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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芬皇寺)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3(634)에 창건한 신라시대 초기 사찰로서 창건 이래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는 사찰로써  백률사, 불국사, 기림사 정도이며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과 원효(元曉)가 머무르면서 불법을 전파하였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전불시대 칠처가람(前佛時代 七處伽藍 :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암사) 중의 하나로 용궁 북 분황사(龍宮 北 芬皇寺)라고 불렀으며, 국가차원의 절로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중요한 절이다. 전불시대 칠처 가람은, 석가모니불 이전의 부처님인 가섭불 시대에 신라 수도 서라벌에 만들어진 일곱 절터에 다시 지은 절을 말하는데, 신라가 인도보다 불교와의 인연이 깊다는 자주적인 종교관이다.

팔각석정(八角石井)과 보광전(普光殿)

분황사의 전각은 세 번의 중건을 하였다. 현재 중심 전각은 보광전(普光殿)으로 팔작지붕에 정면3, 측면2칸의 주심포양식의 법당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조성하였다. 지금 절 모습은 정유재란 이후 계속 유지된 곳으로 추정된다.

보광전(普光殿)은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2칸의 주심포양식의 법당으로 광해군 원년(1609)에 조성하였다.

보광전 안에는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있는데 조선 후기 17세기 금동불입상으로 유일하고 규모가 가장 크다. 1998년 분황사 보광전 해체 수리과정 중 중도리 바닥에서 발견 된 1616년 「분황사상량기(芬皇寺上樑記)」 와 종도리에서 1680년 「부동명활성하분황사중창문(府東明活城下分皇寺重創文)」 묵서(墨書)가 발견되어 이 약사여래입상이 1609년 5,360근의 동을 모아 제작한 불상으로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대형 불상이 대부분 소조(塑造, 진흙)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규모가 커 우람한 형태미를 보이고 있지만, 이와 달리 둥글고 통통한 얼굴에 어깨가 왜소해 전반적으로 동안(童顔)의 형태미를 보여준다. 특히 아이처럼 앳돼 보이는 이목구비는 16세기 불상 양식이, 가슴과 복부가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 등 신체 표현은 17세기 양식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신ㆍ구 양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4 황룡사(皇龍寺)의 종, 분황사(芬皇寺)의 약사(藥師), 봉덕사(奉德寺)의 종 기록에 따르면 신라 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천보(天寶) 13년 갑오(甲午; 754)에 황룡사(皇龍寺)의 종을 주조했는데, 또 이듬해 을미(乙未; 755)에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동상(銅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306,700 근이요, 공장이는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未)이었다.이에 의거하여 분황사에는 신라 최대 불상인 약사여래동상(45m)을 만들었고 황룡사 장육존상(5m)9배 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분황사에는 신라시대 때 호국용이 살았다는 팔각석정(八角石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틀의 높이는 약 70cm이고 외부모양은 팔각이며 내부는 원형이다.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의 진리를 뜻한다.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하다.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 일컫는 팔각석정(八角石井)

원성왕 11년 하서국(河西國) 사신이 세 마리의 용(東池, 靑池, 분황사 우물의 護國龍)을 물고기로 변하게 해서 자기나라로 가지고 가려 했어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 부른다조선시대 때 분황사에 있는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고 한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한 한 행태이다. 현재는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팔각석정(八角石井) 옆에는 고려 19대 명종(1170~1197) 원효대사를 기리기 위해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國帥碑)가 있었으나 현재 차화쟁국사지비적(此和諍國師之碑跡)이라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이 새겨진 비석 받침만이 남아 있다. 화쟁국사(國帥)고려 명종이 원효대사에게 내린 시호(諡號)이다.

화쟁국사비(和諍國帥碑) 받침
화쟁국사비(和諍國帥碑) 받침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어느 때부터 파손되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의 위치는 원래 자리가 아니다.

차화쟁국사지비적(此和諍國師之碑跡)이라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이 새겨진 글자는 마모가 심해서 식별이 어렵다.

그리고 신라 고승 원효 대사가 상당 기간 머물렀던 곳으로 아들 설총이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고 예배하니 돌아봤다는 원효의 고상(顧像)이 고려 말까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신라 경덕왕 때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분황사 좌전 북쪽 벽에 신라의 화성(畵聖) 솔거(率居)가 그린 천수천안관음보살 앞에서 이 아이를 안고 '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 라는 향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며 빌게 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분황사에 대한 발굴조사는 1~ 5(19901995), 6(20009221230)에 걸쳐 시행하였고 15차 조사에는 字形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 배치와 3회에 걸친 금당 변천과정, 회랑지, 석등지 등 다수의 유구를 확인하였다. 6차에는 현재 분황사 외곽담장 동편(황룡사지 전시관부지와 분황사 사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출토유물이 378점이며 기와 및 전돌이 338점으로 가장 많고 토기 및 자기류가 22점이며 청동제 이형장식구 등 금속류가 12, 굽은 옥 등 기타 종류가 6점이다.

분황사 가람배치는 고구려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자형 가람배치 즉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 배치중 금당, 동 금당, 서 금당이 탑을 향하며 동서 금당이 탑을 마주보고 있는 배치이다. 금당이 창건 이후 최소한 같은 자리에서 3회에 걸쳐 확대 또는 축소되면서 절의 방향도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4 분황사 천수대비(芬皇寺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기록에 따르면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난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여기에 左殿이란 右殿에 대응하는 것으로 경덕왕(A.D.742765) 때는 좌우전을 비롯한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 가람배치인 것이다.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當式)에서 일탑일법당식(一塔一金當式) 가람배치로 변하는 시기는 경덕왕 14(755)신라 최대 불상인 분황사 약사여래동상(45m)을 만든 후 이를 모시기 위해서 3법당을 하나의 법당으로 통합하여 중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2차 중건과 3차 중건이 이루어지는데, 법당의 방향도 처음 남향에서 서향으로 바뀌었고 바뀐 이유는 알 수 없다. 3차 중건은 정유재란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은 선덕여왕 때인 634년 창건 때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했으며 현재의 상태는 이때에 복원된 것이다. 이 탑은 한국 전탑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현재 탑신부는 3층만 남아 있으며 벽돌 같은 돌은 회흑색의 안산암이다.

1915년 수리당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각종 옥류와 패류, , 은제 바늘과 침통, 가위 등과 함께 고려시대에 사용하였던 숭녕통보상평오수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의 높이는 탑재들을 종합하여 분석 한 결과 원래는 9층임이 확인되었다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이를 개축하려다 또 허물어졌다고 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올린 것으로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는데 내륙 방향에 있는 2마리는 사자상이고 동해 방향에 있는 2마리는 물개라고 전해지고 있다.

내륙 방향에 있는 사자상

확실하지 않으나 원래는 6마리의 석사자가 있었다고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입구에서 좌측정원에 2구가 있는데 규모가 작은 편이며 형태도 지금의 4마리 사자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헌덕왕릉으로 부터 옮겨온 것으로 보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내 석사자
동해 방향에 있는 물개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이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감실이 있고 문을 만들었고, 그 양쪽에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해 놓았는데 현존하는 인왕상(仁王像) 가운데 조성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7세기 중엽 신라의 통일 이전에 완성되었다.

북쪽 인왕상
동쪽 인왕상

인왕상(仁王像)이 모두 무기를 들지 않고 권법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6구의 상이 X자형의 천의를 입고 있는 古代인왕상(仁王像)으X자형의 천의는 북위시대 양식이다. 그러나 천의 밑으로 드러나는 근육의 표현과 볼륨 있는 양감의 표현, 어린이 같은 신체의 비례는 北齊. 의 양식이다.

남쪽 인왕상
서쪽 인왕상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2 원성대왕(元聖大王)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乙亥; 795)에 당()나라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을 머물러 있다가 돌아갔는데,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廷)에 나와서 아뢴다.
저희들은 동지(東池)청지(靑池; 청지靑池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에 있는 기록을 보면 이 샘은 동해東海의 용이 왕래하면서 불법佛法을 듣던 곳이요 절은 진평왕眞平王이 지은 것으로서 오백五百 성중聖衆과 오층탑五層塔과 전민田民까지 함께 헌납했다고 했다)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그런데 당나라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모두 세 용의 모습을 바꾸어 작은 고기로 변하게 해서 통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나라를 지키는 용을 여기에 머무르게 해 주십시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나라의 세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사형(死刑)에 처할 것이다.” 그제야 하서국 사람들이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 주자, 각각 물속에서 한 길이나 뛰고 기뻐하면서 가 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明哲)함에 감복했다.

삼국유사 의해(意解) 5 원효불기(元曉不羈)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이다.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 불지촌(佛地村) 북쪽 율곡(栗谷)의 사라수(裟羅樹)밑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의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 속언俗言에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 한다)이라고도 한다.

사라수란 것을 속언에 이렇게 말한다. “스님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태기가 있어 이미 만삭인데, 마침 이 골짜기에 있는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였으므로 몹시 급한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서 지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라 했다.” 그 나무의 열매가 또한 이상하여 지금도 사라율(裟羅栗)이라 한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미 중이 되자 그 집을 희사(喜捨)해서 절로 삼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고 했다. 또 사라수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고 했다. 스님의 행장(行狀)에는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조부가 살던 곳을 따른 것이고, <당승전(唐僧傳)>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했다.

상고해 보건대, 인덕(麟德) 2년 사이에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는데 하주는 곧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요, 압량군(押梁郡)은 본래 하주의 속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바로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 스님의 아명(兒名)은 서당(誓幢)이요또 한 가지 이름은 신당(新幢; 은 우리말로 모라고 한다)이다.

석조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으며, 장차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으니, 진평왕(眞平王)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丁丑; 617)이었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스승을 따라 배울 것이 없었다. 그의 유방(遊方)의 시말(始末)과 불교를 널리 편 큰 업적들은 <당승전(唐僧傳)>과 그의 행장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모두 싣지 않고 오직 향전(鄕傳)에 있는 한두 가지 이상한 일만을 기록한다.

스님이 일찍이 어느 날 풍전(風顚)을 하여 거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리겠는가.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석등 하대석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太宗)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貴婦人)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賢人)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이때 요석궁(瑤石宮; 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것이다)에 과부 공주(公主)가 있었는데 왕이 궁리(宮吏)에게 명하여 원효(元曉)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 사천沙川이니 사천沙川을 속담에는 모천牟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또 다리 이름을 유교楡橋라 한다)를 지나다가 만났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원효를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10() 중의 한 사람이다. 방언(方言)으로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六經)과 문학(文學)을 훈해(訓解)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명경(明經)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傳受)해서 끊이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를 잃어 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俗人)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이름했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道具)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 속에 말한, “일체의 무애인(無㝵人)은 한결같이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 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 하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기둥 초석

어느 날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敎化)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 때문에 상추분유(桑樞瓰牖) 확후(玃候)의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陁佛)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元曉)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다 할 것이다.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佛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며 스스로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 빛나게 했다는 이다. 원효도 역시 방언이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鄕言)의 새벽이라고 했다.

그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그쳤다. 또 일찍이 송사(訟事)로 인해서 몸을 백송(百松)으로 나눴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라고 말했다. 또한 바다용의 권유로 해서 노상에서 조서(詔書)를 받아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 했다. 이것은 또한 본시이각(本始二覺)이 숨어 있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이것을 헤치고 와서 종이를 붙였는데 이것은 또한 지음(知音)하여 서로 창화(唱和)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종천(終天)의 뜻을 표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예배하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다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다본 그대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한다.
()해 말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경(三昧境)>의 축()을 열었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1만 거리 바람에 걸었네.
달 밝은 요석궁(瑤石宮)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芬皇寺)엔 돌아다보는 소상(塑像)만 비었네.

삼국유사 감통(感通) 7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아 밤낮으로 약속했다. “먼저 안양(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도록 하지.” 광덕은 분황(芬皇) 서리(西里; 혹은 황룡사皇龍寺에 서거방西去方이 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에 숨어 살면서 신 삼은 것으로 업을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불태우고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다.

석등 하대석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마치고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자는데 관계하려 하자 부인은 이를 거절한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

부인은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륙관(十六觀)을 만들어 미혹(迷惑)을 깨치고 달관(達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기둥 초석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元曉法師)의 처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鍤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 되었다. 삽관법은 원효법사의 본전(本傳)<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속에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대개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
달아, 서방까지 가시나이까,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말씀아뢰소서.
다짐 깊은 부처님께 두 손 모아,
원왕생(願往生)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 남겨 두고 사십팔원(四十八願)이 이루어질까.

석재 파편들

 경주 황룡사지 일대를 구황동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황룡사의 구층탑을 줄여서 구황동이라고도 한다. 또 황룡사, 분황사, 황복사 등 '' 자가 들어가는 절이 아홉 개가 있었다고 해서 구황동이라고도 하고, 또는 진흥왕 때 황룡사터에 신궁을 지으려고 하는데 아홉 마리의 황룡이 나타나 승천하므로 궁궐 대신 절을 세우고 구황동이라 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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