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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 고분지 미완성 왕릉석재군은 황복사지 삼층석탑(皇福寺址 三層石塔)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황복사 초기 목탑지 혹은 신문왕릉, 성덕왕비릉(소덕왕후 김씨)) 또는 효성왕비릉(해명왕후 김씨), 민애왕릉 등으로 추정하였다.

황복사(皇福寺)삼국유사에 의하면 654(진덕여왕 8)에 의상(義湘)대사(625~702)29세에 출가한 곳으로, 1942년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사리함(舍利函)에서 확인된 명문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을 통해 신라 왕실 사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낭산 고분지 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 된 유물은 막새, 기와, 전돌, 등잔 등 약 400여 점이다. 면석과 지대석 및 갑석과 같은 왕릉 석재 대부분은 경작으로 인해 원래 위치는 아니다.

이 왕릉 석재군은 당시 왕을 위하여 사전에 능침을 조영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다가 어떠한 사유로 중지하고 왕릉을 설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하대석이나 상대갑석으로 가공되어질 미완성 장대석 석재가 다수 확인되어 이를 뒤받쳐 주고 있다.

조사된 왕릉 석재의 곡률을 감안할 때 직경 약 22m, 둘레 60m의 규모로 복원되는데, 기존 왕릉의 규모를 통해 비교해 보면 35대 경덕왕릉(765)과 비슷하고, 갑석의 가공기법 또한 경덕왕릉과 유사하기 때문에 추정 왕릉지의 조성 시기는 그 전·후로 추정된다.

이에 왕릉 석재의 출토 양상, 개별 석재의 가공기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볼 때 추정 왕릉지는 33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35대 경덕왕의 형인 34대 효성왕(孝成王, 742)의 미완성 왕릉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효성왕은 그의 유언대로 관을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하였다는 기록과 5년간 짧은 재위기간을 고려해 보면 병석病席에 있을 때 능침을 사전에 준비하다가 왕이 유언으로 화장을 택하자 왕릉의 석물은 방치되어 오다가 후대에 자연스럽게 황복사 금당의 면석, 건물지의 담장 및 기단석 등으로 재사용되었는 것으로 판단된다.

왕릉의 조성은 서쪽에 위치한 너비 약 18m 정도의 대형 도로를 사용하여 석재를 산지에서 운반한 뒤 가공하였으며, 가공에서 나온 박편 등은 도로 부재로 재사용하고 있어 신라 왕릉의 석재 가공이 현장에서 직접 이루어졌음을 확인되었다.

또한 왕릉지로 추정되는 동북쪽은 담장과 석렬을 이용하여 별도 공간을 마련한 다음 서쪽에 대형 건물지와 담장, 회랑 등을 배치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왕릉 능원제도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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