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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등나무(현곡면 오류리 527번지)는 1962년 12월 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등나무는 4그루인데, 두 그루씩 모여서 자라고 있다. 가슴높이의 줄기지름이 각각 20·40·40·50cm이며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다. 높이 17m이로 동서쪽으로 20m, 남북쪽으로 50m 정도 퍼져있다.

어떤 일이나 사정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화합하지 못하는 상태를 갈등(葛藤)이라고 하는데 갈등은 칡과 등나무이다.
칡은 줄기를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해결의 실마리가 찾는 것이 어렵다”라는 의미가 된다.

()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봄을 알리는 꽃향기로 아카시아나무 꽃향기와 더불어 등나무 꽃 향기는 은은하고 깔끔한 향기가 난다. 또한 여름에는 나그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여름나무이다.
()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학술적으로 이 나무의 본래 이름은 참등이라고 하는데 흔히 등이라고 하여 산등이나 애기등 같은 등류를 통칭한다.

등(藤)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식물로 5월에 연보라색의 꽃이 핀다.
등(藤)이라는 한자는 위로 감고 올라가는 모양을 본떠서 만든 상형문자이다.

신라 시대 때, 이곳을 용림(龍林)이라 하여 왕이 수렵을 즐기던 곳이었다여기의 등나무를 용등(龍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등나무 줄기의 꼬임과 그 위엄을 용에 견주어 붙인 명칭이다. 이 등나무 옆에 깊은 샘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고 옆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여기에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농가에 열아홉 살, 열일곱 살이 된 예쁜 두 딸이 있었는데 둘다 남모르게 이웃집 청년을 사모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싸움터로 출정하게 되어 떠나게 되고 그 모습을 몰래 보며 눈물을 짓다 두 자매는 같이 그 청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자매가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다.

자매가 그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못에 몸을 던졌던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연못가에는 등나무 두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청년이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고, 이 화랑은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달픈 사연을 듣고서 자신도 연못에 몸을 던졌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이에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화랑이 죽은 연못가 자리에서 팽나무가 자라 나왔고 이로부터 등 두 그루는 팽나무를 힘차게 감고 올라가 자라 5월이 되면 탐스러운 꽃송이로 그윽한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두 그루 등나무는 팽나무를 감고 자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을 달래고 있다고 한다.

이 애틋한 전설에서 유래되었는지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으며, 또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등나무의 잎을 달여 마시면 정이 다시 살아난다는 속신도 있다.

신혼부부의 금침(베게)에 등꽃을 따서 말린 것을 넣어주면 정이 한층 깊어진다는 말도 전하여지고 있다.

현곡면(見谷面)은 경주시의 서북쪽에 있는 면으로 남쪽으로 경주시내, 동쪽으로 천북면, 북쪽으로 안강읍, 서쪽으로 건천읍과 영천시 고경면에 접해 있다. 서쪽에서 발원하는 소현천을 중심으로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소현천은 동쪽의 형산강에 합류된다.
‘현실’이라는 순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 ‘현곡(見谷)’이라는 설이 있다. 오류리(五柳里) 이름은 마을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다 해서 유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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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207-2 평지 일대(129,643)에 위치하고 있는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사에서 모두 5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으나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이 고분군은 1963121일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경주 시내 중심부의 고분군을 제외하면 경주 주변 외곽에서는 대형봉토분들이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이다.

금척리(金尺里) 고분군(古墳群)은 경주에서 건천읍으로 올라가는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고분이 나뉘어져 있다.
건천읍에서 경주 방향으로 가는 국도 4호선

이곳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받은 금으로 만든 자(金尺)를 숨기기 위해서 40여 개의 가짜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이 무덤들 속에 묻혀 있을 것이라 전해지고 마을 이름 또한 금척리라고 명명되었다.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신라에 금자를 왕에게 바친 사람이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이 금자로 한번 재면 다시 살아나고 무슨 병이라도 금자로 한번 쓰다듬으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은 이 금자를 국보로 여겨 매우 깊숙한 곳에 두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에서 본 서쪽 고분군

이런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금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국보에 해당하는 금자를 달라고 하는 무뢰한 사신에게 순순히 금자를 내줄 수가 없었다. 곧 신하에게 명하여 토분을 만들고 그 속에 금자를 파묻었으며 주변에 다른 토분을 만들어 어느 곳에 금자를 묻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사신은 그 많은 토분을 헤치고 금자를 찾아낼 기력이 없었던 듯 물러나고 말았다. 왕의 지략으로 금자를 당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았으나 이후 어느 토분에 금자가 묻혔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서쪽에 있는 고분군
서쪽에 있는 고분군이 동쪽 고분군보다 규모가 큰 고분이 많다.

현재 남아 있는 봉토분들은 대부분 원형분으로 보이나 몇 기의 표형분(瓢形墳)도 확인된다. 또 많은 고분의 봉토 윗부분에서 함몰된 형상을 찾을 수 있어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봉토는 직경 25m 이상의 크기를 가진 것들도 있어 신라의 지방 고총들과 유사한 크기를 가졌다

금척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때 4번국도 건설공사 중 고분의 존재를 확인한 바 있다. 발굴조사는 1952, 1976, 19813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1952년 발굴조사는 도로확장공사로 파괴된 고분(1·2·3) 2기에 대한 발굴조사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서 32일부터 8일까지 실시하였다.

맨 오른쪽은  표형분(瓢形墳 )

무덤 내부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을 설치한 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였다. 조사결과 출토유물에는 1호분에서 금제세환이식·곡옥·호박제 구슬·토기 및 철기편이, 2호분에서는 많은 토기편과 소량의 철기편이 수습되었다. 따라서 1호분은 고분의 주곽부, 2호분은 부곽 가능성이 크다.

1976년 발굴조사는 318일 토사 채취 중 토기편이 발견됨에 따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적석목곽묘의 고분 4기와 우물 1기가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고배·대부장경호 등 모두 토기이다.

1981년 발굴조사는 상수도시설 공사 중 노출된 고분들에 대한 발굴조사를 경주사적관리사무소와 국립경주박물관 합동으로 423일부터 531일까지실시하였다. 수혈식석곽묘 3, 옹관묘 2, 토광묘 2기 등 모두 15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적석목곽묘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곡옥장식목걸이(曲玉附頸飾), 은제허리띠(銀製) 등이 있는데,신라 지방 고총들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하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군이 조성된 중심 연대는 5세기6세기중반으로 추정된다.

여기 건천읍에 있는 모량리(牟梁里)의 모량(牟梁)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어,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牟梁部)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고 있다.

국도 4호선을 사이에 동쪽에 있는 고분군

모량부(牟梁部)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으로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24대 진흥왕의 왕비인 지소부인(知召夫人) 또는 식도부인 박씨(息道夫人 朴氏)의 출신지로 고분을 평지에 대규모로 조성하여 그 존재감을 강조하였고, 부장유물에 있어서 시내 고분과 크게 차이가 없어 신라의 중앙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세력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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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五陵)은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있는 다섯 기의 왕릉으로 1대 혁거세왕(赫居世王, 기원전 57~ 서기 4), 알영왕비,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능이 누구의 능인지 명시되지 않고 있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은 성이 박씨이며, 전한 효선제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 57) 4월 병진(정월 15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감[居瑟邯]) 이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었다. 사라(斯羅)사로(斯盧)라고도 했다. 남산(南山)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실(宮室)을 세웠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는데 닭이 숲속에서 울었다 해서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이라 했다고도 한다. 후세에 와서 드디어 신라(新羅)라는 국호로 정했던 것이다.
박혁거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전해지고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이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후에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리고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이들을 합장하여 장사지내려하자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므로 머리와 사지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을 만들고 능의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 하였다.

오릉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에 의거하면, 통일신라 중대 이후부터 사릉(蛇陵)·사릉원(蛇陵園)이라는 능호(陵號)와 함께 혁거세왕과 알영부인의 능 또는 혁거세왕·남해왕·유리왕·파사왕의 능으로 알려지기 되었다.

능원 內에는 조선 세종 11년(1429)에 왕명에 따라 건립 된 숭덕전(崇德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고 숙종 20년(1694)에 수리하였다. 경종 3년(1723)에 ‘숭덕전’이라는 편액을 걸었고, 영조 11년(1735)에 건물을 수리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영조 때 수리한 모양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사는 처음에는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와서 박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숭덕전(崇德殿) 일대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
알영정(閼英井) 상부는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영조 35년(1759)에 세운 신도비가 숭성각(崇聖閣)에 있는데, 비석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알영부인이 탄생하였다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알영정(閼英井)이 있는데 담암사(曇巖寺)에서 사용 된 장대석으로 우물을 덮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다. 그리고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이 있다.

숭성각(崇聖閣)
숭성각(崇聖閣) 입구
숭성각(崇聖閣)안에는 영조 35년(1759)에 세운 숭덕비(崇德碑)가 있다.
숭덕비(崇德碑)에는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이 새겨져 있다.
담암사(曇巖寺) 당간지주(幢竿支柱)의 기둥을 사용하여 세운 홍전문(紅箭門)

담암사(曇巖寺)는 전불시대의 칠처가람지 중 하나로 절터는 현재 숭덕전 일대로 보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7세기로 추정된다. 담암사(曇巖寺)에 대한 기록은 문무왕 9년(679년)에 사천왕사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칠처가람지 중 가장 늦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가는 입구

오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능부터 제1호분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제5호분까지 부르고 있다. 제1호분은 높이 8.7m, 직경 41.4,m로 5기 중 가장 크다. 제2호분은 표주박형태로 높이는 각각 5.1m, 4.5m 직경은 장변 36.5m, 단변 20m이다. 제3호분은 제1호분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 5.1m, 직경 26.1m 이고 제4호분은 제3호분의 북쪽에 있으며 높이 2.5m, 직경18.2m이다. 제5호분은 제3호분의 동북쪽에 있으며 높이 2.1m, 직경 17.5m이다.

표주박형태의 제2호분은 2기의 원형분이 합쳐져서 하나의 표형분이 된 부부합장묘로 추정되고 오릉 구역에 있는 능의 수는 실제로 6기로 능에 묻힌 피장자도 6명이다. 신라에서 5세기 이전에 존재하는 원형봉토분이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혁거세왕릉으로 추정되는 제1호분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나머지는 작은 능이다. 나머지 능의 왕 재위기간이 1세기와 2세기 초로 당시 묘제 양식은 목관묘(木棺墓)로 고려하면 오릉과는 관련이 없다.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가 있는 건물(閣)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진 신라시조왕비탄강유지비(新羅始祖王妃誕降遺址碑)

신라의 묘제 양식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살펴보면 기원전 1세기부터 1세기 때는 목관묘이고 2세기부터 4세기 중엽은 목곽묘이다. 이들 묘의 형태는 평면 장방형이거나 타원형으로 높이는 1.5m 내외로 소형분이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목관이나 목곽은 부식 및 침하되어 지표상에서 발견하기가 어렵다. 간혹 도로개설이나 건물신축과정에서 발견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 때는 적석목곽분이고 6세기 중엽이후 부터는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었다.
오릉의 묘제 대한 고고학적 결론을 보면 능의 축조 시기는 6세기 전반으로 귀족의 묘로 규모가 가장 큰 1호분 적석목곽분을 중심으로 신분적으로 차별성을 가진 혈연집단, 또는 배장묘로 보고 있다.

오릉을 만나기 위해 지나가는 숭의문
오릉 앞 제자 지내는 제각

그럼 문헌 기록을 통해 오릉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의 능을 오릉으로 기록한 것은 신라 불교공인에 따라 구전으로 전승 된 설화로 변재천녀(辨才天女)의 시신을 각각 매장하여 오릉을 조성한 불교설화를 박혁거세의 사변설화(蛇變說話)로 변형하여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오릉의 다섯 능을 박혁거세왕,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을 의도적으로 설정하여 기록하였다. 왕비인 알영부인의 능은 언급 없이 묵시적으로 오릉에 포함시켰다. 이후 17세기 박씨 문중에서 대외적으로 오릉에 알영부인을 포함시켰다.

실제 박혁거세의 능을 포함한 신라 초기 왕들의 능은 어디에 있을까?

박씨 일족의 세력권인 남산 서부 구릉지 또 남산 서북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박혁거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13년을 현재 창림사지에 거주하였고 즉위 21년 때 축조한 궁궐, 도성 역할을 했던 금성 위치는 현재 경주고 일대 또는 월성 서쪽 끝을 추정하고 있다. 이후 5대 파사왕 즉위 22년 때 금성에서 현재 반월성인 월성으로 궁궐을 옮겼다.

신라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즉위 8(기원전 50)에는 왜인들의 침임이 있었으나 왕이 덕이 있음을 알고 물러갔다고 되어있고 즉위 17(기원전 41)에는 왕과 왕비가 전국을 돌며 민정을 살피면서 농업과 양잠을 독려했다 즉위 19년 봄 정월에는 변한이 항복해 왔고 즉위 21(기원전 37)에는 도성을 지었는데 이를 금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 금성은 신라 최초의 도성인 셈이다. 그리고 기원전 37, 이때가 실질적인 개국인 것이다.

신라인들이 기원전 57년을 개국 시점을 잡은 것은 고구려의 개국 시점인 기원전 37년 보다 먼저 세워진 국가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즉 기원전 57년부터 기원전 37년 사이 16년 동안 소국들을 결합하여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었고 이로 인해 국경이 확대되어 북쪽 국경을 맞대온 낙랑(동예)과 잦은 국경분쟁이 생긴 것이다.

즉위 30, 낙랑이 쳐들어왔다가 노적가리가 밖에 쌓여있는 것을 보고 도적질 하지 않는 의로운 나라라 하여 물러갔다고 되었다즉위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보내 마한을 예방하였다.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왔기 때문에 호공(匏公)이라고 불렀다.
즉위 39년, 마한 왕이 별세하였고 곧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즉위 53년, 동옥저의 사신이 와서 좋은 말 20필을 바쳤다.
즉위 61년, 봄 3월, 별세하였고 사릉에 장사지냈다.

신라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재위 서기 4~24)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은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영부인(閼英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드디어 존장(尊長)되는 이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오직 남해왕(南解王)만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 불렀다.

왕비는 운제부인(蕓帝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다.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는데 가뭄 때 여기에 기도를 드리면 감응感應이 있다)이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은 키가 크고 성품이 심화하였으며 지략이 뛰어났다고 되었다. 즉위년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즉위 5년에는 석탈해를 사위로 삼고 즉위 11년에는 왜인이 침략하였고 낙랑이 금성을 공격하였다. 전한(前漢)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甲子; 4)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21년 만인 지황(地皇) 4년 갑신(甲申; 24)에 죽었다. 이 왕이 삼황(三皇)의 첫째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사금(尼師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잇금[齒理]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한다하고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것을 김대문(金大問)은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은 주()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왕(新羅王)으로서 거서간(居西干)과 차차웅(次次雄)이란 이름을 쓴 이가 각기 하나요, 이사금(尼師金)이라고 한 이가 열여섯이며, 마립간(麻立干)이라 한 이가 넷이다. 신라 말기의 명유(名儒) 최치원(崔致遠)<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을 지을 적에는 모두 모왕(某王)이라고만 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혹시 그 말이 야비해서 부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인가.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는 데 방언(方言)을 모두 그대로 두는 것도 또한 마땅한 일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들을 갈문왕(葛文王)이라고 불렀는데, 이 일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南解王) 때에 낙랑국(樂浪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다. 또 천봉(天鳳) 5년 무인(戊寅; 18)에 고구려(高句麗)의 속국인 일곱 나라가 와서 항복했다.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金, 재위 서기 24~57)
남해 차차웅의 태자이며 노례이질금(弩禮尼叱今)으로 삼국유사에서는 기록되었다. ()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혹은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혹은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 가지 설이 있으며,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尼叱今),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쓰는데, 󰡐잇금(齒理,또는 나이의 순서)󰡑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部族聯盟長)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즉위 5(서기 28)에 민신을 살피다가 얼어 죽어가는 노파를 보고 최극빈층을 돌보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다음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였고, 차사(嗟辭)와 사뇌격(詞腦格)이 있었다. 또 보습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즉위 9(32)6(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 (), (), (), (), ()의 성()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이때 6부를 정한 기념으로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하여 815일에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嘉俳)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會蘇曲)이었다. 가배놀이는 우리 고유의 공동노동양식인 두레나 품앗이로 변천하였고 이것이 후일 여성 집단인 원화(源花), 남성 집단인 화랑(花郞)이 되었다.

즉위 14(서기 37)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였고 그 낙랑의 피난민 5천여명이 귀순해왔다고 한다. 이 낙랑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가 나오는 그 낙랑이다.
즉위 18(서기 42)에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 해에 고구려(高句麗) 군사가 침범해 왔다. 유리 이사금은 재위 34년 되던 해에 두 아들을 제치고 재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를 들어 매형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죽어, 사릉(蛇陵)에 묻혔다.

신라 5대 파사이사금(婆裟尼師金 재위 서기 80~112)
삼국사기에서는 파사왕의 출생에 대해 두 가지 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유리이사금의 둘째아들로 태자 일성(逸聖)보다 인품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둘째,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파사이사금의 어머니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혹은 史肖夫人)이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탈해이사금 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으나, 그가 내로(奈老)의 아들일 경우 월성(月城)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파사이사금은 즉위 2(서기 81) 2월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3월에 주군(州郡)을 두루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의 정상을 살펴 두 가지 사형죄[二罪]가 아닌 사람은 모두 풀어 주었다고 되어 있다.

한편, 내우외환에 대비하기 위해 즉위 3(서기 82) 봄 정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지금 창고는 텅 비었고 병기는 무디어져 있다. 만약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있거나 변방에 변고가 있으면 무엇으로써 그것을 막겠는가?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게 하고 병기를 벼리어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한다.

이 시기에 신라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인들에게도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즉위 8(서기 87) 가을 7월에 영()을 내려 말하였다. 나는 덕이 없으면서도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여 있고 남쪽은 가야와 연접해 있다. 나의 덕은 능히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의 두 성을 쌓았다. 이 두 성은 신라가 금성을 벗어나 세운 최초의 국경방위시설이었다. 즉위 22(서기 101)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즉위 33(서기 112)에 죽자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 지냈다고 되어 있다.

오릉 내 조성 된 연못

일부 학계에서는 오릉, 사릉을 쿠데타 즉 반란의 결과로 보고 있다. 반란으로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왕비, 장남 등 직계가족이 처참히 살해되었고 7일이 지나서 시신을 찾을 수 있었으나 시신 훼손이 심하여 식별할 수 가 없었다. 이에 다섯 기의 능을 축조하여 시신을 각각 안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근거로 삼국사기 즉위 60년 가을 9월 기록을 보면,

「두 마리의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우레와 비가 심하고 성의 남문이 벼락을 맞았다」 내용이 있다. 용은 일반적으로 왕을 상징하는 동물인데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났다는 것은 왕이 둘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한 사람은 혁거세왕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반락을 일으킨 세력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신라 2대 남해차차웅 즉위 원년 가을 7월 기록에 「왕이 측근에게 “ 두 분의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는 잘못된 일이다. 조심스럽고 위태롭기가 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범해오니, 이는 나에게 덕이 없는 탓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측근들이 “적은 우리나라에 국상이 난 것을 요행으로 여기고 함부로 침범해왔으니, 하늘은 절대 그들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

이 내용을 살펴보면 두 성인은 혁거세왕과 왕비이고 같은 날 살해를 당한 것이고 남해차차웅이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것은 왕의 장남 또는 적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왕과 함께 살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오릉에서 바라본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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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문무대왕면 나아리(羅兒里) 월성원자력본부 후문 공원 남서쪽 소나무숲에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1845(헌종 11) 조정에서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자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장사랑(將仕郞) () 장릉참봉(莊陵參奉) 여강(驪江) 이종상(李鍾祥)이 비문을 지었고,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정언문신겸선전관(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傳官) 여강(驪江) 이재립(李在立) 글씨를 썼다. 비는 화강암으로 비신 높이는 113, 너비 46, 두께 24로 비문은 해서체다.

내용은 마멸이 진행 중이서 탁본으로 알 수 가 있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845년(헌종 11) 조정에서 하사한 하마비

 비각 안에는 1847년 경주부윤 이시우(李時愚)가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記)와 이능항(李能恒)이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중수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重修記)가 있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왕은 본래 파나국(婆那國)의 왕자로 회임된 지 7년만에 큰 알로 태어났다.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버리라고 명하자 왕비가 금궤에 담아 바다에 띄웠는데,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 정박하게 되었다.

한 노파가 알 속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데려다 길렀다. 이 사람이 바로 탈해왕이다. 정박하고 있을 때, 까치가 알렸으므로 작()에서 조()를 떼어내고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는 장사랑(將仕郞) 전(前) 장릉참봉(莊陵參奉) 여강(驪江) 이종상(李鍾祥)이 비문을 지었고,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정언문신겸선전관(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傳官) 여강(驪江) 이재립(李在立) 글씨를 썼다.

왕의 이름은 탈해(脫解)인데, 옛날에는 시호가 없었기 때문에 탈해왕이라고 칭하였다. 당초 진한(辰韓)6(六部)에 군장이 없었는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처음으로 나라를 건국하여 서라(徐羅)라고 칭하였다.

차차웅(次次雄) 때 탈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딸과 결혼을 시켰는데,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인 유리(儒理)를 두고 탈해에게 선위하였다. 탈해는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유리(儒理)를 왕으로 세우고 보필하여 백성들이 부강을 누리게 되었다.

1847년 경주부윤 이시우(李時愚)가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記)
이능항(李能恒)이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중수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重修記)

유리가 사망하자 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명이라는 이유로 탈해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호공(瓠公)을 재상으로 삼고 또 시림(始林 : 계림의 옛 이름)에서 알지(閼智)를 얻었다. 알지는 계림씨(雞林氏 : 金氏)의 조상이다. 탈해는 세상을 떠나면서 유리의 아들 파사(婆娑)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4대 뒤에 탈해의 손자 대휴(伐休)가 또 왕위를 이었으니 계림씨와 번갈아가며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석씨는 모두 8명의 왕이 나왔고, 3성이 향유한 서라는 1000년 동안 다스려졌다. 이는 옛 역사에서 말하는 3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곳 나아리(羅兒里)는 삼국유사 석탈해 탄생설화에 나오는 아진포(阿珍浦)와 관련 있다. 신라 육부촌 때 금산가리촌은 이곳 문무대왕면 일대를 포함하고 있는데 서촌(瑞村)이라고 불렀고 이곳 중 아진포(阿珍浦)를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다. 나아(羅兒)도 이와 관련해서 불러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현재 아진포(阿珍浦)는 월성원자력 건설 때 발전소 부지에 포함되어 볼 수가 없다.

월성원자력 건설 전 아진포 모습

석탈해가 탄 배가 도착한 홈바우는 홈이 패어있는 홈돌이라고도 하는 바위로 장아(長阿) 앞 바닷가에 있었는데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부지에 포함되어 사라졌다.

나아 바닷가

이 밖에 석탈해 탄생설화와 관련 된 마을 지명이 수아(收兒)장아(長阿)가 있다. 수아(收兒) 석탈해를 거두어들인 곳이라 하여 "수아" 혹은 "수애"라고 불렀다. 장아(長阿) 석탈해가 장성하기까지 자라던 언덕이라 하여 "장아"라 하는데 여기 또한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부지에 포함되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전 나아마을 전경

석탈해(昔脫解)는 누구인가?

석탈해의 출생지를 살펴보면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두 사서를 보면 공통적으로 기록된 것이 위치가 왜국 동북쪽 일천여리로 울릉도 동남쪽에 위치한 오키제도의 한 섬으로 추정된다. 일본 시마네현에서 북쪽으로 50~80km, 북위 36도 부근으로 180여 개의 크고 작은 유, 무인도 섬으로 이루어져있다.

석탈해는 박혁거세왕 39년에 왕자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신라로 망명하였고 같은 왜인 출신의 호공(瓠公)의 도움을 받아 신라 귀족사회에 편입되었다. 왜인으로 신라에 귀순했던 호공은 명석한 어린 탈해를 보고 스스로 월성에 있는 자기 집을 주었을 것이다.

남해왕 5(서기 8)에 석탈해는 남해왕 장녀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고 남해왕 7년에 재상 격인 대보에 임명 되어 47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었다. 석탈해는 수로왕이 변한을 병합하여 가야 건국을 하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수로왕과 전쟁을 하였으나 서기 42년에 가야는 건국되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62세 때 유리왕 20년에 유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삼국유사 기이 4대 탈해왕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한 것인지 길()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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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릉에서 언양 쪽으로 가는 사거리에서 포석로를 따라 300m정도 가면 탑정주요소가 보이는데 여기서 옆길로 올라가면 나정이 나온다. 나정은 남산 서북쪽 송림이 울창한 구릉지대에서 위치하고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전설을 가지고 있는 우물이다나정(蘿井)의 뜻은 담쟁이 덩굴이 우거진 우물이라는 것이다.

남산 서북쪽 송림이 울창한 구릉지대에서 위치하고 있는 나정(蘿井)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나정에서 태어나서 13년 후 기원전 57년부터 신라 992녀의 장구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나정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발굴 전에는 비각(碑閣)이 있었고 뒤편에 중앙 위치에 판석이 놓여져 있고 주위에는 4개의 돌이 규칙적으로 사방에 둘러져 있었다. 이 판석이 우물을 덮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비각 안에는 1803년(순조 3년) 2월 직제학 남공철(南公轍1760 ~ 1840)이 찬(撰)한 것을 경주부윤 최헌중(崔獻重) 쓰고 숭덕전 참봉 박광검(朴光儉), 도감 박사로(朴師魯) 등 박씨 문중이 세운 시조탄강유허비(始祖誕降遺墟碑)가 있었다.

비문 내용은 직제학 남공철이 43세 때 영남을 유람할 때 이곳 박씨 일족들이 찾아와서 우물을 옛 사람들이 메워버려 쉽게 그 전하는 바를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혁거세의 탄생을 기념하는 비문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문이 지었고 그 후 세월이 흘러 비문글자가 훼손되어 1929년에 참봉 박희동이 본인 부담으로 비석을 새로이 세웠다.
박씨 일족들의 시조 비문요청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유교의 장자상속제와 17세기 말 성행한 보학(譜學)과 관련이 있다.

1929년에 참봉 박희동이 본인 부담으로 비석을 새로이 세운 시조탄강유허비(始祖誕降遺墟碑)

나정에 대한 4차례의 발굴조사(2002년 ~ 2005년) 결과로 팔각 건물지, 청동기시대 주거지, 기타 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1,39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시기별로 1차 시설에서 4차 시설로 구분되는데 1, 3차 시설 유구는 잘 남아있으나 2, 4차 시설은 파괴되었다. 이중 팔각건물지가 돋보이는데 국가제사시설로 보고 있다.

1차 시설에는 수혈유구(竪穴遺構), 주혈군(柱穴群), 구상유구(溝狀遺構), 목책 시설(木柵施設) 등 있고 조성 시기는 초기 철기시대이다. 수혈(竪穴)은 평면 타원형으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이고 주혈군(柱穴群)은 가운데 수혈유구(竪穴遺構) 중심으로 원형으로 배치된 것으로 기둥을 이용한 상부시설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차례의 발굴조사(2002년~ 2005년) 결과로 발굴된 석재들

구상유구(溝狀遺構)는 수혈유구(竪穴遺構)를 중심으로 사방 외곽으로 변경 약 5m 떨어진 지점에 원형으로 둘러져 있다. 목책시설(木柵施設)은 수혈유구의 외곽을 감싸는 원형으로 설치되었고 직경은 약 28m 내외이다. 목책과 구상유구와 같은 2중의 경계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제의적 성격의 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3차 시설에는 가운데 팔각건물지와 남쪽의 회랑, 담장 등 있다. 팔각건물지의 축조 시기는 의봉 4년 개토(儀鳳四年皆土)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기와가 출토 되어 문무왕 19년(67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679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궁궐을 중수하고 동궁을 창건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나정의 3차 시설 역시 이 시기에 2차 시설을 폐기하고 확대, 조성하였다.

팔각건물지의 기단 한 변은 약 8m, 내부 면적은 약 300㎡이다. 팔각건물지 남쪽 중앙부에는 계단시설과 이와 연접하는 보도시설이 있다. 담장은 남쪽 회랑을 제외한 삼면에 만들어 졌다. 회랑은 후대에 축조된 축대와 도로로 인하여 일부 파괴되었으나 남-북 2칸, 동-서 16칸이며 가운데에 출입구가 있다.

발굴조사 결과, 나정의 자연지형은 원래 중앙부가 높은 완만한 등선이었다. 그런데 팔각건물지를 축조하기 위하여 2차 시설을 폐기하고 땅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럼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태어난 진짜 나정의 위치는 어디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알천(閼川)과 동천(東泉), 양산(楊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6부 촌장들이 알천(閼川) 언덕 위에서 남쪽 방향으로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을 보았는데, 알천은 토함산 북쪽 황룡골에서 발원하여 보문단지를 거쳐서 내려와서 동, 서로 흐르는 북천(北川)의 신라시대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박혁거세가 목욕한 동천(東泉)은 먼저 동천사의 위치가 중요한데 동천사(東泉寺)는 현재 동천동의 서북일대로 보고 있다. 그래서 동천은 알천 즉 북천의 지류로 낭산 방향으로 남북으로 흐르는 소하천으로 추정된다. 또한 양산(楊山) 알천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현재 낭산이 언제부터인가 양산이 개칭되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박혁거세는 낭산에 있는 어는 우물에서 태어났고 동천에서 목욕을 한 것이다.

국가제사시설인 팔각건물지로 사뭇 웅장한 느낌을 준다.

박혁거세(朴赫居世)는 누구인가?

신라 1,000년 왕조동안 박, 석, 김 세 성씨 왕족에 의해 흥망성쇠를 하였다. 총 56명 신라 왕 중에서 박씨 10명, 석씨 8명, 김씨 38명이다. 초기부터 8대 아달라왕 까지 석탈해왕을 제외하고는 240년 동안 박씨 시대이고 9대 벌휴왕부터 16대 흘해왕 까지는 172년 동안 석씨 시대였다. 그리고 17대 내물왕부터 52대 효공왕 까지 556년 동안 김씨 시대였다. 마지막 53대 신덕왕부터 55대 경애왕까지 15년 동안 다시 박씨 시대였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에 의해 세운 왕으로 김씨였다.

신라의 지배계층 또는 구성원 형성은 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한(韓) 편에 “옛적에 진(秦)나라의 노역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하여 온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연나라 사람들이며 신라 대학자 최치원은도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 온 자들”이라고 단정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에도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서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조선의 유민들은 고조선 사람들로 BC 194년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함께 온 망명객들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들은 2가지 부류로서 하나는 연나라 다른 하가야로 발전시켰다.

박혁거세는 6부촌 중 양산촌 출신으로 고허촌의 지지를 받아 6부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즉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급량부[及梁部]) 촌장 알평(謁平)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사량부[沙梁部])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 연맹, 연합하여 박혁거세를 왕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를 통해 고허촌은 고허촌 출신의 알영을 박혁거세의 왕비로 삼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마한(馬韓, 별칭으로 西韓)은 강력하게 분노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왕 38년(서기 전 20년) 신라에서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하자,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으며 이런 말을 했다. “ 진, 변의 두 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는 공물을 보내오지 않았다.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어찌 이와 같은가?” 이에 호공이 지혜롭게 대응하여 마한 왕을 설득, 무마시켰다.

박혁거세 출생 관련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기이제일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한 사람들은 호(匏)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元年) 임자(壬子; 69, 고본古本에는 건호建虎 원년元年이라 했고,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잘못이다) 3월 초하루에 상부(上部)의 조상들은 저마다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두 방자하여 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치고 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조사해 보았더니 거기에는 자줏빛 알 한 개가 있다.

그러나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고 이름하고(이 혁거세赫居世는 필경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을 때의 일이다. 그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한 말에, 어진 이를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까닭이다한다.
또 계룡雞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어찌 서술성모西述聖母의 현신現身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위호(位號)를 거슬감(居瑟邯)이라고 했다(혹은 거居西干이라고도 하니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스스로 말하기를, “알영거서간閼英居西干이 한번 일어났다한 그 말로 인해서 일컬은 것이다. 이 뒤부터 모든 왕자王者의 존칭이 거서간居西干으로 되었다).

나정에서 보면 멀리 보이는 창림사지 삼층석탑

육부전(六部殿)과 육부촌(六部村)
육부전(六部殿)은 나정에서 동쪽으로 200m 가면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육부전은 육촌장(六村長)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1970년에 경주개발사업 때 건립되었고 양산재(楊山齋)로 부르다가 2019년에 강당을 새로 증축하고 육부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육부촌의 촌장의 실체는 고조선유민 또는 진인 등으로 추정되고 북방으로부터 각각 시간적 간격을 유지하며 경주지역에 도착 및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돌산고허촌장과 무산대수촌장의 집단은 내륙으로 이동하여 왔으며, 나머지 네 집단은 동해의 해안을 따라 남하하거나, 해로를 이용하여 이동하여 왔다. 특히 명활산에 강림한 금산가리촌장 집단은 해로를 이용하여 현재 동해구가 있는 양북면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육부촌장의 집단은 경주 중심지와 북쪽, 현곡면, 안강읍 남쪽 평야지대를 제외한 지역에 정착한 것이다.

육부촌 관련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기이제일 신라시조 혁거세왕조 내용을 살펴보자.
삼국유사 기이(紀異) 1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이니 그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이다. 촌장(村長)은 알평(謁平)이니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에 부를 두어 급량부及梁部라고 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940)에 중흥부中興部라고 이름을 고쳤다. 파잠波潛동산東山피상彼上의 동촌東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니, 촌장(村長)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은 도라고 읽고 혹 탁涿으로도 쓴다. 그러나 역시 도라고 읽는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마등오(麻等烏)도북(道北)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이다. 촌장(村長)은 구(; 라고도 씀) 예마(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 개비산皆比山이라고도 함)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혹은 涿)),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한다. 여기에는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소속된다.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빈지賓之빙지冰之라고도 한다)이다. 촌장(村長)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에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 최씨(本彼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杷)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소속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黃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지금의 금강산金剛山 백율사栢栗寺 북쪽 산)이다. 촌장(村長)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잉구미촌(仍仇弥村)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소속되었다.

위의 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여섯 부()의 조상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弩禮王; 윤리왕倫理王) 9(32)에야 비로소 여섯 부()의 명칭을 고치고, 또 그들에게 여섯 성()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는 중흥부(中興部)를 어머니로 삼고, 장복부(長福部)를 아버지, 임천부(臨川部)를 아들, 가덕군(加德郡)을 딸로 삼고 있다. 하지만 그 실상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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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이 떠도는 곳에 있다 하여 부르는 백운암은 통도사 內 20개 암자 중에서 유일하게 암자까지 차가 들어가지 않는 아담하고 소박한 암자이다. 영축산 팔부능선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수도처로 유명하고 특히 만공스님이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백원암 산신각 앞에서 본 풍광

또한 백원암 금샘에서 나는 금수(金水)는 암벽아래 돌 사이에 솟아나는 석간수인데 물맛이 뛰어나고 일품이다. 금수는 일주문 지나서 1곳, 용왕각 좌측에 1곳 그리고 산신각 입구 1곳 등 3곳에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통도팔경 중 제6경 백운명고(白雲鳴鼓)라 하여 저녁 무렵 흰 구름이 영축산을 휘감는 백운암의 북소리가 매우 아름답고 청명하다고 한다. 사찰의 북은 법고(法鼓)라고 부르는데 인간의 윤회에 의하여 현생한 축생을 위하여 치는 북이다.

극락암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비로암과 백운암의 갈림길

통도팔경은 영축산의 동쪽 산록을 따라 발달한 통도천 계곡의 자연 경관과 불교 문화 요소의 특성을 잘 표현한 것으로 제1경은 무풍한송(舞風寒松), 제2경은 안양동대(安養東臺), 제3경은 비로폭포(毘盧瀑布), 제4경은 자장동천(慈藏洞天), 제5경은 극락영지(極樂影池), 제6경은 백운명고(白雲鳴鼓), 제7경은 단성낙조(丹城落照), 제8경은 취운모종(翠雲暮鐘) 등으로 되어 있다.

백운암 아래 800m 지점의 주차장으로 매우 협소하니 가능하면 극락암 주차장을 이용하면 좋다.
백운암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나르는데 사용하는 모노레일
백운암의 가파른 길에 사용하는 지팡이
오르막길을 따라 나무계단과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 일주문을 맞이할 수 있다.

백운암은 892년(진성여왕 6)에 조일대사(祖日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나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1810년(순조 10)에 침허대사(沈虛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조성되어 백운암에 봉안된 「백운암 지장탱화」가 당시의 중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백운암 지장탱화」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7호로 1804년(순조 4)에 조성된 불화이다. 화면의 맨 위쪽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 펼쳐져 있고 중앙에 지장보살이 석장(錫杖)과 투명 구슬을 쥐고 가부좌한 채 앉아 있다. 비단에 채색을 하였고 크기는 세로 158㎝, 가로 175㎝로, 조선 후기 불교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살며시 보이는 백운암

1970년대에 극락암에 주석한 경봉스님이 후원하여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 기능을 하는 백운암, 용왕각, 산식각, 요사채 등이 있다.
백운암은 통도사에서 약 6㎞ 정도로 떨어져 있는데, 승용차를 가지고 오면 극락암 주차장에 주차하거나, 백운암 아래 800m 지점의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백운암 아래 주차장은 협소하여 가능하면 극락암 주차장을 이용하면 좋다. 극락암 주차장에서 걸어서 출발하면 50분정도 이면 백운암에 도착한다. 비로암 방향의 갈림길을 지나서 오르막길을 따라 나무계단과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암 일주문을 맞이할 수 있다.

백운암 일주문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은 19세기 조선의 사라져가는 선풍을 일으킨 선승 경허스님(1849~1912)의 세 제자 중 막내이다. 이른바 삼월(三月)이라 하여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月) 세 명의 스님으로 맏이인 수월스님을 상현달(上弦), 혜월스님을 하현달(下弦), 만공스님을 보름달인 만월(滿月)이라고 부른다.

백원암 금샘에서 나는 금수(金水)는 암벽아래 돌 사이에 솟아나는 석간수가 인데 물맛이 뛰어나고 일품이다. 금수는 일주문 지나서 1곳, 용왕각 좌측에 1곳 그리고 산신각 입구 1곳 등 3곳에 조성되어 있다. 이중 일주문 지나면 맞이하는 금수
일주문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포대화상
백운암
용왕각과 백운암
용왕각
용왕각 좌측에 있는 금수


만공스님이 백운암에서 보름동안 선 수행을 하였는데 어느 날 새벽, 통도사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는 순간 홀연히 깨우치게 되었다. 이후 스승 경허 스님이 머무르고 있는 범어사를 향해 보은의 큰 절 세 번을 하고 천장사로 돌아갔다. 당시 백운암 생활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홀로 거닐며 자재하였다. 」

나한전

만공스님은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법호는 만공(滿空)이다. 속성은 宋氏로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어렸을 때 속명은 도암(道岩)이었다. 1871년(고종 8년, 신미년) 3월 7일 전북 태인군 태인읍 상일리(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휘(諱)는 신통(神通)이라 하였고 어머니는 金氏였다.
만공 스님이 13세 되던 1883년(신미년) 겨울, 도인 하나가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이 아이는 단명할 상으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에 놀란 어머니 金氏가 단명을 면할 방도를 묻자, 도인은 김제 금산사에 가서 올해를 넘기면 운명이 바뀌어 장수를 한다고 하였다.

산신각 입구에 있는 금수

만공스님의 부모님은 아들이 집안의 장자이기에 바로 금산사로 아이를 데려가서 그 해를 보냈다. 그리고 금산사에서 1년을 보내자 부모님 생각과는 달리 만공스님은 출가를 결심 하였다. 만공스님의 단명할 상이 출가를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1886년에 충청남도 공주 동학사에서 출가하여 행자 생활을 하다가, 같은 해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모시고, 경허(鏡虛, 1849~1912)를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았다. 이때 월면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이후 10년간 천장암(天藏庵)에서 공양주를 보았다. 1893년 11월 천장암을 떠나 충청남도 아산 봉곡사에서 수행 중 1895년 7월 (24세)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산신각

1898년 스승 경허를 따라 동래 범어사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홀로 통도사 백운암에 들렀다. 이때 장마를 만나 보름을 지냈는데 두 번째 깨달음을 얻었다. 1901년 7월 경허가 있는 서산 천장암으로 돌아왔다.
덕숭산 수덕사(修德寺)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거쳐 금강산 유점사(揄占寺)에서 3년을 지냈다. 1904년(광무 7년, 33세)에 경허로부터 만공이라는 법호(法號)와 함께 전법게(傳法偈, 득도한 큰스님이 수행 과정을 점검하여 깨달음을 인정하는 것)를 받은 후 덕숭산 수덕사 부근의 금선대에서 설법을 열었고 선풍을 진작시키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1914년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의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고 예산 덕숭산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 등의 중창에 관여하고 승려들을 길러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다.
1920년초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1927년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을 지었는데,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하여 임제종풍(臨濟宗風)의 계승자임을 선언하였다.
1934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이 설립될 때 이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바로 이사장 선출에서 이사장은 송만공(宋滿空), 부이사장은 방한암(方漢岩)이 선임되었다.
1935년부터 3년간 마곡사 주지를 지내면서 대처(帶妻), 음주, 식육을 하는 일본 불교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 31본산(本山) 주지회의가 열렸는데 총독부가 조선불교의 일본 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1940년 5월의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수행과 참선에만 정진하였다. 1941년 3월 10일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갈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 조선 말살 정책을 펼친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의 회유도 거절하는 등 식민지배의 만행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800m 아래 주차장에서 올라온 생활용품을 내리는 곳

주로 예산 덕숭산에 ‘전월사(轉月舍)’란 띠집을 짓고 머물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이 사람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고생했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라는 유언을 남긴 뒤 세수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사후에 <만공어록 滿空語錄>이라는 책이 편찬되었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은 덕숭산 금선대 근처에 부도 만공탑을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었다.
"부처님 사리로 모든 것은 넉넉하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 되어 있으니,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으며, 이후 덕숭산의 다비식에서는 어떤 스님이든지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문도들이 지켜야 할 전통이자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제자로는 춘성, 일엽(여류시인인 김일엽의 법명), 고봉, 혜암, 혜천, 원담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만해는 내 애인이야."라고 말했는가 하면, "지금 온 조선 땅에 사람이 하나 하고도 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만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공스님은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념과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스스로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여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나를 찾을 것을 강조하였다. ‘나’라는 개체의 나가 아니라 일체만법을 포함하는 만유의 나로, 이는 곧 일심과 통한다고 설법하였다.

참선을 위해서는 행자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보조적 요건도 필수적으로 구비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또한 환경과 배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견해를 처음으로 설파하였다. 참선의 보조 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과 수도(修道)에 적절한 도량,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좋은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속세에서도 역시 배경과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였다.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지만 그에 걸맞은 배경과 환경적 요인도 사람을 만든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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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음산(해발:588m)은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기장군의 명산이자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다. 달음산에는 예로부터 산삼이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달음산 골짜기의 얼음이 녹을 무렵이면 천년 묵은 산삼이 사람으로 화(化)해서 상주(喪主)의 복장을 하고 이 산에서 내려와 좌천장터로 나들이 한다고 한다.

달음산 수리봉에서 본 풍광

달음산은 만장년 산지로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두 개의 봉우리인 취봉과 옥녀봉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한다.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인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옥정사 입구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고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주봉(主峰)의 이름은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이라고 하고, 그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 아기봉이라고 한다.
달음산 설명에는 주봉(主峰)인 취봉(鷲峰) 또는 수리봉을 달음산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옥녀봉(玉女峰) 또는 구슬 아기봉을 월음산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옥정사 일주문

취봉 일대에서 발원한 하천을 취정천(鷲井川), 옥녀봉에서 발원한 계곡을 옥정천(玉井川)이라고도 한다.
달음산 산행코스는 5가지가 있는데 옥정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빨리 수리봉 정상에 도착한다. 동해선 전철을 이용하는 경우는 좌천역에서 내려서 광산마을에 까지는 30분정도 걸린다. 차를 가지고 오는 경우는 옥정사 주차장에서 주차하고 출발하면 된다.

달음산 정상인 수리봉 가는 길에 있는 편백나무 숲

옥정사에서 달음산 정상 수리봉까지는 1시간 30부정도 소요된다. 수리봉에서 옥녀봉 방향으로 하산하여 광산마을 초입에 도착하는데 40분 정도 소요된다.

정관

달음산 수리봉(취봉 鷲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일광면 원리 상리마을에서 달음산 기슭을 올라가면 해먹이라는 낙타 등처럼 생긴 능선이 있고, 그 능선 중턱에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장사바우라는 큰 바위가 있다. 장사바위에서 올라가는 곳에 찬물샘이 있고, 그 옆에 집터가 있다. 이곳을 이고(李古) 집터라 하고 있다.

정관

신라 석탈해왕 때 이곳에 이고(李古)라는 늙은 부부가 집을 짓고 살면서 장사바우 앞에서 이들을 점지하여 달라고 기원하였다. 달음산의 신령님이 감응하여 쉰 살이 넘은 외로운 늙은 부부에게 옥동자가 탄생하였다. 늙은 부부는 금지옥엽처럼 키우면서 바우라고 불렀다.

달음산 수리봉의 정상 표지석
수리봉에서 본 정관

바우는 일곱 살이 되자 큰 바위를 번쩍 들고 내던지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빙빙 돌리기도 하였다. 바우장사의 소문이 퍼지게 되자 신라에서는 자객을 시켜 암살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이곳은 신라를 괴롭히던 거칠산국이라는 작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위협을 느낀 바우는 부모 앞에 엎드려 신라국의 첩자가 소자를 죽이려 하니 소자는 성년이 될 때까지 피신을 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직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 장사바위에 올라서 왼쪽무릎을 꿇고 오른손가락을 짚고 힘껏 뛰어오르자 양 겨드랑이 밑에 비늘나래가 3자나 펴지면서 독수리처럼 날아 달음산 수리봉(鷲峰)에 앉았다.

수리봉에서 본 일광
수리봉에서 아득히 보이는 LCT

수리봉의 날카로운 바위를 평탄하게 다지고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천마를 타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장사바위에는 이 바우소년 장사가 왼쪽무릎을 꿇었던 자리와 오른손을 짚었던 흔적이 바위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고, 집터와 샘터가 남아 있다.

수리봉에서 옥녀봉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
수리봉(취봉 鷲峰)
산불감시 초소
달음산 2개의 봉우리 중 하나인 옥녀봉

그때부터 이 바위를 장사바우라고 하고 애기장사를 바우장사라고 불렀고 집터를 이고 집터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달음산의 수리봉(취봉 鷲峰)은 그 위가 묘하게도 넓이가 20평정도 평탄하고 잔디가 덮여져 있는데, 이 바우소년 장사가 독수리처럼 날라 올라가서 머문 곳이라 하여 수리봉이라 하고, 한문으로 취봉산(鷲峰山)이라 표기하고 이를 속언으로는 추봉산이라 한다.

옥녀봉 기슭의 편백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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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산을 가지고 있는 광역시가 부산광역시이며 이것은 부산의 큰 복이다. 이들 중 장산은 해발 634m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며 부산시민이 사시사철 찾는 곳이다. 더불어 대천공원이 조성되어 산행은 물론이며 운동, 각종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해발에 비해 수량이 풍부하여 춘천의 흐르는 물은 가뭄에도 마르는 날이 없어 여름철이면 아이들의 물놀이 터가 된다. 이에 옛 부터 장산 앞 지역은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었고 청사포 앞바다의 풍부한 해산물과 함께 풍요로운 땅이었다.

장산 450m 자락에는 20가구 100여명 주민이 녹차재배 등 농업과 등산객 상대로 하는 식당을 주업으로 살고 있는 장산마을이 있다이 마을은 19636.25전쟁 상이용사 10여명이 원호청으로부터 정착 대부금을 받아 설립한 장산개척단에서 시작된 마을이다.

당시 산정을 개간하여 무, 배추 등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며 살았으나 생활여건이 열악하여 개척단원들은 마을을 떠났다. 그 후 퇴역 장병 40여 세대 120여명이 부산시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무 재배를 하며 정착하였다.

그리고 미국 복지재단에서 기증한 홀스타인 젖소 덕분으로 낙농업을 통해 장산목장으로 마을이 번창하였으나 1985~ 1987년 우유파동과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에 따른 젖소 사육 금지, 자녀교육 등으로 일부가 마을을 떠나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장산을 좀 더 들여다보면 부산국가지질공원,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청산리 대첩의 숨은 영웅 애국지사 강근호의 숨결이 모정원에 남아있다. 또한 민속 및 토속신앙이 전해지고 있는 천제단, 마고당 등 있어 장산을 찾는 이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1418)과 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부산의 전신인 동래의 옛날은 장산국(萇山國)이었으며 신라가 이를 취해 거칠산군(巨漆山郡)을 두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장산을 동래부지도에는 상산(上山)이라는 이름으로 장산이라고도 하고 봉래산이라고도 하였다.

규장각 소장의 동래부지도에는 장산의 위치에다 장산국기라 적혀있고 해동지도에는 상산에다 장산국기라 적혀 있다. 동래부읍지 역시 장산이라고 표기하고 기장의 운봉산에서 뻗어 내렸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래현의하면 옛날에는 장산국(萇山國) 혹은 내산국(萊山國)이라고도 하였다. 신라가 점유하고 나서 거칠산군(巨漆山郡)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이 울주(蔚州)속시켰고 현의 동쪽 15리에 상산(上山)이 있으며, 대마도를 바라보기에 가장 가깝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산을 중심해서 장산국, 또는 내산국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돼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날씨가 맑으면 저 멀리 대마도가 보이는데 실제 거리는 50km이다.

삼한시대의 부산에는 변한(변한)12국 중 하나인 독로국(凟盧國)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삼국지 위서 한전에는 독로국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왜와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독로국이 현재로서는 동래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동래지역의 거칠산국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독로국과 거칠산국이 같은 것인지의 여부는 현재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근 장산 정상 개인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우물터를 발견했는데 지역 향토사학계에서는 옛날 장산국 우물터가 아닌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장산국의 오능은 사라지고

장산국은 신라와 가야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였는데, 이 장산국에 5개의 왕릉 이 존재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신라와 가야의 침략을 피하기 위하여 궁궐과 왕릉은 장산 안에 있었으며, 6·25전쟁 당시 미군이 탄약 창고를 설치하기 전 좌동 일대 어느 작은 절(약수암) 옆에 5개의 큰 무덤이 바로 그것이라 전해진다.

기원 후 5~6세기경에 신라(석탈해왕) 세력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장산국이 멸망하자, 장산국 사람들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고 산의 오능은 초라한 무덤으로 변해 점차 잊히게 되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좌동 토박이 노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어릴 적 그 무덤을 보았는데 탄약 창고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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