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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암(朱砂庵)은 경주시 서면 부산(富山) 정상 바로 아래 있는 암자로 주사사(朱砂寺)라고도 한다. 부산(富山) 정상의 정상은 바위로 되어있고 그 모습이 장수의 투구 형태다. 그리고 주사암(朱砂庵)은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있다. 즉 ㄷ 자 바위가 주사암(朱砂庵)을 둘러싸고 있으며 대웅전 옆의 주사암(朱砂庵)이 투구의 중앙에 있다.

이러한 형국은 풍수지리학적으로 기운이 투구의 안쪽에 들어가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하여 명당 터 중에 하나다. 그리고 절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입구 양쪽의 커다란 석문이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다.

창건 시기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주암사(朱巖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설화에 의해서 절 이름이 주사암(朱砂庵)이 되었다고 한다.

부산(富山)은 주사산(朱沙山, 朱砂山), 오봉산(五峰山), 오로봉산, 닭벼슬산 등으로 불리고 있다. 동경잡기의 기록에 의하면 품상촌(品上村)의 주산으로 그 산 위에 옛터가 있는데 속칭 장자(長者)의 터라 하였다. 또 용정(湧井)이 있으며 산허리에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10여 명을 수용한 수가 있다고 한다.

현재는 오봉산(五峰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지고 있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시대의 한 도인(道人)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보내고 하였는데,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갑사(甲士)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러서 보니, 단사(丹砂)의 붉은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고, 늙은 승려가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괴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천 명을 보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번 주문(呪文)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 안에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후로 절 이름을 주사암(朱砂庵)이라고 한다.

투구바위 뒷편에 있는 주사굴

또 다른 전설은 신라 문무왕 때 부산성富山城)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절을 성에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사암을 불사처(不死處)라 부르고 있다.

주사암(朱砂庵)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남아 있는 전각과 불상을 볼 때 조선 시대 후기에 중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전각 및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 삼성각 · 종각 · 요사 등이 있고, 국가유산으로는 2007년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경주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대웅전
주사암(朱砂庵)이자 영산전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朱砂庵 靈山殿 石造三尊佛坐像)은 영조 1(1725)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영산전 내에 도금 상태로 봉안되어 있다. 좌우로 협시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우협시보살은 머리에 두건을 쓴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주사암(朱砂庵) 삼성각

주사암(朱砂庵) 마당에서 앞의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 오른쪽으로 200m 정도 가면 평평하고 장엄한 바위를 만난다. 넓이는 100여평 규모로 50~6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으로 이 바위를 마당바위라고 불리고 있다. 또는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

김극기(金克己)의 시서(詩序)에 주암사(朱巖寺) 지맥석(持麥石)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지산(下枝山)은 세속에서 부산(富山)이라 부른다. 산의 남쪽에 주암사란 절이 있고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는데 깍아 지른 듯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과 먼바다를 바라봄에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삼라만상을 내려보는 것 같다. 대석(臺石)의 서쪽에 지맥석(持麥石)이 있는데 사방이 깍아지른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듯 하지만 그 위에는 평탄하여 사람 1백명이 앉을 수 있다.

옛날 대서발(大舒發) 김유신(金庾信) 공이 여기에 보리를 가져와 술 재료를 공급하여 군리들을 대접하던 곳으로, 지금도 말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지맥암(持麥巖)에서 서쪽으로 8, 9 보쯤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

주사암(朱砂庵) 지맥석(持麥石), 마당바위에서 본 풍광

마당바위는 CF, Drama 등 촬영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부산성(富山城)삼국사기663(신라 문무왕 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부산(富山)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으로 성벽의 둘레가 9.7km이다. 삼국유사에도 부산성(富山城)을 쌓은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성 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당나라가 신라의 수도까지 침범할 경우 명활산성, 남산 성, 선도 산성 등과 함께 장기전을 수행하기 위한 산성이었다. 그 이후에는 경주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 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주사암 주차장에서 20m 정도 올라가면 부산의 정상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산석성(夫山石城)으로 나오며, “둘레가 2,7653척이며, 안에는 시내가 넷, 연못이 하나, 우물과 샘이 아홉이 있으며, 또한 군창(軍倉)이 있는데, 영천과 영일의 군창을 아울러 들여다 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중요한 산성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성(富山城)으로 나오며, 이미 반이나 무너졌다는 내용이 있어 잘 관리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현재는 남문 터와 군의 창고 터,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 터, 우물 터, , ,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 터 등이 남아 있다.

주사암에서 보살피고 있는 고양이
세월의 흔적

여근곡(女根谷)은 부산 기슭의 골짜기로 여자의 성기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다. 삼국사기636(선덕여왕 5) 두꺼비가 옥문지에 많이 모여 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왕이 서쪽변경의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에 백제 병사가 숨어 있다고 보아 병사를 보내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근곡(女根谷) 옥문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機三事)에도 옥문곡 이야기가 수록되어있는데 두꺼비가 개구리로, 옥문지가 여근곡으로 바뀌어있고, 그 위치도 변경이 아니라 교외인 건천읍 신평리에 있는 부산 아래라고 되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여근곡이 부 중심지의 서쪽 41리에 있다고 하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을 덧붙였으며, 이후 조선 시대 거의 모든 경주부의 지리지에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주사암(朱砂庵)의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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