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동남쪽 기슭 남산동 산55번지에 있는 신라 49대 헌강왕릉(憲康王陵)은 남쪽에는 정강왕릉(定康王陵), 북쪽에는 화랑교육원이 있고 봉분 높이 4.2m, 봉분 지름 15.3m으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이다. 원형 봉토분의 호석으로 최하단의 지대석 위에 10cm 정도 안으로 들여서 길이 60~120cm, 너비 30cm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을 이용하여 둘레를 4단으로 쌓았다.
1993년 8월 태풍으로 봉분의 정상부분이 함몰됨에 따라 수습 차원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내부는 일찍이 도굴되었고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로 확인되었다. 수습된 유물은 도굴된 이후라서 시상대(屍床臺) 위의 석침(石枕), 석좌(石座)를 비롯한 석물과 장신구류, 철기 류, 토기 류 파편뿐이라서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유물은 없었다.
석실 내부 구조는 동쪽으로 널길(연도)이 있고 서쪽으로 석실을 배치하였는데 전체적으로 ‘ㄱ’자형이다. 관이 놓여 있는 방(현실)은 네모 형태로 크기는 남북 2.9m, 동서 2.7m로 천장은 둥글게 모아져 있는 궁륭형 천장(활천장)으로 최상부에는 개석으로 장대석 2매를 나란히 덮었다. 석실 입구에는 돌문, 문지방, 폐쇄석 등이 있었다.
그런데 2매의 판석을 이용한 시상대의 크기는 길이 2.4m, 너비 0.7m이며 두침과 족좌는 각각 1점뿐이라서 피장자는 1인으로 추정되며 일반적으로 왕릉이면 왕비도 같이 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 또한 내부구조나 출토된 토기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헌강왕의 재위기간이었던 9세기와는 차이가 있다.
상석은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봉분의 동쪽 1.6m 정도에 불규칙한 장대석 5매로 장방형으로 만들고 내부에는 다른 석재들로 채웠다. 현 왕릉은 조선 영조 6년 김씨 일족에 의해서 경주 보리사 동남산에 있는 두 고분 가운데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월성에 가까워서 비정하였고 남쪽의 고분은 50대 정강왕릉로 비정하였다.
헌강왕의 장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는 보리사 동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 재위 875~886년, 10년 10개월)
이름은 정(晸)이며 아버지는 48대 경문왕이며 경문왕의 맏아들이다.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동생으로 황(晃. 뒤의 50대 정강왕), 만(曼. 뒤의 51대 진성여왕), 윤(胤)이 있었다. 서자로 요(嶢)가 있어 뒤에 52대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의 비가 되어 의성왕후(義成王后)에 봉하여졌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로 봉해진 헌안왕의 큰딸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金氏)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헌강왕(憲康王)은 성품이 명민하였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고 불교와 국학(國學)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왕위에 오르면서 이찬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대아찬 예겸 (乂謙)을 시중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즉위 2년 2월, 황룡사에서 모든 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왕이 직접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것 이었다.
7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3년 봄 정월, 고려 태조대왕이 송악군에서 태어났다.
4년 4월, 당 희종이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으로 책봉하였고 7월, 당에 사신을 보내려다가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중지하였다. 8월, 일본국 사신이 오니 왕이 조원전에서 접견하였다.
5년 2월, 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博士) 이하 사람들에게 강론을 하게 하였다. 3월, 왕이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하였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들의 모양이 무섭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精靈)이라고 하였다.
6월, 일길찬 신홍이 모반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10월, 왕이 준례문에 행차하여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고 11월, 왕이 혈성 벌에서 사냥을 하였다.
6년 2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고 시중 예겸이 사직하자, 이찬 민공이 시중이 되었다. 8월,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쳐 왔다.
9월 9일,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고 시정이 즐거워하니, 이는 왕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 때문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7년 3월, 왕이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술기운의 오르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8년 4월,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백 냥과 야명주 10개를 바쳤다. 12월, 고미현 여자가 한 번에 삼형제를 낳았다.
9년 2월, 왕이 삼랑사(三郎寺)에 행차하여, 문신들에게 시(詩) 한 수씩을 짓게 하였다.
11년 2월, 호랑이가 대궐에 들어 왔고 3월, 최치원이 돌아왔다. 10월 임자일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고 당에 사신을 보내 황소의 난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12년 봄, 북쪽 진에서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서 판자 쪽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상주하면서, 그것을 가져다 바쳤다. 그 판자 쪽에는 “보로국과 흑수국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6월, 왕이 병으로 편치 못하자, 전국의 죄수들을 석방하였고, 또한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불경을 강론하였다. 7월 5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강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 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용(龍)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왕이 또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南山)의 신(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의 사람에겐 그 신이 보이지 않고 왕만이 혼자서 보았다. 사람이 나타나 앞에서 춤을 추니 왕 자신도 춤을 추면서 형상을 보였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은 이 춤을 전해서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신이 먼저 나와서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해서 새기게 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했기 때문에 상심(象審)이라고 했다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그 형상에 따라서 이름 지은 것이다.
왕이 또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이를 옥도검(玉刀劍)이라 했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에는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했다.
<어법집(語法集)>에 말하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했는데 ‘도파(都波)’라고 한 것은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했다. 즉 지신과 산신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알기 때문에 춤을 추어 이를 경계한 것이나 나라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상서(祥瑞)가 나타났다 하여 술과 여색(女色)을 더욱 즐기다가 나라가 마침 내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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