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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산 기슭 백율사(栢栗寺) 입구(경주시 동천동 산 4)에 있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보물 제121호로 높이 3m의 바위에 4 방향으로 각각 불상을 조성한 사방불(四方佛)석조불상(石造佛像)이다. 즉 서쪽 서면에는 아미타불, 남쪽 남면에는 석가모니불, 동쪽 동면에는 약사여래불, 북쪽 미륵불을 표현하였다.
주변에 주춧돌이 있어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 위에 건물(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결과 고려시대 만들어진 금고(金鼓 : 쇠북)가 발견되었는데 표면에 굴석사(掘石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잘못 전해져서 굴석(掘石)이라 한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를 파내 그곳에 불상을 새겼으므로 불상을 파냈다는 의미인 굴불(掘佛)이라는 이름보다는 바위를 파냈다는 의미인 굴석(掘石)이라는 이름이 더 타당하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굴불사지(掘佛寺址) 관련 삼국유사 권3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로 나들이를 가다가 산 아래에 이르러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땅을 파보게 하니 큰 바위가 나왔고 이 바위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새기게 하고 이로 인해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굴불(掘佛)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의 조각기법은 칠불암 마애삼존상보다 진전된 것으로 바위가 남쪽으로 터진 계곡의 중앙에 놓여 있는데 정면인 남쪽보다 서쪽 면이 더 높고 넓다. 그래서 굴불사 사방불을 조성하면서 서방 미타불상을 사방불의 중심불로 조성했는데 서악동 태종 무열왕릉을 바라보는 위치여서 신라 왕실과 깊은 연관성이 보인다.

서쪽(서방) 서면에는 주불인 아미타불입상과 좌, 우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과 대세지보살입상으로 구성되었고 아미타불입상은 바위에 붙여 몸통을 입체상에 가깝게 조각 한 다음 얼굴만 따로 만들어서 목 위에 붙이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기법은 경주 남산 약수곡 마애불입상으로 이어졌다. 좌우 협시보살은 주불의 크기에 알맞은 비례로 딴 돌을 다듬어 만들어다 주불 좌우에 기대 세워놓았는데 경주 서악동 마애삼존불 전통을 계승하였다.

서쪽(서방) 서면의 주불인 아미타불입상과 좌, 우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과 대세지보살입상

아미타불입상은 겉옷의 옷깃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려 앞가슴을 훤히 드러내놓고 치마를 맨 허리띠 표현까지 노출시켰다. 당 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 겉옷을 두 벌 겹쳐 입는 법)에 의해 속 가사는 통견법으로 입었고 겉 가사는 편단우견법으로 입어 속 가사 자락이 오른쪽 소매처럼 보이도록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동남산 칠불암 사방불에서 부터 시작한 당 나라(713765)의 새로운 의복표현법으로, 당시에 널리 유행하던 의복표현법이다.
수인은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처럼 오른손이 시무외인을, 왼손은 허리 근처까지 올려 마치 무슨 지물(持物)이라도 받쳐 든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빈손이다. 소원하는 대로 모두 주겠다는 의미의 손짓인 여원인(與願印)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은 보관에 화불을 표현하였고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좌 협시 보살입상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섬세하며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은 늘어뜨려 정병(淨甁)을 들었는데 몸은 약간 뒤틀어져 있다.
특히 관세음보살입상은 한쪽다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균형을 잡은 삼굴(三屈)자세를 하고 있는데 이 자세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 했던 자세로 균형 된 신체비례를 보여 주고 있다.

대세지보살은 얼굴이 반 이상 파손되어 전모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비교적 단정하게 똑바로 서 있다. 옷 주름 표현은 관세음보살입상과 대동소이 하 며 매우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 우 협시보살은 몸을 약간 비튼 자세로 측면에서 보면 등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볼륨 있는 곡선이 아름답다.
남쪽(남방) 남면에는 석가삼존입상을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석가여래입상의 두상과 우협시보살상을 정으로 쪼아 떼어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재 수탈이고 한국 문화재의 참혹한 수난의 일부분이다.
조각 기법은 사방불 중 가장 우수하여 마치 석굴암 조각을 보는 것과 같아서 석굴암 조성에 참여했던 조각장(彫刻匠)이 이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 팽만감이 넘치도록 탄력 있는 육신의 표현과 위엄이 깃들인 넉넉하고 자비로운 표정 등이 석굴암의 주불이나 비롯한 여러 존상에서 드러나는 양식적 특색과 매우 흡사하다.

남쪽 남면의 석가삼존입상 중 두상이 없는 석가여래입상과 좌협시보살입상

불국사와 석굴암이 경덕왕 10(751)에 창건되기 시작하기 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커서 이것이 석굴암 조각을 위한 시험 조각일 수도 있다.
석가여래입상의 의복 표현은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처럼 굽타식 통견불의에 양 다리에서 옷 주름이 매미날개처럼 둘로 갈라진 형태다. 그러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 입상의 의복보다 더 얇게 표현하고 있어 그 세련도가 극에 이르렀음을 과시하고 있다연화대좌는 딴 돌로 만들어 밑에서 받치게 하였다.
문수보살이라고 생각되는 좌협시보살입상은 얼굴이 마치 석굴암 본존 좌상 같으나 하체가 풍만하여 꼭 인도의 마투라시대 야차녀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고 천의(天衣)로만 몸을 감싸서 소박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것은 풍만함을 더욱 강조하여 자애로운 모성 상을 표출시키는 효과를 냈다.

서면과 남면

공간의 협소성 때문에 주불과 협시보살의 크기를 거의 같게 조성하였던 듯 파손된 주불의 현재 높이는 136cm이고 문수보살입상 높이는 145cm로 협시보살상이 주불보다 더 큰, 역조현상이 특이하다.
동쪽(동방) 동면에는 약사여래불이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었고 오른 손은 시무외인을 한 듯 하나 파손되었다. 몸 전체는 앞으로 숙여져 있고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치도록 표현되었다.

동쪽 동면의 약사여래불

석벽 면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파고들며 갈라져 나간 형태여서 사람이 그 아래로 들어가 작업할 공간이 없어 그랬는지 몸체는 얕은 돋을새김과 줄무늬로 대충 처리하고 얼굴만 입체감이 날 만큼 두드러지게 새겨 놓았다. 광배 역시 선각(線刻)으로 처리하였는데 두광과 신광이 결합된 광배로 화염문이 섬세하다. 약합(藥盒)도 주변을 파내는 방법으로 그 형태를 나타냈다.

동면과 북면

북쪽(북방) 북면에는 석벽 면이 고르지 않아 두 면으로 나뉠 수밖에 없어 동쪽에는 미륵불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기고, 서쪽에는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을 선각(線刻)으로 그려놓았는데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미륵불의 높이는 161cm로 거의 등신대(等身大; 사람의 몸과 같은 크기)에 해당되는데 감실형 공간에 부조했으며 반복 된 정 자국이 빛을 방사하는 광배 같은 느낌을 준다.

북쪽 북면의 미륵불과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의 높이는 179cm으로 6개의 손에 11면의 얼굴을 가진 보살이다. 본 얼굴 양 옆으로 조그만 얼굴이 있고 그 위에 5면을, 다시 2, 1면의 순서로 배열하였다. 이는 관세음보살의 변화 된 형태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길게 늘어진 목걸이 장식과 두 어깨, 가슴, 양 팔에 걸쳐서 내려오는 천의자락, 허리 밑에서 한 번 접혔다가 늘어선 군의가 다시 두 무릅 아래에서 U자형으로 내려왔다.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은 선각(線刻)으로 그려놓았는데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계림(鷄林, 경주)의 북악(北岳)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는데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는 대비상(大悲像; 관세음보살상) 하나가 있는데 처음 만들어진 때를 알지 못하나 신령스럽기로 소문 나 있었다.”
이 기록에는 대비상이 효소왕 2(693)에 동해 북변 금강산 일대로 놀러 나갔다가 북적 (北狄; 말갈족)에게 포로가 되었던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郞)과 그의 낭도인 안상랑(安 常郞)을 구해 돌아온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신라의 신기(神器)인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거문고(玄琴)를 가지고 가서 만파식적을 쪼개 두 화랑이 타게 하고 관세음보살은 거문고를 타고 하늘을 날아 백률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효소왕 시대(692)에 백률사에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어서, 경덕왕은 백률사 초입에 사방불을 조성하여 적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포로로 잡힌 신라 백성들을 구해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이 대비상을 그대로 옮겨 사방불에 덧붙여 조각했을 것이다.
굴불사지(掘佛寺址)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에 조성 된 사방불(四方佛)과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밀교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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