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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일원(24,304)에 위치한 망덕사지(望德寺址)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1금당 쌍탑 가람 중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지었는데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 사신인 예부시랑 악붕귀를 파견하였고 이를 속이기 위하여 사천왕사 건너편에 신문왕 4(684)에 건립된 사찰로 효소왕 1(692)에 낙성식을 하였다. 절의 이름은 악붕귀가 말한 망덕요산(望德樂山)의 절이라 하여 망덕사라고 하였다.

망덕사지는 낭산 자락에 위치한 사천왕사지의 남쪽에 돌출된 독립 구릉 위에 위치하는데, 삼국유사에 기록된 창건 연기 설화를 살펴보면 사천왕사와 창건연기를 함께 하고 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당나라의 사신이 장차 올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듣고 이 절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해서 따로 그 남쪽에 새 절을 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먼저 황제를 축수하는 곳인 천왕사에 분향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를 새 절로 인도해 보였더니, 그 사신은 문전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고 하면서 끝내 들어가지 않으므로 국인이 금 1천냥을 주었다. 그 사신이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명을 새 절에서 축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사신의 이 말로 인해 망덕사라고 하였다.

망덕사지 ( 望德寺址 )  당간지주 ( 幢竿支柱 ,  보물 제 69 호 )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 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 터와 강당 터, 남쪽으로 중문 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 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 터 남쪽에 계단 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69)가 그대로 남아 있다특히 ·서 목탑 터는 사청왕사지의 동·서 목탑 터와 함께 신라 목탑 구조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망덕사는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당시 서라벌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이다.

망덕사지 일원 토지는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소유하고 있었지만, 해방 이후 민간에 불하되었다. 이에 현재는 금당지, 동탑지, 당간지주 주변만 국유지로 남았고, 사역 주변 대부분은 민간에서 경작지로 이용하고 있다.

1965년 망덕사지 남쪽의 경작지에서 석제 계단 터가 발견되었는데 절로 오르기 위한 시설로 그 높이는 3m 정도로 추정된다. 불국사와 같이 사찰 전면에 설치된 축대 앞에 만들어졌고 계단의 양쪽에는 높이 90, 한 변 너비 14의 팔각기둥이 세워졌다. 

망덕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문화재관리국이 2차례 조사하였다. 1차 발굴조사(1969. 11. 1118)에서는 동·서 목탑 터와 회랑 터의 확인에 주력하였고, 2차 발굴조사(1970. 4. 127)에서는 금당, 북회랑 터, 동회랑 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편, 귀면와, 명문전, 고려시대 청동정병과 개원통보1점등이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사찰 규모는 남쪽 진입계단을 제외한 중문지를 기점으로 가로 약 62.105m, 세로 약 67.997m이고, 전체 면적은 약 4,223이다.

망덕사지에서 본 낭산

망덕사지의 전체 가람구조는 가장 남쪽 단애 면에 사찰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계단이 있고, 그 북쪽에 중문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그 북쪽으로 동서 목탑(3×3)이 각각 위치하고, 금당(5×3)과 강당(7×3칸 추정)이 동서 중심축선상에 남북으로 각각 차례대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남편에는 회랑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금당과 동·서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당은 정면 5, 측면 3칸의 건물로, 기단의 전체의 규모는 약 16.3×12.4m이고 7세기 후반에 조성되어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각각 한 번의 중창이나 대규모 개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망덕사지 금당터

, 서 목탑은 금당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18.4m 이격된 지점에서 동, 서로 약 16.6m 떨어진 곳에 각각 위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서 목탑은 모두 정면 3, 측면 3칸의 정방형건물로 추정되며, 현재 탑지 중심에는 팔각의 심초석이 남아있다.

사천왕사 목탑과 망덕사 목탑을 비교했을 때, 가장 차이나는 것이 단층기단과 이중기단이라는 점이다. 사천왕사 목탑, 감은사 금당 등은 모두 이중기단으로 조성되어 건물의 격을 더욱 높인 듯하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망덕사의 경우 목탑과 금당이 모두 단층기단으로 확인된다.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신라 중대 왕실사찰이자, 성전사원으로 당시 신라에서 사격이 가장 높았던 사찰 중 하나이다.

망덕사지 동 목탑 터

특히 망덕사는 효소왕이 낙성식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창건 배경 등을 고려해 볼 때, 앞의 사찰보다는 사격이 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한편으로는 삼국시대 조성된 황룡사 금당이나 통일직후 679년에 조성된 사천왕사, 그리고 682년에 조성된 감은사 금당까지는 모두 이중기단인 것에 비하여, 685년 혹은 692년 조성된 망덕사 금당, 751년경 조성된 불국사 금당(현 대웅전)의 경우 모두 단층기단을 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 주요 사찰의 건물 기단이 이중기단에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는 시점이 망덕사가 조성되는 시점이 아닌지 추정되고 있다.

망덕사와 관련된 사료 내용은三國遺事三國史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창건 연기 설화와 목탑의 흔들림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먼저 三國史記에 나오는 주요한 기록을 살펴보자.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神文王

신문왕 5(685) 여름 4월에 망덕사가 완성되다.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孝昭王

효소왕 11(702)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서 장사지냈다. 舊唐書에는 장안2(702)에 이홍(理洪)이 죽었다고 하고, 여러 고기에는 임인년(702) 727일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대족3(703)에 죽었다고 한다. 資治通鑑이 잘못되었다.

卷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경덕왕 14(755) 봄 망덕사 탑이 흔들렸다. 당의 영호징(令狐澄)新羅國記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당을 위해 이 절을 세웠던 까닭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두 탑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고, 높이는 13층이다.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 하기를 며칠 동안 그러하였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니었을까?

三國遺事에 나오는 주요한 기록을 보자.

卷第一, 紀異 第一 奈勿王 金堤上

처음 제상이 출발하여 떠날 때에 제상의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망덕사 문 남쪽의 모래 언덕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울부짖었다. 그런 까닭에 그 모래언덕을 장사(長沙)라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그 부인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부인이 두 다리를 뻗쳐 일어서지 않으려 했다. 이에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불렀다. 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하는데 지금도 사당이 있다.

卷第五, 感通 第七 眞身受供

장수(長壽) 원년 임진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망덕사(望德寺)를 처음 세워 당 황실의 덕을 받들게 하였다. 뒤에 경덕왕(景德王) 14년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이 있었고, 신라인들이 말하기를 당 황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卷第五, 感通 第七 善律還生

망덕사의 중 선율(善律)은 보시 받은 돈으로 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공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갑자기 명부의 쫓김을 받아서 저승에 이르렀다. 명사(冥司)가 묻기를 너는 인간세계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라고 하니 선율이 빈도는 말년에 大品經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공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사가 너의 수록(壽籙)은 비록 다 되었으나 뛰어난 소원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인간세계로 돌아가 보전을 완성하여라.”라고 하고 곧 놓아 돌려보냈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이라는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이른다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 망덕사터 서쪽에 65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표면에 아무런 조각과 장식을 두지 않는 대신, 지주 바깥면의 모서리를 윗부분부터 줄어들게 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내었다. 기둥머리는 안쪽 측면에서 바깥 면으로 내려오면서 곡선을 그리며 외부로 6쯤 깎여져 경사를 이루고 있고, 안쪽 윗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만들었다.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이른다.

각 면에 비록 조각은 없으나 소박하고 웅장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망덕사는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685)에 창건된 사찰인데 이 당간지주도 당시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는 높이 2.9m로 망덕사터 서쪽에 65㎝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장사(長沙)와 벌지지(伐知旨)

장사는 남천에 있는 모래언덕으로 신라의 충신 박제상(김제상)이  왜국으로 떠날때 그의 부인이 슬픔에 못이겨 울부짖으며 혼절한 곳이다.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자.

신라의 17대 내물왕(奈勿王) 36년에 일본 왕이 보낸 사신이 찾아왔다. 왕자를 일본에 포로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내물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美海)왕자를 일본으로 보냈다. 이후 미해왕자는 30년 동안 신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내물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이 된 눌지왕은 미해왕자를 그리워했다. 이 말을 들은 김제상은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김제상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쫓아갔지만 이미 배가 출발한 후였다.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모래밭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울었는데, 이곳을 장사(長沙)’라고 부른다. 일본에 도착한 김제상은 신라를 도망쳐 나왔다는 말로 일본의 왕을 속여 환심을 산다. 이후 미해왕자를 배에 태워 신라로 보냈다. 이 사실을 안 일본의 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한편 김제상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불렀다. 이후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후 김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천(南川)은 경주시 외동읍 신계리와 괘릉리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월성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주시내를 중심으로 남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남천이 아니라 문천(蚊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문천은 순우리말 이름인모그내를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며, 경주시내 남쪽의 남천을 일컫는 고유 명칭 중 하나이다. 두 문헌에는 사천(沙川)이라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는 경주시내 남쪽의 남천하상이 주로 모래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치술령 부근에 망부석(望夫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박제상의 아내가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어서 변한 돌 이라는뜻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는 치술령이 경주 중심지의 남쪽 36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망부석 부근에는 치술신모에게 제사지내던 무제당터 또는 신모사터가 전해지고 있다.

진신수공(眞身受供),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말라!

장수(長壽) 원년 임진(壬辰; 692)에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망덕사(望德寺)를 세워 당나라 제실(帝室)의 복을 받들려 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14(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은 말했다. “당나라 제실을 위하여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 영험이 있을 것이다.”

8년 정유(丁酉)에 낙성회(落成會)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는데, 한 비구(比丘)가 몹시 허술한 모양을 하고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했다. “빈도(頻度)도 또한 이 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말석(末席)에 참여하게 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구승이 대답한다. “비파암(琵琶嵓)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갔다. 왕이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언덕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곳을 향해 멀리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남산(南山) 삼성곡(參星谷), 혹은 대적천원(大磧川源)이라고 하는 돌 위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가 와서 복명(復命)하자 왕은 드디어 석가사(釋迦寺)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 자취가 없어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

음식 만들어 중을 대접하고 옛 친구 불렀네.

이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게 비치리.

선율환생(善律還生), 선율(善律) 환생하여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완성하다.

망덕사(望德寺) 중 선율(善律)은 시주받은 돈으로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했다. 공사가 아직 끝나기 전에 갑자기 음부(陰府)의 사자에게 쫓겨서 명부(冥府)에 이르니 명사(冥司)가 물었다. “너는 인간 세계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했느냐.” 선율이 말한다. “저는 만년에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만들려 하다가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왔습니다.” 명사는 너희 수록(壽籙)에 의하면 네 수는 이미 끝났지만 가장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했다니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보전(寶典)을 끝내어 이루도록 하라.” 하고 놓아 보냈다.

돌아오는 도중에 여자 하나가 울면서 그의 앞에 와 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역시 남염주(南閻州)의 신라 사람이온데 부모가 금강사(金剛寺)의 논 1()를 몰래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명부(冥府)에 잡혀 와서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이 일을 우리 부모에게 알려서 속히 그 논을 돌려주도록 해 주십시오.

또 제가 세상에 있을 때에 참기름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도 이불 틈에 감추어 둔 것이 있습니다. 법사께서 부디 그 기름을 가져다가 불등(佛燈)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아 경폭(經幅)으로 써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苦惱)를 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율이 말했다. “그대의 집은 어디 있는가.” “사량부(沙梁部) 구원사(久遠寺) 서남쪽 마을입니다.” 선율이 이 말을 듣고 곧 떠나서 도로 살아났다.

그 때는 선율이 죽은 지 이미 열흘이 되어 남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으므로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외치니, 지나가던 목동(牧童)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렸다. 절의 중이 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내니 선율은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는데 여자는 죽은 지가 15년이나 되었으나 참기름과 베는 완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선율이 여자가 말한 대로 명복을 빌어 주니 여자의 영혼이 찾아와서 말한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반야경(般若經)>을 서로 도와서 완성시켰다. 그 책은 지금 동도(東都) 승사서고(僧史書庫) 안에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는 그것을 펴서 전독(轉讀)하여 재앙을 물리쳤다.

부럽도다. 우리 스님 좋은 인연 따라,

영혼이 돌아와서 옛 고향에서 노니시네.

부모님이 나의 안부(安否) 물으시거든,

나 위해서 빨리 그 논을 돌려주라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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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로사는 강릉의 명물로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은 공장형 커피 전문점으로 산지에서 직접 구해온 커피원두를 볶고 추출해 판매까지 한다. 2002년 강릉에서 커피 로스터리 공장으로 시작하여 전국 15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처음에는 커피를 볶아 카페와 호텔, 레스토랑 등에 공급하는 로스팅 팩토리로 시작했다.

전 세계 산지 곳곳을 직접 찾아가 품질 좋은 원두를 선별하여 산지와 직거래 방식으로 하고 있다. 테라로사는 ()학산의 커피브랜드로 사업영역은 원두 도소매, 매장운영, 장비판매 3가지이다. 한국공식수입원으로 에스프레소 머신인 시네소와 로스팅 머신인 페트론치니를 판매하고 있다.

학산 김용덕 대표는 상고 출신으로 은행원 생활 20년을 했고 IMF 때 명예퇴직 하여 고향인 강릉에서 커피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가톨릭 관동대학교와 영동대학교에서 강사, 겸임교수로 강의를 했었다. 커피품평대회인 뛰어난 컵(Cup of Excellence)' 국제심판관으로 활동한 바 있고, 한국 스페셜티 커피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테라로사는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있다. 지방 근무자에게는 아파트를 제공하고 직원들에게 커피경영 능력을 배양하고자 경영대학원(MBA)이나 관련 대학원 진학을 장려하고 학비를 전액 지원한다. 모든 직원이 1년에 2차례 해외 커피유학을 가게 한다.

이러한 회사 분위기로 장기근속자가 늘어나고 있고 뛰어난 컵(Cup of Excellence)’에 국내 최초로 가장 많은 국제심판관을 등록했다임직원들은 바리스타(58%)와 베이커리(15%), 생산 제조팀(8%) 등 인력 그룹으로 이뤄져 있다.

테라로사는 빨간 벽돌 건물로 내부는 커피를 가는 그라인더와 커피액 농축기 같은 물품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어 커피 공장에 온 느낌을 준다. 외부는 싱그러운 수풀이 우거져 있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은은한 커피향과 맛을 즐길 수 있다.

제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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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산(金谷山, 467m) 동쪽 산기슭 높은 대지 위에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 현곡면 나원리 672번지)은 신라 41대 헌덕왕 때 건립한 난원사(蘭原寺) 터에 있는 석탑이다. 탑이 있는 산줄기 북쪽에는 1970년대까지 민가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탑 앞 남서쪽 협곡에는 1975년에 세운 나원사(羅原寺)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또한 헌덕왕 때 대각사가 대각료(大覺寮)를 짓고 국운창달을 기원하던 곳으로 이곳에 보리림(菩提林)이 있었다고 한다.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제39)은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어 신라 8(八怪) 중 하나인 나원 백탑(羅原 白塔)이라고 부른다. 나원리 마을에서는 계탑(溪塔)이라고도 부른다.

신라 8괴는 남산부석(南山浮石), 문천도사(蚊川到沙), 계림황엽(鷄林黃葉), 금장낙안(金丈落雁), 백률송순(栢栗松筍), 압지부평(鴨池浮萍), 나원백탑(羅原五層石塔), 불국영지(佛國影池) 등 경주에 있는 8가지 괴이한 것을 말한다.

나원리(羅原里)는 배씨 성을 가진 이가 개척했다고 하고 이름의 유래는 신라 헌덕왕 때 건립한 난원사(蘭原寺)에 의해 난원이 됐다가 나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절을 세울 때 앞들에 소가 있었고 소 주위에 난초가 무성하여 절 이름을 난원사(蘭原寺)라 하였고 마을 이름도 난원, 난원리로 불렀다고 한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난원(蘭原)을 나원(羅原)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탑 서쪽은 산줄기로 건물이 들어설만한 공간이 없고 동편으로는 경작지로 넓은 공간이 있어서 금당(金堂) 또는 전각(殿閣)들은 동쪽에 위치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이에 가람배치는 전당후탑형(前堂後塔形) 또는 좌전우탑형(左殿右塔形)으로 보고 있다.

경작지로 변한 주변 대지에서 통일신라시대 문양기와가 출토되어 사찰이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폐사 시기는 알 수가 없다.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제39)은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오층석탑(五層石塔)은 장항리오층석탑과 경주 남산 늠비봉 오층석탑(五層石塔)이 있다.

과거 어느 때 도굴꾼에 의해 1층 탑신 북쪽면석 동쪽부분이 밖으로 30cm 정도 밀려 나와 있는 것이 오래 동안 방치한 것을 19951124일부터 19967월말까지 해체, 복원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때 3층 옥개석 중앙의 사리공에 금동제 사리함이 발견되어 조사 결과 석탑의 제작시기가 8세기 중엽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리함에는 4cm 크기의 금동불 입상, 금동탑 4, 목재 소탑, 사리, 그리고 마지(麻紙)로 묵서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사경으로 된 것으로 8세기 초, 默寫經)가 들어 있었다. 특히 금동불 입상은 최고의 불상으로 정교하고 생동감 넘치는 세련미를 보여 주고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 이중기단의 5층 석탑으로 상륜부에는 노반과 찰주(擦柱) 일부만 남아 있다. 지대석과 1층 기단(基壇) 하대면석을 각각 1매석 다듬어서 그 위에 하대갑석을 올렸다. 지대석 위의 1층 기단 하대면석에는 양쪽 모서리에는 우주를, 가운데에는 탱주 3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하대갑석 위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 받침으로 2층 기단을 받치고 있다.

2층 기단(基壇) 상대면석에는 양쪽 모서리에는 우주를, 가운데에는 탱주 2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상대면석 위에 갑석부연과 상대갑석을 올렸고 상대갑석 위에 각형(角形) 2단 받침으로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기단부는 자형 부재 총 16매석이 사용되었는데 1층 기단의 면석과 갑석에 각 4매석에 8매석을, 2층 기단의 면석과 갑석에 각 4매석에 8매석으로 총 16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 옥개의 각 층 면석 모서리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다. 각 층 옥개석의 밑면은 5단의 옥개받침을 두고 있고, 상면은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며, 처마의 앙곡은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의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고 네 귀퉁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2~3개가 뚫려 있다.

1층 옥개 면석은 4매석으로,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낙수면은 별석으로 2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 이상 옥개 면석은 1매석으로 모서리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고 1층에 비해 높이가 현저히 줄어들어 급격한 체감이 나타난다. 2층 옥개석은 옥개받침과 낙수면은 별석으로 2매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3층 이상 옥개석은 1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륜부 꼭대기는 5층 옥개석 상면에 각형 2단 노반받침 위에 방형 육면체 의 부서진 노반(露盤)과 잘려나가서 35mm만 있는 찰주(擦柱, 상륜부 장식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나원리 오층석탑(羅原里 五層石塔)은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맑은 기품과 높이 9.8m의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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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있는 절터로서, 동서는 길고 남북은 좁은 대지에 조성된 절터다. 전면인 남쪽과 동쪽은 큰 계곡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터의 상당부분이 절개 유실되어 협소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장항리(獐項里)마을 앞산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노루목, 장항이라 불렀다. 절 이름은 오랫동안 유실되어 알 수 없어 마을을 따서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라 부르고 있다.

절터에는  서 5층 석탑, 1층 탑신 위에 옥개석 5개만 올려놓은 동 5층 석탑과 갑석이 결실된 동 5층탑 기단 부재, 원형주좌초석,  금당지와 함께 석조불상의 대좌가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가람배치에 있어 쌍탑과 금당의 관계는 쌍탑이 금당 앞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장항리사지는 탑과 금당이 같은 선상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 1923428일 오전 11시경 도굴범이 오층석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를 탈취하기 위해 파괴한 것을 1932년 서 오층석탑을 복원 및 보수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고 동 오층석탑은 절터의 붕괴로 인하여 무너져 북쪽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19662월에 옮겨 현재의 자리에 또한 세워졌기 때문이다.

좁은 절터에 쌍탑을 세우고 뒤쪽 중앙에 금당을 배치한 쌍탑 1금당으로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고 있으나 강당이나 회랑의 존재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금당 터의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이며, 남아 있는 초석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으로 원형주좌초석과 가운데는 팔각 석조불상의 대좌가 남아 있다.

금당 터 기단 규모는 동서 15.8m, 남북 12.7m이고, 남아 있는 초석을 볼 때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의 규모로 추정된다.

한편으로는 전후(남북)가 좁고 좌우(동서)가 넓은 지형으로 보아 좌전 우탑(左殿 右塔) 가람배치도 추정할 수 있지만 동탑의 위치가 불확실하다.

금당 터 중앙에 있는 석조불상의 대좌

금당 터 중앙에 있는 석조불상의 대좌는 2단으로 아랫단은 팔각형으로 조각이 새겨져 있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는  2단으로 아랫단은 팔각형이고 윗단은 연꽃을 조각한 원형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를 세세히 살펴보면 대좌 아랫부분은 높이 600이며 팔각형으로 조성하였는데, 각 면마다 안상을 마련한 다음 그 속에 신장(神將)과 신수(神獸)를 부조(浮彫)로 처리하였다. 윗부분은 높이 53이며, 복련을 조각한 원형연화대좌이다. 석조불상의 대좌 최대 폭은 2.4m이다.

석조불상의 대좌 아랫부분 안상 속의 신수(神獸)
안상 속의 신장(神將)

이 대좌 위에 놓여 있던 석조불상은 석조여래입상으로 1923년 서 오층석탑이 파괴될 때 같이 피해를 입었으나 1932년 서탑을 복원할 때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북쪽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불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두 팔이 잘리고 허리 위부분과 광배만 복원하였으나, 뒷부분의 광배 일부와 무릎 이하는 결실되었다.

머리와 얼굴모습 그리고 광배에 새겨져 있는 작은 부처인 화불 등의 새긴 수법을 볼 때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으로 판단되며 현존 높이는 3m이나 실제로는 4m이상 되는 장육상으로 추정된다.

서 오층석탑 (西 五層石塔, 국보236)과 동 오층석탑 (東 五層石塔)

서 오층석탑 (西 五層石塔, 국보236호)

서 5층석탑은 높이 9.5m로 경주지역에서는 나원리 5층석탑, 경주 남산 늠비봉 5층석탑과 함께 3기가 있다. 탑 기단부의 상,하층 갑석은 결실부분이 많아서 시멘트로 보수하는 등 전반적으로 부재의 훼손이 심하다.

서 오층석탑의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추었고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다. 이중기단 중 1층 기단은 지대석 1매석과 면석 7매석으로 면석 양쪽에 우주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 2주로 총 8매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석 위에 갑석부연과 갑석을 올려놓았는데 총 4매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갑석 위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 받침으로 2층 기단을 받치고 있다.

2층 기단 면석의 양쪽에는 우주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 2주로 총 7매석으로이루어져 있다. 면석 위에 갑석부연과 갑석을 올려놓았는데 총 4매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위에는 각형(角形) 2단 받침으로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기단부에는 총 23매석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옥개와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의 옥개와 옥개석이 각각 1매석으로 총 10매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 네 면에는 문비(門扉)를 모각(模刻)하고 가운데 한 쌍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가 부조(浮彫)되어 있으나, 가운데 문짝 분할 선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문비 양쪽에는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1구씩 정교하게 조각했는데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양식이다. 2층 이상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2층 이상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어서 급격한 체감을 나타내고 있다.

서 5층석탑 1층 탑신 면석에는 문비(門扉)를 모각(模刻)하고 가운데 한 쌍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가 부조(浮彫)되어 있다.
문양의 도깨비는 신라의 도깨비 모습 아닐까?
문비(門扉) 가운데 문짝 분할 선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문비 양쪽에는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이 1구씩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밑면에 5단의 옥개받침을 두고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며, 처마의 앙곡은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의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다네 귀퉁이에는 풍령(風鈴) 등 장식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상륜부는 노반 1매만 남아 있고 찰주를 포함한 다른 부재는 모두 결실되었다. 노반은 방형 육면체로 가운데에 원형으로 찰주공이 뚫려 있고, 상단(上端)2단으로 돌출된 돌림띠를 두르고 있다.

서 5층석탑의 부재 수는 모두 34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감은사지 3층석탑과 비교해 볼 때 층수는 높아도 부재 수는 1/3이 조금 넘는다. 이 또한 초기 석탑과 비교해 볼 때 시대적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전체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동 5층석탑은 1층 탑신(塔身)5층까지의 옥개석만 남아 있는 석탑으로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19662월에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동 5층석탑 뒤편에 갑석이 결실된 동탑 기단 부재 일부가 있다.

동 5층석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옥개석만 남아 있는 석탑이다.
동 5층석탑 뒤편에 갑석이 결실된 동탑 기단 부재 일부가 있다.
동 5층석탑 1층 탑신(塔身)의 연화대좌를 한 인왕상(仁王像, 금강역사상)과 문비 (門扉)의 도깨비 문양 문고리
국립경주박물관 내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 된 도깨비얼굴 기와
주차장에서 본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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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산((佛光山))과 시명산은 장안사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고 옛부터 '봉우리 8개로 이루어진 산'이란 뜻으로 팔기산이라고 불렀다. 불광산과 시명산 사이의 거리 20m로 지척이다. 두 산은 육산, 흙산으로 정상은 주위 나무로 인해 조망을 보는 멋은 없다. 하지만 등산로가 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있어 삼림욕에도 좋고 대운산과 더불어 등산객이 꾸준히 찾아오는 산이다.

불광산과 시명산 정상을 가는 산행코스는 다양하다. 코스 중 장안사 능선(장안사 부도 밭 방향) 불광산 시명산 박치골 장안사 코스의 소요 시간은 5시간 정도이다.

장안사 우측 부도 밭 가는 길

불광산(660m)은 대동여지도(1861)에 기장현 장안의 주산으로 표기돼 있고, 조선 후기에 지어진 '차성가'에도 불광산 솟았으니 사문법계 없을 손가(이하 생략)라고 이곳의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박치골의 박치는 박천(朴川)으로 삼각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천으로 박천(朴川)은 밝내 로서 예부터 신선한 곳으로 인식해왔다. 옛날 이 삼각산 아래 박천물에서 삼각산의 산정으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숭배하는 제사를 올린 이야기가 전해진다.

불광산 정상 표지석
시명산 정상 표지석

200년 전에 작성된 차성가에는 삼각산의 발원지로부터 불광산의 계곡까지를 박천(朴川)이라고 하였고, 백련암계곡과 박천계곡의 쌍계가 합류하여 기룡리 앞까지를 금천(錦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각산(425m)는 장안사 서쪽에 있는 산으로 전형적인 노년산지로 산봉우리는 왕릉처럼 둥그스레하나 산기슭은 가파른 편이다. 삼각산이란 삿갓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솟아 있는데서 비롯되며, 기우제를 지내던 산이라고 한다. , 이 삼각산을 삼신산으로 삼아 인근마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꼭 단비가 내려 해갈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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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문무대왕면 안동리 함월산 자락에 있는 골굴암(骨窟庵)은 석굴로써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신이 그린 골굴석굴의 주인공인데 그림에는 목조건물로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 있다. 골굴(骨窟) 뼈처럼 생긴 바위굴이라는 뜻이다.

기림사 사적기에 의하면 골굴암(骨窟庵)은 기림사에 딸린 암자로 석굴암 보다 약 200년 먼저 조성되었다.
숙종 12년(1686년)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목조 기와집에 고운 단청을 하여 무척 화려하며 석굴들이 많아서 마치 마을을 이룬 듯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숙종 12(1686)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도 석굴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석굴 앞면은 목조 기와집에 고운 단청을 하여 무척 화려하며 석굴들이 많아서 마치 마을을 이룬 듯하고 석굴도 법당굴과 설법굴로 구별이 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석굴은 감실을 파서 높이 4m, 2.2m의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을 조성한 법당굴로 마애불은 오랜 풍화에 의해 마멸이 심하고 떨어져 나간 부분도 많다. 마애불의 훼손을 막기 위해 둥근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인근에 있는 기림사 사적기에 의하면 기림사에 딸린 암자로 함월산 반대편에 천생 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여 있다고 되어 있다. 골굴암은 석굴암 보다 약 200년 먼저 조성되었다.

삼국유사 의해(意解) 5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설총이 그 유해(遺骸)를 부수어 소상(塑像)으로 진용(眞容)을 만들었고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원효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은 높은 암벽 꼭대기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마애불로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추정된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 보물 제581호)은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 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감실을 파서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을 조성한 법당굴은 마애불의 훼손을 막기 위해 둥근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 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 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북 동해안지질공원의 지질 명소에 경주에 3개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골굴암 타포니(Tafoni)이다. 나머지는 남산 화강암, 양남 주상절리이다골굴암 일대는 신생대에 폭발적인 화산분화로 나온 뜨거운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응회암은 뜨거운 화산재 상태에서 점차 식어가면서 갈라진 틈이 생기는데, 이 틈을 절리(節理, Joint)라고 한다.

절리 면에서 한쪽의 암석이 떨어져 나가면 절벽이 만들어지고 크고 작은 구멍들이 수없이 뚫려있다. 응회암 표면이 풍화에 의해 일부분 떨어져 나가면서 크기가 다양한 오목한 구멍이 생기고 오랜 풍화에 의해 점점 커지게 되는데 이를 타포니(Tafoni)라고 한다. 골굴암은 이러한 타포니를 활용하여 12곳의 법당굴과 설법굴을 조성하였고 마애여래좌상(骨窟庵 磨崖如來坐像)을 새겼다.

골굴암은 선무도(禪武道) 수련 및 공연으로 유명한 절이다. 선무도(禪武道)는 불교무술로 1960년대에 범어사의 양익 대종사(2006년도 입적)가 승군들의 무예와 관법수행법을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정립한 한국 불교의 전통수행법이다.

골굴암 대적광전 앞에서 매일 오후 3시에 월요일, 화요일 제외한 날에 선무도 공연을 하는데 무척 인기가 많다. 특히 외국인의 위한 선무도 수행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선무도 수행자가 많다.

골굴암 대적광전 앞에서 매일 오후 3시에 월요일, 화요일 제외한 날에 선무도 공연을 한다.
외국인의 위한 선무도 수행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행자가 많다.

안동리(安洞里)는 조선중엽에 강찬성(姜讚成)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지형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어 장차 이 마을이 평온하고 부유한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안동, 안골로 불렀다고 한다.

골굴암 앞 노부부가 운영하는 보리수 나무 카페의 커피가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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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影池)

외동읍 괘능리(괘릉리 1297-1번지)에 있는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 유형문화재)은 광배 일부와 머리 부분은 심하게 닳아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석불이다. 광배는 불상과 한 돌로 조각했고 조성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형적인 조성연대를 고려하면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초로 추정된다.

조성연대가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초로 추정되는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

일제 강점기 때, 발행한 경주유적 및 조사서 제2(1917)”에 따르면 부근에 와편이 산재해 있고 초석 등이 보인다.는 것으로 보아 석불을 모신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東京通志 7 고려시대 편에 의하면 불국사 서남쪽 십리 되는 곳에 영지가 있는데, 그 못가에 석조불상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폐사되어 석조여래좌상만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3단의 팔각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대좌는 상, , 하대석이 모두 별석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하며 불안이나 어깨 등 일부에는 인위적으로 보인 훼손 흔적도 보이고 장항리절터 석조여래입상(8세기)처럼 불신을 광배와 한 돌로 조각하였다.

이런 형식의 조각은 경북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통일신라시대), 전남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과 동일하다. 또한 불신을 마애불 형태로 고부조한 특이한 조형방식이다.

주형거신광의 광배는 두 줄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이 구획되고 광배 외연에는 화염문(火焰文), 내부는 초엽문(草葉文), 융기선 위에 단독 화불을 두광 정상에는 삼존화불로 새겨져 있다.

석불(石佛)의 불신을 살펴보면 촉지인으로 판단되는 오른손, 선정인한 왼, 편단우견의 착의, 길상좌자세는 전형적인 항마촉지인 석불 좌상으로 불신의 1/3에 해당하는 불두 높이, 중대석이 길어지면서 전체적으로 높아진 대좌, 하대석 상부 4단 층단 받침, 불신과 대좌의 높이 비례에서 불신 높이가 대좌보다 높은 점 등 석굴암 본존불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대좌의 상대석은 원형으로 화문(花文)장식의 중판앙련이 8개씩 2단으로 모두 16엽이 새겨지고 아랫부분에 2단의 층단 받침이 표현되어 있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안상이 크게 음각되었고 하대석은 복판 복련으로 윗부분에는 4단 팔각층단받침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면마다 화문이 조식된 팔각기대(基臺)가 한 돌로 이어져 있다.

대좌의 팔각 중대석과 복판복련 하대석

740년에 쓰인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영지(影池)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백제 석공 아사달이 불국사 석가탑(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함)을 만들고 있었다. 아내 아사녀가 남편이 그리워 서라벌까지 찾아왔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으며, 탑이 완공되면 연못에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말만 전해 듣는다. 몇 달이 지나도 탑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아사녀는 아사달의 이름을 부르며 연못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영지(影池) 방문객을 맞이하는 조형물
1740년에 쓰인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영지(影池)와 관련된 불국사 석가탑(또는 무영탑[無影塔])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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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 석불입상(活城里 石佛立像)은 외동읍 활성리(외동읍 활성리 385-2번지)에 있는 석불(石佛)로 연지암(蓮池庵) 대웅전에 있는 석조 여래입상(石彫 如來立像, 문화재자료)이다.

사찰이름은 김연지화(金蓮池花)’ 라는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 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고 그곳에 직접 가서 땅을 파서 보니 이 석불이 나왔으므로 암자를 지어서 연지암(蓮池庵)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외동읍 활성리(외동읍 활성리 385-2번지) 연지암(蓮池庵) 대웅전

석불입상(石佛立像)의 광배(光背)는 배 모양이고, 앞면에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여래입상으로 얼굴이 심하게 마모되어 근래에 다시 만들었다. 광배는 머리둘레 2중으로 선을 돌린 두광(頭光)과 몸 둘레에 역시 2중으로 선을 돌린 신광(身光)을 표현하였는데 그 주위에 화려한 불꽃을 조각하였다.

활성리 석불입상(活城里 石佛立像)

불상의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을 표현하였고 귀는 길게 표현하였으며 짧은 목에는 삼도(三道)를 조각하였다. 옷은 목에 테를 두르고 양쪽 어깨에 걸치는 모습을 하였는데 허리까지는 반원형으로 하고 그 아래에는 Y자형으로 갈라지고 있다.

양 다리에는 타원형으로 옷 주름을 표현하였고 양 팔에 걸쳐진 옷 주름은 상당히 굵고 두텁게 조각하였다. 왼손은 들어 올려 약그릇과 같은 것을 들고 있으며, 오른손도 배에 들어 올려 둘째손가락은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서로 붙여 밖을 향하였다. 다리 아랫부분부터 그 아래는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김연지화(金蓮池花) 비(碑)

외동읍은 신라(新羅) 육부촌(六部村) 중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에 속하며 조선시대 말기 경주부(慶州府)의 남산(南山) 및 마석산을 중앙으로 양분하여 서쪽은 내남면(內南面), 동쪽은 외남면(外南面)이라 칭하고 190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남면(外南面)의 북부(北部) 일부를 제외하고 불국사(佛國寺)에서 경상남도 경계까지를 외동(外東)이라 칭하게 되었다.

활성리(活城里) 지명은 장이영(長以英)이라는 이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며 이곳에 장군수(長軍水)인 활수(活水)가 솟아났다 하여 활성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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