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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 서쪽 기슭(배반동 산18-3번지)의 바위 면에 삼존불(三尊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곳은 서록사지(西麓寺址) 일원으로 통일신라시대 절터 이다현재 이곳에는 중생사(衆生寺)라는 작은 절이 있으며 경내에는 마애삼존상(보물 제665)을 비롯하여, 석탑재, 불상대좌, 건물 기단석, 초석 등이 있다. 그리고 과거 주변에서는 석조관음보살입상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이 출토되었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현재 중생사(衆生寺)1972년 보문스님이 기존의 선덕사를 인수하여 중창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전의 선덕사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을 낭산(狼山) 서록사지(西麓寺址)’로 부르고 있었다.

1965년 낭산 마애삼존상 (狼山 磨崖三尊像)을 조사 할 때 이곳에 운영 중인 절은 없었던 것으로 1965년 이전까지는 폐사지로 남아 있었다. 중생사(衆生寺)라는 절은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의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에 등장하는데 현재 중생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낭산 마애삼존상(狼山 磨崖三尊像) 현재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1933년 간행된 『동경통지(東京通誌)에는 이 마애불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산 서쪽 아랫마을 집에 큰 돌이 있는데, 세구의 상을 새겼으나 옆 부분은 묻혀있다. 가운데는 가사를 입고 있고 오른쪽은 갑옷을 입고 칼을 잡았고 왼쪽사람은 흙에 묻혀서 분명하지 않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은 집안에 있던 큰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흙속에 매몰되었다가 후대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에 조각된 삼존상(三尊像)을 살펴보면, 중앙의 본존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다.

지장보살상(피모지장보살상 : 被帽地藏菩薩像)

본존상의 현재 높이는 약 100이다. 둥글고 살이 찐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듯하다. 특히 본존상머리에 착용한 두건과 양어깨를 감싸고 입은 가사 등은 고려불화에서보이는 지장보살상(被帽地藏菩薩像 : 피모지장보살상)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여, 지장보살로 보고 있다.

, 우 협시상은 갑옷을 입고, 악귀를 몰아내는 신장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높이는 두상 모두 약90이로 좌우협시가 신장상인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왼편에 앉아 있는 좌 협시 신장상[向右]은 오른쪽다리는 안쪽으로 접고 왼쪽다리를 비스듬히 세워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시선은 본존상을 향해 있으며, 머리에는 투구를 착용하였고, 몸에는 갑옷을 입고 있다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입을 꽉 다물고 있어 험상궂어 보이며, 높이 치켜든 오른손의 지물과 왼손의 형태 등은 마멸이 심하여 불분명하다. 광배와 대좌의 표현 역시 현재 확인할 수 없다.

왼편에 앉아 있는 좌 협시 신장상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우 협시 신장상[向左]은 좌협시상과 거의 대칭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두 다리를 편안하게 뻗은 유희좌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좌협시상과 유사한 모습을 하지만, 보다 경직되어 있고 몸의 방향도 다르다. 즉 좌협시상은 본존상을 향하여 몸을 틀고 있는 자세인데 비하여 우협시상은 바깥쪽으로 몸을돌려 반대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상 역시 머리에 투구를 착용한 듯 보이며, 몸에는 갑옷을 입고,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우 협시 신장상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 본존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불상, 피모지장보살상(被帽地藏菩薩像), 여신상(혹은 전통 신앙과 관련된 상)3가지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상은 지장보살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마모가 심하여 세부적인표현은 알 수 가 없다. 좌 우 협시상의 모습이 무장을 한 신장상이기 때문에, 매우 독특한 배치구조이다. 조성 시기는 8세기로 보고 있다.

특히 3가지 설 중 여신상은 신라 산신의 모습으로 ‘삼국유사’ 김유신 조에 나타나있다. 김유신(595~673)이 젊은 시절 고구려 간첩 배석에게 잡혀 위험에 빠지려는 찰나 삼산의 신이 모두 나타나 김유신을 구했으며, 그들의 모습은 젊은 여성이었다고 되어있다. 즉 신라의 산신은 왕이나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뿐 아니라 장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김유신을 구해주는 호국신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본존상의 머리를 살펴보면 앞머리와 양 어깨에 걸쳐진 수발(垂髮)에까지 두발 전체에 가는 선으로 머리카락을 표현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두건을 쓴 것이 아니라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상이다. 그러나 이중원광의 광배와 통견식으로 입고 있는 가사, 가부좌의 좌법 등에서 명확하게 불교에 귀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중생사 앞뜰에는 석재들이 한곳에 모여져 있는데, 석탑옥개석, 불상대좌 등 있. 3단 팔각연화대좌는 상대석이 별석이고, 중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대좌의 전체높이는 약73이다. 특히 8각의 중대석 각 면에는 특정 존상이 조각되어있는데, 표면의 마모가 심해 세부내용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중생사 앞뜰에는 석재들이 한곳에 모여져 있는데, 석탑옥개석, 불상대좌 등 있다.
3단 팔각연화대좌는 상대석이 별석이고, 중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다른 연화대좌는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앙련과 복련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복련은 8엽의 연꽃이 매우 볼륨감 있게 새겨져있으나, 앙련은 복련에 비하여 매우 약하게 표현되어있다. 앙련상면정중앙에는 직사각형의 홈이 확인되는데, 추측건대 불상을 결합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크기가 다른 옥개석4기 등이 남아있다.

서록사지(西麓寺址) 주변에서 출토 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은 높이는 약 200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며, 상체는 짧고 배가 다소 나와 있어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 든다. 머리에는 2줄의 띠를 돌리고, 그 위에 화불을 중심으로 10개의 작은 얼굴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10개의 작은 얼굴과 본래 얼굴을 합쳐서 11면이 된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방형을 띠고 있으며, 2줄의 띠 아래로 내려오는 보발은 볼륨감 있게 표현되었다. 코는 부분적으로 결실되었지만 비교적 작고 낮게 나타내었고, 눈은 둥글고 도톰하게 처리하였다. 입은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이다.

서록사지(西麓寺址) 주변에서 출토 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살상의 양어깨에는 천의를 덮고 있으며, 그 위에 3가닥의 보발이 흘러내린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서 정병을 쥐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어떤지 물을 들고 있는데 마모가 심해 잘 확인되지 않는다.

보살상에 착장된 장신구는 크게 목걸이와 영락장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화려한편이다. 목걸이 장식은 2중으로 된 U자형 줄에 여러 개의 짧은 드림장식이 달려있고, 다시 중앙에는 삼지창모양의 수식을 좌우측에는 나뭇잎형태의 수식을 하나씩 더 달았다. 영락장식은 기본적으로 X자형과 U자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양어깨부근에서 내려온 영락이 배 부근에서 꽃문양 장식판을 통과하여 X자로 교차되게 내려오며, 무릎아래에서 새로운U자형영락이 두 개의 꽃문양 장식판을 통해 기존의 X형 영락과 결합된다.

낭산(狼山, 해발 100m)은 경주의 진산(鎭山)으로 신라 사람들은 ‘신들이 노니는 숲’이란 뜻의 신유림(神遊林)이라 부르며 신성시했고 왕실에서 신에게 제사 지냈던 곳이다. ()은 이리 낭()’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413)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잡지·제사지에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나력산은 신라 6부의 하나인 습비부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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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사지(錫杖寺址)는 경주 송화산(松花山, 일명 수도산) 삿갓봉 아래 해발 95∼100m 사이(석장동 산81-2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신라 선덕왕 때 조각승 양지(良志) 스님이 주석(駐錫) 하였던 절이다. 경주 도심에서 형산강 서쪽 편에 자리 잡은 송화산(松花山)은 삿갓봉(234.7m)과 옥녀봉(275.6m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흔히들 수도산이라 부르고 있다.

절터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북향은 산죽(山竹)이 빙 둘러싸고 있고 서편에는 폭 5m 정도의 계곡이 있다. 근처 주민들은 이곳을 ‘절골’이라 부른다.

석장사지(錫杖寺址)에서 출토 된 유물 중 석장(錫杖)이라는 묵서가 쓰인 백자대접이 출토되어 석장사지(錫杖寺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신라 인화문토기부터 조선전기 분청사기와 조선후기 백자 등이 출토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양지(良志) 스님은 기예(技藝)에 통달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기간 : 7804~ 785년 정월)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냈고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란 무엇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공장(工匠)을 의미하며, 석장(錫杖)은 머리에 여섯 개의 방울이 달려 흔들면 소리가 나는 지팡이로 스님이 탁발할 때 인기척을 내거나, 길을 다니면서 짐승을 쫓을 때 사용했을 것이다.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안치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절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암자와 같은 작은 절로 추정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양지스님이 주석하였던 7세기 후 반경에는 석장사내에 전탑으로 만들어진 삼천불탑이 존재 했을 정도면 고려, 조선시대보다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석장사지는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증축되는 과정에서 유구가 훼손되고, 이전시기의 건축부재와 석물들이 재사용되어 창건 때의 절의 전체적인 윤곽은 알 수가 없다.

석장사지에 대한 최초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경주고적보존회의 오사카 긴타로가 하였다. 당시 도굴이 성행하였고 대부분의 유구가 교란 된 상태였다. 절터는 소나무 숲에 묘지가 있었고 초석과 와편 등이 확인되었고. 절터 주변의 일부 가옥에서 사용되고 있는 원형주좌초석이 석장사지에서 옮겨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석장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86년과1992년에 2차에 걸쳐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며, 다수의 기와 편과 탑상문전(塔像紋塼), 소조상편, 소형금동불 등 다양한 불교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200여점의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두 분의 부처님과 그 사이에 탑을 표현하였는데 삼천불탑 조영 시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크기와 문양에 따라 6∼7개의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종류별 크기가 다른 이유는 전탑조성 시 각 위치에 따라 전돌의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났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탑상문전은 경주 삼랑사지와 울산 능소사지, 울주 불영사, 청도 운문사 등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들 사지에도 석장사지와 유사한 전탑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탑상(塔像) 전면(塼面)에 연기법송(緣起法頌) 20자가 새겨져 있는데 크기는 높이 8cm, 폭 6.5cm, 두께 2cm로 글자크기는 약 0.5cm이다. 연대는 7~8세기 경으로 양지스님의 글씨로 추정된다.
내용은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남을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셨노라. 저 법은 인연을 다한다는 것 이것이 대사문의 설법일세(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盡」 是大沙門說」』

석장사지(錫杖寺址) 초입에서 만나는 나무다리 2곳

소조상은 20여점이 출토되었는데,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 등의 신장상편과 보살상편으로 추정되면 소조상편들은 모두 뒷면이 편평한 부조상이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석장사 삼천불탑의 벽면에 부착했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명문전이10여점 출토되었는데, ‘西北’, ‘三’, ‘下層南’ 등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탑축조 시 벽돌의 위치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해(意解) 양지사석(良志使錫) 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해 말한다.
()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왼쪽이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다.

석장사지(錫杖寺址)를 찾아가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으나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과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 가장 쉽게 찾아 갈수 있는 길이다.

휴앤락 오토캠핑장 입구
휴앤락 오토캠핑장 내에서 석장사지로 가는 길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과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 합류헤서 올라가는 길
능선에서 만나는 길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멀리서 보이는 석장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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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가장 먼저 지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의 사찰이다. 문무왕 674년(14년) 당나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서해로 오는 당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밀교 신인종의 시조인 명랑법사가 여러 개의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풀로 오방신의 상을 세워서 유가의 명승 12명과 더불어 문두루 비법을 사용하여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으로 당 수군을 서해에 수장시킨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이다.

5년 후 문무왕 679년(19년) 8월에 양지스님 감독아래 절을 다시 고쳐 세워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고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해적이 나타나 이를 물리치기 위해 명량계통의 두 스님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쳤다.
또한 도솔가로 유명한 월명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고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고 월명사(月明師)도 이 일로 생겨난 이름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절터에는 금당 터, 목탑 터, 강당 터, 단석 터 그리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 귀부의 비각(碑閣) 터, 2기의 석교(石橋)와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절의 구성은 금당을 중심으로 좌, 우에는 목탑이 배치되었고 이들을 둘러 싸는 동, 서익랑을 포함하여 동, 서, 남, 북으로 회랑을 형성하였으며 남쪽에는 중문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북쪽 밖에는 강당(講堂)과 단석(壇席)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동, 서에는 귀부 2기, 서쪽에는 당간지주 1기가 배치되어 있다.

서 귀부로 원래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에 불상과 함께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즉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찬왕사 목탑 터는 통일신라 최초의 쌍탑 터로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층수는 비슷한 시기 망덕사 목탑터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에 삼국유사 기록에는 13층이고 황룡사, 분황사의 탑이 9층 또한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의 북면 목탑을 모각한 마애탑이 7층, 9층임을 감안하면 사천왕사 목탑도 층수가 다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의 쌍탑은 감은사지 3층 석탑으로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동 목탑 터 기단부에서 4기의 녹유신장상이 출토되었는데 최근 추가 발굴조사에 따르면 녹색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벽돌로 부조상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신장상은 화살, 칼, 등을 손으로 잡고 악귀를 짓밟고 있는 상으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3종류의 신장상이 1면에 6기를 배치하여 기단부 4개 면에 총 24기가 조성되었는데 기존의 사천왕상이나 팔부중상과는 형상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이를 조각한 양지스님은 인도에서 온 스님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리고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고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쌍탑 출현은 삼국통일 후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권을 강력한 우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에 하나는 석가모니 불탑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세 시에 왕권 상징의 위엄과 현세의 복을 바라는 뜻으로 쌍탑을 조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 된 서 목탑 터의 기단 모습
양지(良志) 스님이 조각한 사천왕상을 복원한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벽전(甓塼)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서 목탑 터와 동 목탑 터

사천왕사 터 남쪽 중문의 동편에 자리 있는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반면 중문의 서편에 자리 있는 서 귀부는 원래는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래서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여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또한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로 동일한 3간공 관총형 당간지주인 분황사와 보문동사지 당간지주의 중간 형식 단계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武]) 법민(法敏)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동 목탑 터의 초석들.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동 목탑 터의 심초석
동탑 터와 서탑 터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仮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의 초석들
금당터의 본존불과 협시불의 지대석 좌우에 있는 유공초석(有孔礎石)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금당 터의 본존불의 사각 지대석과 좌우협시불 지대석
금당이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 5권 신주(神呪) 6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서단석(西壇席) 터. 단석(壇席)은 문두루도량의 법단으로 추정된다.
서단석(西壇席) 터의 초석으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동단석(東壇席) 터

삼국유사 제 4권 의해(意解) 5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삼국유사 제 5권 감통(感通) 7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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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는 진평왕릉에서 동남쪽으로 약 400m 떨어진 논 중앙(경주시 보문동 848-6번지 외)에 위치하고 있고 그곳에는 연화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910) 1기와 석탑재 몇 구가 흩어져 있다. 주변에는 진평왕릉을 비롯하여 보문동 사지, 황복사지, 보문동고분군 등 다수의 유적들이 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 에 대한 문헌기록은 현재 전무하며, 사찰의 명칭이나 연혁에 대해서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보문동 사지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보문동 북사지로 부르게 되었다. 이 사지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는 아직까지 실시된 적이 없으며, 단지 유적 내에 위치한 연화문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몇몇 조사·연구가 실시된바 있다.

경주시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 해발 252m)의 서쪽 능선에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보문동 고분군(普門洞古墳群)이 있다. 이 고분군은 5~7세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과 완총, 금환총이 확인되었는데 여기 보문동 사지는 이들 지배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에 있는 연화문 당간지주 (幢竿支柱 ,  보물 제 910 호 )

연화문 당간지주 주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사찰 전체의 영역이나 가람배치에 대하여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연화문 당간지주로부터 북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석탑 부재 4매가 흩어져 있어, 보문동 사지(목탑지)와는 다른 별개의 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사역 내 남아 있는 연화문당간지주와 석탑재 등을 참고했을 때, 적어도 통일신라 9세기경에는 사찰이 유지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인 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그의 저서에서 보문리사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北方 幢竿支柱라는 제목으로 이 당간지주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하였다. 당시 후지시마는 보문리사지두 개의 당간지주 즉 보문동 사지 당간지주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3년 이호관 선생은경주지구유적조사 약보에서 보문리 당간지주와 폐탑재라는 제목으로 당간지주를 포함한 주변에 산재 된 석물 등의 현황을 보고한 적이 있는데 이 보고서에는 연화문 당간지주와 함께 한 변이 127, 높이 40의 폐탑재(기단석부재)가 잔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 연화문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경주 진평왕릉 남쪽 논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는 약 144인데 지주 하부에 치석된 부분을 보았을 때, 일정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양 지주는 동서방향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간격은 약 60이다. 양 지주의 상부내면에는 폭 13의 간구가 확인되는데, 당간을 고정하는 장치가 있었던 부분으로 생각된다.

또한 지주 외 측면에는 최상부로부터 아래로 약 52까지 한단을 낮게 하여 사각형의 틀을 마련한 뒤, 그 안에 직경 47의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연화문은 8엽의 복판연화문으로 중앙에는 자방이 있고, 그 안에 17개의 연자를 도드라지게 새기었다.

통일신라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장식을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당간지주는 화려한 연화문 장식이 있어 매우 특이한 예로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당간지주(幢竿支柱) 중 연화문이 있는 유일한 예로 볼 수 있다.

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렸는데, 깃발을 당(幢),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연화문당간지주에서 북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논둑에 석탑부재 4매가 흩어져 있다. 부재 4매 중 3매는자형 귀틀석으로 가로 100, 세로 131, 높이 45이며 3매 모두 같은 크기이다. 원래는 4개의 부재가 결구된 석탑 하층기단석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지표상에는 3개의 부재만 확인될 뿐이다. 1개의 부재가 보완된다면, 전체가 가로·세로 약 230의 정방형 하층기단석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각 부재 가장 자리에는 폭 2427, 높이 약 22의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윗면은 경사가 없이 편평하다.

나머지 부재 1매는 가로 73, 세로 69, 높이 91의 평면 삼각형의 석재이다. 두 면은 치석되었으나, 다른 한 면은 치석되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치석된 두 면 중 한쪽 면에는 폭 15의 기둥이 모각되어 있지만, 다른 한 면은 조각 흔적 없이 편평한 것으로 보아 다른 석재와 결합된 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석탑부재 역시 원래는 4개의 부재가 결구된 상층기단면석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며, 모각된 기둥은 상층기단의 우주로 이해 할 수 있다.

현재 사지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사찰과 관련된 유구 훼손이 심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잔존하는 석탑재의 경우 보호시설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훼손이나 망실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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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동 사지(普門洞 寺址)는 경주시에서 보문관광단지로 가는 국도 남편 보문동(보문동 848-6번지 외 851, 856-2, 857, 757, 758-1, 760 등)의 넓은 평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절터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낭산이 있고, 북쪽에는 진평왕릉, 남쪽으로는 효공왕릉 등이 있다. 절터 內에는 금당지, 목탑지 등의 유구가 있는데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만 당간지주(幢竿支柱), 석등 지대석, 석조, 초석 등 다수의 석물들을 볼 수가  있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와 금당지

절터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처음 이루어졌다. 1916년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고적조사에서 ‘普門寺’, ‘普門’이라고 새긴 기와가 절터 부근에서 출토되어  보문사로 비정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일인 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에 의해 전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68년과 1991년에 문화재관리국과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각각 실시하였다.
가람배치는 7×5칸의 금당을 중심으로 그 전방 좌, 우에 목탑을 23m 간격으로 배치하고 금당 북편에는 강당, 남편에는 중문과 남문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강당지와 중문지, 남문지의 위치 확인은 불가능하나,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조사 할 당시에는 강당지, 문지, 그리고 회랑지의 일부 초석이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금당지
금당지 초석과 지대석

절터의 규모와 현재 남아 있는 유구 등 비교하였을 때, 7세기 후반에 창건 된 사천왕사, 망덕사지 가람배치와 유사성이 많다. 금당지 남편 동서쪽에 목탑이 배치된 점이나 금당지 북편 동서쪽에 건물지가 배치된 점, 그리고 금당지 기단이 가구식 기단으로 축조되었다는 점 등 현재 남아있는 유구 등을 비교해보면, 세 절터에서 공통된 특징들이 다수 확인된다.
창건연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사천왕사(679년)와 망덕사(685년경)의 창건연대를 참고했을 때, 보문사 역시 7세기 후반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문사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신라 경문왕 11년(871)에 황룡사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매납하였던 황룡사「刹柱本紀」에 보문사 상좌승 은전(㢋㭇)이 도감전으로 대탑불사에 참석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금당지와 동탑지
서탑지와 금당지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금동사리기 명경통(‘仲和三年’ 883년)에도 보문사 현여대덕이 대석탑 중수 시 무구정광경에 의거하여 소탑 77기를 만들어 대탑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시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 해발 252m)의 서쪽 능선에서 남북 방향으로 보문동 고분군(普門洞古墳群)이 있는데 5~7세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과 완총, 금환총이 확인되었는데 여기 보문동 절터는 창건 당시 이들 지배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보물 제64호)는 금당 북쪽에 1기가 남아 있는데 1매의 대형 화강암 석재를 길이 244㎝, 너비 90㎝, 깊이 62㎝의 장방형으로 파내었는데, 외부 장식이나 문양이 없는 간소한 형식의 방형석조이다. 수조의 측벽 바닥에는 지름 7㎝ 내외의 배수용 구멍이 한 개 뚫려있다. 석조는 보통 급수 용기라고 알려져 있으나 부처에게 공양할 연꽃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보문동 절터의 석조

보문동 절터의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23호)는 금당지 남북중심축선과 탑지 동서연장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약 140m 떨어진 곳에 있다. 현재 남북으로 2개의 지주가 있는데, 남쪽 지주는 완전하나 북쪽 지주는 상부가 결실되었다.

보문동 절터의 당간지주( 幢竿支柱, 보물 제123호)는 남쪽 지주는 완전하나 북쪽 지주는 상부가 결실되었다.

남쪽 지주의 간공은 방형으로 현 지표면에서 10㎝, 155㎝, 300㎝의 높이에 1개씩 총 3개가 있으며, 3개 모두 구멍 크기는 15×18㎝정도이다. 반면 북쪽 지주는 상·중 2개의 간공만이 확인된다. 또한 남쪽 지주의 간공은 지주를 관통하는 것에 반해 북쪽 지주의 간공은 지주 너비의 1/2만 뚫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정대를 남에서 북으로 꽂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 사이 지표면에는 치석된 석재가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하부 지대석인지 북쪽 지주의 결실부인지 현재로서는 명확하지 않다.

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렸는데, 깃발을 당(幢),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이외에도 수십 개의 초석 및 기단 지대석 등이 흩어져 있고 초석은 원형주좌초석과 방형초석이 대부분이며 고막이가 있는 초석도 일부 있다.

금당지 주변에 있는 석등 옥개석
서탑지에 있는 연화문 석재
이영석재(異形石材)

보문동 절터는 경주지역 폐사지 중에서 가장 많은 석재가 지표상에 노출되어있는 유적 중 하나이다. 하지만 당간지주(幢竿支柱)와 석조를 제외하고는 기타 유구 및 유물들은 보호시설 없이 논 가운데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경작 등으로 인하여 유구의 훼손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 후지시마의 보고내용과 이후 두 차례  조사에서 확인된 유적 현상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동안 유구가 훼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부 확인된 금당지 북쪽 동편 건물지(토단)의 경우 현재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며, 금당지 남편에서 있었다는 중문지의 흔적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절터 내에 흩어져있는 초석과 석물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원위치에서 더 이탈하고 있어, 원형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들어 질 가능성이 높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탑지에서 본 금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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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명리 삼층석탑 (龍明里 三層石塔, 보물 제908호)은 경주 서북쪽인 건천읍 용명리(龍明里) 탑골(塔谷, 856-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으로 8세기 중엽에 세워졌다. 탑골(塔谷) 마을은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불타버리고 그곳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신라 때의 3층 석탑이 마을 옆에 있었으므로 '탑골' 혹은 '탑리(塔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탑골 마을 서쪽은 밀구(密耳)라는 마을이 있는데 구미산으로 용이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는 용암(龍岩)이라는 바위가 있어 용암의 용()자와 명장(明莊) 마을의 명()자를 따서 '용명(龍明)'이라고 불렀다 한다. 혹은 귀가 없는 미륵불이 있었다고 하여 '밀이촌(密耳村)' 또는 '밀귀'라고 부르던 것이 그 후 '밀구'로 바뀌어 불러졌다 한다.

북쪽에는 명장(明莊) 마을이 있는데 파평 윤씨(坡平 尹氏) 성을 가진 한 선비가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깊은 산골이라 산나물이 많아 부근에 명성이 났다고 하여 '명장(明莊)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터 주변의 동쪽과 북쪽 산기슭은 오래전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남쪽과 서쪽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원래의 지형은 알 수 없고 절의 범위나 방향, 배치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또한 석물 등 절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 도괴의 위험이 있던 석탑을 개축할 때 탑신에서 청동불상 1구가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또한 2005413일 그동안 일실되었던 3층 옥개석 위의 노반석이 건천초등학교 교정에서 확인되어 문화재청과 경주시에서 복원하였다.

용명리 삼층석탑(龍明里 三層石塔)은 높이 5.6m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2중 기단의 3층 석탑으로 기단부에 28, 탑신부 6매로, 상륜부에 1매로 모두 35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하 기단 면석에는 탱주가 2주씩이며,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있다.

기단부의 1(하층) 기단은 면석의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하여 3()로 구분되어 있다. 지대석과 면석이 1매석으로 크기가 같은'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 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하다. 가운데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모두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었다.

기단갑석 역시 8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였다. 기단갑석 위는 2단의 호형과 각형 받침(괴임)으로 상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2(상층) 기단은 1층 기단처럼 면석의 양쪽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자형 부재를 네모서리에 1매씩 배치하고 각 면에자형 부재를 1매씩 배치하여 모두 8매로 결구되어 있다.

'자형 부재는 모서리에 우주를 두고 양쪽에 면석을 다듬어 4부재가 동일한 크기와 모양이다. 가운데자형 부재는 역시 4매가 크기와 모양이 동일한데, 면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탱주를 다듬어서 모두 8매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갑석은 2단의 갑석에 4매가 사용되었다. 갑석 위는 2단의 각형 받침(괴임)으로 1층 탑신(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의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지붕)는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塔身)의 각 면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문비 등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받침은 각 층이 5단으로 되어 있다고 각 옥개의 낙수면 위에는 각형 2단 탑신 받침이 있다. 낙수면은 경사를 이루다가 단부에서 살짝 반전하고, 귀마루의 합각선은 뚜렷하다. 전각 양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탑신(塔身) 2층 이상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낸다.

상륜부는 노반을 포함하여 모두 결실된 상태였으나, 지역 시의원의 제보와 경주시 담당자의 노력과 의지로 건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노반석을 2005413일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서 65년 만에 제자리를 찾았다노반은 방형 육면체로 상단부에 2단으로 돌출된 돌림띠가 있고, 가운데 원형 찰주공이 뚫려있다.

경주시는 한때 이곳 탑골마을을 동경이마을로 정해 경주개 새끼 동경이 7마리를 분양받아 사육하게 하여 동경이를 활용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지역의 특화사업으로 발전시켜 하였다. 지금은 퇴락하여 쓸쓸하기가 그지없다. 경주시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문화콘텐츠 지속성을 유지했으면 바랄뿐이다.

탑골 동경이마을의 벽화

경주개 동경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 토종개로 꼬리가 없거나 짧으며 성격은 온순하고 매우 친화적인 토종개다. 동경이라는 이름은 경주의 옛 지명인 동경(東京)에서 사육하는 개라는 의미로, 신라시대부터 경주지역에서 사육되다가 일제강점기 때 멸종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동경잡기(東京雜記)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옛 문헌을 통해 경주지역에서 널리 사육되던 개로 기록돼 있고 신라고분에서 토우로 발굴되는 등 그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에는 유전자 분석 결과 한국 토종개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져 문화재청으로부터 천연기념물 제540호로 지정됐다.

용명리 삼층석탑 (龍明里 三層石塔) 북쪽에 있는 탑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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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 경주시 구황동 103번지)는 경주 낭산(狼山)의 북동편 기슭에 있는 석탑으로 마을 이름은 황복또는 탑거리이며 석탑은 마을 초입 좌측 밭 가운데 있다.

이 석탑은 신라 31대 신문왕이 사망 후 그 아들인 32대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효소왕 1(692)에 세운 탑으로, 이중기단에 높이 7.3m의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33대 성덕왕이 즉위 5(706)에 사리와 불상 등을 추가하여 탑 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탑 서쪽은 산으로 막혀서 건물이 들어설 만한 공간이 없고 동편과 남편은 넓은 경작지와 마을이다. 지형으로 보아 장항리사지와 같이 탑을 서쪽에, 금당을 동쪽에 둔 소위 좌전우탑(左殿右塔) 가람배치로 추정된다. 탑 동남편에는 목이 잘리는 등 훼손이 심한 귀부 한 쌍이 나란히 남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으나 사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 동남편에는 목이 잘리는 등 훼손이 심한 귀부 한 쌍이 나란히 남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으나 사적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78월에 발굴 조사를 하였고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구를 발견했다.

이 절터가 황복사지(皇福寺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든 근거는 1937년경에 낭산 동쪽 기슭에서 일본인이 수집한 명문기와(銘文瓦)이다. 이 기와는 당시 부산에 거주하였던 일본사람이 수집하여 소장하였던 것으로 기와 뒷면에는 황복사(皇福寺)’  또는 왕복(王福)’이라는 명문이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황복사의 창건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5 의상전교(義湘傳敎) 기록에 의하면,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625~702)‘29세에 서울의 황복사로 가서 출가하였다고 되어 있다. 29세는 진덕여왕(眞德女王) 7(653)에 해당되어 황복사는 진덕여왕 때 또는 그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황복사지(皇福寺址)에는 목탑지로 볼 수 있는 유적은 없으나,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5 의상전교(義湘傳敎) 기록을 보면 창건 당시 목탑이 세워졌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내용이 있는데 의상대사가 중국으로 유학한 뒤 귀국하여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스님들과 탑을 돌 때면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닥다리가 없었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이때 의상대사의 나이는 46세로 문무왕 10(670)이다. 당시 신라 왕경에는 아직 석탑이 건립된 적이 없는 시대로 679년에 창건된 사천왕사와 692년의 망덕사에 목탑을 건립하였고 처음 완성되는 석탑은 682년의 감은사 삼층석탑이다. 이에 허공을 밟고 올라갔다는 탑은 목탑으로 추정된다.

7세기 중엽 황복사(皇福寺) 창건과 동시에 목탑이 세워졌으며, 효소왕 원년에 삼층석탑이 추가 건립된 것이다. 그 후 목탑은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사라졌고 석탑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또는 익산왕궁리오층석탑과 같이 목탑이 화재로 소실된 후 그 자리에 석탑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4264일부터 착수된 탑 해체수리 과정에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다.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치와 불상 등 일괄유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중 금동 사리함의 뚜껑내부에서 조탑명문(造塔銘文)을 확인되었는데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문에는 효소왕 원년(692)에 신문왕비인 신목태후와 그녀의 아들 효소왕과 함께 같은 해 72일에 돌아가신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건립하였음을 기록되어 있다. 706년에는 성덕왕이 신목태후와 효소왕의 죽음을 슬퍼하여 부처 사리 4, 6촌 크기의 순금제 미타상 1, 무구정광대다리니경 1권을 석탑 내에 봉안하였음도 기록되어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皇福寺址 三層石塔)은 기단부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7.3m의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옥개(지붕)가 두꺼운 반면 옥개받침은 세밀하여 중후한 느낌을 준다.

기단부의 1(하층) 기단은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하여 3()로 구분되어 있다. 감은사지삼층석탑에 비해 탱주가 1주가 줄어들었다. 갑석 위에는 2단의 호, 각형 받침(괴임)이 2층기단을 받치고 있다.

2(상층) 기단은 1층 기단처럼 면석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두고 가운데 탱주(撑柱) 2주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은 각 면에 3매씩 하여 총 12개 면석이 사용되었고 갑석은 2단의 갑석에 4매가 사용되었다. 갑석 위에는 2단의 각형 받침(괴임)이 1층 탑신(몸돌)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전체적으로 1층 탑신(몸돌)에 비해 2, 3층 탑신(몸돌)의 체감률이 급격히 떨어져있다탑신(몸돌)과 옥개(지붕)는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탑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문비 등 다른 조각은 없다. 옥개가 두꺼워서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게 되어있고 옥개의 네 귀퉁이는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옥개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옥개의 전각 양면에는 풍령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1개씩 있다.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방형의 노반(露盤)만이 남아있고 노반 가운데에는 찰주공이 있다.

황복사지에서 발굴된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금동불입상
금동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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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리는데, 깃발을 당(),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분황사 당간지주(芬皇寺 幢竿支柱)는 분황사 입구 남쪽 50m지점에 세워져 있다. 황룡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입구 쪽에 파손되었지만 당간지주가 있어 현재 분황사 가람의 규모가 상당히 축소된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분황사 당간지주(芬皇寺 幢竿支柱)로 판단된다.

양 기둥에는 상··3곳에 지름 15cm의 구멍[杆孔]이 있고, 두 기둥 사이에 당간을 견고하게 받치기 위한 당간받침돌(간대석 : 竿臺石)이 남아 있는데, 귀부형 간대석으로 거북 모양을 새겨 독특하다.

귀부형 간대석 상면에는 사각형 좌대를 마련하여 앞뒤로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좌대 한가운데에는 작은 사각형을 오목하게 시공하였으며, 한쪽 방향으로는 물이 빠져나가도록 좁게 낙수 홈이 시설되어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당간 하부의 평면 형태는 사각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형 간대석에서 귀두의 방향은 당간지주의 방향과 함께 사찰로의 진입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당간과 당간지주에서 다양한 유형의 간대석이 마련되는데,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처럼 귀부형 간대석을 구비한 경우는 유일하다.

당간지주의 전체적인 형태는 평면 사각 석주형인데, 상부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좁아지도록 하였다. 당간지주의 바깥 면은 지면에서 148cm 정도 되는 높이까지 1단 높게 하였으며, 바깥면의 좌우 측 모서리를 4cm 정도의 너비로 모죽임 하였다.

또한 당간지주의 정상부는 안쪽 면에서 바깥 면으로 나가면서 부드럽게 호형을 하였다. 당간은 당간지주의 안쪽 면에서 바깥 면으로 관통하는 원형 간공(지름 15cm)을 상중하 3곳에 마련하여 간을 끼워 고정하도록 하였다.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는 경주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중요 사찰의 당간지주와 비교하였을 때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귀부형 간대석을 한 것은 유일하다.

분황사 당간지주(芬皇寺 幢竿支柱)에서 본 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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