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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반월성 북편에 분포하는 고분군 가운데 서북편 말단부에 있는 고분군이다. 서쪽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群)과 구분되고 남쪽의 도로에 의해 황남동고분군(皇南洞 古墳群), 황오동고분군(皇吾洞 古墳群)과 구분된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봉황대(鳳凰臺, 125호), 식리총(飾履塚, 126호), 금령총(金鈴塚, 127호),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등 4기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고분 1기와 고분 터 2기를 볼 수가 있다. 봉황대 고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식리총과 금령총, 옥포총은 1924년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하였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 전경
왼쪽부터 금령총(金鈴塚, 127호),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식리총(飾履塚, 126호)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봉황알을 닮은 전망대라는 뜻의 봉황대(鳳凰臺)는 과거 경주를 유람하는 문사나 일본을 오가는 사절단이 경주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였다. 발굴이 되지 않았고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있어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된다.
봉황대(鳳凰臺)가 왕릉급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고고학적 안목 때문이다. 그의 완당전집에 「…봉황대 동서편에 인공산이 많다…몇 해 전 무너진 인공산에서 깊이가 한 길 남짓 되는 검푸른 빛의 공동(구멍)이 보였다.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인공산’이 옛날의 왕릉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이다.

추사 김정희는 “봉황대 주변의 인공산이 무너져 그 속에서 구멍이 뚫렸는데,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신라 왕릉임이 분명하다.” 고 전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으로 이보다 큰 고분은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이나 이것은 표형분(瓢形墳)으로 2개의 무덤이 합쳐진 것이다.
봉황대 고분은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있는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 또는 자비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5세기 말∼ 6세기 초로 편년 되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 되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에는 예부터 ‘봉황 알’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풍수가가 고려 태조(918~943)에게 “배 모양으로 생긴 경주는 언젠가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침몰시켜야 한다.” 고 풍수적으로 신라 공략을 조언하였다. 그리고 그 풍수가는 신라 임금을 찾아가 세치혀를 놀렸다.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긴 서라벌(경주)은 천년동안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봉황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합니다. 서라벌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 두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겁니다.”
풍수가의 말에 혹한 신라 왕은 서라벌 한 복판에 둥글둥글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런 뒤 미추왕릉 부근의 숲속에 우물을 파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짐을 잔뜩 실은 배의 밑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라는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실제로 경주 지형은 형산강(서천)과 북천(알천), 남천으로 둘러싸인 분지(선상지, 삼각주) 지형이다.
봉황대 고분에는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과 종각 터가 있었는데 원래 봉덕사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이 북천의 홍수로 인해 폐사되어 영묘사로 옮겨졌고 영묘사가 화재로 폐사된 뒤 이곳 봉황대 고분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5년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1915년 봉황대 고분에서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기는 모습

금령총(金鈴塚, 127호분)
금령총(金鈴塚)은 두 번째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금관총 발굴 3년 후인 1924년 조선총독부주관으로 노동리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택해 발굴조사를 했다. 봉분은 원형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직경 18m, 높이 약 4.5m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금령총(金鈴塚)은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는 자갈과 갈색 점토로 쌓았고 지표 아래 3m에 지하식의 하나로 된 덧널(목곽, 4.8×3.5×1.5m)이 동, 서를 장축으로 하여,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깐 다음 설치되었고, 덧널 내부의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내면을 투조금동판(透彫金銅板)으로 장식한 나무널(목관, 1.5×0.5m)이 들어 있었다.
1924년 발굴조사 결과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작아서 키 90cm 정도의 6세 이하 왕자 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금관이 금방울 한 쌍이 장식되어「금방울이 금관에 장식되어 출토되었다」는 뜻에서「금령총(金鈴塚)」이라 했다.
발굴을 주관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였고 발굴 결과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해 신라 시대 생활을 알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출토된 중요유물을 보면 금제 허리띠金製튎帶) 및 장식품, 백화수피로 만든 관모, 금구슬,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금제 가락지, 금동제 신발, 큰칼(大刀), 마구류(馬具類) 등 다수가 있는데 특히 다리 달린 배 모양 토기와 신라 토기로서 최초로 국보가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제91호) 2점이 출토되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6세 이하 신라 왕자로 벽화의 아들 또는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금령총 재발굴에서는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보다 먼저 두 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발굴단은 두 고분에 127-1호, 127-2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령총의 조성연대를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말~ 6세기 초로 추정하고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이 6세 이하의 신라 왕자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사기> 500년(소지왕 22년) 9월 기록을 보면 왕자를 추정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 9월, 왕이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 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경북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대목에서 학계는 두 달 뒤인 500년 11월 “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64살의 지증왕이 그 뒤를 이었다”고 했다는 기록은 500년 9 ~ 11월의 기록이 아니고 3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압축·정리한 기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지증왕은 5~6살 이전에 죽은 선왕(소지왕)의 유복자를 위해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금령총은 벽화의 아들 무덤이 되고, 봉황대는 소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금령총 주인공이 벽화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눌지왕 이후 김씨 중에서도 눌지의 직계에서 족내혼, 근친혼을 거듭했기 때문에 지방(경북 영주) 출신의 벽화 소녀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눌지, 자비, 소지로 이어지는 눌지의 직계는 아니고 소지왕과는 6촌(삼국사기), 또는 5촌(삼국유사) 사이가 된다. 계미년(503년 추정) 9월 건립된 포항 냉수리비에는 지증왕을 ‘지도로 갈문왕(왕의 근친에게 주는 봉작)’으로 지칭했다. <삼국사기> 기록(500년 11월 즉위)과는 3년의 시차가 있다.
이는 지증왕이 정변으로 죽은 소지왕의 뒤를 곧바로 잇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최소한 3년 이상 ‘섭정’한 뒤에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즉 지증왕이 3년이나 즉위하지 못했을 정도로 왕위를 두고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지증왕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서 왕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황대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마립간 시대(356~503)의 능으로 보고 내물마립간(356~402), 실성마립간(420~417), 눌지마립간(417~458), 자비마립간(458~479), 소지마립간(479~500) 그리고 재위 도중 칭호를 ‘왕’으로 바꾼 지증왕(500~514) 등 6명의 왕릉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북쪽에 차례로 조성된 봉황대 고분(125호분),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134호분(표형분 : 瓢形墳)의 주인공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두고 내물왕이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눌지왕과 실성왕이 따르고 있다.

노동동 고분군에서 본 황남대총

황남대총의 피장자가 눌지왕이라고 전제로 하면 봉황대 고분은 자비왕이고, 서봉황대 고분(130호분)은 소지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은 모두 자비왕과 관련된 인물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자비왕의 맏아들이 소지왕’이라 했고,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셋째아들이 소지왕’이라 했다. 둘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일찍 죽어 셋째가 ‘맏아들’의 지위에서 왕위를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고리 자루 큰칼 3자루가 출토된 고분으로 규모는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유물의 위상은 최상급이다. 그래서 금령총 주인공은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즉 소지왕이 죽었을 때 자비왕의 손자이자 이사지왕(소지왕의 동생, 금관총 주인공)의 어린 아들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데 요절하자 지증왕이 금령총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근 금령총에서 최소 8명의 순장자가 보인다는 견해가 있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순장 제도는 502년(지증왕 3) 2월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금령총은 502년 2월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식리총(飾履塚, 126호분)
식리총(飾履塚)은 조선총독부주관으로 금관총을 발굴조사 후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참여했다. 발굴 당시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직경 30m, 높이 약 6m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현재 봉황대 고분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분의  지표 2.7m 아래에 지하식으로 하나의 덧널(木槨, 5.25×3.3×1.2m)을 동,서 장축으로 하였고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깔고 설치한 외 덧널식(單槨式)이며, 덧널의 내부 서쪽 내면에 붉은 칠을 하고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나무널(木棺, 2.2×0.78m)을 설치하였다. 널 동쪽에는 각종 껴묻거리(부장품)가 배치되어 있었다. 덧널과 구덩이 벽 사이, 그리고 덧널의 위에는 냇돌로 돌무지를 쌓았고 돌무지 위에는 봉토를 씌웠다. 
널이 놓여 있던 곳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사용하였던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서쪽 끝부분에서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이 발견되어 식리총(飾履塚)으로 명명되었다.
이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은 거북 등 모양(龜甲形) 윤곽 안에 각종 괴수(怪獸)의 타출 무늬(打出文)가 새겨져 있어 서역(西域) 미술과 관련이 깊다.

식리총(飾履塚)은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널 동쪽의 껴묻거리 구역에서는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 백화수피모(白樺樹皮帽),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동장안교(金銅張鞍橋)를 비롯한 각종 마구(馬具) · 청동합(靑銅盒) · 자루솥(鐎斗)을 비롯해 금속용기와 칠기 · 토기 · 금은장쌍룡고리자루큰칼(金銀裝雙龍環頭大刀) 등의 무기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은 뚜껑 손잡이가 새 모양으로 된 특징을 보이고, 자루 솥은 중국 동진(東晋)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고분의 규모와 출토된 금동제 유물로 보아 왕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왕족이거나 최고의 귀족 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피장자는 널 안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로 보아 남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5세기 말경이나 6세기 초엽으로 편년 된다.

식리총(飾履塚)과 금령총(金鈴塚)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옥포총(玉圃塚)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발굴 조사하였다. 가옥 소유지의 이름 박옥포(朴玉圃)에 의해 옥포총(玉圃塚)으로 명명되었다.

옥포총(玉圃塚)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봉분은 확인되지 않지만 약 1m 두께의 남북 너비 8m 정도의 적석 상부에 1m 정도의 점토를 덮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장축 방향이 동-서향 장방형의 목곽형태로 내, 외 2중곽이며 외곽은 길이 485㎝, 너비 240㎝, 내곽은 길이 386㎝, 너비 180㎝이며, 높이 127㎝이다. 목관은 흑칠이 되었으며 크기는 알 수 없다. 묘광은 바닥을 2단으로 파냈고 하단 묘광은 추정 길이 600㎝, 너비 약 600㎝에 상단 묘광은 길이 약 730~740㎝, 너비 약 600㎝, 깊이 187㎝이다.

옥포총(玉圃塚)에서는 금은제 장신구와 백화수피제 관모, 삼루환두대도, 은제 굉갑(肱甲), 마구, 삼환령 등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및 구조 등을 통해서 볼 때 고분군 축조 시기는 5세기 말~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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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동 고분군(慶州 路西洞 古墳群)은 반월성의 북편 일대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지구 고분군들 가운데 북서 말단부에 있는 것으로 경주시 노서동 104번지 일대에 해당된다. 고분군 동쪽의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群)이, 남쪽의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이 있다.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은 13기의 봉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마총(馬塚, 133호분), 우총(牛塚, 131호분),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138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등 8기는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된 유물이나 봉토의 규모로 보아 6세기 때의 신라왕과 왕족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목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128호분), 서봉총(129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제138호분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쌍상총(137호분), 마총(133호분), 우총(131호분) 등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이다.

고분들 가운데 서봉총(129호분), 134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등 4기는 봉분이 표형분(瓢形墳)이고 나머지는 단일원분(單一圓墳)이다. 서북단에 자리한 130호분은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보다는 약간 작지만 거분(巨墳)으로 서봉황대 고분으로 불리고 있다.

미발굴 된 고분은  서봉황대(130호분),  132호분,  134호분, 135호분, 136호분 등 5기이다.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된 고분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봉토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는데 발굴 결과 크기는 직경 45m, 높이 12m 정도로 추산되었다.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덧널은 약 40㎝ 깊이로 지반을 파서 설치한 지상식의 외덧널식(單槨式)이었다.

발굴조사 계기는 주막집 증축 터파기 공사 도중 우연히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귀고리, 허리띠 등 온갖 황금제품이 쏟아져나왔다. 즉 1921년 9월 23일 노서리에 있는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있던 주막(酒幕)집에서 뒤뜰을 확장하려고 폐고분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금관총 유적지에 보존보호를 위해 돔형 전시공간을 구축
금관총의 돔형 전시공간과 뒤에 보이는 봉황대 고분

본격적인 조사는 일부 유물 유실과 봉토가 훼손 된 후 진행되었는데  당시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경찰서장 입회하에 발굴조사를 하였다. 모로시카를 비롯해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그리고 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등과 함께 9월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9월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 만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금관총은 비전문가에 의해 4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를 정확히 밝히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물만 수습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발굴 후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古)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덧널의 크기는 길이, 너비가 4.8×2.1m로 추정하였으나 천마총 등과 비교하면 너무 작게 추정된 것으로 원래는 이중의 덧널식인데 내부 덧널만 조사되었고 그 크기가 그러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무널(木槨)은 약 2.5×1.0m의 크기로 칠(漆)을 한 것이다.

유물로는 금관, 금제허리띠(金製銙帶) 등의 각종 장신구, 금동말안장(金銅鞍橋), 옥충(玉蟲)을 장식한 발걸이(子) 등의 마구류, 금제완(金製완), 청동초두(靑銅斗) 등의 귀금속용기와 유리용기, 토기류, 각종 철제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엽으로 추정되고 있고, 피장자는 남자라는 주장과 여자라는 주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큰 칼의 출토상태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금관총(2015)과 금령총(2018~2020)을 재발굴하였는데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의 ‘칼끝장식’ 1점이 나왔고 2013년에도 금관총 유물의 보존처리 도중 ‘이사지왕’ 명문 고리자루큰칼 2점을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에서만 출토된 3점의 ‘이사지왕’ 명문 칼이 나왔는데 금관총의 주인공, 즉 피장자는 이사지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는 ‘이사지왕’이 보이지 않는다.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 (국립경주박물관)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서봉총(瑞鳳塚)은 세 번째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봉분은 표형분(瓢形墳, 쌍분)이고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1926년에 발굴조사를 했다. 표형분(瓢形墳, 쌍분)은 북분과 남분으로 구성되고 남분을 먼저 발굴을 했고 데이비드 총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Percival David, 1892~1964)가 발굴 자금을 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발굴 결과 금령총보다 많은 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당시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를 기념하여 서봉총으로 명명되었다.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취하고, 출토된 신라 금관 장식 가운데 봉황새 모양 장식이 있어 봉황(鳳凰)의 「봉」자를 취해서 「서봉총」이라 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은 금관총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m의 거리를 두고 있다.

현재 서봉총(瑞鳳塚) 자리에는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의 발굴조사는 금령총의 발굴조사 2년 후인 1926년에 역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관총, 금령총이 먼저 발굴되어 금관이 출토되어서 경주 노동리, 노서리 일대에 분포한 신라 무덤에는 금관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시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나라의 옛 사찰과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그리스, 로마 등의 고분 발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발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일본은 마침 경주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라 고분 발굴 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당시 일본 교토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하마다가 황태자를 안내하여 발굴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고 신라 무덤이 일본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된 셈이다.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때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되어 있어 그 용지를 매립해야 했다. 이때 매립 할 흙이 필요하게 되자, 서봉총의 봉토 흙이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의 매립에 사용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봉황모양장식을 얹은 금관을 비롯한 유리제팔찌, 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 등의 각종 장신구, 청동초두(靑銅斗), 칠도각병(漆塗角甁), 유리그릇을 비롯한 각종 용기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연수원년(延壽元年) 신묘년(辛卯年) 3월에 이 은합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연수원년은 451년 또는 511년으로 추정되는데 451년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분은 이보다 늦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이고 피장자는 여성 왕족묘로 추정된다.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서봉황대 고분은 직경이 거의 80m에 달하고 신라 마립간기 말기인 6세기 초의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 봉토의 상면에서 함몰 현상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서봉황대 고분(미발굴 130호분)
미발굴 132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호우총은 남쪽에 배치되어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하였고 두 고분 모두 표형분(瓢形墳)이다.

봉토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4m 정도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금속용기류, 마구류,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출토된 청동합(靑銅盒, 보물 제1878호) 바닥에는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십(壺杅十)"이라는 4줄 16자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이 이름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호우총이라 명명하였다.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이 청동합(靑銅盒, 청동호우)은 보물 제1878호로 높이 18.5cm, 폭 23cm,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와 동일한 글자체와 제작 시점을 명확히 알려주는 명문 내용 등으로 인하여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뒤 2년이 지난 415년(장수왕 3년)이다.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있었던 제사 때에 만들어진 제기(祭器)의 하나로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銙帶)를 출토하는 최고위급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청동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 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나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은령총(銀鈴塚)은 호우총(壺杅塚)의 북편에 위치하고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발굴 당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중형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봉토의 크기는 직경 20m, 높이 5m로 내부구조는 호우총과 비슷한데, 덧널부는 지하에 설치되었으며 호우총보다 대략 30㎝ 정도 깊게 설치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두향(頭向)은 동쪽이며, 머리 쪽에 부장품이 놓여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동관과 금동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쇠솥 등의 금속제용기류, 칠기, 토기 등과 함께 약간의 철제이기류와 은장도, 그리고 마구류 일부가 수습되었다. 피장자는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널 내에 장식된 큰 칼이 없고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주인공은 왕족의 부인 정도로 여겨지며, 그 축조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쌍상총(雙床塚)은 봉분이 원형봉토분으로 노서동(路西洞)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1953년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묘제는 통일신라 초기의 부부합장분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대부분 도굴되었고 널방(玄室) 내에 2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屍床臺)가 발견되어 쌍상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되고 봉분이 훼손당한 것으로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토의 중심에는 남향한 돌방(石室)이 배치되었다. 널방(玄室)은 길이(동~서) 3.3m, 너비(남~북) 3.0m, 높이3.6m의 크기로 네 벽은 지면 위에 잘 다듬은 깬돌(割石)로 쌓았다. 벽들은 바닥에서 2m 높이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나 그 위부터는 내곡(內曲)하며 줄어들게 쌓았고 위에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뚜껑으로 얹었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네 벽을 쌓을 때는 일정한 크기의 깬돌을 사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쌓았고 그 위에는 회를 발랐다. 널방의 바닥에는 회를 깔고 중앙에 벽과 약 30㎝의 거리를 두고 길이, 너비, 두께가 2.3×2.0×0.3m인 주검 받침(屍床)을 설치하였다.

주검 받침은 자연석과 냇돌(川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먼저 북쪽에 너비 1.5m의 주검 받침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덧대어 너비 0.5m의 2차 주검 받침을 설치한 것이다. 주검 받침의 전면에도 회를 발랐는데, 원래의 주검 받침에는 0.9×0.3×0.2m인 6매의 판석에 시신의 머리·몸·다리를 놓을 만큼 조각하여 정교하게 파 놓았다.
제2주검받침에는 돌베게(石枕)와 돌발받침(石足座)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널(木棺)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안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널방의 정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을 달았는데, 널길은 길이, 너비, 높이가 3.0×1.35×1.5m 정도였다. 널문은 길이, 너비, 두께가 1.33×0.55×0.1m 크기로 문주석(門柱石)을 돌출시키고 밑에 문지방석을 놓고는 2매의 가공한 판석비(板石扉)를 달았다.

이 비(扉)에는 귀면(鬼面)으로 된 청동제좌판(靑銅製座板)에 낀 문고리가 하나씩 달렸고, 그 아래에 철제의 빗장이 걸쳐져 있었다. 비에서 1.6m 떨어진 곳부터 널길의 입구까지에 돌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였다. 돌방(石室)의 안에서는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을 비롯한 약간의 토기편만 출토되었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아 마립간기(麻立干期) 신라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마총(馬塚)은 서봉황대 고분의 전면에 배치된 표형분인 134호의 서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도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사한 결과 말뼈와 안구편(鞍具片)이 나왔다 하여 마총(馬塚)으로 불리고 있다. 그 후 1953년 국립박물관이 이 고분과 약 50m 떨어진 쌍상총과 함께 재조사를 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방과 널길 사이에 돌문이 아닌 나무문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고분 모두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조사 시, 봉분은 많이 깎여 나가고 동서와 남북의 직경이 각각 3.4m, 노면에서의 높이는 3.57m만 남아 있었으나 원래 봉분의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정도인 쌍상총과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총(馬塚)의 돌방은 지상에 남향하여 축조되었다. 널방(玄室)은 동서 3.0m, 남북 3.24m, 높이 3.7m의 크기로 남북이 약간 길지만 정방형(正方形)으로 볼 수 있다. 널방의 네 벽은 비교적 크기가 고르고 장방형(長方形)으로 다듬은 깬돌(割石)로 열과 단을 맞추어 위로 올라가며 좁혀 쌓았다.

마총의 조성연대는 통일초기(統一初期)로 판단되고 있으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문에 나무를 사용한 예는 통구지방의 고구려고분인 무용총(舞踊塚)에서 보이고 있어, 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보아 마립간(麻立干)시기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표형분인 미발굴 134호분
표형분인 134호분의 호석

 

138호분
138호분은 조사 전 이미 봉분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원래는 직경이 약 2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하에 무덤 구덩이를 파고 하나의 덧널(木槨)을 설치한 외덧널식이다. 덧널은 길이, 너비, 높이가 3.8×1.5×1.5m 크기로 추정되었고, 장축은 동-서로 두었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에 치우치게 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을 두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반지, 은반지,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 청동정(靑銅鼎), 쇠솥(鐵釜) 등의 금속용기류, 토기류, 쇠투겁창(鐵矛) 등의 철기류, 청동복륜(靑銅覆輪),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피장자는 남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우총(牛塚)은 노서동고분군 서쪽의 평지에 위치하고 7세기 전반에서 후반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와 고이즈미 아키오(小川顯夫)가 영국인 데이비드의 자금지원으로 발굴한 서봉총(노서동 129호) 남분(데이비드총)에 대한 조사성과가 부진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조사된 고분이다. 발굴 후 민가의 담장에 포함되어 있다가 지금은 주변 지역이 정비되면서 개석 1매만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발굴 당시 봉분의 높이는 약 2m 정도로 일부가 잔존하였다. 석실의 벽체가 붕괴되면서 상부에 적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석의 크기는 길이 220㎝, 너비 140㎝, 두께 40㎝의 원반 모양으로 표면에는 작은 원형의 성혈과 홈이 관찰되는 점으로 볼 때, 지석묘의 상석을 가져다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길이 395㎝, 너비 380㎝의 정방형에 가깝고, 현실의 정남쪽 중앙에 연도가 달려있다. 현실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 들어가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내부 안벽에 접한 양쪽 모서리 부분에 각각 1매의 판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관대 시설로 보인다.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이는 벽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무문전은 노서동137호분(쌍상총)에서 조사된 사례처럼 관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도의 길이는 2.6m이고 할석을 이용해 폐쇄하였다. 벽석에는 0.6㎝ 두께로 회를 발랐다. 연도와 현실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미석이 있다. 석실의 내부에서 소뼈가 출토되어 우총이란 별칭이 붙었다.

미발굴 135호분
미발굴 136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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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 울산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산 207-5번지)은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 은현리 서리마을의 남쪽 야산에 있다. 이곳은 정족산(해발 748m)에서 동북쪽으로 발달한 보골봉의 끝자락에 해당하는데, 적석총이 있는 지점은 경사가 10˚ 이내로 완만한 곳에 축조되어 있다.
적석총(積石塚)은 시신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거나 땅 위에 시신을 놓은 다음 돌을 쌓아서 만든 무덤을 말한다. 총(塚)은 발굴된 무덤의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어 묘라고 부르기는 곤란한 무덤을 말한다.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은 사람머리 크기의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무덤으로 붕괴로 말미암아 확실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남아있는 적석총의 규모는 전체길이 약 20m내외, 높이 6m 정도로 추정된다. 적석총의 석재는 대부분이 자연석으로 큰 것은 65×60×20㎝, 중간 것은 55×40×23㎝, 작은 것은 23×14×7㎝ 정도로 다양하며, 무덤의 전체모습은 원형이다.
적석총의 최하단 기단부의 형태, 함몰되어 있는 적석의 상태 및 높이 등으로 미루어보면 원래는 위쪽으로 오를수록 좁은 형태를 이루는 피라미드형으로 추정된다.

원래 기단부에는 계단으로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나 현재는 확인하기 어렵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인근 저수지 축조 시 적석총의 돌을 사용했다 한다. 적석총에서 약 3m정도 떨어진 주변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쌓은 당이라 하여 해당울, 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적석총에서 약 3m정도 떨어진 주변에는 돌담을 쌓아 묘역을 구분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마고할미가 쌓은 당이라 하여 해당울, 성산이라 부르고 있다.

적석총(積石塚)은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시대 초기에 확인되는데, 이때의 적석총은 대부분 한반도 중부와 북부 지방에 분포한다. 삼국시대가 되면 고구려에서 적석총을 많이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강돌을 사용하여 무질서하게 쌓아 올렸지만, 점차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쌓아 올려 웅장하게 만들었다. 백제에서도 적석총을 만들었는데, 백제의 적석총은 첫 수도였던 한강 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웅촌면(熊村面)에 있는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은 검단리 유적지, 대대리 유적지와 더불어 삼한시대의 우시산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울산지역의 최초 국가인 우시산국이 이 지역으로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의 존재는 강력한 지배층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우시산국은 신라 탈해이사금 때 멸망하기 전까지 반 독립성을 유지한 소국이였다.

은현리 적석총(銀峴里 積石塚)의 피장자는 과연 누구일까?
은현리 적석총은 아직 발굴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구체적인 구조와 연대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추론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우신산국의 지배층이 고구려계통이라는 것이다. 고구려인이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보는 견해다.
또 하나의 추론은 우시산국은 소국 형태의 가야국으로 경남 산청군에 있는 전 구형왕릉(가락국 제10대 구형왕의 돌무덤)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탑으로 보는 견해인데 안동 석탑리 방단형 적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3호)과 비슷한 구조라는 것이다.

은현리(銀峴里)는 은하(銀下)의 은(銀)과 덕현(德峴)의 현(峴)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은하(銀下)’의 순우리말은 ‘은알’로, 음달의 아화(雅化)로 빚어진 말이다.
은현리(銀峴里)는 웅촌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북쪽은 삼동면 출강리, 작동리와 지경을 이룬다. 동쪽은 대복리와 검단리, 남쪽은 고연리와 접한다. 정족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이 보골산에서 골짜기를 만들고, 은현리의 뒤산 능선을 따라 한 맥이 남진한 것이 운암산이다.

은현리의 들판은 매우 넓고 저수지가 많아 비옥하다. 서남쪽에는 무제치늪이 있으며 수반저수지, 담뒤저수지, 상보저수지, 덕산저수지 등의 저수지가 있고 곡천천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있다.
웅촌면(熊村面)은 진산(鎭山)인 운암산(雲岩山)의 모양이 곰과 닮아서 ‘웅촌’이라 이름하였다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곰을 신성시하는 원시 신앙을 가졌던 예맥족(濊貊族)의 주처에는 곰의 터라 하여 ‘웅(熊)’ 자가 붙는데, 이로 미루어 웅촌은 고마족이 세운 우시산국(于尸山國)의 왕읍(王邑)이 있었던 곳이라 이름 한 지명으로 보인다.

은현리 서리마을의 은현리적석총 안내표지판
안내표지판을 따라 가는 길에 만난 공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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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207-2 평지 일대(129,643)에 위치하고 있는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서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이 고분군은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경주 시내 중심부의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건천읍에서 경주 방향으로 가는 국도 4호선

이곳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金尺)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해지고 마을 이름 또한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에서 본 서쪽 고분군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서쪽에 있는 고분군
서쪽에 있는 고분군이 동쪽 고분군보다 규모가 큰 고분이 많다.

현재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

금척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 4번국도 건설공사 중 고분의 존재를 확인한 바 있다. 발굴조사는 1952, 1976, 1981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52년 발굴조사는 도로확장공사로 파괴된 고분(1·2·3) 2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 32일부터 8일까지 실시하였다.

맨 오른쪽은  표형분(瓢形墳 )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였다. 조사결과 출토유물에는 1호분에서 금제세환이식·곡옥·호박제 구슬·토기 및 철기편이, 2호분에서는 많은 토기편과 소량의 철기편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1호분은 고분의 주곽부, 2호분은 부곽 가능성이 크다.

1976년 발굴조사는 318일 토사 채취 중 토기편이 발견됨에 따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적석목곽묘의 고분 4기와 우물 1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고배·대부장경호 등 모두 토기이다.

1981년 발굴조사는 상수도시설 공사 중 노출된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를 경주사적관리사무소와 국립경주박물관 합동으로 423일부터 531일까지실시하였다. 수혈식석곽묘 3, 옹관묘 2, 토광묘 2기 등 모두 1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적석목곽묘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 등이 있는데,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여기 건천읍에 있는 모량리(牟梁里)의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고 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

모량부(牟梁部)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으로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知召夫人) 또는 식도부인 박씨(息道夫人 朴氏)의 출신지로 고분을 평지에 대규모로 조성하여 그 존재감을 강조하였고, 부장유물에 있어서 시내 고분과 크게 차이가 없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세력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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