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건천읍 단석산(斷石山)의 산정(山頂) 부근에서 서남쪽으로 해발 약700m 지점 우징골 신선사(神仙寺)에 이르면 높이 10m의 ㄷ자 모양으로 솟은 거대한 암벽에 있는데 예로부터 이 바위를 상인암(上人巖)이라고 불렀다. 맨 윗사람이라는 의미의 바위 면에 여러 불상들을 새겼는데 이를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위 세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단석산 ( 斷石山 ) 정상
신선사(神仙寺)는 대한불교 법화종에 소속된 사찰로 7세기에 활동하던 자장(慈藏)의 제자 잠주(岑珠)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령각(山靈閣), 요사채 등이 있는 작은 암자이다. 특히 대웅전 앞뜰에 만발한 산나리 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주황색 꽃의 아름다움이 절제미가 흐른다.
석굴 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옛날 절 아래에 살던 한 젊은이가 이곳에 올라와 보니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두는 바둑을 구경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백발의 노파가 되어 있었다. 50년이 지난 것이다.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신선이 바둑을 둔 곳으로 불렀고, 절 이름도 신선사라고 불렀다.
신선사(神仙寺) 대웅전
단석산(斷石山, 827m)은 경주시 건천읍(乾川里) 방내리(芳內里)와 내남면(內南面) 비지리(飛只里)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주에서 가장 높고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였고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청도로 거쳐 경주로 들어오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신라에서는 국방의 요충지였다.
대웅전 앞뜰에 만발한 산나리 꽃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 단석산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숨어 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는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611)에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고 있다.
신선사(神仙寺)에서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으로 가는 길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으로 가는 입구는 서쪽으로 트인 곳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북쪽 바위(북암), 정면은 동쪽 바위(동암), 그리고 오른쪽은 남쪽 바위(남암)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바위 벽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신선사 마애불상군(神仙寺 磨崖佛像群)으로 가는 입구서쪽으로 트인 곳으로 들어서면 왼쪽에는 북쪽 바위(북암), 정면은 동쪽 바위(동암), 그리고 오른쪽은 남쪽 바위(남암)로 구성되어 있다.
북쪽 바위(북암) 오른쪽 면에는 불상, 보살상, 인물상 등 7구가 얕게 새겨져 있다. 위, 아래 2줄로 배치되어 있는데 위쪽은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3구, 반가사유상 1구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반가사유상을 제외한 나머지 불상들은 모두 왼손이 동쪽을 향하여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중생을 본존불인 미륵불입상에게 안내하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북쪽 바위(북암) 오른쪽 면에 있는 여래입상 3구와 반가사유상 1구
아래에는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향로가 같은 지물을 들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공양상 2구가 새겨져 있는데 버선 모양의 모자를 쓰고 허리춤 아래로 늘어진 바지는 폭이 매우 넓고 발목은 동여맨 차림새이다. 신발은 끝이 선 버선코 모양이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스님 한분이 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고 복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향로가 같은 지물을 들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공양상 2구공양상은 버선 모양의 모자를 쓰고 허리춤 아래로 늘어진 바지는 폭이 매우 넓고 발목은 동여맨 차림새로 신발은 끝이 선 버선코 모양이다.얕은 부조로 새겨져 있는 스님
북쪽 바위(북암) 왼쪽 독립된 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미륵불입상이 1구 서 있다. 둥근 얼굴에 미간이 비교적 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서도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머리 위로 2단으로 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인 원형 육계가 솟아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트인 가슴 사이로는 띠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이 보이게 하고 있다.
북쪽 바위(북암) 왼쪽 독립된 면에 있는 높이 8.2m의 미륵불입상미륵불의 둥근 얼굴은 미간이 비교적 넓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면서도 눈꼬리를 부드럽게 하여 환한 미소가 가득하다.
동쪽 바위(동암)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寶甁)을 쥐고 있다.
동쪽 바위(동암)에 있는 높이 6m의 보살상미륵불입상과 보살입상
남쪽 바위(남암)에는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져 있어 앞의 두 불상과 함께 삼존상(三尊像)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 면에는 불상을 만든 경위를 새긴 글이 있는데 약 20행에 200여 자이며, 마멸이 심하여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없다.
1969년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新羅五岳) 조사단이 바위에 새겨진 명문을 분석하여 석굴의 본래 이름이 신선사였음을 밝혀냈다.
남쪽 바위(남암)에 있는 보살입상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글의 전체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판독되는 부분에 ‘보살계제자 잠주(菩薩戒弟子 岑珠), 신선사(神仙寺), 잠훼(岑喙) 등의 표현이 있는데 이 중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 절의 이름이 신선사이고, 이곳에 미륵상 1구와 보살상 2구를 조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보살입상 동쪽 면에는 불상을 만든 경위를 새긴 글이 있는데 약 20행에 200여 자이며, 마멸이 심하여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없다.
이 불상군은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과 우리나라 석굴 사원의 초기 형태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 당시 불교신앙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소금강산 기슭 백율사(栢栗寺) 입구(경주시 동천동 산 4)에 있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은 보물 제121호로 높이 3m의 바위에 4 방향으로 각각 불상을 조성한 사방불(四方佛)의 석조불상(石造佛像)이다. 즉 서쪽 서면에는 아미타불, 남쪽 남면에는 석가모니불, 동쪽 동면에는 약사여래불, 북쪽 미륵불을 표현하였다. 주변에 주춧돌이 있어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위에 건물(법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결과 고려시대 만들어진 금고(金鼓 : 쇠북)가 발견되었는데 표면에 굴석사(掘石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잘못 전해져서 굴석(掘石)이라 한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를 파내 그곳에 불상을 새겼으므로 불상을 파냈다는 의미인 굴불(掘佛)이라는 이름보다는 바위를 파냈다는 의미인 굴석(掘石)이라는 이름이 더 타당하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굴불사지(掘佛寺址) 관련 「삼국유사 권3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로 나들이를 가다가 산 아래에 이르러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땅을 파보게 하니 큰 바위가 나왔고 이 바위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새기게 하고 이로 인해 절을 짓고 절 이름을 굴불(掘佛)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의 조각기법은 칠불암 마애삼존상보다 진전된 것으로 바위가 남쪽으로 터진 계곡의 중앙에 놓여 있는데 정면인 남쪽보다 서쪽 면이 더 높고 넓다. 그래서 굴불사 사방불을 조성하면서 서방 미타불상을 사방불의 중심불로 조성했는데 서악동 태종 무열왕릉을 바라보는 위치여서 신라 왕실과 깊은 연관성이 보인다.
서쪽(서방) 서면에는 주불인 아미타불입상과 좌, 우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과 대세지보살입상으로 구성되었고 아미타불입상은 바위에 붙여 몸통을 입체상에 가깝게 조각 한 다음 얼굴만 따로 만들어서 목 위에 붙이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기법은 경주 남산 약수곡 마애불입상으로 이어졌다. 좌우 협시보살은 주불의 크기에 알맞은 비례로 딴 돌을 다듬어 만들어다 주불 좌우에 기대 세워놓았는데 경주 서악동 마애삼존불 전통을 계승하였다.
서쪽(서방) 서면의 주불인 아미타불입상과 좌, 우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과 대세지보살입상
아미타불입상은 겉옷의 옷깃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려 앞가슴을 훤히 드러내놓고 치마를 맨 허리띠 표현까지 노출시켰다. 당 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 겉옷을 두 벌 겹쳐 입는 법)에 의해 속 가사는 통견법으로 입었고 겉 가사는 편단우견법으로 입어 속 가사 자락이 오른쪽 소매처럼 보이도록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동남산 칠불암 사방불에서 부터 시작한 당 나라(713∼765)의 새로운 의복표현법으로, 당시에 널리 유행하던 의복표현법이다. 수인은 선도산 아미타마애삼존대불처럼 오른손이 시무외인을, 왼손은 허리 근처까지 올려 마치 무슨 지물(持物)이라도 받쳐 든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빈손이다. 소원하는 대로 모두 주겠다는 의미의 손짓인 여원인(與願印)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좌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입상은 보관에 화불을 표현하였고 칠불암 마애삼존불의 좌 협시 보살입상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섬세하며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은 늘어뜨려 정병(淨甁)을 들었는데 몸은 약간 뒤틀어져 있다. 특히 관세음보살입상은 한쪽다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균형을 잡은 삼굴(三屈)자세를 하고 있는데 이 자세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나타나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 했던 자세로 균형 된 신체비례를 보여 주고 있다.
대세지보살은 얼굴이 반 이상 파손되어 전모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오른손에 정병을 들고 비교적 단정하게 똑바로 서 있다. 옷 주름 표현은 관세음보살입상과 대동소이 하 며 매우 세련된 면모를 보인다. 좌, 우 협시보살은 몸을 약간 비튼 자세로 측면에서 보면 등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볼륨 있는 곡선이 아름답다. 남쪽(남방) 남면에는 석가삼존입상을 조성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석가여래입상의 두상과 우협시보살상을 정으로 쪼아 떼어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재 수탈이고 한국 문화재의 참혹한 수난의 일부분이다. 조각 기법은 사방불 중 가장 우수하여 마치 석굴암 조각을 보는 것과 같아서 석굴암 조성에 참여했던 조각장(彫刻匠)이 이를 조성했을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 팽만감이 넘치도록 탄력 있는 육신의 표현과 위엄이 깃들인 넉넉하고 자비로운 표정 등이 석굴암의 주불이나 비롯한 여러 존상에서 드러나는 양식적 특색과 매우 흡사하다.
남쪽 남면의 석가삼존입상 중 두상이 없는 석가여래입상과 좌협시보살입상
불국사와 석굴암이 경덕왕 10년(751)에 창건되기 시작하기 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커서 이것이 석굴암 조각을 위한 시험 조각일 수도 있다. 석가여래입상의 의복 표현은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처럼 굽타식 통견불의에 양 다리에서 옷 주름이 매미날개처럼 둘로 갈라진 형태다. 그러나 감산사 석조아미타불 입상의 의복보다 더 얇게 표현하고 있어 그 세련도가 극에 이르렀음을 과시하고 있다. 연화대좌는 딴 돌로 만들어 밑에서 받치게 하였다. 문수보살이라고 생각되는 좌협시보살입상은 얼굴이 마치 석굴암 본존 좌상 같으나 하체가 풍만하여 꼭 인도의 마투라시대 야차녀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고 천의(天衣)로만 몸을 감싸서 소박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것은 풍만함을 더욱 강조하여 자애로운 모성 상을 표출시키는 효과를 냈다.
서면과 남면
공간의 협소성 때문에 주불과 협시보살의 크기를 거의 같게 조성하였던 듯 파손된 주불의 현재 높이는 136cm이고 문수보살입상 높이는 145cm로 협시보살상이 주불보다 더 큰, 역조현상이 특이하다. 동쪽(동방) 동면에는 약사여래불이 양 발을 무릎위로 올리고 앉아 있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합(藥盒)을 들었고 오른 손은 시무외인을 한 듯 하나 파손되었다. 몸 전체는 앞으로 숙여져 있고 얼굴 표현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신체는 활기차고 긴장감이 넘치도록 표현되었다.
동쪽 동면의 약사여래불
석벽 면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파고들며 갈라져 나간 형태여서 사람이 그 아래로 들어가 작업할 공간이 없어 그랬는지 몸체는 얕은 돋을새김과 줄무늬로 대충 처리하고 얼굴만 입체감이 날 만큼 두드러지게 새겨 놓았다. 광배 역시 선각(線刻)으로 처리하였는데 두광과 신광이 결합된 광배로 화염문이 섬세하다. 약합(藥盒)도 주변을 파내는 방법으로 그 형태를 나타냈다.
동면과 북면
북쪽(북방) 북면에는 석벽 면이 고르지 않아 두 면으로 나뉠 수밖에 없어 동쪽에는 미륵불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기고, 서쪽에는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을 선각(線刻)으로 그려놓았는데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미륵불의 높이는 161cm로 거의 등신대(等身大; 사람의 몸과 같은 크기)에 해당되는데 감실형 공간에 부조했으며 반복 된 정 자국이 빛을 방사하는 광배 같은 느낌을 준다.
북쪽 북면의 미륵불과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의 높이는 179cm으로 6개의 손에 11면의 얼굴을 가진 보살이다. 본 얼굴 양 옆으로 조그만 얼굴이 있고 그 위에 5면을, 다시 2면, 1면의 순서로 배열하였다. 이는 관세음보살의 변화 된 형태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다방면의 신통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길게 늘어진 목걸이 장식과 두 어깨, 가슴, 양 팔에 걸쳐서 내려오는 천의자락, 허리 밑에서 한 번 접혔다가 늘어선 군의가 다시 두 무릅 아래에서 U자형으로 내려왔다.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은 선각(線刻)으로 그려놓았는데 마모가 심하여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계림(鷄林, 경주)의 북악(北岳)을 금강령(金剛嶺)이라 하는데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는 대비상(大悲像; 관세음보살상) 하나가 있는데 처음 만들어진 때를 알지 못하나 신령스럽기로 소문 나 있었다.” 이 기록에는 대비상이 효소왕 2년(693)에 동해 북변 금강산 일대로 놀러 나갔다가 북적 (北狄; 말갈족)에게 포로가 되었던 국선(國仙) 부례랑(夫禮郞)과 그의 낭도인 안상랑(安 常郞)을 구해 돌아온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신라의 신기(神器)인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거문고(玄琴)를 가지고 가서 만파식적을 쪼개 두 화랑이 타게 하고 관세음보살은 거문고를 타고 하늘을 날아 백률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효소왕 시대(692년)에 백률사에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어서, 경덕왕은 백률사 초입에 사방불을 조성하여 적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포로로 잡힌 신라 백성들을 구해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이 대비상을 그대로 옮겨 사방불에 덧붙여 조각했을 것이다. 굴불사지(掘佛寺址) 석조사면불상(石造四面佛像)에 조성 된 사방불(四方佛)과 십일면육비(十一面六臂)관세음보살입상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밀교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산이다.
포석정에서 삼릉입구 사이에 삼불사와 망월사라는 근대에 창건된 절이 있는데 이곳에 선방사지(禪房寺址)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이 있다.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은 선방곡(禪房谷) 입구 기슭에 파손된 채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과 같이 복원하였다. 세 구가 모두 가까운 곳에 흩어져 있었고, 기본양식이 모두 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조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망월사 입구망월사 금강역사
1926년 유적 주변에서 「乾符六年禪房寺塔鍊治內記」라 음각한 탑지석이 발견되어, 선방사지(禪房寺址) 삼존여래상으로 불리기도 하고 삼릉계와 포석계(鮑石溪)의 중간 골짜기를 선방곡(禪房谷)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금 삼불사(三佛寺)라는 작은 절이 있는 자리가 선방곡(禪房谷) 제1사지이고 신라시대 선방사지(禪房寺址)가 있었다는 곳으로 전하고 있다. 현장에는 보물 제63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와 삼불사(三佛寺) 뜰에 있는 석탑(石塔) 부재만 남아 있다.
삼불사 입구
삼불사(三佛寺) 동쪽은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의 보호각을 건립하기 위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1987년 11월에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까지 약 1개월간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자리를 중심으로 주변 외곽 지역을 1차 발굴 조사하였고, 1988년 1월에 2차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주변 건물지에 시대차이가 있음이 밝혀졌고,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또는 그 이후의 건물지가 확인 되었다.
선방곡(禪房谷) 제1사지 석재유구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은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 종교적 신비까지 풍기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이다. 동남산 부처골의 마애여래좌상, 장창곡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생의사 미륵삼존불 또느 삼화령 애기부처)과 함께 古 신라(삼국 시대) 조각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이 풍화에 의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1988년에 기와지붕을 씌운 보호각이 건립되었다.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으로 중앙은 아미타불, 왼쪽은 대세지보살, 오른쪽은 관세음보살
중앙의 본존불은 아미타불상으로 높이 2.6m로 연화대좌는 없는 상태에 평면의 기단석 위에 서 있고 머리카락은 나발(螺髮)이며 육계가 3단으로 된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광배는 전신광배로 불상과 한 돌로 세워져 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뺨을 부풀게 하고 턱은 완강하게 처리하여 힘과 활력을 나타내었다. 눈은 눈두덩을 부풀게 하고 눈을 가늘게 처리함으로써 눈웃음을 짓게 하였으며, 양쪽 뺨을 한껏 부풀게 하고 입을 꾹 다물면서 양가를 깊게 파서 미소가 얼굴 가득히 흘러넘치게 하였다. 코는 큼직한 삼각형이며 귀는 어깨에 닿고 있지만 끝이 깨어져 형태가 분명하지 못하다.
아미타불은 광배는 전신광배로 불상과 한 돌로 연화대좌가 없는 평면의 기단석 위에 서 있다
상체는 우람한 면을 과시하지만 하체는 불분명한 다리의 윤곽 등으로 빈약하게 보여 불균형을 이룬다. 어깨의 팽팽한 윤곽 외에 가슴 등은 평평하며 다리의 볼륨이 약간 표현된 것은 주목된다.
목은 짧은 편으로 삼도(三道) 표현은 보이지 않고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손 모양(手印 : 약속을 손 모양으로 표시)은 통인(通印)으로 왼손은 팔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손바닥을 정면을 향하도록 편 시여원인(施與願印 : 소원을 들어주리라)을,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 위로 향해 치켜든 시무외인(施無畏印 : 두려워 하지마라)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손 모양(手印 : 약속을 손 모양으로 표시)은 통인(通印)으로 왼손은 시여원인(施與願印 : 소원을 들어주리라),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 두려워 하지마라)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로 가사 자락을 약간 덮고 있고 팔에 걸친 옷자락도 짧고 묵중하게 내렸으며, 그 밑으로 광배에 해당하는 면 전체에 걸쳐 옷자락이 덮어져 내려갔다. 가슴에서 발목까지는 U자형의 옷 주름 다섯 가닥이 표현되었는데, 모습은 굵은 요철형의 띠로서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아미타불의 뒷 모습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 아이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대세지보살상으로 높이 2.3m로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새겨진 이중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삼존 가운데 가장 조작이 섬세하며, 더 장식적이다. 얼굴은 둥글고 눈은 가느스름하여 눈에 웃음이 서려있다. 코는 삼각으로 짧고 입술은 조금 큰 편인데 양가가 깊게 패어져 두 뺨에 언덕을 이루면서 꾸밈없는 웃음이 넘쳐흐른다. 턱은 자그마하여 관음보살상과는 대조적이다.
대세지보살은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새겨진 이중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머리에는 관대(冠帶)를 두르고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정면 두식에는 큰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둥근 두광의 테두리에는 두 줄의 선을 돌리고 두광 안에는 5구의 화불(化佛)과 보상화(寶相花)가 새겨져 있다. 화불 또한 원형(圓形)의 두광(頭光) 광배를 가지고 있다.
세 줄로 된 목걸이 앞에 큰 꽃 한 송이가 달려 있고 허리를 감은 군의(裙依)의 자락이나 동여맨 끈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두 어깨에 걸친 천의(天依)는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연꽃을 들고 있는 왼쪽 팔에 걸쳐 아래로 흘러 내렸고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천의 자락은 배 아래로 드리워져서 원을 그리며 영락 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 팔에 걸쳐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대세지보살의 뒷 모습
대세지보살상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두 어깨에서부터 발등 가까이까지 드리워진 구슬과 꽃으로 장식된 굵은 영락이다. 보살상은 이러한 장식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중국 수나라 보살상 장식으로 유행되던 것으로 이 불상들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또 이 보살의 양쪽 허리에서 드리워져 있는 댕기장식도 삼국시대 미륵반가상과 같은 모습이다.
오른쪽의 보살은 관세음보살상으로 또한 높이 2.3m로 연화대좌가 없는 평면의 기단석 위에 서 있다. 삼존 가운데 수법이 다소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두상 광배를 하고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는 관대(冠帶)를 두르고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두식의 중앙에는 화불을 장식하였다.
관세음보살은 연화대좌가 없는 평면의 기단석 위에 서 있다.
머리 양쪽에는 끈이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그 나머지 자락은 두 귀 언저리로 흘러내려 어깨에 덮여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었고 가슴에는 승기지(僧祇支)가 비스듬히 가려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 또는 정병(淨甁)을 잡고 있다. 보병(寶甁), 또는 정병(淨甁)으로 괴로운 사람을 구하겠다는 보살의 약속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물건으로 약속을 표시하는 것을 계인(契印)이라고 한다.
허리를 감은 군의(裙依)자락은 발등을 덮었고 양 어깨에 걸친 천의는 배 아래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양 팔에 걸쳤다가 다시 아래로 굽이쳐 흘러내렸다. 발은 아미타불상처럼 모가 졌으나 오른쪽 다리가 수직으로 되어있고 왼쪽다리는 약간 휘어져있어 휴식하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뒷 모습
전체적으로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을 보면 넓적한 얼굴엔 명랑하고 천진한 웃음을 머금고 있고 도톰한 눈 두덩이와 빰에는 화사함이 피어난다. 몸은 아기처럼 거칠고 뭉툭하지만 부드러우면서 정교한 것이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생의사 미륵삼존불, 삼화령 애기부처)를 연상케 한다.
1988년에 풍화에 의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기와지붕을 씌운 보호각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26년의 조사에 의하면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의 북동쪽 20m 지점에 석탑의 하층 기단석 1개, 상층 기단석 일부와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인 3층옥개석 1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자리에서 동쪽으로 300m 떨어진 언덕에도 층급받침이 3단인 옥개석 2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두 군데의 석탑 부재들은 삼불사(三佛寺) 대웅전 옆으로 옮겨져 1개의 탑으로 복원되었다.
삼불사(三佛寺) 석탑으로 높이 6m의 소탑(小塔)이다.
3층 옥개석의 1변 길이가 95.5cm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전체높이는 6m 정도의 소탑(小塔)이다. 그런데 이 탑지(塔址) 부근에서 「乾符六年己亥五月十五日 禪房寺塔練治133) 內記佛舍利二十三 金一分惠重入 銀十五分道如入節 上和上忠心 第二志萱 大伯士 釋林典 道如 維乃 志空」으로 음각한 탑지석(塔誌石)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만약 이 기록이 2기의 석탑 중 어느 한곳의 석탑에 봉납한 것이었다면 헌강왕(憲康王)년(879)에 두 석탑 중 하나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자리가 선방사(禪房寺)였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지만, 지금 실물이 전하고 있지 않고 탁본(拓本)이나 사진도 알려진 적이 없다.
배동(拜洞), 배리(拜里)의 유래는 신라 때 늙은 재상이 부모의 제삿날에 아는 스님을 통해 스님 한 분 소개받았는데 초라하고 불결한 행색이었다. 늙은 재상은 그를 매우 푸대접하고 업신여기자 스님은 가만히 소맷자락에서 사자를 꺼내어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올라 가버렸다. 이때 자기의 경솔했음을 깨달은 늙은 재상은 밤새 엎드려 빌었고 사람들은 이를 비꼬아 이 동네를 절 잘하는 동네, 곧 배리(拜里)라 하였다.
산도(山桃)와 계행(溪杏)이 울타리에 비쳤는데, 한 지경 봄이 깊어 두 언덕 꽃이 피었네. 혜통이 수달을 한가로이 잡은 때문에, 마귀(魔鬼)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네 경주시 탑동 858-6번지 일대의 남간사지(南澗寺址)는 삼국유사 「혜통 항룡(惠通 降龍)」 기록에 따르면 출가 전 혜통(惠通)이 살던 남간(南澗)마을에 있는 절로 신라 40대 애장왕과 41대 헌덕왕 때 절이 있어 8세기에 세워 진 걸로 추정하고 있다. 혜통화상(惠通和尙)은 수달 살생을 통해 출가하였고 31대 신문왕과 32대 효소왕 때 활동한 고승(高僧)으로 당에 유학하여 무외삼장(無畏三藏)의 제자가 되어 신주(神呪)를 전수받았다. 이후 당나라 공주와 신문왕의 병을 치료하였다. 밀본법사(密本法師), 명랑법사(明郞法師)와 함께 호국불교로써 밀교(密敎)를 번성케 한 인물이다. 또한 삼국유사 흥법(興法) 제3「원종흥법(原宗興法)과 염촉멸신(猒髑滅身)」에는 남간사(南澗寺)의 중 일념(一念)이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는데,이 글에 이차돈 순교 사실이 자세히 실려 있다고 적혀있다.
절에 당(幢)이라는 깃발이 있는데 보통 사찰 입구에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매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당간을 좌우에 세워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幢竿支柱)라고 한다. 남간사지 당간지주(南澗寺址 幢竿支柱)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 3.6m, 두 기둥 사이는 70cm로 돌기둥의 윗부분과 옆모서리에는 홈을 파서 십자형 간구(杆溝 : 도랑모양의 구멍)를 한 의장수법(意匠手法 : 외관 등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꾸밈)을 하였다. 정상부의 십자형 간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수법으로 당간지주(幢竿支柱)의 크기는 높이 3.6m, 폭 60cm, 두께 45cm로 위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져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준다.
당간지주(幢竿支柱)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네 군데에 뚫었다.
당간지주의 아래 부분은 약 50㎝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 돌은 없어진 상태이고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네 군데에 뚫었다.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으로 사천왕사 당간지주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 제5권 신주(神呪) 혜통 항룡(惠通 降龍)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 혜통(惠通)은 그 씨족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의(白衣)로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인 은천동(銀川洞) 어귀(지금의 남간사南澗寺 동리東里)에 있었다. 어느 날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수달[獺]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니 뼈는 전에 살던 굴로 되돌아가서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다. 혜통이 바라보고 한참이나 놀라고 이상히 여겨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마침내 속세를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당나라에 가서 무외삼장(無畏三藏)을 뵙고 배우기를 청하니 삼장이, “우이(嵎夷)의 사람이 어떻게 법기(法器)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러나 혜통은 쉽게 물러가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섬겼다. 그래도 무외(無畏)가 허락하지 않자 혜통은 이에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 서서 불동이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조금 후에 정수리가 터지는데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삼장(三藏)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더니 물동이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면서 신주(神呪)를 외니 상처는 이내 아물어서 전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흉터가 생겨 왕자(王字) 무늬와 같으므로 왕화상(王和尙)이라고 하여 그의 인품을 깊이 인정하여 인결(印訣)을 전했다.
이때 당나라 황실에서는 공주가 병이 있어 고종(高宗)은 삼장에게 치료해 달라고 청하자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이 가르침을 받고 딴 곳에 거처하면서 횐 콩 한 말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니, 그 콩이 변해서 횐 갑옷을 입은 신병(新兵)이 되어 병마(病魔)들을 쫓았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에 다시 검은 콩 한 말을 금 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니, 콩이 변해서 검은 갑옷 입은 신병(新兵)이 되었다. 두 빛의 신병이 함께 병마를 쫓으니 갑자기 교룡(蛟龍)이 나와 달아나고 공주의 병이 나았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은 것을 원망하여 신라 문잉림(文仍林)에 와서 인명을 몹시 해쳤다 당시 정공(鄭恭)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혜통에게 말했다. "스님이 쫓아낸 독룡(毒龍)이 본국에 와서 해(害)가 심하니 빨리 가서 없애 주십시오." 혜통은 이에 정공과 함께 인덕(麟德) 2년 을축(乙丑; 665)에 본국에 돌아와 용을 쫓아 버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번에는 버드나무로 변해서 정씨의 문밖에 우뚝 섰다.
정공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만 좋아하여 무척 사랑했다. 신문왕(神文王)이 죽고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산릉(山陵)을 닦고 장사지내는 길을 만드는데, 정씨 집 버드나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유사(有司)가 베어 버리려 하자 정공이 노해서 말했다. "차라리 내 머리를 벨지언정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 유사가 이 말을 왕에게 아뢰니 왕은 몹시 노해서 법관(法官)에게 명령했다. "정공이 왕화상의 신술(神術)만 믿고 장차 불손(不遜)한 일을 도모하려 하여 왕명을 업신여기고 거역하여, 차라리 제 머리를 베라고 하니 마땅히 제가 좋아하는 대로 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흙으로 묻어 버리고 나서 조정에서 의론했다. "왕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여 반드시 연루(連累)된 혐의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먼저 없애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갑옷 입은 병사를 시켜 그를 잡게 했다. 혜통이 왕망사(王望寺)에 있다가 갑옷 입은 병사가 오는 것을 보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기병과 붉은 먹을 찍은 붓을 가지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내가 하는 것을 보라"하고 병의 목에다 한 획을 그으면서 말한다." 너희들은 모두 너희들의 목을 보라.“ 목을 보니 모두 붉은 획이 그어져 있으므로 서로 보면서 놀랐다. 혜통은 또 소리친다. ”내가 만일 이 병의 목을 자르면 너희들의 목도 잘려질 것이다. 어찌 하려느냐.“ 병사들이 달려와서 붉은 획이 그어진 자기네 목을 왕에게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화상의 신통력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왕녀(王女)가 갑자기 병이 나자 왕은 혜통을 불러서 치료하게 했더니 병이 나았으므로 왕은 크게 기뻐했다. 혜통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서 죄 없이 국가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후회했다. 이에 정공의 처자에게는 죄를 면하게 하고 혜통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용은 이미 정공에게 원수를 갚자 기장산(機張山)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어 해독을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몹시 괴로워했다. 혜통은 산속에 이르러 용을 달래어 불살계(不殺戒)를 주니 그제야 웅신의 해독이 그쳤다. 처음에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하므로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니,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다. 이에 혜통이 말했다. “폐하께서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 장인(臧人) 신충(信忠)이란 사람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으셨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고 윤회환생(輪廻還生)할 때마다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등창도 역시 신충의 탈이오니 마땅히 신충을 위해서 절을 세워 그 명복을 빌어서 원한을 풀게 하십시오.” 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절을 세워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고 했다. 절이 다 이루어지자 공중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났다. “왕이 절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 또 노래 부른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지었는데 그 당(堂)과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보다 앞서 밀본 법사(密本法師)의 뒤에 고승(高僧) 명랑(明郞)이 있었다.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신인(神人; 범서梵書엔 문두루文豆蔞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신인神人이라고 했다)을 얻어 신유림(神遊林; 지금의 천왕사天王寺)를 처음 세우고, 여러 번 이웃 나라가 침입해 온 것을 기도로 물리쳤다. 이에 화상은 무외삼장(無畏三藏)의 골자(骨子)를 전하고, 속세를 두루 다니면서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감화(感化)시켰다, 또 숙명(宿明)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원망을 풀게 하니 밀교(密敎)의 풍도가 이에 크게 떨쳤다. 천마산(天磨山) 총지암(總持嵒)과 무악(毋岳)의 주석원(呪錫院) 등은 모두 그 지류(支流)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혜통의 세속 이름은 존승각간(尊勝角干)이라고 하는데 각간은 곧 신라의 재상과 같은 높은 벼슬이니, 혜통이 벼슬을 지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또 어떤 사람은 시랑(豺狼)을 쏘아 잡았다고 하지만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일원(24,304㎡)에 위치한 망덕사지(望德寺址)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1금당 쌍탑 가람 중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지었는데 그 소문이 당(唐)나라에 전해지자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唐) 사신인 예부시랑 악붕귀를 파견하였고 이를 속이기 위하여 사천왕사 건너편에 신문왕 4년(684)에 건립된 사찰로 효소왕 1년(692)에 낙성식을 하였다. 절의 이름은 악붕귀가 말한 ‘망덕요산(望德樂山)의 절’이라 하여 망덕사라고 하였다.
망덕사지는 낭산 자락에 위치한 사천왕사지의 남쪽에 돌출된 독립 구릉 위에 위치하는데, 『삼국유사』에 기록된 창건 연기 설화를 살펴보면 사천왕사와 창건연기를 함께 하고 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당나라의 사신이 장차 올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듣고 이 절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해서 따로 그 남쪽에 새 절을 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먼저 황제를 축수하는 곳인 천왕사에 분향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를 새 절로 인도해 보였더니, 그 사신은 문전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고 하면서 끝내 들어가지 않으므로 국인이 금 1천냥을 주었다. 그 사신이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명을 새 절에서 축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사신의 이 말로 인해 망덕사라고 하였다.」
망덕사지 ( 望德寺址 ) 당간지주 ( 幢竿支柱 , 보물 제 69 호 )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 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 터와 강당 터, 남쪽으로 중문 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 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 터 남쪽에 계단 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69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동·서 목탑 터는 사청왕사지의 동·서 목탑 터와 함께 신라 목탑 구조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망덕사는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당시 서라벌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이다.
망덕사지 일원 토지는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소유하고 있었지만, 해방 이후 민간에 불하되었다. 이에 현재는 금당지, 동탑지, 당간지주 주변만 국유지로 남았고, 사역 주변 대부분은 민간에서 경작지로 이용하고 있다.
1965년 망덕사지 남쪽의 경작지에서 석제 계단 터가 발견되었는데 절로 오르기 위한 시설로 그 높이는 3m 정도로 추정된다. 불국사와 같이 사찰 전면에 설치된 축대 앞에 만들어졌고 계단의 양쪽에는 높이 90㎝, 한 변 너비 14㎝의 팔각기둥이 세워졌다.
망덕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문화재관리국이 2차례 조사하였다. 1차 발굴조사(1969. 11. 11∼18)에서는 동·서 목탑 터와 회랑 터의 확인에 주력하였고, 2차 발굴조사(1970. 4. 1∼27)에서는 금당, 북회랑 터, 동회랑 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편, 귀면와, 명문전, 고려시대 청동정병과 개원통보1점등이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사찰 규모는 남쪽 진입계단을 제외한 중문지를 기점으로 가로 약 62.105m, 세로 약 67.997m이고, 전체 면적은 약 4,223㎡이다.
망덕사지에서 본 낭산
망덕사지의 전체 가람구조는 가장 남쪽 단애 면에 사찰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계단이 있고, 그 북쪽에 중문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그 북쪽으로 동서 목탑(3×3칸)이 각각 위치하고, 금당(5×3칸)과 강당(7×3칸 추정)이 동서 중심축선상에 남북으로 각각 차례대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서·남편에는 회랑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금당과 동·서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기단의 전체의 규모는 약 16.3×12.4m이고 7세기 후반에 조성되어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각각 한 번의 중창이나 대규모 개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망덕사지 금당터
동, 서 목탑은 금당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18.4m 이격된 지점에서 동, 서로 약 16.6m 떨어진 곳에 각각 위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동·서 목탑은 모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건물로 추정되며, 현재 탑지 중심에는 팔각의 심초석이 남아있다.
사천왕사 목탑과 망덕사 목탑을 비교했을 때, 가장 차이나는 것이 단층기단과 이중기단이라는 점이다. 사천왕사 목탑, 감은사 금당 등은 모두 이중기단으로 조성되어 건물의 격을 더욱 높인 듯하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망덕사의 경우 목탑과 금당이 모두 단층기단으로 확인된다.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신라 중대 왕실사찰이자, 성전사원으로 당시 신라에서 사격이 가장 높았던 사찰 중 하나이다.
망덕사지 동 목탑 터
특히 망덕사는 효소왕이 낙성식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창건 배경 등을 고려해 볼 때, 앞의 사찰보다는 사격이 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삼국시대 조성된 황룡사 금당이나 통일직후 679년에 조성된 사천왕사, 그리고 682년에 조성된 감은사 금당까지는 모두 이중기단인 것에 비하여, 685년 혹은 692년 조성된 망덕사 금당, 751년경 조성된 불국사 금당(현 대웅전)의 경우 모두 단층기단을 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 주요 사찰의 건물 기단이 이중기단에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는 시점이 망덕사가 조성되는 시점이 아닌지 추정되고 있다.
망덕사와 관련된 사료 내용은『三國遺事』와『三國史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창건 연기 설화와 목탑의 흔들림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먼저 『三國史記』에 나오는 주요한 기록을 살펴보자.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神文王
신문왕 5년(685) 여름 4월에 망덕사가 완성되다.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孝昭王
효소왕 11년(702)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서 장사지냈다. 『舊唐書』에는 장안2년(702)에 이홍(理洪)이 죽었다고 하고, 여러 고기에는 임인년(702) 7월 27일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대족3년(703)에 죽었다고 한다. 『資治通鑑』이 잘못되었다.
卷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경덕왕 14년(755) 봄 망덕사 탑이 흔들렸다. 당의 영호징(令狐澄)의 『新羅國記』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당을 위해 이 절을 세웠던 까닭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두 탑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고, 높이는 13층이다.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 하기를 며칠 동안 그러하였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니었을까?
『三國遺事』에 나오는 주요한 기록을 보자.
卷第一, 紀異 第一 奈勿王金堤上
처음 제상이 출발하여 떠날 때에 제상의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망덕사 문 남쪽의 모래 언덕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울부짖었다. 그런 까닭에 그 모래언덕을 장사(長沙)라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그 부인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부인이 두 다리를 뻗쳐 일어서지 않으려 했다. 이에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불렀다. 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하는데 지금도 사당이 있다.
卷第五, 感通 第七眞身受供
장수(長壽) 원년 임진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망덕사(望德寺)를 처음 세워 당 황실의 덕을 받들게 하였다. 뒤에 경덕왕(景德王) 14년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이 있었고, 신라인들이 말하기를 “당 황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卷第五, 感通 第七 善律還生
망덕사의 중 선율(善律)은 보시 받은 돈으로 『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공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갑자기 명부의 쫓김을 받아서 저승에 이르렀다. 명사(冥司)가 묻기를 “너는 인간세계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라고 하니 선율이 “빈도는 말년에 『大品經』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공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사가 “너의 수록(壽籙)은 비록 다 되었으나 뛰어난 소원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인간세계로 돌아가 보전을 완성하여라.”라고 하고 곧 놓아 돌려보냈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이른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 망덕사터 서쪽에 65㎝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표면에 아무런 조각과 장식을 두지 않는 대신, 지주 바깥면의 모서리를 윗부분부터 줄어들게 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내었다. 기둥머리는 안쪽 측면에서 바깥 면으로 내려오면서 곡선을 그리며 외부로 6㎝쯤 깎여져 경사를 이루고 있고, 안쪽 윗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만들었다.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이른다.
각 면에 비록 조각은 없으나 소박하고 웅장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망덕사는『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에 창건된 사찰인데 이 당간지주도 당시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는 높이 2.9m로 망덕사터 서쪽에 65㎝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장사(長沙)와 벌지지(伐知旨)
장사는 남천에 있는 모래언덕으로 신라의 충신 박제상(김제상)이 왜국으로 떠날때 그의 부인이 슬픔에 못이겨 울부짖으며 혼절한 곳이다.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자.
신라의 17대 내물왕(奈勿王) 36년에 일본 왕이 보낸 사신이 찾아왔다. 왕자를 일본에 포로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내물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美海)왕자를 일본으로 보냈다. 이후 미해왕자는 30년 동안 신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내물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이 된 눌지왕은 미해왕자를 그리워했다. 이 말을 들은 김제상은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김제상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쫓아갔지만 이미 배가 출발한 후였다.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모래밭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울었는데, 이곳을 ‘장사(長沙)’라고 부른다. 일본에 도착한 김제상은 신라를 도망쳐 나왔다는 말로 일본의 왕을 속여 환심을 산다. 이후 미해왕자를 배에 태워 신라로 보냈다. 이 사실을 안 일본의 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한편 김제상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불렀다. 이후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후 김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천(南川)은 경주시 외동읍 신계리와 괘릉리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월성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주시내를 중심으로 남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남천이 아니라 문천(蚊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문천은 순우리말 이름인‘모그내’를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며, 경주시내 남쪽의 남천을 일컫는 고유 명칭 중 하나이다. 두 문헌에는 사천(沙川)이라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는 경주시내 남쪽의 남천하상이 주로 모래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치술령 부근에 망부석(望夫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박제상의 아내가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어서 변한 돌 이라는뜻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는 치술령이 경주 중심지의 남쪽 36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망부석 부근에는 치술신모에게 제사지내던 무제당터 또는 신모사터가 전해지고 있다.
진신수공(眞身受供),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말라!
장수(長壽) 원년 임진(壬辰; 692)에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망덕사(望德寺)를 세워 당나라 제실(帝室)의 복을 받들려 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14년(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은 말했다. “당나라 제실을 위하여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 영험이 있을 것이다.”
8년 정유(丁酉)에 낙성회(落成會)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는데, 한 비구(比丘)가 몹시 허술한 모양을 하고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했다. “빈도(頻度)도 또한 이 재(齋)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말석(末席)에 참여하게 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구승이 대답한다. “비파암(琵琶嵓)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갔다. 왕이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언덕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곳을 향해 멀리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남산(南山) 삼성곡(參星谷), 혹은 대적천원(大磧川源)이라고 하는 돌 위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가 와서 복명(復命)하자 왕은 드디어 석가사(釋迦寺)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 자취가 없어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
음식 만들어 중을 대접하고 옛 친구 불렀네.
이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게 비치리.
선율환생(善律還生), 선율(善律) 환생하여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완성하다.
망덕사(望德寺) 중 선율(善律)은 시주받은 돈으로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했다. 공사가 아직 끝나기 전에 갑자기 음부(陰府)의 사자에게 쫓겨서 명부(冥府)에 이르니 명사(冥司)가 물었다. “너는 인간 세계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했느냐.” 선율이 말한다. “저는 만년에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만들려 하다가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왔습니다.” 명사는 “너희 수록(壽籙)에 의하면 네 수는 이미 끝났지만 가장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했다니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보전(寶典)을 끝내어 이루도록 하라.” 하고 놓아 보냈다.
돌아오는 도중에 여자 하나가 울면서 그의 앞에 와 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역시 남염주(南閻州)의 신라 사람이온데 부모가 금강사(金剛寺)의 논 1무(畝)를 몰래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명부(冥府)에 잡혀 와서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이 일을 우리 부모에게 알려서 속히 그 논을 돌려주도록 해 주십시오.
또 제가 세상에 있을 때에 참기름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도 이불 틈에 감추어 둔 것이 있습니다. 법사께서 부디 그 기름을 가져다가 불등(佛燈)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아 경폭(經幅)으로 써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苦惱)를 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율이 말했다. “그대의 집은 어디 있는가.” “사량부(沙梁部) 구원사(久遠寺) 서남쪽 마을입니다.” 선율이 이 말을 듣고 곧 떠나서 도로 살아났다.
그 때는 선율이 죽은 지 이미 열흘이 되어 남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으므로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외치니, 지나가던 목동(牧童)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렸다. 절의 중이 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내니 선율은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는데 여자는 죽은 지가 15년이나 되었으나 참기름과 베는 완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선율이 여자가 말한 대로 명복을 빌어 주니 여자의 영혼이 찾아와서 말한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반야경(般若經)>을 서로 도와서 완성시켰다. 그 책은 지금 동도(東都) 승사서고(僧史書庫) 안에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는 그것을 펴서 전독(轉讀)하여 재앙을 물리쳤다.
테라로사는 강릉의 명물로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은 공장형 커피 전문점으로 산지에서 직접 구해온 커피원두를 볶고 추출해 판매까지 한다. 2002년 강릉에서 커피 로스터리 공장으로 시작하여 전국 15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처음에는 커피를 볶아 카페와 호텔, 레스토랑 등에 공급하는 로스팅 팩토리로 시작했다.
전 세계 산지 곳곳을 직접 찾아가 품질 좋은 원두를 선별하여 산지와 직거래 방식으로 하고 있다. 테라로사는 (주)학산의 커피브랜드로 사업영역은 원두 도소매, 매장운영, 장비판매 3가지이다. 한국공식수입원으로 에스프레소 머신인 시네소와 로스팅 머신인 페트론치니를 판매하고 있다.
㈜학산 김용덕 대표는 상고 출신으로 은행원 생활 20년을 했고 IMF 때 명예퇴직 하여 고향인 강릉에서 커피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가톨릭 관동대학교와 영동대학교에서 강사, 겸임교수로 강의를 했었다. 커피품평대회인 ‘뛰어난 컵(Cup of Excellence)' 국제심판관으로 활동한 바 있고, 한국 스페셜티 커피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테라로사는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지방 근무자에게는 아파트를 제공하고 직원들에게 커피경영 능력을 배양하고자 경영대학원(MBA)이나 관련 대학원 진학을 장려하고 학비를 전액 지원한다. 모든 직원이 1년에 2차례 해외 커피유학을 가게 한다.
이러한 회사 분위기로 장기근속자가 늘어나고 있고 ‘뛰어난 컵(Cup of Excellence)’에 국내 최초로 가장 많은 국제심판관을 등록했다. 임직원들은 바리스타(58%)와 베이커리(15%), 생산 제조팀(8%) 등 인력 그룹으로 이뤄져 있다.
테라로사는 빨간 벽돌 건물로 내부는 커피를 가는 그라인더와 커피액 농축기 같은 물품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어 커피 공장에 온 느낌을 준다. 외부는 싱그러운 수풀이 우거져 있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은은한 커피향과 맛을 즐길 수 있다.
금곡산(金谷山, 467m) 동쪽 산기슭 높은 대지 위에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 현곡면 나원리 672번지)은 신라 41대 헌덕왕 때 건립한 난원사(蘭原寺) 터에 있는 석탑이다. 탑이 있는 산줄기 북쪽에는 1970년대까지 민가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탑 앞 남서쪽 협곡에는 1975년에 세운 나원사(羅原寺)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또한 헌덕왕 때 대각사가 대각료(大覺寮)를 짓고 국운창달을 기원하던 곳으로 이곳에 보리림(菩提林)이 있었다고 한다.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제39호)은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어 신라 8괴(八怪) 중 하나인 나원 백탑(羅原 白塔)이라고 부른다. 나원리 마을에서는 계탑(溪塔)이라고도 부른다.
신라 8괴는 남산부석(南山浮石), 문천도사(蚊川到沙), 계림황엽(鷄林黃葉), 금장낙안(金丈落雁), 백률송순(栢栗松筍), 압지부평(鴨池浮萍), 나원백탑(羅原五層石塔), 불국영지(佛國影池) 등 경주에 있는 8가지 괴이한 것을 말한다.
나원리(羅原里)는 배씨 성을 가진 이가 개척했다고 하고 이름의 유래는 신라 헌덕왕 때 건립한 난원사(蘭原寺)에 의해 난원이 됐다가 나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절을 세울 때 앞들에 소가 있었고 소 주위에 난초가 무성하여 절 이름을 난원사(蘭原寺)라 하였고 마을 이름도 난원, 난원리로 불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난원(蘭原)을 나원(羅原)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탑 서쪽은 산줄기로 건물이 들어설만한 공간이 없고 동편으로는 경작지로 넓은 공간이 있어서 금당(金堂) 또는 전각(殿閣)들은 동쪽에 위치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이에 가람배치는 전당후탑형(前堂後塔形) 또는 좌전우탑형(左殿右塔形)으로 보고 있다.
경작지로 변한 주변 대지에서 통일신라시대 문양기와가 출토되어 사찰이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폐사 시기는 알 수가 없다.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제39호)은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오층석탑(五層石塔)은 장항리오층석탑과 경주 남산 늠비봉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있다.
과거 어느 때 도굴꾼에 의해 1층 탑신 북쪽면석 동쪽부분이 밖으로 30cm 정도 밀려 나와 있는 것이 오래 동안 방치한 것을 1995년 11월 24일부터 1996년 7월말까지 해체, 복원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때 3층 옥개석 중앙의 사리공에 금동제 사리함이 발견되어 조사 결과 석탑의 제작시기가 8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리함에는 4cm 크기의 금동불 입상, 금동탑 4기, 목재 소탑, 사리, 그리고 마지(麻紙)로 묵서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사경으로 된 것으로 8세기 초, 默寫經)가 들어 있었다. 특히 금동불 입상은 최고의 불상으로 정교하고 생동감 넘치는 세련미를 보여 주고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 이중기단의 5층 석탑으로 상륜부에는 노반과 찰주(擦柱) 일부만 남아 있다. 지대석과 1층 기단(基壇) 하대면석을 각각 1매석 다듬어서 그 위에 하대갑석을 올렸다. 지대석 위의 1층 기단 하대면석에는 양쪽 모서리에는 우주를, 가운데에는 탱주 3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하대갑석 위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 받침으로 2층 기단을 받치고 있다.
2층 기단(基壇) 상대면석에는 양쪽 모서리에는 우주를, 가운데에는 탱주 2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상대면석 위에 갑석부연과 상대갑석을 올렸고 상대갑석 위에 각형(角形) 2단 받침으로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기단부는 ㄱ 자형 부재 총 16매석이 사용되었는데 1층 기단의 면석과 갑석에 각 4매석에 8매석을, 2층 기단의 면석과 갑석에 각 4매석에 8매석으로 총 16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 옥개의 각 층 면석 모서리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다. 각 층 옥개석의 밑면은 5단의 옥개받침을 두고 있고, 상면은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며, 처마의 앙곡은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의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고 네 귀퉁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2~3개가 뚫려 있다.
1층 옥개 면석은 4매석으로,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낙수면은 별석으로 2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 이상 옥개 면석은 1매석으로 모서리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고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히 줄어들어 급격한 체감이 나타난다. 2층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낙수면은 별석으로 2매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3층 이상 옥개석은 1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륜부 꼭대기는 5층 옥개석 상면에 각형 2단 노반받침 위에 방형 육면체 의 부서진 노반(露盤)과 잘려나가서 35mm만 있는 찰주(擦柱, 상륜부 장식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은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맑은 기품과 높이 9.8m의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있는 절터로서, 동서는 길고 남북은 좁은 대지에 조성된 절터다. 전면인 남쪽과 동쪽은 큰 계곡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터의 상당부분이 절개 유실되어 협소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장항리(獐項里)는 마을 앞산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목, 장항이라 불렀다. 절 이름은 오랫동안 유실되어 알 수 없어 마을을 따서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라 부르고 있다.
절터에는 서 5층 석탑, 1층 탑신 위에 옥개석 5개만 올려놓은 동 5층 석탑과 갑석이 결실된 동 5층탑 기단 부재, 원형주좌초석, 금당지와 함께 석조불상의 대좌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가람배치에 있어 쌍탑과 금당의 관계는 쌍탑이 금당 앞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장항리사지는 탑과 금당이 같은 선상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1923년 4월 28일 오전 11시경 도굴범이 오층석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를 탈취하기 위해 파괴한 것을 1932년 서 오층석탑을 복원 및 보수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고동 오층석탑은 절터의 붕괴로 인하여 무너져 북쪽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1966년 2월에 옮겨 현재의 자리에 또한 세워졌기 때문이다.
좁은 절터에 쌍탑을 세우고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고 있으나 강당이나 회랑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금당 터의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이며, 남아 있는 초석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원형주좌초석과 가운데는 팔각 석조불상의 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 터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이고, 남아 있는 초석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의 규모로 추정된다.
한편으로는 전후(남북)가 좁고 좌우(동서)가 넓은 지형으로 보아 좌전 우탑(左殿 右塔) 가람배치도 추정할 수 있지만 동탑의 위치가 불확실하다.
금당 터 중앙에 있는 석조불상의 대좌
금당 터 중앙에 있는 석조불상의 대좌는2단으로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는 2단으로 아랫단은 팔각형이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를 세세히 살펴보면 대좌 아랫부분은 높이 600㎜이며 팔각형으로 조성하였는데, 각 면마다 안상을 마련한 다음 그 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를 부조(浮彫)로 처리하였다. 윗부분은 높이 53㎝이며, 복련을 조각한 원형연화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 최대 폭은 2.4m이다.
석조불상의 대좌 아랫부분 안상 속의 신수(神獸)안상 속의 신장(神將)
이 대좌 위에 놓여 있던 석조불상은 석조여래입상으로 1923년 서 오층석탑이 파괴될 때 같이 피해를 입었으나 1932년 서탑을 복원할 때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북쪽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두 팔이 잘리고 허리 위부분과 광배만 복원하였으나, 뒷부분의 광배 일부와 무릎 이하는 결실되었다.
머리와 얼굴모습 그리고 광배에 새겨져 있는 작은 부처인 화불 등의 새긴 수법을 볼 때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으로 판단되며 현존 높이는 3m이나 실제로는 4m이상 되는 장육상으로 추정된다.
서 오층석탑 (西 五層石塔, 국보236호)과 동 오층석탑 (東 五層石塔)
서 오층석탑 (西 五層石塔, 국보236호)
서 5층석탑은 높이 9.5m로 경주지역에서는 나원리 5층석탑, 경주 남산 늠비봉 5층석탑과 함께 3기가 있다. 탑 기단부의 상,하층 갑석은 결실부분이 많아서 시멘트로 보수하는 등 전반적으로 부재의 훼손이 심하다.
서 오층석탑의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추었고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다. 이중기단 중 1층 기단은 지대석 1매석과 면석 7매석으로 면석 양쪽에 우주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 2주로 총 8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석 위에 갑석부연과 갑석을 올려놓았는데 총 4매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갑석 위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 받침으로 2층 기단을 받치고 있다.
2층 기단 면석의 양쪽에는 우주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 2주로 총 7매석으로이루어져 있다. 면석 위에 갑석부연과 갑석을 올려놓았는데 총 4매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위에는 각형(角形) 2단 받침으로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기단부에는 총 23매석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개와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의 옥개와 옥개석이 각각 1매석으로 총 10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 네 면에는 문비(門扉)를 모각(模刻)하고 가운데 한 쌍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가 부조(浮彫)되어 있으나, 가운데 문짝 분할 선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문비 양쪽에는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이 1구씩 정교하게 조각했는데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양식이다. 2층 이상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2층 이상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내고 있다.
서 5층석탑 1층 탑신 면석에는 문비(門扉)를 모각(模刻)하고 가운데 한 쌍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가 부조(浮彫)되어 있다.문양의 도깨비는 신라의 도깨비 모습 아닐까?문비(門扉) 가운데 문짝 분할 선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문비 양쪽에는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이 1구씩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밑면에 5단의 옥개받침을 두고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며, 처마의 앙곡은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의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다. 네 귀퉁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상륜부는 노반 1매만 남아 있고 찰주를 포함한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다. 노반은 방형 육면체로 가운데에 원형으로 찰주공이 뚫려 있고, 상단(上端)에 2단으로 돌출된 돌림띠를 두르고 있다.
서 5층석탑의 부재 수는 모두 34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감은사지 3층석탑과 비교해 볼 때 층수는 높아도 부재 수는 1/3이 조금 넘는다. 이 또한 초기 석탑과 비교해 볼 때 시대적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전체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동 5층석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옥개석만 남아 있는 석탑으로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1966년 2월에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동 5층석탑 뒤편에 갑석이 결실된 동탑 기단 부재 일부가 있다.
동 5층석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옥개석만 남아 있는 석탑이다.동 5층석탑 뒤편에 갑석이 결실된 동탑 기단 부재 일부가 있다.동 5층석탑 1층 탑신(塔身)의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과 문비 (門扉)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국립경주박물관 내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 된 도깨비얼굴 기와주차장에서 본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