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경주시 문무대왕면 나아리(羅兒里) 월성원자력본부 후문 공원 남서쪽 소나무숲에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1845(헌종 11) 조정에서 하마비와 땅을 하사하자 석씨 문중에서 유허비(遺墟碑)와 비각(碑閣)을 건립하였다.

장사랑(將仕郞) () 장릉참봉(莊陵參奉) 여강(驪江) 이종상(李鍾祥)이 비문을 지었고,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정언문신겸선전관(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傳官) 여강(驪江) 이재립(李在立) 글씨를 썼다. 비는 화강암으로 비신 높이는 113, 너비 46, 두께 24로 비문은 해서체다.

내용은 마멸이 진행 중이서 탁본으로 알 수 가 있다. 현재 탁본은 성균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845년(헌종 11) 조정에서 하사한 하마비

 비각 안에는 1847년 경주부윤 이시우(李時愚)가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記)와 이능항(李能恒)이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중수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重修記)가 있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왕은 본래 파나국(婆那國)의 왕자로 회임된 지 7년만에 큰 알로 태어났다.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버리라고 명하자 왕비가 금궤에 담아 바다에 띄웠는데, 진한(辰韓)의 아진포(阿珍浦)에 정박하게 되었다.

한 노파가 알 속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데려다 길렀다. 이 사람이 바로 탈해왕이다. 정박하고 있을 때, 까치가 알렸으므로 작()에서 조()를 떼어내고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신라석씨탈해왕탄강유허비(新羅昔氏脫解王誕降遺墟碑)는 장사랑(將仕郞) 전(前) 장릉참봉(莊陵參奉) 여강(驪江) 이종상(李鍾祥)이 비문을 지었고, 통훈대부 전 행사간원정언문신겸선전관(通訓大夫前行司諫院正言文臣兼宣傳官) 여강(驪江) 이재립(李在立) 글씨를 썼다.

왕의 이름은 탈해(脫解)인데, 옛날에는 시호가 없었기 때문에 탈해왕이라고 칭하였다. 당초 진한(辰韓)6(六部)에 군장이 없었는데,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처음으로 나라를 건국하여 서라(徐羅)라고 칭하였다.

차차웅(次次雄) 때 탈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딸과 결혼을 시켰는데,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인 유리(儒理)를 두고 탈해에게 선위하였다. 탈해는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유리(儒理)를 왕으로 세우고 보필하여 백성들이 부강을 누리게 되었다.

1847년 경주부윤 이시우(李時愚)가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記)
이능항(李能恒)이 지은 신라탈해왕탄강유허비각중수기(新羅脫解王誕降遺墟碑閣重修記)

유리가 사망하자 나라 사람들은 선왕의 명이라는 이유로 탈해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호공(瓠公)을 재상으로 삼고 또 시림(始林 : 계림의 옛 이름)에서 알지(閼智)를 얻었다. 알지는 계림씨(雞林氏 : 金氏)의 조상이다. 탈해는 세상을 떠나면서 유리의 아들 파사(婆娑)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4대 뒤에 탈해의 손자 대휴(伐休)가 또 왕위를 이었으니 계림씨와 번갈아가며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이다. 석씨는 모두 8명의 왕이 나왔고, 3성이 향유한 서라는 1000년 동안 다스려졌다. 이는 옛 역사에서 말하는 3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곳 나아리(羅兒里)는 삼국유사 석탈해 탄생설화에 나오는 아진포(阿珍浦)와 관련 있다. 신라 육부촌 때 금산가리촌은 이곳 문무대왕면 일대를 포함하고 있는데 서촌(瑞村)이라고 불렀고 이곳 중 아진포(阿珍浦)를 아서(阿瑞, 兒瑞)라고 불렀다. 나아(羅兒)도 이와 관련해서 불러지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현재 아진포(阿珍浦)는 월성원자력 건설 때 발전소 부지에 포함되어 볼 수가 없다.

월성원자력 건설 전 아진포 모습

석탈해가 탄 배가 도착한 홈바우는 홈이 패어있는 홈돌이라고도 하는 바위로 장아(長阿) 앞 바닷가에 있었는데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부지에 포함되어 사라졌다.

나아 바닷가

이 밖에 석탈해 탄생설화와 관련 된 마을 지명이 수아(收兒)장아(長阿)가 있다. 수아(收兒) 석탈해를 거두어들인 곳이라 하여 "수아" 혹은 "수애"라고 불렀다. 장아(長阿) 석탈해가 장성하기까지 자라던 언덕이라 하여 "장아"라 하는데 여기 또한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때 부지에 포함되었다.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 전 나아마을 전경

삼국유사 기이 4대 탈해왕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함)은 남해왕(南解王) 때 가락국(駕洛國)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首露王)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법석이면서 그들을 맞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鷄林)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의 아진포(阿珍浦)로 달아났다(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하서지촌下西知村의 이름이 있다). 이때 마침 포구에 한 늙은 할멈이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바로 혁거세왕(赫居世王)의 고기잡이 할멈이었다.

그는 이 배를 바라보고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에는 본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까치들이 모여들어서 우는가.”

배를 끌어당겨 찾아보니 까치들이 배 위에 모여들었다. 그 배 안에는 궤 하나가 있었다. 길이는 20()이오. 너비는 13척이나 된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밑에 매어 두었다. 그러나 이것이 흉()한 것인지 길()한 것인지 몰라서 하늘을 향해 고했다.

이윽고 궤를 열어 보니 단정히 생긴 사내아이가 하나 있고 아울러 칠보(七寶)의 노비(奴婢)가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는 그제야 말을 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이오(정명국正明國 혹은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한다. 완하琓夏는 또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국倭國 동북쪽 1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 나라에는 원래 28 용왕(龍王)이 있어서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났으며 나이 5, 6세부터 왕위(王位)에 올라 만민(萬民)을 가르쳐 성명(性命)을 바르게 했소. 팔품(八品)의 성골(姓骨)이 있는데 그들은 고르는 일이 없이 모두 왕위에 올랐소. 그때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王女)를 맞아 왕비(王妃)로 삼았소.

오래 되어도 아들이 없자 기도를 드려 아들 낳기를 구하여 7년 만에 커다란 알[] 한 개를 낳았소. 이에 대왕은 모든 신하들을 모아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이것은 아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들을 함께 배 안에 실은 뒤 바다에 띄우면서 빌기를,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한 길을 이루도록 해 주시오했소. 빌기를 마치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이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