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문동 사지(普門洞 寺址)는 경주시에서 보문관광단지로 가는 국도 남편 보문동(보문동 848-6번지 외 851, 856-2, 857, 757, 758-1, 760 등)의 넓은 평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터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낭산이 있고, 북쪽에는 진평왕릉, 남쪽으로는 효공왕릉 등이 있다. 절터 內에는 금당지, 목탑지 등의 유구가 있는데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만 당간지주(幢竿支柱), 석등 지대석, 석조, 초석 등 다수의 석물들을 볼 수가 있다.

절터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처음 이루어졌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고적조사에서 ‘普門寺’, ‘普門’이라고 새긴 기와가 절터 부근에서 출토되어 보문사로 비정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일인 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의해 전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8년과 1991년에 문화재관리국과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각각 실시하였다.
가람배치는 7×5칸의 금당을 중심으로 그 전방 좌, 우에 목탑을 23m 간격으로 배치하고 금당 북편에는 강당, 남편에는 중문과 남문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강당지와 중문지, 남문지의 위치 확인은 불가능하나,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조사 할 당시에는 강당지, 문지, 그리고 회랑지의 일부 초석이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절터의 규모와 현재 남아 있는 유구 등 비교하였을 때, 7세기 후반에 창건 된 사천왕사, 망덕사지 가람배치와 유사성이 많다. 금당지 남편 동서쪽에 목탑이 배치된 점이나 금당지 북편 동서쪽에 건물지가 배치된 점, 그리고 금당지 기단이 가구식 기단으로 축조되었다는 점 등 현재 남아있는 유구 등을 비교해보면, 세 절터에서 공통된 특징들이 다수 확인된다.
창건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사천왕사(679년)와 망덕사(685년경)의 창건연대를 참고했을 때, 보문사 역시 7세기 후반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문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신라 경문왕 11년(871)에 황룡사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매납하였던 황룡사「刹柱本紀」에 보문사 상좌승 은전(㢋㭇)이 도감전으로 대탑불사에 참석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금동사리기 명경통(‘仲和三年’ 883년)에도 보문사 현여대덕이 대석탑 중수 시 무구정광경에 의거하여 소탑 77기를 만들어 대탑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시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 해발 252m)의 서쪽 능선에서 남북 방향으로 보문동 고분군(普門洞古墳群)이 있는데 5~7세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과 완총, 금환총이 확인되었는데 여기 보문동 절터는 창건 당시 이들 지배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보물 제64호)는 금당 북쪽에 1기가 남아 있는데 1매의 대형 화강암 석재를 길이 244㎝, 너비 90㎝, 깊이 62㎝의 장방형으로 파내었는데, 외부 장식이나 문양이 없는 간소한 형식의 방형석조이다. 수조의 측벽 바닥에는 지름 7㎝ 내외의 배수용 구멍이 한 개 뚫려있다. 석조는 보통 급수 용기라고 알려져 있으나 부처에게 공양할 연꽃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보문동 절터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23호)는 금당지 남북중심축선과 탑지 동서연장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140m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남북으로 2개의 지주가 있는데, 남쪽 지주는 완전하나 북쪽 지주는 상부가 결실되었다.

남쪽 지주의 간공은 방형으로 현 지표면에서 10㎝, 155㎝, 300㎝의 높이에 1개씩 총 3개가 있으며, 3개 모두 구멍 크기는 15×18㎝정도이다. 반면 북쪽 지주는 상·중 2개의 간공만이 확인된다. 또한 남쪽 지주의 간공은 지주를 관통하는 것에 반해 북쪽 지주의 간공은 지주 너비의 1/2만 뚫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정대를 남에서 북으로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 사이 지표면에는 치석된 석재가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하부 지대석인지 북쪽 지주의 결실부인지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렸는데, 깃발을 당(幢),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이외에도 수십 개의 초석 및 기단 지대석 등이 흩어져 있고 초석은 원형주좌초석과 방형초석이 대부분이며 고막이가 있는 초석도 일부 있다.



보문동 절터는 경주지역 폐사지 중에서 가장 많은 석재가 지표상에 노출되어있는 유적 중 하나이다. 하지만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석조를 제외하고는 기타 유구 및 유물들은 보호시설 없이 논 가운데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경작 등으로 인하여 유구의 훼손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 후지시마의 보고내용과 이후 두 차례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 현상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동안 유구가 훼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부 확인된 금당지 북쪽 동편 건물지(토단)의 경우 현재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며, 금당지 남편에서 있었다는 중문지의 흔적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절터 내에 흩어져있는 초석과 석물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원위치에서 더 이탈하고 있어, 원형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들어 질 가능성이 높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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