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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반월성 북편에 분포하는 고분군 가운데 서북편 말단부에 있는 고분군이다. 서쪽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群)과 구분되고 남쪽의 도로에 의해 황남동고분군(皇南洞 古墳群), 황오동고분군(皇吾洞 古墳群)과 구분된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봉황대(鳳凰臺, 125호), 식리총(飾履塚, 126호), 금령총(金鈴塚, 127호),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등 4기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고분 1기와 고분 터 2기를 볼 수가 있다. 봉황대 고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식리총과 금령총, 옥포총은 1924년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하였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 전경
왼쪽부터 금령총(金鈴塚, 127호),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식리총(飾履塚, 126호)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봉황알을 닮은 전망대라는 뜻의 봉황대(鳳凰臺)는 과거 경주를 유람하는 문사나 일본을 오가는 사절단이 경주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였다. 발굴이 되지 않았고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있어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된다.
봉황대(鳳凰臺)가 왕릉급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고고학적 안목 때문이다. 그의 완당전집에 「…봉황대 동서편에 인공산이 많다…몇 해 전 무너진 인공산에서 깊이가 한 길 남짓 되는 검푸른 빛의 공동(구멍)이 보였다.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인공산’이 옛날의 왕릉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이다.

추사 김정희는 “봉황대 주변의 인공산이 무너져 그 속에서 구멍이 뚫렸는데,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신라 왕릉임이 분명하다.” 고 전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으로 이보다 큰 고분은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이나 이것은 표형분(瓢形墳)으로 2개의 무덤이 합쳐진 것이다.
봉황대 고분은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있는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 또는 자비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5세기 말∼ 6세기 초로 편년 되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 되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에는 예부터 ‘봉황 알’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풍수가가 고려 태조(918~943)에게 “배 모양으로 생긴 경주는 언젠가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침몰시켜야 한다.” 고 풍수적으로 신라 공략을 조언하였다. 그리고 그 풍수가는 신라 임금을 찾아가 세치혀를 놀렸다.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긴 서라벌(경주)은 천년동안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봉황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합니다. 서라벌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 두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겁니다.”
풍수가의 말에 혹한 신라 왕은 서라벌 한 복판에 둥글둥글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런 뒤 미추왕릉 부근의 숲속에 우물을 파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짐을 잔뜩 실은 배의 밑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라는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실제로 경주 지형은 형산강(서천)과 북천(알천), 남천으로 둘러싸인 분지(선상지, 삼각주) 지형이다.
봉황대 고분에는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과 종각 터가 있었는데 원래 봉덕사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이 북천의 홍수로 인해 폐사되어 영묘사로 옮겨졌고 영묘사가 화재로 폐사된 뒤 이곳 봉황대 고분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5년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1915년 봉황대 고분에서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기는 모습

금령총(金鈴塚, 127호분)
금령총(金鈴塚)은 두 번째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금관총 발굴 3년 후인 1924년 조선총독부주관으로 노동리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택해 발굴조사를 했다. 봉분은 원형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직경 18m, 높이 약 4.5m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금령총(金鈴塚)은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는 자갈과 갈색 점토로 쌓았고 지표 아래 3m에 지하식의 하나로 된 덧널(목곽, 4.8×3.5×1.5m)이 동, 서를 장축으로 하여,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깐 다음 설치되었고, 덧널 내부의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내면을 투조금동판(透彫金銅板)으로 장식한 나무널(목관, 1.5×0.5m)이 들어 있었다.
1924년 발굴조사 결과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작아서 키 90cm 정도의 6세 이하 왕자 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금관이 금방울 한 쌍이 장식되어「금방울이 금관에 장식되어 출토되었다」는 뜻에서「금령총(金鈴塚)」이라 했다.
발굴을 주관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였고 발굴 결과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해 신라 시대 생활을 알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출토된 중요유물을 보면 금제 허리띠金製튎帶) 및 장식품, 백화수피로 만든 관모, 금구슬,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금제 가락지, 금동제 신발, 큰칼(大刀), 마구류(馬具類) 등 다수가 있는데 특히 다리 달린 배 모양 토기와 신라 토기로서 최초로 국보가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제91호) 2점이 출토되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6세 이하 신라 왕자로 벽화의 아들 또는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금령총 재발굴에서는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보다 먼저 두 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발굴단은 두 고분에 127-1호, 127-2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령총의 조성연대를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말~ 6세기 초로 추정하고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이 6세 이하의 신라 왕자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사기> 500년(소지왕 22년) 9월 기록을 보면 왕자를 추정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 9월, 왕이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 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경북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대목에서 학계는 두 달 뒤인 500년 11월 “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64살의 지증왕이 그 뒤를 이었다”고 했다는 기록은 500년 9 ~ 11월의 기록이 아니고 3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압축·정리한 기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지증왕은 5~6살 이전에 죽은 선왕(소지왕)의 유복자를 위해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금령총은 벽화의 아들 무덤이 되고, 봉황대는 소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금령총 주인공이 벽화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눌지왕 이후 김씨 중에서도 눌지의 직계에서 족내혼, 근친혼을 거듭했기 때문에 지방(경북 영주) 출신의 벽화 소녀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눌지, 자비, 소지로 이어지는 눌지의 직계는 아니고 소지왕과는 6촌(삼국사기), 또는 5촌(삼국유사) 사이가 된다. 계미년(503년 추정) 9월 건립된 포항 냉수리비에는 지증왕을 ‘지도로 갈문왕(왕의 근친에게 주는 봉작)’으로 지칭했다. <삼국사기> 기록(500년 11월 즉위)과는 3년의 시차가 있다.
이는 지증왕이 정변으로 죽은 소지왕의 뒤를 곧바로 잇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최소한 3년 이상 ‘섭정’한 뒤에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즉 지증왕이 3년이나 즉위하지 못했을 정도로 왕위를 두고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지증왕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서 왕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황대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마립간 시대(356~503)의 능으로 보고 내물마립간(356~402), 실성마립간(420~417), 눌지마립간(417~458), 자비마립간(458~479), 소지마립간(479~500) 그리고 재위 도중 칭호를 ‘왕’으로 바꾼 지증왕(500~514) 등 6명의 왕릉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북쪽에 차례로 조성된 봉황대 고분(125호분),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134호분(표형분 : 瓢形墳)의 주인공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두고 내물왕이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눌지왕과 실성왕이 따르고 있다.

노동동 고분군에서 본 황남대총

황남대총의 피장자가 눌지왕이라고 전제로 하면 봉황대 고분은 자비왕이고, 서봉황대 고분(130호분)은 소지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은 모두 자비왕과 관련된 인물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자비왕의 맏아들이 소지왕’이라 했고,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셋째아들이 소지왕’이라 했다. 둘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일찍 죽어 셋째가 ‘맏아들’의 지위에서 왕위를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고리 자루 큰칼 3자루가 출토된 고분으로 규모는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유물의 위상은 최상급이다. 그래서 금령총 주인공은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즉 소지왕이 죽었을 때 자비왕의 손자이자 이사지왕(소지왕의 동생, 금관총 주인공)의 어린 아들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데 요절하자 지증왕이 금령총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근 금령총에서 최소 8명의 순장자가 보인다는 견해가 있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순장 제도는 502년(지증왕 3) 2월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금령총은 502년 2월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식리총(飾履塚, 126호분)
식리총(飾履塚)은 조선총독부주관으로 금관총을 발굴조사 후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참여했다. 발굴 당시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직경 30m, 높이 약 6m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현재 봉황대 고분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분의  지표 2.7m 아래에 지하식으로 하나의 덧널(木槨, 5.25×3.3×1.2m)을 동,서 장축으로 하였고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깔고 설치한 외 덧널식(單槨式)이며, 덧널의 내부 서쪽 내면에 붉은 칠을 하고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나무널(木棺, 2.2×0.78m)을 설치하였다. 널 동쪽에는 각종 껴묻거리(부장품)가 배치되어 있었다. 덧널과 구덩이 벽 사이, 그리고 덧널의 위에는 냇돌로 돌무지를 쌓았고 돌무지 위에는 봉토를 씌웠다. 
널이 놓여 있던 곳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사용하였던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서쪽 끝부분에서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이 발견되어 식리총(飾履塚)으로 명명되었다.
이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은 거북 등 모양(龜甲形) 윤곽 안에 각종 괴수(怪獸)의 타출 무늬(打出文)가 새겨져 있어 서역(西域) 미술과 관련이 깊다.

식리총(飾履塚)은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널 동쪽의 껴묻거리 구역에서는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 백화수피모(白樺樹皮帽),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동장안교(金銅張鞍橋)를 비롯한 각종 마구(馬具) · 청동합(靑銅盒) · 자루솥(鐎斗)을 비롯해 금속용기와 칠기 · 토기 · 금은장쌍룡고리자루큰칼(金銀裝雙龍環頭大刀) 등의 무기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은 뚜껑 손잡이가 새 모양으로 된 특징을 보이고, 자루 솥은 중국 동진(東晋)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고분의 규모와 출토된 금동제 유물로 보아 왕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왕족이거나 최고의 귀족 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피장자는 널 안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로 보아 남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5세기 말경이나 6세기 초엽으로 편년 된다.

식리총(飾履塚)과 금령총(金鈴塚)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옥포총(玉圃塚)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발굴 조사하였다. 가옥 소유지의 이름 박옥포(朴玉圃)에 의해 옥포총(玉圃塚)으로 명명되었다.

옥포총(玉圃塚)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봉분은 확인되지 않지만 약 1m 두께의 남북 너비 8m 정도의 적석 상부에 1m 정도의 점토를 덮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장축 방향이 동-서향 장방형의 목곽형태로 내, 외 2중곽이며 외곽은 길이 485㎝, 너비 240㎝, 내곽은 길이 386㎝, 너비 180㎝이며, 높이 127㎝이다. 목관은 흑칠이 되었으며 크기는 알 수 없다. 묘광은 바닥을 2단으로 파냈고 하단 묘광은 추정 길이 600㎝, 너비 약 600㎝에 상단 묘광은 길이 약 730~740㎝, 너비 약 600㎝, 깊이 187㎝이다.

옥포총(玉圃塚)에서는 금은제 장신구와 백화수피제 관모, 삼루환두대도, 은제 굉갑(肱甲), 마구, 삼환령 등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및 구조 등을 통해서 볼 때 고분군 축조 시기는 5세기 말~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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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 정상에는 조선 성종 16년(1485)에 조성한 경숙옹주(敬淑翁主) 태실(胎室)과 태비(胎碑)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태실이 도굴되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태실(胎室) 유물인 태 항아리 2점과 태지(胎誌) 1점을 찾아 소장하고 있다.

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은 UNIST 입구 우측에 있는 산이다.

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이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비의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비의 뒷면에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비문으로 보아 1485년(성종 16)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사연댐 가느 길에 만나는 경숙옹주(敬淑翁主)의 태실(胎室)과 태비(胎碑) 안내판

태실의 주인은 경숙옹주(敬淑翁主)로 1483년 조선 성종[1457~1494]과 후궁 숙의 김씨(淑儀金氏) 사이에서 3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출생 후 그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태실(胎室) 및 태비(胎碑)를 조성한 것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으로 가는 길
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로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2004년 12월 16일에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胎)를 모시는 작은 돌방으로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왕실 자손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胎室)을 만들고 태(胎)를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며, 태비(胎碑)는 태실(胎室) 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胎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러한 태(胎)를 처리하는 장태(藏胎) 문화는 조선의 쇠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태비(胎碑)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일반 민간에서는 태(胎)를 길지에 묻거나, 왕겨 불을 이용하여 태웠다. 태(胎)를 태운 재는 강이나, 냇물에 띄워 보내고 태우지 않은 태(胎)는 짚으로 싸서 돌맹이와 함께 물속 깊이 버렸다.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는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산에 묻었고 태(胎)를 담은 항아리를 태호(胎壺) 또는 태옹(胎甕)이라 한다. 이때 태지(胎誌)를 태호 (胎壺) 에 함께 봉안하는데 태지(胎誌)는 태(胎)의 주인에 대한 신상명세서다.
궁중 풍속에 의하면 왕자들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지나면 태(胎)를 태호(胎壺)에 봉안하는데 주로 상감분청이다. 이때 태호(胎壺)는 태(胎)를 봉안하기 전에 백번을 씻는다. 그리고 밑바닥에 동전을 깔고 태(胎)를 봉안한 다음 붉은 비단에 뚜껑을 감싼다. 그것을 다시 외호(外壺)라고 하는 큰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 사이를 솜으로 채워 움직이지 않도록 한 다음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종이로 싼다. 태호는(胎壺) 태지(胎誌)와 함께 봉안 한다.

왕세자의 경우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따로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실은 전국 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봉(胎峯)을 선정하였고, 이곳 돌혈(突穴)에 해당하는 자리에 좌향을 정하여 태를 묻고 주위에는 석조물을 세워 왕릉같이 장엄하게 하였다. 태실(胎室)을 마련한 태봉(胎封)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일반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 일체 행위를 금지하여 특별하게 관리하였다. 이에 관한 업무는 예문관이 맡았다.
왕들의 태실(胎室)은 가능하면 궁중으로부터 거리가 먼 지방의 명당을 찾아서 마련하는데 이는 왕과 백성의 합일을 통해 왕실의 번영과 국토민안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에서 본 사연댐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되는데 아기 태실은 왕실 자손의 태를 묻고 조성한 시설물이라면, 가봉 태실은 왕이나 왕비, 추존왕을 대상으로 그 격식에 맞게 석물을 추가한 것을 뜻한다. 2023년 3월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148개소로, 아기 태실 120개소, 가봉 태실 28개소이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의 고적 조사사업에 의해 조선 왕실의 태실이 파괴되었다. 즉 1928∼1929년 이왕직이 전국에 흩어진 조선 왕실 태실(胎室)에 매안(埋安)된 태항아리와 태지(胎誌)를 수습한 후 서삼릉에 집장(集藏)했고, 이 과정에서 태실(胎室) 석물들을 훼철했기 때문이다. 그때 대상이었던 54개소의 태실지는 훼손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도굴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의도는 조선 왕들을 일본 천황 아래에 포함 시켜 우리 백성을 식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왕실 태호도 많이 도굴하였다.
이후 원 태실지에 남아 있던 석물마저도 오랜 기간 방치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리고 1970년 조선 왕실 태실 관련 유적인 서삼릉이 처음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이래로 태실(胎室)과 관련 유구와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사연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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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동 고분군(慶州 路西洞 古墳群)은 반월성의 북편 일대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지구 고분군들 가운데 북서 말단부에 있는 것으로 경주시 노서동 104번지 일대에 해당된다. 고분군 동쪽의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群)이, 남쪽의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이 있다.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은 13기의 봉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마총(馬塚, 133호분), 우총(131호분),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138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등 8기는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된 유물이나 봉토의 규모로 보아 6세기 때의 신라왕과 왕족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목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128호분), 서봉총(129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제138호분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쌍상총(137호분), 마총(133호분), 우총(131호분) 등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이다.

고분들 가운데 서봉총(129호분), 134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등 4기는 봉분이 표형분(瓢形墳)이고 나머지는 단일원분(單一圓墳)이다. 서북단에 자리한 130호분은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보다는 약간 작지만 거분(巨墳)으로 서봉황대 고분으로 불리고 있다.

미발굴 된 고분은  서봉황대(130호분),  132호분,  134호분, 135호분, 136호분 등 5기이다.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된 고분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봉토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는데 발굴 결과 크기는 직경 45m, 높이 12m 정도로 추산되었다.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덧널은 약 40㎝ 깊이로 지반을 파서 설치한 지상식의 외덧널식(單槨式)이었다.

발굴조사 계기는 주막집 증축 터파기 공사 도중 우연히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귀고리, 허리띠 등 온갖 황금제품이 쏟아져나왔다. 즉 1921년 9월 23일 노서리에 있는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있던 주막(酒幕)집에서 뒤뜰을 확장하려고 폐고분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금관총 유적지에 보존보호를 위해 돔형 전시공간을 구축
금관총의 돔형 전시공간과 뒤에 보이는 봉황대 고분

본격적인 조사는 일부 유물 유실과 봉토가 훼손 된 후 진행되었는데  당시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경찰서장 입회하에 발굴조사를 하였다. 모로시카를 비롯해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그리고 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등과 함께 9월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9월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 만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금관총은 비전문가에 의해 4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를 정확히 밝히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물만 수습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발굴 후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古)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덧널의 크기는 길이, 너비가 4.8×2.1m로 추정하였으나 천마총 등과 비교하면 너무 작게 추정된 것으로 원래는 이중의 덧널식인데 내부 덧널만 조사되었고 그 크기가 그러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무널(木槨)은 약 2.5×1.0m의 크기로 칠(漆)을 한 것이다.

유물로는 금관, 금제허리띠(金製銙帶) 등의 각종 장신구, 금동말안장(金銅鞍橋), 옥충(玉蟲)을 장식한 발걸이(子) 등의 마구류, 금제완(金製완), 청동초두(靑銅斗) 등의 귀금속용기와 유리용기, 토기류, 각종 철제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엽으로 추정되고 있고, 피장자는 남자라는 주장과 여자라는 주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큰 칼의 출토상태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금관총(2015)과 금령총(2018~2020)을 재발굴하였는데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의 ‘칼끝장식’ 1점이 나왔고 2013년에도 금관총 유물의 보존처리 도중 ‘이사지왕’ 명문 고리자루큰칼 2점을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에서만 출토된 3점의 ‘이사지왕’ 명문 칼이 나왔는데 금관총의 주인공, 즉 피장자는 이사지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는 ‘이사지왕’이 보이지 않는다.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 (국립경주박물관)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서봉총(瑞鳳塚)은 세 번째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봉분은 표형분(瓢形墳, 쌍분)이고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1926년에 발굴조사를 했다. 표형분(瓢形墳, 쌍분)은 북분과 남분으로 구성되고 남분을 먼저 발굴을 했고 데이비드 총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Percival David, 1892~1964)가 발굴 자금을 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발굴 결과 금령총보다 많은 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당시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를 기념하여 서봉총으로 명명되었다.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취하고, 출토된 신라 금관 장식 가운데 봉황새 모양 장식이 있어 봉황(鳳凰)의 「봉」자를 취해서 「서봉총」이라 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은 금관총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m의 거리를 두고 있다.

현재 서봉총(瑞鳳塚) 자리에는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의 발굴조사는 금령총의 발굴조사 2년 후인 1926년에 역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관총, 금령총이 먼저 발굴되어 금관이 출토되어서 경주 노동리, 노서리 일대에 분포한 신라 무덤에는 금관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시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나라의 옛 사찰과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그리스, 로마 등의 고분 발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발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일본은 마침 경주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라 고분 발굴 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당시 일본 교토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하마다가 황태자를 안내하여 발굴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고 신라 무덤이 일본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된 셈이다.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때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되어 있어 그 용지를 매립해야 했다. 이때 매립 할 흙이 필요하게 되자, 서봉총의 봉토 흙이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의 매립에 사용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봉황모양장식을 얹은 금관을 비롯한 유리제팔찌, 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 등의 각종 장신구, 청동초두(靑銅斗), 칠도각병(漆塗角甁), 유리그릇을 비롯한 각종 용기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연수원년(延壽元年) 신묘년(辛卯年) 3월에 이 은합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연수원년은 451년 또는 511년으로 추정되는데 451년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분은 이보다 늦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서봉황대 고분은 직경이 거의 80m에 달하고 신라 마립간기 말기인 6세기 초의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 봉토의 상면에서 함몰 현상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서봉황대 고분(미발굴 130호분)
미발굴 132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호우총은 남쪽에 배치되어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하였고 두 고분 모두 표형분(瓢形墳)이다.

봉토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4m 정도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금속용기류, 마구류,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출토된 청동합(靑銅盒, 보물 제1878호) 바닥에는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십(壺杅十)"이라는 4줄 16자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이 이름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호우총이라 명명하였다.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이 청동합(靑銅盒, 청동호우)은 보물 제1878호로 높이 18.5cm, 폭 23cm,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와 동일한 글자체와 제작 시점을 명확히 알려주는 명문 내용 등으로 인하여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뒤 2년이 지난 415년(장수왕 3년)이다.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있었던 제사 때에 만들어진 제기(祭器)의 하나로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銙帶)를 출토하는 최고위급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청동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 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나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은령총(銀鈴塚)은 호우총(壺杅塚)의 북편에 위치하고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발굴 당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중형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봉토의 크기는 직경 20m, 높이 5m로 내부구조는 호우총과 비슷한데, 덧널부는 지하에 설치되었으며 호우총보다 대략 30㎝ 정도 깊게 설치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두향(頭向)은 동쪽이며, 머리 쪽에 부장품이 놓여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동관과 금동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쇠솥 등의 금속제용기류, 칠기, 토기 등과 함께 약간의 철제이기류와 은장도, 그리고 마구류 일부가 수습되었다. 피장자는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널 내에 장식된 큰 칼이 없고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주인공은 왕족의 부인 정도로 여겨지며, 그 축조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쌍상총(雙床塚)은 봉분이 원형봉토분으로 노서동(路西洞)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1953년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묘제는 통일신라 초기의 부부합장분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대부분 도굴되었고 널방(玄室) 내에 2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屍床臺)가 발견되어 쌍상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되고 봉분이 훼손당한 것으로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토의 중심에는 남향한 돌방(石室)이 배치되었다. 널방(玄室)은 길이(동~서) 3.3m, 너비(남~북) 3.0m, 높이3.6m의 크기로 네 벽은 지면 위에 잘 다듬은 깬돌(割石)로 쌓았다. 벽들은 바닥에서 2m 높이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나 그 위부터는 내곡(內曲)하며 줄어들게 쌓았고 위에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뚜껑으로 얹었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네 벽을 쌓을 때는 일정한 크기의 깬돌을 사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쌓았고 그 위에는 회를 발랐다. 널방의 바닥에는 회를 깔고 중앙에 벽과 약 30㎝의 거리를 두고 길이, 너비, 두께가 2.3×2.0×0.3m인 주검 받침(屍床)을 설치하였다.

주검 받침은 자연석과 냇돌(川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먼저 북쪽에 너비 1.5m의 주검 받침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덧대어 너비 0.5m의 2차 주검 받침을 설치한 것이다. 주검 받침의 전면에도 회를 발랐는데, 원래의 주검 받침에는 0.9×0.3×0.2m인 6매의 판석에 시신의 머리·몸·다리를 놓을 만큼 조각하여 정교하게 파 놓았다.
제2주검받침에는 돌베게(石枕)와 돌발받침(石足座)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널(木棺)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안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널방의 정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을 달았는데, 널길은 길이, 너비, 높이가 3.0×1.35×1.5m 정도였다. 널문은 길이, 너비, 두께가 1.33×0.55×0.1m 크기로 문주석(門柱石)을 돌출시키고 밑에 문지방석을 놓고는 2매의 가공한 판석비(板石扉)를 달았다.

이 비(扉)에는 귀면(鬼面)으로 된 청동제좌판(靑銅製座板)에 낀 문고리가 하나씩 달렸고, 그 아래에 철제의 빗장이 걸쳐져 있었다. 비에서 1.6m 떨어진 곳부터 널길의 입구까지에 돌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였다. 돌방(石室)의 안에서는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을 비롯한 약간의 토기편만 출토되었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아 마립간기(麻立干期) 신라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마총(馬塚)은 서봉황대 고분의 전면에 배치된 표형분인 134호의 서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도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사한 결과 말뼈와 안구편(鞍具片)이 나왔다 하여 마총(馬塚)으로 불리고 있다. 그 후 1953년 국립박물관이 이 고분과 약 50m 떨어진 쌍상총과 함께 재조사를 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방과 널길 사이에 돌문이 아닌 나무문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고분 모두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조사 시, 봉분은 많이 깎여 나가고 동서와 남북의 직경이 각각 3.4m, 노면에서의 높이는 3.57m만 남아 있었으나 원래 봉분의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정도인 쌍상총과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총(馬塚)의 돌방은 지상에 남향하여 축조되었다. 널방(玄室)은 동서 3.0m, 남북 3.24m, 높이 3.7m의 크기로 남북이 약간 길지만 정방형(正方形)으로 볼 수 있다. 널방의 네 벽은 비교적 크기가 고르고 장방형(長方形)으로 다듬은 깬돌(割石)로 열과 단을 맞추어 위로 올라가며 좁혀 쌓았다.

마총의 조성연대는 통일초기(統一初期)로 판단되고 있으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문에 나무를 사용한 예는 통구지방의 고구려고분인 무용총(舞踊塚)에서 보이고 있어, 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보아 마립간(麻立干)시기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표형분인 미발굴 134호분
표형분인 134호분의 호석

 

138호분
138호분은 조사 전 이미 봉분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원래는 직경이 약 2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하에 무덤 구덩이를 파고 하나의 덧널(木槨)을 설치한 외덧널식이다. 덧널은 길이, 너비, 높이가 3.8×1.5×1.5m 크기로 추정되었고, 장축은 동-서로 두었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에 치우치게 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을 두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반지, 은반지,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 청동정(靑銅鼎), 쇠솥(鐵釜) 등의 금속용기류, 토기류, 쇠투겁창(鐵矛) 등의 철기류, 청동복륜(靑銅覆輪),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피장자는 남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우총(牛塚)은 노서동고분군 서쪽의 평지에 위치하고 7세기 전반에서 후반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와 고이즈미 아키오(小川顯夫)가 영국인 데이비드의 자금지원으로 발굴한 서봉총(노서동 129호) 남분(데이비드총)에 대한 조사성과가 부진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조사된 고분이다. 발굴 후 민가의 담장에 포함되어 있다가 지금은 주변 지역이 정비되면서 개석 1매만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발굴 당시 봉분의 높이는 약 2m 정도로 일부가 잔존하였다. 석실의 벽체가 붕괴되면서 상부에 적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석의 크기는 길이 220㎝, 너비 140㎝, 두께 40㎝의 원반 모양으로 표면에는 작은 원형의 성혈과 홈이 관찰되는 점으로 볼 때, 지석묘의 상석을 가져다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길이 395㎝, 너비 380㎝의 정방형에 가깝고, 현실의 정남쪽 중앙에 연도가 달려있다. 현실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 들어가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내부 안벽에 접한 양쪽 모서리 부분에 각각 1매의 판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관대 시설로 보인다.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이는 벽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무문전은 노서동137호분(쌍상총)에서 조사된 사례처럼 관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도의 길이는 2.6m이고 할석을 이용해 폐쇄하였다. 벽석에는 0.6㎝ 두께로 회를 발랐다. 연도와 현실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미석이 있다. 석실의 내부에서 소뼈가 출토되어 우총이란 별칭이 붙었다.

미발굴 135호분
미발굴 136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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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가장 먼저 지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의 사찰이다. 문무왕 674년(14년) 당나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서해로 오는 당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밀교 신인종의 시조인 명랑법사가 여러 개의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풀로 오방신의 상을 세워서 유가의 명승 12명과 더불어 문두루 비법을 사용하여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으로 당 수군을 서해에 수장시킨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이다.

5년 후 문무왕 679년(19년) 8월에 양지스님 감독아래 절을 다시 고쳐 세워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고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해적이 나타나 이를 물리치기 위해 명량계통의 두 스님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쳤다.
또한 도솔가로 유명한 월명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고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고 월명사(月明師)도 이 일로 생겨난 이름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절터에는 금당 터, 목탑 터, 강당 터, 단석 터 그리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 귀부의 비각(碑閣) 터, 2기의 석교(石橋)와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절의 구성은 금당을 중심으로 좌, 우에는 목탑이 배치되었고 이들을 둘러 싸는 동, 서익랑을 포함하여 동, 서, 남, 북으로 회랑을 형성하였으며 남쪽에는 중문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북쪽 밖에는 강당(講堂)과 단석(壇席)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동, 서에는 귀부 2기, 서쪽에는 당간지주 1기가 배치되어 있다.

서 귀부로 원래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에 불상과 함께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즉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찬왕사 목탑 터는 통일신라 최초의 쌍탑 터로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층수는 비슷한 시기 망덕사 목탑터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에 삼국유사 기록에는 13층이고 황룡사, 분황사의 탑이 9층 또한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의 북면 목탑을 모각한 마애탑이 7층, 9층임을 감안하면 사천왕사 목탑도 층수가 다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의 쌍탑은 감은사지 3층 석탑으로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동 목탑 터 기단부에서 4기의 녹유신장상이 출토되었는데 최근 추가 발굴조사에 따르면 녹색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벽돌로 부조상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신장상은 화살, 칼, 등을 손으로 잡고 악귀를 짓밟고 있는 상으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3종류의 신장상이 1면에 6기를 배치하여 기단부 4개 면에 총 24기가 조성되었는데 기존의 사천왕상이나 팔부중상과는 형상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이를 조각한 양지스님은 인도에서 온 스님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리고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고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쌍탑 출현은 삼국통일 후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권을 강력한 우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에 하나는 석가모니 불탑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세 시에 왕권 상징의 위엄과 현세의 복을 바라는 뜻으로 쌍탑을 조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 된 서 목탑 터의 기단 모습
양지(良志) 스님이 조각한 사천왕상을 복원한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벽전(甓塼)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서 목탑 터와 동 목탑 터

사천왕사 터 남쪽 중문의 동편에 자리 있는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반면 중문의 서편에 자리 있는 서 귀부는 원래는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래서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여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또한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로 동일한 3간공 관총형 당간지주인 분황사와 보문동사지 당간지주의 중간 형식 단계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武]) 법민(法敏)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동 목탑 터의 초석들.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동 목탑 터의 심초석
동탑 터와 서탑 터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仮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의 초석들
금당터의 본존불과 협시불의 지대석 좌우에 있는 유공초석(有孔礎石)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금당 터의 본존불의 사각 지대석과 좌우협시불 지대석
금당이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 5권 신주(神呪) 6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서단석(西壇席) 터. 단석(壇席)은 문두루도량의 법단으로 추정된다.
서단석(西壇席) 터의 초석으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동단석(東壇席) 터

삼국유사 제 4권 의해(意解) 5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삼국유사 제 5권 감통(感通) 7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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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는 진평왕릉에서 동남쪽으로 약 400m 떨어진 논 중앙(경주시 보문동 848-6번지 외)에 위치하고 있고 그곳에는 연화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910) 1기와 석탑재 몇 구가 흩어져 있다. 주변에는 진평왕릉을 비롯하여 보문동 사지, 황복사지, 보문동고분군 등 다수의 유적들이 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 에 대한 문헌기록은 현재 전무하며, 사찰의 명칭이나 연혁에 대해서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보문동 사지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보문동 북사지로 부르게 되었다. 이 사지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는 아직까지 실시된 적이 없으며, 단지 유적 내에 위치한 연화문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몇몇 조사·연구가 실시된바 있다.

경주시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 해발 252m)의 서쪽 능선에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보문동 고분군(普門洞古墳群)이 있다. 이 고분군은 5~7세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과 완총, 금환총이 확인되었는데 여기 보문동 사지는 이들 지배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에 있는 연화문 당간지주 (幢竿支柱 ,  보물 제 910 호 )

연화문 당간지주 주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사찰 전체의 영역이나 가람배치에 대하여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연화문 당간지주로부터 북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석탑 부재 4매가 흩어져 있어, 보문동 사지(목탑지)와는 다른 별개의 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사역 내 남아 있는 연화문당간지주와 석탑재 등을 참고했을 때, 적어도 통일신라 9세기경에는 사찰이 유지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인 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그의 저서에서 보문리사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北方 幢竿支柱라는 제목으로 이 당간지주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하였다. 당시 후지시마는 보문리사지두 개의 당간지주 즉 보문동 사지 당간지주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3년 이호관 선생은경주지구유적조사 약보에서 보문리 당간지주와 폐탑재라는 제목으로 당간지주를 포함한 주변에 산재 된 석물 등의 현황을 보고한 적이 있는데 이 보고서에는 연화문 당간지주와 함께 한 변이 127, 높이 40의 폐탑재(기단석부재)가 잔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 연화문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경주 진평왕릉 남쪽 논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는 약 144인데 지주 하부에 치석된 부분을 보았을 때, 일정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양 지주는 동서방향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간격은 약 60이다. 양 지주의 상부내면에는 폭 13의 간구가 확인되는데, 당간을 고정하는 장치가 있었던 부분으로 생각된다.

또한 지주 외 측면에는 최상부로부터 아래로 약 52까지 한단을 낮게 하여 사각형의 틀을 마련한 뒤, 그 안에 직경 47의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연화문은 8엽의 복판연화문으로 중앙에는 자방이 있고, 그 안에 17개의 연자를 도드라지게 새기었다.

통일신라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장식을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당간지주는 화려한 연화문 장식이 있어 매우 특이한 예로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당간지주(幢竿支柱) 중 연화문이 있는 유일한 예로 볼 수 있다.

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렸는데, 깃발을 당(幢),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연화문당간지주에서 북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논둑에 석탑부재 4매가 흩어져 있다. 부재 4매 중 3매는자형 귀틀석으로 가로 100, 세로 131, 높이 45이며 3매 모두 같은 크기이다. 원래는 4개의 부재가 결구된 석탑 하층기단석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지표상에는 3개의 부재만 확인될 뿐이다. 1개의 부재가 보완된다면, 전체가 가로·세로 약 230의 정방형 하층기단석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각 부재 가장 자리에는 폭 2427, 높이 약 22의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윗면은 경사가 없이 편평하다.

나머지 부재 1매는 가로 73, 세로 69, 높이 91의 평면 삼각형의 석재이다. 두 면은 치석되었으나, 다른 한 면은 치석되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치석된 두 면 중 한쪽 면에는 폭 15의 기둥이 모각되어 있지만, 다른 한 면은 조각 흔적 없이 편평한 것으로 보아 다른 석재와 결합된 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석탑부재 역시 원래는 4개의 부재가 결구된 상층기단면석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며, 모각된 기둥은 상층기단의 우주로 이해 할 수 있다.

현재 사지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사찰과 관련된 유구 훼손이 심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잔존하는 석탑재의 경우 보호시설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훼손이나 망실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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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 사지(普門洞 寺址)는 경주시에서 보문관광단지로 가는 국도 남편 보문동(보문동 848-6번지 외 851, 856-2, 857, 757, 758-1, 760 등)의 넓은 평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터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낭산이 있고, 북쪽에는 진평왕릉, 남쪽으로는 효공왕릉 등이 있다. 절터 內에는 금당지, 목탑지 등의 유구가 있는데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만 당간지주(幢竿支柱), 석등 지대석, 석조, 초석 등 다수의 석물들을 볼 수가  있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와 금당지

절터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처음 이루어졌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고적조사에서 ‘普門寺’, ‘普門’이라고 새긴 기와가 절터 부근에서 출토되어  보문사로 비정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일인 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의해 전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8년과 1991년에 문화재관리국과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각각 실시하였다.
가람배치는 7×5칸의 금당을 중심으로 그 전방 좌, 우에 목탑을 23m 간격으로 배치하고 금당 북편에는 강당, 남편에는 중문과 남문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강당지와 중문지, 남문지의 위치 확인은 불가능하나,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조사 할 당시에는 강당지, 문지, 그리고 회랑지의 일부 초석이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금당지
금당지 초석과 지대석

절터의 규모와 현재 남아 있는 유구 등 비교하였을 때, 7세기 후반에 창건 된 사천왕사, 망덕사지 가람배치와 유사성이 많다. 금당지 남편 동서쪽에 목탑이 배치된 점이나 금당지 북편 동서쪽에 건물지가 배치된 점, 그리고 금당지 기단이 가구식 기단으로 축조되었다는 점 등 현재 남아있는 유구 등을 비교해보면, 세 절터에서 공통된 특징들이 다수 확인된다.
창건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사천왕사(679년)와 망덕사(685년경)의 창건연대를 참고했을 때, 보문사 역시 7세기 후반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문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신라 경문왕 11년(871)에 황룡사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매납하였던 황룡사「刹柱本紀」에 보문사 상좌승 은전(㢋㭇)이 도감전으로 대탑불사에 참석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금당지와 동탑지
서탑지와 금당지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금동사리기 명경통(‘仲和三年’ 883년)에도 보문사 현여대덕이 대석탑 중수 시 무구정광경에 의거하여 소탑 77기를 만들어 대탑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시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 해발 252m)의 서쪽 능선에서 남북 방향으로 보문동 고분군(普門洞古墳群)이 있는데 5~7세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과 완총, 금환총이 확인되었는데 여기 보문동 절터는 창건 당시 이들 지배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보물 제64호)는 금당 북쪽에 1기가 남아 있는데 1매의 대형 화강암 석재를 길이 244㎝, 너비 90㎝, 깊이 62㎝의 장방형으로 파내었는데, 외부 장식이나 문양이 없는 간소한 형식의 방형석조이다. 수조의 측벽 바닥에는 지름 7㎝ 내외의 배수용 구멍이 한 개 뚫려있다. 석조는 보통 급수 용기라고 알려져 있으나 부처에게 공양할 연꽃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

보문동 절터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23호)는 금당지 남북중심축선과 탑지 동서연장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140m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남북으로 2개의 지주가 있는데, 남쪽 지주는 완전하나 북쪽 지주는 상부가 결실되었다.

보문동 절터의 당간지주( 幢竿支柱, 보물 제123호)는 남쪽 지주는 완전하나 북쪽 지주는 상부가 결실되었다.

남쪽 지주의 간공은 방형으로 현 지표면에서 10㎝, 155㎝, 300㎝의 높이에 1개씩 총 3개가 있으며, 3개 모두 구멍 크기는 15×18㎝정도이다. 반면 북쪽 지주는 상·중 2개의 간공만이 확인된다. 또한 남쪽 지주의 간공은 지주를 관통하는 것에 반해 북쪽 지주의 간공은 지주 너비의 1/2만 뚫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정대를 남에서 북으로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 사이 지표면에는 치석된 석재가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하부 지대석인지 북쪽 지주의 결실부인지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렸는데, 깃발을 당(幢),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이외에도 수십 개의 초석 및 기단 지대석 등이 흩어져 있고 초석은 원형주좌초석과 방형초석이 대부분이며 고막이가 있는 초석도 일부 있다.

금당지 주변에 있는 석등 옥개석
서탑지에 있는 연화문 석재
이영석재(異形石材)

보문동 절터는 경주지역 폐사지 중에서 가장 많은 석재가 지표상에 노출되어있는 유적 중 하나이다. 하지만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석조를 제외하고는 기타 유구 및 유물들은 보호시설 없이 논 가운데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경작 등으로 인하여 유구의 훼손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 후지시마의 보고내용과 이후 두 차례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 현상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동안 유구가 훼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부 확인된 금당지 북쪽 동편 건물지(토단)의 경우 현재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며, 금당지 남편에서 있었다는 중문지의 흔적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절터 내에 흩어져있는 초석과 석물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원위치에서 더 이탈하고 있어, 원형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들어 질 가능성이 높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탑지에서 본 금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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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명리 삼층석탑 (龍明里 三層石塔, 보물 제908호)은 경주 서북쪽인 건천읍 용명리(龍明里) 탑골(塔谷, 856-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8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탑골(塔谷) 마을은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불타버리고 그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라 때의 3층 석탑이 마을 옆에 있었으므로 '탑골' 혹은 '탑리(塔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탑골 마을 서쪽은 밀구(密耳)라는 마을이 있는데 구미산으로 용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용암(龍岩)이라는 바위가 있어 용암의 용()자와 명장(明莊) 마을의 명()자를 따서 '용명(龍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혹은 귀가 없는 미륵불이 있었다고 하여 '밀이촌(密耳村)' 또는 '밀귀'라고 부르던 것이 그 후 '밀구'로 바뀌어 불러졌다 한다.

북쪽에는 명장(明莊) 마을이 있는데 파평 윤씨(坡平 尹氏) 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깊은 산골이라 산나물이 많아 부근에 명성이 났다고 하여 '명장(明莊)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터 주변의 동쪽과 북쪽 산기슭은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남쪽과 서쪽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원래의 지형은 알 수 없고 절의 범위나 방향, 배치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또한 석물 등 절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도괴의 위험이 있던 석탑을 개축할 때 탑신에서 청동불상 1구가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또한 2005413일 그동안 일실되었던 3층 옥개석 위의 노반석이 건천초등학교 교정에서 확인되어 문화재청과 경주시에서 복원하였다.

용명리 삼층석탑(龍明里 三層石塔)은 높이 5.6m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2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기단부에 28, 탑신부 6매로, 상륜부에 1매로 모두 35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하 기단 면석에는 탱주가 2주씩이며,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있다.

기단부의 1(하층) 기단은 면석의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하여 3()로 구분되어 있다. 지대석과 면석이 1매석으로 크기가 같은'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 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하다. 가운데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었다.

기단갑석 역시 8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였다. 기단갑석 위는 2단의 호형과 각형 받침(괴임)으로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2(상층) 기단은 1층 기단처럼 면석의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동일한 크기와 모양이다. 가운데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어서 모두 8매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갑석은 2단의 갑석에 4매가 사용되었다. 갑석 위는 2단의 각형 받침(괴임)으로 1층 탑신(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지붕)는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塔身)의 각 면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문비 등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으로 되어 있다고 각 옥개의 낙수면 위에는 각형 2단 탑신 받침이 있다. 낙수면은 경사를 이루다가 단부에서 살짝 반전하고, 귀마루의 합각선은 뚜렷하다. 전각 양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탑신(塔身) 2층 이상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낸다.

상륜부는 노반을 포함하여 모두 결실된 상태였으나, 지역 시의원의 제보와 경주시 담당자의 노력과 의지로 건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노반석을 2005413일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서 65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노반은 방형 육면체로 상단부에 2단으로 돌출된 돌림띠가 있고, 가운데 원형 찰주공이 뚫려있다.

경주시는 한때 이곳 탑골마을을 동경이마을로 정해 경주개 새끼 동경이 7마리를 분양받아 사육하게 하여 동경이를 활용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지역의 특화사업으로 발전시켜 하였다. 지금은 퇴락하여 쓸쓸하기가 그지없다. 경주시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문화콘텐츠 지속성을 유지했으면 바랄뿐이다.

탑골 동경이마을의 벽화

경주개 동경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토종개로 꼬리가 없거나 짧으며 성격은 온순하고 매우 친화적인 토종개다. 동경이라는 이름은 경주의 옛 지명인 동경(東京)에서 사육하는 개라는 의미로, 신라시대부터 경주지역에서 사육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멸종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동경잡기(東京雜記)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옛 문헌을 통해 경주지역에서 널리 사육되던 개로 기록돼 있고 신라고분에서 토우로 발굴되는 등 그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에는 유전자 분석 결과 한국 토종개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져 문화재청으로부터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됐다.

용명리 삼층석탑 (龍明里 三層石塔) 북쪽에 있는 탑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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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 경주시 구황동 103번지)는 경주 낭산(狼山)의 북동편 기슭에 있는 석탑으로 마을 이름은 황복또는 탑거리이며 석탑은 마을 초입 좌측 밭 가운데 있다.

이 석탑은 신라 31대 신문왕이 사망 후 그 아들인 32대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효소왕 1(692)에 세운 탑으로, 이중기단에 높이 7.3m의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33대 성덕왕이 즉위 5(706)에 사리와 불상 등을 추가하여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탑 서쪽은 산으로 막혀서 건물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없고 동편과 남편은 넓은 경작지와 마을이다. 지형으로 보아 장항리사지와 같이 탑을 서쪽에, 금당을 동쪽에 둔 소위 좌전우탑(左殿右塔) 가람배치로 추정된다. 탑 동남편에는 목이 잘리는 등 훼손이 심한 귀부 한 쌍이 나란히 남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으나 사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 동남편에는 목이 잘리는 등 훼손이 심한 귀부 한 쌍이 나란히 남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으나 사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78월에 발굴 조사를 하였고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구를 발견했다.

이 절터가 황복사지(皇福寺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든 근거는 1937년경에 낭산 동쪽 기슭에서 일본인이 수집한 명문기와(銘文瓦)이다. 이 기와는 당시 부산에 거주하였던 일본사람이 수집하여 소장하였던 것으로 기와 뒷면에는 황복사(皇福寺)’  또는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황복사의 창건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5 의상전교(義湘傳敎) 기록에 의하면,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625~702)‘29세에 서울의 황복사로 가서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다. 29세는 진덕여왕(眞德女王) 7(653)에 해당되어 황복사는 진덕여왕 때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황복사지(皇福寺址)에는 목탑지로 볼 수 있는 유적은 없으나,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5 의상전교(義湘傳敎) 기록을 보면 창건 당시 목탑이 세워졌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의상대사가 중국으로 유학한 뒤 귀국하여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스님들과 탑을 돌 때면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닥다리가 없었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이때 의상대사의 나이는 46세로 문무왕 10(670)이다. 당시 신라 왕경에는 아직 석탑이 건립된 적이 없는 시대로 679년에 창건된 사천왕사와 692년의 망덕사에 목탑을 건립하였고 처음 완성되는 석탑은 682년의 감은사 삼층석탑이다. 이에 허공을 밟고 올라갔다는 탑은 목탑으로 추정된다.

7세기 중엽 황복사(皇福寺) 창건과 동시에 목탑이 세워졌으며, 효소왕 원년에 삼층석탑이 추가 건립된 것이다. 그 후 목탑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사라졌고 석탑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또는 익산왕궁리오층석탑과 같이 목탑이 화재로 소실된 후 그 자리에 석탑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4264일부터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다.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와 불상 등 일괄유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중 금동 사리함의 뚜껑내부에서 조탑명문(造塔銘文)을 확인되었는데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문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그녀의 아들 효소왕과 함께 같은 해 72일에 돌아가신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건립하였음을 기록되어 있다. 706년에는 성덕왕이 신목태후와 효소왕의 죽음을 슬퍼하여 부처 사리 4, 6촌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 무구정광대다리니경 1권을 석탑 내에 봉안하였음도 기록되어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은 기단부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7.3m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옥개(지붕)가 두꺼운 반면 옥개받침은 세밀하여 중후한 느낌을 준다.

기단부의 1(하층) 기단은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하여 3()로 구분되어 있다. 감은사지삼층석탑에 비해 탱주가 1주가 줄어들었다. 갑석 위에는 2단의 호, 각형 받침(괴임)이 2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2(상층) 기단은 1층 기단처럼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 각 면에 3매씩 하여 총 12개 면석이 사용되었고 갑석은 2단의 갑석에 4매가 사용되었다. 갑석 위에는 2단의 각형 받침(괴임)이 1층 탑신(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전체적으로 1층 탑신(몸돌)에 비해 2, 3층 탑신(몸돌)의 체감률이 급격히 떨어져있다탑신(몸돌)과 옥개(지붕)는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문비 등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가 두꺼워서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게 되어있고 옥개의 네 귀퉁이는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옥개의 전각 양면에는 풍령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방형의 노반(露盤)만이 남아있고 노반 가운데에는 찰주공이 있다.

황복사지에서 발굴된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금동불입상
금동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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