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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사지(錫杖寺址)는 경주 송화산(松花山, 일명 수도산) 삿갓봉 아래 해발 95∼100m 사이(석장동 산81-2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신라 선덕왕 때 조각승 양지(良志) 스님이 주석(駐錫) 하였던 절이다. 경주 도심에서 형산강 서쪽 편에 자리 잡은 송화산(松花山)은 삿갓봉(234.7m)과 옥녀봉(275.6m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주 사람들은 흔히들 수도산이라 부르고 있다.

절터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북향은 산죽(山竹)이 빙 둘러싸고 있고 서편에는 폭 5m 정도의 계곡이 있다. 근처 주민들은 이곳을 ‘절골’이라 부른다.

석장사지(錫杖寺址)에서 출토 된 유물 중 석장(錫杖)이라는 묵서가 쓰인 백자대접이 출토되어 석장사지(錫杖寺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신라 인화문토기부터 조선전기 분청사기와 조선후기 백자 등이 출토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양지(良志) 스님은 기예(技藝)에 통달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 재위기간 : 7804~ 785년 정월)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냈고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良志)란 무엇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공장(工匠)을 의미하며, 석장(錫杖)은 머리에 여섯 개의 방울이 달려 흔들면 소리가 나는 지팡이로 스님이 탁발할 때 인기척을 내거나, 길을 다니면서 짐승을 쫓을 때 사용했을 것이다.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들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안치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절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암자와 같은 작은 절로 추정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양지스님이 주석하였던 7세기 후 반경에는 석장사내에 전탑으로 만들어진 삼천불탑이 존재 했을 정도면 고려, 조선시대보다는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석장사지는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증축되는 과정에서 유구가 훼손되고, 이전시기의 건축부재와 석물들이 재사용되어 창건 때의 절의 전체적인 윤곽은 알 수가 없다.

석장사지에 대한 최초 조사는 일제강점기 때 경주고적보존회의 오사카 긴타로가 하였다. 당시 도굴이 성행하였고 대부분의 유구가 교란 된 상태였다. 절터는 소나무 숲에 묘지가 있었고 초석과 와편 등이 확인되었고. 절터 주변의 일부 가옥에서 사용되고 있는 원형주좌초석이 석장사지에서 옮겨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석장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986년과1992년에 2차에 걸쳐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발굴조사보고서에 따르며, 다수의 기와 편과 탑상문전(塔像紋塼), 소조상편, 소형금동불 등 다양한 불교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200여점의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두 분의 부처님과 그 사이에 탑을 표현하였는데 삼천불탑 조영 시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크기와 문양에 따라 6∼7개의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종류별 크기가 다른 이유는 전탑조성 시 각 위치에 따라 전돌의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났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탑상문전은 경주 삼랑사지와 울산 능소사지, 울주 불영사, 청도 운문사 등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들 사지에도 석장사지와 유사한 전탑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떤 탑상문전(塔像紋塼)에는 탑상(塔像) 전면(塼面)에 연기법송(緣起法頌) 20자가 새겨져 있는데 크기는 높이 8cm, 폭 6.5cm, 두께 2cm로 글자크기는 약 0.5cm이다. 연대는 7~8세기 경으로 양지스님의 글씨로 추정된다.
내용은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남을 여래(如來)께서 말씀하셨노라. 저 법은 인연을 다한다는 것 이것이 대사문의 설법일세(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盡」 是大沙門說」』

석장사지(錫杖寺址) 초입에서 만나는 나무다리 2곳

소조상은 20여점이 출토되었는데,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 등의 신장상편과 보살상편으로 추정되면 소조상편들은 모두 뒷면이 편평한 부조상이기 때문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석장사 삼천불탑의 벽면에 부착했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명문전이10여점 출토되었는데, ‘西北’, ‘三’, ‘下層南’ 등의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탑축조 시 벽돌의 위치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의해(意解) 양지사석(良志使錫) 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오직 신라 선덕왕(宣德王)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布帶)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施主)의 집에 가서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했다.
양지의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또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技藝)에도 통달해서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寺)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또 전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靈廟寺)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三千佛)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공경했다. 그가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상(丈六像)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의 태도로 주물러서 만드니, 온 성 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왔도다. 왔도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功德) 닦으러 왔네.
지금까지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3,700석이었다.
논평해 말한다. “양지 스님은 가위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充滿)했다. 그는 여러 방면의 대가(大家)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할 것이다.”
()해 말한다.
()가 파하여 법당 앞에 석장(錫杖)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고 혼자서 단향(檀香) 피우네.
남은 불경 다 읽자 더 할 일 없으니
소상(塑像) 만들어 합장하고 쳐다보네.
 

왼쪽이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다.

석장사지(錫杖寺址)를 찾아가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으나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과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 가장 쉽게 찾아 갈수 있는 길이다.

휴앤락 오토캠핑장 입구
휴앤락 오토캠핑장 내에서 석장사지로 가는 길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
휴앤락 오토캠핑장을 통과해서 가는 길과 소나무 재선충병 적치장을 지나서 가는 길이 합류헤서 올라가는 길
능선에서 만나는 길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멀리서 보이는 석장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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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내에 있는 고분은 경주노동동고분군, 경주노서동고분군, 경주황남동고분군, 경주황오동고분군, 경주인왕동고분군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2011728일 대릉원(大陵苑)으로 통합되었다. 대릉원이란 명칭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 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서 따온 것이다.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역과 그렇지 않는 지역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황리단길에 가까이 있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많이 방문한다. 여기에는 천마총을 비롯하여 황남대총, 검총 등 발굴 된 고분과 미 발굴된 미추왕릉 등 많은 고분들이 있다.

여기에 분포하는 대형 고분들 사이사이 또는 주변에 원래 봉분이 없거나 너무 작아 멸실된 소형 분들이 수도 없이 분포하고 있다. 남아 있는 고분들은 대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 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되고, 봉분의 형태는 대부분 단일원분(單一圓墳)이나 표형분(瓢形墳)도 있다.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표형분(瓢形墳)인 90호분

조사된 소형의 고분들은 대부분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 : 積石木槨墳) 이었으나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 : 竪穴式石槨墓)와 독널무덤(옹관묘 : 甕棺墓)도 혼재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 가운데 109호분과 110호분 일제강점기 때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조사 당시 110호분은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가진 한사람무덤(單葬墳)이었고 109호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시차를 두고 축조된 여러 개의 무덤으로 구성된 여러 사람무덤(多葬墳)이었다. 109호의 무덤 가운데 가장 일찍 축조된 제3·4(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은 현재까지 알려진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마총(天馬塚, 155호분)

1973년에 조사된 천마총은 직경 47m, 높이 12.7m 표형분(瓢形墳)의 부부묘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발굴 당시 천마총은 옆에 민가가 있었고 봉분 일부가 파손되어 있었다. 73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에 걸쳐 연인원 30,000여명이 발굴에 참여하였고 출토 유물 중 천마도(天馬圖)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명명되었다.

천마총을 발굴 조사하게 된 이유는 경주에서 가장 규모 큰 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기 전 예비지식을 얻기 위해 실시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발굴 조사 후 내부를 공개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천마총은 직경 47m, 높이 12.7m 표형분(瓢形墳)의 부부묘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46일 개토제를 시작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발굴 초기 경주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시민들은 왕릉급의 고분을 파헤쳐 가뭄이 든다는 등 민심이 흉흉하였다. 작업 인부들 사이에서도 무덤을 판다는 외경감이 팽배해 있어 발굴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73726일 오후, 무더운 여름에 고분 아래로 파던 중 흙더미 속에서 눈부신 순금제 신라금관이 나왔다. 이때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와서 일순간 하늘이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작업자와 조사원들이 놀라서 잠시 작업이 중지되었다. 이로 인해 가뭄은 해소되었다.

천마총 내부에서는 금관·관장식·관모(冠帽) 등의 장신구류, 금동말안장과 백화수피제천마도장니(白樺樹被製天馬圖帳尼) 등 각종의 마구류, 금동··청동제의 용기류, 유리용기, 각종 철기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백화수피제장니(白樺樹被製帳尼)에 그려진 천마도(天馬圖)가 출토되어 천마총이라 명명되었고, 고분은 복원되어 내부시설이 공개되었다.

천마총 금관(국보 188호)
천마총 유리잔(보물 620호)

출토된 유물들을 탄소 동위원소 측정법과 유물 비교 검토를 통해 천마총 조성연대를 파악하니 560년에서 54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이시기에 사망한 임금은 살펴보면 45819대 눌지왕, 47920대 자비왕, 50021대 소지왕, 51422대 지증왕, 그리고 54023대 법흥왕 등 5명이다.

이중 법흥왕의 장지는 애공사 북쪽 봉우리로 제외가 된다.

이에 학계에서는 천마총의 피장자는 지증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왕이 숨진 해와 달이 기록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당시 1개월간의 해돋이 각도를 컴퓨터로 추적해 분석한 결과, 479년에 타계한 20대 자비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마총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99호분
천마총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99호분

황남대총(皇南大塚, 98호분)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지름 80m, 높이 23m의 신라 최대(最大) 표형분(瓢形墳)으로 1970년대 경주관광10개년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737월에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197510월에 완료하였는데 발굴에 동원 된 인원은 33천여 명이였다. 기간은 24개월이 소요되었으며 국내 고분 발굴조사 중 가장 길다.

황남대총(皇南大塚)은 지름 80m, 높이 23m의 신라 최대(最大) 표형분(瓢形墳)

경주관광10개년개발계획은 1971대통령의 명에 의해 경주시를 국제문화 관광도시로 건설하기 위해 수립 된 개발계획이다. 7년 동안의 공사를 통해 197946일 보문관광단지가 개장 된 것도 대표적인 개발사례다.

유물이 무려 7만여 점으로 금관, 금동관, 봉수형 유리병, 비단벌레 장식 마구 등 출토 되었는데 봉수형 유리병은 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유리병으로 머리 부분이 봉항의 머리 같다고 해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으로 부르고 있다.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 된 것으로 손잡이에 금실을 감고 있어 유리병을 금보다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비단벌레 장식 마구는 말안장 부속품으로 백화나무의 흰 껍질을 깔고 그 위에 비단벌레 날개 천개를 장식하였는데 무지개 빛처럼 영롱하다. 그리고 테두리는 금동제 관으로 마감처리 했다.

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봉수형(鳳首形) 유리병(국보 193호)
남분(南墳)에서 출토 된 금제 관식(보물 630호)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으로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 17대 내물왕 부부로 추정하고 있다. 즉 남분(南墳)은 내물왕, 북분(北墳)은 내물왕의 부인인 보반(保反)인 것이다. 능을 조성할 때 먼저 남분(南墳)을 만들고 나중에 그 고분의 일부를 파내고 북분(北墳)을 연결하였다. 즉 왕이 왕비보다 먼저 사망한 것이다.

내물왕은 재위 46년간(356~402) 신라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었고 김씨(金氏) 왕족 시대를 열었다.

남분(南墳)에서는 환두대도, 금동관, 은제 잔, 상감 팔찌, 유리제품, 갑옷 등 유물이 출토되었고 60세 전, 후의 남자 머리뼈와 이빨이 나왔어 피장자는 남자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주곽에서 순장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키는 148cm, 15세 전후의 소녀 뼈가 나왔고 말 순장도 발견되었다.

북분에(北墳)서는 금관, 반지, 부인대(夫人帶)라고 쓰인 허리띠 장식이 나왔으며 갑옷은 출토되지 않았고 피장자는 키 150m의 여자로 추정된다.

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금반지(보물 623호)
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금제 고배(보물 626호)
금반지(보물 623호)에서 출토 된 은잔(보물 627호)

부장품과 적석목곽분의 형식을 보면 남분은 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북분은 5세기 전반 중엽 이전에 속한다. 이에 일부 학자는 피장자는 19대 눌지왕(재위 417~ 458)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 된 금관이 지금까지 신라의 금관 중 가장 아름답다금관이 나온 곳은 황남대총을 포함하여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이다금관의 장식은 출자(出字) 형 나무모양에 좌, 우에는 사슴뿔 모양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

검총(劍塚, 100호분)

검총(劍塚)은 대릉원 내의 미추왕릉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외형은 지름 44.5m, 높이 9.7m로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다. 1916년 발굴조사 당시 철검(鐵劍)이 출토되어 검총으로 명명되었으며, ‘황남동 제100호분으로도 불리고 있다.

검총(劍塚)은 지름 44.5m, 높이 9.7m로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묘제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고분 중심부에 지반을 깊이 약 67파고 여기에 냇돌을 1.2m 두께로 깔아 무덤의 상면(床面)으로 하고 껴묻거리副葬品와 피장자를 안치시켜서 무덤의 상면을 주위 지반보다 높게 설치하였다.

매장주체부는 냇돌로 쌓은 돌무지積石로 덮었고 돌무지의 높이는 약 3.7m, 남북 지름 약 14.5m이며, 중심부 표면에는 두께 약 1518로 진흙粘土이 덮여 있었다. 그 위에 축조된 봉토는 흙과 자갈을 섞어 쌓았다. 봉토 가운데의 자갈층은 모두 고분 중심부 쪽으로 경사져 내려와 있었다.

검총(劍塚)1916년 일본인 고고학자 세키노關野貞등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신라고분들 중 가장 먼저 학술적 조사를 한 고분이다. 출토 된 유물로는 쇠투겁창(鐵矛) 2, 숫돌(砥石)1, 철검 2, 쇠칼(鐵刀)1,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 등과 후세에 매장된 토기류 몇 점이 출토되었다.

특히 철검은 다른 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출토된 예가 전혀 없고, 고분기 이전에 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거대한 외형이나 내부 구조에 비해 출토 유물은 빈약하고 동일한 시기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이 섞여 있다. 가계를 중요시하였던 마립간시대 왕권의 성장을 배경으로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조상 묘를 대형으로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추왕릉(味鄒王陵, 106호분)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제13대 미추왕릉(味鄒王陵)은 대릉원(大陵園) 안에 있고 주변은 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 12.4m, 직경 56.7m로 묘제는 인근의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이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이 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으며 죽장릉 (竹長陵) 또는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 미추왕의 사망 시기는 3세기인 284년으로 당시 묘제는 목곽묘로 대형의 고분은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편 미추왕 죽엽군조에 의하면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장지는 능재흥륜사동(陵在興輪寺洞)인데 흥륜사(興輪寺)는 여기에서 서쪽 500m 지점에 있는 경주공업고등학교 일원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내물왕의 왕비와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로 되어 있는데 17대 내물왕(~ 4022)은 미추왕 사후 72년 만인 356년에 왕위에 올랐고, 실성왕(~ 4175)118년 후인 402년에 왕위에 올랐다. 이는 후대 김씨 일족이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 사후 왕권이 김씨 일족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족보를 조작한 것이다.

36대 혜공왕 때, 미추왕을 김성시조(金姓始祖)로 추앙하기 위해 미추왕릉(味鄒王陵)을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묻힌 오릉(五陵)보다 서열(序列)을 위에 두고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노서동 고분군, 노동동 고분군 및 대릉원에서 묻힌 선대 왕들의 능 위치는 실전했으나 의도적으로 미추왕릉으로 지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반월성에서 나와서 대릉원 입구에서 먼저 만나는 능이 미추왕릉이다.

능 앞에는 1970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과 상석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이 있다. 능 앞쪽에는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94년 다시 세운 것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곳이다.

 

대릉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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