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률사(栢栗寺)는 경주시 북동쪽 소금강산(小金剛山) 자락에 있는 절로 한자를 보면 잣나무 백(栢), 밤나무 율(栗) 字이다. 백률사 이름은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백률사(栢栗寺) 편에 등장하는데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세한 내용을 보면 「계림(鷄林)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그 절에 부처의 상(像)이 하나 있는데 어느 때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영험이 자못 뚜렷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은 중국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의 관음소상(觀音塑像)을 만들 때 함께 만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률사를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제3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猒髑滅身) 편에 법흥왕 14년(527)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순교(殉敎)한 이차돈(異次頓, 또는 박염촉[朴猒髑], 이차[異次], 이처[伊處])을 기리고자 지은 자추사(刺楸寺)로 추정하고 있다.
이유는 가시(刺)가 있는 호두(楸)가 「밤(栗)」이라는 뜻이므로 백률사와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자(刺)는 잣(栢)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며, 추(楸)는 밤의 일종으로 율(栗)과 통하므로 뜻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따라서 자추(刺楸)는 곧 백률(栢栗)이며 다만 같은 말을 표기할 때 빌린 한자가 달랐을 뿐이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문자가 없었던 신라시대 때 신라인이 사용한 향찰(鄕札)로써 한자의 음(소리)과 훈(뜻)을 빌려서 우리 국어의 문장 순서대로 적은 것이다. 주로 도솔가, 제망매가 등 신라의 노래인 향가(鄕歌)를 표현할 때 이용하였다.
삼국유사 제3권 흥법(興法) 제3 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猒髑滅身) 기록에 이차돈이 순교할 때 내용을 살펴보면 법흥왕 14년(527)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으며 하늘은 사방이 어두워 저녁의 빛을 감추고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목은 북산(北山) 서쪽 고개(곧 금강산金剛山이다. 전傳에는, 머리가 날아가서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 장사지냈다고 했다.)에 장사지냈다. 나인(內人)들은 이를 슬퍼하여 좋은 땅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자추사(刺楸寺)라고 했다.
삼국사기 법흥왕 즉위 15년 기록을 보면 김대문의 「계림잡전」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을 벤 곳에서 피가 솟아 나왔는데, 그 색깔이 젖빛처럼 희었다. 사람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사를 비방하거나 헐뜯지 못하였다고 적혀있다.
현재 백률사는 아담한 사찰이다. 백률사의 대웅전(大雄殿)은 약 3m 높이의 축대 위에 있으며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공포는 다포(多包)양식이고 좌, 우 협칸에 쌍여닫이문이 있다.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선조 때 다시 지었다고 전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곳 대웅전에 모셨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 국보 28호)은 높이 1.77m의 금동불(金銅佛)로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한 것이다.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주지만 신체의 적절한 비례와 조형기법이 우수하며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고 이 세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3대 금동불(金銅佛)로 부른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대웅전에 있었으나 1930년에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대웅전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바위 면에 마애삼층탑이 새겨져 있고 당시 신라시대 때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앞에 간이 시설물을 만들어서 마애삼층탑을 보는데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동경잡기에 따르면 백률사에는 전단(栴檀)나무로 조각 된 불상이 있었고 백률사 누(樓)가 계림에서 최고였다고 한다. 또한 선유 정지상도 시가를 읊어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東川洞 魔崖三尊佛坐像)
동천동 마애삼존불좌상(東川洞 魔崖三尊佛坐像, 유형 문화재 제194호)은 소금강산(小金剛山) 정상 근처의 바위에 새긴 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가운데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상이 앉아 있고 그 양쪽에 협시보살이 있으나 얕게 된 선각으로 마멸과 손상된 부분이 많아서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렵다. 백률사에서 정상방향의 등산길로 걸어가면 10분이면 도착한다.
아미타여래상은 넓적한 얼굴에 머리카락이 없고 육계의 윤곽도 분명하지 않다. 머리둘레에 두 겹의 선으로 두광(頭光)을 표시하였다. 오른쪽은 대세지보살상으로 본존불을 향해 꿇어앉아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는데, 보관(寶冠)에는 보병(寶甁)이 새겨져 있다. 왼쪽은 관음보살상으로 보관의 일부만 제대로 남았는데,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고, 두 겹으로 새긴 둥근 모양의 두광이 확인된다.
이 아미타삼존불좌상은 조각된 옷의 표현과 손의 모습 등 보아 만든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소금강산(小金剛山, 177m)은 경주시 북동쪽에 있는 용강동, 동천동과 천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금산(金山), 금강산(金剛山) 등으로 불리었다. 『삼국유사』에 신라 6촌 중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里村)에서의 금산이 “지금의 금강산으로 백률사 북쪽에 있는 산이다.”라는 기록과 “6촌 중 하나인 명활산 고야촌장인 호진(虎珍)이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금강산은 신라 수도의 중심지에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삼국사기』 이외에도 많은 기록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도 소금강산이 아니라 금강산으로 기록되어있다. 세주(細註)에는 “경주 중심지의 북쪽 7리에 있는데,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시대 초기 서라벌 수도의 중심지에서 북쪽에 있는 돌산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지도에도 금강산이 나오는데, 소금강산이라 기록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 이후 강원도에 있는 금강산이 알려지면서 소금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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