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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림(始林)은 반월성과 대릉원 사이의 외딴 숲으로 신라 김씨(金氏) 시조인 알지(閼智)의 강림 설화가 전해오는 숲이다. 면적은 7,300로 구림(鳩林)이라고도 하고 닭 계()자를 써 계림(鷄林)이라 불렀다. 주위에는 내물왕릉을 비롯한 고분이 둘러싸고 있다.

반월성에서 본 시림(始林), 계림(鷄林)

이곳에는 왕버들, 느티나무, 팽나무 등 오랜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나무 아래에는 조그만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 정겹다특히 초입에는 수령 13,00년 된 회화나무가 있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회화나무는 주로 궁궐, 서원, 향교 입구에 심고 있는데 악귀, 잡귀 등 물리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계림비각(鷄林碑閣)

또한 계림비각(鷄林碑閣)이 있어 안에는 조선 순조 3(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 기록비,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명(鷄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銘)가 있다높이 111.0cm, 너비 39.0cm, 두께 17.0cm로 찬자(撰者) 남공철(南公轍), 서자(書者) 최헌중(崔獻重), 각자 미상으로 내용은 김알지의 탄생에 관련된 설화와 김알지 이후의 김씨 왕가의 계보와 대표적인 치적을 기록하고 명문(銘文)을 쓰게 된 동기를 서술하고 있다.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명(鷄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銘)

동경잡기 기록에 따르면 계림에 높이가 3척 정도 되게 돌을 쌓은 것이 있는데, 속설에 알지가 태()를 풀 때에 가위를 놓아두었던 돌인데 가위 날의 흔적이 있다고 전한다.

김알지(金閼智)는 누구인가?

당나라 태종 때(630) 위징이 편찬한 수서에 신라왕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신라의 왕은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달아나 신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를 왕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여기에 나온 백제 사람은 수서를 편찬한 때가 신라 진평왕이므로 신라 김씨 왕족이야기다김알지가 계림에 온 때인 서기 60년과 65년 사이의 한반도 상황을 확인하면 백제가 마한을 정복할 시점으로 서기 618월에 마한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신라에 바치고 귀순 했던 때이자 마한의 부흥운동 실패와 몰락한 때이다. 그때 마한의 마지막 왕족 후손인 김알지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계림(鷄林) 초입에서 맞이하는 계림비각(鷄林碑閣)

시림(始林) 즉 계림(鷄林의 위치가 맞는 곳인가?

시름(始林)의 위치와 방향, 규모에 대하여 알아보자. 시름(始林)은 외부에서 경주 로 출입할 때 처음으로 맞이하는 숲이라는 뜻이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시름의 방향은 금성 서쪽방향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시림 관련 내용을 보면 눌지마립간 177월에 이리떼가 시림으로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시름이 넓고 방대하다는 것이다선덕여왕 37월에 시림의 들판에서 크게 열병하였다고 되어있어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하는 열병장소 라면 넓은 공간의 장소이다.

삼국유사 견훤 편에는 927년 포석정에 있는 경애왕을 시해하기 위해 견훤이 후백제 군사를 출병시켰다. 신라 수도 경주근방 영천에서 경주로 침입하기 위해 시림에 도착하여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시림으로 나아가게 한 후 갑자기 신라왕도경주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계림(鷄林)에는 왕버들, 느티나무, 팽나무 등 오랜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영천에서 경주로 오는 길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천북안아화건천이고 다른 하나는 영천고경현곡이다. 전자인 경우는 건천에 부산성이 있어 기습공격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반면 후자는 구미산이 있어 산악 지형을 이용하면 은밀한 이동이 가능하여 유력한 경로이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시림은 수도 서라벌 서쪽인 서천 건너편 외곽에 있는 숲으로 현곡방면에 있는 숲이다. 시림의 어원은 조선 유민 즉 고조선 준왕 일행의 유민인 6부촌 세력 중 일부 세력 또는 김일지 세력이 경주지역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맞이한 숲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김알지(金閼智), 탈해왕대(脫解王代)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 60, 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中元은 모두 2년 뿐이다) 8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瓠公)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閼知)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춘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太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王位)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시림, 계림에서 본 반월성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9년 봄 3월 왕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어찌된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가보니 그 곳에는 나무 가지에 금빛나는 작은 상자가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보고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그 상자를 가져와 열게 하였다. 그 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고, 그 아이는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왕이 기뻐하며 측근들에게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로 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그의 이름을 알지라고 하였다. 그는 금빛이 나는 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하였다.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부르고, 이를 국호로 하였다.

대릉원에서 본 시림(始林), 계림(鷄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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