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반월성 북편에 분포하는 고분군 가운데 서북편 말단부에 있는 고분군이다. 서쪽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群)과 구분되고 남쪽의 도로에 의해 황남동고분군(皇南洞 古墳群), 황오동고분군(皇吾洞 古墳群)과 구분된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봉황대(鳳凰臺, 125호), 식리총(飾履塚, 126호), 금령총(金鈴塚, 127호),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등 4기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고분 1기와 고분 터 2기를 볼 수가 있다. 봉황대 고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식리총과 금령총, 옥포총은 1924년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하였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봉황알을 닮은 전망대라는 뜻의 봉황대(鳳凰臺)는 과거 경주를 유람하는 문사나 일본을 오가는 사절단이 경주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였다. 발굴이 되지 않았고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있어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된다.
봉황대(鳳凰臺)가 왕릉급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고고학적 안목 때문이다. 그의 완당전집에 「…봉황대 동서편에 인공산이 많다…몇 해 전 무너진 인공산에서 깊이가 한 길 남짓 되는 검푸른 빛의 공동(구멍)이 보였다.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인공산’이 옛날의 왕릉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추사 김정희는 “봉황대 주변의 인공산이 무너져 그 속에서 구멍이 뚫렸는데,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신라 왕릉임이 분명하다.” 고 전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으로 이보다 큰 고분은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이나 이것은 표형분(瓢形墳)으로 2개의 무덤이 합쳐진 것이다.
봉황대 고분은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있는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5세기 말∼ 6세기 초로 편년 되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 되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에는 예부터 ‘봉황 알’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풍수가가 고려 태조(918~943)에게 “배 모양으로 생긴 경주는 언젠가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침몰시켜야 한다.” 고 풍수적으로 신라 공략을 조언하였다. 그리고 그 풍수가는 신라 임금을 찾아가 세치혀를 놀렸다.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긴 서라벌(경주)은 천년동안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봉황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합니다. 서라벌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 두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겁니다.”
풍수가의 말에 혹한 신라 왕은 서라벌 한 복판에 둥글둥글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런 뒤 미추왕릉 부근의 숲속에 우물을 파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짐을 잔뜩 실은 배의 밑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라는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실제로 경주 지형은 형산강(서천)과 북천(알천), 남천으로 둘러싸인 분지(선상지, 삼각주) 지형이다.
봉황대 고분에는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과 종각 터가 있었는데 원래 봉덕사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이 북천의 홍수로 인해 폐사되어 영묘사로 옮겨졌고 영묘사가 화재로 폐사된 뒤 이곳 봉황대 고분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5년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금령총(金鈴塚, 127호분)
금령총(金鈴塚)은 두 번째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금관총 발굴 3년 후인 1924년 조선총독부주관으로 노동리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택해 발굴조사를 했다. 봉분은 원형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직경 18m, 높이 약 4.5m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는 자갈과 갈색 점토로 쌓았고 지표 아래 3m에 지하식의 하나로 된 덧널(목곽, 4.8×3.5×1.5m)이 동, 서를 장축으로 하여,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깐 다음 설치되었고, 덧널 내부의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내면을 투조금동판(透彫金銅板)으로 장식한 나무널(목관, 1.5×0.5m)이 들어 있었다.
1924년 발굴조사 결과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작아서 키 90cm 정도의 6세 이하 왕자 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금관이 금방울 한 쌍이 장식되어「금방울이 금관에 장식되어 출토되었다」는 뜻에서「금령총(金鈴塚)」이라 했다.
발굴을 주관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였고 발굴 결과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해 신라 시대 생활을 알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출토된 중요유물을 보면 금제 허리띠金製튎帶) 및 장식품, 백화수피로 만든 관모, 금구슬,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금제 가락지, 금동제 신발, 큰칼(大刀), 마구류(馬具類) 등 다수가 있는데 특히 다리 달린 배 모양 토기와 신라 토기로서 최초로 국보가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제91호) 2점이 출토되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금령총 재발굴에서는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보다 먼저 두 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발굴단은 두 고분에 127-1호, 127-2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령총의 조성연대를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말~ 6세기 초로 추정하고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이 6세 이하의 신라 왕자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사기> 500년(소지왕 22년) 9월 기록을 보면 왕자를 추정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 9월, 왕이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 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경북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대목에서 학계는 두 달 뒤인 500년 11월 “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64살의 지증왕이 그 뒤를 이었다”고 했다는 기록은 500년 9 ~ 11월의 기록이 아니고 3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압축·정리한 기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지증왕은 5~6살 이전에 죽은 선왕(소지왕)의 유복자를 위해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금령총은 벽화의 아들 무덤이 되고, 봉황대는 소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금령총 주인공이 벽화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눌지왕 이후 김씨 중에서도 눌지의 직계에서 족내혼, 근친혼을 거듭했기 때문에 지방(경북 영주) 출신의 벽화 소녀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눌지, 자비, 소지로 이어지는 눌지의 직계는 아니고 소지왕과는 6촌(삼국사기), 또는 5촌(삼국유사) 사이가 된다. 계미년(503년 추정) 9월 건립된 포항 냉수리비에는 지증왕을 ‘지도로 갈문왕(왕의 근친에게 주는 봉작)’으로 지칭했다. <삼국사기> 기록(500년 11월 즉위)과는 3년의 시차가 있다.
이는 지증왕이 정변으로 죽은 소지왕의 뒤를 곧바로 잇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최소한 3년 이상 ‘섭정’한 뒤에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즉 지증왕이 3년이나 즉위하지 못했을 정도로 왕위를 두고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지증왕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서 왕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황대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마립간 시대(356~503)의 능으로 보고 내물마립간(356~402), 실성마립간(420~417), 눌지마립간(417~458), 자비마립간(458~479), 소지마립간(479~500) 그리고 재위 도중 칭호를 ‘왕’으로 바꾼 지증왕(500~514) 등 6명의 왕릉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북쪽에 차례로 조성된 봉황대 고분(125호분),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134호분(표형분 : 瓢形墳)의 주인공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두고 내물왕이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눌지왕과 실성왕이 따르고 있다.

황남대총의 피장자가 눌지왕이라고 전제로 하면 봉황대 고분은 자비왕이고, 서봉황대 고분(130호분)은 소지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은 모두 자비왕과 관련된 인물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자비왕의 맏아들이 소지왕’이라 했고,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셋째아들이 소지왕’이라 했다. 둘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일찍 죽어 셋째가 ‘맏아들’의 지위에서 왕위를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고리 자루 큰칼 3자루가 출토된 고분으로 규모는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유물의 위상은 최상급이다. 그래서 금령총 주인공은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즉 소지왕이 죽었을 때 자비왕의 손자이자 이사지왕(소지왕의 동생, 금관총 주인공)의 어린 아들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데 요절하자 지증왕이 금령총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근 금령총에서 최소 8명의 순장자가 보인다는 견해가 있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순장 제도는 502년(지증왕 3) 2월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금령총은 502년 2월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식리총(飾履塚, 126호분)
식리총(飾履塚)은 조선총독부주관으로 금관총을 발굴조사 후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참여했다. 발굴 당시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직경 30m, 높이 약 6m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현재 봉황대 고분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분의 지표 2.7m 아래에 지하식으로 하나의 덧널(木槨, 5.25×3.3×1.2m)을 동,서 장축으로 하였고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깔고 설치한 외 덧널식(單槨式)이며, 덧널의 내부 서쪽 내면에 붉은 칠을 하고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나무널(木棺, 2.2×0.78m)을 설치하였다. 널 동쪽에는 각종 껴묻거리(부장품)가 배치되어 있었다. 덧널과 구덩이 벽 사이, 그리고 덧널의 위에는 냇돌로 돌무지를 쌓았고 돌무지 위에는 봉토를 씌웠다.
널이 놓여 있던 곳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사용하였던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서쪽 끝부분에서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이 발견되어 식리총(飾履塚)으로 명명되었다.
이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은 거북 등 모양(龜甲形) 윤곽 안에 각종 괴수(怪獸)의 타출 무늬(打出文)가 새겨져 있어 서역(西域) 미술과 관련이 깊다.

널 동쪽의 껴묻거리 구역에서는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 백화수피모(白樺樹皮帽),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동장안교(金銅張鞍橋)를 비롯한 각종 마구(馬具) · 청동합(靑銅盒) · 자루솥(鐎斗)을 비롯해 금속용기와 칠기 · 토기 · 금은장쌍룡고리자루큰칼(金銀裝雙龍環頭大刀) 등의 무기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은 뚜껑 손잡이가 새 모양으로 된 특징을 보이고, 자루 솥은 중국 동진(東晋)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고분의 규모와 출토된 금동제 유물로 보아 왕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왕족이거나 최고의 귀족 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피장자는 널 안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로 보아 남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5세기 말경이나 6세기 초엽으로 편년 된다.

식리총(飾履塚)과 금령총(金鈴塚)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옥포총(玉圃塚)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발굴 조사하였다. 가옥 소유지의 이름 박옥포(朴玉圃)에 의해 옥포총(玉圃塚)으로 명명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봉분은 확인되지 않지만 약 1m 두께의 남북 너비 8m 정도의 적석 상부에 1m 정도의 점토를 덮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장축 방향이 동-서향 장방형의 목곽형태로 내, 외 2중곽이며 외곽은 길이 485㎝, 너비 240㎝, 내곽은 길이 386㎝, 너비 180㎝이며, 높이 127㎝이다. 목관은 흑칠이 되었으며 크기는 알 수 없다. 묘광은 바닥을 2단으로 파냈고 하단 묘광은 추정 길이 600㎝, 너비 약 600㎝에 상단 묘광은 길이 약 730~740㎝, 너비 약 600㎝, 깊이 187㎝이다.

옥포총(玉圃塚)에서는 금은제 장신구와 백화수피제 관모, 삼루환두대도, 은제 굉갑(肱甲), 마구, 삼환령 등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및 구조 등을 통해서 볼 때 고분군 축조 시기는 5세기 말~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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