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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지(陵旨塔址)는 낭산(狼山) 서쪽 기슭(경주시 배반동 621번지 일대)에 있고 절터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능지탑(陵旨塔)은  능시탑으로 구전되어 왔으며, 조선시대 편찬된 『동경잡기(東京雜記)능지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근 마을 이름은  능말’, ‘능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능지탑(陵旨塔)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말 조선고적연구회 명의의 보고서에 따르면 낭산 배반동 능지탑터를 화장지 유적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1969년부터 197911년간의  삼산오악학술조사단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문무왕(文武王) ‘고문외정(庫門外庭)의 기록을 근거로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고 있다.

삼산오악조사단이 발굴조사를 실시했을 때, 탑의 북쪽에서 건물지와 석등지가 확인되었으며, 수막새, 암막새, 치미, 귀면와, , 석제불상과 토기편, 자기편 등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능지탑(陵旨塔) 주변이 있는 경주 배반동 일대를  마을주민들은 고문뜰로 부르고 있었다. 능지탑(陵旨塔)과 문무왕의화장터에 대한 관련성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현재 능지탑(陵旨塔)197810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791125일에 공사 완료한 모습이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이다능지탑은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능지탑(陵旨塔)은 현재 전체높이가 4.49m이며, 2층으로 복원·정비되어 있는데 이중기단에 기단부와 탑신부로 구분할 수 있다. 기단부 4면에는 9기의 십이지상이 있는데, 사상(), 인상(호랑이), 진상()은 없다.

탑의 탑신부는 전탑과 같은 형태로 다듬지 않은 장방형의 석재로 쌓아올렸다. 그 위에 옥개에 해당하는 연화문석조물을 올렸는데, 이러한 석조물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정방형의 판석에 4개의 복판의 연꽃잎을 새긴 것과 장방형의 판석 한 면에 복판연꽃잎을 표현한 것 이다.

발굴 조사 시 100여 매의 연화문석조물을 확인하였는데, 현재 1층에는 61, 2층에는 18매로 복원되어있다. 탑의 북쪽에 토담이 형성되어있으며, 그 앞에는 나머지 복원되지 않은 연화형석조물과 장대석이 모아져있다. 이는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탑의 북쪽에 토담이 형성되어있으며, 그 앞에는 나머지 복원되지 않은 연화형석조물과 장대석이 모아져있다. 이는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기단부에 배치된 십이지신상 중 자상()은 머리는 우측을 향해 있으며, 문복을 착의하였고 낮은 귀와 함께 이빨을 나타내었고, 왼손은 칼을 쥐었으며 오른손은 도포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인상으로 판단된다. 판석의 크기는 길이 109.0, 너비 67.5이다.

자상 ( 쥐 ) 은 머리는 우측을 향해 있으며 ,  문복을 착의하였고  낮은 귀와 함께 이빨을 나타내었고 ,  왼손은 칼을 쥐었으며 오른손은 도포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인상으로 판단된다 .

자상()을 제외한 나머지 상들은 무관복을 입고 있으며, 크기는 길이 100.0. 너비는 70.0내외이다. 머리의 방향은 오상(), 술상()는 정면, 자상(), 축상(), 묘상(토끼), 신상(원숭이)는 우측, , , 돼지는 좌측을 향하고 있다

자상()의 우측에 위치된 축상()은 머리의 방향이 우향으로 무관복을 입었고 보주를 잡고 있다. 판석의 크기는 길이95.0, 너비 69.0이다.

축상 ( 소 ) 은 머리의 방향이 우향으로 무관복을 입었고  보주를 잡고 있다

묘상(토끼)은 도끼를 잡고 있고 오상()은 화염보주와 칼을 잡고 있다.

묘상(토끼)은 도끼를 잡고 있다.
오상(말)은 화염보주와 칼을 잡고 있다.

미상()은 낫 형태의 모()를 잡고 있고 신상(원숭이)은 두 손으로 창으로 가슴을 가로지르며 잡고 있다. 유상()은 칼을 잡고 있다.

미상(양)은 낫 형태의 모(矛)를 잡고 있다.
신상(원숭이)은 두 손으로 창으로 가슴을 가로지르며 잡고 있다.
유상 ( 닭 ) 은 칼을 잡고 있다 .

그리고 술상()은 짧은 귀에 도끼를 잡고 있으나 자상()으로, 해상(돼지)은 접혀 있는 귀와 이빨을 보면 술상()으로 판단된다.

술상(개)은 짧은 귀에 도끼를 잡고 있으나 자상(쥐)으로 판단된다.
해상(돼지)은 접혀 있는 귀와 이빨을 보면 술상(개)으로 판단된다.

낭산(狼山)에서 출토 된 석조약사불좌상(국립경주박물관)은 높이는 약 128.5로 광배, 불신, 그리고 대좌가 한돌(一石)로 조성되었다. 왼손에는 큰 보주형의 약기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촉지인을 한다. 얼굴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는데, 세부표현은 마모가 심해 잘 확인되지 않는다.

어깨와 팔, 다리에는 두꺼운 옷 주름이 동일한 간격으로 표현되어있다. 주형광배에는 양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따로 구분하였고, 그 내부에는 꽃무늬 장식과 불꽃무늬장식을 표현하였다. 대좌는 연화대좌로 상대석만 남아있다. 대좌의 연잎장식은 복엽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연잎 안에는 꽃문양장식이 세밀하게 조각되어있다. 이 불상은 왼손에 약기를 들고 있어서 약사불로 판단되며 약사신앙이 유행하던 9세기에 조성한 상으로 추정된다.

낭산(狼山)에서 출토 된 석조약사불좌상(국립경주박물관)은 높이는 약 128.5㎝로 광배, 불신, 그리고 대좌가 한돌(一石)로 조성되었다.

현재 복원 된 능지탑에 조성 된 십이지신상은 능지탑 축조와 관련 된 것이 아니며 주변 훼손 된 능에서 옮겨 진 것을 조합하여 복원하였다. 자세히 십이지신상을 살펴보면 크기가 차이가 있고 양식도 다름을 알 수가 있다특히 자상()은 황복사 동편 왕릉 추정지에서 가져 온 것으로 인상(호랑이)이 자상()으로 바꿔졌다.

능지탑(陵旨塔)은 낭산(狼山) 서록에 있는 사찰로 그동안 문무대왕의 화장지로 추정된 장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찰과 관련하여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유적의 성격과 창건 및 폐사 등의 사찰의 연혁과 사명을 알 수 없는 유적이다. 이에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원형 복원이 필요하다.

1970년 발굴 조사 때, 소조여래좌상의 파편 등이 발견되어 창건 때에는 사면에 흙으로 만든 큰 불상을 봉안한 감실과 같은 목조건축물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 발굴 조사 때, 출토 된 소조여래좌상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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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 서쪽 기슭(배반동 산18-3번지)의 바위 면에 삼존불(三尊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곳은 서록사지(西麓寺址) 일원으로 통일신라시대 절터 이다현재 이곳에는 중생사(衆生寺)라는 작은 절이 있으며 경내에는 마애삼존상(보물 제665)을 비롯하여, 석탑재, 불상대좌, 건물 기단석, 초석 등이 있다. 그리고 과거 주변에서는 석조관음보살입상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이 출토되었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현재 중생사(衆生寺)1972년 보문스님이 기존의 선덕사를 인수하여 중창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전의 선덕사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을 낭산(狼山) 서록사지(西麓寺址)’로 부르고 있었다.

1965년 낭산 마애삼존상 (狼山 磨崖三尊像)을 조사 할 때 이곳에 운영 중인 절은 없었던 것으로 1965년 이전까지는 폐사지로 남아 있었다. 중생사(衆生寺)라는 절은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의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에 등장하는데 현재 중생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낭산 마애삼존상(狼山 磨崖三尊像) 현재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1933년 간행된 『동경통지(東京通誌)에는 이 마애불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산 서쪽 아랫마을 집에 큰 돌이 있는데, 세구의 상을 새겼으나 옆 부분은 묻혀있다. 가운데는 가사를 입고 있고 오른쪽은 갑옷을 입고 칼을 잡았고 왼쪽사람은 흙에 묻혀서 분명하지 않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은 집안에 있던 큰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흙속에 매몰되었다가 후대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에 조각된 삼존상(三尊像)을 살펴보면, 중앙의 본존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다.

지장보살상(피모지장보살상 : 被帽地藏菩薩像)

본존상의 현재 높이는 약 100이다. 둥글고 살이 찐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듯하다. 특히 본존상머리에 착용한 두건과 양어깨를 감싸고 입은 가사 등은 고려불화에서보이는 지장보살상(被帽地藏菩薩像 : 피모지장보살상)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여, 지장보살로 보고 있다.

, 우 협시상은 갑옷을 입고, 악귀를 몰아내는 신장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높이는 두상 모두 약90이로 좌우협시가 신장상인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왼편에 앉아 있는 좌 협시 신장상[向右]은 오른쪽다리는 안쪽으로 접고 왼쪽다리를 비스듬히 세워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시선은 본존상을 향해 있으며, 머리에는 투구를 착용하였고, 몸에는 갑옷을 입고 있다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입을 꽉 다물고 있어 험상궂어 보이며, 높이 치켜든 오른손의 지물과 왼손의 형태 등은 마멸이 심하여 불분명하다. 광배와 대좌의 표현 역시 현재 확인할 수 없다.

왼편에 앉아 있는 좌 협시 신장상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우 협시 신장상[向左]은 좌협시상과 거의 대칭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두 다리를 편안하게 뻗은 유희좌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좌협시상과 유사한 모습을 하지만, 보다 경직되어 있고 몸의 방향도 다르다. 즉 좌협시상은 본존상을 향하여 몸을 틀고 있는 자세인데 비하여 우협시상은 바깥쪽으로 몸을돌려 반대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상 역시 머리에 투구를 착용한 듯 보이며, 몸에는 갑옷을 입고,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우 협시 신장상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 본존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불상, 피모지장보살상(被帽地藏菩薩像), 여신상(혹은 전통 신앙과 관련된 상)3가지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상은 지장보살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마모가 심하여 세부적인표현은 알 수 가 없다. 좌 우 협시상의 모습이 무장을 한 신장상이기 때문에, 매우 독특한 배치구조이다. 조성 시기는 8세기로 보고 있다.

특히 3가지 설 중 여신상은 신라 산신의 모습으로 ‘삼국유사’ 김유신 조에 나타나있다. 김유신(595~673)이 젊은 시절 고구려 간첩 배석에게 잡혀 위험에 빠지려는 찰나 삼산의 신이 모두 나타나 김유신을 구했으며, 그들의 모습은 젊은 여성이었다고 되어있다. 즉 신라의 산신은 왕이나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뿐 아니라 장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김유신을 구해주는 호국신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본존상의 머리를 살펴보면 앞머리와 양 어깨에 걸쳐진 수발(垂髮)에까지 두발 전체에 가는 선으로 머리카락을 표현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두건을 쓴 것이 아니라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상이다. 그러나 이중원광의 광배와 통견식으로 입고 있는 가사, 가부좌의 좌법 등에서 명확하게 불교에 귀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중생사 앞뜰에는 석재들이 한곳에 모여져 있는데, 석탑옥개석, 불상대좌 등 있. 3단 팔각연화대좌는 상대석이 별석이고, 중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대좌의 전체높이는 약73이다. 특히 8각의 중대석 각 면에는 특정 존상이 조각되어있는데, 표면의 마모가 심해 세부내용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중생사 앞뜰에는 석재들이 한곳에 모여져 있는데, 석탑옥개석, 불상대좌 등 있다.
3단 팔각연화대좌는 상대석이 별석이고, 중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다른 연화대좌는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앙련과 복련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복련은 8엽의 연꽃이 매우 볼륨감 있게 새겨져있으나, 앙련은 복련에 비하여 매우 약하게 표현되어있다. 앙련상면정중앙에는 직사각형의 홈이 확인되는데, 추측건대 불상을 결합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크기가 다른 옥개석4기 등이 남아있다.

서록사지(西麓寺址) 주변에서 출토 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은 높이는 약 200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며, 상체는 짧고 배가 다소 나와 있어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 든다. 머리에는 2줄의 띠를 돌리고, 그 위에 화불을 중심으로 10개의 작은 얼굴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10개의 작은 얼굴과 본래 얼굴을 합쳐서 11면이 된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방형을 띠고 있으며, 2줄의 띠 아래로 내려오는 보발은 볼륨감 있게 표현되었다. 코는 부분적으로 결실되었지만 비교적 작고 낮게 나타내었고, 눈은 둥글고 도톰하게 처리하였다. 입은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이다.

서록사지(西麓寺址) 주변에서 출토 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살상의 양어깨에는 천의를 덮고 있으며, 그 위에 3가닥의 보발이 흘러내린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서 정병을 쥐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어떤지 물을 들고 있는데 마모가 심해 잘 확인되지 않는다.

보살상에 착장된 장신구는 크게 목걸이와 영락장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화려한편이다. 목걸이 장식은 2중으로 된 U자형 줄에 여러 개의 짧은 드림장식이 달려있고, 다시 중앙에는 삼지창모양의 수식을 좌우측에는 나뭇잎형태의 수식을 하나씩 더 달았다. 영락장식은 기본적으로 X자형과 U자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양어깨부근에서 내려온 영락이 배 부근에서 꽃문양 장식판을 통과하여 X자로 교차되게 내려오며, 무릎아래에서 새로운U자형영락이 두 개의 꽃문양 장식판을 통해 기존의 X형 영락과 결합된다.

낭산(狼山, 해발 100m)은 경주의 진산(鎭山)으로 신라 사람들은 ‘신들이 노니는 숲’이란 뜻의 신유림(神遊林)이라 부르며 신성시했고 왕실에서 신에게 제사 지냈던 곳이다. ()은 이리 낭()’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413)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잡지·제사지에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나력산은 신라 6부의 하나인 습비부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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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사지(錫杖寺址)는 경주 송화산(松花山, 일명 수도산) 삿갓봉 아래 해발 95∼100m 사이(석장동 산81-2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신라 선덕왕 때 조각승 양지(良志) 스님이 주석(駐錫) 하였던 절이다. 경주 도심에서 형산강 서쪽 편에 자리 잡은 송화산(松花山)은 삿갓봉(234.7m)과 옥녀봉(275.6m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흔히들 수도산이라 부르고 있다.

절터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북향은 산죽(山竹)이 빙 둘러싸고 있고 서편에는 폭 5m 정도의 계곡이 있다. 근처 주민들은 이곳을 ‘절골’이라 부른다.

석장사지(錫杖寺址)에서 출토 된 유물 중 석장(錫杖)이라는 묵서가 쓰인 백자대접이 출토되어 석장사지(錫杖寺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신라 인화문토기부터 조선전기 분청사기와 조선후기 백자 등이 출토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양지(良志) 스님은 기예(技藝)에 통달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기간 : 7804~ 785년 정월)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냈고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란 무엇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공장(工匠)을 의미하며, 석장(錫杖)은 머리에 여섯 개의 방울이 달려 흔들면 소리가 나는 지팡이로 스님이 탁발할 때 인기척을 내거나, 길을 다니면서 짐승을 쫓을 때 사용했을 것이다.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안치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절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암자와 같은 작은 절로 추정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양지스님이 주석하였던 7세기 후 반경에는 석장사내에 전탑으로 만들어진 삼천불탑이 존재 했을 정도면 고려, 조선시대보다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석장사지는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증축되는 과정에서 유구가 훼손되고, 이전시기의 건축부재와 석물들이 재사용되어 창건 때의 절의 전체적인 윤곽은 알 수가 없다.

석장사지에 대한 최초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경주고적보존회의 오사카 긴타로가 하였다. 당시 도굴이 성행하였고 대부분의 유구가 교란 된 상태였다. 절터는 소나무 숲에 묘지가 있었고 초석과 와편 등이 확인되었고. 절터 주변의 일부 가옥에서 사용되고 있는 원형주좌초석이 석장사지에서 옮겨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석장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86년과1992년에 2차에 걸쳐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며, 다수의 기와 편과 탑상문전(塔像紋塼), 소조상편, 소형금동불 등 다양한 불교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200여점의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두 분의 부처님과 그 사이에 탑을 표현하였는데 삼천불탑 조영 시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크기와 문양에 따라 6∼7개의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종류별 크기가 다른 이유는 전탑조성 시 각 위치에 따라 전돌의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났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탑상문전은 경주 삼랑사지와 울산 능소사지, 울주 불영사, 청도 운문사 등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들 사지에도 석장사지와 유사한 전탑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탑상(塔像) 전면(塼面)에 연기법송(緣起法頌) 20자가 새겨져 있는데 크기는 높이 8cm, 폭 6.5cm, 두께 2cm로 글자크기는 약 0.5cm이다. 연대는 7~8세기 경으로 양지스님의 글씨로 추정된다.
내용은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남을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셨노라. 저 법은 인연을 다한다는 것 이것이 대사문의 설법일세(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盡」 是大沙門說」』

석장사지(錫杖寺址) 초입에서 만나는 나무다리 2곳

소조상은 20여점이 출토되었는데,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 등의 신장상편과 보살상편으로 추정되면 소조상편들은 모두 뒷면이 편평한 부조상이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석장사 삼천불탑의 벽면에 부착했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명문전이10여점 출토되었는데, ‘西北’, ‘三’, ‘下層南’ 등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탑축조 시 벽돌의 위치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해(意解) 양지사석(良志使錫) 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해 말한다.
()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왼쪽이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다.

석장사지(錫杖寺址)를 찾아가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으나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과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 가장 쉽게 찾아 갈수 있는 길이다.

휴앤락 오토캠핑장 입구
휴앤락 오토캠핑장 내에서 석장사지로 가는 길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과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 합류헤서 올라가는 길
능선에서 만나는 길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멀리서 보이는 석장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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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내에 있는 고분은 경주노동동고분군, 경주노서동고분군, 경주황남동고분군, 경주황오동고분군, 경주인왕동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728일 대릉원(大陵苑)으로 통합되었다. 대릉원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서 따온 것이다.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역과 그렇지 않는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황리단길에 가까이 있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많이 방문한다. 여기에는 천마총을 비롯하여 황남대총, 검총 등 발굴 된 고분과 미 발굴된 미추왕릉 등 많은 고분들이 있다.

여기에 분포하는 대형 고분들 사이사이 또는 주변에 원래 봉분이 없거나 너무 작아 멸실된 소형 분들이 수도 없이 분포하고 있다. 남아 있는 고분들은 대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 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되고, 봉분의 형태는 대부분 단일원분(單一圓墳)이나 표형분(瓢形墳)도 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표형분(瓢形墳)인 90호분

조사된 소형의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 積石木槨墳) 이었으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 竪穴式石槨墓)와 독널무덤(옹관묘 : 甕棺墓)도 혼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 가운데 109호분과 110호분 일제강점기 때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조사 당시 110호분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가진 한사람무덤(單葬墳)이었고 109호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시차를 두고 축조된 여러 개의 무덤으로 구성된 여러 사람무덤(多葬墳)이었다. 109호의 무덤 가운데 가장 일찍 축조된 제3·4(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은 현재까지 알려진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마총(天馬塚, 155호분)

1973년에 조사된 천마총은 직경 47m, 높이 12.7m 표형분(瓢形墳)의 부부묘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발굴 당시 천마총은 옆에 민가가 있었고 봉분 일부가 파손되어 있었다. 73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에 걸쳐 연인원 30,000여명이 발굴에 참여하였고 출토 유물 중 천마도(天馬圖)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명명되었다.

천마총을 발굴 조사하게 된 이유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 큰 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기 전 예비지식을 얻기 위해 실시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발굴 조사 후 내부를 공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천마총은 직경 47m, 높이 12.7m 표형분(瓢形墳)의 부부묘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46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발굴 초기 경주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시민들은 왕릉급의 고분을 파헤쳐 가뭄이 든다는 등 민심이 흉흉하였다. 작업 인부들 사이에서도 무덤을 판다는 외경감이 팽배해 있어 발굴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73726일 오후, 무더운 여름에 고분 아래로 파던 중 흙더미 속에서 눈부신 순금제 신라금관이 나왔다. 이때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와서 일순간 하늘이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작업자와 조사원들이 놀라서 잠시 작업이 중지되었다. 이로 인해 가뭄은 해소되었다.

천마총 내부에서는 금관·관장식·관모(冠帽) 등의 장신구류, 금동말안장과 백화수피제천마도장니(白樺樹被製天馬圖帳尼) 등 각종의 마구류, 금동··청동제의 용기류, 유리용기, 각종 철기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백화수피제장니(白樺樹被製帳尼)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명명되었고, 고분은 복원되어 내부시설이 공개되었다.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천마총 유리잔(보물 620호)

출토된 유물들을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과 유물 비교 검토를 통해 천마총 조성연대를 파악하니 560년에서 54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이시기에 사망한 임금은 살펴보면 45819대 눌지왕, 47920대 자비왕, 50021대 소지왕, 51422대 지증왕, 그리고 54023대 법흥왕 등 5명이다.

이중 법흥왕의 장지는 애공사 북쪽 봉우리로 제외가 된다.

이에 학계에서는 천마총의 피장자는 지증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왕이 숨진 해와 달이 기록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당시 1개월간의 해돋이 각도를 컴퓨터로 추적해 분석한 결과, 479년에 타계한 20대 자비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마총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99호분
천마총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99호분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지름 80m, 높이 23m의 신라 최대(最大) 표형분(瓢形墳)으로 1970년대 경주관광10개년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737월에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197510월에 완료하였는데 발굴에 동원 된 인원은 33천여 명이였다. 기간은 24개월이 소요되었으며 국내 고분 발굴조사 중 가장 길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지름 80m, 높이 23m의 신라 최대(最大) 표형분(瓢形墳)

경주관광10개년개발계획은 1971대통령의 명에 의해 경주시를 국제문화 관광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수립 된 개발계획이다. 7년 동안의 공사를 통해 197946일 보문관광단지가 개장 된 것도 대표적인 개발사례다.

유물이 무려 7만여 점으로 금관, 금동관, 봉수형 유리병, 비단벌레 장식 마구 등 출토 되었는데 봉수형 유리병은 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유리병으로 머리 부분이 봉항의 머리 같다고 해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으로 부르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 된 것으로 손잡이에 금실을 감고 있어 유리병을 금보다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비단벌레 장식 마구는 말안장 부속품으로 백화나무의 흰 껍질을 깔고 그 위에 비단벌레 날개 천개를 장식하였는데 무지개 빛처럼 영롱하다. 그리고 테두리는 금동제 관으로 마감처리 했다.

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국보 193호)
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금제 관식(보물 630호)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으로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 17대 내물왕 부부로 추정하고 있다. 즉 남분(南墳)은 내물왕, 북분(北墳)은 내물왕의 부인인 보반(保反)인 것이다. 능을 조성할 때 먼저 남분(南墳)을 만들고 나중에 그 고분의 일부를 파내고 북분(北墳)을 연결하였다. 즉 왕이 왕비보다 먼저 사망한 것이다.

내물왕은 재위 46년간(356~402) 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었고 김씨(金氏) 왕족 시대를 열었다.

남분(南墳)에서는 환두대도, 금동관, 은제 잔, 상감 팔찌, 유리제품, 갑옷 등 유물이 출토되었고 60세 전, 후의 남자 머리뼈와 이빨이 나왔어 피장자는 남자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곽에서 순장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키는 148cm, 15세 전후의 소녀 뼈가 나왔고 말 순장도 발견되었다.

북분에(北墳)서는 금관, 반지, 부인대(夫人帶)라고 쓰인 허리띠 장식이 나왔으며 갑옷은 출토되지 않았고 피장자는 키 150m의 여자로 추정된다.

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금반지(보물 623호)
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금제 고배(보물 626호)
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은잔(보물 627호)

부장품과 적석목곽분의 형식을 보면 남분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북분은 5세기 전반 중엽 이전에 속한다. 이에 일부 학자는 피장자는 19대 눌지왕(재위 417~ 458)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 된 금관이 지금까지 신라의 금관 중 가장 아름답다금관이 나온 곳은 황남대총을 포함하여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이다금관의 장식은 출자(出字) 형 나무모양에 좌, 우에는 사슴뿔 모양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

검총(劍塚, 100호분)

검총(劍塚)은 대릉원 내의 미추왕릉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외형은 지름 44.5m, 높이 9.7m로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다. 1916년 발굴조사 당시 철검(鐵劍)이 출토되어 검총으로 명명되었으며, ‘황남동 제100호분으로도 불리고 있다.

검총(劍塚)은 지름 44.5m, 높이 9.7m로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고분 중심부에 지반을 깊이 약 67파고 여기에 냇돌을 1.2m 두께로 깔아 무덤의 상면(床面)으로 하고 껴묻거리副葬品와 피장자를 안치시켜서 무덤의 상면을 주위 지반보다 높게 설치하였다.

매장주체부는 냇돌로 쌓은 돌무지積石로 덮었고 돌무지의 높이는 약 3.7m, 남북 지름 약 14.5m이며, 중심부 표면에는 두께 약 1518로 진흙粘土이 덮여 있었다. 그 위에 축조된 봉토는 흙과 자갈을 섞어 쌓았다. 봉토 가운데의 자갈층은 모두 고분 중심부 쪽으로 경사져 내려와 있었다.

검총(劍塚)1916년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關野貞등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신라고분들 중 가장 먼저 학술적 조사를 한 고분이다. 출토 된 유물로는 쇠투겁창(鐵矛) 2, 숫돌(砥石)1, 철검 2, 쇠칼(鐵刀)1,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 등과 후세에 매장된 토기류 몇 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철검은 다른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출토된 예가 전혀 없고, 고분기 이전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거대한 외형이나 내부 구조에 비해 출토 유물은 빈약하고 동일한 시기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섞여 있다. 가계를 중요시하였던 마립간시대 왕권의 성장을 배경으로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상 묘를 대형으로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추왕릉(味鄒王陵, 106호분)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은 대릉원(大陵園) 안에 있고 주변은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 12.4m, 직경 56.7m로 묘제는 인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이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이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으며 죽장릉 (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 미추왕의 사망 시기는 3세기인 284년으로 당시 묘제는 목곽묘로 대형의 고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조에 의하면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장지는 능재흥륜사동(陵在興輪寺洞)인데 흥륜사(興輪寺)는 여기에서 서쪽 500m 지점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일원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내물왕의 왕비와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되어 있는데 17대 내물왕(~ 4022)은 미추왕 사후 72년 만인 356년에 왕위에 올랐고, 실성왕(~ 4175)118년 후인 402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는 후대 김씨 일족이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 사후 왕권이 김씨 일족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족보를 조작한 것이다.

36대 혜공왕 때, 미추왕을 김성시조(金姓始祖)로 추앙하기 위해 미추왕릉(味鄒王陵)을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五陵)보다 서열(序列)을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서동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및 대릉원에서 묻힌 선대 왕들의 능 위치는 실전했으나 의도적으로 미추왕릉으로 지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반월성에서 나와서 대릉원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능이 미추왕릉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다. 능 앞쪽에는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대릉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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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반월성 북편에 분포하는 고분군 가운데 서북편 말단부에 있는 고분군이다. 서쪽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群)과 구분되고 남쪽의 도로에 의해 황남동고분군(皇南洞 古墳群), 황오동고분군(皇吾洞 古墳群)과 구분된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봉황대(鳳凰臺, 125호), 식리총(飾履塚, 126호), 금령총(金鈴塚, 127호),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등 4기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고분 1기와 고분 터 2기를 볼 수가 있다. 봉황대 고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식리총과 금령총, 옥포총은 1924년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하였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 전경
왼쪽부터 금령총(金鈴塚, 127호),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식리총(飾履塚, 126호)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봉황알을 닮은 전망대라는 뜻의 봉황대(鳳凰臺)는 과거 경주를 유람하는 문사나 일본을 오가는 사절단이 경주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였다. 발굴이 되지 않았고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있어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된다.
봉황대(鳳凰臺)가 왕릉급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고고학적 안목 때문이다. 그의 완당전집에 「…봉황대 동서편에 인공산이 많다…몇 해 전 무너진 인공산에서 깊이가 한 길 남짓 되는 검푸른 빛의 공동(구멍)이 보였다.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인공산’이 옛날의 왕릉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이다.

추사 김정희는 “봉황대 주변의 인공산이 무너져 그 속에서 구멍이 뚫렸는데,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신라 왕릉임이 분명하다.” 고 전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으로 이보다 큰 고분은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이나 이것은 표형분(瓢形墳)으로 2개의 무덤이 합쳐진 것이다.
봉황대 고분은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있는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 또는 자비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5세기 말∼ 6세기 초로 편년 되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 되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에는 예부터 ‘봉황 알’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풍수가가 고려 태조(918~943)에게 “배 모양으로 생긴 경주는 언젠가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침몰시켜야 한다.” 고 풍수적으로 신라 공략을 조언하였다. 그리고 그 풍수가는 신라 임금을 찾아가 세치혀를 놀렸다.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긴 서라벌(경주)은 천년동안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봉황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합니다. 서라벌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 두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겁니다.”
풍수가의 말에 혹한 신라 왕은 서라벌 한 복판에 둥글둥글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런 뒤 미추왕릉 부근의 숲속에 우물을 파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짐을 잔뜩 실은 배의 밑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라는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실제로 경주 지형은 형산강(서천)과 북천(알천), 남천으로 둘러싸인 분지(선상지, 삼각주) 지형이다.
봉황대 고분에는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과 종각 터가 있었는데 원래 봉덕사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이 북천의 홍수로 인해 폐사되어 영묘사로 옮겨졌고 영묘사가 화재로 폐사된 뒤 이곳 봉황대 고분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5년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1915년 봉황대 고분에서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기는 모습

금령총(金鈴塚, 127호분)
금령총(金鈴塚)은 두 번째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금관총 발굴 3년 후인 1924년 조선총독부주관으로 노동리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택해 발굴조사를 했다. 봉분은 원형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직경 18m, 높이 약 4.5m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금령총(金鈴塚)은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는 자갈과 갈색 점토로 쌓았고 지표 아래 3m에 지하식의 하나로 된 덧널(목곽, 4.8×3.5×1.5m)이 동, 서를 장축으로 하여,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깐 다음 설치되었고, 덧널 내부의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내면을 투조금동판(透彫金銅板)으로 장식한 나무널(목관, 1.5×0.5m)이 들어 있었다.
1924년 발굴조사 결과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작아서 키 90cm 정도의 6세 이하 왕자 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금관이 금방울 한 쌍이 장식되어「금방울이 금관에 장식되어 출토되었다」는 뜻에서「금령총(金鈴塚)」이라 했다.

발굴을 주관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였고 발굴 결과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해 신라 시대 생활을 알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출토된 중요유물을 보면 금제 허리띠金製튎帶) 및 장식품, 백화수피로 만든 관모, 금구슬,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금제 가락지, 금동제 신발, 큰칼(大刀), 마구류(馬具類) 등 다수가 있는데 특히 다리 달린 배 모양 토기와 신라 토기로서 최초로 국보가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제91호) 2점이 출토되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6세 이하 신라 왕자로 벽화의 아들 또는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금령총 재발굴에서는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보다 먼저 두 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발굴단은 두 고분에 127-1호, 127-2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령총의 조성연대를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말~ 6세기 초로 추정하고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이 6세 이하의 신라 왕자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사기> 500년(소지왕 22년) 9월 기록을 보면 왕자를 추정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제91호) 주인상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제91호) 하인상

「가을 9월, 왕이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 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경북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대목에서 학계는 두 달 뒤인 500년 11월 “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64살의 지증왕이 그 뒤를 이었다”고 했다는 기록은 500년 9 ~ 11월의 기록이 아니고 3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압축·정리한 기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지증왕은 5~6살 이전에 죽은 선왕(소지왕)의 유복자를 위해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금령총은 벽화의 아들 무덤이 되고, 봉황대는 소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금령총 주인공이 벽화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눌지왕 이후 김씨 중에서도 눌지의 직계에서 족내혼, 근친혼을 거듭했기 때문에 지방(경북 영주) 출신의 벽화 소녀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눌지, 자비, 소지로 이어지는 눌지의 직계는 아니고 소지왕과는 6촌(삼국사기), 또는 5촌(삼국유사) 사이가 된다. 계미년(503년 추정) 9월 건립된 포항 냉수리비에는 지증왕을 ‘지도로 갈문왕(왕의 근친에게 주는 봉작)’으로 지칭했다. <삼국사기> 기록(500년 11월 즉위)과는 3년의 시차가 있다.
이는 지증왕이 정변으로 죽은 소지왕의 뒤를 곧바로 잇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최소한 3년 이상 ‘섭정’한 뒤에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즉 지증왕이 3년이나 즉위하지 못했을 정도로 왕위를 두고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지증왕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서 왕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황대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마립간 시대(356~503)의 능으로 보고 내물마립간(356~402), 실성마립간(420~417), 눌지마립간(417~458), 자비마립간(458~479), 소지마립간(479~500) 그리고 재위 도중 칭호를 ‘왕’으로 바꾼 지증왕(500~514) 등 6명의 왕릉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북쪽에 차례로 조성된 봉황대 고분(125호분),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134호분(표형분 : 瓢形墳)의 주인공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두고 내물왕이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눌지왕과 실성왕이 따르고 있다.

노동동 고분군에서 본 황남대총

황남대총의 피장자가 눌지왕이라고 전제로 하면 봉황대 고분은 자비왕이고, 서봉황대 고분(130호분)은 소지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은 모두 자비왕과 관련된 인물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자비왕의 맏아들이 소지왕’이라 했고,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셋째아들이 소지왕’이라 했다. 둘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일찍 죽어 셋째가 ‘맏아들’의 지위에서 왕위를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고리 자루 큰칼 3자루가 출토된 고분으로 규모는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유물의 위상은 최상급이다. 그래서 금령총 주인공은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즉 소지왕이 죽었을 때 자비왕의 손자이자 이사지왕(소지왕의 동생, 금관총 주인공)의 어린 아들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데 요절하자 지증왕이 금령총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근 금령총에서 최소 8명의 순장자가 보인다는 견해가 있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순장 제도는 502년(지증왕 3) 2월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금령총은 502년 2월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식리총(飾履塚, 126호분)
식리총(飾履塚)은 조선총독부주관으로 금관총을 발굴조사 후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참여했다. 발굴 당시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직경 30m, 높이 약 6m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현재 봉황대 고분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분의  지표 2.7m 아래에 지하식으로 하나의 덧널(木槨, 5.25×3.3×1.2m)을 동,서 장축으로 하였고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깔고 설치한 외 덧널식(單槨式)이며, 덧널의 내부 서쪽 내면에 붉은 칠을 하고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나무널(木棺, 2.2×0.78m)을 설치하였다. 널 동쪽에는 각종 껴묻거리(부장품)가 배치되어 있었다. 덧널과 구덩이 벽 사이, 그리고 덧널의 위에는 냇돌로 돌무지를 쌓았고 돌무지 위에는 봉토를 씌웠다. 
널이 놓여 있던 곳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사용하였던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서쪽 끝부분에서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이 발견되어 식리총(飾履塚)으로 명명되었다.
이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은 거북 등 모양(龜甲形) 윤곽 안에 각종 괴수(怪獸)의 타출 무늬(打出文)가 새겨져 있어 서역(西域) 미술과 관련이 깊다.

식리총(飾履塚)은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널 동쪽의 껴묻거리 구역에서는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 백화수피모(白樺樹皮帽),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동장안교(金銅張鞍橋)를 비롯한 각종 마구(馬具) · 청동합(靑銅盒) · 자루솥(鐎斗)을 비롯해 금속용기와 칠기 · 토기 · 금은장쌍룡고리자루큰칼(金銀裝雙龍環頭大刀) 등의 무기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은 뚜껑 손잡이가 새 모양으로 된 특징을 보이고, 자루 솥은 중국 동진(東晋)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고분의 규모와 출토된 금동제 유물로 보아 왕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왕족이거나 최고의 귀족 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피장자는 널 안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로 보아 남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5세기 말경이나 6세기 초엽으로 편년 된다.

식리총(飾履塚)과 금령총(金鈴塚)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옥포총(玉圃塚)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발굴 조사하였다. 가옥 소유지의 이름 박옥포(朴玉圃)에 의해 옥포총(玉圃塚)으로 명명되었다.

옥포총(玉圃塚)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봉분은 확인되지 않지만 약 1m 두께의 남북 너비 8m 정도의 적석 상부에 1m 정도의 점토를 덮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장축 방향이 동-서향 장방형의 목곽형태로 내, 외 2중곽이며 외곽은 길이 485㎝, 너비 240㎝, 내곽은 길이 386㎝, 너비 180㎝이며, 높이 127㎝이다. 목관은 흑칠이 되었으며 크기는 알 수 없다. 묘광은 바닥을 2단으로 파냈고 하단 묘광은 추정 길이 600㎝, 너비 약 600㎝에 상단 묘광은 길이 약 730~740㎝, 너비 약 600㎝, 깊이 187㎝이다.

옥포총(玉圃塚)에서는 금은제 장신구와 백화수피제 관모, 삼루환두대도, 은제 굉갑(肱甲), 마구, 삼환령 등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및 구조 등을 통해서 볼 때 고분군 축조 시기는 5세기 말~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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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 정상에는 조선 성종 16년(1485)에 조성한 경숙옹주(敬淑翁主) 태실(胎室)과 태비(胎碑)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태실이 도굴되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태실(胎室) 유물인 태 항아리 2점과 태지(胎誌) 1점을 찾아 소장하고 있다.

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은 UNIST 입구 우측에 있는 산이다.

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이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비의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비의 뒷면에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비문으로 보아 1485년(성종 16)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사연댐 가느 길에 만나는 경숙옹주(敬淑翁主)의 태실(胎室)과 태비(胎碑) 안내판

태실의 주인은 경숙옹주(敬淑翁主)로 1483년 조선 성종[1457~1494]과 후궁 숙의 김씨(淑儀金氏) 사이에서 3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출생 후 그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태실(胎室) 및 태비(胎碑)를 조성한 것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으로 가는 길
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로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2004년 12월 16일에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胎)를 모시는 작은 돌방으로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왕실 자손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胎室)을 만들고 태(胎)를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며, 태비(胎碑)는 태실(胎室) 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胎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러한 태(胎)를 처리하는 장태(藏胎) 문화는 조선의 쇠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태비(胎碑)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일반 민간에서는 태(胎)를 길지에 묻거나, 왕겨 불을 이용하여 태웠다. 태(胎)를 태운 재는 강이나, 냇물에 띄워 보내고 태우지 않은 태(胎)는 짚으로 싸서 돌맹이와 함께 물속 깊이 버렸다.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는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산에 묻었고 태(胎)를 담은 항아리를 태호(胎壺) 또는 태옹(胎甕)이라 한다. 이때 태지(胎誌)를 태호 (胎壺) 에 함께 봉안하는데 태지(胎誌)는 태(胎)의 주인에 대한 신상명세서다.
궁중 풍속에 의하면 왕자들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지나면 태(胎)를 태호(胎壺)에 봉안하는데 주로 상감분청이다. 이때 태호(胎壺)는 태(胎)를 봉안하기 전에 백번을 씻는다. 그리고 밑바닥에 동전을 깔고 태(胎)를 봉안한 다음 붉은 비단에 뚜껑을 감싼다. 그것을 다시 외호(外壺)라고 하는 큰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 사이를 솜으로 채워 움직이지 않도록 한 다음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종이로 싼다. 태호는(胎壺) 태지(胎誌)와 함께 봉안 한다.

왕세자의 경우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따로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실은 전국 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봉(胎峯)을 선정하였고, 이곳 돌혈(突穴)에 해당하는 자리에 좌향을 정하여 태를 묻고 주위에는 석조물을 세워 왕릉같이 장엄하게 하였다. 태실(胎室)을 마련한 태봉(胎封)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일반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 일체 행위를 금지하여 특별하게 관리하였다. 이에 관한 업무는 예문관이 맡았다.
왕들의 태실(胎室)은 가능하면 궁중으로부터 거리가 먼 지방의 명당을 찾아서 마련하는데 이는 왕과 백성의 합일을 통해 왕실의 번영과 국토민안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에서 본 사연댐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되는데 아기 태실은 왕실 자손의 태를 묻고 조성한 시설물이라면, 가봉 태실은 왕이나 왕비, 추존왕을 대상으로 그 격식에 맞게 석물을 추가한 것을 뜻한다. 2023년 3월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148개소로, 아기 태실 120개소, 가봉 태실 28개소이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의 고적 조사사업에 의해 조선 왕실의 태실이 파괴되었다. 즉 1928∼1929년 이왕직이 전국에 흩어진 조선 왕실 태실(胎室)에 매안(埋安)된 태항아리와 태지(胎誌)를 수습한 후 서삼릉에 집장(集藏)했고, 이 과정에서 태실(胎室) 석물들을 훼철했기 때문이다. 그때 대상이었던 54개소의 태실지는 훼손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도굴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의도는 조선 왕들을 일본 천황 아래에 포함 시켜 우리 백성을 식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왕실 태호도 많이 도굴하였다.
이후 원 태실지에 남아 있던 석물마저도 오랜 기간 방치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리고 1970년 조선 왕실 태실 관련 유적인 서삼릉이 처음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이래로 태실(胎室)과 관련 유구와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사연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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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동 고분군(慶州 路西洞 古墳群)은 반월성의 북편 일대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지구 고분군들 가운데 북서 말단부에 있는 것으로 경주시 노서동 104번지 일대에 해당된다. 고분군 동쪽의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群)이, 남쪽의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이 있다.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은 13기의 봉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마총(馬塚, 133호분), 우총(牛塚, 131호분),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138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등 8기는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된 유물이나 봉토의 규모로 보아 6세기 때의 신라왕과 왕족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목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128호분), 서봉총(129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제138호분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쌍상총(137호분), 마총(133호분), 우총(131호분) 등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이다.

고분들 가운데 서봉총(129호분), 134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등 4기는 봉분이 표형분(瓢形墳)이고 나머지는 단일원분(單一圓墳)이다. 서북단에 자리한 130호분은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보다는 약간 작지만 거분(巨墳)으로 서봉황대 고분으로 불리고 있다.

미발굴 된 고분은  서봉황대(130호분),  132호분,  134호분, 135호분, 136호분 등 5기이다.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된 고분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봉토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는데 발굴 결과 크기는 직경 45m, 높이 12m 정도로 추산되었다.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덧널은 약 40㎝ 깊이로 지반을 파서 설치한 지상식의 외덧널식(單槨式)이었다.

발굴조사 계기는 주막집 증축 터파기 공사 도중 우연히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귀고리, 허리띠 등 온갖 황금제품이 쏟아져나왔다. 즉 1921년 9월 23일 노서리에 있는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있던 주막(酒幕)집에서 뒤뜰을 확장하려고 폐고분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금관총 유적지에 보존보호를 위해 돔형 전시공간을 구축
금관총의 돔형 전시공간과 뒤에 보이는 봉황대 고분

본격적인 조사는 일부 유물 유실과 봉토가 훼손 된 후 진행되었는데  당시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경찰서장 입회하에 발굴조사를 하였다. 모로시카를 비롯해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그리고 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등과 함께 9월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9월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 만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금관총은 비전문가에 의해 4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를 정확히 밝히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물만 수습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발굴 후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古)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덧널의 크기는 길이, 너비가 4.8×2.1m로 추정하였으나 천마총 등과 비교하면 너무 작게 추정된 것으로 원래는 이중의 덧널식인데 내부 덧널만 조사되었고 그 크기가 그러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무널(木槨)은 약 2.5×1.0m의 크기로 칠(漆)을 한 것이다.

유물로는 금관, 금제허리띠(金製銙帶) 등의 각종 장신구, 금동말안장(金銅鞍橋), 옥충(玉蟲)을 장식한 발걸이(子) 등의 마구류, 금제완(金製완), 청동초두(靑銅斗) 등의 귀금속용기와 유리용기, 토기류, 각종 철제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엽으로 추정되고 있고, 피장자는 남자라는 주장과 여자라는 주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큰 칼의 출토상태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금관총(2015)과 금령총(2018~2020)을 재발굴하였는데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의 ‘칼끝장식’ 1점이 나왔고 2013년에도 금관총 유물의 보존처리 도중 ‘이사지왕’ 명문 고리자루큰칼 2점을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에서만 출토된 3점의 ‘이사지왕’ 명문 칼이 나왔는데 금관총의 주인공, 즉 피장자는 이사지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는 ‘이사지왕’이 보이지 않는다.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 (국립경주박물관)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서봉총(瑞鳳塚)은 세 번째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봉분은 표형분(瓢形墳, 쌍분)이고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1926년에 발굴조사를 했다. 표형분(瓢形墳, 쌍분)은 북분과 남분으로 구성되고 남분을 먼저 발굴을 했고 데이비드 총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Percival David, 1892~1964)가 발굴 자금을 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발굴 결과 금령총보다 많은 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당시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를 기념하여 서봉총으로 명명되었다.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취하고, 출토된 신라 금관 장식 가운데 봉황새 모양 장식이 있어 봉황(鳳凰)의 「봉」자를 취해서 「서봉총」이라 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은 금관총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m의 거리를 두고 있다.

현재 서봉총(瑞鳳塚) 자리에는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의 발굴조사는 금령총의 발굴조사 2년 후인 1926년에 역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관총, 금령총이 먼저 발굴되어 금관이 출토되어서 경주 노동리, 노서리 일대에 분포한 신라 무덤에는 금관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시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나라의 옛 사찰과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그리스, 로마 등의 고분 발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발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일본은 마침 경주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라 고분 발굴 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당시 일본 교토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하마다가 황태자를 안내하여 발굴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고 신라 무덤이 일본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된 셈이다.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때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되어 있어 그 용지를 매립해야 했다. 이때 매립 할 흙이 필요하게 되자, 서봉총의 봉토 흙이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의 매립에 사용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봉황모양장식을 얹은 금관을 비롯한 유리제팔찌, 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 등의 각종 장신구, 청동초두(靑銅斗), 칠도각병(漆塗角甁), 유리그릇을 비롯한 각종 용기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연수원년(延壽元年) 신묘년(辛卯年) 3월에 이 은합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연수원년은 451년 또는 511년으로 추정되는데 451년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분은 이보다 늦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이고 피장자는 여성 왕족묘로 추정된다.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서봉황대 고분은 직경이 거의 80m에 달하고 신라 마립간기 말기인 6세기 초의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 봉토의 상면에서 함몰 현상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서봉황대 고분(미발굴 130호분)
미발굴 132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호우총은 남쪽에 배치되어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하였고 두 고분 모두 표형분(瓢形墳)이다.

봉토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4m 정도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금속용기류, 마구류,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출토된 청동합(靑銅盒, 보물 제1878호) 바닥에는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십(壺杅十)"이라는 4줄 16자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이 이름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호우총이라 명명하였다.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이 청동합(靑銅盒, 청동호우)은 보물 제1878호로 높이 18.5cm, 폭 23cm,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와 동일한 글자체와 제작 시점을 명확히 알려주는 명문 내용 등으로 인하여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뒤 2년이 지난 415년(장수왕 3년)이다.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있었던 제사 때에 만들어진 제기(祭器)의 하나로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銙帶)를 출토하는 최고위급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청동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 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나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은령총(銀鈴塚)은 호우총(壺杅塚)의 북편에 위치하고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발굴 당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중형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봉토의 크기는 직경 20m, 높이 5m로 내부구조는 호우총과 비슷한데, 덧널부는 지하에 설치되었으며 호우총보다 대략 30㎝ 정도 깊게 설치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두향(頭向)은 동쪽이며, 머리 쪽에 부장품이 놓여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동관과 금동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쇠솥 등의 금속제용기류, 칠기, 토기 등과 함께 약간의 철제이기류와 은장도, 그리고 마구류 일부가 수습되었다. 피장자는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널 내에 장식된 큰 칼이 없고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주인공은 왕족의 부인 정도로 여겨지며, 그 축조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쌍상총(雙床塚)은 봉분이 원형봉토분으로 노서동(路西洞)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1953년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묘제는 통일신라 초기의 부부합장분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대부분 도굴되었고 널방(玄室) 내에 2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屍床臺)가 발견되어 쌍상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되고 봉분이 훼손당한 것으로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토의 중심에는 남향한 돌방(石室)이 배치되었다. 널방(玄室)은 길이(동~서) 3.3m, 너비(남~북) 3.0m, 높이3.6m의 크기로 네 벽은 지면 위에 잘 다듬은 깬돌(割石)로 쌓았다. 벽들은 바닥에서 2m 높이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나 그 위부터는 내곡(內曲)하며 줄어들게 쌓았고 위에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뚜껑으로 얹었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네 벽을 쌓을 때는 일정한 크기의 깬돌을 사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쌓았고 그 위에는 회를 발랐다. 널방의 바닥에는 회를 깔고 중앙에 벽과 약 30㎝의 거리를 두고 길이, 너비, 두께가 2.3×2.0×0.3m인 주검 받침(屍床)을 설치하였다.

주검 받침은 자연석과 냇돌(川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먼저 북쪽에 너비 1.5m의 주검 받침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덧대어 너비 0.5m의 2차 주검 받침을 설치한 것이다. 주검 받침의 전면에도 회를 발랐는데, 원래의 주검 받침에는 0.9×0.3×0.2m인 6매의 판석에 시신의 머리·몸·다리를 놓을 만큼 조각하여 정교하게 파 놓았다.
제2주검받침에는 돌베게(石枕)와 돌발받침(石足座)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널(木棺)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안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널방의 정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을 달았는데, 널길은 길이, 너비, 높이가 3.0×1.35×1.5m 정도였다. 널문은 길이, 너비, 두께가 1.33×0.55×0.1m 크기로 문주석(門柱石)을 돌출시키고 밑에 문지방석을 놓고는 2매의 가공한 판석비(板石扉)를 달았다.

이 비(扉)에는 귀면(鬼面)으로 된 청동제좌판(靑銅製座板)에 낀 문고리가 하나씩 달렸고, 그 아래에 철제의 빗장이 걸쳐져 있었다. 비에서 1.6m 떨어진 곳부터 널길의 입구까지에 돌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였다. 돌방(石室)의 안에서는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을 비롯한 약간의 토기편만 출토되었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아 마립간기(麻立干期) 신라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마총(馬塚)은 서봉황대 고분의 전면에 배치된 표형분인 134호의 서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도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사한 결과 말뼈와 안구편(鞍具片)이 나왔다 하여 마총(馬塚)으로 불리고 있다. 그 후 1953년 국립박물관이 이 고분과 약 50m 떨어진 쌍상총과 함께 재조사를 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방과 널길 사이에 돌문이 아닌 나무문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고분 모두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조사 시, 봉분은 많이 깎여 나가고 동서와 남북의 직경이 각각 3.4m, 노면에서의 높이는 3.57m만 남아 있었으나 원래 봉분의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정도인 쌍상총과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총(馬塚)의 돌방은 지상에 남향하여 축조되었다. 널방(玄室)은 동서 3.0m, 남북 3.24m, 높이 3.7m의 크기로 남북이 약간 길지만 정방형(正方形)으로 볼 수 있다. 널방의 네 벽은 비교적 크기가 고르고 장방형(長方形)으로 다듬은 깬돌(割石)로 열과 단을 맞추어 위로 올라가며 좁혀 쌓았다.

마총의 조성연대는 통일초기(統一初期)로 판단되고 있으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문에 나무를 사용한 예는 통구지방의 고구려고분인 무용총(舞踊塚)에서 보이고 있어, 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보아 마립간(麻立干)시기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표형분인 미발굴 134호분
표형분인 134호분의 호석

 

138호분
138호분은 조사 전 이미 봉분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원래는 직경이 약 2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하에 무덤 구덩이를 파고 하나의 덧널(木槨)을 설치한 외덧널식이다. 덧널은 길이, 너비, 높이가 3.8×1.5×1.5m 크기로 추정되었고, 장축은 동-서로 두었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에 치우치게 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을 두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반지, 은반지,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 청동정(靑銅鼎), 쇠솥(鐵釜) 등의 금속용기류, 토기류, 쇠투겁창(鐵矛) 등의 철기류, 청동복륜(靑銅覆輪),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피장자는 남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우총(牛塚)은 노서동고분군 서쪽의 평지에 위치하고 7세기 전반에서 후반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와 고이즈미 아키오(小川顯夫)가 영국인 데이비드의 자금지원으로 발굴한 서봉총(노서동 129호) 남분(데이비드총)에 대한 조사성과가 부진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조사된 고분이다. 발굴 후 민가의 담장에 포함되어 있다가 지금은 주변 지역이 정비되면서 개석 1매만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발굴 당시 봉분의 높이는 약 2m 정도로 일부가 잔존하였다. 석실의 벽체가 붕괴되면서 상부에 적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석의 크기는 길이 220㎝, 너비 140㎝, 두께 40㎝의 원반 모양으로 표면에는 작은 원형의 성혈과 홈이 관찰되는 점으로 볼 때, 지석묘의 상석을 가져다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길이 395㎝, 너비 380㎝의 정방형에 가깝고, 현실의 정남쪽 중앙에 연도가 달려있다. 현실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 들어가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내부 안벽에 접한 양쪽 모서리 부분에 각각 1매의 판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관대 시설로 보인다.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이는 벽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무문전은 노서동137호분(쌍상총)에서 조사된 사례처럼 관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도의 길이는 2.6m이고 할석을 이용해 폐쇄하였다. 벽석에는 0.6㎝ 두께로 회를 발랐다. 연도와 현실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미석이 있다. 석실의 내부에서 소뼈가 출토되어 우총이란 별칭이 붙었다.

미발굴 135호분
미발굴 136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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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가장 먼저 지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의 사찰이다. 문무왕 674년(14년) 당나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서해로 오는 당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밀교 신인종의 시조인 명랑법사가 여러 개의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풀로 오방신의 상을 세워서 유가의 명승 12명과 더불어 문두루 비법을 사용하여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으로 당 수군을 서해에 수장시킨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이다.

5년 후 문무왕 679년(19년) 8월에 양지스님 감독아래 절을 다시 고쳐 세워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고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해적이 나타나 이를 물리치기 위해 명량계통의 두 스님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쳤다.
또한 도솔가로 유명한 월명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고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고 월명사(月明師)도 이 일로 생겨난 이름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절터에는 금당 터, 목탑 터, 강당 터, 단석 터 그리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 귀부의 비각(碑閣) 터, 2기의 석교(石橋)와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절의 구성은 금당을 중심으로 좌, 우에는 목탑이 배치되었고 이들을 둘러 싸는 동, 서익랑을 포함하여 동, 서, 남, 북으로 회랑을 형성하였으며 남쪽에는 중문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북쪽 밖에는 강당(講堂)과 단석(壇席)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동, 서에는 귀부 2기, 서쪽에는 당간지주 1기가 배치되어 있다.

서 귀부로 원래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에 불상과 함께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즉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찬왕사 목탑 터는 통일신라 최초의 쌍탑 터로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층수는 비슷한 시기 망덕사 목탑터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에 삼국유사 기록에는 13층이고 황룡사, 분황사의 탑이 9층 또한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의 북면 목탑을 모각한 마애탑이 7층, 9층임을 감안하면 사천왕사 목탑도 층수가 다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의 쌍탑은 감은사지 3층 석탑으로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동 목탑 터 기단부에서 4기의 녹유신장상이 출토되었는데 최근 추가 발굴조사에 따르면 녹색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벽돌로 부조상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신장상은 화살, 칼, 등을 손으로 잡고 악귀를 짓밟고 있는 상으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3종류의 신장상이 1면에 6기를 배치하여 기단부 4개 면에 총 24기가 조성되었는데 기존의 사천왕상이나 팔부중상과는 형상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이를 조각한 양지스님은 인도에서 온 스님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리고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고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쌍탑 출현은 삼국통일 후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권을 강력한 우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에 하나는 석가모니 불탑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세 시에 왕권 상징의 위엄과 현세의 복을 바라는 뜻으로 쌍탑을 조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 된 서 목탑 터의 기단 모습
양지(良志) 스님이 조각한 사천왕상을 복원한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벽전(甓塼)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서 목탑 터와 동 목탑 터

사천왕사 터 남쪽 중문의 동편에 자리 있는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반면 중문의 서편에 자리 있는 서 귀부는 원래는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래서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여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또한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로 동일한 3간공 관총형 당간지주인 분황사와 보문동사지 당간지주의 중간 형식 단계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武]) 법민(法敏)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동 목탑 터의 초석들.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동 목탑 터의 심초석
동탑 터와 서탑 터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仮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의 초석들
금당터의 본존불과 협시불의 지대석 좌우에 있는 유공초석(有孔礎石)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금당 터의 본존불의 사각 지대석과 좌우협시불 지대석
금당이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 5권 신주(神呪) 6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서단석(西壇席) 터. 단석(壇席)은 문두루도량의 법단으로 추정된다.
서단석(西壇席) 터의 초석으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동단석(東壇席) 터

삼국유사 제 4권 의해(意解) 5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삼국유사 제 5권 감통(感通) 7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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