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지(影池)

외동읍 괘능리(괘릉리 1297-1번지)에 있는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 유형문화재)은 광배 일부와 머리 부분은 심하게 닳아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운 석불이다. 광배는 불상과 한 돌로 조각했고 조성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형적인 조성연대를 고려하면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초로 추정된다.

조성연대가 8세기 후반이나 9세기 초로 추정되는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

일제 강점기 때, 발행한 경주유적 및 조사서 제2(1917)”에 따르면 부근에 와편이 산재해 있고 초석 등이 보인다.는 것으로 보아 석불을 모신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東京通志 7 고려시대 편에 의하면 불국사 서남쪽 십리 되는 곳에 영지가 있는데, 그 못가에 석조불상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이미 폐사되어 석조여래좌상만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지 석불좌상(影池 石佛坐像)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3단의 팔각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대좌는 상, , 하대석이 모두 별석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으로 손상이 심하며 불안이나 어깨 등 일부에는 인위적으로 보인 훼손 흔적도 보이고 장항리절터 석조여래입상(8세기)처럼 불신을 광배와 한 돌로 조각하였다.

이런 형식의 조각은 경북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통일신라시대), 전남 영암 도갑사 석조여래좌상과 동일하다. 또한 불신을 마애불 형태로 고부조한 특이한 조형방식이다.

주형거신광의 광배는 두 줄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이 구획되고 광배 외연에는 화염문(火焰文), 내부는 초엽문(草葉文), 융기선 위에 단독 화불을 두광 정상에는 삼존화불로 새겨져 있다.

석불(石佛)의 불신을 살펴보면 촉지인으로 판단되는 오른손, 선정인한 왼, 편단우견의 착의, 길상좌자세는 전형적인 항마촉지인 석불 좌상으로 불신의 1/3에 해당하는 불두 높이, 중대석이 길어지면서 전체적으로 높아진 대좌, 하대석 상부 4단 층단 받침, 불신과 대좌의 높이 비례에서 불신 높이가 대좌보다 높은 점 등 석굴암 본존불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대좌의 상대석은 원형으로 화문(花文)장식의 중판앙련이 8개씩 2단으로 모두 16엽이 새겨지고 아랫부분에 2단의 층단 받침이 표현되어 있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안상이 크게 음각되었고 하대석은 복판 복련으로 윗부분에는 4단 팔각층단받침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면마다 화문이 조식된 팔각기대(基臺)가 한 돌로 이어져 있다.

대좌의 팔각 중대석과 복판복련 하대석

740년에 쓰인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영지(影池)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백제 석공 아사달이 불국사 석가탑(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함)을 만들고 있었다. 아내 아사녀가 남편이 그리워 서라벌까지 찾아왔지만, “지금은 만날 수 없으며, 탑이 완공되면 연못에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는 말만 전해 듣는다. 몇 달이 지나도 탑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아사녀는 아사달의 이름을 부르며 연못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영지(影池) 방문객을 맞이하는 조형물
1740년에 쓰인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영지(影池)와 관련된 불국사 석가탑(또는 무영탑[無影塔])전설이 전해진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