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암(朱砂庵)은 경주시 서면 부산(富山) 정상 바로 아래 있는 암자로 주사사(朱砂寺)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은 바위로 되어있고 그 모습이 장수의 투구 형태다. 그리고 주사암(朱砂庵)은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다. 즉 ㄷ 자 바위가 주사암(朱砂庵)을 둘러싸고 있으며 대웅전 옆의 주사암(朱砂庵)이 투구의 중앙에 있다.
이러한 형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기운이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하여 명당 터 중에 하나다. 그리고 절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창건 시기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주암사(朱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설화에 의해서 절 이름이 주사암(朱砂庵)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富山)은 주사산(朱沙山, 朱砂山), 오봉산(五峰山), 오로봉산, 닭벼슬산 등으로 불리고 있다. 동경잡기의 기록에 의하면 품상촌(品上村)의 주산으로 그 산 위에 옛터가 있는데 속칭 장자(長者)의 터라 하였다. 또 용정(湧井)이 있으며 산허리에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10여 명을 수용한 수가 있다고 한다. 현재는 오봉산(五峰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시대의 한 도인(道人)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고 하였는데,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갑사(甲士)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러서 보니, 단사(丹砂)의 붉은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고, 늙은 승려가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괴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천 명을 보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번 주문(呪文)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 안에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후로 절 이름을 주사암(朱砂庵)이라고 한다.」
투구바위 뒷편에 있는 주사굴
또 다른 전설은 신라 문무왕 때 부산성富山城)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사암을 불사처(不死處)라 부르고 있다.
주사암(朱砂庵)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남아 있는 전각과 불상을 볼 때 조선 시대 후기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전각 및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 삼성각 · 종각 · 요사 등이 있고, 국가유산으로는 2007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경주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대웅전주사암(朱砂庵)이자 영산전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朱砂庵 靈山殿 石造三尊佛坐像)은 영조 1년(1725)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영산전 내에 도금 상태로 봉안되어 있다. 좌우로 협시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우협시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쓴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삼성각
주사암(朱砂庵) 마당에서 앞의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 오른쪽으로 200m 정도 가면 평평하고 장엄한 바위를 만난다. 넓이는 100여평 규모로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이 바위를 마당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또는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
김극기(金克己)의 시서(詩序)에 주암사(朱巖寺) 지맥석(持麥石)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지산(下枝山)은 세속에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산의 남쪽에 주암사란 절이 있고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는데 깍아 지른 듯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과 먼바다를 바라봄에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삼라만상을 내려보는 것 같다. 대석(臺石)의 서쪽에 지맥석(持麥石)이 있는데 사방이 깍아지른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듯 하지만 그 위에는 평탄하여 사람 1백명이 앉을 수 있다.
옛날 대서발(大舒發) 김유신(金庾信) 공이 여기에 보리를 가져와 술 재료를 공급하여 군리들을 대접하던 곳으로, 지금도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 9 보쯤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에서 본 풍광
마당바위는 CF, Drama 등 촬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부산성(富山城)은 『삼국사기』에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으로 성벽의 둘레가 9.7km이다. 『삼국유사』에도 부산성(富山城)을 쌓은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성 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당나라가 신라의 수도까지 침범할 경우 명활산성, 남산 성, 선도 산성 등과 함께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한 산성이었다. 그 이후에는 경주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 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주사암 주차장에서 20m 정도 올라가면 부산의 정상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산석성(夫山石城)으로 나오며, “둘레가 2,765보 3척이며, 안에는 시내가 넷, 연못이 하나, 우물과 샘이 아홉이 있으며, 또한 군창(軍倉)이 있는데, 영천과 영일의 군창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중요한 산성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성(富山城)으로 나오며, 이미 반이나 무너졌다는 내용이 있어 잘 관리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 터와 군의 창고 터,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 터, 우물 터, 못, 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 터 등이 남아 있다.
주사암에서 보살피고 있는 고양이세월의 흔적
여근곡(女根谷)은 부산 기슭의 골짜기로 여자의 성기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636년(선덕여왕 5) 두꺼비가 옥문지에 많이 모여 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이 서쪽변경의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에 백제 병사가 숨어 있다고 보아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근곡(女根谷) 옥문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機三事)에도 옥문곡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는데 두꺼비가 개구리로, 옥문지가 여근곡으로 바뀌어있고, 그 위치도 변경이 아니라 교외인 건천읍 신평리에 있는 부산 아래라고 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근곡이 부 중심지의 서쪽 41리에 있다고 하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덧붙였으며, 이후 조선 시대 거의 모든 경주부의 지리지에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 정상에는 조선 성종 16년(1485)에 조성한 경숙옹주(敬淑翁主) 태실(胎室)과 태비(胎碑)가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초 태실이 도굴되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태실(胎室) 유물인 태 항아리 2점과 태지(胎誌) 1점을 찾아 소장하고 있다.
울산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태봉산(胎封山, 산 112)은 UNIST 입구 우측에 있는 산이다.
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이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비의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비의 뒷면에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비문으로 보아 1485년(성종 16)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사연댐 가느 길에 만나는 경숙옹주(敬淑翁主)의 태실(胎室)과 태비(胎碑) 안내판
태실의 주인은 경숙옹주(敬淑翁主)로 1483년 조선 성종[1457~1494]과 후궁 숙의 김씨(淑儀金氏) 사이에서 3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출생 후 그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태실(胎室) 및 태비(胎碑)를 조성한 것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으로 가는 길태비(胎碑)는 지붕돌과 몸체가 하나로 연결된 형태로 전체 높이가 107㎝이고, 몸체는 높이 75㎝, 너비 45㎝, 두께 19㎝이다.
2004년 12월 16일에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태실(胎室)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胎)를 모시는 작은 돌방으로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과 왕실 자손들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는 뜻에서 전국에 이름난 산을 찾아 태실(胎室)을 만들고 태(胎)를 묻었다고 한다. 이러한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며, 태비(胎碑)는 태실(胎室) 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태실(胎室)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러한 태(胎)를 처리하는 장태(藏胎) 문화는 조선의 쇠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태비(胎碑) 앞면에 ‘왕녀 합환 아기씨 태실(王女合歡阿只氏胎室)’이라는 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뒷면에는 “성화 21년 8월 6일에 세우다[成化二十一年八月初六日立]”라고 세운 날짜가 새겨져 있다.
일반 민간에서는 태(胎)를 길지에 묻거나, 왕겨 불을 이용하여 태웠다. 태(胎)를 태운 재는 강이나, 냇물에 띄워 보내고 태우지 않은 태(胎)는 짚으로 싸서 돌맹이와 함께 물속 깊이 버렸다. 왕실이나 사대부 집안에서는 태(胎)를 항아리에 담아 산에 묻었고 태(胎)를 담은 항아리를 태호(胎壺) 또는 태옹(胎甕)이라 한다. 이때 태지(胎誌)를 태호 (胎壺) 에 함께 봉안하는데 태지(胎誌)는 태(胎)의 주인에 대한 신상명세서다. 궁중 풍속에 의하면 왕자들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지나면 태(胎)를 태호(胎壺)에 봉안하는데 주로 상감분청이다. 이때 태호(胎壺)는 태(胎)를 봉안하기 전에 백번을 씻는다. 그리고 밑바닥에 동전을 깔고 태(胎)를 봉안한 다음 붉은 비단에 뚜껑을 감싼다. 그것을 다시 외호(外壺)라고 하는 큰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 사이를 솜으로 채워 움직이지 않도록 한 다음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기름종이로 싼다. 태호는(胎壺) 태지(胎誌)와 함께 봉안 한다.
왕세자의 경우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따로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태실은 전국 각지의 길지를 찾아 태봉(胎峯)을 선정하였고, 이곳 돌혈(突穴)에 해당하는 자리에 좌향을 정하여 태를 묻고 주위에는 석조물을 세워 왕릉같이 장엄하게 하였다. 태실(胎室)을 마련한 태봉(胎封)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일반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 일체 행위를 금지하여 특별하게 관리하였다. 이에 관한 업무는 예문관이 맡았다. 왕들의 태실(胎室)은 가능하면 궁중으로부터 거리가 먼 지방의 명당을 찾아서 마련하는데 이는 왕과 백성의 합일을 통해 왕실의 번영과 국토민안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태봉산(胎封山) 정상에서 본 사연댐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되는데 아기 태실은 왕실 자손의 태를 묻고 조성한 시설물이라면, 가봉 태실은 왕이나 왕비, 추존왕을 대상으로 그 격식에 맞게 석물을 추가한 것을 뜻한다. 2023년 3월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왕실의 태실(胎室)은 148개소로, 아기 태실 120개소, 가봉 태실 28개소이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의 고적 조사사업에 의해 조선 왕실의 태실이 파괴되었다. 즉 1928∼1929년 이왕직이 전국에 흩어진 조선 왕실 태실(胎室)에 매안(埋安)된 태항아리와 태지(胎誌)를 수습한 후 서삼릉에 집장(集藏)했고, 이 과정에서 태실(胎室) 석물들을 훼철했기 때문이다. 그때 대상이었던 54개소의 태실지는 훼손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는 도굴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의도는 조선 왕들을 일본 천황 아래에 포함 시켜 우리 백성을 식민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왕실 태호도 많이 도굴하였다. 이후 원 태실지에 남아 있던 석물마저도 오랜 기간 방치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리고 1970년 조선 왕실 태실 관련 유적인 서삼릉이 처음으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이래로 태실(胎室)과 관련 유구와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노서동 고분군(慶州 路西洞 古墳群)은 반월성의 북편 일대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지구 고분군들 가운데 북서 말단부에 있는 것으로 경주시 노서동 104번지 일대에 해당된다. 고분군 동쪽의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群)이, 남쪽의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이 있다.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은 13기의 봉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마총(馬塚, 133호분), 우총(牛塚, 131호분),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138호분, 호우총(壺杆塚,140호분),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등 8기는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된 유물이나 봉토의 규모로 보아 6세기 때의 신라왕과 왕족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목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128호분), 서봉총(129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제138호분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쌍상총(137호분), 마총(133호분), 우총(131호분) 등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이다.
고분들 가운데 서봉총(129호분), 134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등 4기는 봉분이 표형분(瓢形墳)이고 나머지는 단일원분(單一圓墳)이다. 서북단에 자리한 130호분은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보다는 약간 작지만 거분(巨墳)으로 서봉황대 고분으로 불리고 있다.
미발굴 된 고분은 서봉황대(130호분), 132호분, 134호분, 135호분, 136호분 등 5기이다.
금관총(金冠塚,128호분)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된 고분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봉토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는데 발굴 결과 크기는 직경 45m, 높이 12m 정도로 추산되었다.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덧널은 약 40㎝ 깊이로 지반을 파서 설치한 지상식의 외덧널식(單槨式)이었다.
발굴조사 계기는 주막집 증축 터파기 공사 도중 우연히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귀고리, 허리띠 등 온갖 황금제품이 쏟아져나왔다. 즉 1921년 9월 23일 노서리에 있는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있던 주막(酒幕)집에서 뒤뜰을 확장하려고 폐고분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금관총 유적지에 보존보호를 위해 돔형 전시공간을 구축금관총의 돔형 전시공간과 뒤에 보이는 봉황대 고분
본격적인 조사는 일부 유물 유실과 봉토가 훼손 된 후 진행되었는데 당시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경찰서장 입회하에 발굴조사를 하였다. 모로시카를 비롯해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그리고 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등과 함께 9월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9월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 만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금관총은 비전문가에 의해 4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를 정확히 밝히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물만 수습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발굴 후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古)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덧널의 크기는 길이, 너비가 4.8×2.1m로 추정하였으나 천마총 등과 비교하면 너무 작게 추정된 것으로 원래는 이중의 덧널식인데 내부 덧널만 조사되었고 그 크기가 그러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무널(木槨)은 약 2.5×1.0m의 크기로 칠(漆)을 한 것이다.
유물로는 금관, 금제허리띠(金製銙帶) 등의 각종 장신구, 금동말안장(金銅鞍橋), 옥충(玉蟲)을 장식한 발걸이(子) 등의 마구류, 금제완(金製완), 청동초두(靑銅斗) 등의 귀금속용기와 유리용기, 토기류, 각종 철제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엽으로 추정되고 있고, 피장자는 남자라는 주장과 여자라는 주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큰 칼의 출토상태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금관총(2015)과 금령총(2018~2020)을 재발굴하였는데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의 ‘칼끝장식’ 1점이 나왔고 2013년에도 금관총 유물의 보존처리 도중 ‘이사지왕’ 명문 고리자루큰칼 2점을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에서만 출토된 3점의 ‘이사지왕’ 명문 칼이 나왔는데 금관총의 주인공, 즉 피장자는 이사지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는 ‘이사지왕’이 보이지 않는다.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 (국립경주박물관)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서봉총(瑞鳳塚)은 세 번째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봉분은 표형분(瓢形墳, 쌍분)이고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1926년에 발굴조사를 했다. 표형분(瓢形墳, 쌍분)은 북분과 남분으로 구성되고 남분을 먼저 발굴을 했고 데이비드 총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Percival David, 1892~1964)가 발굴 자금을 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발굴 결과 금령총보다 많은 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당시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를 기념하여 서봉총으로 명명되었다.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취하고, 출토된 신라 금관 장식 가운데 봉황새 모양 장식이 있어 봉황(鳳凰)의 「봉」자를 취해서 「서봉총」이라 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은 금관총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m의 거리를 두고 있다.
현재 서봉총(瑞鳳塚) 자리에는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의 발굴조사는 금령총의 발굴조사 2년 후인 1926년에 역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관총, 금령총이 먼저 발굴되어 금관이 출토되어서 경주 노동리, 노서리 일대에 분포한 신라 무덤에는 금관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시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나라의 옛 사찰과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그리스, 로마 등의 고분 발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발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일본은 마침 경주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라 고분 발굴 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당시 일본 교토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하마다가 황태자를 안내하여 발굴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고 신라 무덤이 일본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된 셈이다.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때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되어 있어 그 용지를 매립해야 했다. 이때 매립 할 흙이 필요하게 되자, 서봉총의 봉토 흙이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의 매립에 사용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봉황모양장식을 얹은 금관을 비롯한 유리제팔찌, 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 등의 각종 장신구, 청동초두(靑銅斗), 칠도각병(漆塗角甁), 유리그릇을 비롯한 각종 용기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연수원년(延壽元年) 신묘년(辛卯年) 3월에 이 은합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연수원년은 451년 또는 511년으로 추정되는데 451년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분은 이보다 늦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이고 피장자는 여성 왕족묘로 추정된다.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서봉황대 고분은 직경이 거의 80m에 달하고 신라 마립간기 말기인 6세기 초의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 봉토의 상면에서 함몰 현상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서봉황대 고분(미발굴 130호분)미발굴 132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호우총은 남쪽에 배치되어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하였고 두 고분 모두 표형분(瓢形墳)이다.
봉토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4m 정도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금속용기류, 마구류,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출토된 청동합(靑銅盒, 보물 제1878호) 바닥에는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십(壺杅十)"이라는 4줄 16자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이 이름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호우총이라 명명하였다.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이 청동합(靑銅盒, 청동호우)은 보물 제1878호로 높이 18.5cm, 폭 23cm,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와 동일한 글자체와 제작 시점을 명확히 알려주는 명문 내용 등으로 인하여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뒤 2년이 지난 415년(장수왕 3년)이다.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있었던 제사 때에 만들어진 제기(祭器)의 하나로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銙帶)를 출토하는 최고위급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청동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 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나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은령총(銀鈴塚)은 호우총(壺杅塚)의 북편에 위치하고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발굴 당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중형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봉토의 크기는 직경 20m, 높이 5m로 내부구조는 호우총과 비슷한데, 덧널부는 지하에 설치되었으며 호우총보다 대략 30㎝ 정도 깊게 설치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두향(頭向)은 동쪽이며, 머리 쪽에 부장품이 놓여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동관과 금동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쇠솥 등의 금속제용기류, 칠기, 토기 등과 함께 약간의 철제이기류와 은장도, 그리고 마구류 일부가 수습되었다. 피장자는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널 내에 장식된 큰 칼이 없고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주인공은 왕족의 부인 정도로 여겨지며, 그 축조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쌍상총(雙床塚)은 봉분이 원형봉토분으로 노서동(路西洞)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1953년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묘제는 통일신라 초기의 부부합장분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대부분 도굴되었고 널방(玄室) 내에 2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屍床臺)가 발견되어 쌍상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되고 봉분이 훼손당한 것으로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토의 중심에는 남향한 돌방(石室)이 배치되었다. 널방(玄室)은 길이(동~서) 3.3m, 너비(남~북) 3.0m, 높이3.6m의 크기로 네 벽은 지면 위에 잘 다듬은 깬돌(割石)로 쌓았다. 벽들은 바닥에서 2m 높이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나 그 위부터는 내곡(內曲)하며 줄어들게 쌓았고 위에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뚜껑으로 얹었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네 벽을 쌓을 때는 일정한 크기의 깬돌을 사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쌓았고 그 위에는 회를 발랐다. 널방의 바닥에는 회를 깔고 중앙에 벽과 약 30㎝의 거리를 두고 길이, 너비, 두께가 2.3×2.0×0.3m인 주검 받침(屍床)을 설치하였다.
주검 받침은 자연석과 냇돌(川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먼저 북쪽에 너비 1.5m의 주검 받침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덧대어 너비 0.5m의 2차 주검 받침을 설치한 것이다. 주검 받침의 전면에도 회를 발랐는데, 원래의 주검 받침에는 0.9×0.3×0.2m인 6매의 판석에 시신의 머리·몸·다리를 놓을 만큼 조각하여 정교하게 파 놓았다. 제2주검받침에는 돌베게(石枕)와 돌발받침(石足座)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널(木棺)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안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널방의 정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을 달았는데, 널길은 길이, 너비, 높이가 3.0×1.35×1.5m 정도였다. 널문은 길이, 너비, 두께가 1.33×0.55×0.1m 크기로 문주석(門柱石)을 돌출시키고 밑에 문지방석을 놓고는 2매의 가공한 판석비(板石扉)를 달았다.
이 비(扉)에는 귀면(鬼面)으로 된 청동제좌판(靑銅製座板)에 낀 문고리가 하나씩 달렸고, 그 아래에 철제의 빗장이 걸쳐져 있었다. 비에서 1.6m 떨어진 곳부터 널길의 입구까지에 돌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였다. 돌방(石室)의 안에서는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을 비롯한 약간의 토기편만 출토되었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아 마립간기(麻立干期) 신라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마총(馬塚)은 서봉황대 고분의 전면에 배치된 표형분인 134호의 서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도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사한 결과 말뼈와 안구편(鞍具片)이 나왔다 하여 마총(馬塚)으로 불리고 있다. 그 후 1953년 국립박물관이 이 고분과 약 50m 떨어진 쌍상총과 함께 재조사를 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방과 널길 사이에 돌문이 아닌 나무문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고분 모두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조사 시, 봉분은 많이 깎여 나가고 동서와 남북의 직경이 각각 3.4m, 노면에서의 높이는 3.57m만 남아 있었으나 원래 봉분의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정도인 쌍상총과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총(馬塚)의 돌방은 지상에 남향하여 축조되었다. 널방(玄室)은 동서 3.0m, 남북 3.24m, 높이 3.7m의 크기로 남북이 약간 길지만 정방형(正方形)으로 볼 수 있다. 널방의 네 벽은 비교적 크기가 고르고 장방형(長方形)으로 다듬은 깬돌(割石)로 열과 단을 맞추어 위로 올라가며 좁혀 쌓았다.
마총의 조성연대는 통일초기(統一初期)로 판단되고 있으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문에 나무를 사용한 예는 통구지방의 고구려고분인 무용총(舞踊塚)에서 보이고 있어, 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보아 마립간(麻立干)시기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표형분인 미발굴 134호분표형분인 134호분의 호석
138호분 138호분은 조사 전 이미 봉분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원래는 직경이 약 2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하에 무덤 구덩이를 파고 하나의 덧널(木槨)을 설치한 외덧널식이다. 덧널은 길이, 너비, 높이가 3.8×1.5×1.5m 크기로 추정되었고, 장축은 동-서로 두었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에 치우치게 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을 두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반지, 은반지,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 청동정(靑銅鼎), 쇠솥(鐵釜) 등의 금속용기류, 토기류, 쇠투겁창(鐵矛) 등의 철기류, 청동복륜(靑銅覆輪),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피장자는 남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우총(牛塚)은 노서동고분군 서쪽의 평지에 위치하고 7세기 전반에서 후반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와 고이즈미 아키오(小川顯夫)가 영국인 데이비드의 자금지원으로 발굴한 서봉총(노서동 129호) 남분(데이비드총)에 대한 조사성과가 부진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조사된 고분이다. 발굴 후 민가의 담장에 포함되어 있다가 지금은 주변 지역이 정비되면서 개석 1매만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발굴 당시 봉분의 높이는 약 2m 정도로 일부가 잔존하였다. 석실의 벽체가 붕괴되면서 상부에 적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석의 크기는 길이 220㎝, 너비 140㎝, 두께 40㎝의 원반 모양으로 표면에는 작은 원형의 성혈과 홈이 관찰되는 점으로 볼 때, 지석묘의 상석을 가져다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길이 395㎝, 너비 380㎝의 정방형에 가깝고, 현실의 정남쪽 중앙에 연도가 달려있다. 현실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 들어가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내부 안벽에 접한 양쪽 모서리 부분에 각각 1매의 판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관대 시설로 보인다.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이는 벽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무문전은 노서동137호분(쌍상총)에서 조사된 사례처럼 관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도의 길이는 2.6m이고 할석을 이용해 폐쇄하였다. 벽석에는 0.6㎝ 두께로 회를 발랐다. 연도와 현실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미석이 있다. 석실의 내부에서 소뼈가 출토되어 우총이란 별칭이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