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머무는 곳’, ‘배를 움직이는 곳’으로 알려진 운주사(雲住寺)는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의 나지막한 야산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10~11세기 고려 초에 창건한 사찰로 14~15세기에 가장 번창하였고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폐찰 되었다. 지금은 현재 석불 70구와 석탑 18기만이 남아 있으나, 1942년에는 석불 213구,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이곳의 탑이나 석불을 헐어다가 묘지 상석을 만들기도 하고 주춧돌, 섬돌로 축대를 쌓는 데 사용했고, 때로는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도 했다고 한다.


1921년에 간행된 『도암 면지(道岩面誌)』에 의하면, 1918년에 전 군수(前郡守) 박윤동(朴潤東) 등 16명이 시주하여 재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72년~1978년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하였고, 근래에 송광사의 말사로 편입되면서 대대적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수많은 전각을 건립하고 주변을 정비하고 있다.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21 교구 본사 송광사(松廣寺) 소속 사찰이다.
절 주변은 사적 제312호로 지정되었고 입구의 구층 석탑은 보물 제796, 중심부의 석조불감(石造佛龕)은 보물 797호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원형다층석탑은 보물 789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이곳의 석탑은 모양이나 무늬의 표현방식이 매우 독특하고 층수도 다양하며 둥근 공 모양의 원형 탑이나 호떡 모양의 돌을 올려놓은 듯 등 특이하다. 또한 탑의 표면에 ‘X’, ‘◇’, ‘川’과 같은 기하학 무늬들이 새겨 있어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운주사(雲住寺) 內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70여 구의 석불도 그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평면적이면서 토속적인 생김새에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신체 구조는 고려시대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와불(臥佛 : 누운 부처)이 유명한데 미처 일으켜 세우지 못한 불상으로 도선 국사가 천불(千佛) 천탑(千塔)을 하룻밤에 세울 때 맨 마지막으로 좌불과 입상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는데, 공사에 싫증난 동자승이 닭이 울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불상을 세우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1530년(중종 5)에 증보된 『동국여지승람』의 능성현(綾城縣) 조에 「운주사(雲住寺)는 천불산(千佛山)에 있다. 절의 좌우 산마루에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개 있고, 또 석실이 있는데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1632년에 간행된 『능주목지(綾州牧誌)』에 「운주사(雲住寺)는 지금 폐찰 되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폐사된 이후 설담자우(雪潭自優)의 「운주동 불탑 수리 후 중건 약사전 권선문(雲住洞 佛塔修理 後 重建 藥師殿 勸善文)」에 의하면 19세기 초반 훼손된 불상과 무너진 불탑을 중수하고 새로이 약사전(藥師殿)을 중건하였고 이를 약사사(藥師寺)로 기록하고 있다.
설담자우(雪潭自優, 1709~1770) 스님은 어려서 순창 강천사(剛泉寺)에 들어가 모은 지훈(暮隱智薰, ?~1736)에게 계를 받으며 청허의 제자인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의 법통을 이었다. 이후 강천사에 딸린 연대암(蓮臺庵)에서 노년을 보내고 입적했다.
스님에 대한 기록으로는 1784년에 간행된 <설담집(雪潭集)>이 있는데, 설담의 제자이자 이후 대흥사의 12대 강사 중 한 명이 되는 나암 승제(懶菴勝濟)가 주축이 되어 각종 글을 엮은 문집이다.

운주사(雲住寺)에 대한 발굴조사는 전남대박물관에서 1984년부터 네 차례를 실시하였는데 운주사(雲住寺)의 본래 절터는 현재 대웅전이 있는 곳이 아니라 주차장이 있는 곳 위의 밭 근처였음이 확인되었다. 1989년 조사에는 석탑들 가운데 두 기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로 운주사 환은천조, 홍치 8년(雲住寺 丸恩天造, 弘治 八年)이라고 적힌 암막새 기와가 나와서, 원래 절 이름이 운주사(運舟寺)가 아니라 운주사(雲住寺)라는 것과 1495년(연산군 1)에 중창된 적이 있음을 밝혀졌다. 그리고 발굴 후 다시 흙으로 덮어 현재는 잡초만 무성하다,
운주사 일대의 암석은 중생대 백악기에서 화산에서 분출된 화산재와 돌덩이가 켜켜이 쌓이면서 만들어진 응회암이다.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경도가 약한 응회암은 잘 깨지고 부스러지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제작하였다. 운주사에는 여기저기 벽에 기대어 간신히 서있는 불상이나 탑이 있는데, 대부분 풍화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원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럼 이 절, 운주사를 누가, 무엇 때문에 창건했을까?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도선국사(道詵國師)와 관련 된 풍수비보설이다.
도선국사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배 한복판에 해당하는 호남 땅이 영남 땅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어 국운(國運)이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고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자 기울 것을 염려하여 1,000개의 불상과 1,000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운주사 유적들이 12 ~13세기의 양식이고 도선국사는 9세기의 인물이라서 연대가 맞지 않다.
다른 하나는 밀교에서 절을 세웠다는 것인데 운주사에서 출토 된 수막새 기와에 “옴마니반메홈” 이라는 진언이 범어로 양각되어 있고 석조불감(石造佛龕) 안에 남북으로 등을 맞댄 불상은 밀교적인 음양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부처들이 대부분 지권인을 하고 있고 천불을 조성하여 모시는 천불신앙은 밀교에서 널리 믿어졌다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은 몽고침략기에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1238년(고종 25년) 몽고군이 고려인들의 저항의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호국사찰인 황룡사를 불태워버렸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 황룡사를 대신할 사찰이 운주사이고 이곳에 천불 천탑(千佛 千塔)을 세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륵신앙으로 고려 무인정권 시절 이곳에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이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를 기원하며 그들의 염원으로 천불 천탑(千佛 千塔)을 세웠다는 것이다.
운주사(雲住寺) 입구부터 펼쳐진 다양한 석탑과 석불을 살펴보자.
구층 석탑 (九層 石塔)은 보물 제796로 운주사(雲住寺) 일주문을 지나서 가장 먼저 맞이하는 석탑(石塔)으로 높이 10.7m로 석탑 중 가장 높다. 기단부(基壇部)의 지대석은 하나의 평평한 바윗돌을 사용하여 각형의 3단으로 가공한 굄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세웠다.
탑신부(塔身部)의 1층 탑신(塔身 : 몸돌)은 4장의 널돌로 세워서 짜였으며,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긴 후 다시 면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굵게 새겨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2층 탑신(塔身)부터는 각 면마다 2중으로 마름모꼴을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를 조각하였다.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은 밑면이 약간 치켜 올려져 있고, 여러 겹의 빗살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옥개석 받침은 생략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원기둥모양으로 다듬은 돌과 보륜(寶輪 : 바퀴모양의 장식)을 올렸다. 전체적인 탑의 모습은 지방적인 색채가 뚜렷하다.
운주사(雲住寺)의 석불군은 일주문을 지나서 북쪽 대웅전을 향한 길을 걸으면 오른쪽, 즉 동쪽 암벽에 조성되어 있다. 첫 번째 석불군은 구층 석탑 동쪽에 있는 높이 약 8m, 너비 20m의 암벽 수직 단애 면에 좌불 1구와 입상 5구를 배열하였는데 입상 1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좌대를 갖추고 있다. 두 손을 합장하고 좌불을 한 비로자나 부처님은 1984년 발굴 조사 때, 불상 대좌 뒤편에서 8~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 불상과 여래 불상이 출토되었다.


두 번째 석불군은 첫 번째와 10여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높이 5m, 너비 25m의 암벽에 8구의 석불이 배열되어 있다. 중앙에 높이 4.75m의 대형 입상이 주불이고 좌우에 입상 7구의 협시불이 있다.


높고 큼직한 방형으로 다듬은 기단 위에 원형의 1단 굄을 만들고 그 위에 7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세운 칠층석탑(七層石塔) 은 높이는 9.6m이다. 1층과 2층 탑신(塔身)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고 탱주(撐柱)는 생략되었다.

3층 이상 탑신(塔身)은 모두 1매석이며 각 면에 우주(隅柱)가 모각되었고 탱주(撐柱)도 생략되었다. 각 층의 두툼한 옥개석(屋蓋石)은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6단이다. 추녀와 처마는 직선형으로 표현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유실되었지만 비교적 단정하고 소박한 석탑이다.

석불좌상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쌍교차문 칠층석탑(雙交叉紋 七層石塔)은 각층 탑신에 쌍교차문(XX)과 마름모꼴(◇) 형태를 조각하여 국내 석탑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높고 큼직한 방형의 기단 위에 1단의 방형좌대를 만들고 그 위에 탑신을 세웠다. 비교적 안정되고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다.

광배석불좌상(光背石佛坐像)은 높이 2.7m로 사다리꼴 판석에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구분 없이 불신 주변으로 선각에 의한 화염문(火焰紋)을 음각하였고 고 부조된 불상에 비해 두께가 얇은 편이다.
불신은 고부조로 돌출시켰는데 수인과 코, 눈썹, 귀는 양각하였다. 전체적으로 상호는 원만상이며, 눈에 비해 약간 높게 표현된 눈썹과 기다란 코, 두툼한 입술을 표현하였다. 귓바퀴가 큰 귀는 눈썹부근에서 입술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육계는 파손되었으나 높은 편이다. 머리와 이마의 구분선은 잘 보이지 않지만, 이마가 넓은 편이고 중앙에 백호가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짧고 두툼한 목에는 삼도가 보이지 않는다. 법의는 우견 편단으로 옷 주름이 왼쪽 어깨와 오른쪽 소매에만 사선으로 음각되어 있다.
수인은 두 손을 합장하는 듯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지권인의 변형인지는 확실치 않아 보인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길상좌이고 다리 전체에 옷 주름의 표현이 사선으로 되어 있다.

광배석불좌상(光背石佛坐像) 길 건너편에 있는 세 번째 석불군은 암벽 왼쪽에 사각형과 원반형의 대좌에 불상4구가 세워져있다. 중앙에는 복련(復蓮)이 묘사된 사각형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있는 불상이 있고 그 좌우로 판석을 이용한 듯 얕은 부조와 선각으로 묘사되어 있는 석불이 배치되었다.

중앙의 석불은 두 손이 형태가 없어졌으나 다른 불상들보다 입체감 있게 묘사 되었는데 얼굴에는 긴 귀와 코의 흔적이 있으며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식의 법의를 걸쳤다.

바로 옆에는 불두 5편, 석불 입상 3구가 있다. 이중 가장 큰 석불 입상은 세 조각으로 파손 된 것을 1993년 보수하여 세워 놓은 것이다.


석조불감(石造佛龕) 앞 칠층석탑(七層石塔)은 주변의 다른 큰 석탑이 큰 방형을 설치하여 기단을 대신한 것과 달리 규모가 작은 지대석 위에 1단 굄을 마련하여 탑을 세웠다.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5단으로 넓고 평평한 옥개석(屋蓋石)과 그 윗면 네 귀퉁이의 우동마루가 예리한 선을 이루지 않고 두툼하게 표현된 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나타나는 기법이다. 또한 옥개석(屋蓋石)의 폭과 탑신 높이의 체감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탑이다.


석조불감(石造佛龕)은 불감(佛龕) 안에 석불좌상 2구가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배면불(背面佛)이 있다. 보물 797호로 운주사(雲住寺)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앞, 뒤에는 칠층석탑(七層石塔), 원형 다층석탑(圓形 多層石塔)이 놓여있어서 야외 불당의 주존 불 구실을 하고 있다.
불감(佛龕)이란 석굴 형태의 일정한 공간(龕室)에 부처님을 안치하는 건조물을 말하는데 평면은 방형으로 평평한 기단석 위에 5매의 판석을 이용하여 짜 맞춘 단상이 있고, 그 위에 1매의 갑석이 있는데 각 면에 13엽(葉)의 앙련이 음각되어 있다.
불감(佛龕) 안에는 1매의 판석을 세워 공간을 2분(分)하였고 상단은 개방되어 있으며, 양쪽에 화염문(火焰汶)이 조각되어 광배역할을 하고 있다. 양 측면은 1매석을 세워 벽체를 구성하였고 전면은 좌우의 벽체로 막아져 있고, 중앙은 열려 있는데 문설주 부분에 여닫이 문 시설로 보이는 구멍이 상단 좌·우에만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이며, 팔매 석으로 이루어졌고, 굵은 용마루가 수평으로 설치되어져 있다. 좌·우 용마루 끝에 기와가 보이며 지붕 일부와 불상 밑 부분이 시멘트로 보수되었는데 1920년에서 1940년 사이에 수리된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 입구를 향한 남쪽 불상은 좌상을 한 석가모니불로 자세히 살펴보면, 육계부분이 파손되었고 상호는 대체로 둥글며 눈에서 입 부근까지 길다랗게 표현한 귀는 양각이며 귀 바퀴는 음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가느다란 눈썹과 콧등이 파손된 상태이고 양각이며 시멘트로 보수되었고 가느다란 눈은 선각으로 눈썹보다 약간 낮게 묘사하였다.
목은 짧고 삼도가 표현되었고 법의는 통견이며, 오른쪽 어깨에 걸쳐 있는 옷자락은 왼쪽 어깨에서 명치부분을 지나 하반신까지 덮은 형태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배에 대고 왼손을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손목까지 옷 주름이 음각되었고 손가락이 묘사되었다. 돌출한 다리 형태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결가부좌 형태로 길상좌에 속하며, 왼발의 꼬여진 모습이 옷자락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발바닥과 발가락을 제외한 다리에는 사신의 옷 주름이 흘러내린다. 광배는 사다리꼴의 판석에 두광과 신광이 구분 없이 구불구불한 문양이 선각되어 있는데 화염문의 표현으로 보여 진다.

원형다층석탑을 바라보고 있는 북쪽 불상은 좌상을 한 비로자나불로 상호는 원만상이며 가느다란 눈썹, 얇게 뜬 눈, 희미한 입으로 표현하였다. 귀는 형태만 갖추었고 코는 시멘트로 보수한 것이다. 머리에 육계가 없다.
목은 짧으며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이다. 양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 주름이 좌정한 신체 전면을 덮고 있고, 옷 주름이 가슴 중앙에서 모아져 수인은 지권인으로 추정된다. 앉은 자세는 옷 주름이 약간 겹쳐 있어 오른발을 위에 얹은 형태임을 알게 한다
광배는 남쪽 석불좌상과 마찬가지로 불상과 약간 떨어져 있으며, 남쪽 좌상이 한 줄의 선각임에 비해 북쪽 좌상은 꼬리가 가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이것도 화염문의 변형으로 보인다. 운주사의 불상 중 광배표현이 있는 것은 이 석조불감내의 석불좌상, 마애여래좌상, 광배석불좌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원형 다층석탑(圓形 多層石塔)은 보물 797호로 높이 5.8m이며 석조불감 북편에 있다. 기단부의 기단(基壇)은 두툼한 원형 단을 만들고 탑을 세웠다. 기단 면석은 5매석을 조립하여 8각을 이루고 원형의 갑석에는 앙화로 된 연꽃을 선으로 16장을 표현하였다.

원형의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다. 탑신 1층 옥개석(屋蓋石)은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2층부터 옥개석(屋蓋石)은 정반대로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글다. 이는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려 한 의도로 추측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雲住寺) 대웅전(大雄殿) 앞 다층석탑(多層石塔)은 높이 3.23m로 탑신부의 4층 옥개석(屋蓋石)까지 남아 있고 그 이상 부재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옥개석(屋蓋石) 상부는 전탑과 같은 3단의 계단 형으로 이루어진 모전석탑 유형이다. 즉 돌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만들어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통돌을 계단 형으로 깍은 것이다. 특히 각 층의 옥개석(屋蓋石) 모서리 부분에서는 가벼운 반전이 있다.


운주사(雲住寺)에는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위에 석탑 2기를 조성하였는데 오층석탑(五層石塔)과 교차문 칠층석탑(交叉紋 七層石塔)이다. 그리고 암반아래에도 석불군을 조성하였다.



거북바위 오층석탑(五層石塔)은 높이 5.57m로 거북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암반위에 탑을 세웠다. 1층 탑신은 1매의 방형에 각 면의 모서리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탱주는 생략되었다.

2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짜 맞추었는데 각 면의 귀퉁이에 우주가 정연하게 각출되었다. 옥개석 받침은 뚜렷하며 상면에 탑신 굄이 생략되었다. 상륜부는 복발형의 부재가 안치되고 그 위에 보주가 연결되었다. 전체적으로 치석의 기법이나 각 부재의 비례가 안정된 탑이다.

거북바위 교차문 칠층석탑 (交叉紋 七層石塔)은 높이 7.17m로 다소 경사진 암반을 완만하게 다듬어서 기단부 없이 그 위에 탑을 세웠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고 면석중앙으로 보조 우주가 하나씩 얕게 표출되었고 탱주는 생략되었다.


2층에서 7층까지 탑신 4면에 X자문이 새겨져 있고 옥개석(屋蓋石) 우동마루가 두툼하게 튀어나오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5단이다. 한국석탑에서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 탑으로 모두 건축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서쪽 산기슭에 있는 와불(臥佛)로 가는 길 중간의 거북바위 아래에 있는 석불군은 높이 5m, 너비 15m의 거북바위에 조성한 공간의 넓이는 일부 암반이 떨어져 나가 3m × 4m × 2m이다. 이는 너무 깊게 암벽 감실을 조성하려다 상부 암반이 무너져 내린 결과로 추정된다.

높이 4m지점에 지름1m정도의 암벽을 다듬은 흔적이 보여 이곳에 대형 불상을 모시려던 것으로 짐작된다. 불상 중앙은 좌상, 그 주위는 입상이 배열되어 있다. 불상은 9구이나 대좌는 12개라서 불상 3구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곳으로 보인다.

거북바위에서 와불(臥佛)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시위불은 크기 10.8m의 입상(立像)으로 와불(臥佛)을 지킨다하여 머슴불로도 불리는데, 와불(臥佛)의 한쪽을 잘라내어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와형 석조여래불(臥形 石造如來佛)은 운주사(雲住寺) 계곡 서쪽 산 정상에서 크고 넓은 암반을 다듬어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고 좌상(坐像)한 비로자나불과 입상(立像)한 석가모니불로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와불(臥佛)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때 옆으로 누운 모습이다.
그런데 운주사의 와형 석조여래불(臥形 石造如來佛)은 앉아 있는 석불과 서있는 석불로 암반 위에 그대로 새긴 채 하늘을 향하고 있어 와불(臥佛)이란 표현은 맞지 않다. 즉, 암반을 쪼개서 일으켜 세우려했으나 무게와 균열 등 기술적 한계로 그대로 둔 것으로 추정된다.
두 석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북쪽 다리부분이 남향의 머리 부분에 비해 5도 가량 경사져 있을 뿐만 아니라 좌상(坐像), 입상(立像) 다리부분과 좌상(坐像), 입상(立像) 사이에 떼어내려 했던 흔적처럼 보이는 틈이 있다.


결가부좌로 좌상(坐像)을 한 비로자나불은 높이 12. 7m(무게 150톤 추정)로 국내 석불 중 가장 크다. 타원형의 상호에 길고 넓적한 귀는 이마에서 목까지 내려오는데 귀의 형태만 묘사되었다.
눈썹과 코는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눈은 반달형으로 눈꺼풀이 두껍게, 입술은 두툼하게 표현하였다. 인중의 경우 선각으로 또렷하게 표현하여 특이하다. 볼과 얼굴 전체의 측면은 볼륨감이 넘치며, 이마는 머리보다 한 단 낮게 깎았다.
육계는 별석으로 상호의 오른쪽에 따로 만들어 놓았다. 어깨와 목에 비해 양 무릅 사이의 폭이 너무 넓어 균형을 잃고 있다.
입상(立像)을 한 석가모니불은 높이 10.3m(무게 100톤 추정)로 좌상(坐像)한 비로자나불 왼쪽에 있으며, 하나의 돌로 두 개의 석불을 만들었다. 좌상(坐像)과 같은 조각 수법을 보이고 좌상의 옆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장(細長)하다.
상호는 길고 측면까지 잘 다듬은 형태이다. 눈썹과 코는 도드라지며, 눈은 반달형으로 코, 입, 인중의 표현이 좌상(坐像)과 동일하다. 귀는 현재 깨져 있어 그 형태만 보이고 있는데, 이마와 목까지 길게 표현되었다. 이마는 좌상과 마찬가지로 머리보다 한 단 낮게 조식(藻飾)하여 그 위에 육계를 장식하였다.


수인(手印 : 손 모양)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여원인(與願印)을 취한 것 같으나 어색하고 사실적이지 않다. 또한 옷 주름은 수직선과 사선으로만 처리하여 매우 단순하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은 중생의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 평안을 주는 손짓으로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밖(앞)으로 향하는 형태다. 그리고 여원인(與願印)은 중생이 원하는 모든 자비로운 서원을 들어준다는 서약으로 왼손을 아래로 늘어뜨려 밖(앞)으로 보이는 형태다.
창건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하루 밤 사이에 천불 천탑을 다 세우고 이 와불을 마지막으로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새벽닭이 울어 중단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일어서지 못한 채 남겨진 존재가 바로 이 와불(臥佛)이라고 한다.

미국 CNN 방송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선정 된 세량지

세량제는 세량 저수지라고도 하며,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에 위치한 저수지로 1969년 준공된 1종 농업용 저수지이다. 세량제는 규모는 작지만 잔잔한 호수에 드리워진 산벚꽃, 형형색색의 단풍, 물안개 등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특히 봄, 가을에는 세량제의 경관을 담고자 사진작가들이 전국에서 몰려드는데, 하루 탐방객만 700명~800명이 될 정도이다. 세량제는 2012년 미국 CNN 방송에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 중 24위로 선정 발표하면서, 화순군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화순군(和順郡)은 전라남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군이다. 내장산, 추월산, 설산으로부터 이어져 온 호남정맥이 무등산에서 안양산, 두봉산, 국사봉으로 연결된다. 하천은 지석천과 동복천이 군의 유역을 나누고 있다.
『삼국사기지리지』(능성)에“ 여미현(汝湄縣)은 본래 백제의 잉리아현(仍利阿縣)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였는데 지금의 화순군(和順郡)이다.”라고 기록되어 현재의 지명을유추할 수 있다.
도암면(道巖面)은 화순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이다. 북쪽은 고당산과 해망산이 도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해망산에서 남쪽으로 천태산, 깃대봉, 금성산, 화학산으로 동쪽산지를 이루면서 춘양면과 청풍면의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광덕산, 선왕산이 있다. 서쪽은 나주호가 있고 나주호 남쪽으로는 봉학천이나주시 다도면과 경계를 이룬다.
1914년에 능주군 도장면(道莊面), 호암면(虎巖面), 남평군 다도면 일부를 합해 서도장면의 ‘도(道)’자와 호암면의 ‘암(巖)’자를 따서 도암면(道巖面)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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