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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지(陵旨塔址)는 낭산(狼山) 서쪽 기슭(경주시 배반동 621번지 일대)에 있고 절터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능지탑(陵旨塔)은  능시탑으로 구전되어 왔으며, 조선시대 편찬된 『동경잡기(東京雜記)능지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근 마을 이름은  능말’, ‘능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능지탑(陵旨塔)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말 조선고적연구회 명의의 보고서에 따르면 낭산 배반동 능지탑터를 화장지 유적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1969년부터 197911년간의  삼산오악학술조사단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문무왕(文武王) ‘고문외정(庫門外庭)의 기록을 근거로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고 있다.

삼산오악조사단이 발굴조사를 실시했을 때, 탑의 북쪽에서 건물지와 석등지가 확인되었으며, 수막새, 암막새, 치미, 귀면와, , 석제불상과 토기편, 자기편 등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능지탑(陵旨塔) 주변이 있는 경주 배반동 일대를  마을주민들은 고문뜰로 부르고 있었다. 능지탑(陵旨塔)과 문무왕의화장터에 대한 관련성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현재 능지탑(陵旨塔)197810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791125일에 공사 완료한 모습이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이다능지탑은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능지탑(陵旨塔)은 현재 전체높이가 4.49m이며, 2층으로 복원·정비되어 있는데 이중기단에 기단부와 탑신부로 구분할 수 있다. 기단부 4면에는 9기의 십이지상이 있는데, 사상(), 인상(호랑이), 진상()은 없다.

탑의 탑신부는 전탑과 같은 형태로 다듬지 않은 장방형의 석재로 쌓아올렸다. 그 위에 옥개에 해당하는 연화문석조물을 올렸는데, 이러한 석조물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정방형의 판석에 4개의 복판의 연꽃잎을 새긴 것과 장방형의 판석 한 면에 복판연꽃잎을 표현한 것 이다.

발굴 조사 시 100여 매의 연화문석조물을 확인하였는데, 현재 1층에는 61, 2층에는 18매로 복원되어있다. 탑의 북쪽에 토담이 형성되어있으며, 그 앞에는 나머지 복원되지 않은 연화형석조물과 장대석이 모아져있다. 이는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탑의 북쪽에 토담이 형성되어있으며, 그 앞에는 나머지 복원되지 않은 연화형석조물과 장대석이 모아져있다. 이는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기단부에 배치된 십이지신상 중 자상()은 머리는 우측을 향해 있으며, 문복을 착의하였고 낮은 귀와 함께 이빨을 나타내었고, 왼손은 칼을 쥐었으며 오른손은 도포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인상으로 판단된다. 판석의 크기는 길이 109.0, 너비 67.5이다.

자상 ( 쥐 ) 은 머리는 우측을 향해 있으며 ,  문복을 착의하였고  낮은 귀와 함께 이빨을 나타내었고 ,  왼손은 칼을 쥐었으며 오른손은 도포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인상으로 판단된다 .

자상()을 제외한 나머지 상들은 무관복을 입고 있으며, 크기는 길이 100.0. 너비는 70.0내외이다. 머리의 방향은 오상(), 술상()는 정면, 자상(), 축상(), 묘상(토끼), 신상(원숭이)는 우측, , , 돼지는 좌측을 향하고 있다

자상()의 우측에 위치된 축상()은 머리의 방향이 우향으로 무관복을 입었고 보주를 잡고 있다. 판석의 크기는 길이95.0, 너비 69.0이다.

축상 ( 소 ) 은 머리의 방향이 우향으로 무관복을 입었고  보주를 잡고 있다

묘상(토끼)은 도끼를 잡고 있고 오상()은 화염보주와 칼을 잡고 있다.

묘상(토끼)은 도끼를 잡고 있다.
오상(말)은 화염보주와 칼을 잡고 있다.

미상()은 낫 형태의 모()를 잡고 있고 신상(원숭이)은 두 손으로 창으로 가슴을 가로지르며 잡고 있다. 유상()은 칼을 잡고 있다.

미상(양)은 낫 형태의 모(矛)를 잡고 있다.
신상(원숭이)은 두 손으로 창으로 가슴을 가로지르며 잡고 있다.
유상 ( 닭 ) 은 칼을 잡고 있다 .

그리고 술상()은 짧은 귀에 도끼를 잡고 있으나 자상()으로, 해상(돼지)은 접혀 있는 귀와 이빨을 보면 술상()으로 판단된다.

술상(개)은 짧은 귀에 도끼를 잡고 있으나 자상(쥐)으로 판단된다.
해상(돼지)은 접혀 있는 귀와 이빨을 보면 술상(개)으로 판단된다.

낭산(狼山)에서 출토 된 석조약사불좌상(국립경주박물관)은 높이는 약 128.5로 광배, 불신, 그리고 대좌가 한돌(一石)로 조성되었다. 왼손에는 큰 보주형의 약기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촉지인을 한다. 얼굴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는데, 세부표현은 마모가 심해 잘 확인되지 않는다.

어깨와 팔, 다리에는 두꺼운 옷 주름이 동일한 간격으로 표현되어있다. 주형광배에는 양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따로 구분하였고, 그 내부에는 꽃무늬 장식과 불꽃무늬장식을 표현하였다. 대좌는 연화대좌로 상대석만 남아있다. 대좌의 연잎장식은 복엽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연잎 안에는 꽃문양장식이 세밀하게 조각되어있다. 이 불상은 왼손에 약기를 들고 있어서 약사불로 판단되며 약사신앙이 유행하던 9세기에 조성한 상으로 추정된다.

낭산(狼山)에서 출토 된 석조약사불좌상(국립경주박물관)은 높이는 약 128.5㎝로 광배, 불신, 그리고 대좌가 한돌(一石)로 조성되었다.

현재 복원 된 능지탑에 조성 된 십이지신상은 능지탑 축조와 관련 된 것이 아니며 주변 훼손 된 능에서 옮겨 진 것을 조합하여 복원하였다. 자세히 십이지신상을 살펴보면 크기가 차이가 있고 양식도 다름을 알 수가 있다특히 자상()은 황복사 동편 왕릉 추정지에서 가져 온 것으로 인상(호랑이)이 자상()으로 바꿔졌다.

능지탑(陵旨塔)은 낭산(狼山) 서록에 있는 사찰로 그동안 문무대왕의 화장지로 추정된 장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찰과 관련하여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유적의 성격과 창건 및 폐사 등의 사찰의 연혁과 사명을 알 수 없는 유적이다. 이에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원형 복원이 필요하다.

1970년 발굴 조사 때, 소조여래좌상의 파편 등이 발견되어 창건 때에는 사면에 흙으로 만든 큰 불상을 봉안한 감실과 같은 목조건축물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 발굴 조사 때, 출토 된 소조여래좌상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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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 서쪽 기슭(배반동 산18-3번지)의 바위 면에 삼존불(三尊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곳은 서록사지(西麓寺址) 일원으로 통일신라시대 절터 이다현재 이곳에는 중생사(衆生寺)라는 작은 절이 있으며 경내에는 마애삼존상(보물 제665)을 비롯하여, 석탑재, 불상대좌, 건물 기단석, 초석 등이 있다. 그리고 과거 주변에서는 석조관음보살입상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이 출토되었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현재 중생사(衆生寺)1972년 보문스님이 기존의 선덕사를 인수하여 중창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전의 선덕사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을 낭산(狼山) 서록사지(西麓寺址)’로 부르고 있었다.

1965년 낭산 마애삼존상 (狼山 磨崖三尊像)을 조사 할 때 이곳에 운영 중인 절은 없었던 것으로 1965년 이전까지는 폐사지로 남아 있었다. 중생사(衆生寺)라는 절은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의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에 등장하는데 현재 중생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낭산 마애삼존상(狼山 磨崖三尊像) 현재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1933년 간행된 『동경통지(東京通誌)에는 이 마애불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산 서쪽 아랫마을 집에 큰 돌이 있는데, 세구의 상을 새겼으나 옆 부분은 묻혀있다. 가운데는 가사를 입고 있고 오른쪽은 갑옷을 입고 칼을 잡았고 왼쪽사람은 흙에 묻혀서 분명하지 않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은 집안에 있던 큰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흙속에 매몰되었다가 후대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에 조각된 삼존상(三尊像)을 살펴보면, 중앙의 본존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다.

지장보살상(피모지장보살상 : 被帽地藏菩薩像)

본존상의 현재 높이는 약 100이다. 둥글고 살이 찐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듯하다. 특히 본존상머리에 착용한 두건과 양어깨를 감싸고 입은 가사 등은 고려불화에서보이는 지장보살상(被帽地藏菩薩像 : 피모지장보살상)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여, 지장보살로 보고 있다.

, 우 협시상은 갑옷을 입고, 악귀를 몰아내는 신장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높이는 두상 모두 약90이로 좌우협시가 신장상인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왼편에 앉아 있는 좌 협시 신장상[向右]은 오른쪽다리는 안쪽으로 접고 왼쪽다리를 비스듬히 세워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시선은 본존상을 향해 있으며, 머리에는 투구를 착용하였고, 몸에는 갑옷을 입고 있다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입을 꽉 다물고 있어 험상궂어 보이며, 높이 치켜든 오른손의 지물과 왼손의 형태 등은 마멸이 심하여 불분명하다. 광배와 대좌의 표현 역시 현재 확인할 수 없다.

왼편에 앉아 있는 좌 협시 신장상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우 협시 신장상[向左]은 좌협시상과 거의 대칭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두 다리를 편안하게 뻗은 유희좌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좌협시상과 유사한 모습을 하지만, 보다 경직되어 있고 몸의 방향도 다르다. 즉 좌협시상은 본존상을 향하여 몸을 틀고 있는 자세인데 비하여 우협시상은 바깥쪽으로 몸을돌려 반대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상 역시 머리에 투구를 착용한 듯 보이며, 몸에는 갑옷을 입고,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우 협시 신장상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 본존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불상, 피모지장보살상(被帽地藏菩薩像), 여신상(혹은 전통 신앙과 관련된 상)3가지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상은 지장보살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마모가 심하여 세부적인표현은 알 수 가 없다. 좌 우 협시상의 모습이 무장을 한 신장상이기 때문에, 매우 독특한 배치구조이다. 조성 시기는 8세기로 보고 있다.

특히 3가지 설 중 여신상은 신라 산신의 모습으로 ‘삼국유사’ 김유신 조에 나타나있다. 김유신(595~673)이 젊은 시절 고구려 간첩 배석에게 잡혀 위험에 빠지려는 찰나 삼산의 신이 모두 나타나 김유신을 구했으며, 그들의 모습은 젊은 여성이었다고 되어있다. 즉 신라의 산신은 왕이나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뿐 아니라 장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김유신을 구해주는 호국신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본존상의 머리를 살펴보면 앞머리와 양 어깨에 걸쳐진 수발(垂髮)에까지 두발 전체에 가는 선으로 머리카락을 표현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두건을 쓴 것이 아니라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상이다. 그러나 이중원광의 광배와 통견식으로 입고 있는 가사, 가부좌의 좌법 등에서 명확하게 불교에 귀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중생사 앞뜰에는 석재들이 한곳에 모여져 있는데, 석탑옥개석, 불상대좌 등 있. 3단 팔각연화대좌는 상대석이 별석이고, 중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대좌의 전체높이는 약73이다. 특히 8각의 중대석 각 면에는 특정 존상이 조각되어있는데, 표면의 마모가 심해 세부내용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중생사 앞뜰에는 석재들이 한곳에 모여져 있는데, 석탑옥개석, 불상대좌 등 있다.
3단 팔각연화대좌는 상대석이 별석이고, 중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다른 연화대좌는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앙련과 복련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복련은 8엽의 연꽃이 매우 볼륨감 있게 새겨져있으나, 앙련은 복련에 비하여 매우 약하게 표현되어있다. 앙련상면정중앙에는 직사각형의 홈이 확인되는데, 추측건대 불상을 결합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크기가 다른 옥개석4기 등이 남아있다.

서록사지(西麓寺址) 주변에서 출토 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은 높이는 약 200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며, 상체는 짧고 배가 다소 나와 있어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 든다. 머리에는 2줄의 띠를 돌리고, 그 위에 화불을 중심으로 10개의 작은 얼굴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10개의 작은 얼굴과 본래 얼굴을 합쳐서 11면이 된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방형을 띠고 있으며, 2줄의 띠 아래로 내려오는 보발은 볼륨감 있게 표현되었다. 코는 부분적으로 결실되었지만 비교적 작고 낮게 나타내었고, 눈은 둥글고 도톰하게 처리하였다. 입은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이다.

서록사지(西麓寺址) 주변에서 출토 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살상의 양어깨에는 천의를 덮고 있으며, 그 위에 3가닥의 보발이 흘러내린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서 정병을 쥐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어떤지 물을 들고 있는데 마모가 심해 잘 확인되지 않는다.

보살상에 착장된 장신구는 크게 목걸이와 영락장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화려한편이다. 목걸이 장식은 2중으로 된 U자형 줄에 여러 개의 짧은 드림장식이 달려있고, 다시 중앙에는 삼지창모양의 수식을 좌우측에는 나뭇잎형태의 수식을 하나씩 더 달았다. 영락장식은 기본적으로 X자형과 U자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양어깨부근에서 내려온 영락이 배 부근에서 꽃문양 장식판을 통과하여 X자로 교차되게 내려오며, 무릎아래에서 새로운U자형영락이 두 개의 꽃문양 장식판을 통해 기존의 X형 영락과 결합된다.

낭산(狼山, 해발 100m)은 경주의 진산(鎭山)으로 신라 사람들은 ‘신들이 노니는 숲’이란 뜻의 신유림(神遊林)이라 부르며 신성시했고 왕실에서 신에게 제사 지냈던 곳이다. ()은 이리 낭()’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413)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잡지·제사지에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나력산은 신라 6부의 하나인 습비부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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