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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필요한 산림자원을 보호 및 육성하기 위해 봉산(封山) 또는 금산(禁山)으로 지정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금표(禁標)나 봉표(封標) 등 표석을 설치하였다. 산림은 주로 소나무 숲을 의미하는데 특히 황장목(黃腸木, 또는 금강송)은 소나무 중에서도 몸통 속 부분이 누런색을 띠고,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서, 주로 왕실의 관을 만들 때 사용되었던 나무이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에서 2008년도부터 조선왕조실록, 속대전, 만기요람 등 문헌에 나와 있는 황장금표 및 봉산표석에 대해 전국 일제조사를 시작하여 2009년도에 22개소를 발굴하였다.

경주시 동경주(양남면, 양북면, 감포읍)에는 봉표가 3개소에 있으며 양북면에 2개소로 불령봉표, 시령봉표, 양남면에 1개소로 수렴포봉표가 있다. 봉표내용은 연경묘(延慶墓)의 제사에 사용 될 향불을 피우는 데 쓰는 숯을 만들기 위해 봉산을 지정하고 봉표를 설치했다는 내용이다.

延慶墓香 炭山因 啓下 佛嶺, 柿嶺, 水念浦 封標

연경묘 제사에 사용하는 향불을 피우는 데 쓰는 숯을 만들기 위한 산이므로 임금의 명에 의해 불령, 시령, 수렴포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연경묘(延慶墓)는 제23대 순조의 큰아들 효명세자(1809 1830)의 묘호이다. 1809년에 태어났으며 순조 123세에 왕세자에 책봉돼 효명세자로 불렸는데,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부터 왕위 계승을 위한 대리청정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승하해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대리청정 33개월 만이고 순조는 4년 후 세상을 떴다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즉위 후 추존왕(追尊王) 익종()으로 추대되었고 연경묘에서 수릉(綏陵)으로, () 형식에서 능() 형식으로 바뀌었다. 이후 고종 때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됐고 지금의 봉표는 헌종이 익종으로 추대 전에 설치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릉)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있고 부인 신정황후와 같이 합장되어 있다.

효명세자는 당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버지 순조를 도와 왕권을 강화하던 중이었다. 외가인 안동 김씨 세력을 배척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역대 세자 중 예술문화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고 특별히 춤사위를 즐겼다 한다. 궁과 종묘에 쓸 연향 등을 새로 만들고 발굴했으며 대규모 연회를 열기도 해 조선 궁중 향연의 절정기를 이루게 했다. 일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국가적 시위로 해석된다.

효명세자의 부인 신정황후 조씨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2세에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돼 세자빈이 됐으며 효부라 칭찬을 받았다. 효명세자 승하 3년 전에 유일한 자식인 헌종을 낳고 왕실생활 11년 되던 해 남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23세에 홀로 돼 82세까지 장수했다.

그러나 장수는 했지만 그것이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신정황후는 시어머니 순원황후의 안동 김씨 세력과 자신의 친정 세력인 풍양 조씨 사이에서 세력 다툼의 주역이 됐고 조선 왕실을 손아귀에 넣고 군림했던 그녀는 조선 왕실을 패망하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

조선후기 세도정치에 의한 무분별한 봉표 시행으로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하여 원성이 너무나 컸었다. 백성들은 산에서 땔감을 구하고, 산나물과 약초를 캐고 필요한 나무를 벌목하는데 이를 금지하니 가렴주구 하는 고을 탐관오리에 의해 가뜩이나 힘든 삶에 백성들은 한층 도탄에 빠졌었다. 이에 경주부윤 노영경이 이 폐단을 한때 철폐하여 많은 백성으로 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경주보문단지에서 동해구 방향에 있는 문무대왕암이나 감은사지로 가려면 동대봉산 또는 추령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동대봉산 또한 봉산으로 지정 된 산으로 수군의 조선용 목재를 사용하기 위함으로 이 또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구전민요를 살펴보면 백성들의 가슴 태우는 원한을 노래 가락을 통해 풀고자 함을 알 수가 있다.

불 붙었네 불 붙었네 동대봉산 불 붙었네.

동대봉산 붙은 불은 동해 불로 끄련마는

요내 가슴 붙은 불은 어느 님이 꺼줄는고.

왕의 길에서 만난 불령봉표

양북면 호암리 불령이라는 고개에 있는 봉표는 인근 봉표 중 글자가 가장 선명하다. 예전에는 절터가 있었으며 절 이름은 알 수 없고 이곳 에서 발견 된 목 없는 석불은 현재 기림사 성보박물관 입구에 있다. 또한 기림사와 불국사 스님들이 불령을 통해 서로 왕래하였다.

왕의 길(반월성추원모차골서낭당 고개세수방불령재용연기림사대왕암)은 신라 문무대왕의 장례길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제를 지내기 위해 감은사와 문무대왕암까지 수레를 타고 지나가는 길이였다.

지금은 트레킹코스로 유명하다. 호암마을 앞산에는 마치 입을 벌린 범처럼 생긴 기이한 바위가 있어 그 바위의 이름을 범바위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호암" 혹은 범바우라 불렀다고 한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너머 가는 옛길에서의 시령봉표

양북면 용동1리 감골에는 옛날 포항 장기로 넘어가는 길이 있어 이곳 마을사람들이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교통발달로 다니는 이는 없다. 용동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龍洞이라 불렀다. 마을에서 계곡 천을 따라 30 ~ 40분 정도 올라가면 볼 수 있는데 원래 위치는 알 수 없고 물가에 위치하고 있어 인근 봉표 중 마모가 가장 심하여 글자를 식별하기가 어렵다.

 

별을 보기 좋은 어촌마을에서의 수렴포봉표

양남면 수렴1리 국도31번 해안도로와 인접한 곳에 있다. 조그만 텃밭에 묻혀 있어 전체 글자를 볼 수 없고 주변 봉산으로 지정 될 만한 큰 산이 없어 실효성이 궁금하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병의 병영을 가졌던 곳이라 하여 수영포리라 하였는데 1914년에 행정리명을 수렴리라 하였다. 옛날 왜적의 침입이 많은 곳이라 마을 사람들의 기질이 강하고성공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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