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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6대 진평왕릉(眞平王陵)은 낭산의 동쪽이자 명활성 남서쪽 구릉성 대지인 경주시 보문동 608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봉분 높이 8.4m, 봉분 지름 40m로 묘제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 굴식돌방무덤)로 추정된다()의 호석(둘레돌)은 검은색을 띤 괴석과 화강암을 혼용하여 능을 둘렀는데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능 앞에는 최근에 조선 왕릉의 혼유석을 모방한 상석과 의자형 혼유석이 설치되어있다.

조선 영조 6년 김씨 일족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평왕(眞平王) 장지로 기록된 한지(漢只)와 조선시대 낭산 북동 주변 들판의 당시 지명이 한지원(閑地原)으로 발음이 같아서 이 봉분을 진평왕릉(眞平王陵)으로 비정하였다.

신라  26 대 진평왕릉 ( 眞平王陵 )

한지원(閑地原)은 경작을 하지 않는 땅이라는 뜻으로 고려 현종 3(1012)에 경주읍성을 쌓은 직후 북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분황사로부터 명활산성까지의 구간에 제방을 쌓고 오리수(五里藪)를 조성함으로써 생긴 지명이다그리고 이로 인해 남쪽 보문 들판과 구황동 일대가 북천으로부터 농수를 구하기 어려워서 한지원(閑地原)이라고 불렀다.

한지(漢只)는 신라 6촌 중 금산가리촌이 한기부(漢祇部) 또는 한지벌부(漢只伐部)로 발전하였으며 촌장은 지타로 명활산을 통해서 강림했다. 중심지인 금산은 소금강산 중턱에 있는 백률사 북쪽 산으로 현재  동천동 일부, 황성동, 용강동, 천북면 등 행정구역이다.

그래서 진평왕릉(眞平王陵) 위치는 분황사와 명활산 기슭 사이일 것으로 추정되며 진평왕릉(眞平王陵)은 선덕왕릉 이전에 조성한 것으로 호석에 사용된 돌은 가공하지 않은 괴석이고 받침석은 없어야 하며 이를 충족하는 것이 동천동 북천변의 41대 헌덕왕릉이다.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능 앞에는 최근에 조선 왕릉의 혼유석을 모방한 상석과 의자형 혼유석이 설치되어있다.

신라 26진평왕(眞平王 : 재위기간 5797~632년 정월, 526개월)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24대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로 작은 아버지인 25대 진지왕(眞智王)화백회의에서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갈문왕 입종(葛文王 立宗)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金氏) 마야부인(摩耶夫人)이고 갈문왕 복승(葛文王 福勝)의 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 생김이 기이하였고 체격이 장대하였으며, 지식이 깊고 의기가 활달하였다.

진평왕은 재위 54년 동안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고 중국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다. 여러 승려를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등 불교 진흥에도 힘썼고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쌓고 명활성을 고쳐 짓는 등 수도 방어를 강화하였다. 진평왕이 죽었을 때 한지(漢只)에서 장사를 지냈다. 왕이 하늘로부터 옥대(玉帶)’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즉위 원년(579) 8,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다. 왕의 어머니인 만호부인(萬呼夫人) 동생인 백반을 진정 갈문왕에 봉하고, 국반을 진안 갈문왕에 봉했다. 22,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后稷)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가까운 왕족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즉위 3년 봄 정월, 처음으로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다. 이는 고려의 이부(吏部), 조선의 이조(吏曹)와 같다.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 각 한 명씩을 두었다.

62,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고쳤다. 3, 국가의 세금을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調府令) 한 명을 두어 납세와 부역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고, 우마차를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乘府令) 한 명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73, 가뭄이 들자 왕이 정전에 거처하지 않았으며, 평상시보다 음식을 줄이고 죄수를 직접 재심사하였다. 7, 고승 지명(智明)이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남조(南朝)() 나라에 갔다. 진평왕 대에는 중국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 행(求法 行)과 귀국 행(歸國 行)이 빈번하게 있었는데,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행차와 같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불교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8년 봄 정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禮部令) 두 명을 두었다.

9년 가을 7, 대세와 구칠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의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세는 내물왕의 7대손이며, 이찬 동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나고 젊어서부터 세속을 떠나 외지로 나가려는 뜻을 품었었다. 그는 담수라는 중과 사귀면서 말했다. “신라 같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연못의 고기가 산림의 크기를 모르고, 새장의 새가 바다의 넓음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지나 오나라, 월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을 것이며, 명산에서 도를 구할 것이다.

만약 속된 자세를 바꿀 수 있거나 신선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표표하게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닐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천하의 신기한 노름이요,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담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대세는 그를 버리고 다시 친구를 찾았다. 그는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사람됨이 굳건하고 남다른 절개가 있었다. 그는 곧 구칠과 함께 남산에 있는 절을 유람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연못에 나뭇잎이 떠다니고 있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방을 유람할 생각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뭇잎 하나씩을 주워 이를 배로 생각하고 띄워서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자.” 조금 후에 대세의 잎사귀가 앞서자 대세가 웃으면서 내가 먼저 간다!”라고 말했다.

구칠은 불끈 성을 내며 나도 또한 사나이이다. 어찌 갈 수 없으리.”라고 말하였다. 대세는 구칠이야말로 같이 행동을 할 만한 사람임을 알고, 은근히 자신의 뜻을 말했다. 구칠은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어 배를 타고 남해를 떠났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1012,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으므로 이찬 수을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113, 원광(圓光) 법사가 진()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연구하였다.

132,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두 명을 두었다진평왕 초기에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국정이 왕권을 중심으로 원활하게 수행되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신라의 관제발달사상 발전기로서 새로운 행정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7, 남산성을 쌓았고 그 둘레가 2854보였다.

능(陵)의 호석(둘레돌)은 검은색을 띤 괴석과 화강암을 혼용하여 능을 둘렀는데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

157, 명활성을 개축하였고 그 둘레가 3천 보였다. 서형산성은 둘레가 2천 보였다. 16,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 황제가 조서를 주어 왕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배수하였다.

183, 고승 담육(曇育)이 수나라에 가서 불법을 연구하였다.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10, 영흥사에 화재가 발생하여 350호가 연이어 불에 탔고 왕이 직접 나가서 이들을 구제하였다. 19, 삼랑사가 낙성되었다.  22, 고승 원광(圓光)이 조빙사(朝聘使) 나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橫川)을 따라 돌아왔다.

24, 대내마(奈麻) 상군(上軍)을 사신으로 수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 백제가 아막성(阿莫城: 지금의 雲峰)을 공격하였고 왕이 장병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귀산과 추항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9, 고승 지명(智明)이 수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상군(上軍)을 따라 돌아왔다. 왕이 지명(智明) 공의 계행을 존경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258,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침범하였고 왕이 직접 군사 1만을 이끌고 나아가 그들을 물리쳤다. 267, 대내마 만세와 혜문(惠文) 등을 수나라에 사절로 보내 조회하였다. 남천주를 없애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273, 고승 담육(曇育)이 수나라에 사절로 갔던 혜문(惠文) 을 따라 돌아왔다. 가을 8,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30, 왕은 고구려가 자주 국토를 침범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왕은 원광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군사를 요구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불교도의 행실이 아니지만, 제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곧 글을 지어 올렸다.

2,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4,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점령하였다.

33, 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구하는 내용의 글(걸사표 : 乞師表)을 바쳤다. 수양제가 이를 허락하였고 군사를 동원한 사실은 고구려기에 실려 있다. 10, 백제 군사가 가잠성을 백일 동안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이 굳게 수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고 성은 함락되었다.

35, 7, 수나라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를 초청하여 불경을 설법하게 하였다. 36년  2, 사벌주를 폐지한 후 일선주를 설치하고,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의 흙으로 빚은 불상이 저절로 훼손되고, 얼마 후에 진흥왕의 왕비(비구니)가 사망하였다.

 3810,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40, 북한산주 군주 변품이 가잠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백제와 싸웠다. 해론이 이에 종군하여 적과 만나 전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43년 가을 7, 왕이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고조가 직접 사신을 위로하고, 통직 산기상시 유문소를 사절로 파견하면서 조서, 그림, 병풍, 비단 3백단을 보내왔다.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한편 이시기에 김춘추와 김유신이 등장하게 된다.

442, 이찬 용수를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즉위 7년에는 대궁, 양궁, 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1인을 두어 3궁을 동시에 관장하게 한 것이다.

45년 봄 정월, 병부 대감 두 명을 두었다. 10,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였다

46년 봄 정월, 시위부 대감 6명과 상사서 대정 1명과 대도서 대정 1명을 두었다. 3,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10, 백제 군사가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 등 여섯 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3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가 봉잠앵잠기현 3성의 군사를 합하여 굳게 지키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4711,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 때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 나라에 조회할 수 없음과 또한 그들이 자주 침범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487,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조가 주자사를 보내 고구려와 화친할 것을 권하였다. 8,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였다. 주재성 성주 동소가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고허성을 쌓았다.

49 6,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7, 백제 장군 사걸이 서쪽 변경의 2성을 점령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11,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2,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격파하였다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녀를 파는 일이 있었다.

518,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 9,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32, 흰 개가 대궐의 담장 위에 올라갔다5,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 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구족을 처형하였다. 아찬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망하였으나, 처자가 보고 싶어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왔다. 그는 그 곳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나 그의 헤어진 옷과 바꾸어 입은채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7,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명을 바쳤다. 그러나 위징(魏徵)은 이를 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기뻐하며 저 임읍(林邑)에서 바친 앵무새도 추운 고통을 말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황차 가족을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의 처지야 어떻겠는가!”라고 말하고, 사신에게 맡겨 돌려보냈다. 흰 무지개가 대궐 우물로 들어갔다. 토성이 달을 범했다.

54년 봄 정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서로 좌광록대보(左光祿大夫) 벼슬을 추증하고, 비단 2백 필을 부조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1 천사옥대(天賜玉帶)

26대 백정왕(白淨王)의 시호(諡號)는 진평대왕(眞平大王), ()은 김씨(金氏).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 후에 고려왕(高麗王)이 신라를 치려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 무엇이냐.” 좌우가 대답한다.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구층탑(九層塔)이 그 둘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찬()하여 말했다.

구름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

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

신라가 망한 청진(淸秦) 4년 정유(丁酉, 937) 5월에 정승(正承) 김부(金傅, 경순왕)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다. 길이는 10(). 전과(鐫銙)62개나 되었다. 이것을 진평왕(眞平王)의 천사대(天賜帶)라고 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는 이것을 받아 내고內庫에 간직했다.

추수가 끝난 보문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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