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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 울산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산 207-5번지)은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은현리 서리마을의 남쪽 야산에 있다. 이곳은 정족산(해발 748m)에서 동북쪽으로 발달한 보골봉의 끝자락에 해당하는데, 적석총이 있는 지점은 경사가 10˚ 이내로 완만한 곳에 축조되어 있다.

적석총(積石塚)은 시신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거나 땅 위에 시신을 놓은 다음 돌을 쌓아서 만든 무덤을 말한다. ()발굴된 무덤의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어 묘라고 부르기는 곤란한 무덤을 말한다.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은 사람머리 크기의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무덤으로 붕괴로 말미암아 확실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남아있는 적석총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20m내외, 높이 6m 정도로 추정된다. 적석총의 석재는 대부분이 자연석으로 큰 것은 65×60×20, 중간 것은 55×40×23, 작은 것은 23×14×7정도로 다양하며, 무덤의 전체모습은 원형이다.

적석총의 최하단 기단부의 형태, 함몰되어 있는 적석의 상태 및 높이 등으로 미루어보면 원래는 위쪽으로 오를수록 좁은 형태를 이루는 피라미드형으로 추정된다.

원래 기단부에는 계단으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나 현재는 확인하기 어렵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인근 저수지 축조 시 적석총의 돌을 사용했다 한다. 적석총에서 약 3m정도 떨어진 주변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쌓은 당이라 하여 해당울, 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적석총에서 약 3m정도 떨어진 주변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쌓은 당이라 하여 해당울, 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적석총(積石塚)은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 초기에 확인되는데, 이때의 적석총은 대부분 한반도 중부와 북부 지방에 분포한다. 삼국시대가 되면 고구려에서 적석총을 많이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강돌을 사용하여 무질서하게 쌓아 올렸지만, 점차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쌓아 올려 웅장하게 만들었다. 백제에서도 적석총을 만들었는데, 백제의 적석총은 첫 수도였던 한강 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웅촌면(熊村面)에 있는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은 검단리 유적지, 대대리 유적지와 더불어 삼한시대의 우시산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지역의 최초 국가인 우시산국이 이 지역으로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의 존재는 강력한 지배층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시산국은 신라 탈해이사금 때 멸망하기 전까지 반 독립성을 유지한 소국이였다.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의 피장자는 과연 누구일까?

은현리 적석총은 아직 발굴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구체적인 구조와 연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추론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우신산국의 지배층이 고구려계통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는 견해다.

또 하나의 추론은 우시산국은 소국 형태의 가야국으로 경남 산청군에 있는 전 구형왕릉(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의 돌무덤)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탑으로 보는 견해인데 안동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3)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이다.

은현리(銀峴里)는 은하(銀下)의 은()과 덕현(德峴)의 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은하(銀下)’의 순우리말은 은알, 음달의 아화(雅化)로 빚어진 말이다.

은현리(銀峴里)는 웅촌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북쪽은 삼동면 출강리, 작동리와 지경을 이룬다. 동쪽은 대복리와 검단리, 남쪽은 고연리와 접한다. 정족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이 보골산에서 골짜기를 만들고, 은현리의 뒤산 능선을 따라 한 맥이 남진한 것이 운암산이다.

은현리의 들판은 매우 넓고 저수지가 많아 비옥하다. 서남쪽에는 무제치늪이 있으며 수반저수지, 담뒤저수지, 상보저수지, 덕산저수지 등의 저수지가 있고 곡천천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다.

웅촌면(熊村面)은 진산(鎭山)인 운암산(雲岩山)의 모양이 곰과 닮아서 웅촌이라 이름하였다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곰을 신성시하는 원시 신앙을 가졌던 예맥족(濊貊族)의 주처에는 곰의 터라 하여 ()’ 자가 붙는데, 이로 미루어 웅촌은 고마족이 세운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왕읍(王邑)이 있었던 곳이라 이름 한 지명으로 보인다.

은현리 서리마을의 은현리적석총 안내표지판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는 길에 만난 공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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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207-2 평지 일대(129,643)에 위치하고 있는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서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이 고분군은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경주 시내 중심부의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건천읍에서 경주 방향으로 가는 국도 4호선

이곳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金尺)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해지고 마을 이름 또한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에서 본 서쪽 고분군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서쪽에 있는 고분군
서쪽에 있는 고분군이 동쪽 고분군보다 규모가 큰 고분이 많다.

현재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

금척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 4번국도 건설공사 중 고분의 존재를 확인한 바 있다. 발굴조사는 1952, 1976, 1981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52년 발굴조사는 도로확장공사로 파괴된 고분(1·2·3) 2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 32일부터 8일까지 실시하였다.

맨 오른쪽은  표형분(瓢形墳 )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였다. 조사결과 출토유물에는 1호분에서 금제세환이식·곡옥·호박제 구슬·토기 및 철기편이, 2호분에서는 많은 토기편과 소량의 철기편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1호분은 고분의 주곽부, 2호분은 부곽 가능성이 크다.

1976년 발굴조사는 318일 토사 채취 중 토기편이 발견됨에 따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적석목곽묘의 고분 4기와 우물 1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고배·대부장경호 등 모두 토기이다.

1981년 발굴조사는 상수도시설 공사 중 노출된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를 경주사적관리사무소와 국립경주박물관 합동으로 423일부터 531일까지실시하였다. 수혈식석곽묘 3, 옹관묘 2, 토광묘 2기 등 모두 1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적석목곽묘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 등이 있는데,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여기 건천읍에 있는 모량리(牟梁里)의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고 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

모량부(牟梁部)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으로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知召夫人) 또는 식도부인 박씨(息道夫人 朴氏)의 출신지로 고분을 평지에 대규모로 조성하여 그 존재감을 강조하였고, 부장유물에 있어서 시내 고분과 크게 차이가 없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세력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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