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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서동 고분군(慶州 路西洞 古墳群)은 반월성의 북편 일대에 분포하는 경주 중심지구 고분군들 가운데 북서 말단부에 있는 것으로 경주시 노서동 104번지 일대에 해당된다. 고분군 동쪽의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노동동 고분군(路東洞 古墳群)이, 남쪽의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황남동 고분군(皇南洞 古墳群)이 있다.

노서동 고분군(路西洞 古墳)은 13기의 봉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마총(馬塚, 133호분), 우총(牛塚, 131호분),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138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등 8기는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된 유물이나 봉토의 규모로 보아 6세기 때의 신라왕과 왕족의 무덤들로 추정된다.

고분군의 내부구조는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뒤 덧널(목곽)을 설치하고 냇돌과 자갈로 쌓은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내부에 깬돌로 사각형의 널방(석실)을 만들고 널길(연도)을 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금관총(128호분), 서봉총(129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제138호분 무덤들은 신라 때의 것으로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쌍상총(137호분), 마총(133호분), 우총(131호분) 등은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이다.

고분들 가운데 서봉총(129호분), 134호분, 호우총(140호분), 은령총(139호분) 등 4기는 봉분이 표형분(瓢形墳)이고 나머지는 단일원분(單一圓墳)이다. 서북단에 자리한 130호분은 봉황대 고분(鳳凰臺 古墳)보다는 약간 작지만 거분(巨墳)으로 서봉황대 고분으로 불리고 있다.

미발굴 된 고분은  서봉황대(130호분),  132호분,  134호분, 135호분, 136호분 등 5기이다.

금관총(金冠塚, 128호분)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된 고분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되어 신라 고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봉토는 이미 파괴되어 있었는데 발굴 결과 크기는 직경 45m, 높이 12m 정도로 추산되었다.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덧널은 약 40㎝ 깊이로 지반을 파서 설치한 지상식의 외덧널식(單槨式)이었다.

발굴조사 계기는 주막집 증축 터파기 공사 도중 우연히 금관을 비롯한 팔찌와 귀고리, 허리띠 등 온갖 황금제품이 쏟아져나왔다. 즉 1921년 9월 23일 노서리에 있는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있던 주막(酒幕)집에서 뒤뜰을 확장하려고 폐고분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금관총 유적지에 보존보호를 위해 돔형 전시공간을 구축
금관총의 돔형 전시공간과 뒤에 보이는 봉황대 고분

본격적인 조사는 일부 유물 유실과 봉토가 훼손 된 후 진행되었는데  당시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경찰서장 입회하에 발굴조사를 하였다. 모로시카를 비롯해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그리고 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등과 함께 9월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9월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 만에 발굴이 완료되었다.

금관총은 비전문가에 의해 4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를 정확히 밝히는 데 부족한 점이 많다.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물만 수습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발굴 후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古)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덧널의 크기는 길이, 너비가 4.8×2.1m로 추정하였으나 천마총 등과 비교하면 너무 작게 추정된 것으로 원래는 이중의 덧널식인데 내부 덧널만 조사되었고 그 크기가 그러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무널(木槨)은 약 2.5×1.0m의 크기로 칠(漆)을 한 것이다.

유물로는 금관, 금제허리띠(金製銙帶) 등의 각종 장신구, 금동말안장(金銅鞍橋), 옥충(玉蟲)을 장식한 발걸이(子) 등의 마구류, 금제완(金製완), 청동초두(靑銅斗) 등의 귀금속용기와 유리용기, 토기류, 각종 철제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말엽으로 추정되고 있고, 피장자는 남자라는 주장과 여자라는 주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큰 칼의 출토상태로 보아 남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금관총(2015)과 금령총(2018~2020)을 재발굴하였는데 금관총 재발굴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의 ‘칼끝장식’ 1점이 나왔고 2013년에도 금관총 유물의 보존처리 도중 ‘이사지왕’ 명문 고리자루큰칼 2점을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금관총에서만 출토된 3점의 ‘이사지왕’ 명문 칼이 나왔는데 금관총의 주인공, 즉 피장자는 이사지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는 ‘이사지왕’이 보이지 않는다.

‘이사지왕(尒斯智王)’ 명문이 찍힌 고리자루큰칼 (국립경주박물관)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서봉총(瑞鳳塚)은 세 번째 금관이 출토된 고분으로 봉분은 표형분(瓢形墳, 쌍분)이고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1926년에 발굴조사를 했다. 표형분(瓢形墳, 쌍분)은 북분과 남분으로 구성되고 남분을 먼저 발굴을 했고 데이비드 총이라고도 불리는데 영국인 퍼시빌 데이비드(Percival David, 1892~1964)가 발굴 자금을 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봉총(瑞鳳塚, 129호분)

발굴 결과 금령총보다 많은 신라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고 당시 발굴 현장을 방문한 스웨덴 황태자를 기념하여 서봉총으로 명명되었다.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취하고, 출토된 신라 금관 장식 가운데 봉황새 모양 장식이 있어 봉황(鳳凰)의 「봉」자를 취해서 「서봉총」이라 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은 금관총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m의 거리를 두고 있다.

현재 서봉총(瑞鳳塚) 자리에는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고 표형분(瓢形墳, 쌍분) 모양의 흔적만 남아 있다.
서봉총의 발굴조사는 금령총의 발굴조사 2년 후인 1926년에 역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관총, 금령총이 먼저 발굴되어 금관이 출토되어서 경주 노동리, 노서리 일대에 분포한 신라 무덤에는 금관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고 믿어왔다.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시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나라의 옛 사찰과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그리스, 로마 등의 고분 발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발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일본은 마침 경주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라 고분 발굴 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당시 일본 교토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하마다가 황태자를 안내하여 발굴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고 신라 무덤이 일본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된 셈이다.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때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되어 있어 그 용지를 매립해야 했다. 이때 매립 할 흙이 필요하게 되자, 서봉총의 봉토 흙이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의 매립에 사용되었다.

출토 유물로는 봉황모양장식을 얹은 금관을 비롯한 유리제팔찌, 금제굵은고리드리개(金製太環垂飾) 등의 각종 장신구, 청동초두(靑銅斗), 칠도각병(漆塗角甁), 유리그릇을 비롯한 각종 용기류, 각종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가운데 “연수원년(延壽元年) 신묘년(辛卯年) 3월에 이 은합을 만들었다”라는 명문이 있는 은합(銀盒)이 출토되어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연수원년은 451년 또는 511년으로 추정되는데 451년이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분은 이보다 늦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이고 피장자는 여성 왕족묘로 추정된다.

서봉황대 고분(130호분)
서봉황대 고분은 직경이 거의 80m에 달하고 신라 마립간기 말기인 6세기 초의 왕릉일 가능성이 크다. 봉토의 상면에서 함몰 현상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아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서봉황대 고분(미발굴 130호분)
미발굴 132호분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호우총은 남쪽에 배치되어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유적으로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발굴하였고 두 고분 모두 표형분(瓢形墳)이다.

봉토의 크기는 직경 16m, 높이 4m 정도로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금속용기류, 마구류,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출토된 청동합(靑銅盒, 보물 제1878호) 바닥에는 "을묘년(乙卯年) 국강상(國罡上) 광개토지(廣開土地) 호태왕(好太王) 호우십(壺杅十)"이라는 4줄 16자의 명문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이 이름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호우총이라 명명하였다.

호우총(壺杆塚, 140호분)

이 청동합(靑銅盒, 청동호우)은 보물 제1878호로 높이 18.5cm, 폭 23cm,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와 동일한 글자체와 제작 시점을 명확히 알려주는 명문 내용 등으로 인하여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유물이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뒤 2년이 지난 415년(장수왕 3년)이다.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있었던 제사 때에 만들어진 제기(祭器)의 하나로 고분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출토유물로 보아 이 고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金製銙帶)를 출토하는 최고위급보다는 한 단계 낮은 신라 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청동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 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나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은령총(銀鈴塚, 139호분)
은령총(銀鈴塚)은 호우총(壺杅塚)의 북편에 위치하고 봉분은 표형분(瓢形墳)으로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발굴 당시 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중형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46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봉토의 크기는 직경 20m, 높이 5m로 내부구조는 호우총과 비슷한데, 덧널부는 지하에 설치되었으며 호우총보다 대략 30㎝ 정도 깊게 설치되어 있었다. 피장자의 두향(頭向)은 동쪽이며, 머리 쪽에 부장품이 놓여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금동관과 금동귀고리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쇠솥 등의 금속제용기류, 칠기, 토기 등과 함께 약간의 철제이기류와 은장도, 그리고 마구류 일부가 수습되었다. 피장자는 가는 고리 귀고리(細環耳飾)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널 내에 장식된 큰 칼이 없고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주인공은 왕족의 부인 정도로 여겨지며, 그 축조연대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쌍상총(雙床塚)은 봉분이 원형봉토분으로 노서동(路西洞) 고분군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1953년 국립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묘제는 통일신라 초기의 부부합장분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대부분 도굴되었고 널방(玄室) 내에 2개의 덧붙여진 주검 받침대(屍床臺)가 발견되어 쌍상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분은 조사 전에 이미 도굴되고 봉분이 훼손당한 것으로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토의 중심에는 남향한 돌방(石室)이 배치되었다. 널방(玄室)은 길이(동~서) 3.3m, 너비(남~북) 3.0m, 높이3.6m의 크기로 네 벽은 지면 위에 잘 다듬은 깬돌(割石)로 쌓았다. 벽들은 바닥에서 2m 높이까지는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나 그 위부터는 내곡(內曲)하며 줄어들게 쌓았고 위에 1매의 커다란 판석을 뚜껑으로 얹었다.

쌍상총(雙床塚, 137호분)

네 벽을 쌓을 때는 일정한 크기의 깬돌을 사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쌓았고 그 위에는 회를 발랐다. 널방의 바닥에는 회를 깔고 중앙에 벽과 약 30㎝의 거리를 두고 길이, 너비, 두께가 2.3×2.0×0.3m인 주검 받침(屍床)을 설치하였다.

주검 받침은 자연석과 냇돌(川石)을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먼저 북쪽에 너비 1.5m의 주검 받침을 설치하였고 여기에 덧대어 너비 0.5m의 2차 주검 받침을 설치한 것이다. 주검 받침의 전면에도 회를 발랐는데, 원래의 주검 받침에는 0.9×0.3×0.2m인 6매의 판석에 시신의 머리·몸·다리를 놓을 만큼 조각하여 정교하게 파 놓았다.
제2주검받침에는 돌베게(石枕)와 돌발받침(石足座)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널(木棺)을 사용하지 않고 시신을 바로 안치한 것으로 판단된다.

널방의 정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을 달았는데, 널길은 길이, 너비, 높이가 3.0×1.35×1.5m 정도였다. 널문은 길이, 너비, 두께가 1.33×0.55×0.1m 크기로 문주석(門柱石)을 돌출시키고 밑에 문지방석을 놓고는 2매의 가공한 판석비(板石扉)를 달았다.

이 비(扉)에는 귀면(鬼面)으로 된 청동제좌판(靑銅製座板)에 낀 문고리가 하나씩 달렸고, 그 아래에 철제의 빗장이 걸쳐져 있었다. 비에서 1.6m 떨어진 곳부터 널길의 입구까지에 돌을 쌓아 입구를 폐쇄하였다. 돌방(石室)의 안에서는 인화문토기편(印花文土器片)을 비롯한 약간의 토기편만 출토되었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돌무지덧널무덤으로 보아 마립간기(麻立干期) 신라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마총(馬塚)은 서봉황대 고분의 전면에 배치된 표형분인 134호의 서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도굴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사한 결과 말뼈와 안구편(鞍具片)이 나왔다 하여 마총(馬塚)으로 불리고 있다. 그 후 1953년 국립박물관이 이 고분과 약 50m 떨어진 쌍상총과 함께 재조사를 하였는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방과 널길 사이에 돌문이 아닌 나무문을 설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고분 모두 통일신라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총(馬塚, 133호분)

조사 시, 봉분은 많이 깎여 나가고 동서와 남북의 직경이 각각 3.4m, 노면에서의 높이는 3.57m만 남아 있었으나 원래 봉분의 크기는 직경 17m, 높이 5m정도인 쌍상총과 거의 같은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총(馬塚)의 돌방은 지상에 남향하여 축조되었다. 널방(玄室)은 동서 3.0m, 남북 3.24m, 높이 3.7m의 크기로 남북이 약간 길지만 정방형(正方形)으로 볼 수 있다. 널방의 네 벽은 비교적 크기가 고르고 장방형(長方形)으로 다듬은 깬돌(割石)로 열과 단을 맞추어 위로 올라가며 좁혀 쌓았다.

마총의 조성연대는 통일초기(統一初期)로 판단되고 있으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널문에 나무를 사용한 예는 통구지방의 고구려고분인 무용총(舞踊塚)에서 보이고 있어, 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무덤의 피장자는 주변의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보아 마립간(麻立干)시기 왕족의 후예로 추정할 수 있다.

표형분인 미발굴 134호분
표형분인 134호분의 호석

 

138호분
138호분은 조사 전 이미 봉분이 거의 파괴되었으나 원래는 직경이 약 20m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지하에 무덤 구덩이를 파고 하나의 덧널(木槨)을 설치한 외덧널식이다. 덧널은 길이, 너비, 높이가 3.8×1.5×1.5m 크기로 추정되었고, 장축은 동-서로 두었다. 덧널 안에는 약간 서쪽에 치우치게 하여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피장자를 안치한 나무널을 두었다.

출토유물로는 금제귀고리(金製耳飾), 금반지, 은반지, 은제허리띠(銀製銙帶) 등의 장신구류, 청동합, 청동정(靑銅鼎), 쇠솥(鐵釜) 등의 금속용기류, 토기류, 쇠투겁창(鐵矛) 등의 철기류, 청동복륜(靑銅覆輪), 발걸이(鐙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피장자는 남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우총(牛塚)은 노서동고분군 서쪽의 평지에 위치하고 7세기 전반에서 후반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묘제는 횡혈식석실묘(굴식돌방무덤)으로 대부분 도굴되어 자세히 알 수 없다.
1929년 조선총독부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와 고이즈미 아키오(小川顯夫)가 영국인 데이비드의 자금지원으로 발굴한 서봉총(노서동 129호) 남분(데이비드총)에 대한 조사성과가 부진하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조사된 고분이다. 발굴 후 민가의 담장에 포함되어 있다가 지금은 주변 지역이 정비되면서 개석 1매만 있다.

우총(牛塚, 131호분)

발굴 당시 봉분의 높이는 약 2m 정도로 일부가 잔존하였다. 석실의 벽체가 붕괴되면서 상부에 적석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개석의 크기는 길이 220㎝, 너비 140㎝, 두께 40㎝의 원반 모양으로 표면에는 작은 원형의 성혈과 홈이 관찰되는 점으로 볼 때, 지석묘의 상석을 가져다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은 길이 395㎝, 너비 380㎝의 정방형에 가깝고, 현실의 정남쪽 중앙에 연도가 달려있다. 현실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좁아 들어가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현실의 내부 안벽에 접한 양쪽 모서리 부분에 각각 1매의 판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관대 시설로 보인다.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이는 벽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무문전은 노서동137호분(쌍상총)에서 조사된 사례처럼 관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도의 길이는 2.6m이고 할석을 이용해 폐쇄하였다. 벽석에는 0.6㎝ 두께로 회를 발랐다. 연도와 현실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미석이 있다. 석실의 내부에서 소뼈가 출토되어 우총이란 별칭이 붙었다.

미발굴 135호분
미발굴 136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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