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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은 대릉원(大陵園) 안에 있고 주변은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 12.4m, 직경 56.7m로 묘제는 인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이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이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으며 죽장릉 (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 미추왕의 사망 시기는 3세기인 284년으로 당시 묘제는 목곽묘로 대형의 고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조」에 의하면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장지는 능재흥륜사동(陵在興輪寺洞)인데 흥륜사(興輪寺)는 여기에서 서쪽 500m 지점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일원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내물왕의 왕비와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되어 있는데 17대 내물왕(~ 402년 2월)은 미추왕 사후 72년 만인 356년에 왕위에 올랐고, 실성왕(~ 417년 5월)은 118년 후인 402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는 후대 김씨 일족이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 사후 왕권이 김씨 일족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족보를 조작한 것이다.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삼문

36대 혜공왕 때, 미추왕을 김성시조(金姓始祖)로 추앙하기 위해 미추왕릉(味鄒王陵)을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五陵)보다 서열(序列)을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서동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및 대릉원에서 묻힌 선대 왕들의 능 위치는 실전했으나 의도적으로 미추왕릉을 지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반월성에서 나와서 대릉원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능이 미추왕릉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다. 능 앞쪽에는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다.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재위 기간 26212~ 28410, 2210개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미조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는데 성은 김씨이고 어머니는 박씨이며 갈문왕 이칠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이고 11대 조분왕의 딸이다. 미추의 조상 알지(閼智)가 계림에서 태어나자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閼智)가 세한(勢漢, 熱漢)을 낳고, 세한(勢漢)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阿道)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首留)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郁甫)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仇道)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즉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미추왕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으로 되어있다. 단지 삼국유사에서는 김알지의 아들 이름이 열한(熱漢)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세(勢)자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열(熱)자로 잘못 쓴 결과이다.

미추의 아버지인 구도(仇道)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로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왕비는 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아들이 없어 그녀의 남편인 미추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추대했고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정변으로 왕이 된 경우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261년 12월 28일 첨해왕(沾解王)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이는 첨해왕(沾解王)과, 왕비 및 가족이 살해된 것이다. 미추는 김씨 성을 가진 귀족이지 왕족은 아니고 11대 조분왕의 둘째 사위이다. 첨해왕(沾解王)이 아들이 없으면 그의 사위 중 누군가가 왕이 되는 것이 정상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왕의 사망일은 연도와 해당 월만 기록하지 일자를 기록하지 않는다.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은 백제와의 싸움에 일생을 바쳤고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였다. 재위 23년만인 284년에 죽으니 대릉(大陵)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유사에는 능의 위치가 흥륜사(興輪寺) 동쪽으로 되어 있다. 그의 능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 불리게 된 배경은 삼국유사 기이(紀異)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편에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 함)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이다. 대대로 현달(顯達)하고, 또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어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지금 세상에서 미추왕(未鄒王)의 능(陵)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金氏)로서 처음 왕위(王位)에 오른 때문이며, 후대(後代)의 모든 김씨 왕(金氏 王)들이 미추(未鄒)를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 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禮)王)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동원했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신라군을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군사와 힘을 합해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댓잎만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와 나라에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고 불렀다.

대릉원 내에 있는 검총으로 유일하게 무덤 옆에 대나무가 있다.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武器)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엇인가 진동(振動)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 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臣)은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한다. 왕은 대답한다.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公)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서 김유신공(金庾信公)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金公)을 위해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公)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平壤)을 토벌(討伐)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 : 내림(奈臨),골화(骨火),혈례(穴禮))과 함께 제사 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序列)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고 한다.」
삼국사기 新羅本紀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주요 일대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즉위 원년 3월, 대궐 동쪽 못에 용이 나타났다. 7월, 금성 서문에 불이 났고, 인가 삼백여 호가 연이어 불탔다.
2년 정월,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다.

3년 2월, 왕이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황산에 행차하여 노인 및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5년 가을 8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출격하였다. 적들은 패주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놓고 왕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으며, 또한 사신 다섯 명을 파견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11년 2월,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15년 2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고 여겨 이에 따르지 않았다.

17년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파진찬 정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19년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였다.
20년 정월, 홍권을 이찬, 양질을 일길찬, 광겸을 사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9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22년 9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10월에는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23년 2월, 왕이 서쪽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대릉(大陵, 죽장릉[竹長陵])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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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반월성 북편에 분포하는 고분군 가운데 서북편 말단부에 있는 고분군이다. 서쪽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群)과 구분되고 남쪽의 도로에 의해 황남동고분군(皇南洞 古墳群), 황오동고분군(皇吾洞 古墳群)과 구분된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봉황대(鳳凰臺, 125호), 식리총(飾履塚, 126호), 금령총(金鈴塚, 127호),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등 4기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고분 1기와 고분 터 2기를 볼 수가 있다. 봉황대 고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식리총과 금령총, 옥포총은 1924년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하였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 전경
왼쪽부터 금령총(金鈴塚, 127호),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식리총(飾履塚, 126호)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봉황알을 닮은 전망대라는 뜻의 봉황대(鳳凰臺)는 과거 경주를 유람하는 문사나 일본을 오가는 사절단이 경주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였다. 발굴이 되지 않았고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있어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된다.
봉황대(鳳凰臺)가 왕릉급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고고학적 안목 때문이다. 그의 완당전집에 「…봉황대 동서편에 인공산이 많다…몇 해 전 무너진 인공산에서 깊이가 한 길 남짓 되는 검푸른 빛의 공동(구멍)이 보였다.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인공산’이 옛날의 왕릉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이다.

추사 김정희는 “봉황대 주변의 인공산이 무너져 그 속에서 구멍이 뚫렸는데,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신라 왕릉임이 분명하다.” 고 전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으로 이보다 큰 고분은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이나 이것은 표형분(瓢形墳)으로 2개의 무덤이 합쳐진 것이다.
봉황대 고분은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있는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 또는 자비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5세기 말∼ 6세기 초로 편년 되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 되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에는 예부터 ‘봉황 알’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풍수가가 고려 태조(918~943)에게 “배 모양으로 생긴 경주는 언젠가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침몰시켜야 한다.” 고 풍수적으로 신라 공략을 조언하였다. 그리고 그 풍수가는 신라 임금을 찾아가 세치혀를 놀렸다.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긴 서라벌(경주)은 천년동안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봉황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합니다. 서라벌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 두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겁니다.”
풍수가의 말에 혹한 신라 왕은 서라벌 한 복판에 둥글둥글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런 뒤 미추왕릉 부근의 숲속에 우물을 파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짐을 잔뜩 실은 배의 밑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라는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실제로 경주 지형은 형산강(서천)과 북천(알천), 남천으로 둘러싸인 분지(선상지, 삼각주) 지형이다.
봉황대 고분에는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과 종각 터가 있었는데 원래 봉덕사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이 북천의 홍수로 인해 폐사되어 영묘사로 옮겨졌고 영묘사가 화재로 폐사된 뒤 이곳 봉황대 고분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5년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1915년 봉황대 고분에서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기는 모습

금령총(金鈴塚, 127호분)
금령총(金鈴塚)은 두 번째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금관총 발굴 3년 후인 1924년 조선총독부주관으로 노동리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택해 발굴조사를 했다. 봉분은 원형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직경 18m, 높이 약 4.5m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금령총(金鈴塚)은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는 자갈과 갈색 점토로 쌓았고 지표 아래 3m에 지하식의 하나로 된 덧널(목곽, 4.8×3.5×1.5m)이 동, 서를 장축으로 하여,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깐 다음 설치되었고, 덧널 내부의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내면을 투조금동판(透彫金銅板)으로 장식한 나무널(목관, 1.5×0.5m)이 들어 있었다.
1924년 발굴조사 결과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작아서 키 90cm 정도의 6세 이하 왕자 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금관이 금방울 한 쌍이 장식되어「금방울이 금관에 장식되어 출토되었다」는 뜻에서「금령총(金鈴塚)」이라 했다.
발굴을 주관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였고 발굴 결과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해 신라 시대 생활을 알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출토된 중요유물을 보면 금제 허리띠金製튎帶) 및 장식품, 백화수피로 만든 관모, 금구슬,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금제 가락지, 금동제 신발, 큰칼(大刀), 마구류(馬具類) 등 다수가 있는데 특히 다리 달린 배 모양 토기와 신라 토기로서 최초로 국보가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제91호) 2점이 출토되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6세 이하 신라 왕자로 벽화의 아들 또는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금령총 재발굴에서는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보다 먼저 두 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발굴단은 두 고분에 127-1호, 127-2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령총의 조성연대를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말~ 6세기 초로 추정하고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이 6세 이하의 신라 왕자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사기> 500년(소지왕 22년) 9월 기록을 보면 왕자를 추정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 9월, 왕이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 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경북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대목에서 학계는 두 달 뒤인 500년 11월 “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64살의 지증왕이 그 뒤를 이었다”고 했다는 기록은 500년 9 ~ 11월의 기록이 아니고 3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압축·정리한 기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지증왕은 5~6살 이전에 죽은 선왕(소지왕)의 유복자를 위해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금령총은 벽화의 아들 무덤이 되고, 봉황대는 소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금령총 주인공이 벽화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눌지왕 이후 김씨 중에서도 눌지의 직계에서 족내혼, 근친혼을 거듭했기 때문에 지방(경북 영주) 출신의 벽화 소녀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눌지, 자비, 소지로 이어지는 눌지의 직계는 아니고 소지왕과는 6촌(삼국사기), 또는 5촌(삼국유사) 사이가 된다. 계미년(503년 추정) 9월 건립된 포항 냉수리비에는 지증왕을 ‘지도로 갈문왕(왕의 근친에게 주는 봉작)’으로 지칭했다. <삼국사기> 기록(500년 11월 즉위)과는 3년의 시차가 있다.
이는 지증왕이 정변으로 죽은 소지왕의 뒤를 곧바로 잇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최소한 3년 이상 ‘섭정’한 뒤에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즉 지증왕이 3년이나 즉위하지 못했을 정도로 왕위를 두고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지증왕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서 왕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황대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마립간 시대(356~503)의 능으로 보고 내물마립간(356~402), 실성마립간(420~417), 눌지마립간(417~458), 자비마립간(458~479), 소지마립간(479~500) 그리고 재위 도중 칭호를 ‘왕’으로 바꾼 지증왕(500~514) 등 6명의 왕릉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북쪽에 차례로 조성된 봉황대 고분(125호분),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134호분(표형분 : 瓢形墳)의 주인공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두고 내물왕이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눌지왕과 실성왕이 따르고 있다.

노동동 고분군에서 본 황남대총

황남대총의 피장자가 눌지왕이라고 전제로 하면 봉황대 고분은 자비왕이고, 서봉황대 고분(130호분)은 소지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은 모두 자비왕과 관련된 인물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자비왕의 맏아들이 소지왕’이라 했고,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셋째아들이 소지왕’이라 했다. 둘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일찍 죽어 셋째가 ‘맏아들’의 지위에서 왕위를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고리 자루 큰칼 3자루가 출토된 고분으로 규모는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유물의 위상은 최상급이다. 그래서 금령총 주인공은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즉 소지왕이 죽었을 때 자비왕의 손자이자 이사지왕(소지왕의 동생, 금관총 주인공)의 어린 아들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데 요절하자 지증왕이 금령총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근 금령총에서 최소 8명의 순장자가 보인다는 견해가 있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순장 제도는 502년(지증왕 3) 2월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금령총은 502년 2월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식리총(飾履塚, 126호분)
식리총(飾履塚)은 조선총독부주관으로 금관총을 발굴조사 후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참여했다. 발굴 당시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직경 30m, 높이 약 6m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현재 봉황대 고분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분의  지표 2.7m 아래에 지하식으로 하나의 덧널(木槨, 5.25×3.3×1.2m)을 동,서 장축으로 하였고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깔고 설치한 외 덧널식(單槨式)이며, 덧널의 내부 서쪽 내면에 붉은 칠을 하고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나무널(木棺, 2.2×0.78m)을 설치하였다. 널 동쪽에는 각종 껴묻거리(부장품)가 배치되어 있었다. 덧널과 구덩이 벽 사이, 그리고 덧널의 위에는 냇돌로 돌무지를 쌓았고 돌무지 위에는 봉토를 씌웠다. 
널이 놓여 있던 곳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사용하였던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서쪽 끝부분에서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이 발견되어 식리총(飾履塚)으로 명명되었다.
이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은 거북 등 모양(龜甲形) 윤곽 안에 각종 괴수(怪獸)의 타출 무늬(打出文)가 새겨져 있어 서역(西域) 미술과 관련이 깊다.

식리총(飾履塚)은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널 동쪽의 껴묻거리 구역에서는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 백화수피모(白樺樹皮帽),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동장안교(金銅張鞍橋)를 비롯한 각종 마구(馬具) · 청동합(靑銅盒) · 자루솥(鐎斗)을 비롯해 금속용기와 칠기 · 토기 · 금은장쌍룡고리자루큰칼(金銀裝雙龍環頭大刀) 등의 무기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은 뚜껑 손잡이가 새 모양으로 된 특징을 보이고, 자루 솥은 중국 동진(東晋)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고분의 규모와 출토된 금동제 유물로 보아 왕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왕족이거나 최고의 귀족 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피장자는 널 안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로 보아 남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5세기 말경이나 6세기 초엽으로 편년 된다.

식리총(飾履塚)과 금령총(金鈴塚)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옥포총(玉圃塚)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발굴 조사하였다. 가옥 소유지의 이름 박옥포(朴玉圃)에 의해 옥포총(玉圃塚)으로 명명되었다.

옥포총(玉圃塚)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봉분은 확인되지 않지만 약 1m 두께의 남북 너비 8m 정도의 적석 상부에 1m 정도의 점토를 덮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장축 방향이 동-서향 장방형의 목곽형태로 내, 외 2중곽이며 외곽은 길이 485㎝, 너비 240㎝, 내곽은 길이 386㎝, 너비 180㎝이며, 높이 127㎝이다. 목관은 흑칠이 되었으며 크기는 알 수 없다. 묘광은 바닥을 2단으로 파냈고 하단 묘광은 추정 길이 600㎝, 너비 약 600㎝에 상단 묘광은 길이 약 730~740㎝, 너비 약 600㎝, 깊이 187㎝이다.

옥포총(玉圃塚)에서는 금은제 장신구와 백화수피제 관모, 삼루환두대도, 은제 굉갑(肱甲), 마구, 삼환령 등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및 구조 등을 통해서 볼 때 고분군 축조 시기는 5세기 말~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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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암(朱砂庵)은 경주시 서면 부산(富山) 정상 바로 아래 있는 암자로 주사사(朱砂寺)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은 바위로 되어있고 그 모습이 장수의 투구 형태다. 그리고 주사암(朱砂庵)은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다. 즉 ㄷ 자 바위가 주사암(朱砂庵)을 둘러싸고 있으며 대웅전 옆의 주사암(朱砂庵)이 투구의 중앙에 있다.

이러한 형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기운이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하여 명당 터 중에 하나다. 그리고 절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창건 시기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주암사(朱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설화에 의해서 절 이름이 주사암(朱砂庵)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富山)은 주사산(朱沙山, 朱砂山), 오봉산(五峰山), 오로봉산, 닭벼슬산 등으로 불리고 있다. 동경잡기의 기록에 의하면 품상촌(品上村)의 주산으로 그 산 위에 옛터가 있는데 속칭 장자(長者)의 터라 하였다. 또 용정(湧井)이 있으며 산허리에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10여 명을 수용한 수가 있다고 한다.
현재는 오봉산(五峰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시대의 한 도인(道人)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고 하였는데,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갑사(甲士)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러서 보니, 단사(丹砂)의 붉은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고, 늙은 승려가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괴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천 명을 보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번 주문(呪文)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 안에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후로 절 이름을 주사암(朱砂庵)이라고 한다.」

투구바위 뒷편에 있는 주사굴

또 다른 전설은 신라 문무왕 때 부산성富山城)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사암을 불사처(不死處)라 부르고 있다.

주사암(朱砂庵)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남아 있는 전각과 불상을 볼 때 조선 시대 후기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전각 및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 삼성각 · 종각 · 요사 등이 있고, 국가유산으로는 2007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경주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대웅전
주사암(朱砂庵)이자 영산전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朱砂庵 靈山殿 石造三尊佛坐像)은 영조 1년(1725)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영산전 내에 도금 상태로 봉안되어 있다. 좌우로 협시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우협시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쓴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삼성각

주사암(朱砂庵) 마당에서 앞의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 오른쪽으로 200m 정도 가면 평평하고 장엄한 바위를 만난다. 넓이는 100여평 규모로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이 바위를 마당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또는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

김극기(金克己)의 시서(詩序)에 주암사(朱巖寺) 지맥석(持麥石)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지산(下枝山)은 세속에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산의 남쪽에 주암사란 절이 있고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는데 깍아 지른 듯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과 먼바다를 바라봄에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삼라만상을 내려보는 것 같다. 대석(臺石)의 서쪽에 지맥석(持麥石)이 있는데 사방이 깍아지른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듯 하지만 그 위에는 평탄하여 사람 1백명이 앉을 수 있다.

옛날 대서발(大舒發) 김유신(金庾信) 공이 여기에 보리를 가져와 술 재료를 공급하여 군리들을 대접하던 곳으로, 지금도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 9 보쯤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에서 본 풍광

마당바위는 CF, Drama 등 촬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부산성(富山城)은 『삼국사기』에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으로 성벽의 둘레가 9.7km이다. 『삼국유사』에도 부산성(富山城)을 쌓은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성 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당나라가 신라의 수도까지 침범할 경우 명활산성, 남산 성, 선도 산성 등과 함께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한 산성이었다. 그 이후에는 경주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 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주사암 주차장에서 20m 정도 올라가면 부산의 정상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산석성(夫山石城)으로 나오며, “둘레가 2,765보 3척이며, 안에는 시내가 넷, 연못이 하나, 우물과 샘이 아홉이 있으며, 또한 군창(軍倉)이 있는데, 영천과 영일의 군창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중요한 산성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성(富山城)으로 나오며, 이미 반이나 무너졌다는 내용이 있어 잘 관리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 터와 군의 창고 터,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 터, 우물 터, 못, 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 터 등이 남아 있다.

주사암에서 보살피고 있는 고양이
세월의 흔적

여근곡(女根谷)은 부산 기슭의 골짜기로 여자의 성기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636년(선덕여왕 5) 두꺼비가 옥문지에 많이 모여 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이 서쪽변경의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에 백제 병사가 숨어 있다고 보아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근곡(女根谷) 옥문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機三事)에도 옥문곡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는데 두꺼비가 개구리로, 옥문지가 여근곡으로 바뀌어있고, 그 위치도 변경이 아니라 교외인 건천읍 신평리에 있는 부산 아래라고 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근곡이 부 중심지의 서쪽 41리에 있다고 하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덧붙였으며, 이후 조선 시대 거의 모든 경주부의 지리지에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주사암(朱砂庵)의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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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 정상에는 조선 성종 16년(1485)에 조성한 경숙옹주(敬淑翁主) 태실(胎室)과 태비(胎碑)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태실이 도굴되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태실(胎室) 유물인 태 항아리 2점과 태지(胎誌) 1점을 찾아 소장하고 있다.

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은 UNIST 입구 우측에 있는 산이다.

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이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비의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비의 뒷면에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비문으로 보아 1485년(성종 16)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사연댐 가느 길에 만나는 경숙옹주(敬淑翁主)의 태실(胎室)과 태비(胎碑) 안내판

태실의 주인은 경숙옹주(敬淑翁主)로 1483년 조선 성종[1457~1494]과 후궁 숙의 김씨(淑儀金氏) 사이에서 3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출생 후 그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태실(胎室) 및 태비(胎碑)를 조성한 것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으로 가는 길
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로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2004년 12월 16일에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胎)를 모시는 작은 돌방으로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왕실 자손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胎室)을 만들고 태(胎)를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며, 태비(胎碑)는 태실(胎室) 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胎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러한 태(胎)를 처리하는 장태(藏胎) 문화는 조선의 쇠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태비(胎碑)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일반 민간에서는 태(胎)를 길지에 묻거나, 왕겨 불을 이용하여 태웠다. 태(胎)를 태운 재는 강이나, 냇물에 띄워 보내고 태우지 않은 태(胎)는 짚으로 싸서 돌맹이와 함께 물속 깊이 버렸다.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는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산에 묻었고 태(胎)를 담은 항아리를 태호(胎壺) 또는 태옹(胎甕)이라 한다. 이때 태지(胎誌)를 태호 (胎壺) 에 함께 봉안하는데 태지(胎誌)는 태(胎)의 주인에 대한 신상명세서다.
궁중 풍속에 의하면 왕자들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지나면 태(胎)를 태호(胎壺)에 봉안하는데 주로 상감분청이다. 이때 태호(胎壺)는 태(胎)를 봉안하기 전에 백번을 씻는다. 그리고 밑바닥에 동전을 깔고 태(胎)를 봉안한 다음 붉은 비단에 뚜껑을 감싼다. 그것을 다시 외호(外壺)라고 하는 큰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 사이를 솜으로 채워 움직이지 않도록 한 다음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종이로 싼다. 태호는(胎壺) 태지(胎誌)와 함께 봉안 한다.

왕세자의 경우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따로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실은 전국 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봉(胎峯)을 선정하였고, 이곳 돌혈(突穴)에 해당하는 자리에 좌향을 정하여 태를 묻고 주위에는 석조물을 세워 왕릉같이 장엄하게 하였다. 태실(胎室)을 마련한 태봉(胎封)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일반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 일체 행위를 금지하여 특별하게 관리하였다. 이에 관한 업무는 예문관이 맡았다.
왕들의 태실(胎室)은 가능하면 궁중으로부터 거리가 먼 지방의 명당을 찾아서 마련하는데 이는 왕과 백성의 합일을 통해 왕실의 번영과 국토민안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에서 본 사연댐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되는데 아기 태실은 왕실 자손의 태를 묻고 조성한 시설물이라면, 가봉 태실은 왕이나 왕비, 추존왕을 대상으로 그 격식에 맞게 석물을 추가한 것을 뜻한다. 2023년 3월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148개소로, 아기 태실 120개소, 가봉 태실 28개소이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의 고적 조사사업에 의해 조선 왕실의 태실이 파괴되었다. 즉 1928∼1929년 이왕직이 전국에 흩어진 조선 왕실 태실(胎室)에 매안(埋安)된 태항아리와 태지(胎誌)를 수습한 후 서삼릉에 집장(集藏)했고, 이 과정에서 태실(胎室) 석물들을 훼철했기 때문이다. 그때 대상이었던 54개소의 태실지는 훼손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도굴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의도는 조선 왕들을 일본 천황 아래에 포함 시켜 우리 백성을 식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왕실 태호도 많이 도굴하였다.
이후 원 태실지에 남아 있던 석물마저도 오랜 기간 방치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리고 1970년 조선 왕실 태실 관련 유적인 서삼릉이 처음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이래로 태실(胎室)과 관련 유구와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사연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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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동 고분군(慶州 路西洞 古墳群)은 반월성의 북편 일대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지구 고분군들 가운데 북서 말단부에 있는 것으로 경주시 노서동 104번지 일대에 해당된다. 고분군 동쪽의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群)이, 남쪽의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이 있다.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은 13기의 봉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마총(馬塚, 133호분), 우총(牛塚, 131호분),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138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등 8기는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된 유물이나 봉토의 규모로 보아 6세기 때의 신라왕과 왕족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목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128호분), 서봉총(129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제138호분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쌍상총(137호분), 마총(133호분), 우총(131호분) 등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이다.

고분들 가운데 서봉총(129호분), 134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등 4기는 봉분이 표형분(瓢形墳)이고 나머지는 단일원분(單一圓墳)이다. 서북단에 자리한 130호분은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보다는 약간 작지만 거분(巨墳)으로 서봉황대 고분으로 불리고 있다.

미발굴 된 고분은  서봉황대(130호분),  132호분,  134호분, 135호분, 136호분 등 5기이다.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된 고분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봉토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는데 발굴 결과 크기는 직경 45m, 높이 12m 정도로 추산되었다.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덧널은 약 40㎝ 깊이로 지반을 파서 설치한 지상식의 외덧널식(單槨式)이었다.

발굴조사 계기는 주막집 증축 터파기 공사 도중 우연히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귀고리, 허리띠 등 온갖 황금제품이 쏟아져나왔다. 즉 1921년 9월 23일 노서리에 있는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있던 주막(酒幕)집에서 뒤뜰을 확장하려고 폐고분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금관총 유적지에 보존보호를 위해 돔형 전시공간을 구축
금관총의 돔형 전시공간과 뒤에 보이는 봉황대 고분

본격적인 조사는 일부 유물 유실과 봉토가 훼손 된 후 진행되었는데  당시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경찰서장 입회하에 발굴조사를 하였다. 모로시카를 비롯해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그리고 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등과 함께 9월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9월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 만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금관총은 비전문가에 의해 4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를 정확히 밝히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물만 수습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발굴 후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古)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덧널의 크기는 길이, 너비가 4.8×2.1m로 추정하였으나 천마총 등과 비교하면 너무 작게 추정된 것으로 원래는 이중의 덧널식인데 내부 덧널만 조사되었고 그 크기가 그러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무널(木槨)은 약 2.5×1.0m의 크기로 칠(漆)을 한 것이다.

유물로는 금관, 금제허리띠(金製銙帶) 등의 각종 장신구, 금동말안장(金銅鞍橋), 옥충(玉蟲)을 장식한 발걸이(子) 등의 마구류, 금제완(金製완), 청동초두(靑銅斗) 등의 귀금속용기와 유리용기, 토기류, 각종 철제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엽으로 추정되고 있고, 피장자는 남자라는 주장과 여자라는 주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큰 칼의 출토상태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금관총(2015)과 금령총(2018~2020)을 재발굴하였는데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의 ‘칼끝장식’ 1점이 나왔고 2013년에도 금관총 유물의 보존처리 도중 ‘이사지왕’ 명문 고리자루큰칼 2점을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에서만 출토된 3점의 ‘이사지왕’ 명문 칼이 나왔는데 금관총의 주인공, 즉 피장자는 이사지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는 ‘이사지왕’이 보이지 않는다.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 (국립경주박물관)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서봉총(瑞鳳塚)은 세 번째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봉분은 표형분(瓢形墳, 쌍분)이고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1926년에 발굴조사를 했다. 표형분(瓢形墳, 쌍분)은 북분과 남분으로 구성되고 남분을 먼저 발굴을 했고 데이비드 총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Percival David, 1892~1964)가 발굴 자금을 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발굴 결과 금령총보다 많은 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당시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를 기념하여 서봉총으로 명명되었다.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취하고, 출토된 신라 금관 장식 가운데 봉황새 모양 장식이 있어 봉황(鳳凰)의 「봉」자를 취해서 「서봉총」이라 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은 금관총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m의 거리를 두고 있다.

현재 서봉총(瑞鳳塚) 자리에는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의 발굴조사는 금령총의 발굴조사 2년 후인 1926년에 역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관총, 금령총이 먼저 발굴되어 금관이 출토되어서 경주 노동리, 노서리 일대에 분포한 신라 무덤에는 금관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시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나라의 옛 사찰과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그리스, 로마 등의 고분 발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발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일본은 마침 경주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라 고분 발굴 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당시 일본 교토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하마다가 황태자를 안내하여 발굴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고 신라 무덤이 일본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된 셈이다.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때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되어 있어 그 용지를 매립해야 했다. 이때 매립 할 흙이 필요하게 되자, 서봉총의 봉토 흙이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의 매립에 사용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봉황모양장식을 얹은 금관을 비롯한 유리제팔찌, 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 등의 각종 장신구, 청동초두(靑銅斗), 칠도각병(漆塗角甁), 유리그릇을 비롯한 각종 용기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연수원년(延壽元年) 신묘년(辛卯年) 3월에 이 은합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연수원년은 451년 또는 511년으로 추정되는데 451년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분은 이보다 늦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이고 피장자는 여성 왕족묘로 추정된다.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서봉황대 고분은 직경이 거의 80m에 달하고 신라 마립간기 말기인 6세기 초의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 봉토의 상면에서 함몰 현상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서봉황대 고분(미발굴 130호분)
미발굴 132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호우총은 남쪽에 배치되어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하였고 두 고분 모두 표형분(瓢形墳)이다.

봉토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4m 정도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금속용기류, 마구류,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출토된 청동합(靑銅盒, 보물 제1878호) 바닥에는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십(壺杅十)"이라는 4줄 16자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이 이름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호우총이라 명명하였다.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이 청동합(靑銅盒, 청동호우)은 보물 제1878호로 높이 18.5cm, 폭 23cm,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와 동일한 글자체와 제작 시점을 명확히 알려주는 명문 내용 등으로 인하여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뒤 2년이 지난 415년(장수왕 3년)이다.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있었던 제사 때에 만들어진 제기(祭器)의 하나로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銙帶)를 출토하는 최고위급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청동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 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나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은령총(銀鈴塚)은 호우총(壺杅塚)의 북편에 위치하고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발굴 당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중형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봉토의 크기는 직경 20m, 높이 5m로 내부구조는 호우총과 비슷한데, 덧널부는 지하에 설치되었으며 호우총보다 대략 30㎝ 정도 깊게 설치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두향(頭向)은 동쪽이며, 머리 쪽에 부장품이 놓여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동관과 금동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쇠솥 등의 금속제용기류, 칠기, 토기 등과 함께 약간의 철제이기류와 은장도, 그리고 마구류 일부가 수습되었다. 피장자는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널 내에 장식된 큰 칼이 없고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주인공은 왕족의 부인 정도로 여겨지며, 그 축조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쌍상총(雙床塚)은 봉분이 원형봉토분으로 노서동(路西洞)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1953년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묘제는 통일신라 초기의 부부합장분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대부분 도굴되었고 널방(玄室) 내에 2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屍床臺)가 발견되어 쌍상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되고 봉분이 훼손당한 것으로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토의 중심에는 남향한 돌방(石室)이 배치되었다. 널방(玄室)은 길이(동~서) 3.3m, 너비(남~북) 3.0m, 높이3.6m의 크기로 네 벽은 지면 위에 잘 다듬은 깬돌(割石)로 쌓았다. 벽들은 바닥에서 2m 높이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나 그 위부터는 내곡(內曲)하며 줄어들게 쌓았고 위에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뚜껑으로 얹었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네 벽을 쌓을 때는 일정한 크기의 깬돌을 사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쌓았고 그 위에는 회를 발랐다. 널방의 바닥에는 회를 깔고 중앙에 벽과 약 30㎝의 거리를 두고 길이, 너비, 두께가 2.3×2.0×0.3m인 주검 받침(屍床)을 설치하였다.

주검 받침은 자연석과 냇돌(川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먼저 북쪽에 너비 1.5m의 주검 받침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덧대어 너비 0.5m의 2차 주검 받침을 설치한 것이다. 주검 받침의 전면에도 회를 발랐는데, 원래의 주검 받침에는 0.9×0.3×0.2m인 6매의 판석에 시신의 머리·몸·다리를 놓을 만큼 조각하여 정교하게 파 놓았다.
제2주검받침에는 돌베게(石枕)와 돌발받침(石足座)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널(木棺)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안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널방의 정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을 달았는데, 널길은 길이, 너비, 높이가 3.0×1.35×1.5m 정도였다. 널문은 길이, 너비, 두께가 1.33×0.55×0.1m 크기로 문주석(門柱石)을 돌출시키고 밑에 문지방석을 놓고는 2매의 가공한 판석비(板石扉)를 달았다.

이 비(扉)에는 귀면(鬼面)으로 된 청동제좌판(靑銅製座板)에 낀 문고리가 하나씩 달렸고, 그 아래에 철제의 빗장이 걸쳐져 있었다. 비에서 1.6m 떨어진 곳부터 널길의 입구까지에 돌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였다. 돌방(石室)의 안에서는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을 비롯한 약간의 토기편만 출토되었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아 마립간기(麻立干期) 신라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마총(馬塚)은 서봉황대 고분의 전면에 배치된 표형분인 134호의 서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도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사한 결과 말뼈와 안구편(鞍具片)이 나왔다 하여 마총(馬塚)으로 불리고 있다. 그 후 1953년 국립박물관이 이 고분과 약 50m 떨어진 쌍상총과 함께 재조사를 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방과 널길 사이에 돌문이 아닌 나무문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고분 모두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조사 시, 봉분은 많이 깎여 나가고 동서와 남북의 직경이 각각 3.4m, 노면에서의 높이는 3.57m만 남아 있었으나 원래 봉분의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정도인 쌍상총과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총(馬塚)의 돌방은 지상에 남향하여 축조되었다. 널방(玄室)은 동서 3.0m, 남북 3.24m, 높이 3.7m의 크기로 남북이 약간 길지만 정방형(正方形)으로 볼 수 있다. 널방의 네 벽은 비교적 크기가 고르고 장방형(長方形)으로 다듬은 깬돌(割石)로 열과 단을 맞추어 위로 올라가며 좁혀 쌓았다.

마총의 조성연대는 통일초기(統一初期)로 판단되고 있으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문에 나무를 사용한 예는 통구지방의 고구려고분인 무용총(舞踊塚)에서 보이고 있어, 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보아 마립간(麻立干)시기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표형분인 미발굴 134호분
표형분인 134호분의 호석

 

138호분
138호분은 조사 전 이미 봉분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원래는 직경이 약 2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하에 무덤 구덩이를 파고 하나의 덧널(木槨)을 설치한 외덧널식이다. 덧널은 길이, 너비, 높이가 3.8×1.5×1.5m 크기로 추정되었고, 장축은 동-서로 두었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에 치우치게 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을 두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반지, 은반지,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 청동정(靑銅鼎), 쇠솥(鐵釜) 등의 금속용기류, 토기류, 쇠투겁창(鐵矛) 등의 철기류, 청동복륜(靑銅覆輪),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피장자는 남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우총(牛塚)은 노서동고분군 서쪽의 평지에 위치하고 7세기 전반에서 후반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와 고이즈미 아키오(小川顯夫)가 영국인 데이비드의 자금지원으로 발굴한 서봉총(노서동 129호) 남분(데이비드총)에 대한 조사성과가 부진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조사된 고분이다. 발굴 후 민가의 담장에 포함되어 있다가 지금은 주변 지역이 정비되면서 개석 1매만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발굴 당시 봉분의 높이는 약 2m 정도로 일부가 잔존하였다. 석실의 벽체가 붕괴되면서 상부에 적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석의 크기는 길이 220㎝, 너비 140㎝, 두께 40㎝의 원반 모양으로 표면에는 작은 원형의 성혈과 홈이 관찰되는 점으로 볼 때, 지석묘의 상석을 가져다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길이 395㎝, 너비 380㎝의 정방형에 가깝고, 현실의 정남쪽 중앙에 연도가 달려있다. 현실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 들어가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내부 안벽에 접한 양쪽 모서리 부분에 각각 1매의 판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관대 시설로 보인다.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이는 벽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무문전은 노서동137호분(쌍상총)에서 조사된 사례처럼 관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도의 길이는 2.6m이고 할석을 이용해 폐쇄하였다. 벽석에는 0.6㎝ 두께로 회를 발랐다. 연도와 현실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미석이 있다. 석실의 내부에서 소뼈가 출토되어 우총이란 별칭이 붙었다.

미발굴 135호분
미발굴 136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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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가장 먼저 지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의 사찰이다. 문무왕 674년(14년) 당나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서해로 오는 당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밀교 신인종의 시조인 명랑법사가 여러 개의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풀로 오방신의 상을 세워서 유가의 명승 12명과 더불어 문두루 비법을 사용하여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으로 당 수군을 서해에 수장시킨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이다.

5년 후 문무왕 679년(19년) 8월에 양지스님 감독아래 절을 다시 고쳐 세워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고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해적이 나타나 이를 물리치기 위해 명량계통의 두 스님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쳤다.
또한 도솔가로 유명한 월명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고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고 월명사(月明師)도 이 일로 생겨난 이름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절터에는 금당 터, 목탑 터, 강당 터, 단석 터 그리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 귀부의 비각(碑閣) 터, 2기의 석교(石橋)와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절의 구성은 금당을 중심으로 좌, 우에는 목탑이 배치되었고 이들을 둘러 싸는 동, 서익랑을 포함하여 동, 서, 남, 북으로 회랑을 형성하였으며 남쪽에는 중문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북쪽 밖에는 강당(講堂)과 단석(壇席)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동, 서에는 귀부 2기, 서쪽에는 당간지주 1기가 배치되어 있다.

서 귀부로 원래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에 불상과 함께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즉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찬왕사 목탑 터는 통일신라 최초의 쌍탑 터로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층수는 비슷한 시기 망덕사 목탑터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에 삼국유사 기록에는 13층이고 황룡사, 분황사의 탑이 9층 또한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의 북면 목탑을 모각한 마애탑이 7층, 9층임을 감안하면 사천왕사 목탑도 층수가 다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의 쌍탑은 감은사지 3층 석탑으로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동 목탑 터 기단부에서 4기의 녹유신장상이 출토되었는데 최근 추가 발굴조사에 따르면 녹색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벽돌로 부조상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신장상은 화살, 칼, 등을 손으로 잡고 악귀를 짓밟고 있는 상으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3종류의 신장상이 1면에 6기를 배치하여 기단부 4개 면에 총 24기가 조성되었는데 기존의 사천왕상이나 팔부중상과는 형상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이를 조각한 양지스님은 인도에서 온 스님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리고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고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쌍탑 출현은 삼국통일 후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권을 강력한 우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에 하나는 석가모니 불탑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세 시에 왕권 상징의 위엄과 현세의 복을 바라는 뜻으로 쌍탑을 조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 된 서 목탑 터의 기단 모습
양지(良志) 스님이 조각한 사천왕상을 복원한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벽전(甓塼)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서 목탑 터와 동 목탑 터

사천왕사 터 남쪽 중문의 동편에 자리 있는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반면 중문의 서편에 자리 있는 서 귀부는 원래는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래서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여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또한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로 동일한 3간공 관총형 당간지주인 분황사와 보문동사지 당간지주의 중간 형식 단계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武]) 법민(法敏)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동 목탑 터의 초석들.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동 목탑 터의 심초석
동탑 터와 서탑 터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仮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의 초석들
금당터의 본존불과 협시불의 지대석 좌우에 있는 유공초석(有孔礎石)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금당 터의 본존불의 사각 지대석과 좌우협시불 지대석
금당이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 5권 신주(神呪) 6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서단석(西壇席) 터. 단석(壇席)은 문두루도량의 법단으로 추정된다.
서단석(西壇席) 터의 초석으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동단석(東壇席) 터

삼국유사 제 4권 의해(意解) 5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삼국유사 제 5권 감통(感通) 7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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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기념비(Blood Compact Shrine, Tagbilaran east road in Tagbilaran City)

혈맹기념비(Blood Compact Shrine)는 스페인의 정복자 레가스피와 보홀섬의 추장인 시카투나가 맺은 우호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비로 당시의 상황을 조각으로 만든 조형물이다. 블러드 힐의 타그빌라란 프리엔드십 공원(Tagbilaran City Friendship Park)에 있다.

블러드 힐의 타그빌라란 프리엔드십 공원(Tagbilaran City Friendship Park)에 있는 혈맹기념비(Blood Compact Shrine)

타그빌라란 시(Tagbilaran City)는 스페인 정복 이전에는 중국과 말레이 반도와의 교역으로 번성한 마을이었다. 15653월 스페인의 정복자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필리핀으로 향하기 위해 멕시코를 지나 15653월에 보홀섬에 도착했다.

당시 보홀섬에 사는 추장 다투 시카투나(Datu Sikatuna)와 초대 필리핀 총독이 된 레가스피와 화평(우호조약)을 맺고 서로의 왼팔 손목을 베어 피를 내어 하나의 용기에 부어 와인과 섞어 마시면서 혈맹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매년 7월 내내 산두고 축제(Sandugo Festival)에서 재현되고 있다.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 Tagbilaran east road in Baclayon)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교회 건물 중 하나로 보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고 1995년 보홀 국보로 지정되었다. 1595년 스페인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성당으로 약 4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건물들은 여러 해에 걸쳐 세워졌으며, 그 과정은 원주민의 희생이 있었다.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

1596년 지어졌는데 회색의 거대한 건물로 산호 가루와 석회석으로 지어졌는데 건물을 견고하게 짓기 위해 달걀흰자를 섞었다고 한다.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1596년에 지어졌으나 지진과 화재로 무너졌고 약 200여명의 원주민들이 강제로 재건에 이용되는 아픈 역사를 품고 1727년 완공되었고 지금의 모습이다.

성당(Baclayon Church)은 1596년에 지어졌으나 지진과 화재로 무너졌고 1727년 완공되었고 지금의 모습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맞이하는 것은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가톨릭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내부는 여타 유럽의 성당처럼 천정의 그림은 다를 바가 없이 성경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소박하고 간결하다.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 조형물
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맞이하는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가톨릭 유물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소박하고 간결하다.

성당 앞에는 필리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플루메리아(Plumeria, 칼라추치)가 피어 있어 당시 원주민의 희생을 위로한 듯하다. 꽃의 원산지는 중남미이나 스페인 식민 지배 때 갤리온(Galleon, 스페인 범선) 무역을 통해 들어왔다.

성당 앞에는 필리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플루메리아(Plumeria, 칼라추치) 나무
플루메리아(Plumeria, 칼라추치) 꽃

나비 뱀 농장(Bohol Lemur and Butterfly Park, Tagbilaran east road in Loay)

농장에는 나비, 악어, 토끼, 뱀 등 사육되고 있는데 환경은 열악하다. 특히 악어가 있는 곳은 최악의 환경이다. 들어 가면 처음 만나는 것이 나비이고 나비의 성장 전 과정을 볼 수 있고 포토존도 있다.

뱀이 있는 곳에는 뱀과 스킨쉽을 권하고 사진도 찍어준다. 결국에는 상술인데 사진 파일을 보여주며 사진 구매를 권유한다.

로복 강(Loboc River, agbilaran east road in Loay)의 선상 투어와 뷔페

로복강(Loboc River)'필리핀의 아마존'이라 불리는 강으로 배를 타고 선상에서 뷔페 형식으로 점심을 하는 곳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정글 사이를 흐르는 강을 따라가면 풍경을 감상하는 여정이다.

배는 로복강(Loboc River) 투어 중 강가에서 생활하는 원시 부족 마을을 볼 수 있는데 옛날 모습을 재현했고 10분 정도 정박한다. 원하는 사람은 내려서 마을을 둘러 본다. 그런데 여기에 상술이 있어 사진을 찍어주면서 사진 구매를 권유한다.

옛날 모습을 재현한 원시 부족 마을

선상에서는 한 가수가 선상 여정이 끝까지 노래를 부르며 공연을 하는데 끝날 무렵에는 공연료를 요청한다.

선상에서 한국가요를 노래하는 가수

맨 메이드 포레스트(Bilar Man-Made Forest in Bilar, Loay interior road), 마호가니 숲

초콜릿 힐로 향하는 길에 빌라르 마을 도로 양쪽에 2km를 자리 잡은 '맨 메이드 포레스트'에는 고급 목재로 사용되는 키가 큰 마호가니 나무가 즐비하게 하늘을 덮고 있다. 대규모로 조성된 인공 숲으로 일명 마호가니 숲이라고 부르고 있다

맨 메이드 포레스트, 마호가니 숲
길가에 있는 망고나무

안경원숭이(Bohol Tarsier Conservation Area in Bilar, Loay interior road)

안경원숭이는 타르시어 원숭이로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영장류이고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13cm밖에 되지 않는다. 성인 남자 주먹 하나 크기에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데 마치 안경을 쓴 듯한 모습이라서 안경원숭이라고 불린다.

보홀과 인도네시아 일부에만 사는 멸종위기종으로 필리핀 정부가 지정한 보호구역에서만 만날 수 있다. 나무에 매달려 대부분 시간을 보내며 작은 도마뱀 등을 잡아먹고 산다.

타르시어 원숭이는 영화 스타워즈의 '요다'와 그렘린 속 '기즈모' 캐릭터 탄생에 영감을 준 존재다.

키세스 초콜릿 모양을 닮은 초콜릿 힐(Chocolate Hills Complex in Carmen, Loay interior road)

보홀섬 중앙에 위치한 초콜릿 힐은 200만 년 전 바다속에 퇴적된 산호섬들이 융기해 만들어진 지형으로, 평소에는 초록빛을 띠지만 건기(12~5)에는 잎이 마르면서 진한 갈색으로 변해 키세스 초콜릿을 닮은 모양이라서 초콜릿 힐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뿔형 언덕 수가 무려 1,270여 개에 달하는데 일정한 모양의 언덕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초콜릿 힐의 웅장한 모습을 보려면 전망대(550m)로 향하는데 전망대까지 놓인 계단은 214개다. 원래는 212개였는데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214일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2개의 계단을 더 놓았다고 한다.

초콜릿 힐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

전망대에 오르면 원뿔 모양 언덕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지는데 특히 세부가 있는 북쪽이 더 많이 보인다. 전망대 아래 주변에는 사륜 오토바이 체험장이 있어 대여해서 초콜릿 힐 속을 누빌 수 있다.

전망대 아래 주변에는 사륜 오토바이 체험장이 있어 대여해서 초콜릿 힐 속을 누빌 수 있다.

이 동화 같은 풍경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먼 옛날 아로고라는 거인이 살았다. ‘알로야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짝사랑 했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사랑에 눈이 먼 아로고는 자신의 손에 알로야를 쥐고 도망치지만, 너무 꽉 쥔 나머지 알로야가 죽고 만다. 슬픔에 빠진 아로고는 며칠 밤을 울었고 그의 눈물이 땅에 닿으면서 초콜릿 힐이 되었다고 한다.

아바탄 강의 반딧불 감상(Abatan River Community Life tour, Tagbilaran North road in Cortes)

아바탄 강(Abatan River) 보홀섬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하는 강이다. 해질 무렵에 보트 또는 카약을 타고 아바탄 강과 바다와 만나는 기수지역 상류의 강변에 있는 커다란 맹그로브 나무에 있는 반딧불을 감상하는 것이다.

캄캄한 밤하늘 아래 배를 타고 고요한 강을 따라 반딧불을 찾는 여정은 마치 동화와 같고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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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 고래상어 스노쿨링(Taug Whaleshark in Lila, Bohol Circumferential Road)

팡라오(Panglao Island)Alona Swiss Resort에서 차로 40분 정도 가면 보홀(Bohol Island) 릴라에 도착하는데 이곳 해상에서 고래상어를 볼 수 있다스노쿨링에 대한 간단한 교육과 안전교육, 고래상어를 만지지 말라 등 주의사항을 듣고 고래상어를 볼 수 있는 바다로 필리핀 전통 배 방카로 이동한다.

필리핀 전통 배 방카

배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크릴새우 뭉치를 뿌리면 고래상어가 다가와서 커다란 입을 벌려 크릴새우 뭉치를 흡입하고 이때 배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스노쿨링을 통해 고래상어를 근접 관찰을 하는데 매우 감동적이다. 이것은 고래상어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커다란 입을 벌려 크릴새우 뭉치를 흡입하는 고래상어

고래상어(Whaleshark)는 멸종위기종으로 몸길이는 보통 12m 내외이며, 최대 18m까지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몸무게는 15~20t에 달한다. 몸 빛깔은 등쪽은 푸른색이고 배쪽은 흰색이다. 배 위쪽으로는 흰 점과 옅은 수직 줄무늬가 있다.

체험업체 LOKALPAGE의 베이스캠퍼인 터틀즈
터틀즈에서 고래상어(Whaleshark) 스노쿨링 마치고 먹는 점심식사

발리카삭 호핑투어(Balicasag Island hopping tour)

발리카삭(Balicasag Island)은 팡라오 섬 남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이곳 일대는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섬 주변 바다는 수심이 낮지만 조금만 나아가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깊어지는 절벽 지형이다. 물이 맑아서 가시거리가 좋은 데다 파도가 잔잔해 수많은 호핑투어(hopping tour)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점심식사 후 발리카삭 (Balicasag Island)으로 가는 방카를 타기 위해 이동
발리카삭 (Balicasag Island)

팡라오 섬에서 필리핀 전통 배 방카로 약 40~ 50분 정도 지나면 관찰 포인트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력 본격적으로 스노쿨링을 통해 관찰하는데 열대어의 무리, 거북이 및 산호초를 관찰한다. 열대어와 거북이의 유영을 바다속에서 보니 감동적이고 시간 흐름을 잊게 한다.

열대어와 유영
거북이와 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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