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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가장 먼저 지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의 사찰이다. 문무왕 674년(14년) 당나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서해로 오는 당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밀교 신인종의 시조인 명랑법사가 여러 개의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풀로 오방신의 상을 세워서 유가의 명승 12명과 더불어 문두루 비법을 사용하여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으로 당 수군을 서해에 수장시킨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679년을 전·후한 시점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년 후 문무왕 679년(19년) 8월에 양지스님 감독아래 절을 다시 고쳐 세워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고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해적이 나타나 이를 물리치기 위해 명량계통의 두 스님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쳤다.
또한 도솔가로 유명한 월명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고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고 월명사(月明師)도 이 일로 생겨난 이름이다.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이다.

현재 절터에는 금당 터, 목탑 터, 강당 터, 단석 터 그리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절의 구성은 금당을 중심으로 좌, 우에는 목탑이 배치되었고 이들을 둘러 싸는 동, 서익랑을 포함하여 동, 서, 남, 북으로 회랑을 형성하였으며 남쪽에는 중문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북쪽 밖에는 강당(講堂)과 단석(壇席)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동, 서에는 귀부 2기, 서쪽에는 당간지주 1기가 배치되어 있다.

서 귀부로 원래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에 불상과 함께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즉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찬왕사 목탑 터는 통일신라 최초의 쌍탑 터로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층수는 비슷한 시기 망덕사 목탑터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에 삼국유사 기록에는 13층이고 황룡사, 분황사의 탑이 9층 또한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의 북면 목탑을 모각한 마애탑이 7층, 9층임을 감안하면 사천왕사 목탑도 층수가 다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의 쌍탑은 감은사지 3층 석탑으로 여겨진다.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사천왕사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쌍탑 출현은 삼국통일 후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권을 강력한 우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에 하나는 석가모니 불탑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세 시에 왕권 상징의 위엄과 현세의 복을 바라는 뜻으로 쌍탑을 조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 된 서 목탑 터의 기단 모습
양지(良志) 스님이 조각한 사천왕상을 복원한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벽전(甓塼)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서 목탑 터와 동 목탑 터

사천왕사 터 남쪽 중문의 동편에 자리 있는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반면 중문의 서편에 자리 있는 서 귀부는 원래는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찰의 창건 시기인 679년을 전·후한 시점에 조성한 것으로 판단되고, 신라 분황사 당간지주 이후에 조성된 초창기 석조물에 해당된다.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로 동일한 3간공 관총형 당간지주인 분황사와 보문동사지 당간지주의 중간 형식 단계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武]) 법민(法敏)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동 목탑 터의 초석들.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동 목탑 터의 심초석

 

동탑 터와 서탑 터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仮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의 초석들
금당터의 본존불과 협시불의 지대석 좌우에 있는 유공초석(有孔礎石)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금당 터의 본존불의 사각 지대석과 좌우협시불 지대석
금당이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 5권 신주(神呪) 6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서단석(西壇席) 터. 단석(壇席)은 문두루도량의 법단으로 추정된다.
서단석(西壇席) 터의 초석으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동단석(東壇席) 터

삼국유사 제 4권 의해(意解) 5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삼국유사 제 5권 감통(感通) 7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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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는 진평왕릉에서 동남쪽으로 약 400m 떨어진 논 중앙(경주시 보문동 848-6번지 외)에 위치하고 있고 그곳에는 연화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910) 1기와 석탑재 몇 구가 흩어져 있다. 주변에는 진평왕릉을 비롯하여 보문동 사지, 황복사지, 보문동고분군 등 다수의 유적들이 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 에 대한 문헌기록은 현재 전무하며, 사찰의 명칭이나 연혁에 대해서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보문동 사지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보문동 북사지로 부르게 되었다. 이 사지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는 아직까지 실시된 적이 없으며, 단지 유적 내에 위치한 연화문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몇몇 조사·연구가 실시된바 있다.

경주시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 해발 252m)의 서쪽 능선에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보문동 고분군(普門洞古墳群)이 있다. 이 고분군은 5~7세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과 완총, 금환총이 확인되었는데 여기 보문동 사지는 이들 지배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에 있는 연화문 당간지주 (幢竿支柱 ,  보물 제 910 호 )

연화문 당간지주 주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사찰 전체의 영역이나 가람배치에 대하여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연화문 당간지주로부터 북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석탑 부재 4매가 흩어져 있어, 보문동 사지(목탑지)와는 다른 별개의 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사역 내 남아 있는 연화문당간지주와 석탑재 등을 참고했을 때, 적어도 통일신라 9세기경에는 사찰이 유지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인 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그의 저서에서 보문리사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北方 幢竿支柱라는 제목으로 이 당간지주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하였다. 당시 후지시마는 보문리사지두 개의 당간지주 즉 보문동 사지 당간지주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3년 이호관 선생은경주지구유적조사 약보에서 보문리 당간지주와 폐탑재라는 제목으로 당간지주를 포함한 주변에 산재 된 석물 등의 현황을 보고한 적이 있는데 이 보고서에는 연화문 당간지주와 함께 한 변이 127, 높이 40의 폐탑재(기단석부재)가 잔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 연화문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경주 진평왕릉 남쪽 논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는 약 144인데 지주 하부에 치석된 부분을 보았을 때, 일정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양 지주는 동서방향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간격은 약 60이다. 양 지주의 상부내면에는 폭 13의 간구가 확인되는데, 당간을 고정하는 장치가 있었던 부분으로 생각된다.

또한 지주 외 측면에는 최상부로부터 아래로 약 52까지 한단을 낮게 하여 사각형의 틀을 마련한 뒤, 그 안에 직경 47의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연화문은 8엽의 복판연화문으로 중앙에는 자방이 있고, 그 안에 17개의 연자를 도드라지게 새기었다.

통일신라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장식을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당간지주는 화려한 연화문 장식이 있어 매우 특이한 예로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당간지주(幢竿支柱) 중 연화문이 있는 유일한 예로 볼 수 있다.

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렸는데, 깃발을 당(幢),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연화문당간지주에서 북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논둑에 석탑부재 4매가 흩어져 있다. 부재 4매 중 3매는자형 귀틀석으로 가로 100, 세로 131, 높이 45이며 3매 모두 같은 크기이다. 원래는 4개의 부재가 결구된 석탑 하층기단석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지표상에는 3개의 부재만 확인될 뿐이다. 1개의 부재가 보완된다면, 전체가 가로·세로 약 230의 정방형 하층기단석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각 부재 가장 자리에는 폭 2427, 높이 약 22의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윗면은 경사가 없이 편평하다.

나머지 부재 1매는 가로 73, 세로 69, 높이 91의 평면 삼각형의 석재이다. 두 면은 치석되었으나, 다른 한 면은 치석되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치석된 두 면 중 한쪽 면에는 폭 15의 기둥이 모각되어 있지만, 다른 한 면은 조각 흔적 없이 편평한 것으로 보아 다른 석재와 결합된 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석탑부재 역시 원래는 4개의 부재가 결구된 상층기단면석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며, 모각된 기둥은 상층기단의 우주로 이해 할 수 있다.

현재 사지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사찰과 관련된 유구 훼손이 심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잔존하는 석탑재의 경우 보호시설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훼손이나 망실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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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 사지(普門洞 寺址)는 경주시에서 보문관광단지로 가는 국도 남편 보문동(보문동 848-6번지 외 851, 856-2, 857, 757, 758-1, 760 등)의 넓은 평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터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낭산이 있고, 북쪽에는 진평왕릉, 남쪽으로는 효공왕릉 등이 있다. 절터 內에는 금당지, 목탑지 등의 유구가 있는데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만 당간지주(幢竿支柱), 석등 지대석, 석조, 초석 등 다수의 석물들을 볼 수가  있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와 금당지

절터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처음 이루어졌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고적조사에서 ‘普門寺’, ‘普門’이라고 새긴 기와가 절터 부근에서 출토되어  보문사로 비정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일인 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의해 전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8년과 1991년에 문화재관리국과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각각 실시하였다.
가람배치는 7×5칸의 금당을 중심으로 그 전방 좌, 우에 목탑을 23m 간격으로 배치하고 금당 북편에는 강당, 남편에는 중문과 남문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강당지와 중문지, 남문지의 위치 확인은 불가능하나,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조사 할 당시에는 강당지, 문지, 그리고 회랑지의 일부 초석이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금당지
금당지 초석과 지대석

절터의 규모와 현재 남아 있는 유구 등 비교하였을 때, 7세기 후반에 창건 된 사천왕사, 망덕사지 가람배치와 유사성이 많다. 금당지 남편 동서쪽에 목탑이 배치된 점이나 금당지 북편 동서쪽에 건물지가 배치된 점, 그리고 금당지 기단이 가구식 기단으로 축조되었다는 점 등 현재 남아있는 유구 등을 비교해보면, 세 절터에서 공통된 특징들이 다수 확인된다.
창건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사천왕사(679년)와 망덕사(685년경)의 창건연대를 참고했을 때, 보문사 역시 7세기 후반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문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신라 경문왕 11년(871)에 황룡사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매납하였던 황룡사「刹柱本紀」에 보문사 상좌승 은전(㢋㭇)이 도감전으로 대탑불사에 참석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금당지와 동탑지
서탑지와 금당지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금동사리기 명경통(‘仲和三年’ 883년)에도 보문사 현여대덕이 대석탑 중수 시 무구정광경에 의거하여 소탑 77기를 만들어 대탑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시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 해발 252m)의 서쪽 능선에서 남북 방향으로 보문동 고분군(普門洞古墳群)이 있는데 5~7세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과 완총, 금환총이 확인되었는데 여기 보문동 절터는 창건 당시 이들 지배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보물 제64호)는 금당 북쪽에 1기가 남아 있는데 1매의 대형 화강암 석재를 길이 244㎝, 너비 90㎝, 깊이 62㎝의 장방형으로 파내었는데, 외부 장식이나 문양이 없는 간소한 형식의 방형석조이다. 수조의 측벽 바닥에는 지름 7㎝ 내외의 배수용 구멍이 한 개 뚫려있다. 석조는 보통 급수 용기라고 알려져 있으나 부처에게 공양할 연꽃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

보문동 절터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23호)는 금당지 남북중심축선과 탑지 동서연장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140m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남북으로 2개의 지주가 있는데, 남쪽 지주는 완전하나 북쪽 지주는 상부가 결실되었다.

보문동 절터의 당간지주( 幢竿支柱, 보물 제123호)는 남쪽 지주는 완전하나 북쪽 지주는 상부가 결실되었다.

남쪽 지주의 간공은 방형으로 현 지표면에서 10㎝, 155㎝, 300㎝의 높이에 1개씩 총 3개가 있으며, 3개 모두 구멍 크기는 15×18㎝정도이다. 반면 북쪽 지주는 상·중 2개의 간공만이 확인된다. 또한 남쪽 지주의 간공은 지주를 관통하는 것에 반해 북쪽 지주의 간공은 지주 너비의 1/2만 뚫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정대를 남에서 북으로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 사이 지표면에는 치석된 석재가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하부 지대석인지 북쪽 지주의 결실부인지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렸는데, 깃발을 당(幢),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이외에도 수십 개의 초석 및 기단 지대석 등이 흩어져 있고 초석은 원형주좌초석과 방형초석이 대부분이며 고막이가 있는 초석도 일부 있다.

금당지 주변에 있는 석등 옥개석
서탑지에 있는 연화문 석재
이영석재(異形石材)

보문동 절터는 경주지역 폐사지 중에서 가장 많은 석재가 지표상에 노출되어있는 유적 중 하나이다. 하지만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석조를 제외하고는 기타 유구 및 유물들은 보호시설 없이 논 가운데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경작 등으로 인하여 유구의 훼손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 후지시마의 보고내용과 이후 두 차례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 현상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동안 유구가 훼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부 확인된 금당지 북쪽 동편 건물지(토단)의 경우 현재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며, 금당지 남편에서 있었다는 중문지의 흔적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절터 내에 흩어져있는 초석과 석물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원위치에서 더 이탈하고 있어, 원형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들어 질 가능성이 높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탑지에서 본 금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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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명리 삼층석탑 (龍明里 三層石塔, 보물 제908호)은 경주 서북쪽인 건천읍 용명리(龍明里) 탑골(塔谷, 856-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8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탑골(塔谷) 마을은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불타버리고 그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라 때의 3층 석탑이 마을 옆에 있었으므로 '탑골' 혹은 '탑리(塔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탑골 마을 서쪽은 밀구(密耳)라는 마을이 있는데 구미산으로 용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용암(龍岩)이라는 바위가 있어 용암의 용()자와 명장(明莊) 마을의 명()자를 따서 '용명(龍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혹은 귀가 없는 미륵불이 있었다고 하여 '밀이촌(密耳村)' 또는 '밀귀'라고 부르던 것이 그 후 '밀구'로 바뀌어 불러졌다 한다.

북쪽에는 명장(明莊) 마을이 있는데 파평 윤씨(坡平 尹氏) 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깊은 산골이라 산나물이 많아 부근에 명성이 났다고 하여 '명장(明莊)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터 주변의 동쪽과 북쪽 산기슭은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남쪽과 서쪽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원래의 지형은 알 수 없고 절의 범위나 방향, 배치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또한 석물 등 절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도괴의 위험이 있던 석탑을 개축할 때 탑신에서 청동불상 1구가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또한 2005413일 그동안 일실되었던 3층 옥개석 위의 노반석이 건천초등학교 교정에서 확인되어 문화재청과 경주시에서 복원하였다.

용명리 삼층석탑(龍明里 三層石塔)은 높이 5.6m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2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기단부에 28, 탑신부 6매로, 상륜부에 1매로 모두 35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하 기단 면석에는 탱주가 2주씩이며,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있다.

기단부의 1(하층) 기단은 면석의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하여 3()로 구분되어 있다. 지대석과 면석이 1매석으로 크기가 같은'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 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하다. 가운데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었다.

기단갑석 역시 8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였다. 기단갑석 위는 2단의 호형과 각형 받침(괴임)으로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2(상층) 기단은 1층 기단처럼 면석의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동일한 크기와 모양이다. 가운데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어서 모두 8매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갑석은 2단의 갑석에 4매가 사용되었다. 갑석 위는 2단의 각형 받침(괴임)으로 1층 탑신(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지붕)는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塔身)의 각 면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문비 등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으로 되어 있다고 각 옥개의 낙수면 위에는 각형 2단 탑신 받침이 있다. 낙수면은 경사를 이루다가 단부에서 살짝 반전하고, 귀마루의 합각선은 뚜렷하다. 전각 양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탑신(塔身) 2층 이상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낸다.

상륜부는 노반을 포함하여 모두 결실된 상태였으나, 지역 시의원의 제보와 경주시 담당자의 노력과 의지로 건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노반석을 2005413일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서 65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노반은 방형 육면체로 상단부에 2단으로 돌출된 돌림띠가 있고, 가운데 원형 찰주공이 뚫려있다.

경주시는 한때 이곳 탑골마을을 동경이마을로 정해 경주개 새끼 동경이 7마리를 분양받아 사육하게 하여 동경이를 활용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지역의 특화사업으로 발전시켜 하였다. 지금은 퇴락하여 쓸쓸하기가 그지없다. 경주시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문화콘텐츠 지속성을 유지했으면 바랄뿐이다.

탑골 동경이마을의 벽화

경주개 동경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토종개로 꼬리가 없거나 짧으며 성격은 온순하고 매우 친화적인 토종개다. 동경이라는 이름은 경주의 옛 지명인 동경(東京)에서 사육하는 개라는 의미로, 신라시대부터 경주지역에서 사육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멸종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동경잡기(東京雜記)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옛 문헌을 통해 경주지역에서 널리 사육되던 개로 기록돼 있고 신라고분에서 토우로 발굴되는 등 그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에는 유전자 분석 결과 한국 토종개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져 문화재청으로부터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됐다.

용명리 삼층석탑 (龍明里 三層石塔) 북쪽에 있는 탑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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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 경주시 구황동 103번지)는 경주 낭산(狼山)의 북동편 기슭에 있는 석탑으로 마을 이름은 황복또는 탑거리이며 석탑은 마을 초입 좌측 밭 가운데 있다.

이 석탑은 신라 31대 신문왕이 사망 후 그 아들인 32대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효소왕 1(692)에 세운 탑으로, 이중기단에 높이 7.3m의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33대 성덕왕이 즉위 5(706)에 사리와 불상 등을 추가하여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탑 서쪽은 산으로 막혀서 건물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없고 동편과 남편은 넓은 경작지와 마을이다. 지형으로 보아 장항리사지와 같이 탑을 서쪽에, 금당을 동쪽에 둔 소위 좌전우탑(左殿右塔) 가람배치로 추정된다. 탑 동남편에는 목이 잘리는 등 훼손이 심한 귀부 한 쌍이 나란히 남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으나 사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 동남편에는 목이 잘리는 등 훼손이 심한 귀부 한 쌍이 나란히 남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으나 사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78월에 발굴 조사를 하였고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구를 발견했다.

이 절터가 황복사지(皇福寺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든 근거는 1937년경에 낭산 동쪽 기슭에서 일본인이 수집한 명문기와(銘文瓦)이다. 이 기와는 당시 부산에 거주하였던 일본사람이 수집하여 소장하였던 것으로 기와 뒷면에는 황복사(皇福寺)’  또는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황복사의 창건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5 의상전교(義湘傳敎) 기록에 의하면,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625~702)‘29세에 서울의 황복사로 가서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다. 29세는 진덕여왕(眞德女王) 7(653)에 해당되어 황복사는 진덕여왕 때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황복사지(皇福寺址)에는 목탑지로 볼 수 있는 유적은 없으나,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5 의상전교(義湘傳敎) 기록을 보면 창건 당시 목탑이 세워졌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의상대사가 중국으로 유학한 뒤 귀국하여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스님들과 탑을 돌 때면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닥다리가 없었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이때 의상대사의 나이는 46세로 문무왕 10(670)이다. 당시 신라 왕경에는 아직 석탑이 건립된 적이 없는 시대로 679년에 창건된 사천왕사와 692년의 망덕사에 목탑을 건립하였고 처음 완성되는 석탑은 682년의 감은사 삼층석탑이다. 이에 허공을 밟고 올라갔다는 탑은 목탑으로 추정된다.

7세기 중엽 황복사(皇福寺) 창건과 동시에 목탑이 세워졌으며, 효소왕 원년에 삼층석탑이 추가 건립된 것이다. 그 후 목탑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사라졌고 석탑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또는 익산왕궁리오층석탑과 같이 목탑이 화재로 소실된 후 그 자리에 석탑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4264일부터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다.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와 불상 등 일괄유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중 금동 사리함의 뚜껑내부에서 조탑명문(造塔銘文)을 확인되었는데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문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그녀의 아들 효소왕과 함께 같은 해 72일에 돌아가신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건립하였음을 기록되어 있다. 706년에는 성덕왕이 신목태후와 효소왕의 죽음을 슬퍼하여 부처 사리 4, 6촌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 무구정광대다리니경 1권을 석탑 내에 봉안하였음도 기록되어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은 기단부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7.3m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옥개(지붕)가 두꺼운 반면 옥개받침은 세밀하여 중후한 느낌을 준다.

기단부의 1(하층) 기단은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하여 3()로 구분되어 있다. 감은사지삼층석탑에 비해 탱주가 1주가 줄어들었다. 갑석 위에는 2단의 호, 각형 받침(괴임)이 2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2(상층) 기단은 1층 기단처럼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 각 면에 3매씩 하여 총 12개 면석이 사용되었고 갑석은 2단의 갑석에 4매가 사용되었다. 갑석 위에는 2단의 각형 받침(괴임)이 1층 탑신(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전체적으로 1층 탑신(몸돌)에 비해 2, 3층 탑신(몸돌)의 체감률이 급격히 떨어져있다탑신(몸돌)과 옥개(지붕)는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문비 등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가 두꺼워서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게 되어있고 옥개의 네 귀퉁이는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옥개의 전각 양면에는 풍령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방형의 노반(露盤)만이 남아있고 노반 가운데에는 찰주공이 있다.

황복사지에서 발굴된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금동불입상
금동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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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리는데, 깃발을 당(),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분황사 당간지주(芬皇寺 幢竿支柱)는 분황사 입구 남쪽 50m지점에 세워져 있다. 황룡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입구 쪽에 파손되었지만 당간지주가 있어 현재 분황사 가람의 규모가 상당히 축소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분황사 당간지주(芬皇寺 幢竿支柱)로 판단된다.

양 기둥에는 상··3곳에 지름 15cm의 구멍[杆孔]이 있고, 두 기둥 사이에 당간을 견고하게 받치기 위한 당간받침돌(간대석 : 竿臺石)이 남아 있는데, 귀부형 간대석으로 거북 모양을 새겨 독특하다.

귀부형 간대석 상면에는 사각형 좌대를 마련하여 앞뒤로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좌대 한가운데에는 작은 사각형을 오목하게 시공하였으며, 한쪽 방향으로는 물이 빠져나가도록 좁게 낙수 홈이 시설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당간 하부의 평면 형태는 사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형 간대석에서 귀두의 방향은 당간지주의 방향과 함께 사찰로의 진입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당간과 당간지주에서 다양한 유형의 간대석이 마련되는데,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처럼 귀부형 간대석을 구비한 경우는 유일하다.

당간지주의 전체적인 형태는 평면 사각 석주형인데, 상부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좁아지도록 하였다. 당간지주의 바깥 면은 지면에서 148cm 정도 되는 높이까지 1단 높게 하였으며, 바깥면의 좌우 측 모서리를 4cm 정도의 너비로 모죽임 하였다.

또한 당간지주의 정상부는 안쪽 면에서 바깥 면으로 나가면서 부드럽게 호형을 하였다. 당간은 당간지주의 안쪽 면에서 바깥 면으로 관통하는 원형 간공(지름 15cm)을 상중하 3곳에 마련하여 간을 끼워 고정하도록 하였다.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경주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중요 사찰의 당간지주와 비교하였을 때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귀부형 간대석을 한 것은 유일하다.

분황사 당간지주(芬皇寺 幢竿支柱)에서 본 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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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천읍 단석산(斷石山)의 산정(山頂) 부근에서 서남쪽으로 해발 약700m 지점 우징골 신선사(神仙寺)에 이르면 높이 10m자 모양으로 솟은 거대한 암벽에 있는데 예로부터 이 바위를 상인암(上人巖)이라고 불렀다. 맨 윗사람이라는 의미의 바위 면에 여러 불상들을 새겼는데 이를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위 세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단석산 ( 斷石山 ) 정상

신선사(神仙寺)는 대한불교 법화종에 소속된 사찰로 7세기에 활동하던 자장(慈藏)의 제자 잠주(岑珠)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령각(山靈閣), 요사채 등이 있는 작은 암자이다. 특히 대웅전 앞뜰에 만발한 산나리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주황색 꽃의 아름다움이 절제미가 흐른다.

석굴 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보니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50년이 지난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고 불렀다. 

신선사(神仙寺) 대웅전

단석산(斷石山, 827m)은 경주시 건천읍(乾川里) 방내리(芳內里)와 내남면(內南面) 비지리(飛只里)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주에서 가장 높고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였고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청도로 거쳐 경주로 들어오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신라에서는 국방의 요충지였다.

대웅전 앞뜰에 만발한 산나리 꽃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 단석산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숨어 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는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611)에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고 있다.

신선사(神仙寺)에서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으로 가는 길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으로 가는 입구는 서쪽으로 트인 곳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북쪽 바위(북암), 정면은 동쪽 바위(동암), 그리고 오른쪽은 남쪽 바위(남암)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바위 벽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으로 가는 입구
서쪽으로 트인 곳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북쪽 바위(북암), 정면은 동쪽 바위(동암), 그리고 오른쪽은 남쪽 바위(남암)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 바위(북암) 오른쪽 면에는 불상, 보살상, 인물상 등 7구가 얕게 새겨져 있다. , 아래 2줄로 배치되어 있는데 위쪽은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3, 반가사유상 1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반가사유상을 제외한 나머지 불상들은 모두 왼손이 동쪽을 향하여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중생을 본존불인 미륵불입상에게 안내하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북쪽 바위(북암) 오른쪽 면에 있는 여래입상 3구와 반가사유상 1구

아래에는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향로가 같은 지물을 들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공양상 2구가 새겨져 있는데 버선 모양의 모자를 쓰고 허리춤 아래로 늘어진 바지는 폭이 매우 넓고 발목은 동여맨 차림새이다. 신발은 끝이 선 버선코 모양이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스님 한분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고 복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향로가 같은 지물을 들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공양상 2구
공양상은 버선 모양의 모자를 쓰고 허리춤 아래로 늘어진 바지는 폭이 매우 넓고 발목은 동여맨 차림새로 신발은 끝이 선 버선코 모양이다.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 스님

북쪽 바위(북암) 왼쪽 독립된 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미륵불입상이 1구 서 있다. 둥근 얼굴에 미간이 비교적 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서도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머리 위로 2단으로 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인 원형 육계가 솟아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트인 가슴 사이로는 띠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이 보이게 하고 있다.

북쪽 바위(북암) 왼쪽 독립된 면에 있는 높이 8.2m의 미륵불입상
미륵불의 둥근 얼굴은 미간이 비교적 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서도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동쪽 바위(동암)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寶甁)을 쥐고 있다.

동쪽 바위(동암)에 있는 높이 6m의 보살상
미륵불입상과 보살입상

남쪽 바위(남암)에는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져 있어 앞의 두 불상과 함께 삼존상(三尊像)을 이루고 있다이 보살상의 동쪽 면에는 불상을 만든 경위를 새긴 글이 있는데 약 20행에 200여 자이며, 마멸이 심하여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없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新羅五岳) 조사단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였음을 밝혀냈다.

남쪽 바위(남암)에 있는 보살입상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글의 전체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판독되는 부분에 보살계제자 잠주(菩薩戒弟子 岑珠), 신선사(神仙寺), 잠훼(岑喙) 등의 표현이 있는데 이 중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 절의 이름이 신선사이고, 이곳에 미륵상 1구와 보살상 2구를 조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살입상 동쪽 면에는 불상을 만든 경위를 새긴 글이 있는데 약 20행에 200여 자이며, 마멸이 심하여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없다.

이 불상군은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과 우리나라 석굴 사원의 초기 형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 당시 불교신앙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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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산 기슭 백율사(栢栗寺) 입구(경주시 동천동 산 4)에 있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보물 제121호로 높이 3m의 바위에 4 방향으로 각각 불상을 조성한 사방불(四方佛)석조불상(石造佛像)이다. 즉 서쪽 서면에는 아미타불, 남쪽 남면에는 석가모니불, 동쪽 동면에는 약사여래불, 북쪽 미륵불을 표현하였다.
주변에 주춧돌이 있어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 위에 건물(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결과 고려시대 만들어진 금고(金鼓 : 쇠북)가 발견되었는데 표면에 굴석사(掘石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잘못 전해져서 굴석(掘石)이라 한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를 파내 그곳에 불상을 새겼으므로 불상을 파냈다는 의미인 굴불(掘佛)이라는 이름보다는 바위를 파냈다는 의미인 굴석(掘石)이라는 이름이 더 타당하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굴불사지(掘佛寺址) 관련 삼국유사 권3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로 나들이를 가다가 산 아래에 이르러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땅을 파보게 하니 큰 바위가 나왔고 이 바위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새기게 하고 이로 인해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굴불(掘佛)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의 조각기법은 칠불암 마애삼존상보다 진전된 것으로 바위가 남쪽으로 터진 계곡의 중앙에 놓여 있는데 정면인 남쪽보다 서쪽 면이 더 높고 넓다. 그래서 굴불사 사방불을 조성하면서 서방 미타불상을 사방불의 중심불로 조성했는데 서악동 태종 무열왕릉을 바라보는 위치여서 신라 왕실과 깊은 연관성이 보인다.

서쪽(서방) 서면에는 주불인 아미타불입상과 좌, 우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과 대세지보살입상으로 구성되었고 아미타불입상은 바위에 붙여 몸통을 입체상에 가깝게 조각 한 다음 얼굴만 따로 만들어서 목 위에 붙이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기법은 경주 남산 약수곡 마애불입상으로 이어졌다. 좌우 협시보살은 주불의 크기에 알맞은 비례로 딴 돌을 다듬어 만들어다 주불 좌우에 기대 세워놓았는데 경주 서악동 마애삼존불 전통을 계승하였다.

서쪽(서방) 서면의 주불인 아미타불입상과 좌, 우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과 대세지보살입상

아미타불입상은 겉옷의 옷깃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려 앞가슴을 훤히 드러내놓고 치마를 맨 허리띠 표현까지 노출시켰다. 당 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 겉옷을 두 벌 겹쳐 입는 법)에 의해 속 가사는 통견법으로 입었고 겉 가사는 편단우견법으로 입어 속 가사 자락이 오른쪽 소매처럼 보이도록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동남산 칠불암 사방불에서 부터 시작한 당 나라(713765)의 새로운 의복표현법으로, 당시에 널리 유행하던 의복표현법이다.
수인은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처럼 오른손이 시무외인을, 왼손은 허리 근처까지 올려 마치 무슨 지물(持物)이라도 받쳐 든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빈손이다. 소원하는 대로 모두 주겠다는 의미의 손짓인 여원인(與願印)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은 보관에 화불을 표현하였고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좌 협시 보살입상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섬세하며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은 늘어뜨려 정병(淨甁)을 들었는데 몸은 약간 뒤틀어져 있다.
특히 관세음보살입상은 한쪽다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균형을 잡은 삼굴(三屈)자세를 하고 있는데 이 자세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 했던 자세로 균형 된 신체비례를 보여 주고 있다.

대세지보살은 얼굴이 반 이상 파손되어 전모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비교적 단정하게 똑바로 서 있다. 옷 주름 표현은 관세음보살입상과 대동소이 하 며 매우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 우 협시보살은 몸을 약간 비튼 자세로 측면에서 보면 등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볼륨 있는 곡선이 아름답다.
남쪽(남방) 남면에는 석가삼존입상을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석가여래입상의 두상과 우협시보살상을 정으로 쪼아 떼어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재 수탈이고 한국 문화재의 참혹한 수난의 일부분이다.
조각 기법은 사방불 중 가장 우수하여 마치 석굴암 조각을 보는 것과 같아서 석굴암 조성에 참여했던 조각장(彫刻匠)이 이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 팽만감이 넘치도록 탄력 있는 육신의 표현과 위엄이 깃들인 넉넉하고 자비로운 표정 등이 석굴암의 주불이나 비롯한 여러 존상에서 드러나는 양식적 특색과 매우 흡사하다.

남쪽 남면의 석가삼존입상 중 두상이 없는 석가여래입상과 좌협시보살입상

불국사와 석굴암이 경덕왕 10(751)에 창건되기 시작하기 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커서 이것이 석굴암 조각을 위한 시험 조각일 수도 있다.
석가여래입상의 의복 표현은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처럼 굽타식 통견불의에 양 다리에서 옷 주름이 매미날개처럼 둘로 갈라진 형태다. 그러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 입상의 의복보다 더 얇게 표현하고 있어 그 세련도가 극에 이르렀음을 과시하고 있다연화대좌는 딴 돌로 만들어 밑에서 받치게 하였다.
문수보살이라고 생각되는 좌협시보살입상은 얼굴이 마치 석굴암 본존 좌상 같으나 하체가 풍만하여 꼭 인도의 마투라시대 야차녀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고 천의(天衣)로만 몸을 감싸서 소박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것은 풍만함을 더욱 강조하여 자애로운 모성 상을 표출시키는 효과를 냈다.

서면과 남면

공간의 협소성 때문에 주불과 협시보살의 크기를 거의 같게 조성하였던 듯 파손된 주불의 현재 높이는 136cm이고 문수보살입상 높이는 145cm로 협시보살상이 주불보다 더 큰, 역조현상이 특이하다.
동쪽(동방) 동면에는 약사여래불이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었고 오른 손은 시무외인을 한 듯 하나 파손되었다. 몸 전체는 앞으로 숙여져 있고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치도록 표현되었다.

동쪽 동면의 약사여래불

석벽 면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파고들며 갈라져 나간 형태여서 사람이 그 아래로 들어가 작업할 공간이 없어 그랬는지 몸체는 얕은 돋을새김과 줄무늬로 대충 처리하고 얼굴만 입체감이 날 만큼 두드러지게 새겨 놓았다. 광배 역시 선각(線刻)으로 처리하였는데 두광과 신광이 결합된 광배로 화염문이 섬세하다. 약합(藥盒)도 주변을 파내는 방법으로 그 형태를 나타냈다.

동면과 북면

북쪽(북방) 북면에는 석벽 면이 고르지 않아 두 면으로 나뉠 수밖에 없어 동쪽에는 미륵불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기고, 서쪽에는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을 선각(線刻)으로 그려놓았는데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미륵불의 높이는 161cm로 거의 등신대(等身大; 사람의 몸과 같은 크기)에 해당되는데 감실형 공간에 부조했으며 반복 된 정 자국이 빛을 방사하는 광배 같은 느낌을 준다.

북쪽 북면의 미륵불과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의 높이는 179cm으로 6개의 손에 11면의 얼굴을 가진 보살이다. 본 얼굴 양 옆으로 조그만 얼굴이 있고 그 위에 5면을, 다시 2, 1면의 순서로 배열하였다. 이는 관세음보살의 변화 된 형태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길게 늘어진 목걸이 장식과 두 어깨, 가슴, 양 팔에 걸쳐서 내려오는 천의자락, 허리 밑에서 한 번 접혔다가 늘어선 군의가 다시 두 무릅 아래에서 U자형으로 내려왔다.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은 선각(線刻)으로 그려놓았는데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계림(鷄林, 경주)의 북악(北岳)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는데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는 대비상(大悲像; 관세음보살상) 하나가 있는데 처음 만들어진 때를 알지 못하나 신령스럽기로 소문 나 있었다.”
이 기록에는 대비상이 효소왕 2(693)에 동해 북변 금강산 일대로 놀러 나갔다가 북적 (北狄; 말갈족)에게 포로가 되었던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郞)과 그의 낭도인 안상랑(安 常郞)을 구해 돌아온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신라의 신기(神器)인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거문고(玄琴)를 가지고 가서 만파식적을 쪼개 두 화랑이 타게 하고 관세음보살은 거문고를 타고 하늘을 날아 백률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효소왕 시대(692)에 백률사에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어서, 경덕왕은 백률사 초입에 사방불을 조성하여 적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포로로 잡힌 신라 백성들을 구해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이 대비상을 그대로 옮겨 사방불에 덧붙여 조각했을 것이다.
굴불사지(掘佛寺址)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에 조성 된 사방불(四方佛)과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밀교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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