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41대 헌덕왕릉(憲德王陵)는 분황사 동북쪽 소금강산과 북천(北川)사이 들판의 송림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봉분 직경 25.9m, 봉분 높이 6.3m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인데 호석(護石, 둘레돌)은 면석(面石)과 탱석(撑石, 버팀돌)으로 각각 48개로 이루어져 있다. 호석 밖에는 돌기둥을 54개를 세웠고 돌기둥 사이에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호석과 난간 사이 바닥에는 박석을 깔아서 회랑을 조성하였다.
호석(護石)의 탱석(撑石)에는 평복(平服)을 입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새겨져 있고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돼지(亥) 상(像) 등 5개만 남아 있는데 손에는 각종 무기를 들고 머리는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다. 나머지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기록에 따르면 조선 영조 18년(1742년) 8월 22일 태풍과 비가 몰아쳐 북천(北川)이 범람하면서 유실되었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당해 9월에 영조에게 사실을 아뢰었으며 그로 인해 경상도관찰사가 수축하였다.
헌덕왕릉(憲德王陵)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에 사용 된 면석과 탱석(撑石)은 이전 시기의 왕릉보다 각각 12개, 총 24개가 더 들어간 것으로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경주 지역에 있는 신라 왕릉 가운데 호석에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은 것은 십이지신상 첫 출현인 성덕왕릉을 비롯하여 김유신 묘,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구정동 방형분, 진덕여왕릉이 있다.
쥐 상(子像)은 암좌(岩座) 위에 왼팔은 조각하지 않고 옷소매 속으로 숨기고 오른 손은 금강저를 들고 있는데 S자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소 상(丑像)은 다섯 상 가운데 유일하게 암좌 같은 대좌(臺座)가 없고 오른 손에 무기를 잡고 어깨 위로 하여 자연스럽게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범 상(寅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토끼 상(卯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무기를 잡고 있다.
돼지 상(亥像)은 암좌(岩座) 위에 오른 손으로 환두대도(環頭大刀)의 끝을 잡고 있는데 S자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십이지신(十二支神)은 점성술이 발달한 서아시아의 십이궁(十二宮)이 인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된 것으로 한(漢)나라 중기 때 방위(方位)와 시간에 대응시키고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등 12동물과도 대응시켰다.
후한(後漢) 때 오행상극설 (五行相剋說)에 따라 십이지신(十二支神)을 설명하고 사람의 생년월일(生年月日)을 동물명으로 대신하여 일컬었다. 그리고 당(唐) 나라 때 묘지명판(墓地銘板)의 사면(四面)에 조각하거나 무덤에 넣는 도제용(陶製俑)에도 사용 되었는데 손에 홀(笏)을 들고 문관(文官) 복장(服裝)을 한 인신에 머리만 십이지(十二支)의 동물로 나타냈다.
불교에서 십이지신(十二支神)은 땅을 지키는 일을 하는 열두 신장으로 《약사경(藥師經)》을 외우는 불교인을 지키는 신장(神將)으로 12야차대장, 12시왕이라고도 하였다. 약사불의 12대원에 대응하여 약사불을 수호하고 약사의 대원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신장이며 십이신장이 약사여래와 함께 등장하게 된 것은 『약사경(藥師經)』에 따른 것인데, 석가모니가 약사여래의 본원공덕을 설명할 때 12야차대장이 크게 감명 받아 12대원을 행할 것을 서원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헌덕왕릉(憲德王陵)은 38대 원성왕릉(元聖王陵)과 마찬가지로 능의 전면에는 상석, 석사자상, 석인상(石人像), 호인상(胡人像), 화표석(華表石) 등을 배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 있었던 서역인(西域人) 얼굴의 무인상을 조각한 호인상(胡人像)은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있다.
1970년대 경주 고도 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정비, 보수함에 호석 일부와 난간을 새로 만들었다. 최근에 설치 된 탁자식 형태의 상석은 흥덕왕릉의 상석을 모방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헌덕왕(憲德王)이 죽자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천림사(泉林寺)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능의 남쪽에 절터가 있어 천림사 터로 보고 있다.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 : 재위기간 809년 7월 ~ 826년 10월, 17년 3개월)
이름은 언승(彦昇)이고 39대 소성왕(昭聖王)의 동복 동생이다. 아버지는 38대 원성왕의 큰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이다. 왕비는 귀승부인(貴勝夫人)인데 각간 예영(禮英)의 딸이다.
소성왕(昭聖王)이 죽은 뒤 40대 어린 애장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였고 애장왕이 성장하여 친정을 하려 하자, 애장왕 10년(809년) 상대등(上大等)으로 있을 때 동생 이찬 수종, 또는 제옹(42대 흥덕왕), 조카 제륭(43대 희강왕)과 함께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이보다 앞서 원성왕 6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갔다가 대아찬의 작위를 받았고, 7년에 반역하는 신하를 처형하여 잡찬이 되었고, 10년에 시중이 되었고, 11년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12년에 병부령이 되었고, 애장왕 원년에 각간이 되었고, 2년에 어룡성 사신이 되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대등이 되었다가, 809년에 난을 일으켰으며, 애장왕이 살해되고 왕위에 올랐다. 이찬 김숭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재위기간 동안에 뚜렷한 정책이나 정치개혁이 보이지 않으나 애장왕 당시의 개혁정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농사를 권장하고 당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김헌창의 난과 김범문의 난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혼란스러웠다. 현재의 대동강인 패강(浿江) 주변에 장성(長城)을 쌓았고, 822년에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천림사(泉林寺) 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즉위 14년(822년) 신라 최대 반란인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왕은 이찬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 우징(祐徵)등이 주축이 된 토벌군으로 하여금 난을 평정하도록 했고 김헌창은 결국 웅진성(공주)에서 10일동안 저항하다가 자살했다. 3년 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북한산주 도독 총명(聰明)에게 토벌되어 주살되었다. 다음해(826년) 헌덕왕은 즉위17년 만에 죽었다.
즉위 원년(809년)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창남 등을 당에 보내 이전 왕의 죽음을 알렸다. 당 헌종은 직방원외랑섭어사중승 최정을 정사로, 인질로 가있던 김사신을 부사로 파견하면서, 황제의 신임표를 지니고 가서 조의를 표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새로운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의 아내 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며, 대재상 김숭빈 등 3명에게 문극을 주었다.
2년 봄 정월,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람을 보내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7월, 유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갔다.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10월, 왕자 김헌장을 당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순종을 위하여 명복을 빈다.”고 하였다. 유성이 왕량 성좌에 들어갔다.
3년 봄 정월, 시중 양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원흥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이찬 웅원을 완산주 도독으로 임명하였고 4월, 왕이 처음으로 평의전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4년 봄, 균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이찬 충영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9월, 급찬 숭정을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5년 봄 정월, 이찬 헌창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 묘에 참배하였다. 현덕문에 불이 났다.
6년 3월,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왕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이찬 충영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왕이 사자를 보내 수재를 당한 주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간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였다. 8월, 무진주 도독 헌창을 중앙으로 불러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10월, 대사 검모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7년 봄 정월, 당에 사신을 보냈다. 헌종이 그를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8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고,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8년 봄 정월, 시중 헌창이 외직으로 나가 청주 도독이 되었고, 장여가 시중이 되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한산주 당은현에서 길이 10척, 넓이 8척, 높이 3척 5촌이 되는 큰 바위가 저절로 1백여 보 이동하였다. 6월,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9년 봄 정월, 이찬 김 충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5월,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고 7월이 되자 비가 내렸다. 10월,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왕은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왕자 김 장렴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11년 봄 정월,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찬 헌정이 병이 나서 걷지 못하므로, 나이 70세가 안되었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상대등 김숭빈이 사망하자, 이찬 김 수종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초적들이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7월, 당 나라 운주 절도사(節度使) 이사도(李師道)가 반란을 일으켰다. 헌종이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 조공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왕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 김웅원(金雄元)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12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목종이 인덕전에서 사신을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 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가 있었다. 4월, 시중 김 충공이 사망하자 이찬 영공이 시중이 되었다. 청주 도독 헌창이 웅천주 도독이 되었다. 7월, 패강 남천에 있는 두 돌이 서로 맞붙었다. 12월 29일, 큰 우레가 있었다.
14년 봄 정월, 왕의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다.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왕은 이찬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 대아찬 우징(祐徵)등이 주축이 된 토벌군으로 하여금 난을 평정하도록 했고 김헌창은 결국 웅진성(공주)에서 10일 동안 저항하다가 자살했다.
4월 13일, 달빛이 핏빛 같았다. 7월 12일, 해에 흑점이 생겨 남북을 가리켰다. 12월, 주필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5년 봄 정월 5일, 서원경에,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졌다. 9일에는 흰 색․검은 색․붉은 색의 세 가지 벌레가 눈밭을 기어 다니다가 햇볕이 나자 사라졌다. 원순․평원 두 각간이 나이 70세가 되어 은퇴하고자 하였다. 왕은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수성군과 당은현을 합쳤다.
17년 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적 수신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였다.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우기 위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해왔다.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처형하였다. 3월, 무진주 마미지현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몸이 둘, 팔이 넷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때, 천둥소리가 크게 울렸다.
5월, 왕자 김흔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이전에 와있는 대학생 최이정․ 김숙정․ 박계업 등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고, 새로 입조한 김 윤부․김 입지․박 양지 등 열두명을 숙위로 머물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공부를 하게하고, 홍려시에서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여 주소서.” 황제가 이를 따랐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 대양관군에 사는 내마 황지의 아내가 아들 둘과 딸 둘을 한 번에 낳았다. 그녀에게 벼 1백 석을 주었다.
18년 7월, 우잠 태수 백영으로 하여금 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신라 최대의 반란, 김헌창(金憲昌)의 난(822년)
헌덕왕 14년(서기822) 3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자기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옛 백제 땅인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일으킨 난이다.
김주원(金周元)은 태종 무열왕 셋째아들인 김문왕(金文王)의 5세손으로 37대 선덕왕(宣德王)이 후사가 없이 병으로 죽자 김경신(金敬信)과의 왕위다툼에서 패배하여 강원도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로 퇴거(退去)하였고 강릉 김씨(江陵 金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 세력으로 남았다. 후삼국 시대 명주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김순식(金順式, 뒤에 王順式]이 그의 후손이다. 이들은 굴산사(掘山寺)의 사굴산파(闍掘山派)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김순식 가문은 고려에 귀의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이 왕위다툼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7대 선덕왕(宣德王)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지정의 난을 함께 수습한 공신 김경신을(金敬信) 중용하여 상대등으로 삼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왕은 왕족인 김주원(金周元)을 등용하였다. 그러자 김경신(金敬信)이 꿈을 꾸었다. 사모를 벗고 갓을 쓴 채 12줄 거문고(絃琴)를 끌어안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우물로 들어가는 꿈이어서 그는 옥에 갇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고 심히 걱정했다. 그런데 여삼(餘三)이라는 자가 찾아와 이렇게 해몽을 해주었다.
"사모를 벗은 것은 더 이상 높은 자가 없다는 것이고,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줄 거문고를 않은 것은 12대 손까지 대를 이을 징조이고, 천관사(天官寺) 우물로 들어간 것은 대궐로 들어갈 징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김경신(金敬信)은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한 등급 위에 김주원(金周元)이 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일세."
그런데 이 꿈을 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났다(785년). 왕의 아들이 없었으므로, 궁궐에서는 무열왕계 왕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金周元)을 맞아들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주원(金周元)의 집이 북천(北川)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김주원(金周元)이 북천(北川)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김경신(金敬信)이 먼저 궁궐에 들어가 왕위(元聖王, 신라 38대왕)에 오르게 되었다.」
김주원(金周元)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은 계속 중앙 관직에 남아 활동하였으며, 807년에 이찬으로서 시종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실세요, 실력자인 김언승(金彦昇)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급성장 하였다. 그런데 김언승(金彦昇)이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자신이 신라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이찬 김헌창(金憲昌)은 자연히 중심 세력에서 밀려나 813년 1월에 무진주의 도독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817년 가을에는 흉년으로 굶어죽은 자들이 속출하였다. 이래저래 살아가기 힘든 백성들이 819년에 전국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821년에도 봄 기근이 심하여 백성들 중에는 자손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틈을 타서 평소 자기 부친 김주원(金周元) 이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과 자신이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822년 3월에 난을 일으켰다.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사벌주(상주), 청주(진주)의 4주 도독과 국원(충주), 서원(청주), 금관(김해)의 사신들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이때 청주 도독 향영은 불복하고 추화군으로 도망쳐 버렸다. 게다가 한산(경주), 우두(춘천), 삽량(양산), 패강, 북원 등에 있는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항하는 중앙 귀족들의 연합 세력에 의해 반란군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되었다.
헌덕왕은 우선8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왕도 팔방을 수비하게 한 다음, 일길찬 장웅을 먼저 출동시키고, 이어 잡찬 위공과 파진한 제릉을 보냈으며, 그 다음에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 및 대아찬 우징 등에게 군사를 주어 적을 막아 치게 하였다. 또한 각간 충공과 잡찬 융응에게는 문화 관문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때 김헌창(金憲昌)도 반란군을 정비한 다음 요소요소에 장수들을 파견해 왕군에 대비시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잘 훈련된 중앙 군대의 정규군을 이길만한 군사력을 지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병졸로 동원된 양민들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해 주지 아니 했기 때문에, 왕군과의 싸움에서 계속 밀리게 되었다.
왕군은 먼저 장웅이 도동현에서 반란군과 접전하여 격파시킨 것을 필두로, 위공과 제릉이 장웅과 합세해 삼년산성(보은)을 공격해 역시 승리를 장식한 다음, 속리산으로 군사를 돌려 그곳의 적도 격멸시켜 버렸다. 왕군의 균정 등도 성산에서 싸워 반란군을 격멸시킨 다음, 3군을 웅진으로 모아 반란군과 대접전을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반란군의 주력 부대는 격파되었다.
이때 김헌창(金憲昌)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여 성으로 도망쳐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마지막 저항을 했다. 왕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헌창(金憲昌)은 사태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며 자기는 사형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감지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성을 함락한 왕군은 김헌창(金憲昌)의 시신을 찾아내어 주형을 가했으며, 그 친족과 남은 무리 2백39명을 모두 처형했다. 이때가 822년이었다.
그러나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김헌창 (金憲昌) 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825년(헌덕왕 17년) 1월에 김헌창(金憲昌)의 아들 김범문(金梵文)이 고달산적(여주), 수신 등에서 모은 농민군 1백여명과 함께 난을 일으켜, 평양(양주) 도읍을 세우기 위해 우선 북한산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한산주 도독 총명은 반란군을 대파하고 김범문(金梵文) 부자 2대에 걸쳐 일어난 모반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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