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 경주시 배동 산30번지)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다. 능은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고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남쪽아래에는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이 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위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록에는 없다. 

신라 6대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서남산 포석정 남쪽 200m 지점에 있고 계단식 지형을 이용하여 조성하였으며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12.7m, 높이 3.3m이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성은 박씨(朴氏)이며 지미(祇味) 또는 지마(祇磨)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고, 어머니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비는 갈문왕 마제(摩帝)의 딸 애례부인 김씨(愛禮夫人 金氏)이다.

서기 112년에 즉위하였고 치적은 가야와 왜와 말갈의 침입을 격퇴한 것이다. 기록을 보면 즉위 4(115)5(116)에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공격하였다. 즉위 14(125) 말갈군이 대령책(大嶺柵:대관령)으로 쳐들어 왔으나 물리쳤다. 재위 23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다.

지마왕릉(祇磨王陵)의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지마왕릉(祇磨王陵)은 조선 영조 6(1730)에 박씨 일족이 주장하였고 능 앞의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1871)에 세웠다박씨 일족이 주장하여 제()를 지내는 신라 박씨 왕릉은 ,지마왕릉, 일성왕릉, 아달라왕릉, 신덕왕릉, 경명왕릉, 경애왕릉 등 모두 6기이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다. 묘제 양식은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때의 횡혈식석실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1955년 박응수씨가 설치하였고 표석은 박씨 문중에서 고종 8년(1871년)에 세웠다.

능 앞에 있는 상석(床石)의 변천 및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상석(床石)은 제수(祭需)를 진설하는 곳이자 능의 정면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데 신라 왕릉에서 상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무열왕릉이고 흥덕왕릉 이후에는 설치되지 않았다.

상석의 형태는 여러 개의 장대석을 조립한 초기의 상석(무열왕릉, 신문왕릉)과 두꺼운 큰 판석 6매를 이용한 탁자형 상석(성덕왕릉, 원성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으로 구분된다. 특히 탁자형 상석에는 전면 또는 후면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서는 정자각(丁字閣)이 등장하여 이곳에서 제수(祭需)를 진설하였고, 능의 앞의 상석은 혼유석(魂遊石)이라 하여 영혼이 거처하는 공간으로 의미와 명칭이 바뀌어졌다. 따라서 신라 왕릉에 설치된 혼유석 형태의 상석은 조선후기 또는 일제 강점기 때 김씨 일족과 박씨 일족, 석씨 일족이 설치한 것이다.

신라 6대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 재위 112~134, 2110개월)

어느 날 5대 파사왕이 태자 지마를 데리고 유찬의 연못으로 사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지부에 들렀다. 이때 이찬 허루가 왕 일행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모두들 취했을 무렵 허루의 아내가 한 처자를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다. 그러자 마제의 아내도 자신의 딸을 불렀는데 태자의 마음에 들었다.

이것을 본 허루가 질투를 하자 파사왕이 허루에게 이 곳 땅 이름이 대포(큰 부엌)인데, 공이 이곳에서 훌륭한 음식과 좋은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어 즐겁게 하니, 직위를 주다(酒多:술이 많음)라고 하여 이찬 위에 두어야 마땅하겠다.”라고 벼슬을 내려 무마하고, 마제의 딸을 태자의 배필로 삼았다. 주다는 뒤에 각간이라고 불렀다.

지마이사금(祇磨尼師今)의 주요 일대기를 보면, 즉위 22, 왕이 직접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창영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옥권을 파진찬으로, 신권을 일길찬으로, 순선을 급찬으로 임명하였다.

3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예방해왔고 여름 4월에 홍수가 났다. 죄수들를 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42, 가야가 남쪽 변경을 약탈하였고 7, 왕이 가야를 직접 공격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黃山河: 낙동강 하류)를 지나는데 가야인들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왕은 이를 모르고 곧바로 전진하였는데, 복병이 나와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왕은 군사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였다.

58, 장수를 보내 가야를 공격하게 하고, 왕은 정병 1만을 거느려 뒤를 이었다. 가야는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그 때 마침 비가 오래 내렸으므로 왕은 되돌아 왔다.

10년 정월, 익종을 이찬으로 임명하고, 흔련을 파진찬으로 임명하고, 임권을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2, 대증산성을 쌓았고 4, 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11년 서울 사람들이 왜병이 크게 몰려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앞 다투어 산골짜기로 피난하였다. 왕은 이찬 익종 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123, 왜국과 강화하였다.

14년 정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크게 공격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가을 7월에 그들은 다시 대령 책을 습격하고 이하를 넘어왔다. 왕은 백제에 글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고,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8, 이찬 창영이 사망하자, 파진찬 옥권을 이찬으로 임명하여 정사에 참여시켰다. 212, 궁궐 남문이 불탔다. 238, 왕이 별세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배동 석조여래삼존불상에서 지마왕릉 방향으로 오솔길을 따라 출발하여 만나는 태진지라는 작은 연못을 만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