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빙고(石氷庫, 경주시 인왕동 449-1 일원)는 반월성 안의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는 돌로 된 얼음 저장 창고이다. 현재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석빙고(石氷庫)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 하천의 얼음을 겨울에 잘라 저장하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왕 6년 11월에 유사에게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하여 이미 신라 시대에 관청에 명해 얼음을 저장하게 했으며 이 일을 담당한 빙고전(永庫典) 이라는 기관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석빙고(石氷庫)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출입구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너비 201cm, 높이 178cm 규모의 남쪽 입구를 들어서면 입구와 바닥과의 지반 차이를 처리하기 위하여 계단을 두어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반대쪽인 북측은 밑바닥을 경사지게 처리하였으며 북벽 바닥 중앙에 배수구가 있어 내부에서 발생한 물이 처리되도록 하였다.
바닥면에는 길이 방향으로 자갈이 노출된 부분이 있는데, 바닥에 목재를 깔아 놓았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장방형의 빙실은 길이 1,880cm, 너비 594cm, 높이 497cm의 규모이다.
내부는 치석된 돌로 5개의 홍예보(虹寛棵)를 들어 올리고 홍예와 홍예 사이는 장대석을 걸쳐 천장을 구성하였다. 홍예 구조 위에 봉토를 조성하고 입구를 남쪽에 배치한 장방형이다. 입구 양측에는 ‘ㄱ’자형의 석축이 둘러져 있어 바람에 의해 바깥 공기가 빙실 내부로 쉽게 유입되지 않도록 하였고 아치형의 봉토 위에는 3기의 환기구가 노출되었다.

북벽과 입구가 있는 남벽은 지반과 수직한 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벽면의 하단부는 길고 큰 규모의 장대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축조하였다. 지반은 토양과 잔자갈로 이루어졌고 북쪽을 향하여 약 3~4°의 경사를 가지면서 점차 낮아진다. 지붕에는 잔디를 심어 태양열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석빙고(石氷庫)의 형태와 재질은 다양한 석재로 축조되었고 잘 다듬어진 방형의 석재로 구성되었으나 일부 치석 수법이 다른 부재가 있다. 입구 양 측벽에는 목조 건물의 초석으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부재가 사용되었으며, 내부에는 표면의 치석 정도와 형태가 다른 부재들이 다수 있다. 또한 쐐기공과 같은 채석 흔적이 선명한 부재도 나타나며 다른 건축물에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형의 석재도 있다.


석빙고(石氷庫) 좌측에 있는 비문에 「숭정기원후재신유추팔월이기개축(崇禎紀元後再辛酉秋八月移基改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1741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1738년(영조 14년)에 경주부윤 조명겸(趙明謙)이 나무로 되어 있던 빙고를 돌로 축조하였고 현 위치의 서쪽 약 70m 지점에서 지금의 위치로 4년 후에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원래의 빙고지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동서 방향의 장방형 웅덩이 흔적이 있다. 월성 내부에 대한 지표 조사 결과, 옛 석빙고 터로 전하는 곳에 있는 구덩이는 규모가 동서 3,000cm, 남북 1,000cm, 높이 150cm 정도이며, 특별한 시설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798년에 만들어진 「경주읍내전도」에는 초빙고(草氷庫)가 그려져 있는데, 월성의 서편 지역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구체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기록에도 『~빙고 담당 관원이 갈대를 베어다가 빙고의 아래 위 사방에 두껍게 깔아 저장된 얼음이 녹아 없어 지지 않도록 하였다.』라는 글이 있다.
현재 석빙고에 대해서 신라신대에 축조한 것을 현 위치로 옮겼다는 신라시대 축조설과 조선시대 축조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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