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 정상에는 조선 성종 16년(1485)에 조성한 경숙옹주(敬淑翁主) 태실(胎室)과 태비(胎碑)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태실이 도굴되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태실(胎室) 유물인 태 항아리 2점과 태지(胎誌) 1점을 찾아 소장하고 있다.
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은 UNIST 입구 우측에 있는 산이다.
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이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비의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비의 뒷면에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비문으로 보아 1485년(성종 16)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사연댐 가느 길에 만나는 경숙옹주(敬淑翁主)의 태실(胎室)과 태비(胎碑) 안내판
태실의 주인은 경숙옹주(敬淑翁主)로 1483년 조선 성종[1457~1494]과 후궁 숙의 김씨(淑儀金氏) 사이에서 3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출생 후 그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태실(胎室) 및 태비(胎碑)를 조성한 것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으로 가는 길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로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2004년 12월 16일에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胎)를 모시는 작은 돌방으로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왕실 자손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胎室)을 만들고 태(胎)를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며, 태비(胎碑)는 태실(胎室) 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胎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러한 태(胎)를 처리하는 장태(藏胎) 문화는 조선의 쇠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태비(胎碑)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뒷면에는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일반 민간에서는 태(胎)를 길지에 묻거나, 왕겨 불을 이용하여 태웠다. 태(胎)를 태운 재는 강이나, 냇물에 띄워 보내고 태우지 않은 태(胎)는 짚으로 싸서 돌맹이와 함께 물속 깊이 버렸다.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는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산에 묻었고 태(胎)를 담은 항아리를 태호(胎壺) 또는 태옹(胎甕)이라 한다. 이때 태지(胎誌)를 태호 (胎壺) 에 함께 봉안하는데 태지(胎誌)는 태(胎)의 주인에 대한 신상명세서다. 궁중 풍속에 의하면 왕자들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지나면 태(胎)를 태호(胎壺)에 봉안하는데 주로 상감분청이다. 이때 태호(胎壺)는 태(胎)를 봉안하기 전에 백번을 씻는다. 그리고 밑바닥에 동전을 깔고 태(胎)를 봉안한 다음 붉은 비단에 뚜껑을 감싼다. 그것을 다시 외호(外壺)라고 하는 큰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 사이를 솜으로 채워 움직이지 않도록 한 다음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종이로 싼다. 태호는(胎壺) 태지(胎誌)와 함께 봉안 한다.
왕세자의 경우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따로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실은 전국 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봉(胎峯)을 선정하였고, 이곳 돌혈(突穴)에 해당하는 자리에 좌향을 정하여 태를 묻고 주위에는 석조물을 세워 왕릉같이 장엄하게 하였다. 태실(胎室)을 마련한 태봉(胎封)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일반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 일체 행위를 금지하여 특별하게 관리하였다. 이에 관한 업무는 예문관이 맡았다. 왕들의 태실(胎室)은 가능하면 궁중으로부터 거리가 먼 지방의 명당을 찾아서 마련하는데 이는 왕과 백성의 합일을 통해 왕실의 번영과 국토민안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에서 본 사연댐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되는데 아기 태실은 왕실 자손의 태를 묻고 조성한 시설물이라면, 가봉 태실은 왕이나 왕비, 추존왕을 대상으로 그 격식에 맞게 석물을 추가한 것을 뜻한다. 2023년 3월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148개소로, 아기 태실 120개소, 가봉 태실 28개소이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의 고적 조사사업에 의해 조선 왕실의 태실이 파괴되었다. 즉 1928∼1929년 이왕직이 전국에 흩어진 조선 왕실 태실(胎室)에 매안(埋安)된 태항아리와 태지(胎誌)를 수습한 후 서삼릉에 집장(集藏)했고, 이 과정에서 태실(胎室) 석물들을 훼철했기 때문이다. 그때 대상이었던 54개소의 태실지는 훼손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도굴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의도는 조선 왕들을 일본 천황 아래에 포함 시켜 우리 백성을 식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왕실 태호도 많이 도굴하였다. 이후 원 태실지에 남아 있던 석물마저도 오랜 기간 방치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리고 1970년 조선 왕실 태실 관련 유적인 서삼릉이 처음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이래로 태실(胎室)과 관련 유구와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노서동 고분군(慶州 路西洞 古墳群)은 반월성의 북편 일대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지구 고분군들 가운데 북서 말단부에 있는 것으로 경주시 노서동 104번지 일대에 해당된다. 고분군 동쪽의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群)이, 남쪽의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이 있다.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은 13기의 봉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마총(馬塚, 133호분), 우총(牛塚, 131호분),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138호분, 호우총(壺杆塚,140호분),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등 8기는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된 유물이나 봉토의 규모로 보아 6세기 때의 신라왕과 왕족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목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128호분), 서봉총(129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제138호분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쌍상총(137호분), 마총(133호분), 우총(131호분) 등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이다.
고분들 가운데 서봉총(129호분), 134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등 4기는 봉분이 표형분(瓢形墳)이고 나머지는 단일원분(單一圓墳)이다. 서북단에 자리한 130호분은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보다는 약간 작지만 거분(巨墳)으로 서봉황대 고분으로 불리고 있다.
미발굴 된 고분은 서봉황대(130호분), 132호분, 134호분, 135호분, 136호분 등 5기이다.
금관총(金冠塚,128호분)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된 고분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봉토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는데 발굴 결과 크기는 직경 45m, 높이 12m 정도로 추산되었다.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덧널은 약 40㎝ 깊이로 지반을 파서 설치한 지상식의 외덧널식(單槨式)이었다.
발굴조사 계기는 주막집 증축 터파기 공사 도중 우연히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귀고리, 허리띠 등 온갖 황금제품이 쏟아져나왔다. 즉 1921년 9월 23일 노서리에 있는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있던 주막(酒幕)집에서 뒤뜰을 확장하려고 폐고분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금관총 유적지에 보존보호를 위해 돔형 전시공간을 구축금관총의 돔형 전시공간과 뒤에 보이는 봉황대 고분
본격적인 조사는 일부 유물 유실과 봉토가 훼손 된 후 진행되었는데 당시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경찰서장 입회하에 발굴조사를 하였다. 모로시카를 비롯해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그리고 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등과 함께 9월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9월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 만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금관총은 비전문가에 의해 4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를 정확히 밝히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물만 수습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발굴 후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古)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덧널의 크기는 길이, 너비가 4.8×2.1m로 추정하였으나 천마총 등과 비교하면 너무 작게 추정된 것으로 원래는 이중의 덧널식인데 내부 덧널만 조사되었고 그 크기가 그러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무널(木槨)은 약 2.5×1.0m의 크기로 칠(漆)을 한 것이다.
유물로는 금관, 금제허리띠(金製銙帶) 등의 각종 장신구, 금동말안장(金銅鞍橋), 옥충(玉蟲)을 장식한 발걸이(子) 등의 마구류, 금제완(金製완), 청동초두(靑銅斗) 등의 귀금속용기와 유리용기, 토기류, 각종 철제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엽으로 추정되고 있고, 피장자는 남자라는 주장과 여자라는 주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큰 칼의 출토상태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금관총(2015)과 금령총(2018~2020)을 재발굴하였는데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의 ‘칼끝장식’ 1점이 나왔고 2013년에도 금관총 유물의 보존처리 도중 ‘이사지왕’ 명문 고리자루큰칼 2점을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에서만 출토된 3점의 ‘이사지왕’ 명문 칼이 나왔는데 금관총의 주인공, 즉 피장자는 이사지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는 ‘이사지왕’이 보이지 않는다.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 (국립경주박물관)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서봉총(瑞鳳塚)은 세 번째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봉분은 표형분(瓢形墳, 쌍분)이고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1926년에 발굴조사를 했다. 표형분(瓢形墳, 쌍분)은 북분과 남분으로 구성되고 남분을 먼저 발굴을 했고 데이비드 총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Percival David, 1892~1964)가 발굴 자금을 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발굴 결과 금령총보다 많은 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당시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를 기념하여 서봉총으로 명명되었다.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취하고, 출토된 신라 금관 장식 가운데 봉황새 모양 장식이 있어 봉황(鳳凰)의 「봉」자를 취해서 「서봉총」이라 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은 금관총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m의 거리를 두고 있다.
현재 서봉총(瑞鳳塚) 자리에는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의 발굴조사는 금령총의 발굴조사 2년 후인 1926년에 역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관총, 금령총이 먼저 발굴되어 금관이 출토되어서 경주 노동리, 노서리 일대에 분포한 신라 무덤에는 금관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시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나라의 옛 사찰과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그리스, 로마 등의 고분 발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발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일본은 마침 경주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라 고분 발굴 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당시 일본 교토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하마다가 황태자를 안내하여 발굴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고 신라 무덤이 일본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된 셈이다.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때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되어 있어 그 용지를 매립해야 했다. 이때 매립 할 흙이 필요하게 되자, 서봉총의 봉토 흙이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의 매립에 사용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봉황모양장식을 얹은 금관을 비롯한 유리제팔찌, 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 등의 각종 장신구, 청동초두(靑銅斗), 칠도각병(漆塗角甁), 유리그릇을 비롯한 각종 용기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연수원년(延壽元年) 신묘년(辛卯年) 3월에 이 은합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연수원년은 451년 또는 511년으로 추정되는데 451년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분은 이보다 늦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이고 피장자는 여성 왕족묘로 추정된다.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서봉황대 고분은 직경이 거의 80m에 달하고 신라 마립간기 말기인 6세기 초의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 봉토의 상면에서 함몰 현상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서봉황대 고분(미발굴 130호분)미발굴 132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호우총은 남쪽에 배치되어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하였고 두 고분 모두 표형분(瓢形墳)이다.
봉토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4m 정도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금속용기류, 마구류,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출토된 청동합(靑銅盒, 보물 제1878호) 바닥에는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십(壺杅十)"이라는 4줄 16자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이 이름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호우총이라 명명하였다.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이 청동합(靑銅盒, 청동호우)은 보물 제1878호로 높이 18.5cm, 폭 23cm,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와 동일한 글자체와 제작 시점을 명확히 알려주는 명문 내용 등으로 인하여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뒤 2년이 지난 415년(장수왕 3년)이다.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있었던 제사 때에 만들어진 제기(祭器)의 하나로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銙帶)를 출토하는 최고위급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청동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 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나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은령총(銀鈴塚)은 호우총(壺杅塚)의 북편에 위치하고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발굴 당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중형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봉토의 크기는 직경 20m, 높이 5m로 내부구조는 호우총과 비슷한데, 덧널부는 지하에 설치되었으며 호우총보다 대략 30㎝ 정도 깊게 설치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두향(頭向)은 동쪽이며, 머리 쪽에 부장품이 놓여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동관과 금동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쇠솥 등의 금속제용기류, 칠기, 토기 등과 함께 약간의 철제이기류와 은장도, 그리고 마구류 일부가 수습되었다. 피장자는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널 내에 장식된 큰 칼이 없고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주인공은 왕족의 부인 정도로 여겨지며, 그 축조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쌍상총(雙床塚)은 봉분이 원형봉토분으로 노서동(路西洞)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1953년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묘제는 통일신라 초기의 부부합장분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대부분 도굴되었고 널방(玄室) 내에 2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屍床臺)가 발견되어 쌍상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되고 봉분이 훼손당한 것으로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토의 중심에는 남향한 돌방(石室)이 배치되었다. 널방(玄室)은 길이(동~서) 3.3m, 너비(남~북) 3.0m, 높이3.6m의 크기로 네 벽은 지면 위에 잘 다듬은 깬돌(割石)로 쌓았다. 벽들은 바닥에서 2m 높이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나 그 위부터는 내곡(內曲)하며 줄어들게 쌓았고 위에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뚜껑으로 얹었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네 벽을 쌓을 때는 일정한 크기의 깬돌을 사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쌓았고 그 위에는 회를 발랐다. 널방의 바닥에는 회를 깔고 중앙에 벽과 약 30㎝의 거리를 두고 길이, 너비, 두께가 2.3×2.0×0.3m인 주검 받침(屍床)을 설치하였다.
주검 받침은 자연석과 냇돌(川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먼저 북쪽에 너비 1.5m의 주검 받침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덧대어 너비 0.5m의 2차 주검 받침을 설치한 것이다. 주검 받침의 전면에도 회를 발랐는데, 원래의 주검 받침에는 0.9×0.3×0.2m인 6매의 판석에 시신의 머리·몸·다리를 놓을 만큼 조각하여 정교하게 파 놓았다. 제2주검받침에는 돌베게(石枕)와 돌발받침(石足座)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널(木棺)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안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널방의 정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을 달았는데, 널길은 길이, 너비, 높이가 3.0×1.35×1.5m 정도였다. 널문은 길이, 너비, 두께가 1.33×0.55×0.1m 크기로 문주석(門柱石)을 돌출시키고 밑에 문지방석을 놓고는 2매의 가공한 판석비(板石扉)를 달았다.
이 비(扉)에는 귀면(鬼面)으로 된 청동제좌판(靑銅製座板)에 낀 문고리가 하나씩 달렸고, 그 아래에 철제의 빗장이 걸쳐져 있었다. 비에서 1.6m 떨어진 곳부터 널길의 입구까지에 돌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였다. 돌방(石室)의 안에서는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을 비롯한 약간의 토기편만 출토되었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아 마립간기(麻立干期) 신라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마총(馬塚)은 서봉황대 고분의 전면에 배치된 표형분인 134호의 서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도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사한 결과 말뼈와 안구편(鞍具片)이 나왔다 하여 마총(馬塚)으로 불리고 있다. 그 후 1953년 국립박물관이 이 고분과 약 50m 떨어진 쌍상총과 함께 재조사를 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방과 널길 사이에 돌문이 아닌 나무문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고분 모두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조사 시, 봉분은 많이 깎여 나가고 동서와 남북의 직경이 각각 3.4m, 노면에서의 높이는 3.57m만 남아 있었으나 원래 봉분의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정도인 쌍상총과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총(馬塚)의 돌방은 지상에 남향하여 축조되었다. 널방(玄室)은 동서 3.0m, 남북 3.24m, 높이 3.7m의 크기로 남북이 약간 길지만 정방형(正方形)으로 볼 수 있다. 널방의 네 벽은 비교적 크기가 고르고 장방형(長方形)으로 다듬은 깬돌(割石)로 열과 단을 맞추어 위로 올라가며 좁혀 쌓았다.
마총의 조성연대는 통일초기(統一初期)로 판단되고 있으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문에 나무를 사용한 예는 통구지방의 고구려고분인 무용총(舞踊塚)에서 보이고 있어, 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보아 마립간(麻立干)시기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표형분인 미발굴 134호분표형분인 134호분의 호석
138호분 138호분은 조사 전 이미 봉분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원래는 직경이 약 2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하에 무덤 구덩이를 파고 하나의 덧널(木槨)을 설치한 외덧널식이다. 덧널은 길이, 너비, 높이가 3.8×1.5×1.5m 크기로 추정되었고, 장축은 동-서로 두었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에 치우치게 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을 두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반지, 은반지,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 청동정(靑銅鼎), 쇠솥(鐵釜) 등의 금속용기류, 토기류, 쇠투겁창(鐵矛) 등의 철기류, 청동복륜(靑銅覆輪),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피장자는 남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우총(牛塚)은 노서동고분군 서쪽의 평지에 위치하고 7세기 전반에서 후반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와 고이즈미 아키오(小川顯夫)가 영국인 데이비드의 자금지원으로 발굴한 서봉총(노서동 129호) 남분(데이비드총)에 대한 조사성과가 부진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조사된 고분이다. 발굴 후 민가의 담장에 포함되어 있다가 지금은 주변 지역이 정비되면서 개석 1매만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발굴 당시 봉분의 높이는 약 2m 정도로 일부가 잔존하였다. 석실의 벽체가 붕괴되면서 상부에 적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석의 크기는 길이 220㎝, 너비 140㎝, 두께 40㎝의 원반 모양으로 표면에는 작은 원형의 성혈과 홈이 관찰되는 점으로 볼 때, 지석묘의 상석을 가져다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길이 395㎝, 너비 380㎝의 정방형에 가깝고, 현실의 정남쪽 중앙에 연도가 달려있다. 현실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 들어가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내부 안벽에 접한 양쪽 모서리 부분에 각각 1매의 판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관대 시설로 보인다.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이는 벽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무문전은 노서동137호분(쌍상총)에서 조사된 사례처럼 관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도의 길이는 2.6m이고 할석을 이용해 폐쇄하였다. 벽석에는 0.6㎝ 두께로 회를 발랐다. 연도와 현실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미석이 있다. 석실의 내부에서 소뼈가 출토되어 우총이란 별칭이 붙었다.
경주 낭산(狼山) 선덕여왕릉 아래 있는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가장 먼저 지은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의 사찰이다. 문무왕 674년(14년) 당나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서해로 오는 당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밀교 신인종의 시조인 명랑법사가 여러 개의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었다. 그리고 풀로 오방신의 상을 세워서 유가의 명승 12명과 더불어 문두루 비법을 사용하여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으로 당 수군을 서해에 수장시킨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이다.
5년 후 문무왕 679년(19년) 8월에 양지스님 감독아래 절을 다시 고쳐 세워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고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해적이 나타나 이를 물리치기 위해 명량계통의 두 스님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쳤다. 또한 도솔가로 유명한 월명스님이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고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고 월명사(月明師)도 이 일로 생겨난 이름이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절터에는 금당 터, 목탑 터, 강당 터, 단석 터 그리고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 귀부의 비각(碑閣) 터, 2기의 석교(石橋)와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절의 구성은 금당을 중심으로 좌, 우에는 목탑이 배치되었고 이들을 둘러 싸는 동, 서익랑을 포함하여 동, 서, 남, 북으로 회랑을 형성하였으며 남쪽에는 중문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북쪽 밖에는 강당(講堂)과 단석(壇席)이 배치되어 있고 남쪽 동, 서에는 귀부 2기, 서쪽에는 당간지주 1기가 배치되어 있다.
서 귀부로 원래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에 불상과 함께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즉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찬왕사 목탑 터는 통일신라 최초의 쌍탑 터로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층수는 비슷한 시기 망덕사 목탑터 초석이 정면 3칸, 측면 3칸에 삼국유사 기록에는 13층이고 황룡사, 분황사의 탑이 9층 또한 남산 탑골 마애조상군의 북면 목탑을 모각한 마애탑이 7층, 9층임을 감안하면 사천왕사 목탑도 층수가 다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최초의 3층 석탑의 쌍탑은 감은사지 3층 석탑으로 여겨진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동 목탑 터 기단부에서 4기의 녹유신장상이 출토되었는데 최근 추가 발굴조사에 따르면 녹색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벽돌로 부조상을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신장상은 화살, 칼, 등을 손으로 잡고 악귀를 짓밟고 있는 상으로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3종류의 신장상이 1면에 6기를 배치하여 기단부 4개 면에 총 24기가 조성되었는데 기존의 사천왕상이나 팔부중상과는 형상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이를 조각한 양지스님은 인도에서 온 스님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리고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고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며, 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 쌍탑 출현은 삼국통일 후 정치적 경제적, 후유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권을 강력한 우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에 하나는 석가모니 불탑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재세 시에 왕권 상징의 위엄과 현세의 복을 바라는 뜻으로 쌍탑을 조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 된 서 목탑 터의 기단 모습양지(良志) 스님이 조각한 사천왕상을 복원한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벽전(甓塼)서 목탑 내부에는 문무왕의 일대기와 현세와 내세의 복을 비는 시설을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서 목탑 터와 동 목탑 터
사천왕사 터 남쪽 중문의 동편에 자리 있는 동 귀부는 남쪽으로 머리 방향을 두고 있고 귀비는 사천왕사 사적비로 추정된다. 반면 중문의 서편에 자리 있는 서 귀부는 원래는 서탑 또는 능지탑인 북쪽을 향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쪽으로 바꿔졌다. 귀비는 문무대왕 능비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문무대왕의 일대기, 태종 무열왕과 조상의 가계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최근 7차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2기의 귀부 앞에는 물길이 있었고 이를 건너 갈 수 있는 2기의 석교가 있었다. 그래서 사천왕사를 가기 위해서는 석교를 경유하여 중문을 통과해야 했다. 또한 귀부에는 비각이 있었고 현재 동귀부에서 비각 초석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천왕사 터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사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식의 3간공 관통형 당간지주로 동일한 3간공 관총형 당간지주인 분황사와 보문동사지 당간지주의 중간 형식 단계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1982년 인근 마을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이 자리는 원위치가 아니다. 그리고 인근 마을이 어디인지, 원래의 자리 즉 어느 사찰의 당간지주인지 알 수 없다.
삼국유사 제 2권 기이(紀異) 제 2 문호왕(文虎[武]王) 법민(法敏)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平壤)에 이르러 당(唐)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가지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동 목탑 터의 초석들. 동 목탑의 내부에는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또는 부처님 일생에 관련된 내용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엄하게 만들었으리라 추정된다.동 목탑 터의 심초석동탑 터와 서탑 터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 각간(角干)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새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명랑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거기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道場)을 개설(開設)하면 좋겠습니다.” 그때 정주(貞州)에서 사람이 달려와 보고한다. “당나라 군사가 무수히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돌고 있습니다.” 왕은 명랑을 불러 물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명랑이 말한다. “여러 가지 빛의 비단으로 절을 가설(仮設)하면 될 것입니다.” 이에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만들고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만들었다. 그리고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열두 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하여 문두루(文豆婁)의 비밀한 법(法)을 쓰게 했다. 그때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아직 교전(交戰)하기 전인데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서 당나라 군사는 모두 물속에 침몰(沈沒)되었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하여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금당 터의 초석들금당터의 본존불과 협시불의 지대석 좌우에 있는 유공초석(有孔礎石)
그 후 신미년(辛未; 671)에 당나라는 다시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왔으므로 또 그전의 비법을 썼더니 배는 전과 같이 침몰되었다. 이때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은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문준을 불러서 묻는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두 번이나 대병(大兵)을 내었는데도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들은 상국(上國)에 온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 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恩德)을 갚으려고 낭산(狼山) 남쪽에 새로 천왕사(天王寺)를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萬年壽命)을 빌면서 법석(法席)을 길이 열었다는 일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郞) 낙붕귀(樂鵬龜)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금당 터의 본존불의 사각 지대석과 좌우협시불 지대석금당이 문두루비법의 핵심인 오방신을 두었는지 아니면 가람구조 자체가 오방신을 모시는 시설인지 향후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다.
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이 절을 사신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새 절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청한다. “먼저 황제의 수(壽)를 비는 천왕사에 가서 분향(焚香)하겠습니다.” 이에 새로 지은 절로 그를 안내하자 그 사신은 절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하고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국인(國人)들이 금 1,000냥을 주었더니 그는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天王寺)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壽)를 축원할 뿐이었습니다.”했다. 이때 당나라 사신의 말에 의해 그 절을 망덕사(望德寺)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 5권 신주(神呪) 제 6 명랑신인(明朗神印) 〈금광사(金光寺) 본기(本記)〉를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법사 명랑(明朗)이 신라에 태어나서 당나라도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데 바다의 용의 청에 의해,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秘法)을 전하고, 황금 1,000냥을 보시(布施)받아 가지고 땅 밑을 잠행(潛行)하여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고 용왕(龍王)이 보시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佛像)을 장식하니 유난히 광채가 났다. 그런 때문에 절 이름을 금광사(金光寺)라고 했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이요,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으로서 혹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는데, 소판(蘇判) 무림(戊林)의 딸 김씨(金氏)로서 즉 자장(慈藏)의 누이 동생이다. 재량(才良)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맏이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이요,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다. 처음에 그 어머니가 꿈에 푸른빛이 나는 구슬을 입에 삼기고 태기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서단석(西壇席) 터. 단석(壇席)은 문두루도량의 법단으로 추정된다.서단석(西壇席) 터의 초석으로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다.
신라 선덕왕(善德王) 원년(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乙未;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신(戊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병을 거느리고 신라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군사를 백제(百濟)에 머물러 두고 장차 신라를 쳐서 멸망시키려 했다. 신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막았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장차 신라를 치려 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이것을 듣고 두려워하여 법사를 청해다가 비법을 써서 빌어서 이를 물리치게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울 때 또한 해적이 와서 침범하니, 이에 안혜(安惠)ㆍ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廣學)ㆍ대연(大緣) 등 두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법을 만들어 해적을 물리쳐 진압했으니, 모두 명랑의 계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법사를 합하여 위로 용수(龍樹)에 이르기까지를 구조(九祖)로 삼았다. 또 태조가 글들을 위해 현성사(現聖寺)를 세워 한 종파(宗派)의 근본을 삼았다.
동단석(東壇席) 터
삼국유사 제 4권 의해(意解) 제5 양지사석(良志使錫)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塔)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찬(讚)해 말한다. 재(齋)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삼국유사 제 5권 감통(感通) 제 7 월명사(月明師) 도솔가(兜率歌) 월명은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있으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어느 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문 앞 큰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곳을 월명리(月明里)라고 했다. 월명사(月明師)도 또한 이 일 때문에 이름을 나타냈다. 월명사는 곧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인데 신라 사람들도 향가를 숭상한 자가 많았으니 이것은 대개 시(詩)ㆍ송(頌) 같은 것이다. 때문에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찬(讚)해 말한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동생의 노자를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을 일깨워 항아(姮娥)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兜率天)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혈맹기념비(Blood Compact Shrine, Tagbilaran east road in Tagbilaran City)
혈맹기념비(Blood Compact Shrine)는 스페인의 정복자 레가스피와 보홀섬의 추장인 시카투나가 맺은 우호조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비로 당시의 상황을 조각으로 만든 조형물이다. 블러드 힐의 타그빌라란 프리엔드십 공원(Tagbilaran City Friendship Park)에 있다.
블러드 힐의 타그빌라란 프리엔드십 공원(Tagbilaran City Friendship Park)에 있는 혈맹기념비(Blood Compact Shrine)
타그빌라란 시(Tagbilaran City)는 스페인 정복 이전에는 중국과 말레이 반도와의 교역으로 번성한 마을이었다. 1565년 3월 스페인의 정복자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필리핀으로 향하기 위해 멕시코를 지나 1565년 3월에 보홀섬에 도착했다.
당시 보홀섬에 사는 추장 다투 시카투나(Datu Sikatuna)와 초대 필리핀 총독이 된 레가스피와 화평(우호조약)을 맺고 서로의 왼팔 손목을 베어 피를 내어 하나의 용기에 부어 와인과 섞어 마시면서 혈맹을 맺었다. 이를 계기로 매년 7월 내내 산두고 축제(Sandugo Festival)에서 재현되고 있다.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 Tagbilaran east road in Baclayon)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교회 건물 중 하나로 보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고 1995년 보홀 국보로 지정되었다. 1595년 스페인 선교사들에 의해 지어진 성당으로 약 4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건물들은 여러 해에 걸쳐 세워졌으며, 그 과정은 원주민의 희생이 있었다.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
1596년 지어졌는데 회색의 거대한 건물로 산호 가루와 석회석으로 지어졌는데 건물을 견고하게 짓기 위해 달걀흰자를 섞었다고 한다.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은 1596년에 지어졌으나 지진과 화재로 무너졌고 약 200여명의 원주민들이 강제로 재건에 이용되는 아픈 역사를 품고 1727년 완공되었고 지금의 모습이다.
성당(Baclayon Church)은 1596년에 지어졌으나 지진과 화재로 무너졌고 1727년 완공되었고 지금의 모습이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맞이하는 것은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가톨릭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내부는 여타 유럽의 성당처럼 천정의 그림은 다를 바가 없이 성경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소박하고 간결하다.
바클레욘 성당(Baclayon Church) 조형물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맞이하는 16세기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가톨릭 유물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소박하고 간결하다.
성당 앞에는 필리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플루메리아(Plumeria, 칼라추치)가 피어 있어 당시 원주민의 희생을 위로한 듯하다. 꽃의 원산지는 중남미이나 스페인 식민 지배 때 갤리온(Galleon, 스페인 범선) 무역을 통해 들어왔다.
성당 앞에는 필리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플루메리아(Plumeria, 칼라추치) 나무플루메리아(Plumeria, 칼라추치) 꽃
나비 뱀 농장(Bohol Lemur and Butterfly Park, Tagbilaran east road in Loay)
농장에는 나비, 악어, 토끼, 뱀 등 사육되고 있는데 환경은 열악하다. 특히 악어가 있는 곳은 최악의 환경이다. 들어 가면 처음 만나는 것이 나비이고 나비의 성장 전 과정을 볼 수 있고 포토존도 있다.
뱀이 있는 곳에는 뱀과 스킨쉽을 권하고 사진도 찍어준다. 결국에는 상술인데 사진 파일을 보여주며 사진 구매를 권유한다.
로복 강(Loboc River, agbilaran east road in Loay)의 선상 투어와 뷔페
로복강(Loboc River)은 '필리핀의 아마존'이라 불리는 강으로 배를 타고 선상에서 뷔페 형식으로 점심을 하는 곳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정글 사이를 흐르는 강을 따라가면 풍경을 감상하는 여정이다.
배는 로복강(Loboc River) 투어 중 강가에서 생활하는 원시 부족 마을을 볼 수 있는데 옛날 모습을 재현했고 10분 정도 정박한다. 원하는 사람은 내려서 마을을 둘러 본다. 그런데 여기에 상술이 있어 사진을 찍어주면서 사진 구매를 권유한다.
옛날 모습을 재현한 원시 부족 마을
선상에서는 한 가수가 선상 여정이 끝까지 노래를 부르며 공연을 하는데 끝날 무렵에는 공연료를 요청한다.
선상에서 한국가요를 노래하는 가수
맨 메이드 포레스트(Bilar Man-Made Forest in Bilar, Loay interior road), 마호가니 숲
초콜릿 힐로 향하는 길에 빌라르 마을 도로 양쪽에 2km를 자리 잡은 '맨 메이드 포레스트'에는 고급 목재로 사용되는 키가 큰 마호가니 나무가 즐비하게 하늘을 덮고 있다. 대규모로 조성된 인공 숲으로 일명 마호가니 숲이라고 부르고 있다.
맨 메이드 포레스트, 마호가니 숲길가에 있는 망고나무
안경원숭이(Bohol Tarsier Conservation Area in Bilar, Loay interior road)
안경원숭이는 타르시어 원숭이로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영장류이고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13cm밖에 되지 않는다. 성인 남자 주먹 하나 크기에 눈이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데 마치 안경을 쓴 듯한 모습이라서 안경원숭이라고 불린다.
보홀과 인도네시아 일부에만 사는 멸종위기종으로 필리핀 정부가 지정한 보호구역에서만 만날 수 있다. 나무에 매달려 대부분 시간을 보내며 작은 도마뱀 등을 잡아먹고 산다.
타르시어 원숭이는 영화 스타워즈의 '요다'와 그렘린 속 '기즈모' 캐릭터 탄생에 영감을 준 존재다.
키세스 초콜릿 모양을 닮은 초콜릿 힐(Chocolate Hills Complex in Carmen, Loay interior road)
보홀섬 중앙에 위치한 초콜릿 힐은 200만 년 전 바다속에 퇴적된 산호섬들이 융기해 만들어진 지형으로, 평소에는 초록빛을 띠지만 건기(12월~5월)에는 잎이 마르면서 진한 갈색으로 변해 키세스 초콜릿을 닮은 모양이라서 초콜릿 힐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뿔형 언덕 수가 무려 1,270여 개에 달하는데 일정한 모양의 언덕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초콜릿 힐의 웅장한 모습을 보려면 전망대(550m)로 향하는데 전망대까지 놓인 계단은 214개다. 원래는 212개였는데 연인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맞춰 2개의 계단을 더 놓았다고 한다.
초콜릿 힐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
전망대에 오르면 원뿔 모양 언덕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지는데 특히 세부가 있는 북쪽이 더 많이 보인다. 전망대 아래 주변에는 사륜 오토바이 체험장이 있어 대여해서 초콜릿 힐 속을 누빌 수 있다.
전망대 아래 주변에는 사륜 오토바이 체험장이 있어 대여해서 초콜릿 힐 속을 누빌 수 있다.
이 동화 같은 풍경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먼 옛날 ‘아로고’라는 거인이 살았다. ‘알로야’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짝사랑 했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사랑에 눈이 먼 아로고는 자신의 손에 알로야를 쥐고 도망치지만, 너무 꽉 쥔 나머지 알로야가 죽고 만다. 슬픔에 빠진 아로고는 며칠 밤을 울었고 그의 눈물이 땅에 닿으면서 초콜릿 힐이 되었다고 한다.
아바탄 강의 반딧불 감상(Abatan River Community Life tour, Tagbilaran North road in Cortes)
아바탄 강(Abatan River)은보홀섬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하는 강이다. 해질 무렵에 보트 또는 카약을 타고 아바탄 강과 바다와 만나는 기수지역 상류의 강변에 있는 커다란 맹그로브 나무에 있는 반딧불을 감상하는 것이다.
캄캄한 밤하늘 아래 배를 타고 고요한 강을 따라 반딧불을 찾는 여정은 마치 동화와 같고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릴라 고래상어 스노쿨링(Taug Whaleshark in Lila, Bohol Circumferential Road)
팡라오(Panglao Island)의 Alona Swiss Resort에서 차로 40분 정도 가면 보홀(Bohol Island) 릴라에 도착하는데 이곳 해상에서 고래상어를 볼 수 있다. 스노쿨링에 대한간단한 교육과 안전교육, 고래상어를 만지지 말라 등 주의사항을 듣고 고래상어를 볼 수 있는 바다로 필리핀 전통 배 방카로 이동한다.
필리핀 전통 배 방카
배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크릴새우 뭉치를 뿌리면 고래상어가 다가와서 커다란 입을 벌려 크릴새우 뭉치를 흡입하고 이때 배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스노쿨링을 통해 고래상어를 근접 관찰을 하는데 매우 감동적이다. 이것은 고래상어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커다란 입을 벌려 크릴새우 뭉치를 흡입하는 고래상어
고래상어(Whaleshark)는 멸종위기종으로 몸길이는 보통 12m 내외이며, 최대 18m까지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몸무게는 15~20t에 달한다. 몸 빛깔은 등쪽은 푸른색이고 배쪽은 흰색이다. 배 위쪽으로는 흰 점과 옅은 수직 줄무늬가 있다.
체험업체 LOKALPAGE의 베이스캠퍼인 터틀즈터틀즈에서 고래상어(Whaleshark) 스노쿨링 마치고 먹는 점심식사
발리카삭 호핑투어(Balicasag Island hopping tour)
발리카삭(Balicasag Island)은 팡라오 섬 남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이곳 일대는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섬 주변 바다는 수심이 낮지만 조금만 나아가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깊어지는 절벽 지형이다. 물이 맑아서 가시거리가 좋은 데다 파도가 잔잔해 수많은 호핑투어(hopping tour)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점심식사 후 발리카삭 (Balicasag Island)으로 가는 방카를 타기 위해 이동발리카삭 (Balicasag Island)
팡라오 섬에서 필리핀 전통 배 방카로 약 40분 ~ 50분 정도 지나면 관찰 포인트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력 본격적으로 스노쿨링을 통해 관찰하는데 열대어의 무리, 거북이 및 산호초를 관찰한다. 열대어와 거북이의 유영을 바다속에서 보니 감동적이고 시간 흐름을 잊게 한다.
필리핀의 일반적인 여행지로 보라카이와 세부인데 최근에는 보홀(Bohol Island)의 호핑투어(hopping tour가 주목을 많이 받고 인기가 많다. 특히 직항로가 개설되어 여행가기가 편리하다. 김해공항에서 출발하여 보홀 팡라오 국제공항(Panglao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4시간 30분이다.
보홀(Bohol Island)은 필리핀에서 10번째로 큰 섬으로 면적이 제주도 2배 크기로 부속 섬이 70여 개 있다. 세부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세부에서 배로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면 갈 수 있다. 보홀(Bohol Island)은 행정명이 보홀주(Province of Bohol)로 주도는 타그빌라란(Tagbilaran City)으로 보홀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세부와 마닐라를 연결하는 타그빌라란 공항(Tagbilaran Airport)이 있다.
보홀(Bohol Island)의 대표적인 호핑투어(hopping tour) 지역은 보홀 남서쪽에 있는 팡라오섬(Panglao Island)으로 보홀과는 두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에 국제공항인 보홀 팡라오 국제공항(Panglao International Airport)이 있다.
그리고 보홀(Bohol Island)의 대부분 리조트와 호텔은 팡라오 섬(Panglao Island)에 있고 이동수단은 3륜 오토바이로 일명 툭툭이라고 부르는데 택시 역할을 한다.
이 섬의 유명한 해변은 알로나 비치(Alona Beach)인데팡라오 섬 남서쪽에 있다. 이름의 유래는 1973년 필리핀의 유명 여배우 알로나 알레그레가 이곳에서 영화를 찍었는데, 현지인들과 잘 어울리는 다정한 성격으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후 알로나 비치로 불리게 되었다.
알로나 비치 (Alona Beach)
돌조 비치(Doljo Beach)은 팡라오 섬 북서쪽에 있는 해변으로 알로나 비치(Alona Beach) 비해 여행객이 적고 조용하며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다. 수심이 얕고 바다 멀리 세부가 보이는 해변이고 인근에는 더 밸뷰 리조트(The Bellevue Resort)가 있다. 알로나 비치(Alona Beach)에서 툭툭이를 타고 가면 30분이면 도착한다.
돌조 비치(Doljo Beach)와 바다 멀리 보이는 세부오른쪽은 더 밸뷰 리조트(The Bellevue Resort) 건물
필리핀에 입국하려면 이 트레블(e-Travel)을 작성해야 하는데 필리핀 관광부 홈 사이트(etravel.gov.ph)에서 작성해서 등록해야 한다. 내용은 입국 및 세관신고서로 비행기 출발 시간 기준으로 72시간 이내에 작성해야 한다. 필리핀 입국이 처음이면 먼저 이 트레블(e-Travel) 계정을 만들어 거주지, 여권번호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입력해야 한다.
이후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부여 된 트레블(e-Travel) 계정이 만들어지면 로그인하여 입국 및 세관신고서를 작성하여 등록이 완료되면 QR 코드가 생성되는데 이를 캡쳐하여 저장하였다가 필리핀 공항 입국 시 보여주면 된다. 가족이 있는 경우는 보호자가 대표로 작성하여 가족 각 개인에게 생성 된 QR 코드를 휴대폰으로 가족에게 전송하면 된다.
필리핀 입국절차가 끝나면 공항에서 국내에서 구입한 필리핀 유심(e-usim 아닌)으로 교체하여 이동하면 된다. 필리핀과의 시차는 1시간으로 한국보다 1시간 늦다. 필리핀은 출국세가 있어 1인당 현금 560페소를 준비해야 한다.
보홀(Bohol Island)에서 여행하기 위해서는 현지 화폐인 페소를 준비해야 하는데 툭툭이를 부를 때나, 현금만 받는 식당, Tip 등에 필요하고 국내에서는 수수료를 고려하여 최소한의 금액만 환전하고 추가로 필요하면 현지에서 달러를 페소로 환전하면 된다. 그래서 국내에서 최소한의 페소와 달러를 준비 하면 된다.
이곳에는 수질이 안좋기 때문에 마시는 물은 PET에 들어 있는 생수를 마셔야 한다. 가능하면 국내에서 새 필터로 교체한 샤워기 헤드를 준비하여 현지에서 교체하여 사용하면 좋다. 그리고 전신 마시지 가격이 국내의 절반이고 효과도 좋아 현지 마시지 숍을 이용하면 좋다.
현지 음식은 사계절 더운 날씨 탓에 주로 튀기고 볶은 음식이 많고 닭튀김 요리가 현지인의 주식인 것 같다.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나 이곳 팡라오(Panglao Island)에 맛집은 없고 음식도 평이 한 것 같다. 대신 과일 음료인 망고, 코코넛, 수박은 좋다.
그래서 경험을 통해 살펴보면 가격 기준으로 음식점은 3가지 유형이 있다. 한가지는 현금만 받고 부득이 카드 계산 시 3% 수수료를 받는 음식점인데 Monster Crab이라는 음식점으로 한국 사람이 운영하고 가격도 비싸다.
Monster Crab에서는 요리되는 Crab을 손님이 선택한다.
그리고 가격에 5% Tip을 포함시키고 카드가 되는 음식점이다. 사실 손님 입장에서 Tip은 옵션이고 금액은 알아서 주는 것인데 가격에 포함시키는 것은 불쾌한 것이다. 알로나 비치(Alona Beach) 초입에 있는 Gerry’s Grill이라는 음식점이 해당된다. 마지막 유형은 카드가 되고 Tip은 알아서 주면 되는 음식점이다. Jose Panglao이라는 음식점이 해당된다.
보홀(Bohol Island) 여행은 스노쿨링을 이용하는 호핑투어(Hopping tour) 같은 해상여행과 초콜릿 힐, 안경원숭이 보기 등 내륙여행이 있다. 여행의 주안점은 호핑투어(Hopping tour) 등 체험이기에 여기에 비용을 많이 두었고 체험은 LOKALPAGE라는 업체를 이용했다. 숙소는 가격이 다소 저렴한 3성급인 Alona Swiss Resort를 했는데 가성비는 무난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는 진평왕릉에서 동남쪽으로 약 400m 떨어진 논 중앙(경주시 보문동 848-6번지 외)에 위치하고 있고 그곳에는 연화문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910호) 1기와 석탑재 몇 구가 흩어져 있다. 주변에는 진평왕릉을 비롯하여 보문동 사지, 황복사지, 보문동고분군 등 다수의 유적들이 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 에 대한 문헌기록은 현재 전무하며, 사찰의 명칭이나 연혁에 대해서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보문동 사지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보문동 북사지’로 부르게 되었다. 이 사지에 대한 정식 발굴조사는 아직까지 실시된 적이 없으며, 단지 유적 내에 위치한 연화문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몇몇 조사·연구가 실시된바 있다.
경주시 동쪽에 위치한 명활산(明活山, 해발 252m)의 서쪽 능선에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보문동 고분군(普門洞古墳群)이 있다. 이 고분군은 5~7세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문리 부부총과 완총, 금환총이 확인되었는데 여기 보문동 사지는 이들 지배세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에 있는
연화문 당간지주 (幢竿支柱 , 보물 제 910 호 )
연화문 당간지주 주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사찰 전체의 영역이나 가람배치에 대하여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연화문 당간지주로부터 북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석탑 부재 4매가 흩어져 있어, 보문동 사지(목탑지)와는 다른 별개의 사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사역 내 남아 있는 연화문당간지주와 석탑재 등을 참고했을 때, 적어도 통일신라 9세기경에는 사찰이 유지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인 건축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그의 저서에서 ‘보문리사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北方 幢竿支柱’라는 제목으로 이 당간지주에 관하여 상세히 기술하였다. 당시 후지시마는 ‘보문리사지’內 두 개의 당간지주 즉 보문동 사지 당간지주와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3년 이호관 선생은「경주지구유적조사 약보」에서 ‘보문리 당간지주와 폐탑재’라는 제목으로 당간지주를 포함한 주변에 산재 된 석물 등의 현황을 보고한 적이 있는데 이 보고서에는 연화문 당간지주와 함께 한 변이 127㎝, 높이 40㎝의 폐탑재(기단석부재)가 잔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문동 북사지(普門洞 北寺址) 연화문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경주 진평왕릉 남쪽 논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는 약 144㎝인데 지주 하부에 치석된 부분을 보았을 때, 일정부분이 땅속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양 지주는 동서방향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간격은 약 60㎝이다. 양 지주의 상부내면에는 폭 13㎝의 간구가 확인되는데, 당간을 고정하는 장치가 있었던 부분으로 생각된다.
또한 지주 외 측면에는 최상부로부터 아래로 약 52㎝까지 한단을 낮게 하여 사각형의 틀을 마련한 뒤, 그 안에 직경 47㎝의 연화문을 장식하였다. 연화문은 8엽의 복판연화문으로 중앙에는 자방이 있고, 그 안에 17개의 연자를 도드라지게 새기었다.
통일신라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장식을 하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당간지주는 화려한 연화문 장식이 있어 매우 특이한 예로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당간지주(幢竿支柱) 중 연화문이 있는 유일한 예로 볼 수 있다.
사찰에 의례, 행사가 열릴 때 깃발을 달아 알렸는데, 깃발을 당(幢), 깃대를 당간(幢竿), 긴 당간이 흔들리지 않게 지탱해주는 지지대를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대개 사찰의 입구에 세워진다.
연화문당간지주에서 북서쪽으로 약 10m 떨어진 논둑에 석탑부재 4매가 흩어져 있다. 부재 4매 중 3매는‘ㄴ’자형 귀틀석으로 가로 100㎝, 세로 131㎝, 높이 45㎝이며 3매 모두 같은 크기이다. 원래는 4개의 부재가 결구된 석탑 하층기단석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지표상에는 3개의 부재만 확인될 뿐이다. 1개의 부재가 보완된다면, 전체가 가로·세로 약 230㎝의 정방형 하층기단석이 될 것으로 짐작된다. 각 부재 가장 자리에는 폭 24∼27㎝, 높이 약 22㎝의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윗면은 경사가 없이 편평하다.
나머지 부재 1매는 가로 73㎝, 세로 69㎝, 높이 91㎝의 평면 삼각형의 석재이다. 두 면은 치석되었으나, 다른 한 면은 치석되지 않은 상태이다. 특히 치석된 두 면 중 한쪽 면에는 폭 15㎝의 기둥이 모각되어 있지만, 다른 한 면은 조각 흔적 없이 편평한 것으로 보아 다른 석재와 결합된 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석탑부재 역시 원래는 4개의 부재가 결구된 상층기단면석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이며, 모각된 기둥은 상층기단의 우주로 이해 할 수 있다.
현재 사지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사찰과 관련된 유구 훼손이 심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잔존하는 석탑재의 경우 보호시설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아 훼손이나 망실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울주군 삼남읍(三南邑) 교동리(校洞里)에 있는작괘천(酌掛川)은 물이 맑고 주변 풍광이 뛰어난 언양의 명소다. 이로 인해 냇가의 바위에는 온통 사람 이름이 많이 새겨져 있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리고 근래 이 일대에 벚나무가 심어져 꽃이 만발할 때는 울산 12경의 하나가 된다.
해발 1,068m의 간월산에서 발원해 태화강으로 흘러가는 작괘천(酌掛川)은 지도에는 작수천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지역주민들은 작괘천(酌掛川)으로 부르고 있고 줄여서 작천(酌川)이라고도 한다.
이름의 유래는 냇가의 수백 평이나 되는 바위가 오랜 세월의 물살에 깎여 움푹 파인 형상이 마치 술잔을 걸어 둔 것과 같다고 하여 작괘천(酌川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작괘천(酌川亭)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된 옥산과 봉화산 사이의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화강암에는 유리의 원료가 되는 형석(螢石)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자수정의 광맥도 이 형석인 어미 돌로 이어져 있는데 어미 돌을 따라 파 내려가면 단단한 화강암 속에 자수정 구덕이 형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작괘천(酌川亭)의 바위면은 형석이 많이 배겨 있어 달밤이면 반딧불이 불빛처럼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움푹 파인 형상으로 크고 작은 구덕은 자연적으로 자수정이 패여 나간 옥 구덕인 것이다
작괘천(酌掛川)에 작천정(酌川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1894년(고종 31년)에 언양 현감으로 부임해 온 정긍조(鄭肯朝)가 작천정 앞 냇가에서 시회(時會)를 열고 정각(亭閣)을 만들기로 여러 사람과 뜻을 모았으나 다른 곳으로 부임하는 바람에 만들지 못하고 1902년 여름에 최시명(崔時鳴) 군수가 정비하면서 정각(亭閣)을 세우고 이름을 작천정(酌川亭)이라고 하였다.
1902년 여름에 최시명(崔時鳴) 군수가 세운 작천정(酌川亭)
작천정(酌川亭) 안에 들어가면 지역 문인들이 지은 글이 현판에 걸려 있는데 작천정기(酌川亭記), 오언율시 등 작품이 있다.
작천정(酌川亭) 안에는 지역 문인들이 지은 글이 현판에 걸려 있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부로산(봉화산)에 석수사(石水寺)가 있다고 하였 는데 절터가 작천정(酌川亭) 입구로 추측되며 절이 있었던 자리를 지금은 절터구미라고 부른다. 그리고 언양 향교의 주춧돌이 석수사(石水寺)의 것이라고 하며 작천정 (酌川亭) 자리는 수석암(水石庵)이라는 암자터였다고 한다.
작천정(酌川亭)에서 상류 쪽으로 20m 정도 걸어가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마애석각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0인의 후손들이 일제강점기 때인 1936년에 일본인의 눈을 피해 바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0인의 이름을 새긴 바위이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마애석각 뒤쪽에는 1986년에 세운 비각이 있다.
가로 5m, 높이 2m 크기의 바위에 가로로 선무원종공신이라고 새기고 세로로 직함, 이름, 출신지역을 새겼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마애석각 뒤쪽에는 1986년에 세운 비각이 있는데 안에는 귀부 위에 높이 2.52m의 비가 있다.
작괘천(酌川亭) 초입의 바위에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5년 울주군 상북면 출신의 김영걸씨가 글씨를 쓰고 삼남면 출신 함석헌씨가 음각대자로 새겼는데 당시에 쉽지 않는 행동이다.
그리고 인내천(人乃天) 바위의 맞은 편 앞산 중턱에는 1935년 언양청년회장 신근수씨가 높이 2m, 넓이 100㎡ 부지에 민족자주 정신 청사에 남으리라는 뜻으로 청사대(靑史臺)를 축조하였고 글씨도 새겼다.
작괘천(酌川亭) 초입의 인내천(人乃天) 바위
삼남면(三南面)의 삼남은 1933년 중남면(中南面)과 삼동면(三同面)을 통합하면서 삼동의 ‘삼(三)’자와 중남의‘남(南)’자에서 한 글자씩 따서 형성된 지명이다. 교동리(校洞里)는 언양 향교(鄕校)가 있어 붙은 지명이다. 언양 향교의 창건은 언제 지어 졌는지 알 수 없으나 네 번 짓고 세 번 옮긴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