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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머무는 곳’, ‘배를 움직이는 곳’으로 알려진 운주사(雲住寺)는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의 나지막한 야산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10~11세기 고려 초에 창건한 사찰로 14~15세기에 가장 번창하였고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폐찰 되었다. 지금은 현재 석불 70구와 석탑 18기만이 남아 있으나, 1942년에는 석불 213구,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의 탑이나 석불을 헐어다가 묘지 상석을 만들기도 하고 주춧돌, 섬돌로 축대를 쌓는 데 사용했고, 때로는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다고 한다.

‘구름이 머무는 곳’, 운주사(雲住寺) 일주문

1921년에 간행된 『도암 면지(道岩面誌)』에 의하면, 1918년에 전 군수(前郡守) 박윤동(朴潤東) 등 16명이 시주하여 재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2년~1978년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하였고, 근래에 송광사의 말사로 편입되면서 대대적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수많은 전각을 건립하고 주변을 정비하고 있다.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21 교구 본사 송광사(松廣寺) 소속 사찰이다.

절 주변은 사적 제312호로 지정되었고 입구의 구층 석탑은 보물 제796, 중심부의 석조불감(石造佛龕)은 보물 797호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원형다층석탑은 보물 789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일주문에서 맞이하는 거북이. 이곳에 거북바위가 있어 석탑 2기와 석불군이 조성되어 있고 영구산(靈龜山)이 있다.

이곳의 석탑은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층수도 다양하며 둥근 공 모양의 원형 탑이나 호떡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듯 등 특이하다. 또한 탑의 표면에 ‘X’, ‘◇’, ‘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 있어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운주사(雲住寺) 內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70여 구의 석불도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평면적이면서 토속적인 생김새에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체 구조는 고려시대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와불(臥佛 : 누운 부처)이 유명한데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불상으로 도선 국사가 천불(千佛) 천탑(千塔)을 하룻밤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좌불과 입상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난 동자승이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불상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우지 못한 좌상(坐像)과 입상(立像)은 일명 와불(臥佛 : 누운 부처)로 유명하다.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1530년(중종 5)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의 능성현(綾城縣) 조에 「운주사(雲住寺)는 천불산(千佛山)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1632년에 간행된 『능주목지(綾州牧誌)』에 「운주사(雲住寺)는 지금 폐찰 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폐사된 이후 설담자우(雪潭自優)의 「운주동 불탑 수리 후 중건 약사전 권선문(雲住洞 佛塔修理 後 重建 藥師殿 勸善文)」에 의하면 19세기 초반 훼손된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중수하고 새로이 약사전(藥師殿)을 중건하였고 이를 약사사(藥師寺)로 기록하고 있다.

천불(千佛) 천탑(千塔)의 화순 운주사(和順 雲住寺) 경내

운주사(雲住寺)에 대한 발굴조사는 전남대박물관에서 1984년부터 네 차례를 실시하였는데 운주사(雲住寺)의 본래 절터는 현재 대웅전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주차장이 있는 곳 위의 밭 근처였음이 확인되었다. 1989년 조사에는 석탑들 가운데 두 기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로 운주사 환은천조, 홍치 8년(雲住寺 丸恩天造, 弘治 八年)이라고 적힌 암막새 기와가 나와서, 원래 절 이름이 운주사(運舟寺)가 아니라 운주사(雲住寺)라는 것과 1495년(연산군 1)에 중창된 적이 있음을 밝혀졌다. 그리고 발굴 후 다시 흙으로 덮어 현재는 잡초만 무성하다,

운주사 일대의 암석은 중생대 백악기에서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돌덩이가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응회암이다.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경도가 약한 응회암은 잘 깨지고 부스러지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제작하였다. 운주사에는 여기저기 벽에 기대어 간신히 서있는 불상이나 탑이 있는데, 대부분 풍화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원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럼 이 절, 운주사를 누가, 무엇 때문에 창건했을까?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도선국사(道詵國師)와 관련 된 풍수비보설이다.

도선국사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배 한복판에 해당하는 호남 땅이 영남 땅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 국운(國運)이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자 기울 것을 염려하여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운주사 유적들이 12 ~13세기의 양식이고 도선국사는 9세기의 인물이라서 연대가 맞지 않다.

다른 하나는  밀교에서 절을 세웠다는 것인데 운주사에서 출토 된 수막새 기와에 “옴마니반메홈” 이라는 진언이 범어로 양각되어 있고 석조불감(石造佛龕) 안에 남북으로 등을 맞댄 불상은 밀교적인 음양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부처들이 대부분 지권인을 하고 있고 천불을 조성하여 모시는 천불신앙은 밀교에서 널리 믿어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몽고침략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1238년(고종 25년) 몽고군이 고려인들의 저항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호국사찰인 황룡사를 불태워버렸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 황룡사를 대신할 사찰이 운주사이고 이곳에 천불 천탑(千佛 千塔)을 세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륵신앙으로 고려 무인정권 시절 이곳에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를 기원하며 그들의 염원으로 천불 천탑(千佛 千塔)을 세웠다는 것이다.

운주사(雲住寺) 입구부터 펼쳐진 다양한 석탑과 석불을 살펴보자.

구층 석탑 (九層 石塔)은 보물 제796로 운주사(雲住寺) 일주문을 지나서 가장 먼저 맞이하는 석탑(石塔)으로 높이 10.7m로  석탑 중 가장 높다. 기단부(基壇部)의 지대석은 하나의 평평한 바윗돌을 사용하여 각형의 3단으로 가공한 굄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세웠다.

탑신부(塔身部)의 1층 탑신(塔身 : 몸돌)은 4장의 널돌로 세워서 짜였으며,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긴 후 다시 면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굵게 새겨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2층 탑신(塔身)부터는 각 면마다 2중으로 마름모꼴을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은 밑면이 약간 치켜 올려져 있고, 여러 겹의 빗살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옥개석 받침은 생략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원기둥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보륜(寶輪 : 바퀴모양의 장식)을 올렸다. 전체적인 탑의 모습은 지방적인 색채가 뚜렷하다.

운주사(雲住寺)의 석불군은 일주문을 지나서 북쪽 대웅전을 향한 길을 걸으면 오른쪽, 즉 동쪽 암벽에 조성되어 있다. 첫 번째 석불군은 구층 석탑 동쪽에 있는 높이 약 8m, 너비 20m의 암벽 수직 단애 면에 좌불 1구와 입상 5구를 배열하였는데 입상 1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좌대를 갖추고 있다. 두 손을 합장하고 좌불을 한 비로자나 부처님은 1984년 발굴 조사 때, 불상 대좌 뒤편에서 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불상과 여래 불상이 출토되었다.

좌불 1구와 입상 5구으로 궝 된 첫번째 석불군
첫 번째 석불군과 위의 일명 무소유탑

두 번째 석불군은 첫 번째와 10여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높이 5m, 너비 25m의 암벽에 8구의 석불이 배열되어 있다. 중앙에 높이 4.75m의 대형 입상이 주불이고 좌우에 입상 7구의 협시불이 있다.

8구의 석불 입상으로 두번째 석불군
주불인 높이 4.75m의 대형 입상

높고 큼직한 방형으로 다듬은 기단 위에 원형의 1단 굄을 만들고 그 위에 7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세운 칠층석탑(七層石塔) 은 높이는 9.6m이다. 1층과 2층 탑신(塔身)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고 탱주(撐柱)는 생략되었다. 

높고 큼직한 방형으로 다듬은 기단 위에 원형의 1단 굄을 만들고 그 위에 7층의 탑신부를 세운 칠층석탑(七層石塔)

3층 이상 탑신(塔身)은 모두 1매석이며 각 면에 우주(隅柱)가 모각되었고 탱주(撐柱)도 생략되었다. 각 층의 두툼한 옥개석(屋蓋石)은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6단이다. 추녀와 처마는 직선형으로 표현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유실되었지만 비교적 단정하고 소박한 석탑이다.

기단 위 원형의 1단 굄

석불좌상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쌍교차문 칠층석탑(雙交叉紋 七層石塔)은 각층 탑신에 쌍교차문(XX)과 마름모꼴(◇) 형태를 조각하여 국내 석탑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높고 큼직한 방형의 기단 위에 1단의 방형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탑신을 세웠다. 비교적 안정되고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쌍교차문 칠층석탑(雙交叉紋 七層石塔)

광배석불좌상(光背石佛坐像)은 운주사(雲住寺) 석불 가운데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과 함께 유일하게 광배(光背)가 표현된 불상이다. 사다리꼴 판석에 조각된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구분이 없고 불신 주변으로 선각에 의한 화염문(火焰紋)을 음각하였다. 광배(光背)는 고 부조된 불상에 비해 두께가 얇은 편이다.

사다리꼴 판석에 조각된 광배석불좌상(光背石佛坐像)

불신은 광배(光背)에서 약간 도드라지게 표현되었으며 수인과 코, 눈썹, 귀는 양각하였다. 전체적으로 상호는 원만상이며, 눈에 비해 약간 높게 표현된 눈썹과 기다란 코, 두툼한 입술을 표현하였다. 귓바퀴가 큰 귀는 눈썹부근에서 입술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불신 주변으로 선각에 의한 화염문(火焰紋)을 음각하였고 광배(光背)는 고 부조된 불상에 비해 두께가 얇은 편이다.

광배석불좌상(光背石佛坐像) 길 건너편에 있는 세 번째 석불군은 암벽 왼쪽에 사각형과 원반형의 대좌에 불상4구가 세워져있다. 중앙에는 복련(復蓮)이 묘사된 사각형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있는 불상이 있고 그 좌우로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묘사되어 있는 석불이 배치되었다.

사각형과 원반형의 대좌에 불상4구가 세워져 있는 세 번째 석불군

중앙의 석불은 두 손이 형태가 없어졌으나 다른 불상들보다 입체감 있게 묘사 되었는데 얼굴에는 긴 귀와 코의 흔적이 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식의 법의를 걸쳤다.

복련(復蓮)이 묘사된 사각형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있는 불상

바로 옆에는 불두 5편, 석불 입상 3구가 있다. 이중 가장 큰 석불 입상은 세 조각으로 파손 된 것을 1993년 보수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석조불감(石造佛龕) 앞 칠층석탑(七層石塔)은 주변의 다른 큰 석탑이 큰 방형을 설치하여 기단을 대신한 것과 달리 규모가 작은 지대석 위에 1단 굄을 마련하여 탑을 세웠다.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5단으로 넓고 평평한 옥개석(屋蓋石)과 그 윗면 네 귀퉁이의 우동마루가 예리한 선을 이루지 않고 두툼하게 표현된 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나타나는 기법이다. 또한 옥개석(屋蓋石)의 폭과 탑신 높이의 체감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탑이다.

석조불감(石造佛龕) 앞 칠층석탑(七層石塔)
석조불감(石造佛龕)은 운주사(雲住寺) 중심부에 위치하고 앞, 뒤에 석탑 1기씩 놓여있어서 야외 불당의 주존 불 구실을 하고 있다.

석조불감(石造佛龕)은 보물 797호로 운주사(雲住寺)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앞, 뒤에는 석탑이 1기씩 놓여있어서 야외 불당의 주존 불 구실을 하고 있다. 불감(佛龕)이란 석굴 형태의 일정한 공간(龕室)에 부처님을 안치하는 건조물을 말하는데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석조불감(石造佛龕)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龕室) 안은 남북으로 통하게 하여 2구의 불상이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그리고 석조불감 안에 등을 맞댄 불상은 그 유래가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석조불감(石造佛龕)의 북향 좌불상
석조불감(石造佛龕)의 남향 좌불상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원형 다층석탑(圓形 多層石塔)은 보물 797호로 높이 5.8m이다. 기단부의 기단(基壇)은 두툼한 원형 단을 만들고 탑을 세웠다. 기단 면석은 5매석을 조립하여 8각을 이루고 원형의 갑석에는 연꽃을 선으로 16장을 표현하였다.

원형 다층석탑(圓形 多層石塔)

원형의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탑신 1층 옥개석(屋蓋石)은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2층부터 옥개석(屋蓋石)은 정반대로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글다. 이는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려 한 의도로 추측된다.

기단부 원형의 갑석에는 연꽃을 선으로 16장을 표현하였고 원형의 탑신(塔身)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雲住寺) 대웅전(大雄殿) 앞 다층석탑(多層石塔)은 높이 3.23m로 탑신부의 4층 옥개석(屋蓋石)까지 남아 있고 그 이상 부재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옥개석(屋蓋石) 상부는 전탑과 같은 3단의 계단 형으로 이루어진 모전석탑 유형이다. 즉 돌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통돌을 계단 형으로 깍은 것이다. 특히 각 층의 옥개석(屋蓋石) 모서리 부분에서는 가벼운 반전이 있다.

운주사(雲住寺) 대웅전(大雄殿) 앞 다층석탑(多層石塔)
탑신부의 4층 옥개석까지 남아 있고 옥개석 상부는 전탑과 같은 3단의 계단 형으로 이루어진 모전석탑 유형이다.

운주사(雲住寺)에는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위에 석탑 2기를 조성하였는데 오층석탑(五層石塔)과 교차문 칠층석탑(交叉紋 七層石塔)이다. 그리고 암반아래에도 석불군을 조성하였다.

거북바위 가는 길
거북바위에는 석탑 2기를 조성하였는데 오층석탑(五層石塔)과 교차문 칠층석탑(交叉紋 七層石塔)이 있고 암반아래에도 석불군을 조성하였다.
거북바위 위의 오층석탑(五層石塔)과 교차문 칠층석탑(交叉紋 七層石塔)

거북바위 오층석탑(五層石塔)은 높이 5.57m로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위에 탑을 세웠다. 1층 탑신은 1매의 방형에 각 면의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탱주는 생략되었다.

거북바위 오층석탑(五層石塔)

2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짜 맞추었는데 각 면의 귀퉁이에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다. 옥개석 받침은 뚜렷하며 상면에 탑신 굄이 생략되었다. 상륜부는 복발형의 부재가 안치되고 그 위에 보주가 연결되었다. 전체적으로 치석의 기법이나 각 부재의 비례가 안정된 탑이다.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 (交叉紋 七層石塔)은 높이 7.17m로 다소 경사진 암반을 완만하게 다듬어서 기단부 없이 그 위에 탑을 세웠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중앙으로 보조 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출되었고 탱주는 생략되었다.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 (交叉紋 七層石塔)

2층에서 7층까지 탑신 4면에 X자문이 새겨져 있고 옥개석(屋蓋石) 우동마루가 두툼하게 튀어나오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5단이다. 한국석탑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 탑으로 모두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2층에서 7층까지 탑신 4면에 X자문이 새겨져 있고 옥개석 우동마루가 두툼하게 튀어나오고 옥개석 받침은 5단이다.

서쪽 산기슭에 있는 와불(臥佛)로 가는 길 중간의 거북바위 아래에 있는 석불군은 높이 5m, 너비 15m의 거북바위에 조성한 공간의 넓이는 일부 암반이 떨어져 나가 3m × 4m × 2m이다. 이는 너무 깊게 암벽 감실을 조성하려다 상부 암반이 무너져 내린 결과로 추정된다.

거북바위 아래에 있는 석불군

높이 4m지점에 지름1m정도의 암벽을 다듬은 흔적이 보여 이곳에 대형 불상을 모시려던 것으로 짐작된다. 불상 중앙은 좌상, 그 주위는 입상이 배열되어 있다. 불상은 9구이나 대좌는 12개라서 불상 3구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곳으로 보인다.

와형 석조여래불(臥形 石造如來佛)은 운주사(雲住寺) 계곡 서쪽 산 정상에서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석불 2구로 큰 불상인좌상과 작은 입상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명 와불(臥佛 : 누워있는 불상)이라고도 한다. 크기는 길이 12.7m, 너비 10.3m로 국내 석불 중 가장 크다

좌상의 대불은 어깨와 목에 비해 양 무릅 사이의 폭이 너무 넓어 인구(사람의 형상)의 균형을 잃고 있다. 작은 불상인 입상의 수인(손 모양)은 시무외인 여원인을 취한 것 같으나 어색하고 사실적이지 않다. 또한 옷 주름은 수직선과 사선으로만 처리하여 매우 단순하다.

위가 좌상(坐像)이고 아래가 입상(立像)이다.
좌상(坐像)이 대불이고 입상(立像)은 작다.

창건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하루 밤 사이에 천불 천탑을 다 세우고 이 와불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새벽닭이 울어 중단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일어서지 못한 채 남겨진 존재가 바로 이 와불(臥佛)이라고 한다.

실제로 불상을 조성하려다 난관이 생겨서 포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와불의 형태를 보면 일반적으로 가로 누운 형태가 아니라 가부좌를 틀고, 서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와불과 지면 사이에는 결이 나 있는데 이 결을 따라 암반을 쪼갠 흔적이 발쪽을 보면 밑에서 보인다.

즉, 원래 계획대로라면 암반의 결을 따라 와불을 쪼개서 일으켜 세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깨부분부터 결이 사라지는데 이 부분의 암반이 생각 이상으로 커서 이대로 세우면 불상이 부러지기 때문에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영구산(靈龜山) 정상

화순군(和順郡)은 전라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군이다. 내장산, 추월산, 설산으로부터 이어져 온 호남정맥이 무등산에서 안양산, 두봉산, 국사봉으로 연결된다. 하천은 지석천과 동복천이 군의 유역을 나누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능성)에“ 여미현(汝湄縣)은 본래 백제의 잉리아현(仍利阿縣)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화순군(和順郡)이다.”라고 기록되어 현재의 지명을유추할 수 있다.

도암면(道巖面)은 화순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이다. 북쪽은 고당산과 해망산이 도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해망산에서 남쪽으로 천태산, 깃대봉, 금성산, 화학산으로 동쪽산지를 이루면서 춘양면과 청풍면의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광덕산, 선왕산이 있다. 서쪽은 나주호가 있고 나주호 남쪽으로는 봉학천이나주시 다도면과 경계를 이룬다.

1914년에 능주군 도장면(道莊面), 호암면(虎巖面), 남평군 다도면 일부를 합해 서도장면의 ‘도(道)’자와 호암면의 ‘암(巖)’자를 따서 도암면(道巖面)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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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鷰谷寺)는 543년 인도의 고승 연기 조사(烟起祖師)가 세운 사찰로 토지면(土旨面) 내서리 연곡골(鷰谷)에 있는데 화엄사와 함께 지리산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연곡골(鷰谷)의 북쪽에 피아골이 있고 지리산자락일대의 긴 골짜기로 865번 지방도로가 지나간다.

연곡사(鷰谷寺) 서쪽에서 내려오는 연곡천(鳶谷川)과 내동리 당재에서 시작되는 당치천(堂峙川)이 내서천(內西川)으로 유입되는데 내서천(內西川)은 지리산 반야봉남쪽에서 시작되는 하천으로 섬진강에 유입된다.

연곡(鷰谷)지명의 유래는 『구례군사』에서 “동곡(洞谷)의 산형(山形)이 연소(鷰巢, 제비집)와 같다하여 이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연곡사(鷰谷寺)전설 중 연기조사(烟起祖師)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큰 연못에서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연곡사(鷰谷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피아골이라는 지명은 옛날 이곳에서 오곡 중 하나인 피(稷)를 많이 가꾸었기 때문에 피밭골이라 하였다가 바뀐 이름으로 피아골 입구 마을이 직전리(稷田里)다.

연곡사(鷰谷寺)는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창건 된 것으로 추정되며 선종 사찰로 번성하였고 도선 국사, 현각 선사, 진정 국사, 영관 선사, 소요 대사 등 덕망 높은 승려들이  주석(駐錫)하였다.

543년 인도의 고승 연기 조사(烟起祖師)가 세운 연곡사(鷰谷寺)

임진왜란 때 사찰이 모두 불에 탔으나, 1627년(인조 5년)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 : 1562~1649년)이 중창 불사를 하였고 400여 스님과 더불어 총림(叢林 : 선원, 강원, 율원이 갖추어져 있는 사찰)을 열어 선풍을 진작시켰다.

1745년(영조 21년) 왕가에 신주목(神主木 : 위패를 만드는 나무)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내는 율목봉산지소(栗木封山之所)로 연곡사(鷰谷寺)가 지정되기도 하였다.

연곡(鷰谷)지명의 유래는 “동곡(洞谷)의 산형(山形)이 연소(鷰巢: 제비집)와 같다하여 이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연곡사(鷰谷寺)전설 중 연기조사(烟起祖師)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큰 연못에서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연곡사(鷰谷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07년 연곡사(鷰谷寺)가 항일 의병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었던 것을 1924년 소규모 중창이 이루어졌으나 6·25전쟁으로 또 다시 전소되었다. 1980년대 이후 중흥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사찰에는 국보로 지정된 동 승탑(국보 제53호), 북 승탑(국보 제54호)과 보물로 지정된 삼층 석탑(보물 제151호), 현각 선사(玄覺 禪師) 비(보물 제152호), 동 승탑 비(보물 제153호), 소요 대사(逍遙大師) 승탑(보물 제154호) 등  남아 있다.

연곡사 삼층석탑(鷰谷寺 三層石塔)은 높이 6m로 건립연대는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법당 남쪽에 있는데 기단부(基壇部)가 3중 기단(基壇)으로 독특한 석탑이다. 석탑의 3층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이 밑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1967년 해체하여 수리할 때 복원되었다. 이 때 상층 기단 안에서 25.5cm의 금동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었다.

기단부(基壇部)가 3중 기단(基壇)인 연곡사 삼층석탑(鷰谷寺 三層石塔)

기단부(基壇部)의 1중 기단과 2층 기단의 우주(隅柱 : 모서리)와 탱주(撐柱 : 가운데 기둥)의 모양은 형상화 되어 있지 않다. 2층 기단의 위는 2단 각형 굄이 위를 떠받치고 3층 기단은 우주(隅柱) 2개와 탱주(撐柱) 1개는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고 맨 위는 2단 받침이 되어 있다.

3층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이 밑에 떨어져 있었는데 1967년 해체하여 수리할 때 복원되었다. 이 때 상층 기단 안에서 25.5cm의 금동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었다.

3층 기단은 매우 넓어나 탑신부(塔身部)는 줄어든 느낌이 있지만, 맨 아래 기단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체감비율도 온화하며 안정감이 느껴지는 탑이다.

탑신부(塔身部)의 탑신(塔身 : 몸돌)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각 층의 탑신(塔身)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는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4단이고 처마 밑은 수평하다. 옥개석(屋蓋石)의 경사는 경쾌한 곡선이 흐르고, 전각(轉角)의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 올림(反轉)도 우아하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유실되어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곳 연곡사 승탑(鷰谷寺 僧塔)과 석비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주인을 알 수 없어 위치에 따라 동(東) 승탑(僧塔), 동 승탑 비(東 僧塔 碑), 북(北) 승탑(僧塔)으로 부르고 있다.

동 승탑 비(東 僧塔 碑)는 고려시대 제작된 것으로 높이 1.2m로 비신(碑身 : 몸돌)이 없어진 채,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어 주인을 알 수 없다.

사각형 지대석 위에 귀부(龜趺)가 놓여 져 있고 머리는 뿔이 하나 달린 용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나 원래 잘려진 것을 복구해 놓아 부자연스럽다. 발가락 3개를 가진 네 다리로 땅을 딛고 등은 육각형의 무늬(龜甲)에 새 날개 모양의 무늬를 조각해 놓은 귀갑문(龜甲紋)으로 매우 드문 양식이다.

동 승탑 비(東 僧塔 碑)는 등은 육각형의 무늬(龜甲)에 귀갑문(龜甲紋)으로 새 날개 모양의 무늬를 조각해 놓았는데 매우 드문 양식이다.

귀부(龜趺)의 장식은 사령(四靈 : 용, 봉황, 기린, 거북) 중 실재하는 동물로 영원한 시간과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을 형상화했으나 통일신라 말기에 거북머리가 용머리로 변화를 했다. 이는 선종불교(禪宗佛敎)에 대한 지방 세력(호족)의 수용과 선종 지원에 따라 선종 스승의 정신적인 권위와 지방호족 가문의 위세과시였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황제국을 표방한 고려 왕실의 위상으로 거북의 몸도 용의 몸으로 변했다. 이 때 용은 용생구자(龍生九子)의 전설에 따르면 용의 아들 중 무거운 하중을 짊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비희(贔屓)이다. 등 중앙에 비를 끼우도록 마련된 비좌(碑座)의 각 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고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장식하였다.

귀부(龜趺)는 적갈색이고 이수(螭首)는 암갈색인 것은 돌의 재질이 달라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화재와 풍화 등으로 색이 변한 것이다.

이수(螭首)는 삼산형(三山形)의 모양에 구름 속의 용 5마리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고 꼭대기에는 불꽃(火焰)에 휩싸인 보주(寶珠: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조각했다. 용은 용생구자(龍生九子)의 전설에 따르면 용의 아들 중 높은 곳을 좋아하는 이문(螭吻)이다.

동 승탑 비(東 僧塔 碑)의 한 몸이나 귀부(龜趺)는 적갈색이고 이수(螭首)는 암갈색인 것은 돌의 재질이 달라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화재와 풍화 등으로 색이 변한 것이다.

석비(石碑)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일대기를 기록한 태종무열왕릉비 같은 능비(陵碑), 승탑 비(僧塔 碑) 그리고 고을에 부임한 관리를 칭송한 공덕비, 사찰의 내력을 기술한 중수비(重修碑), 중창비(重創碑) 등 사적비(事賊碑)가 있다. 기원은 중국에서 장례를 치를 때에 무덤의 구덩이에 관을 용이하게 내리기 위하여 무덤 앞에 세웠던 돌기둥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후한(後漢) 때 비신(碑身) 한가운데 구멍을 뚫려 관을 내리는 역할을 하였고 비의 테두리에 용, 꽃, 사신(四神) 등을 새겼다. 남북조 시대에 댓돌에 현무(玄武)를 새겼던 귀부(龜趺)와 이맛돌에 용을 새겼던 이수(螭首)가 등장하였다.

구성은 거북모양 받침석인 귀부(龜趺 : 받침돌), 거북 등 한가운데 비(碑)를 꽂아 세울 수 있도록 홈을 판 네모난 받침대인 비좌(碑座)와 비신(碑身) 그리고 구름 속의 용을 새긴 이수(螭首 : 머릿돌)로 되어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비(碑)는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릉비이며 선종불교의 발전에 따른 승탑의 조성은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로 추정하나 실제로 비가 남아 있는 것은 9세기 중엽 이후이고 이로부터 10세기까지 전성기였다.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릉비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릉비와 능

12세기 이후 이수(螭首)가 없어지고 비신 상부의 좌우를 귀접(비신의 상단 양 모서리를 맞대어 구조적인 균형을 잡는 방식)을 한 형식이 나타났고 더욱 쇠퇴하여 귀부(龜趺)도 사라지고 단출한 대석 위에 비신과 지붕 형 덮개돌을 얹은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동 승탑 (東 僧塔)은 연곡사 승탑(鷰谷寺 僧塔) 중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며 통일 신라 후기에 제작 된 것으로 원형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승탑과 함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누구의 승탑인지 알 수 없으나 도선 국사의 사리가 안치된 탑이라 전해 오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동경대학으로 반출하려고 하여 없어질 위기도 있었다. 즉 일본인들이 승탑僧塔)을 산길로 운반하려고 하였으나 불가능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동 승탑 (東 僧塔)과 동 승탑 비(東 僧塔 碑)

승탑(僧塔)의 높이 3m, 팔각 당형(八角 堂型)으로 네모난 바닥 돌(지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세 층으로 하대석(下臺石 : 아래받침돌), 중대석(中臺石 : 가운데받침돌), 상대석(上臺石 : 위 받침돌)으로 되어 있다.

높이 3m, 8각 당형(八角 堂型)의 동 승탑 (東 僧塔)

하대석(下臺石)은 두 단인데, 팔각의 면에 구름에 휩싸인 용과 면마다 형태가 다른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맨 위에는 각형으로 된 3단의 굄이 중대석(中臺石)을 받치고 있다.

팔각의 각 면에 구름에 휩싸인 용과 그 위에 면마다 형태가 다른 사자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중대석(中臺石)은 한 단으로 팔각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과 그 안쪽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 중상(八部 衆像)을 새겼다. 위에는 3단의 굄이 상대석(上臺石)을 받치고 있다.

팔각의 각 면에 안상(眼象)과 그 안쪽에 8부 중상(八部 衆像)을 새겼다.

상대석(上臺石)도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앙련(仰蓮)으로 연꽃잎 마다 국화 같은 꽃무늬가 돋을새김이 되어 있다. 그 위에는 난간 같은 고복형의 마디가 있는 우주(隅柱)가 몸체와 분리돼 있고 여덟 개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겼다. 맨 위에는 낮은 3단의 굄이 있고 그 위에 탑신부(塔身部) 몸돌(塔身)이 놓여 있다.

두 겹의 앙련에 국화 같은 꽃무늬가 돋을새김이 되어 있고 그 위에는 난간 같은 고복형의 마디가 있는 우주가 몸체와 분리돼 있고 여덟 개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 안에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 몸돌은 아래보다 위의 폭이 좁은 사다리꼴로 팔각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 문비형, 가마 등이 돋을새김을 하였다.

사다리꼴로 팔각의 각 면에 4천왕상(四天王像), 문비형, 가마 등이 돋을새김을 하였고 바로 위의 옥개석(屋蓋石) 겹처마 밑에는 구름무늬와 여자 선인(仙人)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은 목조 건축의 지붕 약식을 따르고 있는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정교하다. 지붕마루(隅棟 : 우동) 끝에는 풍탁을 걸어두었던 구멍이 있으며 옥개석(屋蓋石) 겹처마 밑에는 구름무늬와 여자 선인(仙人)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옥개석(屋蓋石)은 목조 건축의 지붕 양식을 따르고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하였으며 지붕마루(우동) 끝에는 풍탁을 걸어두었던 구멍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앙화(仰花)에 연꽃무늬가 장식된 복발(覆鉢), 앙화(仰花)와 복련(覆蓮)으로 구성 된 보륜(寶輪),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 네 마리가 사방으로 향해 있는 보개(寶蓋), 그 위에 앙화(仰花), 보주(寶珠)가 얹혀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앙화(仰花)에 연꽃무늬가 장식된 복발(覆鉢), 앙화(仰花)와 복련(覆蓮)으로 구성 된 보륜(寶輪),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 네 마리가 사방으로 향해 있는 보개(寶蓋), 그 위에 앙화(仰花), 보주(寶珠)가 얹혀있다.

부도(浮屠) 또는 승탑(僧塔)은 스님들의 사리를 두는 곳으로 부도(浮屠)는 '붓다(Buddha)' 의 음역(音譯)으로 부처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선종의 발달로 승려들도 부처와 같이 존경하여 부도(浮屠)라 일컫게 되었다.

승탑(僧塔)의 기원을 살펴보면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는 죽은 후 유골로 초상이 만들어져 분황사에 안치되었고, 자장(慈藏)의 유해는 석혈(石穴)에 봉안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현(惠現)의 시신은 석실(石室)에 두어 호랑이 밥이 되게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의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죽은 후 제자들이 흩어지려는 유골을 모아 흙 속에 매장하였다.

이후 통일신라 말기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선종불교(禪宗佛敎)의 성장과 지방 세력(호족)의 수용과 선종 지원에 따라 승탑(僧塔)이 발생하였다. 특히 선종(禪宗)이 전국 각처 산문(山門)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종풍(宗風)은 스승으로부터 제자가 법통(法統)을 물려받는 사제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시되어 승탑(僧塔) 조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된 승탑(僧塔)은 팔각당형(八角堂型)으로 국립중앙박물관정원에 있는 염거화상 승탑(廉巨和尙 僧塔)으로 선종의 일파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시조이다. 형태는 팔각당형(八角堂型)에서 시원으로 출발하여 석종형(石鐘型), 탑신원구형(塔身圓球型), 보궁형(寶宮型) 등 다양하다.

구성은 석탑과 같이 건물의 형태로 출발한 것으로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기단부(基壇部), 사리를 보관하는 탑신부(塔身部), 그리고 머리장식을 하는 상륜부(相輪部)으로 되어 있다. 특히 상륜부는 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하였다.

북 승탑(北 僧塔)은 동 승탑에서 북쪽으로 150m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또한 팔각당형 승탑으로 동 승탑을 본떠 건립한 것으로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승탑(僧塔)은 높이 3m 팔각 당형(八角 堂型)으로 네모난 바닥 돌(지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세 층으로 하대석(下臺石 : 아래받침돌), 중대석(中臺石 : 가운데받침돌), 상대석(上臺石 : 위 받침돌)을 올렸다.

높이 3m 팔각 당형(八角 堂型)의 북 승탑(北 僧塔)

하대석(下臺石)은 두 단인데, 2단의 팔각 굄 위에 구름무늬를, 그 다음에는 귀꽃이 있는 복련(覆蓮)을 각각 새겼다. 중대석(中臺石)은 팔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안쪽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팔부 중상(八部 衆像)을 새겼다.

하대석(下臺石)은 2단의 팔각 굄 위에 구름무늬를 그 다음에는 귀꽃이 있는 복련(覆蓮)을 각각 새겼다. 중대석(中臺石)은 팔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그 안쪽에는 팔부 중상(八部 衆像)을 새겼다.

상대석(上臺石)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두 겹의 앙련(仰蓮)에 연꽃무늬 장식을 하였고 바로 위에는 난간처럼 생긴 고복형 우주(隅柱)를 장식하였고 우주(隅柱) 사이 면마다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돋을새김을 하였다.

상대석(上臺石)은 두 겹의 앙련(仰蓮)에 연꽃무늬 장식을 하였고 바로 위에는 난간처럼 생긴 고복형 우주(隅柱)를 장식하였고 우주(隅柱) 사이 면마다 릉빈가(伽陵頻迦)를 돋을새김을 하였다. 탑신부(塔身部) 몸돌은 팔각의 각 면에 향로와 4천왕상(四天王像), 문비, 가마 등을 새겨 놓았다.
난간처럼 생긴 고복형 우주사이 면마다 새겨진 가릉빈가(伽陵頻迦)
탑신부(塔身部) 몸돌에 새겨진 가마

탑신부(塔身部) 몸돌은 팔각의 각 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 문비, 가마 등을 새겨 놓았다.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에는 동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기와의 모양을 새겨두었다. 지붕마루(우동) 끝에는 꽃무늬를 새겼고 옥개석(屋蓋石) 겹처마 밑에는 구름무늬와 여자 선인(仙人)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옥개석(屋蓋石) 겹처마 밑에는 구름무늬와 여자 선인(仙人)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옥개석(屋蓋石)에는 동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기와의 모양을 새겨두었고 지붕마루(우동) 끝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상륜부(相輪部)에는 앙화(仰花)에 연꽃무늬가 장식된 복발(覆鉢), 복련(覆蓮)과 앙화(仰花) 로 구성 된 보륜(寶輪),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 네 마리가 사방으로 향해 있는 보개(寶蓋), 그 위에 보주(寶珠)가 온전하게 얹혀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앙화(仰花)에 연꽃무늬가 장식된 복발(覆鉢), 복련(覆蓮)과 앙화(仰花)로 구성 된 보륜(寶輪),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 네 마리가 사방으로 향해 있는 보개(寶蓋), 그 위에 보주(寶珠)가 온전하게 얹혀있다.
날개를 활짝 편 가릉빈가 네 마리가 사방으로 향해 있는 보개(寶蓋),

동 승탑(東 僧塔)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 승탑(北 僧塔)은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이다. 사찰 내에 현각 선사(玄覺 禪師) 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현각 선사(玄覺 禪師) 승탑(僧塔)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의 승탑(僧塔)은 효종 원년(순치 6년, 1650)에 세운 것으로 탑신의 한 면에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 경인(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 庚寅)’이라는 두 줄의 글귀가 뚜렷이 새겨져 있서 승탑(僧塔)의 주인과 건립 연도를 명확히 알 수 있다.

효종 원년(순치 6년, 1650)에 세워진 소요대사 승탑(逍遙大師 僧塔)
탑신부(塔身部)의 탑신(몸돌)에 새겨진 소요대사지탑 순치육년 경인(逍遙大師之塔 順治六年 庚寅)’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은 서산 대사 휴정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린 연곡사(鷰谷寺)를 크게 중창하고 서산 대사의 선 맥을 이은 큰스님이다. 승탑(僧塔)은 높이 3.6m 팔각 당형(八角 堂型)으로 기단부(基壇部)는 세 단으로 나누어 하대석(下臺石 : 아래받침돌), 중대석(中臺石 : 가운데받침돌), 상대석(上臺石 : 위 받침돌)을 올렸다.

기단부(基壇部)는 3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그 위로 탑신을 받치도록 두툼한 굄을 둔 점이 독특하다.

하대석(下臺石)은 2단의 팔각지대석위에 홈이 패어 있는 팔각 면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中臺石)은 가운데 부위가 각진 타원형으로 아래, 위 대칭으로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下臺石)은 2단의 팔각지대석위에 홈이 패어 있는 팔각 면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中臺石)은 가운데 부위가 각진 타원형으로 아래, 위 대칭으로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上臺石)은 2단의 각형(角形) 굄 위에 팔각 앙련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위에는 각형(角形) 굄과 호형(弧形) 굄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은 팔각의 한 면에만 문비(門扉 : 문짝 모양)를 새기고, 다른 한 면에는 글씨, 나머지 여섯 면은 사천왕상(四天王像)과 인왕상(仁王像)을 볼록하게 조각하였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에 새겨진 사천왕상(四天王像)
문비(門扉) 좌우의 인왕상(仁王像)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은 팔각으로 낙수 면은 급경사를 이루었고 전각(轉角)은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여덟 곳의 우동(隅棟)끝마다 큼지막하게 귀꽃이 솟아 있다.

옥개석(屋蓋石) 전각(轉角)은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여덟 곳의 우동(隅棟)끝마다 큼지막하게 귀꽃이 솟아 잇다.

상륜부(相輪部)에는 앙화(仰花)가 조각 된 복발(覆鉢), 두 줄의 횡대에 꽃무늬가 수놓은 보륜(寶輪), 그리고 그 위에 봉황 4마리가 조각되어 있는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상륜부(相輪部)의 복발(覆鉢), 보륜(寶輪),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의 승탑(僧塔) 앞
종인화상 부도

현각선사 비(玄覺禪師 碑)는  고려 경종 4년(979)에 세운 비(碑)로 임진왜란 당시 몸돌(비신)이 없어졌고 일제 강점기 때 약탈과 방화로 더욱 더 파괴되었다. 1970년에 귀부의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조각난 것을 복원해 놓은 것으로 현재는 받침돌(龜趺)과 머릿돌(螭首)만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비문은 학사 왕융(王融)이 짓고, 글씨는 동정주국(同政柱國) 장신원(張信元)이 쓴 것이다.

비(碑)는 높이 1.9m로 몸돌(碑身)이 없어진 채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고 이수(螭首) 앞면 가운데(제액)에 현각 선사 비명(玄覺 禪師 碑銘)’이 새겨져 있어, 주인이 현각선사(玄覺 禪師)임을 알 수 있다.

이수(螭首) 앞면 가운데(제액)에 현각 선사 비명(玄覺 禪師 碑銘)’이 새겨져 있다.
귀부의 머리 부분과 몸통 부분이 조각난 것을 복원해 놓은 흔적

사각형 지대석 위에 귀부(龜趺)가 놓여 져 있고 뿔이 하나 달린 용의 머리에 부리부리한 두 눈과 큼직한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입 주변에 수염을 새겼다. 발가락 4개를 가진 네 다리로 땅을 딛고 등은 귀갑문(龜甲紋)으로 거북 모양의 등(龜甲)에는 꽃을 조각했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의 4면에는 안상(眼象)속에 귀꽃 이 새겨져 있다.

비좌(碑座)의 4면에는 안상(眼象)속에 귀꽃 이 새겨져 있다.

이수(螭首)는 여러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이 조각되었고 비석 안으로 스민 물을 빼는 물구멍이 받침돌 비좌와 머릿돌 윗부분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수(螭首)에는 여러 마리의 용이 서로 얽힌 모습이 조각되었다.
비석 안으로 스민 물을 빼는 물구멍이 받침돌 비좌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토지면(土旨面)은 구례군의 동쪽에 위치한 면으로 동쪽은 하동군, 서쪽은 마산면, 북쪽은 산동면, 남쪽은 섬진강을 경계로 간전면과 문척면에 접하고 있다. 섬진강을 경계로 토지면은 북쪽에, 간전면은 남쪽에 위치하고 지리산이 북동쪽에 위치하여 산지가 전체면적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그리고 토지면(土旨面)은 원래 토지면(吐旨面)으로 표기되었으나 1899년(광무3) 토지면(土旨面)으로 개칭하였다. 화엄사에 딸려 도자기를 만들어 바치던 토지처(吐旨處)였던 것에서 토지지명이 유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토지처(吐旨處)는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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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암(四聖庵)은 구례군(求禮郡) 문척면(文尺面) 죽마리에 있는 오산(鼇山) 정상의 깎아지른 암벽에 지은 사찰로, 백제성왕22년(544년)에 연기조사가 건립하여 오산암(鼇山庵)이라 불리다가 이곳에서 4명의 고승(의상, 원효, 도선, 진각국사)이 수도하여 사성암(四聖庵)으로 불렸다. 사성암(四聖庵)은 8∼13세기까지는 상당한 크기의 수도 도량이었다.

4명의 고승(의상, 원효, 도선, 진각국사)이 수도한 사성암(四聖庵)
왼쪽부터 53불전(五十三佛殿)과 유리광전(琉璃光殿)

오산(鰲山, 542m)은 구례군의 문척면 죽마리에 위치한 산으로 섬진강이 서쪽에서 오산(鼇山)을 감돌고 흘러 동쪽으로 빠져나간다. 꼭대기에 바위가 하나있고 바위에는 빈틈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깊다. 전하는 말에, 도선(道詵)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오산(鼇山)은 「봉성지」(구례향교 발간, 1800년)에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예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기록되어 있다.

오산(鼇山)의 정상 표지석

사성암(四聖庵)은 터가 좁아 가파른 암벽에 전각을 조성하였는데 오산의 우뚝 솟은 기암괴석과 전각이 조화를 이루어 뛰어난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이곳에서 보는 주변 풍광은 매우 뛰어나는데 구례의 들녘과 섬진강, 멀리 지리산 연봉들, 구례읍과 7개 면(面)을 한 곳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유리광전(琉璃光殿)에서 바라본 섬진강 풍광
산왕전(山王殿) 앞에서 바라본 구례읍과 7개 면(面) 전경

주의할 점은 사성암(四聖庵)에 올라가는 길이 좁고 굴곡이 심하여 차량을 만나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오산아래의 정류장에서 암자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면 편리하다.

사성암(四聖庵)에는 유리광전(琉璃光殿), 53불전(五十三佛殿), 지장전(地藏殿), 산왕전(山王殿) 등 당우와 도선굴, 배례석, 소원바위와 유형문화재 제220호인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이 있다.

주불전은 유리광전(琉璃光殿)으로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고 이곳에 유형문화재 제220호인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고 한다.

사성암(四聖庵)의 주불전인 유리광전(琉璃光殿)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은 높이 3.9m로 전체적으로 간략화 된 음각기법으로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머리에는 넓적하고 낮게 솟은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었는데 왼쪽 어깨의 옷 주름이 촘촘한 격자무늬를 하고 있어 다소 생소한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위에 있고 왼손은 가슴 아래에 대어 뭔가 받치고 있는 듯 한 모습이다.

불상의 뒤에는 광배(光背)가 표현되었고 머리 주위에도 2줄의 띠를 두른 원형의 머리광배가 있고 광배에는 불꽃무늬와 넝쿨무늬가 있는데,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의 무늬와 비슷하다.

유형문화재 제220호인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아쉽게도 공사 중 관계로 그림으로 대체하고 있다.

53불전(五十三佛殿)에는 화엄세계의 53불과 500나한을 모신 법당으로 53불은 조선후기에 조성하였는데 33불만 남아있고 20불은 현대에 조성하였다.

53불전(五十三佛殿)
지장전(地藏殿)
주존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고 있는 지장전(地藏殿)
산신(山神)을 모시고 있는 산왕전(山王殿)
산왕전(山王殿) 옆의 암벽
도선굴
도선굴에서 바라본 산왕전(山王殿)

배례석(拜禮石)은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일반적으로 석탑 앞에 있으나 사성암(四聖庵)의 배례석(拜禮石)은 화엄사 방향으로 있는데 이 암자에서 불상을 모시기 전 스님들이 이 배례석(拜禮石)에서 화엄사를 향해 부처님께 예를 올렸다고 한다.

배례석(拜禮石)
사성암(四聖庵)의 배례석(拜禮石)은 화엄사로 향하고 있다.

소원바위는 부처님의 형상을 닮은 바위로 이 바위는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하여 소원바위로 불린다. 뗏목을 팔러 하동으로 내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내를 잃은 설움으로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사연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소원바위

구례군(求禮郡)은 전라남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경상남도 하동군, 서쪽은 곡성군, 남쪽은 순천시와 광양시, 북쪽은 전라북도 남원시와 접하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지리산이 있고, 섬진강이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흘러들어와 군의 중앙을 서쪽으로 지나가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구례현은 본시 백제의 구차례현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경덕왕 때부터 지명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척면(文尺面)은 구례군의 남쪽에 위치한 면이다. 동쪽은 간전면, 서쪽은 구례읍, 남쪽은 순천시, 북쪽은 섬진강을 경계로 토지면·마산면과 접하고 있다. 백운산 준령이 둘러 있을 뿐 아니라 섬진강이 휘감아 흘러가고 있어 반달형의 지세를 이룬다. 섬진강변에 약간의 평야가 있을 뿐 대부분 밭으로 이루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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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빙고(石氷庫, 경주시 인왕동 449-1 일원)는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돌로 된 얼음 저장 창고이다. 현재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석빙고(石氷庫)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 하천의 얼음을 겨울에 잘라 저장하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여 이미 신라 시대에 관청에 명해 얼음을 저장하게 했으며 이 일을 담당한 빙고전(永庫典) 이라는 기관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밤의 석빙고(石氷庫)
경주 석빙고(石氷庫)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이며 가장 완전한 석빙고(石氷庫)다.

석빙고(石氷庫)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출입구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너비 201cm, 높이 178cm 규모의 남쪽 입구를 들어서면 입구와 바닥과의 지반 차이를 처리하기 위하여 계단을 두어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반대쪽인 북측은 밑바닥을 경사지게 처리하였으며 북벽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에서 발생한 물이 처리되도록 하였다.

바닥면에는 길이 방향으로 자갈이 노출된 부분이 있는데, 바닥에 목재를 깔아 놓았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장방형의 빙실은 길이 1,880cm, 너비 594cm, 높이 497cm의 규모이다.

내부는 치석된 돌로 5개의 홍예보(虹寛棵)를 들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는 장대석을 걸쳐 천장을 구성하였다. 홍예 구조 위에 봉토를 조성하고 입구를 남쪽에 배치한 장방형이다. 입구 양측에는 ‘ㄱ’자형의 석축이 둘러져 있어 바람에 의해 바깥 공기가 빙실 내부로 쉽게 유입되지 않도록 하였고 아치형의 봉토 위에는 3기의 환기구가 노출되었다.

북벽과 입구가 있는 남벽은 지반과 수직한 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벽면의 하단부는 길고 큰 규모의 장대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축조하였다. 지반은 토양과 잔자갈로 이루어졌고 북쪽을 향하여 약 3~4°의 경사를 가지면서 점차 낮아진다. 지붕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열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석빙고(石氷庫)의 형태와 재질은 다양한 석재로 축조되었고 잘 다듬어진 방형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나 일부 치석 수법이 다른 부재가 있다. 입구 양 측벽에는 목조 건물의 초석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재가 사용되었으며, 내부에는 표면의 치석 정도와 형태가 다른 부재들이 다수 있다. 또한 쐐기공과 같은 채석 흔적이 선명한 부재도 나타나며 다른 건축물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형의 석재도 있다.

아치형의 봉토 위에는 3기의 환기구

석빙고(石氷庫) 좌측에 있는 비문에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1741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1738년(영조 14년)에 경주부윤 조명겸(趙明謙)이 나무로 되어 있던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고 현 위치의 서쪽 약 70m 지점에서 지금의 위치로 4년 후에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빙고비(石氷庫碑, 1738년, 영조 14)

실제 원래의 빙고지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동서 방향의 장방형 웅덩이 흔적이 있다. 월성 내부에 대한 지표 조사 결과, 옛 석빙고 터로 전하는 곳에 있는 구덩이는 규모가 동서 3,000cm, 남북 1,000cm, 높이 150cm 정도이며, 특별한 시설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798년에 만들어진 「경주읍내전도」에는 초빙고(草氷庫)가 그려져 있는데, 월성의 서편 지역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구체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기록에도 『~빙고 담당 관원이 갈대를 베어다가 빙고의 아래 위 사방에 두껍게 깔아 저장된 얼음이 녹아 없어 지지 않도록 하였다.』라는 글이 있다.

현재 석빙고에 대해서 신라신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신라시대 축조설과 조선시대 축조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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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북쪽에 위치한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호)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점성대(占星臺)라고도 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사용된 돌은 모두 376개이며, 화강암을 주로 사용하였다.

월성 북쪽에 위치한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호)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점성대(占星臺)라고도 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관련 문헌으로 『삼국유사』 권1 왕력에 【(나물마립간의) 능(陵)은 첨성대(占星臺) 서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기이1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에도 【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경주)부성(府城) 남쪽 모퉁이에 있는데,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 7년 계사(癸巳), 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속으로부터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과 『승정원일기』에 【영조 44년(1768) 2월 1일에 왕이 “경주 첨성대 위로 직접 올라가 보았는가?”라고 물으니, 홍계희가 “첨성대 안쪽의 돌이 층계를 이루고 있어 오를 수가 있습니다. 사인(使人 : 심부름꾼)에게 오르라 하여 첨성대 꼭대기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고 하였다】 기록을 통해 첨성대(瞻星臺)는 바깥쪽에서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에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지면에 한 변 5.3m 내외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이며, 지대석(地臺石 : 건축물을 세우려는 땅을 둘러서 쌓은 돌) 8개와 기단석(基壇石 :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단을 쌓는 돌) 12개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기단석 위쪽만 10cm 정도 드러났다.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 곡선으로 쌓았는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 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 1단의 높이는 약 30㎝이고 그 위에 네모형의 장대석을 두 겹으로 ‘정(井)’자 형으로 얹었다. 13단과 15단에 걸쳐 남쪽으로 향한 곳에 조그마한 출입구를 두었는데,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있어 이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19, 20단과 25, 26단 두 곳에 ‘정(井)’자 형의 장대석이 걸쳐져 있다. 27단의 내부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판목을 놓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정상부의 ‘정’자 형의 돌 위에도 관측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천문관측은 두 분야로 나누는데 하나는 역법을 만들기 위해 태양과 달 그리고 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항성의 배치로 정해진 별자리를 지방 또는 국가로 분배하고 그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반 천문현상을 관측하여 길흉을 점치는 점성(占星)이다. 특히 점성(占星)은 국가나 왕조에게는 매우 중요했으며 되도록 왕궁에 가까워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첨성대(瞻星臺) 축조자에 대한 기록으로는 석씨계보(昔氏系譜)가 유일한데 석탈해왕(昔脫解王) 16세손인 석오원이 축조했다고 되어 있다.

첨성대(瞻星臺) 25, 26단 두 곳에 ‘정(井)’자 형의 장대석이 걸쳐져 있다.
첨성대(瞻星臺) 13단과 15단에 걸쳐 남쪽으로 향한 곳에 조그마한 출입구를 두었는데,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있어 이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때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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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최북단 왕정골(王井谷)에 자리한 상서장(上書莊 : 인왕동274번지 일대 4,960평)은 낭산의 서북쪽에 있는 독서당(讀書堂)과 함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이다.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반월성(半月城)이 보이고, 그 앞에는 문천(蚊川)과 인용사지(仁容寺址)가 있다.

왕정골(王井谷)은 동남산과 서남산의 경계 지점에 있는 계곡으로 모양새가 삐쭉이 나와 있어 언뜻 보면 독립된 산을 형성하는 듯도 하지만, 남산의 최북단에 위치한 계곡으로 길이는 매우 짧다. 계곡 끝의 서편을 도당산이라고 부른다. 계곡 서남쪽에는 서남산으로 진입할 수 있는 식혜골 능선과 연결되고 있고 능선 동쪽은 절터 골과 연접해 있다.

계곡의 명칭은 왕(王)이 자주 드나들며 사용하던 우물(井)이 있는 계곡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다. 왕정(王井)이라는 우물이 있던 곳은 현재 경주∼포항간 국도가 지나는 바람에 완전히 유실되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옥정(玉井)이라는 명문기와가 수습이 되었는데 옥정(玉井)이라 함은 곧 왕정(王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계곡에는 총 3곳의 절터가 있는데 문천 남쪽의 인용사지(仁容寺址)를 포함하여 상서장(上書莊)이 위치하는 곳도 통일신라시대 절터였다. 그래서 상서장(上書莊)을 둘러보면 옛 절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서장(上書莊)은 신라 말 문란한 기강과 정치를 바로잡고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린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崔致遠)은 통일신라 후기의 학자로, 12세 되던 경문왕 8년(868)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과거급제 한 후 벼슬길에 올랐다.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하여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時務十條)를 올리는 등,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노년에는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에 은둔하며 지내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건물은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가 조선시대에 폐허화된 것을 18세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875년 경주부윤 이돈상(李敦相) 이 문창후(文昌侯) 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의 비문을 지어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연화대석위에 세웠는데 현재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상서장(上書莊)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린 곳이라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건물은 고려시대 때 통일신라시대 절터에 건립되었다가 조선시대에 폐허화된 것을 18세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가운데에 진앙문(進仰門)이라는 외삼문이 있고, 안쪽 네모난 담장가운데에 솟을삼문의 추모문(追慕門)이 있다. 그 안에 상서장(上書莊)이 있으며, 그 뒤로 영정각(影幀閣)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상서장(上書莊)은 정면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전체에 툇간을 두고 있다.

상서장(上書莊)의 건물배치는 맨 앞에 진앙문(進仰門)이라는 외삼문이 있고, 안쪽 네모난 담장가운데에 솟을삼문의 추모문(追慕門)이 있다. 그 안에 상서장(上書莊)이 있으며, 그 뒤로 영정각(影幀閣)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가운데에 진앙문(進仰門)이라는 외삼문이 있다.
솟을삼문의 추모문(追慕門)
정면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의 상서장(上書莊)
영정각(影幀閣)

상서장(上書莊)은 폐쇄형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1칸과 2칸을 두었다. 사당인 영정각(影幀閣)을 세웠는데, 뒤의 두 곳에 축대를 한 단씩 쌓고, 앞으로 툇간을 둔 3칸에 풍판이 달린 맞배지붕이다. 상서장 담장 밖 동북쪽에는 비각이 있고, 서쪽에는 '一'자형의 고직사(庫直舍)인 화수정(花樹亭)과 재사(齋舍)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상서장(上書莊) 담장 밖 동북쪽에는 경주부윤 이돈상이 지은 문창후(文昌侯) 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와 비각이 있다.
문창후(文昌侯) 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가 있는 비각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연화대석위에 세워진 문창후(文昌侯) 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

문창후(文昌侯)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주 금오산 북쪽 문천언덕에 상서장이 있는데 곧 문창후 최선생 거 하시 던 옛터다. 선생의 휘는 치원, 자는 고운, 호는 해운이며 사량부사람이다. 신라 헌안왕 원년정축(A.D.857)에 문창현에서 태어났고 고려 때 문창후로 봉해졌다. 나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당 희종 갑오(A.D.874)에 등제하였고 侍御使의 관직에 올랐으며 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문장을 잘 하였는데 黃巢檄文을 지어서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28세 때 조서를 받들고 귀국하자, 헌강왕이 고국에 머무르게 하며 侍讀翰林學士의 관직을 내렸다. 신라는 날로 어지럽고 고려의 국운은 바야흐로 일어나자 곧 조정에 글을 올려서(上書) 國政을 논했는데, 이 글속에 ‘鷄林은 黃葉이고 鵠嶺은 靑松이다.’는 말이 있었다. 이 글을 올린 집을 上書莊이라 한 것인데, 대개 이러한 까닭이다.

상서장 동쪽에는 낭산서당이 있으니 곧 선생이 독서하던 곳이고, 상서장 서쪽에는 서악서원이 있는데 이는 선생을 享祀하는곳이다. 堂宇를 수리하고 선조를 존모하는데 자손이 모든 정성을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곳 상서장은 지금 건립한지 몇 년이 흘렀으나 비석을 세워 기록해놓은 글이 없으니 유림의 欠典이 아닌가.

병자년(A.D.1876)에 선생의 후손들이 비로소 表石을 세우고 나에게 글을 부탁해 왔다. 아! 슬프다. 선생의 淸風과 孤節은 동해와 함께 영원히 전할 터인데, 이처럼 작은 비석하나도 족히 輕重을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손이 이 상서장을 愛護하는도리에 있어서 다소의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 전 참판(前 參判) 경주부윤 이돈상(李敦相) 짓다. -

비각 동쪽 담장아래에 있는 절터의 석재들
상서장(上書莊) 앞의 장대석
상서장(上書莊)을 둘러보면 옛 절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추모문(追慕門) 건물의 초석에서 주로 확인된다.
기둥과 맞지 않는 고맥이초석
기둥과 맞지 않는 원형초석

상서장(上書莊)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할매바위(동제바위)가 있는데 바위 크기는 높이 3.5m∙폭 3m 정도이다. 바위 앞쪽에는 시멘트로 160×90×30㎝크기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양지마을, 해맞이마을, 서원마을, 인용마을이 함께 동제를 모시는 장소이다. 이 할매바위 아래에도 바위가 있는데 이들을 합쳐 고운대(孤雲臺)라 부르고 있다.

상서장(上書莊)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할매바위(동제바위)가 있는데 바위 앞쪽에는 시멘트로 160×90×30㎝크기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양지마을, 해맞이마을, 서원마을, 인용마을이 함께 동제를 모시는 장소이다.
할매바위아래의 고운대(孤雲臺)

왕정골(王井谷)에서 통일신라 7세기 후반~8세기에 조성 된 석조불입상(石造佛立像)이 발견 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높이 201.cm로 광배와 신체가 한 돌로 제작되었으며 무릎아래는 결실되었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는 높은 편이고, 긴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이마에는 큰 백호 구멍이 있다. 굵은 목과 단정한 어깨 등 건장한 체구를 하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손등을 밖으로 하여 가슴위에서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내보이면서 배 앞에 대고 있다. 통견의 대의위에 둥근 옷 주름이 계단식으로 내려오다가 다시 복부에 놓여진 왼손을 중심으로 호형(弧形)의 옷 주름이 반복된다. 신체의 비례는 균형이 잡히고 가늘어지는 허리가 유난히 강조되었다.

주형광배(커다란 배 모양)내부는 보주형의 두광과 신광으로 나누어져 있고, 넝쿨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하였고 빛을 형상화한 것이다. 등 뒤의 광배에는 나뭇잎처럼 단순화된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왕정절골 석조불입상(王井谷 石造佛立像 : 높이 201.cm, 통일신라 7세기 후반~8세기, 국립경주박물관) : 신체가 한 돌로 제작되었으며 무릎아래는 결실되었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는 높은 편이고, 긴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굵은 목과 단정한 어깨 등 건장한 체구를 하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손등을 밖으로 하여 가슴위에서 說法印을 취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내보이면서 배 앞에 대고 있다. 통견의 대의위에 둥근 옷 주름이 계단식으로 내려오다가 다시 복부에 놓여진 왼손을 중심으로 弧形의 옷 주름이 반복된다. 신체의 비례는 균형이 잡히고 가늘어지는 허리가 유난히 강조되었다. 주형광배내부는 보주형의 두광과 신광으로 나누어져 있고, 나무줄기 같은 무늬가 외곽부를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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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산(都堂山)은 남산의 한 봉우리로 남산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산맥의 끝머리에 솟은 산으로 봉우리가 세 개로 이루어진 작은 산(95m이다. 경주 향교의 안산이며 반월성에서 마주 보이는 가장 가까운 산이다.
풍수지리적으로 경주 남산은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금오산(金鰲山)이라 부르는데 도당산(都堂山)은 자라의 머리에 해당되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흔히 경주 남산을 북쪽의 금오봉(金鰲峰, 468m)을 금오산(金鰲山),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494.6m)을 고위산(高位山)으로, 각각 독립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도당산(都堂山)은 남산의 한 봉우리로 남산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산맥의 끝머리에 솟은 산으로 봉우리가 세 개로 이루어진 작은 산(95m이다.
경주 남산을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금오산(金鰲山)이라 부르는데 도당산(都堂山)은 자라의 머리에 해당되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도당산(都堂山) 초입에서 본 월정교와 반월성

도당(都堂)이란 마을을 지키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 또는 정치를 의논하는 곳으로 신라이전부터 사로의 육부 촌장들이 모여 나라의 태평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나라 일을 의논하던 곳이다.
‘도당(都堂)’과 ‘남당(南堂)’을 같은 의미로 보아 남당정치를 하였던 것으로 해석하는데 신라에서 남당정치를 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3년(249)에 “궁궐 남쪽에 남당(南堂)’을 지었다.”고 한 것이 있다.
신라초기의 임금들은 하늘의 뜻에 의해 백성을 다스렸다. 신라 두 번째 임금을 차차웅이라 불렀는데, 차차웅이란 말은 무당이란 뜻이다. 즉 하늘의 신과 말이 통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또한 사로시대부터 숭상하던 계림 숲이나, 나정 우물들이 모두 이산 부근에 있다.

월정교에서 출발하여 도착한 도당산(都堂山) 초입

지금 도당산(都堂山)은 산 전체가 무덤으로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산정에 올라가면 평지가 나오는데 정자 터로 추정되는 것에는 고신라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다. 그 자리에 화랑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지금 도당산(都堂山)은 산 전체가 무덤으로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산정에 올라가면 평지가 나오는데 정자 터로 추정되는 것에 고신라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고 그 자리에 조성된 화랑정
화랑정에서 바라본 월정교

도당산(都堂山)은 일명 장두산(墻頭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돛대 같은 산이라는 뜻이다. 도당산(都堂山)에서 맨드리 고개로 이어져 해목령으로 곧게 뻗어 오른 산맥은 전진하는 돛대(장두 : 墻頭)로 보였기 때문이다.
고려는 신라가 나라를 바친 후에도 다시 일어설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도당산(都堂山)의 산맥을 끊어 놓았는데 돛대를 잘라 놓은 것이다. 왕정골에서 식혜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깊이 파여져 있는데 그것은 산맥을 잘라 놓은 흔적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 다른 풍수이야기는 행주형行舟形) 풍수로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다. 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 가던 후삼국 시대, 고려의 왕건은 신라가 다시 일어설 것을 염려하여 풍수지리설의 착안하여 비밀스럽게 풍수장이 한 명을 신라로 보냈다.
그는 신라의 임금을 찾아가 신라의 수도는 봉황의 보금자리처럼 생겨서 왕조의 번성이 지속되려면 봉황이 떠날 수 없게 알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 말에 혹한 임금은 백성을 동원하여 둥글게 흙을 쌓아 수많은 알의 형상을 만들었다.
왕건의 보낸 풍수장이 말은 거짓이었다. 실상 경주는 봉황의 보금자리가 아닌 배의 형상을 한 행주형(行舟形)이였고, 봉황 알 모습의 거대한 흙더미는 파도에 휘청거리는 배에 과도한 짐을 싣는 모양이 돼버렸다. 풍수장이는 알의 형상이 가장 많은 미추왕릉 곁 밤나무 숲에 깊은 우물을 판 뒤 고려로 달아났다. 침몰하는 배에 구멍을 뚫어버린 것으로, 이후 신라는 급속히 파멸의 길을 걸었다.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서 배가 뜬 모양이란 행주형(行舟形)은 행운의 터라고 말하는데 배가 재물과 사람을 운반했기 때문에 배에는 사람과 재화가 모인다고 하여 배 모양의 땅에 묘를 쓰거나 집을 지으면 번창한다고 믿었다. 주형(舟形), 배 모양의 앞에 행(行)자를 붙여서 배가 떠다니는 형상을 말하는 것이다.
도당산(都堂山)은 지난 1976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경주IC와 국도 7호선를 연결하기 위해 서라벌대로가 건설되면서 남산과 분리되어 단절되었다. 건설 당시 박씨 일족이 금오산(金鰲山)의 정기가 도당산(都堂山)을 통해 오릉에 이르는 맥을 끊는다고 반대운동을 한때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후 도당산(都堂山)의 문화재 훼손도 가속화가 되는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이에 반월성에서 월정교를 거쳐 도당산(都堂山), 남산으로 통하는 남산 옛길을 복원하고 남산과 동일 권역으로 묶어 관리하기 위해 남산과 도당산(都堂山)을 잇는 인공 터널 공사를 2012년에 착공하여 2016년 11월 28일 완공하여 개통하였다. 인공터널은 폭 30m, 길이 111m, 선형개량 구간은 580m에 이른다.

도당산(都堂山)은 지난 1976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경주IC와 국도 7호선를 연결하기 위해 서라벌대로가 건설되면서 남산과 분리되어 단절되었다. 오른쪽이 도당산(都堂山)
남산과 도당산(都堂山)을 잇는 인공 터널 공사를 2012년에 착공하여 2016년 11월 28일 완공하여 개통하였다.
폭 30m, 길이 111m, 선형개량 구간 580m 인공터널
공원으로 조성된 터널 상부

도당산(都堂山)에 토성(都堂山土城)도 있으며 남산토성과 인접하고 있고 나정(蘿井), 오릉(五陵), 월성(月城) 일대의 벌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체성(體城)은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토축하였는데 지금은 대부분 훼손되고 원상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은 동남쪽으로 50m 정도이다.
현재 비교적 성체의 보존상태가 양호한 동남쪽 부분의 경우 성벽 바깥높이 4m, 안쪽 높이 1.2m, 상부너비 4.5m 규모이고 전체길이는 약 1㎞ 정도로 추정된다. 성내의 시설물은 서쪽과 남쪽에 각각 2개소, 동쪽에 1개소로 모두 5개소의 문지와 북쪽과 남서쪽에 각 1개소의 건물지가 있다.
남산에는 4개의 성터가 있는데, 도당산(都堂山) 토성, 남산토성, 그리고 남산신성, 고허성이다. 이들 토성과 산성의 축조 연대는 월성과 가까울수록 빠르며 토성(土城)에서 석성(石城)으로 전이(轉移)되어 갔다. 이에 처음에는 도당산(都堂山) 토성, 남산토성이 왕경 방비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점차 남산신성과 고허성으로 왕경 방어의 역할은 확대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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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천년 숲 정원’은 경주 동남산 자락에 자리한 경북도 제1호 지방정원으로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內(경주시 통일로 366-4 일원)에 있으며 2023년 4월 24일 개원했다.

지자체가 조성·관리하는 국내 다섯 번째 지방정원이자, 경상북도에서는 첫 번째 지방정원이다. 규모는 96,800평으로 2016년부터 2022년까지 7년간 국비 29억 원, 도비 108억 원 등 총 137억 원을 투입한 정원이다.

정원 내에는 거울 숲, 분재원, 서라벌정원, 버들 못 정원, 꽃 보라 정원, 천연기념물원, 무궁화동산, 늘 솔 광장, 숲 그늘 정원, 미리내 정원, 아름 숲, 드리 숲 등 12개 주제정원이 조성돼 있다. 433종 27만 본의 식물이 식재됐으며, 이 중 목본류가 360종 5만 본, 초본류가 73종 22만 본을 차지한다.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관람 포인트이자 포토 존은 맑은 실개천 위로 놓인 ‘외나무다리’와 그 주변을 감싸는 ‘거울 숲’이다.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관람 포인트이자 포토 존은 맑은 실개천 위로 놓인 ‘외나무다리’와 그 주변을 감싸는 ‘거울 숲’이다. 물결이 잔잔한 개울물 위로 숲과 사람이 또렷하게 비치는 장면은 이곳을 찾은 이들의 매력 포인트다.

가장 멋있는 풍경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와 칠엽수 숲길이다.

메타 세퀘이아(Metasequoia)는 화석식물인 Sequoia와 후에 구별된 식물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석탄기 이전에 번성한 식물로 현재는 중국 일부에서 자생하고 있으며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꽃피는 시기는 4월이며 피는 꽃은 가지 끝에 달려 밑으로 늘어진다. 열매 맺는 시기는 6~7월이다. 곧게 뻗는 수형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심어 기른다.

칠엽수(마로니에)는 칠엽수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으로 잎새 일곱 장이 둥글게 모여 달려 칠엽수란 이름이 붙었다. 지중해 발칸반도가 고향인 유럽칠엽수와 일본원산 칠엽수가 있으며 우리나라 공원이나 길가에 있는 칠엽수는 일본원산 칠엽수로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고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칠엽수도 이때 심어졌다.

칠엽수 열매껍질을 까면 밤(栗, Chestnut)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밤은 뾰족한 꼭지점이 있지만 칠엽수 열매는 그런 게 없고 독성이 있어 그냥 먹으면 안된다. 서양에서는 밤을 마농이라고 부르며 마로니에란 이름도 이 열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칠엽수(마로니에) 열매
칠엽수 열매껍질을 까면 밤(栗, Chestnut)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밤은 뾰족한 꼭지점이 있지만 칠엽수 열매는 그런 게 없고 독성이 있어 그냥 먹으면 안된다. 서양에서는 밤을 마농이라고 부르며 마로니에란 이름도 이 열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칠엽수는 덕수궁에 있는 서양칠엽수로 1913년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에게 선물하여 심은 나무이다.

경북천년 숲 정원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 해가 짧은 동절기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운영 시간이 조정된다. 입장료와 주차비가 모두 무료다. 또한 숲 해설 프로그램과 유아 숲 체험원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상수리나무 열매. 상수리나무는 도토리를 뜻하는 한자어 상실(橡實)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4~5월 수꽃은 늘어지며 피고 암꽃은 1~3개가 잎겨드랑이에서 핀다. 열매는 10월에 익는데 주로 묵을 쑤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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