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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천읍 단석산(斷石山)의 산정(山頂) 부근에서 서남쪽으로 해발 약700m 지점 우징골 신선사(神仙寺)에 이르면 높이 10m자 모양으로 솟은 거대한 암벽에 있는데 예로부터 이 바위를 상인암(上人巖)이라고 불렀다. 맨 윗사람이라는 의미의 바위 면에 여러 불상들을 새겼는데 이를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위 세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단석산 ( 斷石山 ) 정상

신선사(神仙寺)는 대한불교 법화종에 소속된 사찰로 7세기에 활동하던 자장(慈藏)의 제자 잠주(岑珠)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령각(山靈閣), 요사채 등이 있는 작은 암자이다. 특히 대웅전 앞뜰에 만발한 산나리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주황색 꽃의 아름다움이 절제미가 흐른다.

석굴 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보니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50년이 지난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고 불렀다. 

신선사(神仙寺) 대웅전

단석산(斷石山, 827m)은 경주시 건천읍(乾川里) 방내리(芳內里)와 내남면(內南面) 비지리(飛只里)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주에서 가장 높고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였고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청도로 거쳐 경주로 들어오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신라에서는 국방의 요충지였다.

대웅전 앞뜰에 만발한 산나리 꽃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 단석산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숨어 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는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611)에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고 있다.

신선사(神仙寺)에서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으로 가는 길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으로 가는 입구는 서쪽으로 트인 곳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북쪽 바위(북암), 정면은 동쪽 바위(동암), 그리고 오른쪽은 남쪽 바위(남암)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바위 벽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으로 가는 입구
서쪽으로 트인 곳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북쪽 바위(북암), 정면은 동쪽 바위(동암), 그리고 오른쪽은 남쪽 바위(남암)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 바위(북암) 오른쪽 면에는 불상, 보살상, 인물상 등 7구가 얕게 새겨져 있다. , 아래 2줄로 배치되어 있는데 위쪽은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3, 반가사유상 1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반가사유상을 제외한 나머지 불상들은 모두 왼손이 동쪽을 향하여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중생을 본존불인 미륵불입상에게 안내하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북쪽 바위(북암) 오른쪽 면에 있는 여래입상 3구와 반가사유상 1구

아래에는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향로가 같은 지물을 들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공양상 2구가 새겨져 있는데 버선 모양의 모자를 쓰고 허리춤 아래로 늘어진 바지는 폭이 매우 넓고 발목은 동여맨 차림새이다. 신발은 끝이 선 버선코 모양이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스님 한분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고 복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향로가 같은 지물을 들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공양상 2구
공양상은 버선 모양의 모자를 쓰고 허리춤 아래로 늘어진 바지는 폭이 매우 넓고 발목은 동여맨 차림새로 신발은 끝이 선 버선코 모양이다.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 스님

북쪽 바위(북암) 왼쪽 독립된 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미륵불입상이 1구 서 있다. 둥근 얼굴에 미간이 비교적 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서도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머리 위로 2단으로 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인 원형 육계가 솟아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트인 가슴 사이로는 띠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이 보이게 하고 있다.

북쪽 바위(북암) 왼쪽 독립된 면에 있는 높이 8.2m의 미륵불입상
미륵불의 둥근 얼굴은 미간이 비교적 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서도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동쪽 바위(동암)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寶甁)을 쥐고 있다.

동쪽 바위(동암)에 있는 높이 6m의 보살상
미륵불입상과 보살입상

남쪽 바위(남암)에는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져 있어 앞의 두 불상과 함께 삼존상(三尊像)을 이루고 있다이 보살상의 동쪽 면에는 불상을 만든 경위를 새긴 글이 있는데 약 20행에 200여 자이며, 마멸이 심하여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없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新羅五岳) 조사단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였음을 밝혀냈다.

남쪽 바위(남암)에 있는 보살입상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글의 전체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판독되는 부분에 보살계제자 잠주(菩薩戒弟子 岑珠), 신선사(神仙寺), 잠훼(岑喙) 등의 표현이 있는데 이 중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 절의 이름이 신선사이고, 이곳에 미륵상 1구와 보살상 2구를 조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살입상 동쪽 면에는 불상을 만든 경위를 새긴 글이 있는데 약 20행에 200여 자이며, 마멸이 심하여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없다.

이 불상군은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과 우리나라 석굴 사원의 초기 형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 당시 불교신앙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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