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지(陵旨塔址)는 낭산(狼山) 서쪽 기슭(경주시 배반동 621번지 일대)에 있고 절터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능지탑(陵旨塔)은 ‘능시탑’으로 구전되어 왔으며, 조선시대 편찬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능지’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근 마을 이름은 ‘능말’, ‘능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능지탑(陵旨塔)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말 조선고적연구회 명의의 보고서에 따르면 낭산 배반동 능지탑터를 화장지 유적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1969년부터 1979년 11년간의 삼산오악학술조사단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삼국유사(三國遺事)』「문무왕(文武王)」‘고문외정(庫門外庭)’의 기록을 근거로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고 있다.
삼산오악조사단이 발굴조사를 실시했을 때, 탑의 북쪽에서 건물지와 석등지가 확인되었으며, 수막새, 암막새, 치미, 귀면와, 전, 석제불상과 토기편, 자기편 등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능지탑(陵旨塔) 주변이 있는 경주 배반동 일대를 마을주민들은 ‘고문뜰’로 부르고 있었다. 능지탑(陵旨塔)과 문무왕의화장터에 대한 관련성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현재 능지탑(陵旨塔)은 1978년 10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79년 11월 25일에 공사 완료한 모습이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이다. 능지탑은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능지탑(陵旨塔)은 현재 전체높이가 4.49m이며, 2층으로 복원·정비되어 있는데 이중기단에 기단부와 탑신부로 구분할 수 있다. 기단부 4면에는 9기의 십이지상이 있는데, 사상(뱀), 인상(호랑이), 진상(용)은 없다.
탑의 탑신부는 전탑과 같은 형태로 다듬지 않은 장방형의 석재로 쌓아올렸다. 그 위에 옥개에 해당하는 연화문석조물을 올렸는데, 이러한 석조물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정방형의 판석에 4개의 복판의 연꽃잎을 새긴 것과 장방형의 판석 한 면에 복판연꽃잎을 표현한 것 이다.
발굴 조사 시 100여 매의 연화문석조물을 확인하였는데, 현재 1층에는 61매, 2층에는 18매로 복원되어있다. 탑의 북쪽에 토담이 형성되어있으며, 그 앞에는 나머지 복원되지 않은 연화형석조물과 장대석이 모아져있다. 이는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탑의 북쪽에 토담이 형성되어있으며, 그 앞에는 나머지 복원되지 않은 연화형석조물과 장대석이 모아져있다. 이는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기단부에 배치된 십이지신상 중 자상(쥐)은 머리는 우측을 향해 있으며, 문복을 착의하였고 낮은 귀와 함께 이빨을 나타내었고, 왼손은 칼을 쥐었으며 오른손은 도포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인상으로 판단된다. 판석의 크기는 길이 109.0㎝, 너비 67.5㎝이다.
자상 ( 쥐 ) 은 머리는 우측을 향해 있으며 , 문복을 착의하였고 낮은 귀와 함께 이빨을 나타내었고 , 왼손은 칼을 쥐었으며 오른손은 도포자락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인상으로 판단된다 .
자상(쥐)을 제외한 나머지 상들은 무관복을 입고 있으며, 크기는 길이 100.0㎝. 너비는 70.0㎝ 내외이다. 머리의 방향은 오상(말), 술상(개)는 정면, 자상(쥐), 축상(소), 묘상(토끼), 신상(원숭이)는 우측, 양, 닭, 돼지는 좌측을 향하고 있다
자상(쥐)의 우측에 위치된 축상(소)은 머리의 방향이 우향으로 무관복을 입었고 보주를 잡고 있다. 판석의 크기는 길이95.0㎝, 너비 69.0㎝이다.
축상 ( 소 ) 은 머리의 방향이 우향으로 무관복을 입었고 보주를 잡고 있다
묘상(토끼)은 도끼를 잡고 있고 오상(말)은 화염보주와 칼을 잡고 있다.
묘상(토끼)은 도끼를 잡고 있다.오상(말)은 화염보주와 칼을 잡고 있다.
미상(양)은 낫 형태의 모(矛)를 잡고 있고 신상(원숭이)은 두 손으로 창으로 가슴을 가로지르며 잡고 있다. 유상(닭)은 칼을 잡고 있다.
미상(양)은 낫 형태의 모(矛)를 잡고 있다.신상(원숭이)은 두 손으로 창으로 가슴을 가로지르며 잡고 있다.유상 ( 닭 ) 은 칼을 잡고 있다 .
그리고 술상(개)은 짧은 귀에 도끼를 잡고 있으나 자상(쥐)으로, 해상(돼지)은 접혀 있는 귀와 이빨을 보면 술상(개)으로 판단된다.
술상(개)은 짧은 귀에 도끼를 잡고 있으나 자상(쥐)으로 판단된다.해상(돼지)은 접혀 있는 귀와 이빨을 보면 술상(개)으로 판단된다.
낭산(狼山)에서 출토 된 석조약사불좌상(국립경주박물관)은 높이는 약 128.5㎝로 광배, 불신, 그리고 대좌가 한돌(一石)로 조성되었다. 왼손에는 큰 보주형의 약기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촉지인을 한다. 얼굴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있는데, 세부표현은 마모가 심해 잘 확인되지 않는다.
어깨와 팔, 다리에는 두꺼운 옷 주름이 동일한 간격으로 표현되어있다. 주형광배에는 양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따로 구분하였고, 그 내부에는 꽃무늬 장식과 불꽃무늬장식을 표현하였다. 대좌는 연화대좌로 상대석만 남아있다. 대좌의 연잎장식은 복엽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연잎 안에는 꽃문양장식이 세밀하게 조각되어있다. 이 불상은 왼손에 약기를 들고 있어서 약사불로 판단되며 약사신앙이 유행하던 9세기에 조성한 상으로 추정된다.
낭산(狼山)에서 출토 된 석조약사불좌상(국립경주박물관)은 높이는 약 128.5㎝로 광배, 불신, 그리고 대좌가 한돌(一石)로 조성되었다.
현재 복원 된 능지탑에 조성 된 십이지신상은 능지탑 축조와 관련 된 것이 아니며 주변 훼손 된 능에서 옮겨 진 것을 조합하여 복원하였다. 자세히 십이지신상을 살펴보면 크기가 차이가 있고 양식도 다름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자상(쥐)은 황복사 동편 왕릉 추정지에서 가져 온 것으로 인상(호랑이)이 자상(쥐)으로 바꿔졌다.
능지탑(陵旨塔)은 낭산(狼山) 서록에 있는 사찰로 그동안 문무대왕의 화장지로 추정된 장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찰과 관련하여 문헌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유적의 성격과 창건 및 폐사 등의 사찰의 연혁과 사명을 알 수 없는 유적이다. 이에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원형 복원이 필요하다.
1970년 발굴 조사 때, 소조여래좌상의 파편 등이 발견되어 창건 때에는 사면에 흙으로 만든 큰 불상을 봉안한 감실과 같은 목조건축물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낭산(狼山) 서쪽 기슭(배반동 산18-3번지)의 바위 면에 삼존불(三尊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곳은 서록사지(西麓寺址) 일원으로통일신라시대 절터 이다. 현재 이곳에는 중생사(衆生寺)라는 작은 절이 있으며 경내에는 마애삼존상(보물 제665호)을 비롯하여, 석탑재, 불상대좌, 건물 기단석, 초석 등이 있다. 그리고 과거 주변에서는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이출토되었고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현재 중생사(衆生寺)는 1972년 보문스님이 기존의 선덕사를 인수하여 중창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전의 선덕사라는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을 ‘낭산(狼山) 서록사지(西麓寺址)’로 부르고 있었다.
1965년 낭산 마애삼존상 (狼山 磨崖三尊像)을 조사 할 때 이곳에 운영 중인 절은 없었던 것으로 1965년 이전까지는 폐사지로 남아 있었다. 중생사(衆生寺)라는 절은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의 삼소관음(三所觀音)과 중생사(衆生寺)에 등장하는데 현재 중생사와는 전혀 무관하다.
낭산 마애삼존상(狼山 磨崖三尊像)현재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1933년 간행된 『동경통지(東京通誌)』에는 이 마애불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있다.
「산 서쪽 아랫마을 집에 큰 돌이 있는데, 세구의 상을 새겼으나 옆 부분은 묻혀있다. 가운데는 가사를 입고 있고 오른쪽은 갑옷을 입고 칼을 잡았고 왼쪽사람은 흙에 묻혀서 분명하지 않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은 집안에 있던 큰 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흙속에 매몰되었다가 후대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에 조각된 삼존상(三尊像)을 살펴보면, 중앙의 본존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있다.
지장보살상(피모지장보살상 :
被帽地藏菩薩像)
본존상의 현재 높이는 약 100㎝이다. 둥글고 살이 찐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듯하다. 특히 본존상머리에 착용한 두건과 양어깨를 감싸고 입은 가사 등은 고려불화에서보이는 지장보살상(被帽地藏菩薩像: 피모지장보살상)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여, 지장보살로 보고 있다.
좌, 우 협시상은 갑옷을 입고, 악귀를 몰아내는 신장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높이는 두상 모두 약90㎝이로 좌우협시가 신장상인 경우는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왼편에 앉아 있는 좌 협시 신장상[向右]은 오른쪽다리는 안쪽으로 접고 왼쪽다리를 비스듬히 세워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시선은 본존상을 향해 있으며, 머리에는 투구를 착용하였고, 몸에는 갑옷을 입고 있다. 얼굴은 광대뼈가 나오고 입을 꽉 다물고 있어 험상궂어 보이며, 높이 치켜든 오른손의 지물과 왼손의 형태 등은 마멸이 심하여 불분명하다. 광배와 대좌의 표현 역시 현재 확인할 수 없다.
왼편에 앉아 있는 좌 협시 신장상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우 협시 신장상[向左]은 좌협시상과 거의 대칭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두 다리를 편안하게 뻗은 유희좌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좌협시상과 유사한 모습을 하지만, 보다 경직되어 있고 몸의 방향도 다르다. 즉 좌협시상은 본존상을 향하여 몸을 틀고 있는 자세인데 비하여 우협시상은 바깥쪽으로 몸을돌려 반대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상 역시 머리에 투구를 착용한 듯 보이며, 몸에는 갑옷을 입고, 칼을 쥐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편에 앉아 있는 우 협시 신장상
마애삼존상(磨崖三尊像) 본존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불상, 피모지장보살상(被帽地藏菩薩像), 여신상(혹은 전통 신앙과 관련된 상)등 3가지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상은 지장보살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마모가 심하여 세부적인표현은 알 수 가 없다. 좌 우 협시상의 모습이 무장을 한 신장상이기 때문에, 매우 독특한 배치구조이다. 조성 시기는 8세기로 보고 있다.
특히 3가지 설 중 여신상은 신라 산신의 모습으로 ‘삼국유사’ 김유신 조에 나타나있다. 김유신(595~673)이 젊은 시절 고구려 간첩 배석에게 잡혀 위험에 빠지려는 찰나 삼산의 신이 모두 나타나 김유신을 구했으며, 그들의 모습은 젊은 여성이었다고 되어있다. 즉 신라의 산신은 왕이나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역할뿐 아니라 장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김유신을 구해주는 호국신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본존상의 머리를 살펴보면 앞머리와 양 어깨에 걸쳐진 수발(垂髮)에까지 두발 전체에 가는 선으로 머리카락을 표현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두건을 쓴 것이 아니라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상이다. 그러나 이중원광의 광배와 통견식으로 입고 있는 가사, 가부좌의 좌법 등에서 명확하게 불교에 귀의한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중생사 앞뜰에는 석재들이 한곳에 모여져 있는데, 석탑옥개석, 불상대좌 등 있다. 3단 팔각연화대좌는 상대석이 별석이고, 중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대좌의 전체높이는 약73㎝이다. 특히 8각의 중대석 각 면에는 특정 존상이 조각되어있는데, 표면의 마모가 심해 세부내용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현재 중생사 앞뜰에는 석재들이 한곳에 모여져 있는데, 석탑옥개석, 불상대좌 등 있다.3단 팔각연화대좌는 상대석이 별석이고, 중대석과 하대석은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다른 연화대좌는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앙련과 복련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복련은 8엽의 연꽃이 매우 볼륨감 있게 새겨져있으나, 앙련은 복련에 비하여 매우 약하게 표현되어있다. 앙련상면정중앙에는 직사각형의 홈이 확인되는데, 추측건대 불상을 결합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크기가 다른 옥개석4기 등이 남아있다.
서록사지(西麓寺址) 주변에서 출토 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은 높이는 약 200㎝로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며, 상체는 짧고 배가 다소 나와 있어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이 든다. 머리에는 2줄의 띠를 돌리고, 그 위에 화불을 중심으로 10개의 작은 얼굴을 일렬로 배치하였다.
10개의 작은 얼굴과 본래 얼굴을 합쳐서 11면이 된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방형을 띠고 있으며, 2줄의 띠 아래로 내려오는 보발은 볼륨감 있게 표현되었다. 코는 부분적으로 결실되었지만 비교적 작고 낮게 나타내었고, 눈은 둥글고 도톰하게 처리하였다. 입은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이다.
서록사지(西麓寺址) 주변에서 출토 된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보살상의 양어깨에는 천의를 덮고 있으며, 그 위에 3가닥의 보발이 흘러내린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서 정병을 쥐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어떤지 물을 들고 있는데 마모가 심해 잘 확인되지 않는다.
보살상에 착장된 장신구는 크게 목걸이와 영락장식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화려한편이다. 목걸이 장식은 2중으로 된 U자형 줄에 여러 개의 짧은 드림장식이 달려있고, 다시 중앙에는 삼지창모양의 수식을 좌우측에는 나뭇잎형태의 수식을 하나씩 더 달았다. 영락장식은 기본적으로 X자형과 U자형이 결합된 형태이다.
양어깨부근에서 내려온 영락이 배 부근에서 꽃문양 장식판을 통과하여 X자로 교차되게 내려오며, 무릎아래에서 새로운U자형영락이 두 개의 꽃문양 장식판을 통해 기존의 X형 영락과 결합된다.
낭산(狼山, 해발 100m)은 경주의 진산(鎭山)으로 신라 사람들은 ‘신들이 노니는 숲’이란 뜻의 신유림(神遊林)이라 부르며 신성시했고 왕실에서 신에게 제사 지냈던 곳이다. 낭(狼)은 이리 낭(狼)’字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랑(狼)’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년(413년)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잡지·제사’지에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산(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산(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을 ‘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나력산은 신라 6부의 하나인 습비부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는 “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년)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犬)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했다.
석장사지(錫杖寺址)는 경주 송화산(松花山, 일명 수도산) 삿갓봉 아래 해발 95∼100m 사이(석장동 산81-2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신라 선덕왕 때 조각승 양지(良志) 스님이 주석(駐錫) 하였던 절이다. 경주 도심에서 형산강 서쪽 편에 자리 잡은 송화산(松花山)은 삿갓봉(234.7m)과 옥녀봉(275.6m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흔히들 수도산이라 부르고 있다.
절터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북향은 산죽(山竹)이 빙 둘러싸고 있고 서편에는 폭 5m 정도의 계곡이 있다. 근처 주민들은 이곳을 ‘절골’이라 부른다.
석장사지(錫杖寺址)에서 출토 된 유물 중 석장(錫杖)이라는 묵서가 쓰인 백자대접이 출토되어 석장사지(錫杖寺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신라 인화문토기부터 조선전기 분청사기와 조선후기 백자 등이 출토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양지(良志) 스님은 기예(技藝)에 통달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기간 : 780년 4월 ~ 785년 정월)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냈고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란 무엇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공장(工匠)을 의미하며, 석장(錫杖)은 머리에 여섯 개의 방울이 달려 흔들면 소리가 나는 지팡이로 스님이 탁발할 때 인기척을 내거나, 길을 다니면서 짐승을 쫓을 때 사용했을 것이다.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안치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절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암자와 같은 작은 절로 추정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양지스님이 주석하였던 7세기 후 반경에는 석장사내에 전탑으로 만들어진 삼천불탑이 존재 했을 정도면 고려, 조선시대보다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석장사지는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증축되는 과정에서 유구가 훼손되고, 이전시기의 건축부재와 석물들이 재사용되어 창건 때의 절의 전체적인 윤곽은 알 수가 없다.
석장사지에 대한 최초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경주고적보존회의 오사카 긴타로가 하였다. 당시 도굴이 성행하였고 대부분의 유구가 교란 된 상태였다. 절터는 소나무 숲에 묘지가 있었고 초석과 와편 등이 확인되었고. 절터 주변의 일부 가옥에서 사용되고 있는 원형주좌초석이 석장사지에서 옮겨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석장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86년과1992년에 2차에 걸쳐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며, 다수의 기와 편과 탑상문전(塔像紋塼), 소조상편, 소형금동불 등 다양한 불교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200여점의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두 분의 부처님과 그 사이에 탑을 표현하였는데 삼천불탑 조영 시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크기와 문양에 따라 6∼7개의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종류별 크기가 다른 이유는 전탑조성 시 각 위치에 따라 전돌의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났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탑상문전은 경주 삼랑사지와 울산 능소사지, 울주 불영사, 청도 운문사 등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들 사지에도 석장사지와 유사한 전탑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탑상(塔像) 전면(塼面)에 연기법송(緣起法頌) 20자가 새겨져 있는데 크기는 높이 8cm, 폭 6.5cm, 두께 2cm로 글자크기는 약 0.5cm이다. 연대는 7~8세기 경으로 양지스님의 글씨로 추정된다. 내용은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남을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셨노라. 저 법은 인연을 다한다는 것 이것이 대사문의 설법일세(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盡」 是大沙門說」』
석장사지(錫杖寺址) 초입에서 만나는 나무다리 2곳
소조상은 20여점이 출토되었는데,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 등의 신장상편과 보살상편으로 추정되면 소조상편들은 모두 뒷면이 편평한 부조상이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석장사 삼천불탑의 벽면에 부착했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명문전이10여점 출토되었는데, ‘西北’, ‘三’, ‘下層南’ 등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탑축조 시 벽돌의 위치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해(意解) 양지사석(良志使錫) 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왼쪽이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다.
석장사지(錫杖寺址)를 찾아가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으나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과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 가장 쉽게 찾아 갈수 있는 길이다.
휴앤락 오토캠핑장 입구휴앤락 오토캠핑장 내에서 석장사지로 가는 길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과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 합류헤서 올라가는 길능선에서 만나는 길에서 아래로 내려간다.멀리서 보이는 석장사지
경주시 내에 있는 고분은 경주노동동고분군, 경주노서동고분군, 경주황남동고분군, 경주황오동고분군, 경주인왕동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 대릉원(大陵苑)으로 통합되었다. 대릉원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서 따온 것이다.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역과 그렇지 않는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황리단길에 가까이 있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많이 방문한다. 여기에는 천마총을 비롯하여 황남대총, 검총 등 발굴 된 고분과 미 발굴된 미추왕릉 등 많은 고분들이 있다.
여기에 분포하는 대형 고분들 사이사이 또는 주변에 원래 봉분이 없거나 너무 작아 멸실된 소형 분들이 수도 없이 분포하고 있다. 남아 있는 고분들은 대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 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되고, 봉분의 형태는 대부분 단일원분(單一圓墳)이나 표형분(瓢形墳)도 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표형분(瓢形墳)인 90호분
조사된 소형의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積石木槨墳) 이었으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 竪穴式石槨墓)와 독널무덤(옹관묘 : 甕棺墓)도 혼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 가운데 109호분과 110호분 일제강점기 때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조사 당시 110호분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가진 한사람무덤(單葬墳)이었고 109호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시차를 두고 축조된 여러 개의 무덤으로 구성된 여러 사람무덤(多葬墳)이었다. 109호의 무덤 가운데 가장 일찍 축조된 제3·4곽(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은 현재까지 알려진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마총(天馬塚, 155호분)
1973년에 조사된 천마총은 직경 47m, 높이 12.7m 표형분(瓢形墳)의 부부묘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발굴 당시 천마총은 옆에 민가가 있었고 봉분 일부가 파손되어 있었다. 73년 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에 걸쳐 연인원 30,000여명이 발굴에 참여하였고 출토 유물 중 천마도(天馬圖)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명명되었다.
천마총을 발굴 조사하게 된 이유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 큰 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기 전 예비지식을 얻기 위해 실시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발굴 조사 후 내부를 공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천마총은 직경 47m, 높이 12.7m 표형분(瓢形墳)의 부부묘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4월 6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발굴 초기 경주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시민들은 왕릉급의 고분을 파헤쳐 가뭄이 든다는 등 민심이 흉흉하였다. 작업 인부들 사이에서도 무덤을 판다는 외경감이 팽배해 있어 발굴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73년 7월 26일 오후, 무더운 여름에 고분 아래로 파던 중 흙더미 속에서 눈부신 순금제 신라금관이 나왔다. 이때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와서 일순간 하늘이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작업자와 조사원들이 놀라서 잠시 작업이 중지되었다. 이로 인해 가뭄은 해소되었다.
천마총 내부에서는 금관·관장식·관모(冠帽) 등의 장신구류, 금동말안장과 백화수피제천마도장니(白樺樹被製天馬圖帳尼) 등 각종의 마구류, 금동·은·청동제의 용기류, 유리용기, 각종 철기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백화수피제장니(白樺樹被製帳尼)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명명되었고, 고분은 복원되어 내부시설이 공개되었다.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천마총 유리잔(보물 620호)
출토된 유물들을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과 유물 비교 검토를 통해 천마총 조성연대를 파악하니 560년에서 54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이시기에 사망한 임금은 살펴보면 458년 19대 눌지왕, 479년 20대 자비왕, 500년 21대 소지왕, 514년 22대 지증왕, 그리고 540년 23대 법흥왕 등 5명이다.
이중 법흥왕의 장지는 애공사 북쪽 봉우리로 제외가 된다.
이에 학계에서는 천마총의 피장자는 지증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왕이 숨진 해와 달이 기록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당시 1개월간의 해돋이 각도를 컴퓨터로 추적해 분석한 결과, 479년에 타계한 20대 자비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마총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99호분천마총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99호분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지름 80m, 높이 23m의 신라 최대(最大) 표형분(瓢形墳)으로 1970년대 경주관광10개년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73년 7월에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1975년 10월에 완료하였는데 발굴에 동원 된 인원은 3만 3천여 명이였다. 기간은 2년 4개월이 소요되었으며 국내 고분 발굴조사 중 가장 길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지름 80m, 높이 23m의 신라 최대(最大) 표형분(瓢形墳)
경주관광10개년개발계획은 1971년 대통령의 명에 의해 경주시를 국제문화 관광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수립 된 개발계획이다. 7년 동안의 공사를 통해 1979년 4월6일 보문관광단지가 개장 된 것도 대표적인 개발사례다.
유물이 무려 7만여 점으로 금관, 금동관, 봉수형 유리병, 비단벌레 장식 마구 등 출토 되었는데 봉수형 유리병은 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유리병으로 머리 부분이 봉항의 머리 같다고 해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으로 부르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 된 것으로 손잡이에 금실을 감고 있어 유리병을 금보다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비단벌레 장식 마구는 말안장 부속품으로 백화나무의 흰 껍질을 깔고 그 위에 비단벌레 날개 천개를 장식하였는데 무지개 빛처럼 영롱하다. 그리고 테두리는 금동제 관으로 마감처리 했다.
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국보 193호)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금제 관식(보물 630호)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으로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 17대 내물왕 부부로 추정하고 있다. 즉 남분(南墳)은 내물왕, 북분(北墳)은 내물왕의 부인인 보반(保反)인 것이다. 능을 조성할 때 먼저 남분(南墳)을 만들고 나중에 그 고분의 일부를 파내고 북분(北墳)을 연결하였다. 즉 왕이 왕비보다 먼저 사망한 것이다.
내물왕은 재위 46년간(356년~402년) 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었고 김씨(金氏) 왕족 시대를 열었다.
남분(南墳)에서는 환두대도, 금동관, 은제 잔, 상감 팔찌, 유리제품, 갑옷 등 유물이 출토되었고 60세 전, 후의 남자 머리뼈와 이빨이 나왔어 피장자는 남자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곽에서 순장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키는 148cm, 15세 전후의 소녀 뼈가 나왔고 말 순장도 발견되었다.
북분에(北墳)서는 금관, 반지, 부인대(夫人帶)라고 쓰인 허리띠 장식이 나왔으며 갑옷은 출토되지 않았고 피장자는 키 150m의 여자로 추정된다.
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금반지(보물 623호)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금제 고배(보물 626호)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은잔(보물 627호)
부장품과 적석목곽분의 형식을 보면 남분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북분은 5세기 전반 중엽 이전에 속한다. 이에 일부 학자는 피장자는 19대 눌지왕(재위 417년~ 458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 된 금관이 지금까지 신라의 금관 중 가장 아름답다. 금관이 나온 곳은 황남대총을 포함하여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이다. 금관의 장식은 출자(出字) 형 나무모양에 좌, 우에는 사슴뿔 모양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
검총(劍塚, 100호분)
검총(劍塚)은 대릉원 내의 미추왕릉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외형은 지름 44.5m, 높이 9.7m로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다. 1916년 발굴조사 당시 철검(鐵劍)이 출토되어 검총으로 명명되었으며, ‘황남동 제100호분’으로도 불리고 있다.
검총(劍塚)은 지름 44.5m, 높이 9.7m로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고분 중심부에 지반을 깊이 약 67㎝ 파고 여기에 냇돌을 1.2m 두께로 깔아 무덤의 상면(床面)으로 하고 껴묻거리〔副葬品〕와 피장자를 안치시켜서 무덤의 상면을 주위 지반보다 높게 설치하였다.
매장주체부는 냇돌로 쌓은 돌무지〔積石〕로 덮었고 돌무지의 높이는 약 3.7m, 남북 지름 약 14.5m이며, 중심부 표면에는 두께 약 15∼18㎝로 진흙〔粘土〕이 덮여 있었다. 그 위에 축조된 봉토는 흙과 자갈을 섞어 쌓았다. 봉토 가운데의 자갈층은 모두 고분 중심부 쪽으로 경사져 내려와 있었다.
검총(劍塚)은 1916년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關野貞〕등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신라고분들 중 가장 먼저 학술적 조사를 한 고분이다. 출토 된 유물로는 쇠투겁창(鐵矛) 2점, 숫돌(砥石)1점, 철검 2점, 쇠칼(鐵刀)1점,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 등과 후세에 매장된 토기류 몇 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철검은 다른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출토된 예가 전혀 없고, 고분기 이전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거대한 외형이나 내부 구조에 비해 출토 유물은 빈약하고 동일한 시기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섞여 있다. 가계를 중요시하였던 마립간시대 왕권의 성장을 배경으로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상 묘를 대형으로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추왕릉(味鄒王陵, 106호분)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은 대릉원(大陵園) 안에 있고 주변은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 12.4m, 직경 56.7m로 묘제는 인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이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이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으며 죽장릉 (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 미추왕의 사망 시기는 3세기인 284년으로 당시 묘제는 목곽묘로 대형의 고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조」에 의하면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장지는 능재흥륜사동(陵在興輪寺洞)인데 흥륜사(興輪寺)는 여기에서 서쪽 500m 지점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일원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내물왕의 왕비와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되어 있는데 17대 내물왕(~ 402년 2월)은 미추왕 사후 72년 만인 356년에 왕위에 올랐고, 실성왕(~ 417년 5월)은 118년 후인 402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는 후대 김씨 일족이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 사후 왕권이 김씨 일족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족보를 조작한 것이다.
36대 혜공왕 때, 미추왕을 김성시조(金姓始祖)로 추앙하기 위해 미추왕릉(味鄒王陵)을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五陵)보다 서열(序列)을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서동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및 대릉원에서 묻힌 선대 왕들의 능 위치는 실전했으나 의도적으로 미추왕릉으로 지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반월성에서 나와서 대릉원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능이 미추왕릉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다. 능 앞쪽에는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맑은 날이면 볼 수 있는 일본 섬으로 국내에서 가장 빨리, 쉽게 가는 해외 여행지이다. 특히 바다낚시로 유명하여 낚시꾼과 쇼핑관광을 즐기는 여행객이 당일 여행으로 많이 찾는다. 대마도의 면적은 제주도면적의 38%이고 길이는 거제도의 1.8배로 남북으로는 82km, 동서로는 18km이다. 기후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시차는 동일하다.
대마도는 히타카쓰항이 있는 상대마도와 아즈하라항이 있는 하대마도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 사이는 민관교라는 다리로 연결되어있다. 대마도는 원래는 하나의 섬인데 1900년에 서쪽 아소만에 있던 군함을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동쪽의 미우라만을 연결하게 위해 운하를 만들어서 두 개의 섬이 되었다.
대마도로 가는 교통편은 배로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출항하여 상대마도의 히타카스항에 도착하는 배편과 하대마도의 이즈하라항에 도착하는 배편이 있다. 주로 당일 여행하는 여행객은 좀 더 빨리 도착하는 히타카스항 행 배편을 이용하는데 소요시간은 1시간 10분에서 30분이다. 하대마도의 이즈하라항에 도착하는데 소요시간은 약 1시간 50분이다.
부산 동구 부산역에 인접해 있는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바라 본 부산항대교히타카스항으로 출항하는 팬스타 쓰시마 링크호
대마도 입국 준비로는 여권과 승선권을 지참해야 하고 입국 신고서와 세관 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출국세로 현금 1,000엔을 준비해야 한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출항하여 히타카스항 국제터미널에 도착하면 입국심사를 받는데 지문인식과 얼굴전면촬영을 하면 심사가 마친다.
상대마도의 히타카스항 국제터미널
처음 대마도를 당일 여행하는 경우는 주로 패키지로 간다. 그러면 2곳 정도 간단한 구경을 하고 히타카스항 주변에서 점심을 하고 쇼핑으로 끝난다. 쇼핑 장소로는 슈퍼 밸류와 게이트웨이 면세점이 있는데 슈퍼 밸류에는 Drug Store가 있어 약품구매도 가능하다. 또한 슈퍼 밸류 앞에는 의자, 탁자와 파라솔이 있어 캔 맥주와 안주를 구매해서 먹기에 좋다. 히타카스항 국제터미널 안에는 면세점이 없으므로 밖에 있는 게이트웨이 면세점을 이용해야 한다.
상대마도의 히타카스항
미우다 해수욕장
대마도 북쪽에 있는 미우다 해수욕장은 우리나라 여행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히타카쓰항 국제터미널에서 도보로는 3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1996년 일본의 물가 백선에 뽑힌 해수욕장으로 에메랄드빛 바다와 고운 모래사장이 인기가 높다. 주변에는 샤워실, 화장실 및 정자 등이 설치돼 있으며 캠핑도 가능하고 매년 7월 20일부터 8월 31일 정도에 해수욕이 가능하다. 개장기간 제외하고는 수영은 금지다.
미우다 해수욕장 입구미우다 해수욕장 안내석오른쪽에는 화장실, 샤워실, 캠핑장소가 있다.일본인들의 신앙미우다 해수욕장 후문미우다 해수욕장에 위치하고 있는 토요코인우동과 초밥으로 곁들인 점심
슈시 단풍길
슈시 단풍길은 약 7km의 구간으로 대마도 39번 국도를 따라 흐르는 슈시강 주변에 있는 길로 슈시삼림공원 內에 있다. 단풍이 드는 가을은 단풍물결로 유명하며 삼림이 울창하여 삼림욕과 힐링하기에도 좋다. 그렇지만 울창한 삼림으로 로밍이 터지지 않는다. 히타카스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로 이동하면 19분이면 도착한다.
슈시 단풍길히타카스항 게이트웨이 면세점슈퍼 밸류에서 구매한 컵라면으로 우동맛이 난다.마일드한 맛이 나는 드립커피동전파스로 불리는 로이히쓰보코와 소화제인 캬베진슈퍼 밸류에서 구매한 캔맥주와 안주류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은 대릉원(大陵園) 안에 있고 주변은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 12.4m, 직경 56.7m로 묘제는 인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이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이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으며 죽장릉 (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 미추왕의 사망 시기는 3세기인 284년으로 당시 묘제는 목곽묘로 대형의 고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조」에 의하면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장지는 능재흥륜사동(陵在興輪寺洞)인데 흥륜사(興輪寺)는 여기에서 서쪽 500m 지점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일원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내물왕의 왕비와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되어 있는데 17대 내물왕(~ 402년 2월)은 미추왕 사후 72년 만인 356년에 왕위에 올랐고, 실성왕(~ 417년 5월)은 118년 후인 402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는 후대 김씨 일족이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 사후 왕권이 김씨 일족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족보를 조작한 것이다.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삼문
36대 혜공왕 때, 미추왕을 김성시조(金姓始祖)로 추앙하기 위해 미추왕릉(味鄒王陵)을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五陵)보다 서열(序列)을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서동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및 대릉원에서 묻힌 선대 왕들의 능 위치는 실전했으나 의도적으로 미추왕릉을 지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반월성에서 나와서 대릉원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능이 미추왕릉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다. 능 앞쪽에는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다.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 재위 기간 262년 12월 ~ 284년 10월, 22년 10개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미조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는데 성은 김씨이고 어머니는 박씨이며 갈문왕 이칠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이고 11대 조분왕의 딸이다. 미추의 조상 알지(閼智)가 계림에서 태어나자 탈해왕이 데려와 궁중에서 길렀고, 뒤에 대보로 임명하였다. 알지(閼智)가 세한(勢漢, 熱漢)을 낳고, 세한(勢漢)이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阿道)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首留)가 욱보(郁甫)를 낳고, 욱보(郁甫)가 구도(仇道)를 낳았으니, 구도(仇道)가 곧 미추의 아버지이다. 즉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미추왕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으로 되어있다. 단지 삼국유사에서는 김알지의 아들 이름이 열한(熱漢)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세(勢)자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열(熱)자로 잘못 쓴 결과이다.
미추의 아버지인 구도(仇道)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로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왕비는 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이 아들이 없어 그녀의 남편인 미추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 백성들이 미추를 왕으로 추대했고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이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정변으로 왕이 된 경우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261년 12월 28일 첨해왕(沾解王)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이는 첨해왕(沾解王)과, 왕비 및 가족이 살해된 것이다. 미추는 김씨 성을 가진 귀족이지 왕족은 아니고 11대 조분왕의 둘째 사위이다. 첨해왕(沾解王)이 아들이 없으면 그의 사위 중 누군가가 왕이 되는 것이 정상이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왕의 사망일은 연도와 해당 월만 기록하지 일자를 기록하지 않는다.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은 백제와의 싸움에 일생을 바쳤고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였다. 재위 23년만인 284년에 죽으니 대릉(大陵)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유사에는 능의 위치가 흥륜사(興輪寺) 동쪽으로 되어 있다. 그의 능을 죽장릉(竹長陵), 죽현릉(竹現陵) 불리게 된 배경은 삼국유사 기이(紀異)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편에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미추왕(未鄒王)과 죽엽군(竹葉軍) 「제13대 미추니질금(未鄒尼叱今;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 함)은 김알지(金閼智)의 7대 손(七代 孫)이다. 대대로 현달(顯達)하고, 또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첨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어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지금 세상에서 미추왕(未鄒王)의 능(陵)을 시조당(始祖堂)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대개 김씨(金氏)로서 처음 왕위(王位)에 오른 때문이며, 후대(後代)의 모든 김씨 왕(金氏 王)들이 미추(未鄒)를 시조(始祖)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 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죽었으며 능(陵)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14대 유리왕(儒理(禮)王)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공격해 왔다. 신라에서도 크게 군사를 동원했으나 오랫동안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이상한 군사가 와서 신라군을 도왔는데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들은 신라 군사와 힘을 합해서 적을 격파했다. 그러나 적군이 물러간 뒤에는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댓잎만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제야 선왕(先王)이 음(陰)으로 도와 나라에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 능을 죽현능(竹現陵)이라고 불렀다.
대릉원 내에 있는 검총으로 유일하게 무덤 옆에 대나무가 있다.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나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將軍)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武器)를 든 40명 가량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간다.
이윽고 능 속에서 무엇인가 진동(振動)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 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臣)은 평생 동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三國)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나의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한다. 왕은 대답한다.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공(公)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는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이내 대신(大臣)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서 김유신공(金庾信公)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金公)을 위해서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서 공(公)의 명복(冥福)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平壤)을 토벌(討伐)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웠던 절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魂靈)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 : 내림(奈臨),골화(骨火),혈례(穴禮))과 함께 제사 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序列)을 오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고 한다.」 삼국사기 新羅本紀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의 주요 일대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즉위 원년 3월, 대궐 동쪽 못에 용이 나타났다. 7월, 금성 서문에 불이 났고, 인가 삼백여 호가 연이어 불탔다. 2년 정월,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다.
3년 2월, 왕이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황산에 행차하여 노인 및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5년 가을 8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출격하였다. 적들은 패주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놓고 왕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으며, 또한 사신 다섯 명을 파견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11년 2월,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15년 2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고 여겨 이에 따르지 않았다.
17년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파진찬 정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19년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였다. 20년 정월, 홍권을 이찬, 양질을 일길찬, 광겸을 사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9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22년 9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고, 10월에는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일길찬 양질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23년 2월, 왕이 서쪽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문하였다.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대릉(大陵, 죽장릉[竹長陵])에 장사지냈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반월성 북편에 분포하는 고분군 가운데 서북편 말단부에 있는 고분군이다. 서쪽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群)과 구분되고 남쪽의 도로에 의해 황남동고분군(皇南洞 古墳群), 황오동고분군(皇吾洞 古墳群)과 구분된다.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은 봉황대(鳳凰臺, 125호), 식리총(飾履塚, 126호), 금령총(金鈴塚, 127호),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등4기로 구성되어 있고 현재 고분 1기와 고분 터 2기를 볼 수가 있다. 봉황대 고분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식리총과 금령총, 옥포총은 1924년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하였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 125호분) 봉황알을 닮은 전망대라는 뜻의 봉황대(鳳凰臺)는 과거 경주를 유람하는 문사나 일본을 오가는 사절단이 경주 시내를 조망하는 전망대였다. 발굴이 되지 않았고 봉토의 정상부에 함몰 현상이 있어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된다. 봉황대(鳳凰臺)가 왕릉급 무덤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고고학적 안목 때문이다. 그의 완당전집에 「…봉황대 동서편에 인공산이 많다…몇 해 전 무너진 인공산에서 깊이가 한 길 남짓 되는 검푸른 빛의 공동(구멍)이 보였다.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인공산’이 옛날의 왕릉이라는 증거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이다.
추사 김정희는 “봉황대 주변의 인공산이 무너져 그 속에서 구멍이 뚫렸는데,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었다. 신라 왕릉임이 분명하다.” 고 전했다.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은 원분(圓墳)으로 가장 큰 고분으로 높이 22m, 지름 82m으로 이보다 큰 고분은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이나 이것은 표형분(瓢形墳)으로 2개의 무덤이 합쳐진 것이다. 봉황대 고분은 어느 왕의 능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앞에 있는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그리고 옆에 나란히 있는 금관총(金冠塚)의 조사결과와 관련해 보면 500년 무렵의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소지왕 또는 자비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식리총과 금령총은 5세기 말∼ 6세기 초로 편년 되고, 노동동 고분군의 서편에 인접한 금관총 역시 5세기 말로 편년 되어 봉황대 고분도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경주에는 예부터 ‘봉황 알’ 전설이 구전되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풍수가가 고려 태조(918~943)에게 “배 모양으로 생긴 경주는 언젠가 좋은 바람을 타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침몰시켜야 한다.” 고 풍수적으로 신라 공략을 조언하였다. 그리고 그 풍수가는 신라 임금을 찾아가 세치혀를 놀렸다. “봉황의 둥우리처럼 생긴 서라벌(경주)은 천년동안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젠 봉황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합니다. 서라벌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 두면 다른 곳으로 떠나지 못할 겁니다.” 풍수가의 말에 혹한 신라 왕은 서라벌 한 복판에 둥글둥글 흙을 쌓아 산더미 같은 알을 수없이 만들었다. 그런 뒤 미추왕릉 부근의 숲속에 우물을 파놓고 고려로 도망갔다. 짐을 잔뜩 실은 배의 밑바닥을 뚫어 놓은 격이었다. 이 때문에 ‘신라’라는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실제로 경주 지형은 형산강(서천)과 북천(알천), 남천으로 둘러싸인 분지(선상지, 삼각주) 지형이다. 봉황대 고분에는 성덕대왕 신종(봉덕사종)과 종각 터가 있었는데 원래 봉덕사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이 북천의 홍수로 인해 폐사되어 영묘사로 옮겨졌고 영묘사가 화재로 폐사된 뒤 이곳 봉황대 고분으로 옮겨졌다. 이후 1915년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1915년 봉황대 고분에서 구 경주박물관(현 경주문화원)으로 옮기는 모습
금령총(金鈴塚, 127호분) 금령총(金鈴塚)은 두 번째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금관총 발굴 3년 후인 1924년 조선총독부주관으로 노동리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택해 발굴조사를 했다. 봉분은 원형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직경 18m, 높이 약 4.5m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금령총(金鈴塚)은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는 자갈과 갈색 점토로 쌓았고 지표 아래 3m에 지하식의 하나로 된 덧널(목곽, 4.8×3.5×1.5m)이 동, 서를 장축으로 하여,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깐 다음 설치되었고, 덧널 내부의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는 내면을 투조금동판(透彫金銅板)으로 장식한 나무널(목관, 1.5×0.5m)이 들어 있었다. 1924년 발굴조사 결과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크기가 작아서 키 90cm 정도의 6세 이하 왕자 무덤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금관이 금방울 한 쌍이 장식되어「금방울이 금관에 장식되어 출토되었다」는 뜻에서「금령총(金鈴塚)」이라 했다.
발굴을 주관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였고 발굴 결과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해 신라 시대 생활을 알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출토된 중요유물을 보면 금제 허리띠金製튎帶) 및 장식품, 백화수피로 만든 관모, 금구슬,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금제 가락지, 금동제 신발, 큰칼(大刀), 마구류(馬具類) 등 다수가 있는데 특히 다리 달린 배 모양 토기와 신라 토기로서 최초로 국보가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제91호) 2점이 출토되었다.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은 6세 이하 신라 왕자로 벽화의 아들 또는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금령총 재발굴에서는 봉황대와 금령총 사이에서 금령총보다 먼저 두 기의 고분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발굴단은 두 고분에 127-1호, 127-2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령총의 조성연대를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말~ 6세기 초로 추정하고 금령총에 묻힌 주인공이 6세 이하의 신라 왕자는 과연 누구일까?. <삼국사기> 500년(소지왕 22년) 9월 기록을 보면 왕자를 추정할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을 9월, 왕이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 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경북 안동)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대목에서 학계는 두 달 뒤인 500년 11월 “소지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64살의 지증왕이 그 뒤를 이었다”고 했다는 기록은 500년 9 ~ 11월의 기록이 아니고 3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압축·정리한 기록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지증왕은 5~6살 이전에 죽은선왕(소지왕)의 유복자를 위해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금령총은 벽화의 아들 무덤이 되고, 봉황대는 소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 학계에서는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금령총 주인공이 벽화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눌지왕 이후 김씨 중에서도 눌지의 직계에서 족내혼, 근친혼을 거듭했기 때문에 지방(경북 영주) 출신의 벽화 소녀를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눌지, 자비, 소지로 이어지는 눌지의 직계는 아니고 소지왕과는 6촌(삼국사기), 또는 5촌(삼국유사) 사이가 된다. 계미년(503년 추정) 9월 건립된 포항 냉수리비에는 지증왕을 ‘지도로 갈문왕(왕의 근친에게 주는 봉작)’으로 지칭했다. <삼국사기> 기록(500년 11월 즉위)과는 3년의 시차가 있다. 이는 지증왕이 정변으로 죽은 소지왕의 뒤를 곧바로 잇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증왕은 최소한 3년 이상 ‘섭정’한 뒤에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즉 지증왕이 3년이나 즉위하지 못했을 정도로 왕위를 두고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지증왕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서 왕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황대와 같은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을 마립간 시대(356~503)의 능으로 보고 내물마립간(356~402), 실성마립간(420~417), 눌지마립간(417~458), 자비마립간(458~479), 소지마립간(479~500) 그리고 재위 도중 칭호를 ‘왕’으로 바꾼 지증왕(500~514) 등 6명의 왕릉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그 북쪽에 차례로 조성된 봉황대 고분(125호분),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134호분(표형분 : 瓢形墳)의 주인공도 추정할 수 있다. 현재 황남대총의 주인공을 두고 내물왕이 주류를 이루고, 그 뒤를 눌지왕과 실성왕이 따르고 있다.
노동동 고분군에서 본 황남대총
황남대총의 피장자가 눌지왕이라고 전제로 하면 봉황대 고분은 자비왕이고, 서봉황대 고분(130호분)은 소지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은 모두 자비왕과 관련된 인물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자비왕의 맏아들이 소지왕’이라 했고, <삼국유사>는 ‘자비왕의 셋째아들이 소지왕’이라 했다. 둘 다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첫째와 둘째 아들이 일찍 죽어 셋째가 ‘맏아들’의 지위에서 왕위를 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금관총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 고리 자루 큰칼 3자루가 출토된 고분으로 규모는 황남대총보다는 작지만, 유물의 위상은 최상급이다. 그래서 금령총 주인공은 소지왕의 동생이자 금관총의 주인공인 ‘이사지왕’의 어린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즉 소지왕이 죽었을 때 자비왕의 손자이자 이사지왕(소지왕의 동생, 금관총 주인공)의 어린 아들이 유일한 왕위 계승자인데 요절하자 지증왕이 금령총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최근 금령총에서 최소 8명의 순장자가 보인다는 견해가 있어 <삼국사기>에 따르면 순장 제도는 502년(지증왕 3) 2월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금령총은 502년 2월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식리총(飾履塚, 126호분) 식리총(飾履塚)은 조선총독부주관으로 금관총을 발굴조사 후 3년 뒤 1924년에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일본인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참여했다. 발굴 당시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직경 30m, 높이 약 6m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밝혀졌다. 현재 봉황대 고분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봉토분의 지표 2.7m 아래에 지하식으로 하나의 덧널(木槨, 5.25×3.3×1.2m)을 동,서 장축으로 하였고 무덤 구덩이 바닥에 45㎝ 두께로 냇돌과 자갈을 깔고 설치한 외 덧널식(單槨式)이며, 덧널의 내부 서쪽 내면에 붉은 칠을 하고 금박(金箔)으로 장식한 나무널(木棺, 2.2×0.78m)을 설치하였다. 널 동쪽에는 각종 껴묻거리(부장품)가 배치되어 있었다. 덧널과 구덩이 벽 사이, 그리고 덧널의 위에는 냇돌로 돌무지를 쌓았고 돌무지 위에는 봉토를 씌웠다. 널이 놓여 있던 곳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사용하였던 유물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널 서쪽 끝부분에서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이 발견되어 식리총(飾履塚)으로 명명되었다. 이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은 거북 등 모양(龜甲形) 윤곽 안에 각종 괴수(怪獸)의 타출 무늬(打出文)가 새겨져 있어 서역(西域) 미술과 관련이 깊다.
식리총(飾履塚)은 현재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남아 있다.
널 동쪽의 껴묻거리 구역에서는 금동제 신발(金銅製 飾履), 백화수피모(白樺樹皮帽),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동장안교(金銅張鞍橋)를 비롯한 각종 마구(馬具) · 청동합(靑銅盒) · 자루솥(鐎斗)을 비롯해 금속용기와 칠기 · 토기 · 금은장쌍룡고리자루큰칼(金銀裝雙龍環頭大刀) 등의 무기가 출토되었다. 청동합은 뚜껑 손잡이가 새 모양으로 된 특징을 보이고, 자루 솥은 중국 동진(東晋)에서 유행한 형식이다. 고분의 규모와 출토된 금동제 유물로 보아 왕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왕족이거나 최고의 귀족 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피장자는 널 안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로 보아 남자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서는 비교적 늦은 5세기 말경이나 6세기 초엽으로 편년 된다.
식리총(飾履塚)과 금령총(金鈴塚)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봉황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옥포총(玉圃塚, 142호분) 옥포총(玉圃塚)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4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발굴 조사하였다. 가옥 소유지의 이름 박옥포(朴玉圃)에 의해 옥포총(玉圃塚)으로 명명되었다.
옥포총(玉圃塚)이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봉분은 확인되지 않지만 약 1m 두께의 남북 너비 8m 정도의 적석 상부에 1m 정도의 점토를 덮었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장축 방향이 동-서향 장방형의 목곽형태로 내, 외 2중곽이며 외곽은 길이 485㎝, 너비 240㎝, 내곽은 길이 386㎝, 너비 180㎝이며, 높이 127㎝이다. 목관은 흑칠이 되었으며 크기는 알 수 없다. 묘광은 바닥을 2단으로 파냈고 하단 묘광은 추정 길이 600㎝, 너비 약 600㎝에 상단 묘광은 길이 약 730~740㎝, 너비 약 600㎝, 깊이 187㎝이다.
옥포총(玉圃塚)에서는 금은제 장신구와 백화수피제 관모, 삼루환두대도, 은제 굉갑(肱甲), 마구, 삼환령 등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및 구조 등을 통해서 볼 때 고분군 축조 시기는 5세기 말~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주사암(朱砂庵)은 경주시 서면 부산(富山) 정상 바로 아래 있는 암자로 주사사(朱砂寺)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은 바위로 되어있고 그 모습이 장수의 투구 형태다. 그리고 주사암(朱砂庵)은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다. 즉 ㄷ 자 바위가 주사암(朱砂庵)을 둘러싸고 있으며 대웅전 옆의 주사암(朱砂庵)이 투구의 중앙에 있다.
이러한 형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기운이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하여 명당 터 중에 하나다. 그리고 절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창건 시기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주암사(朱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설화에 의해서 절 이름이 주사암(朱砂庵)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富山)은 주사산(朱沙山, 朱砂山), 오봉산(五峰山), 오로봉산, 닭벼슬산 등으로 불리고 있다. 동경잡기의 기록에 의하면 품상촌(品上村)의 주산으로 그 산 위에 옛터가 있는데 속칭 장자(長者)의 터라 하였다. 또 용정(湧井)이 있으며 산허리에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10여 명을 수용한 수가 있다고 한다. 현재는 오봉산(五峰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시대의 한 도인(道人)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고 하였는데,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갑사(甲士)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러서 보니, 단사(丹砂)의 붉은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고, 늙은 승려가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괴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천 명을 보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번 주문(呪文)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 안에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후로 절 이름을 주사암(朱砂庵)이라고 한다.」
투구바위 뒷편에 있는 주사굴
또 다른 전설은 신라 문무왕 때 부산성富山城)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사암을 불사처(不死處)라 부르고 있다.
주사암(朱砂庵)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남아 있는 전각과 불상을 볼 때 조선 시대 후기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전각 및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 삼성각 · 종각 · 요사 등이 있고, 국가유산으로는 2007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경주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대웅전주사암(朱砂庵)이자 영산전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朱砂庵 靈山殿 石造三尊佛坐像)은 영조 1년(1725)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영산전 내에 도금 상태로 봉안되어 있다. 좌우로 협시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우협시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쓴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삼성각
주사암(朱砂庵) 마당에서 앞의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 오른쪽으로 200m 정도 가면 평평하고 장엄한 바위를 만난다. 넓이는 100여평 규모로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이 바위를 마당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또는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
김극기(金克己)의 시서(詩序)에 주암사(朱巖寺) 지맥석(持麥石)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지산(下枝山)은 세속에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산의 남쪽에 주암사란 절이 있고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는데 깍아 지른 듯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과 먼바다를 바라봄에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삼라만상을 내려보는 것 같다. 대석(臺石)의 서쪽에 지맥석(持麥石)이 있는데 사방이 깍아지른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듯 하지만 그 위에는 평탄하여 사람 1백명이 앉을 수 있다.
옛날 대서발(大舒發) 김유신(金庾信) 공이 여기에 보리를 가져와 술 재료를 공급하여 군리들을 대접하던 곳으로, 지금도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 9 보쯤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에서 본 풍광
마당바위는 CF, Drama 등 촬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부산성(富山城)은 『삼국사기』에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으로 성벽의 둘레가 9.7km이다. 『삼국유사』에도 부산성(富山城)을 쌓은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성 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당나라가 신라의 수도까지 침범할 경우 명활산성, 남산 성, 선도 산성 등과 함께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한 산성이었다. 그 이후에는 경주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 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주사암 주차장에서 20m 정도 올라가면 부산의 정상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산석성(夫山石城)으로 나오며, “둘레가 2,765보 3척이며, 안에는 시내가 넷, 연못이 하나, 우물과 샘이 아홉이 있으며, 또한 군창(軍倉)이 있는데, 영천과 영일의 군창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중요한 산성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성(富山城)으로 나오며, 이미 반이나 무너졌다는 내용이 있어 잘 관리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 터와 군의 창고 터,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 터, 우물 터, 못, 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 터 등이 남아 있다.
주사암에서 보살피고 있는 고양이세월의 흔적
여근곡(女根谷)은 부산 기슭의 골짜기로 여자의 성기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636년(선덕여왕 5) 두꺼비가 옥문지에 많이 모여 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이 서쪽변경의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에 백제 병사가 숨어 있다고 보아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근곡(女根谷) 옥문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機三事)에도 옥문곡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는데 두꺼비가 개구리로, 옥문지가 여근곡으로 바뀌어있고, 그 위치도 변경이 아니라 교외인 건천읍 신평리에 있는 부산 아래라고 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근곡이 부 중심지의 서쪽 41리에 있다고 하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덧붙였으며, 이후 조선 시대 거의 모든 경주부의 지리지에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