 상(丑像)은 다섯 상 가운데 유일하게 암좌 같은 대좌(臺座)가 없고 오른 손에 무기를 잡고 어깨 위로 하여 자연스럽게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범 상(寅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토끼 상(卯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무기를 잡고 있다.

돼지 상(亥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환두대도(環頭大刀)의 끝을 잡고 있는데 S자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한()나라 중기 때 방위(方位)와 시간에 대응시키고 자(), (), (), (), (), (), (), (), (), (), (), ()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당()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로 나타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돼지 상(亥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환두대도(環頭大刀)의 끝을 잡고 있는데 S자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소 상(丑像)은 다섯 상 가운데 유일하게 암좌 같은 대좌(臺座)가 없고 오른 손에 무기를 잡고 어깨 위로 하여 자연스럽게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쥐 상(子像)은 암좌(岩座) 위에 왼팔은 조각하지 않고 옷소매 속으로 숨기고 오른 손은 금강저를 들고 있는데 S자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토끼 상(卯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무기를 잡고 있다.
범 상(寅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헌덕왕릉(憲德王陵)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과 마찬가지로 능의 전면에는 상석, 석사자상, 석인상(石人像), 호인상(胡人像), 화표석(華表石) 등을 배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 있었던 서역인(西域人) 얼굴의 무인상을 조각한 호인상(胡人像)은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있다.

1970년대 경주 고도 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정비, 보수함에 호석 일부와 난간을 새로 만들었다. 최근에 설치 된 탁자식 형태의 상석은 흥덕왕릉의 상석을 모방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헌덕왕(憲德王)이 죽자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천림사(泉林寺)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능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천림사 터로 보고 있다.

최근에 설치 된 탁자식 형태의 상석은 흥덕왕릉의 상석을 모방하였다.

신라 41헌덕왕(憲德王) : 재위기간 8097~ 82610, 173개월)

이름은 언승(彦昇)이고 39대 소성왕(昭聖王)의 동복 동생이다. 아버지는 38대 원성왕의 큰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이다. 왕비는 귀승부인(貴勝夫人)인데 각간 예영(禮英)의 딸이다.

소성왕(昭聖王)이 죽은 뒤 40대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였고 애장왕이 성장하여 친정을 하려 하자, 애장왕 10(809) 대등(上大等)으로 있을 때 동생 이찬 수종, 또는 제옹(42대 흥덕왕), 조카 제륭(43대 희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이보다 앞서 원성왕 6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갔다가 대아찬의 작위를 받았고, 7년에 반역하는 신하를 처형하여 잡찬이 되었고, 10년에 시중이 되었고, 11년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12년에 병부령이 되었고, 애장왕 원년에 각간이 되었고, 2년에 어룡성 사신이 되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대등이 되었다가, 809년에 난을 일으켰으며, 애장왕이 살해되고 왕위에 올랐다. 이찬 김숭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호석(護石, 둘레돌)밖에는 돌기둥을 54개를 세워 난간을 설치하였고, 호석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서 회랑을 조성하였다.

재위기간 동안에 뚜렷한 정책이나 정치개혁이 보이지 않으나 애장왕 당시의 개혁정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농사를 권장하고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다. 현재의 대동강인 패강(浿江) 주변에 장성(長城)을 쌓았고, 822년에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천림사(泉林寺) 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즉위 14(822년) 신라 최대 반란인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왕은 이찬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 우징(祐徵)등이 주축이 된 토벌군으로 하여금 난을 평정하도록 했고 김헌창은 결국 웅진성(공주)에서 10일동안 저항하다가 자살했다. 3년 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북한산주 도독 총명(聰明)에게 토벌되어 주살되었다. 다음해(826년) 헌덕왕은 즉위17년 만에 죽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호석(護石)의 탱석(撑石)에는 평복(平服)을 입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져 있고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돼지(亥) 상(像) 등 5개만 남아 있다.

 

즉위 원년(809) 8,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이찬 김창남 등을 당에 보내 이전 왕의 죽음을 알렸다. 당 헌종은 직방원외랑섭어사중승 최정을 정사로, 인질로 가있던 김사신을 부사로 파견하면서, 황제의 신임표를 지니고 가서 조의를 표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새로운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의 아내 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며, 대재상 김숭빈 등 3명에게 문극을 주었다.

2년 봄 정월,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2,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람을 보내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7, 유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갔다.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10, 왕자 김헌장을 당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순종을 위하여 명복을 빈다.”고 하였다. 유성이 왕량 성좌에 들어갔다.

3년 봄 정월, 시중 양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원흥이 시중이 되었다2, 이찬 웅원을 완산주 도독으로 임명하였고 4, 왕이 처음으로 평의전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4년 봄, 균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이찬 충영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9, 급찬 숭정을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5년 봄 정월, 이찬 헌창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2, 시조 묘에 참배하였다. 현덕문에 불이 났다.

63,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왕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이찬 충영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5,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왕이 사자를 보내 수재를 당한 주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간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였다8, 무진주 도독 헌창을 중앙으로 불러 시중으로 임명하였다10, 대사 검모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7년 봄 정월, 당에 사신을 보냈다. 헌종이 그를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8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고,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8년 봄 정월, 시중 헌창이 외직으로 나가 청주 도독이 되었고, 장여가 시중이 되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한산주 당은현에서 길이 10, 넓이 8, 높이 35촌이 되는 큰 바위가 저절로 1백여 보 이동하였다. 6,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9년 봄 정월, 이찬 김 충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5,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고 7월이 되자 비가 내렸다10,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왕은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왕자 김 장렴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11년 봄 정월,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찬 헌정이 병이 나서 걷지 못하므로, 나이 70세가 안되었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 상대등 김숭빈이 사망하자, 이찬 김 수종이 상대등이 되었다. 3, 초적들이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7, 당 나라 운주 절도사(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다. 헌종이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 조공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왕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 김웅원(金雄元)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12,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11,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목종이 인덕전에서 사신을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 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가 있었다4, 시중 김 충공이 사망하자 이찬 영공이 시중이 되었다. 청주 도독 헌창이 웅천주 도독이 되었다. 7, 패강 남천에 있는 두 돌이 서로 맞붙었다1229, 큰 우레가 있었다.

14년 봄 정월, 왕의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2,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다.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왕은 이찬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 우징(祐徵)등이 주축이 된 토벌군으로 하여금 난을 평정하도록 했고 김헌창은 결국 웅진성(공주)에서 10일 동안 저항하다가 자살했다.

413, 달빛이 핏빛 같았다. 712, 해에 흑점이 생겨 남북을 가리켰다. 12, 주필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5년 봄 정월 5, 서원경에,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졌다. 9일에는 흰 색검은 색붉은 색의 세 가지 벌레가 눈밭을 기어 다니다가 햇볕이 나자 사라졌다원순평원 두 각간이 나이 70세가 되어 은퇴하고자 하였다. 왕은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 수성군과 당은현을 합쳤다.

17년 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적 수신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였다.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우기 위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해왔다.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처형하였다3, 무진주 마미지현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몸이 둘, 팔이 넷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때,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5, 왕자 김흔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이전에 와있는 대학생 최이정김숙정박계업 등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고, 새로 입조한 김 윤부김 입지박 양지 등 열두명을 숙위로 머물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공부를 하게하고, 홍려시에서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여 주소서.” 황제가 이를 따랐다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 대양관군에 사는 내마 황지의 아내가 아들 둘과 딸 둘을 한 번에 낳았다. 그녀에게 벼 1백 석을 주었다.

187, 우잠 태수 백영으로 하여금 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10,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신라 최대의 반란, 김헌창(金憲昌)의 난(822)

헌덕왕 14(서기822) 3,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자기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옛 백제 땅인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일으킨 난이다.

김주원(金周元)은 태종 무열왕 셋째아들인 김문왕(金文王)5세손으로 37대 선덕왕(宣德王)이 후사가 없이 병으로 죽자 김경신(金敬信)과의 왕위다툼에서 패배하여 강원도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퇴거(退去)하였고 강릉 김씨(江陵 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 세력으로 남았다. 후삼국 시대 명주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김순식(金順式, 뒤에 王順式]이 그의 후손이다. 이들은 굴산사(掘山寺)의 사굴산파(闍掘山派)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김순식 가문은 고려에 귀의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이 왕위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7대 선덕왕(宣德王)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지정의 난을 함께 수습한 공신 김경신을(金敬信) 중용하여 상대등으로 삼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왕은 왕족인 김주원(金周元)을 등용하였다. 그러자 김경신(金敬信)이 꿈을 꾸었다. 사모를 벗고 갓을 쓴 채 12줄 거문고(絃琴)를 끌어안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어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심히 걱정했다. 그런데 여삼(餘三)이라는 자가 찾아와 이렇게 해몽을 해주었다.

"사모를 벗은 것은 더 이상 높은 자가 없다는 것이고,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줄 거문고를 않은 것은 12대 손까지 대를 이을 징조이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징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김경신(金敬信)은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한 등급 위에 김주원(金周元)이 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일세."

그런데 이 꿈을 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났다(785). 왕의 아들이 없었으므로,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金周元)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주원(金周元)의 집이 북천(北川)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金周元)이 북천(北川)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김경신(金敬信)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위(元聖王, 신라 38대왕)에 오르게 되었다.

김주원(金周元)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은 계속 중앙 관직에 남아 활동하였으며, 807년에 이찬으로서 시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실세요, 실력자인 김언승(金彦昇)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급성장 하였다. 그런데 김언승(金彦昇)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신라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이찬 김헌창(金憲昌)은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8131월에 무진주의 도독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817년 가을에는 흉년으로 굶어죽은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래저래 살아가기 힘든 백성들이 819년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821년에도 봄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 중에는 자손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틈을 타서 평소 자기 부친 김주원(金周元) 이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자신이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8223월에 난을 일으켰다.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사벌주(상주), 청주(진주)4주 도독과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이때 청주 도독 향영은 불복하고 추화군으로 도망쳐 버렸다. 게다가 한산(경주), 우두(춘천), 삽량(양산), 패강, 북원 등에 있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항하는 중앙 귀족들의 연합 세력에 의해 반란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헌덕왕은 우선8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왕도 팔방을 수비하게 한 다음, 일길찬 장웅을 먼저 출동시키고, 이어 잡찬 위공과 파진한 제릉을 보냈으며, 그 다음에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 및 대아찬 우징 등에게 군사를 주어 적을 막아 치게 하였다. 또한 각간 충공과 잡찬 융응에게는 문화 관문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 김헌창(金憲昌)도 반란군을 정비한 다음 요소요소에 장수들을 파견해 왕군에 대비시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잘 훈련된 중앙 군대의 정규군을 이길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해 주지 아니 했기 때문에, 왕군과의 싸움에서 계속 밀리게 되었다.

왕군은 먼저 장웅이 도동현에서 반란군과 접전하여 격파시킨 것을 필두로, 위공과 제릉이 장웅과 합세해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해 역시 승리를 장식한 다음, 속리산으로 군사를 돌려 그곳의 적도 격멸시켜 버렸다. 왕군의 균정 등도 성산에서 싸워 반란군을 격멸시킨 다음, 3군을 웅진으로 모아 반란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반란군의 주력 부대는 격파되었다.

이때 김헌창(金憲昌)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여 성으로 도망쳐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마지막 저항을 했다. 왕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헌창(金憲昌)은 사태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며 자기는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감지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성을 함락한 왕군은 김헌창(金憲昌)의 시신을 찾아내어 주형을 가했으며, 그 친족과 남은 무리 239명을 모두 처형했다. 이때가 822년이었다.

그러나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헌창 (金憲昌) 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825(헌덕왕 17) 1월에 김헌창(金憲昌)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적(여주), 수신 등에서 모은 농민군 1백여명과 함께 난을 일으켜, 평양(양주) 도읍을 세우기 위해 우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한산주 도독 총명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김범문(金梵文) 부자 2대에 걸쳐 일어난 모반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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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6대 진평왕릉(眞平王陵)은 낭산의 동쪽이자 명활성 남서쪽 구릉성 대지인 경주시 보문동 60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 높이 8.4m, 봉분 지름 40m로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로 추정된다()의 호석(둘레돌)은 검은색을 띤 괴석과 화강암을 혼용하여 능을 둘렀는데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능 앞에는 최근에 조선 왕릉의 혼유석을 모방한 상석과 의자형 혼유석이 설치되어있다.

조선 영조 6년 김씨 일족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평왕(眞平王) 장지로 기록된 한지(漢只)와 조선시대 낭산 북동 주변 들판의 당시 지명이 한지원(閑地原)으로 발음이 같아서 이 봉분을 진평왕릉(眞平王陵)으로 비정하였다.

신라  26 대 진평왕릉 ( 眞平王陵 )

한지원(閑地原)은 경작을 하지 않는 땅이라는 뜻으로 고려 현종 3(1012)에 경주읍성을 쌓은 직후 북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분황사로부터 명활산성까지의 구간에 제방을 쌓고 오리수(五里藪)를 조성함으로써 생긴 지명이다그리고 이로 인해 남쪽 보문 들판과 구황동 일대가 북천으로부터 농수를 구하기 어려워서 한지원(閑地原)이라고 불렀다.

한지(漢只)는 신라 6촌 중 금산가리촌이 한기부(漢祇部) 또는 한지벌부(漢只伐部)로 발전하였으며 촌장은 지타로 명활산을 통해서 강림했다. 중심지인 금산은 소금강산 중턱에 있는 백률사 북쪽 산으로 현재  동천동 일부, 황성동, 용강동, 천북면 등 행정구역이다.

그래서 진평왕릉(眞平王陵) 위치는 분황사와 명활산 기슭 사이일 것으로 추정되며 진평왕릉(眞平王陵)은 선덕왕릉 이전에 조성한 것으로 호석에 사용된 돌은 가공하지 않은 괴석이고 받침석은 없어야 하며 이를 충족하는 것이 동천동 북천변의 41대 헌덕왕릉이다.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능 앞에는 최근에 조선 왕릉의 혼유석을 모방한 상석과 의자형 혼유석이 설치되어있다.

신라 26진평왕(眞平王 : 재위기간 5797~632년 정월, 526개월)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24대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로 작은 아버지인 25대 진지왕(眞智王)화백회의에서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갈문왕 입종(葛文王 立宗)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金氏) 마야부인(摩耶夫人)이고 갈문왕 복승(葛文王 福勝)의 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 생김이 기이하였고 체격이 장대하였으며, 지식이 깊고 의기가 활달하였다.

진평왕은 재위 54년 동안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고 중국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다. 여러 승려를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등 불교 진흥에도 힘썼고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쌓고 명활성을 고쳐 짓는 등 수도 방어를 강화하였다. 진평왕이 죽었을 때 한지(漢只)에서 장사를 지냈다. 왕이 하늘로부터 옥대(玉帶)’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즉위 원년(579) 8,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다. 왕의 어머니인 만호부인(萬呼夫人) 동생인 백반을 진정 갈문왕에 봉하고, 국반을 진안 갈문왕에 봉했다. 22,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后稷)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가까운 왕족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즉위 3년 봄 정월, 처음으로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다. 이는 고려의 이부(吏部), 조선의 이조(吏曹)와 같다.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 각 한 명씩을 두었다.

62,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고쳤다. 3, 국가의 세금을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調府令) 한 명을 두어 납세와 부역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고, 우마차를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乘府令) 한 명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73, 가뭄이 들자 왕이 정전에 거처하지 않았으며, 평상시보다 음식을 줄이고 죄수를 직접 재심사하였다. 7, 고승 지명(智明)이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남조(南朝)() 나라에 갔다. 진평왕 대에는 중국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 행(求法 行)과 귀국 행(歸國 行)이 빈번하게 있었는데,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행차와 같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불교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8년 봄 정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禮部令) 두 명을 두었다.

9년 가을 7, 대세와 구칠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의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세는 내물왕의 7대손이며, 이찬 동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나고 젊어서부터 세속을 떠나 외지로 나가려는 뜻을 품었었다. 그는 담수라는 중과 사귀면서 말했다. “신라 같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연못의 고기가 산림의 크기를 모르고, 새장의 새가 바다의 넓음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지나 오나라, 월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을 것이며, 명산에서 도를 구할 것이다.

만약 속된 자세를 바꿀 수 있거나 신선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표표하게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닐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천하의 신기한 노름이요,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담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대세는 그를 버리고 다시 친구를 찾았다. 그는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사람됨이 굳건하고 남다른 절개가 있었다. 그는 곧 구칠과 함께 남산에 있는 절을 유람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연못에 나뭇잎이 떠다니고 있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방을 유람할 생각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뭇잎 하나씩을 주워 이를 배로 생각하고 띄워서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자.” 조금 후에 대세의 잎사귀가 앞서자 대세가 웃으면서 내가 먼저 간다!”라고 말했다.

구칠은 불끈 성을 내며 나도 또한 사나이이다. 어찌 갈 수 없으리.”라고 말하였다. 대세는 구칠이야말로 같이 행동을 할 만한 사람임을 알고, 은근히 자신의 뜻을 말했다. 구칠은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어 배를 타고 남해를 떠났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1012,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으므로 이찬 수을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113, 원광(圓光) 법사가 진()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연구하였다.

132,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두 명을 두었다진평왕 초기에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국정이 왕권을 중심으로 원활하게 수행되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신라의 관제발달사상 발전기로서 새로운 행정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7, 남산성을 쌓았고 그 둘레가 2854보였다.

능(陵)의 호석(둘레돌)은 검은색을 띤 괴석과 화강암을 혼용하여 능을 둘렀는데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

157, 명활성을 개축하였고 그 둘레가 3천 보였다. 서형산성은 둘레가 2천 보였다. 16,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 황제가 조서를 주어 왕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배수하였다.

183, 고승 담육(曇育)이 수나라에 가서 불법을 연구하였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0, 영흥사에 화재가 발생하여 350호가 연이어 불에 탔고 왕이 직접 나가서 이들을 구제하였다. 19, 삼랑사가 낙성되었다.  22, 고승 원광(圓光)이 조빙사(朝聘使) 나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橫川)을 따라 돌아왔다.

24, 대내마(奈麻) 상군(上軍)을 사신으로 수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 백제가 아막성(阿莫城: 지금의 雲峰)을 공격하였고 왕이 장병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귀산과 추항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9, 고승 지명(智明)이 수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상군(上軍)을 따라 돌아왔다. 왕이 지명(智明) 공의 계행을 존경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258,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침범하였고 왕이 직접 군사 1만을 이끌고 나아가 그들을 물리쳤다. 267, 대내마 만세와 혜문(惠文) 등을 수나라에 사절로 보내 조회하였다. 남천주를 없애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273, 고승 담육(曇育)이 수나라에 사절로 갔던 혜문(惠文) 을 따라 돌아왔다. 가을 8,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30, 왕은 고구려가 자주 국토를 침범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왕은 원광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군사를 요구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불교도의 행실이 아니지만, 제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곧 글을 지어 올렸다.

2,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4,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점령하였다.

33, 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구하는 내용의 글(걸사표 : 乞師表)을 바쳤다. 수양제가 이를 허락하였고 군사를 동원한 사실은 고구려기에 실려 있다. 10, 백제 군사가 가잠성을 백일 동안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이 굳게 수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고 성은 함락되었다.

35, 7,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를 초청하여 불경을 설법하게 하였다. 36년  2, 사벌주를 폐지한 후 일선주를 설치하고,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의 흙으로 빚은 불상이 저절로 훼손되고, 얼마 후에 진흥왕의 왕비(비구니)가 사망하였다.

 3810,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40, 북한산주 군주 변품이 가잠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백제와 싸웠다. 해론이 이에 종군하여 적과 만나 전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43년 가을 7, 왕이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고조가 직접 사신을 위로하고, 통직 산기상시 유문소를 사절로 파견하면서 조서, 그림, 병풍, 비단 3백단을 보내왔다.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한편 이시기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등장하게 된다.

442, 이찬 용수를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즉위 7년에는 대궁, 양궁, 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1인을 두어 3궁을 동시에 관장하게 한 것이다.

45년 봄 정월, 병부 대감 두 명을 두었다. 10,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였다

46년 봄 정월, 시위부 대감 6명과 상사서 대정 1명과 대도서 대정 1명을 두었다. 3,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10, 백제 군사가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 등 여섯 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3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가 봉잠앵잠기현 3성의 군사를 합하여 굳게 지키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4711,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 때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 나라에 조회할 수 없음과 또한 그들이 자주 침범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487,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조가 주자사를 보내 고구려와 화친할 것을 권하였다. 8,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였다. 주재성 성주 동소가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고허성을 쌓았다.

49 6,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7, 백제 장군 사걸이 서쪽 변경의 2성을 점령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11,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2,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격파하였다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녀를 파는 일이 있었다.

518,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 9,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32, 흰 개가 대궐의 담장 위에 올라갔다5,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 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구족을 처형하였다. 아찬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망하였으나, 처자가 보고 싶어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왔다. 그는 그 곳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나 그의 헤어진 옷과 바꾸어 입은채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7,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명을 바쳤다. 그러나 위징(魏徵)은 이를 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기뻐하며 저 임읍(林邑)에서 바친 앵무새도 추운 고통을 말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황차 가족을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의 처지야 어떻겠는가!”라고 말하고, 사신에게 맡겨 돌려보냈다. 흰 무지개가 대궐 우물로 들어갔다. 토성이 달을 범했다.

54년 봄 정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서로 좌광록대보(左光祿大夫) 벼슬을 추증하고, 비단 2백 필을 부조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1 천사옥대(天賜玉帶)

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諡號)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은 김씨(金氏).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 후에 고려왕(高麗王)이 신라를 치려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 무엇이냐.” 좌우가 대답한다.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구층탑(九層塔)이 그 둘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찬()하여 말했다.

구름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

신라가 망한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 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 경순왕)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 전과(鐫銙)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추수가 끝난 보문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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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0대 정강왕릉(定康王陵)은 경주 동남산의 남산동 산53번지에 위치하며 남쪽에는 통일전이 있고 북쪽에는 49대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흙으로 덮은 둥근 형태의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직경 15.7m, 봉분 높이 4m로 묘제는 헌강왕릉(憲康王陵)과 같이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로 추정된다.
봉분을 두른 호석(護石, 둘레돌)은 길이 90 ~120cm, 너비 30cm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2단으로 쌓았는데 하단의 지대석은 호석(護石)보다 넓게 하였고 지대석 위에 약 10cm 정도 안으로 들여서 호석(護石)을 2단으로 쌓았다.

헌강왕릉(憲康王陵)의 호석(護石)은 4단인데 비해 정강왕릉(定康王陵)은 2단으로 축소된 것으로 기울어가는 신라하대 국운을 반영한 것 같다. 능의 동쪽에 있는 상석은 후대에 설치 된 것으로 추정된다.

능의 동쪽에 있는 상석은 후대에 설치 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지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헌강왕(憲康王陵)과 같이 보리사(菩提寺) 동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영조 6년에 김씨 일족은 동남산에서 약 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두 고분 가운데 월성에 가까운 고분을 헌강왕릉(憲康王陵)으로 그 남쪽의 고분은 정강왕릉(定康王陵)으로 비정하였다.
신라 50정강왕(定康王 : 재위기간 8867~ 8877, 1)
「이름은 황()이며, 경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49대 헌강왕(憲康王)의 동생이다. 당시 헌강왕(憲康王)에게는 아들 요가 있었지만 태어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아기이기에 황()이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하여진 영화부인(寧花夫人)이다. (: 49대 헌강왕), (: 51대 진성여왕), ()과 형제간이다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추봉된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추봉된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정강왕(憲康王)은 형인 헌강왕(憲康王)에 이어 886년 7월에 왕위에 올랐으나 887년 7월에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이 만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정강왕(憲康王)은 병이 깊어지자 시중 준흥(俊興)에게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동생인 만(曼, 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887년 75일 세상을 떠났다. 헌강왕(憲康王)과 마찬가지로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서 장사를 지냈다.

즉위 원년(886년) 8월, 이찬 준흥(俊興)을 시중으로 임명하였고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어 황폐하였다.
2년 봄 정월,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강론을 들었다. 백고좌(百高座)는 나라의 평안을 위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열었던 국가적 불교 행사의 하나이다. 한주 이찬 김 요가 모반하므로, 군사를 보내 그를 처형하였다.

정강왕릉 ( 定康王陵 ) 주변의 장대석들

5월, 왕이 병들자 시중 준흥(俊興)에게 말했다. “나의 병이 위급하니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 뒤를 이을 자식은 없으나, 누이 동생 만은 천성이 명민하고 체격이 남자와 같으니, 그대들이 선덕왕과 진덕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정강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정강왕릉( 定康王陵 )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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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동남쪽 기슭 남산동 산55번지에 있는 신라 49대 헌강왕릉(憲康王陵)은 남쪽에는 정강왕릉(定康王陵), 북쪽에는 화랑교육원이 있고  봉분 높이 4.2m, 봉분 지름 15.3m으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이다. 원형 봉토분의 호석으로 최하단의 지대석 위에 10cm 정도 안으로 들여서 길이 60~120cm, 너비 30cm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둘레를 4단으로 쌓았다.

19938월 태풍으로 봉분의 정상부분이 함몰됨에 따라 수습 차원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내부는 일찍이 도굴되었고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로 확인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도굴된 이후라서 시상대(屍床臺) 위의 석침(石枕), 석좌(石座)를 비롯한 석물과 장신구류, 철기 류, 토기 류 파편뿐이라서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유물은 없었다.

석실 내부 구조는 동쪽으로 널길(연도)이 있고 서쪽으로 석실을 배치하였는데 전체적으로 자형이다. 관이 놓여 있는 방(현실)은 네모 형태로 크기는 남북 2.9m, 동서 2.7m로 천장은 둥글게 모아져 있는 궁륭형 천장(활천장)으로 최상부에는 개석으로 장대석 2매를 나란히 덮었다. 석실 입구에는 돌문, 문지방, 폐쇄석 등이 있었다.

그런데 2매의 판석을 이용한 시상대의 크기는 길이 2.4m, 너비 0.7m이며 두침과 족좌는 각각 1점뿐이라서 피장자는 1인으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왕릉이면 왕비도 같이 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 또한 내부구조나 출토된 토기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헌강왕의 재위기간이었던 9세기와는 차이가 있다.

상석은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봉분의 동쪽 1.6m 정도에 불규칙한 장대석 5매로 장방형으로 만들고 내부에는 다른 석재들로 채웠다. 현 왕릉은 조선 영조 6년 김씨 일족에 의해서 경주 보리사 동남산에 있는 두 고분 가운데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월성에 가까워서 비정하였고 남쪽의 고분은 50대 정강왕릉로 비정하였다.

헌강왕의 장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보리사 동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 재위 875~886, 1010개월)

이름은 정()이며 아버지는 48대 경문왕이며 경문왕의 맏아들이다.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동생으로 황(. 뒤의 50대 정강왕), (. 뒤의 51대 진성여왕), ()이 있었다. 서자로 요()가 있어 뒤에 52대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의 비가 되어 의성왕후(義成王后)에 봉하여졌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로 봉해진 헌안왕의 큰딸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金氏)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헌강왕(憲康王)은 성품이 명민하였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고 불교와 국학(國學)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왕위에 오르면서 이찬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예겸 (乂謙) 시중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즉위 22, 황룡사에서 모든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왕이 직접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것 이었다.

7,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3년 봄 정월, 고려 태조대왕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

44,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고 7, 당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중지하였다. 8, 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52,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博士) 이하 사람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다. 3, 왕이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양이 무섭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精靈)이라고 하였다.

6,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10, 왕이 준례문에 행차하여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고 11, 왕이 혈성 벌에서 사냥을 하였다.

62, 금성이 달을 범하였고 시중 예겸이 사직하자, 이찬 민공이 시중이 되었다. 8,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쳐 왔다.

99,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73,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술기운의 오르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84,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야명주 10개를 바쳤다. 12, 고미현 여자가 한 번에 삼형제를 낳았다.

92, 왕이 삼랑사(三郎寺)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 한 수씩을 짓게 하였다.

112, 호랑이가 대궐에 들어 왔고 3, 최치원이 돌아왔다10월 임자일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고 당에 사신을 보내 황소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12년 봄, 북쪽 진에서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판자 쪽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상주하면서, 그것을 가져다 바쳤다. 그 판자 쪽에는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6, 왕이 병으로 편치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였고, 또한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75,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헌강왕릉(憲康王陵)으로 가는 길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2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망해사(望海寺) 대웅전 벽화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개운포 (開雲浦) 에서 본 처용암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개운포(開雲浦)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울주군 망해사(望海寺)

왕이 또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南山)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이 혼자서 보았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니 왕 자신도 춤을 추면서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서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신이 먼저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해서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象審)이라고 했다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이 또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검(玉刀劍)이라 했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했다.

<어법집(語法集)>에 말하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했는데 도파(都波)’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했다. 즉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기다가 나라가 마침 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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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55대 왕 경애왕릉(景哀王陵)은 경주시 배동 산73-1번지로 서남산의 삼릉 남쪽에 있다.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높이 4.20m, 봉분 직경 13m이며, 발굴조사는 하지 않았으나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봉분자락에는 아무런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경애왕의 시신을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신라 55대 왕 경애왕릉(景哀王陵)

해목령(蟹目嶺)은 남산신성 내 남쪽 서측의 봉우리를 말하며, 그 아래 게의 눈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부연된 명칭으로 높이는 265m이다. 그러나 해목령 (蟹目嶺)주변에서 왕릉급의 고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의 능은 조선영조 6년 박씨 일족에 의해 지정된 것이다. 박씨 일족이 이처럼 삼릉과 인접한 곳에 비정한 이유는 그가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즉 삼릉을 박씨 왕족의 능이라고 지정할때 같이 지정하였다.

해목령(蟹目嶺)은 경애왕릉에서 떨어져 있어서 맞지 않으며, 해목령(蟹目嶺)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을 경애왕릉으로 보아야 한다는 일부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일성왕릉 위치는 이라기보다는 산사면 말단부에 있다.

신라 55경애왕(景哀王, 재위 924 8~ 92711, 33개월)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53대 신덕왕(神德王)의 둘째 아들이자 54대 경명왕(景明王)의 동복동생이고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다. 경애왕 재위기간에는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잠시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사를 보내어 고려를 도왔다. 927년 11월에 포석사(鮑石祠)에서 제사를 지내는 중 그곳을 기습한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사로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포석사(鮑石祠), 또는 포석(鮑石)은 길례(吉禮)를 행하는 장소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사가 치르는 곳이었고 제사를 행하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노(文努, 538년~606년)를 비롯한 나라의 중요 인물들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1999년 4월 ~ 5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포석정 동남쪽 70m 지점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포석(鮑石)이라는 명문이 있는 기와 몇 점과 기와무지를 확인했다. 이는 포석정이 단순히 유상곡수를 하는 놀이터가 아니라 포석사와 같은 사당이었음을 뜻한다.

문노(文努)는 가야 출신으로 가야 구형왕의 아들인 김무력 장군을 따라 전쟁터에 나아가 백제군을 섬멸하는데 앞장서는 등으로 많은 공을 세웠다.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는 실질적인 일등공신이었다.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실력을 인정받아 화랑의 우두머리인 8대 풍월주와 재상까지 올랐다.

즉위 원년(924) 9, 고려 태조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고 10,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즉위 210, 고울부 장군 능문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그 성이 신라의 서라벌과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1, 후백제 견훤이 그의 조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견훤은 변덕스럽고 거짓말을 많이 하므로 그와 화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태조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34,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은 고려 사람들이 고의로 죽였다고 생각하고 분개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웅진까지 진군하였다. 태조가 모든 성에 명령하여 방비를 굳게 하고 나가지 않도록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진격하여 위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조는 사신에게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이 넘쳐서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4년 봄 정월, 태조가 직접 백제를 공격하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도왔고 2, 병부 시랑 장분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후당에서는 장분을 검교공부상서로 임명하고, 부사인 병부 낭중 박술홍을 겸어사중승으로, 판관인 창부 원외랑 이충식을 겸시어사로 임명하였다.

3, 황룡사 탑이 흔들리다가 북쪽으로 기울었다. 태조가 직접 가서 근암성을 격파하였다. 후당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를 회화 대장군으로 삼았다 4, 지강주사 왕봉규가 사자 임언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명종이 중흥전에서 그를 접견하고 선물을 주었다. 강주 관하의 돌산 등 네 고을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9, 견훤이 고울부(경북 영천)에서 신라 군사를 공격하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수에게 명령하여 정병 1만 명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이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이용하여, 겨울 11월에 신라 서라벌을 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궁녀, 종실들을 데리고 포석사에서 제를 올리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는데 그때 견훤의 군대가 밀어닥쳤다. 왕은 당황하여 왕비와 함께 달아나 도성 남쪽 별궁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견훤의 군대 포위망에 걸리자 살해당할 것을 염려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가 92711월 이였다. 그러나 고려의 사가들은 신라멸망의 당위성을 역설하기 위해 국가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음력 11월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왕이 춤추며 즐기고 놀았다고 표현하였다.

견훤은 경애왕의 외종제 김부(金傅)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는데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견훤은 왕족 효렴을 비롯하여 재상 영경과 그 외에 종실의 자녀들과 각종 기술자들, 병기, 보배 등을 빼앗아 돌아갔다.

삼릉에서 경애왕릉으로 가는 길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2 경애왕(景哀王)

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申; 924) 219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풀이했다. 겸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百座)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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