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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북쪽에 위치한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점성대(占星臺)라고도 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圓筒部)를 올리고 맨 위에 정()자형의 정상부(頂上部)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사용된 돌은 모두 376개이며, 화강암을 주로 사용하였다.

월성 북쪽에 위치한 첨성대(瞻星臺, 국보 제31호)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점성대(占星臺)라고도 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이다.

관련 문헌으로 삼국유사1 왕력에 (나물마립간의) ()은 첨성대(占星臺) 서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기이1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에도 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경주)부성(府城) 남쪽 모퉁이에 있는데, 당나라 태종 정관(貞觀) 7년 계사(癸巳), 633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속으로부터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과 승정원일기영조 44(1768) 21일에 왕이 경주 첨성대 위로 직접 올라가 보았는가?”라고 물으니, 홍계희가 첨성대 안쪽의 돌이 층계를 이루고 있어 오를 수가 있습니다. 사인(使人 : 심부름꾼)에게 오르라 하여 첨성대 꼭대기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고 하였다기록을 통해 첨성대(瞻星臺)는 바깥쪽에서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에 사다리를 이용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하늘을 관찰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기단부(基壇部)는 지면에 한 변 5.3m 내외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이며, 지대석(地臺石 : 건축물을 세우려는 땅을 둘러서 쌓은 돌) 8개와 기단석(基壇石 :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단을 쌓는 돌) 12개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는 기단석 위쪽만 10cm 정도 드러났다.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 곡선으로 쌓았는데, 매끄럽게 잘 다듬어진 외부에 비해 내부는 돌의 뒷 뿌리가 삐죽삐죽 나와 벽면이 고르지 않다1단의 높이는 약 30이고 그 위에 네모형의 장대석을 두 겹으로 ()’자 형으로 얹었다. 13단과 15단에 걸쳐 남쪽으로 향한 곳에 조그마한 출입구를 두었는데,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있어 이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차 있고 19, 20단과 25, 26단 두 곳에 ()’자 형의 장대석이 걸쳐져 있다. 27단의 내부의 반원에는 판석이 있고, 그 반대쪽에는 판목을 놓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자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정상부의 자 형의 돌 위에도 관측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문학은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농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관측 결과에 따라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점성술(占星術)이 고대국가에서 중요시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면 정치와도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첨성대(瞻星臺) 25, 26단 두 곳에 ‘정(井)’자 형의 장대석이 걸쳐져 있다.
첨성대(瞻星臺) 13단과 15단에 걸쳐 남쪽으로 향한 곳에 조그마한 출입구를 두었는데,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있어 이 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때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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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최북단 왕정골(王井谷)에 자리한 상서장(上書莊 : 인왕동274번지 일대 4,960평)은 낭산의 서북쪽에 있는 독서당(讀書堂)과 함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이다.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반월성(半月城)이 보이고, 그 앞에는 문천(蚊川)과 인용사지(仁容寺址)가 있다.

왕정골(王井谷)은 동남산과 서남산의 경계 지점에 있는 계곡으로 모양새가 삐쭉이 나와 있어 언뜻 보면 독립된 산을 형성하는 듯도 하지만, 남산의 최북단에 위치한 계곡으로 길이는 매우 짧다. 계곡 끝의 서편을 도당산이라고 부른다. 계곡 서남쪽에는 서남산으로 진입할 수 있는 식혜골 능선과 연결되고 있고 능선 동쪽은 절터 골과 연접해 있다.

계곡의 명칭은 왕(王)이 자주 드나들며 사용하던 우물()이 있는 계곡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다. 왕정(王井)이라는 우물이 있던 곳은 현재 경주포항간 국도가 지나는 바람에 완전히 유실되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이곳에서 옥정(玉井)이라는 명문기와가 수습이 되었는데 옥정(玉井)이라 함은 곧 왕정(王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계곡에는 총 3곳의 절터가 있는데 문천 남쪽의 인용사지(仁容寺址)를 포함하여 상서장(上書莊)이 위치하는 곳도 통일신라시대 절터였다. 그래서 상서장(上書莊)을 둘러보면 옛 절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상서장(上書莊)은 신라 말 문란한 기강과 정치를 바로잡고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린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최치원(崔致遠)은 통일신라 후기의 학자로, 12세 되던 경문왕 8년(868)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과거급제 한 후 벼슬길에 올랐다.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하여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時務十條)를 올리는 등,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노년에는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에 은둔하며 지내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

건물은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가 조선시대에 폐허화된 것을 18세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875년 경주부윤 이돈상(李敦相) 이 문창후(文昌侯) 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의 비문을 지어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연화대석위에 세웠는데 현재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상서장(上書莊)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를 올린 곳이라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건물은 고려시대 때 통일신라시대 절터에 건립되었다가 조선시대에 폐허화된 것을 18세기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가운데에 진앙문(進仰門)이라는 외삼문이 있고, 안쪽 네모난 담장가운데에 솟을삼문의 추모문(追慕門)이 있다. 그 안에 상서장(上書莊)이 있으며, 그 뒤로 영정각(影幀閣)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상서장(上書莊)은 정면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전체에 툇간을 두고 있다.

상서장(上書莊)의 건물배치는 맨 앞에 진앙문(進仰門)이라는 외삼문이 있고, 안쪽 네모난 담장가운데에 솟을삼문의 추모문(追慕門)이 있다. 그 안에 상서장(上書莊)이 있으며, 그 뒤로 영정각(影幀閣)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가운데에 진앙문(進仰門)이라는 외삼문이 있다.
솟을삼문의 추모문(追慕門)
정면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의 상서장(上書莊)
영정각(影幀閣)

상서장(上書莊)은 폐쇄형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1칸과 2칸을 두었다. 사당인 영정각(影幀閣)을 세웠는데, 뒤의 두 곳에 축대를 한 단씩 쌓고, 앞으로 툇간을 둔 3칸에 풍판이 달린 맞배지붕이다. 상서장 담장 밖 동북쪽에는 비각이 있고, 서쪽에는 '一'자형의 고직사(庫直舍)인 화수정(花樹亭)과 재사(齋舍)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상서장(上書莊) 담장 밖 동북쪽에는 경주부윤 이돈상이 지은 문창후(文昌侯) 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와 비각이 있다.
문창후(文昌侯) 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가 있는 비각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연화대석위에 세워진 문창후(文昌侯) 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

문창후(文昌侯)최선생(崔先生) 상서장비(上書莊碑)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주 금오산 북쪽 문천언덕에 상서장이 있는데 곧 문창후 최선생 거 하시 던 옛터다. 선생의 휘는 치원, 자는 고운, 호는 해운이며 사량부사람이다. 신라 헌안왕 원년정축(A.D.857)에 문창현에서 태어났고 고려 때 문창후로 봉해졌다. 나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당 희종 갑오(A.D.874)에 등제하였고 侍御使의 관직에 올랐으며 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문장을 잘 하였는데 黃巢檄文을 지어서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28세 때 조서를 받들고 귀국하자, 헌강왕이 고국에 머무르게 하며 侍讀翰林學士의 관직을 내렸다. 신라는 날로 어지럽고 고려의 국운은 바야흐로 일어나자 곧 조정에 글을 올려서(上書) 國政을 논했는데, 이 글속에 ‘鷄林은 黃葉이고 鵠嶺은 靑松이다.’는 말이 있었다. 이 글을 올린 집을 上書莊이라 한 것인데, 대개 이러한 까닭이다.
상서장 동쪽에는 낭산서당이 있으니 곧 선생이 독서하던 곳이고, 상서장 서쪽에는 서악서원이 있는데 이는 선생을 享祀하는곳이다. 堂宇를 수리하고 선조를 존모하는데 자손이 모든 정성을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곳 상서장은 지금 건립한지 몇 년이 흘렀으나 비석을 세워 기록해놓은 글이 없으니 유림의 欠典이 아닌가.
병자년(A.D.1876)에 선생의 후손들이 비로소 表石을 세우고 나에게 글을 부탁해 왔다. 아! 슬프다. 선생의 淸風과 孤節은 동해와 함께 영원히 전할 터인데, 이처럼 작은 비석하나도 족히 輕重을 논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손이 이 상서장을 愛護하는도리에 있어서 다소의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 전 참판(前 參判) 경주부윤 이돈상(李敦相) 짓다. -

비각 동쪽 담장아래에 있는 절터의 석재들
상서장(上書莊) 앞의 장대석
상서장(上書莊)을 둘러보면 옛 절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추모문(追慕門) 건물의 초석에서 주로 확인된다.
기둥과 맞지 않는 고맥이초석
기둥과 맞지 않는 원형초석

상서장(上書莊)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할매바위(동제바위)가 있는데 바위 크기는 높이 3.5m3m 정도이다. 바위 앞쪽에는 시멘트로 160×90×30크기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양지마을, 해맞이마을, 서원마을, 인용마을이 함께 동제를 모시는 장소이다. 이 할매바위 아래에도 바위가 있는데 이들을 합쳐 고운대(孤雲臺)라 부르고 있다.

상서장(上書莊)에서 동쪽으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할매바위(동제바위)가 있는데 바위 앞쪽에는 시멘트로 160×90×30㎝크기의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양지마을, 해맞이마을, 서원마을, 인용마을이 함께 동제를 모시는 장소이다.
할매바위아래의 고운대(孤雲臺)

왕정골(王井谷)에서 통일신라 7세기 후반~8세기에 조성 된 석조불입상(石造佛立像)이 발견 되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높이 201.cm로 광배와 신체가 한 돌로 제작되었으며 무릎아래는 결실되었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는 높은 편이고, 긴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이마에는 큰 백호 구멍이 있다. 굵은 목과 단정한 어깨 등 건장한 체구를 하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손등을 밖으로 하여 가슴위에서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내보이면서 배 앞에 대고 있다. 통견의 대의위에 둥근 옷 주름이 계단식으로 내려오다가 다시 복부에 놓여진 왼손을 중심으로 호형(弧形)의 옷 주름이 반복된다. 신체의 비례는 균형이 잡히고 가늘어지는 허리가 유난히 강조되었다.

주형광배(커다란 배 모양)내부는 보주형의 두광과 신광으로 나누어져 있고, 넝쿨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하였고 빛을 형상화한 것이다. 등 뒤의 광배에는 나뭇잎처럼 단순화된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왕정절골 석조불입상(王井谷 石造佛立像 : 높이 201.cm, 통일신라 7세기 후반~8세기, 국립경주박물관) : 신체가 한 돌로 제작되었으며 무릎아래는 결실되었다. 소발의 머리에 육계는 높은 편이고, 긴 얼굴은 양감이 풍부하며 굵은 목과 단정한 어깨 등 건장한 체구를 하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손등을 밖으로 하여 가슴위에서 說法印을 취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내보이면서 배 앞에 대고 있다. 통견의 대의위에 둥근 옷 주름이 계단식으로 내려오다가 다시 복부에 놓여진 왼손을 중심으로 弧形의 옷 주름이 반복된다. 신체의 비례는 균형이 잡히고 가늘어지는 허리가 유난히 강조되었다. 주형광배내부는 보주형의 두광과 신광으로 나누어져 있고, 나무줄기 같은 무늬가 외곽부를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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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당산(都堂山)은 남산의 한 봉우리로 남산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산맥의 끝머리에 솟은 산으로 봉우리가 세 개로 이루어진 작은 산(95m이다. 경주 향교의 안산이며 반월성에서 마주 보이는 가장 가까운 산이다.
풍수지리적으로 경주 남산은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금오산(金鰲山)이라 부르는데 도당산(都堂山)은 자라의 머리에 해당되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흔히 경주 남산을 북쪽의 금오봉(金鰲峰, 468m)을 금오산(金鰲山), 남쪽의 고위봉(高位峰, 494.6m)을 고위산(高位山)으로, 각각 독립된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도당산(都堂山)은 남산의 한 봉우리로 남산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산맥의 끝머리에 솟은 산으로 봉우리가 세 개로 이루어진 작은 산(95m이다.
경주 남산을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금오산(金鰲山)이라 부르는데 도당산(都堂山)은 자라의 머리에 해당되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도당산(都堂山) 초입에서 본 월정교와 반월성

도당(都堂)이란 마을을 지키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 또는 정치를 의논하는 곳으로 신라이전부터 사로의 육부 촌장들이 모여 나라의 태평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나라 일을 의논하던 곳이다.
‘도당(都堂)’과 ‘남당(南堂)’을 같은 의미로 보아 남당정치를 하였던 것으로 해석하는데 신라에서 남당정치를 한 기록으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3년(249)에 “궁궐 남쪽에 남당(南堂)’을 지었다.”고 한 것이 있다.
신라초기의 임금들은 하늘의 뜻에 의해 백성을 다스렸다. 신라 두 번째 임금을 차차웅이라 불렀는데, 차차웅이란 말은 무당이란 뜻이다. 즉 하늘의 신과 말이 통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또한 사로시대부터 숭상하던 계림 숲이나, 나정 우물들이 모두 이산 부근에 있다.

월정교에서 출발하여 도착한 도당산(都堂山) 초입

지금 도당산(都堂山)은 산 전체가 무덤으로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산정에 올라가면 평지가 나오는데 정자 터로 추정되는 것에는 고신라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다. 그 자리에 화랑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지금 도당산(都堂山)은 산 전체가 무덤으로 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산정에 올라가면 평지가 나오는데 정자 터로 추정되는 것에 고신라의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고 그 자리에 조성된 화랑정
화랑정에서 바라본 월정교

도당산(都堂山)은 일명 장두산(墻頭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돛대 같은 산이라는 뜻이다. 도당산(都堂山)에서 맨드리 고개로 이어져 해목령으로 곧게 뻗어 오른 산맥은 전진하는 돛대(장두 : 墻頭)로 보였기 때문이다.
고려는 신라가 나라를 바친 후에도 다시 일어설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도당산(都堂山)의 산맥을 끊어 놓았는데 돛대를 잘라 놓은 것이다. 왕정골에서 식혜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깊이 파여져 있는데 그것은 산맥을 잘라 놓은 흔적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또 다른 풍수이야기는 행주형行舟形) 풍수로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다. 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 가던 후삼국 시대, 고려의 왕건은 신라가 다시 일어설 것을 염려하여 풍수지리설의 착안하여 비밀스럽게 풍수장이 한 명을 신라로 보냈다.
그는 신라의 임금을 찾아가 신라의 수도는 봉황의 보금자리처럼 생겨서 왕조의 번성이 지속되려면 봉황이 떠날 수 없게 알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 말에 혹한 임금은 백성을 동원하여 둥글게 흙을 쌓아 수많은 알의 형상을 만들었다.
왕건의 보낸 풍수장이 말은 거짓이었다. 실상 경주는 봉황의 보금자리가 아닌 배의 형상을 한 행주형(行舟形)이였고, 봉황 알 모습의 거대한 흙더미는 파도에 휘청거리는 배에 과도한 짐을 싣는 모양이 돼버렸다. 풍수장이는 알의 형상이 가장 많은 미추왕릉 곁 밤나무 숲에 깊은 우물을 판 뒤 고려로 달아났다. 침몰하는 배에 구멍을 뚫어버린 것으로, 이후 신라는 급속히 파멸의 길을 걸었다.
일반적으로 풍수지리에서 배가 뜬 모양이란 행주형(行舟形)은 행운의 터라고 말하는데 배가 재물과 사람을 운반했기 때문에 배에는 사람과 재화가 모인다고 하여 배 모양의 땅에 묘를 쓰거나 집을 지으면 번창한다고 믿었다. 주형(舟形), 배 모양의 앞에 행(行)자를 붙여서 배가 떠다니는 형상을 말하는 것이다.
도당산(都堂山)은 지난 1976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경주IC와 국도 7호선를 연결하기 위해 서라벌대로가 건설되면서 남산과 분리되어 단절되었다. 건설 당시 박씨 일족이 금오산(金鰲山)의 정기가 도당산(都堂山)을 통해 오릉에 이르는 맥을 끊는다고 반대운동을 한때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후 도당산(都堂山)의 문화재 훼손도 가속화가 되는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이에 반월성에서 월정교를 거쳐 도당산(都堂山), 남산으로 통하는 남산 옛길을 복원하고 남산과 동일 권역으로 묶어 관리하기 위해 남산과 도당산(都堂山)을 잇는 인공 터널 공사를 2012년에 착공하여 2016년 11월 28일 완공하여 개통하였다. 인공터널은 폭 30m, 길이 111m, 선형개량 구간은 580m에 이른다.

도당산(都堂山)은 지난 1976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경주IC와 국도 7호선를 연결하기 위해 서라벌대로가 건설되면서 남산과 분리되어 단절되었다. 오른쪽이 도당산(都堂山)
남산과 도당산(都堂山)을 잇는 인공 터널 공사를 2012년에 착공하여 2016년 11월 28일 완공하여 개통하였다.
폭 30m, 길이 111m, 선형개량 구간 580m 인공터널
공원으로 조성된 터널 상부

도당산(都堂山)에 토성(都堂山土城)도 있으며 남산토성과 인접하고 있고 나정(蘿井), 오릉(五陵), 월성(月城) 일대의 벌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다. 체성(體城)은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토축하였는데 지금은 대부분 훼손되고 원상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은 동남쪽으로 50m 정도이다.
현재 비교적 성체의 보존상태가 양호한 동남쪽 부분의 경우 성벽 바깥높이 4m, 안쪽 높이 1.2m, 상부너비 4.5m 규모이고 전체길이는 약 1㎞ 정도로 추정된다. 성내의 시설물은 서쪽과 남쪽에 각각 2개소, 동쪽에 1개소로 모두 5개소의 문지와 북쪽과 남서쪽에 각 1개소의 건물지가 있다.
남산에는 4개의 성터가 있는데, 도당산(都堂山) 토성, 남산토성, 그리고 남산신성, 고허성이다. 이들 토성과 산성의 축조 연대는 월성과 가까울수록 빠르며 토성(土城)에서 석성(石城)으로 전이(轉移)되어 갔다. 이에 처음에는 도당산(都堂山) 토성, 남산토성이 왕경 방비의 기능을 수행하였고 점차 남산신성과 고허성으로 왕경 방어의 역할은 확대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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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천년 숲 정원은 경주 동남산 자락에 자리한 경북도 제1호 지방정원으로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 (경주시 통일로 366-4 일원)에 있으며 2023424일 개원했다.

지자체가 조성·관리하는 국내 다섯 번째 지방정원이자, 경상북도에서는 첫 번째 지방정원이다. 규모는 96,800평으로 2016년부터 2022년까지 7년간 국비 29억 원, 도비 108억 원 등 총 137억 원을 투입한 정원이다.

정원 내에는 거울 숲, 분재원, 서라벌정원, 버들 못 정원, 꽃 보라 정원, 천연기념물원, 무궁화동산, 늘 솔 광장, 숲 그늘 정원, 미리내 정원, 아름 숲, 드리 숲 등 12개 주제정원이 조성돼 있다. 43327만 본의 식물이 식재됐으며, 이 중 목본류가 3605만 본, 초본류가 7322만 본을 차지한다.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관람 포인트이자 포토 존은 맑은 실개천 위로 놓인 ‘외나무다리’와 그 주변을 감싸는 ‘거울 숲’이다.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관람 포인트이자 포토 존은 맑은 실개천 위로 놓인 외나무다리와 그 주변을 감싸는 거울 숲이다. 물결이 잔잔한 개울물 위로 숲과 사람이 또렷하게 비치는 장면은 이곳을 찾은 이들의 매력 포인트다.

가장 멋있는 풍경은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와 칠엽수 숲길이다.

메타 세퀘이아(Metasequoia)는 화석식물인 Sequoia와 후에 구별된 식물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석탄기 이전에 번성한 식물로 현재는 중국 일부에서 자생하고 있으며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꽃피는 시기는 4월이며 피는 꽃은 가지 끝에 달려 밑으로 늘어진다열매 맺는 시기는 6~7월이다. 곧게 뻗는 수형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심어 기른다.

칠엽수(마로니에)는 칠엽수과에 속하는 낙엽성 교목으로 잎새 일곱 장이 둥글게 모여 달려 칠엽수란 이름이 붙었다. 지중해 발칸반도가 고향인 유럽칠엽수와 일본원산 칠엽수가 있으며 우리나라 공원이나 길가에 있는 칠엽수는 일본원산 칠엽수로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고 마로니에 공원에 있는 칠엽수도 이때 심어졌다.

칠엽수 열매껍질을 까면 밤(, Chestnut)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밤은 뾰족한 꼭지점이 있지만 칠엽수 열매는 그런 게 없고 독성이 있어 그냥 먹으면 안된다. 서양에서는 밤을 마농이라고 부르며 마로니에란 이름도 이 열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칠엽수(마로니에) 열매
칠엽수 열매껍질을 까면 밤(栗, Chestnut)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밤은 뾰족한 꼭지점이 있지만 칠엽수 열매는 그런 게 없고 독성이 있어 그냥 먹으면 안된다. 서양에서는 밤을 마농이라고 부르며 마로니에란 이름도 이 열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칠엽수는 덕수궁에 있는 서양칠엽수로 1913년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에게 선물하여 심은 나무이다.

경북천년 숲 정원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하며, 해가 짧은 동절기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로 운영 시간이 조정된다. 입장료와 주차비가 모두 무료다. 또한 숲 해설 프로그램과 유아 숲 체험원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상수리나무 열매. 상수리나무는 도토리를 뜻하는 한자어 상실(橡實)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4~5월 수꽃은 늘어지며 피고 암꽃은 1~3개가 잎겨드랑이에서 핀다. 열매는 10월에 익는데 주로 묵을 쑤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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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狼山)은 경주 보문동과 구황동사이에 있는 나지막한 동산이다. 해발 115m, 면적 831,729(251,598)으로 경주의 진산(鎭山)이며 비록 산의 높이는 낮지만 신라 수도의 핵심지역에서 가깝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헌에 기록되었다()은 이리 낭()’로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밀교 비법으로 당 수군을 물리친 호국 사찰 사천왕사지

또는 사마천의 <사기>에는 동쪽의 큰 별을 ()’이라 한다.” 고 해서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신라 사람들은 신들이 노니는 숲이란 뜻의 신유림(神遊林)이라 부르며 신성시했고 왕실에서 신에게 제사 지냈던 곳이다.

신라 최초의 여왕인 27대 선덕여왕의 능

현재 낭산(狼山)을 아래쪽에서부터 위쪽으로 살펴보면 밀교 비법으로 당 수군을 물리친 호국 사찰 사천왕사지를 비롯하여 신라 최초의 여왕인 27대 선덕여왕의 능,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그리고 중앙에는 모자를 쓴 지장보살이 새겨진 마애삼존상, 끝단에는 고운 최치원의 독서당, 끝단 동쪽에는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실성왕 12(413) 8월에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늘의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한 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하였다.

모자를 쓴 지장보살이 새겨진 마애삼존상

삼국사기잡지·제사지에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는데 학계에서는 3(三山)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奈歷)낭산’(狼山)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이를 통해 우리민족의 토착신앙인 산악숭배 사상을 엿 볼 수가 있다. 나력산은 신라 6부의 하나인 습비부에 있다고 하였다.

고운 최치원의 독서당

그리고 천년 신라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했다.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황복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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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 편백나무 숲(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535-2번지)은 이곳 고향 출신의 재일교포가 1975년 고향에 내려와 오봉산 자락 55,043(181,963) 대지에 편백나무 1만여 그루를 50년 조성과 조림을 한 후 경주시에 기증한 숲이다. 이곳으로 오는 길은 건천IC를 지나 산내(청도) 쪽으로 100m 정도 가다 보면 고속철도 고가대교 아래 오른쪽에 안내판이 있다.

숲길 입구에는 5-6대 주차 가능한 공터가 있으나 가능하면 도로변의 안전한 공간에 주차한 뒤,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는 것이 좋다. 차량 운전 시 경사가 있어 주의를 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는 350번 버스를 승차하여 송선1리 달래창 정류장 하차하여 약 2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된다.

편백나무 숲 내음길은 대부분 데크와 약간의 흙길 500m로 정자 2곳이 마련되어 있고 30분 정도 산책할 수 있다.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 10시부터 경북 숲해설가협회 경주시지부에서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 걷기를 원하면 숲 주변으로 이어진 단석산, 오봉산 등산로를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이곳 편백나무숲의 식물 분포를 보면 목본류 56(갈참, 물푸레, 광대싸리, 고욤, 작살 등)과 초본류 10(꿀풀, 조뱅이, 벌노랑이, 노랑장대나물, 백선 등)이 분포돼 있다.

편백나무는 일본산으로 열매는 축구공처럼 생겼고 잎은 Y자형이다. 편백나무와 유사한 측백나무는 열매는 뿔처럼 생겼고 잎은 W자형이다. 우리나라 천연 기념물 1호는 측백나무다. 이곳에서 불편한 점은 지나가는 고속철 소음이 심하다.

송선리(松仙里) 지명 유래는 약 400여 년 전 임진왜란 후에 오천정씨(烏川鄭氏)가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소나무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송전(松田)'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을 옆 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어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乾川)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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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 : 경주시 성동동 4번지, 면적 9,944)는 경주시 동북편에 치우쳐 있으나 북쪽으로는 북천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월성과 남산을 바라보는 경주분지의 중심에 있는 곳으로 통일신라시대 왕궁의 북궁(北宮)으로 추정하고 있.

전랑지(殿廊址)라는 명칭이 처음 생기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7년 발굴조사에서 전당지(殿堂址), 장랑지(長廊址), 문지(門址) 등의 건물지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와전류 등 각종 유물도 출토 되어 1940731일부터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라는 이름으로 사적이 지정된 이후였다.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 : 경주시 성동동 4번지, 면적 9,944평)는 통일신라시대 왕궁의 북궁(北宮)으로 추정하고 있다.

관련 기록으로 삼국사기지리지에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으니, 둘레가 1,838였다고 전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신월성은 오늘날 월성을 가리키고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 일대를 만월성(滿月城)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후반부터 중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왕궁이 월성만으로 좁았기 때문에 안압지 동쪽에서부터 천주사지(天柱寺址)와 첨성대(瞻星臺)를 포함한 나물왕릉 동쪽 부근까지 궁성지를 넓혔으며, 이때 그 주위를 토장성벽(土墻城壁)으로 둘렀고, 이것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은 모양이어서 만월성(滿月城)이라 불렀다.

1937년 발굴조사는 북천 제방 공사를 하던 중에 건물 터가 드러나 옛날 절이 있었던 자리로 생각하여 일부(2,000)에 대하여 발굴 조사를 하였다. 확인된 자리는 큰 건물이 있던 전당 터(殿堂址) 6곳과 복도가 있던 장랑 터(長廊址) 6, 문 터 2, 담장 터 3곳이며, 평기와(기와 : 평면은 네모형, 횡단면은 원호로 된 평평한 기와)와 벽돌을 써서 만든 배수 시설 2, 우물 터 1곳이다.

경주 북천의 북쪽 지역인 동천동, 황성동, 용강동 등에 새로운 시가지를 건설하면서 기존 시가지와 연결되는 양정로의 연장개설이 전량지 서쪽 일부지역(1,760)을 통과하도록 예정되어 있어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전량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1993415일부터 동년 1231일 까지 9개월 동안 조사를 하였다.

성동동 전랑지(城東洞 殿廊址)의 초석들

발굴 조사 결과, 대형 건물 터와 부속 건물 터 5, 담장 터 2곳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많은 양의 기와와 납석(蠟石 : 촉감이 매끈매끈하고 기름 같은 광택이 나는 암석과 광물)으로 만든 그릇, 토기 뼈 항아리 토기 등 245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가운데 187점이 와전류로 막새와 내림새의 문양형식이 동궁 유적, 월성 해자 등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동일한 형식으로 고신라부터 통일신라에 걸쳐 제작이 되어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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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루(南古壘)는 경주역 동쪽에 위치한 전랑지(殿廊址) 서쪽에서 북쪽으로는 북천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양정로 서변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되다가 인왕동 고분군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황남동 대릉원 앞을 지나서 서천변까지 이르는 방어용 시설물인 토루(土壘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으로 쌓은 제방이나 둑)로써 고려 시대에 쌓은 읍성의 외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고루(南古壘)는 일제강점기 때 1936212일부터 사적 제17호로 지정하여 보호해 오고 있었으나 경주시의 개발로 대부분 파손되고 지금은 경주고등학교 서쪽(성동동 전랑지 서쪽에서 인왕동 고분 북쪽까지) 800m 구간만이 남아있다.

성동동 24번지 구역의 남고루(南古壘)

남고루(南古壘)에 대한 문헌 기록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동경잡기(東京雜記)에 전하고 있는데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 현종 3(1012) 8월에 남고루(南古壘)를 쌓았다고 하고,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현종 때 전라 · 충청 · 경상 3도의 군졸을 동원하여 북천에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동동 24번지 구역은 신라가 멸망하고 전랑지(殿廊址)가 파괴된 다음에 고려 때 전량지(殿廊址)에 사용하였던 초석 등 석재를 (南古壘) 석축 쌓는데 일부를 사용하였다

1936년 조사 당시 밑넓이 9.5m, 외벽높이 3.5m, 내벽높이 2m로 확인되었으며, 1993년 남고루(南古壘) 정비계획 일환으로 남고루(南古壘) 일부 구간 3곳인 성동동 24번지, 황오동 28번지, 황오동 68-1번지에 대하여 경주문화재연구소가 91일 발굴조사를 착수하여 동년 1231일에 완료하였다.

황오동 28번지 구역의 남고루(南古壘)

발굴 조사 결과, 토루(土壘) 아래층에서 통일 신라 시대의 도로 유적과 함께 성벽의 기초 석축과 인공적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방어시설인 해자(垓子)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성동동 24번지 구역은 신라가 멸망하고 전랑지(殿廊址) 파괴된 이후 고려 때 전량지(殿廊址)에 사용하였던 초석 등 석재를 남고루(南古壘) 석축 쌓는데 일부를 사용하였다.

출토 유물에는 기와 류 4, 백자 2, 숟가락 1, 반지 3점 등 총 10점이 출토되었다.

황오동 68-1번지 구역의 남고루(南古壘)
황오동 68-1번지 구역의 남고루(南古壘) 표지석
황오동 68-1번지 구역 발굴조사 결과 유골 2구와 반지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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