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가장 먼저 지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의 사찰이다. 문무왕 674년(14년) 당나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서해로 오는 당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밀교 신인종의 시조인 명랑법사가 여러 개의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풀로 오방신의 상을 세워서 유가의 명승 12명과 더불어 문두루 비법을 사용하여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으로 당 수군을 서해에 수장시킨 호국사찰이다.


5년 후 문무왕 679년(19년) 8월에 양지스님 감독아래 절을 다시 고쳐 세워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고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해적이 나타나 이를 물리치기 위해 명량계통의 두 스님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쳤다.
또한 도솔가로 유명한 월명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고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고 월명사(月明師)도 이 일로 생겨난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금당 터, 목탑 터, 강당 터, 단석 터 그리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절의 구성은 금당을 중심으로 좌, 우에는 목탑이 배치되었고 이들을 둘러 싸는 동, 서익랑을 포함하여 동, 서, 남, 북으로 회랑을 형성하였으며 남쪽에는 중문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북쪽 밖에는 강당(講堂)과 단석(壇席)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동, 서에는 귀부 2기, 서쪽에는 당간지주 1기가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에 불상과 함께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즉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찬왕사 목탑 터는 통일신라 최초의 쌍탑 터로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층수는 비슷한 시기 망덕사 목탑터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에 삼국유사 기록에는 13층이고 황룡사, 분황사의 탑이 9층 또한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의 북면 목탑을 모각한 마애탑이 7층, 9층임을 감안하면 사천왕사 목탑도 층수가 다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의 쌍탑은 감은사지 3층 석탑으로 여겨진다.




사천왕사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쌍탑 출현은 삼국통일 후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권을 강력한 우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에 하나는 석가모니 불탑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세 시에 왕권 상징의 위엄과 현세의 복을 바라는 뜻으로 쌍탑을 조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사천왕사 터 남쪽 중문의 동편에 자리 있는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반면 중문의 서편에 자리 있는 서 귀부는 원래는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찰의 창건 시기인 679년을 전·후한 시점에 조성한 것으로 판단되고, 신라 분황사 당간지주 이후에 조성된 초창기 석조물에 해당된다.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로 동일한 3간공 관총형 당간지주인 분황사와 보문동사지 당간지주의 중간 형식 단계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 제 2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仮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 5권 신주(神呪) 제 6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삼국유사 제 4권 의해(意解) 제5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삼국유사 제 5권 감통(感通) 제 7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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