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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배반동 956번지 일원(24,304)에 위치한 망덕사지(望德寺址)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1금당 쌍탑 가람 중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지었는데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 사신인 예부시랑 악붕귀를 파견하였고 이를 속이기 위하여 사천왕사 건너편에 신문왕 4(684)에 건립된 사찰로 효소왕 1(692)에 낙성식을 하였다. 절의 이름은 악붕귀가 말한 망덕요산(望德樂山)의 절이라 하여 망덕사라고 하였다.

망덕사지는 낭산 자락에 위치한 사천왕사지의 남쪽에 돌출된 독립 구릉 위에 위치하는데, 삼국유사에 기록된 창건 연기 설화를 살펴보면 사천왕사와 창건연기를 함께 하고 있다. 관련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은 당나라의 사신이 장차 올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듣고 이 절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해서 따로 그 남쪽에 새 절을 짓고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말하기를, “먼저 황제를 축수하는 곳인 천왕사에 분향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를 새 절로 인도해 보였더니, 그 사신은 문전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고 하면서 끝내 들어가지 않으므로 국인이 금 1천냥을 주었다. 그 사신이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명을 새 절에서 축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당나라 사신의 이 말로 인해 망덕사라고 하였다.

망덕사지 ( 望德寺址 )  당간지주 ( 幢竿支柱 ,  보물 제 69 호 )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 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 터와 강당 터, 남쪽으로 중문 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 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 터 남쪽에 계단 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69)가 그대로 남아 있다특히 ·서 목탑 터는 사청왕사지의 동·서 목탑 터와 함께 신라 목탑 구조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망덕사는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당시 서라벌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이다.

망덕사지 일원 토지는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에서 소유하고 있었지만, 해방 이후 민간에 불하되었다. 이에 현재는 금당지, 동탑지, 당간지주 주변만 국유지로 남았고, 사역 주변 대부분은 민간에서 경작지로 이용하고 있다.

1965년 망덕사지 남쪽의 경작지에서 석제 계단 터가 발견되었는데 절로 오르기 위한 시설로 그 높이는 3m 정도로 추정된다. 불국사와 같이 사찰 전면에 설치된 축대 앞에 만들어졌고 계단의 양쪽에는 높이 90, 한 변 너비 14의 팔각기둥이 세워졌다. 

망덕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문화재관리국이 2차례 조사하였다. 1차 발굴조사(1969. 11. 1118)에서는 동·서 목탑 터와 회랑 터의 확인에 주력하였고, 2차 발굴조사(1970. 4. 127)에서는 금당, 북회랑 터, 동회랑 터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편, 귀면와, 명문전, 고려시대 청동정병과 개원통보1점등이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사찰 규모는 남쪽 진입계단을 제외한 중문지를 기점으로 가로 약 62.105m, 세로 약 67.997m이고, 전체 면적은 약 4,223이다.

망덕사지에서 본 낭산

망덕사지의 전체 가람구조는 가장 남쪽 단애 면에 사찰 출입시설로 추정되는 계단이 있고, 그 북쪽에 중문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시 그 북쪽으로 동서 목탑(3×3)이 각각 위치하고, 금당(5×3)과 강당(7×3칸 추정)이 동서 중심축선상에 남북으로 각각 차례대로 배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남편에는 회랑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금당과 동·서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금당은 정면 5, 측면 3칸의 건물로, 기단의 전체의 규모는 약 16.3×12.4m이고 7세기 후반에 조성되어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각각 한 번의 중창이나 대규모 개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망덕사지 금당터

, 서 목탑은 금당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18.4m 이격된 지점에서 동, 서로 약 16.6m 떨어진 곳에 각각 위치한 것으로 확인된다. ·서 목탑은 모두 정면 3, 측면 3칸의 정방형건물로 추정되며, 현재 탑지 중심에는 팔각의 심초석이 남아있다.

사천왕사 목탑과 망덕사 목탑을 비교했을 때, 가장 차이나는 것이 단층기단과 이중기단이라는 점이다. 사천왕사 목탑, 감은사 금당 등은 모두 이중기단으로 조성되어 건물의 격을 더욱 높인 듯하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망덕사의 경우 목탑과 금당이 모두 단층기단으로 확인된다.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신라 중대 왕실사찰이자, 성전사원으로 당시 신라에서 사격이 가장 높았던 사찰 중 하나이다.

망덕사지 동 목탑 터

특히 망덕사는 효소왕이 낙성식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창건 배경 등을 고려해 볼 때, 앞의 사찰보다는 사격이 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한편으로는 삼국시대 조성된 황룡사 금당이나 통일직후 679년에 조성된 사천왕사, 그리고 682년에 조성된 감은사 금당까지는 모두 이중기단인 것에 비하여, 685년 혹은 692년 조성된 망덕사 금당, 751년경 조성된 불국사 금당(현 대웅전)의 경우 모두 단층기단을 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 주요 사찰의 건물 기단이 이중기단에서 단층기단으로 변화하는 시점이 망덕사가 조성되는 시점이 아닌지 추정되고 있다.

망덕사와 관련된 사료 내용은三國遺事三國史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창건 연기 설화와 목탑의 흔들림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먼저 三國史記에 나오는 주요한 기록을 살펴보자.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神文王

신문왕 5(685) 여름 4월에 망덕사가 완성되다.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孝昭王

효소왕 11(702)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는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서 장사지냈다. 舊唐書에는 장안2(702)에 이홍(理洪)이 죽었다고 하고, 여러 고기에는 임인년(702) 727일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대족3(703)에 죽었다고 한다. 資治通鑑이 잘못되었다.

卷第九, 新羅本紀 第九 景德王

경덕왕 14(755) 봄 망덕사 탑이 흔들렸다. 당의 영호징(令狐澄)新羅國記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당을 위해 이 절을 세웠던 까닭에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두 탑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고, 높이는 13층이다. 갑자기 심하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 하기를 며칠 동안 그러하였다. 이 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니었을까?

三國遺事에 나오는 주요한 기록을 보자.

卷第一, 紀異 第一 奈勿王 金堤上

처음 제상이 출발하여 떠날 때에 제상의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뒤를 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망덕사 문 남쪽의 모래 언덕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울부짖었다. 그런 까닭에 그 모래언덕을 장사(長沙)라고 하며, 친척 두 사람이 그 부인의 겨드랑이를 붙들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부인이 두 다리를 뻗쳐 일어서지 않으려 했다. 이에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불렀다. 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하는데 지금도 사당이 있다.

卷第五, 感通 第七 眞身受供

장수(長壽) 원년 임진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망덕사(望德寺)를 처음 세워 당 황실의 덕을 받들게 하였다. 뒤에 경덕왕(景德王) 14년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이 있었고, 신라인들이 말하기를 당 황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卷第五, 感通 第七 善律還生

망덕사의 중 선율(善律)은 보시 받은 돈으로 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공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갑자기 명부의 쫓김을 받아서 저승에 이르렀다. 명사(冥司)가 묻기를 너는 인간세계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라고 하니 선율이 빈도는 말년에 大品經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공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사가 너의 수록(壽籙)은 비록 다 되었으나 뛰어난 소원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인간세계로 돌아가 보전을 완성하여라.”라고 하고 곧 놓아 돌려보냈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이라는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이른다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 망덕사터 서쪽에 65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표면에 아무런 조각과 장식을 두지 않는 대신, 지주 바깥면의 모서리를 윗부분부터 줄어들게 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내었다. 기둥머리는 안쪽 측면에서 바깥 면으로 내려오면서 곡선을 그리며 외부로 6쯤 깎여져 경사를 이루고 있고, 안쪽 윗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만들었다.

당간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기를 달던 깃대를 말하며, 당간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시켜주는 두 돌기둥을 이른다.

각 면에 비록 조각은 없으나 소박하고 웅장한 기풍을 나타내고 있다. 망덕사는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통일신라 신문왕 5(685)에 창건된 사찰인데 이 당간지주도 당시에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망덕사지 당간지주 (望德寺址 幢竿支柱)는 높이 2.9m로 망덕사터 서쪽에 65㎝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장사(長沙)와 벌지지(伐知旨)

장사는 남천에 있는 모래언덕으로 신라의 충신 박제상(김제상)이  왜국으로 떠날때 그의 부인이 슬픔에 못이겨 울부짖으며 혼절한 곳이다.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 보자.

신라의 17대 내물왕(奈勿王) 36년에 일본 왕이 보낸 사신이 찾아왔다. 왕자를 일본에 포로로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내물왕은 셋째 아들인 미해(美海)왕자를 일본으로 보냈다. 이후 미해왕자는 30년 동안 신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내물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이 된 눌지왕은 미해왕자를 그리워했다. 이 말을 들은 김제상은 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김제상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쫓아갔지만 이미 배가 출발한 후였다.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모래밭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울었는데, 이곳을 장사(長沙)’라고 부른다. 일본에 도착한 김제상은 신라를 도망쳐 나왔다는 말로 일본의 왕을 속여 환심을 산다. 이후 미해왕자를 배에 태워 신라로 보냈다. 이 사실을 안 일본의 왕은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木島)라는 섬 속에서 불태워 죽였다.

한편 김제상의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불렀다. 이후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이후 김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鵄述神母)’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천(南川)은 경주시 외동읍 신계리와 괘릉리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월성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형산강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주시내를 중심으로 남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남천이 아니라 문천(蚊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문천은 순우리말 이름인모그내를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며, 경주시내 남쪽의 남천을 일컫는 고유 명칭 중 하나이다. 두 문헌에는 사천(沙川)이라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는 경주시내 남쪽의 남천하상이 주로 모래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치술령 부근에 망부석(望夫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박제상의 아내가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가 죽어서 변한 돌 이라는뜻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는 치술령이 경주 중심지의 남쪽 36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망부석 부근에는 치술신모에게 제사지내던 무제당터 또는 신모사터가 전해지고 있다.

진신수공(眞身受供),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말라!

장수(長壽) 원년 임진(壬辰; 692)에 효소왕(孝昭王)이 즉위하여 처음으로 망덕사(望德寺)를 세워 당나라 제실(帝室)의 복을 받들려 했다. 그 후 경덕왕(景德王) 14(755)에 망덕사 탑이 흔들리더니 이 해에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났다. 신라 사람들은 말했다. “당나라 제실을 위하여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 영험이 있을 것이다.”

8년 정유(丁酉)에 낙성회(落成會)를 열고 효소왕이 친히 가서 공양하는데, 한 비구(比丘)가 몹시 허술한 모양을 하고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청했다. “빈도(頻度)도 또한 이 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여 말석(末席)에 참여하게 했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그대는 어디 사는가.” 비구승이 대답한다. “비파암(琵琶嵓)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이제 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말라.” 중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진신(眞身) 석가(釋迦)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가 남쪽을 향하여 갔다. 왕이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언덕에 달려 올라가서 그가 간 곳을 향해 멀리 절하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니 남산(南山) 삼성곡(參星谷), 혹은 대적천원(大磧川源)이라고 하는 돌 위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를 놓고 숨어 버렸다.

사자가 와서 복명(復命)하자 왕은 드디어 석가사(釋迦寺)를 비파암 밑에 세우고, 또 그 자취가 없어진 곳에 불무사(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때를 두 곳에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

음식 만들어 중을 대접하고 옛 친구 불렀네.

이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때로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게 비치리.

선율환생(善律還生), 선율(善律) 환생하여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완성하다.

망덕사(望德寺) 중 선율(善律)은 시주받은 돈으로 <육백반야경(六百般若經)>을 이루고자 했다. 공사가 아직 끝나기 전에 갑자기 음부(陰府)의 사자에게 쫓겨서 명부(冥府)에 이르니 명사(冥司)가 물었다. “너는 인간 세계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을 했느냐.” 선율이 말한다. “저는 만년에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만들려 하다가 공사를 마치지 못하고 왔습니다.” 명사는 너희 수록(壽籙)에 의하면 네 수는 이미 끝났지만 가장 좋은 소원을 마치지 못했다니 다시 인간 세상에 돌아가서 보전(寶典)을 끝내어 이루도록 하라.” 하고 놓아 보냈다.

돌아오는 도중에 여자 하나가 울면서 그의 앞에 와 절을 하며 말했다. “나도 역시 남염주(南閻州)의 신라 사람이온데 부모가 금강사(金剛寺)의 논 1()를 몰래 빼앗은 일에 연루되어 명부(冥府)에 잡혀 와서 오랫동안 몹시 괴로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법사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거든 이 일을 우리 부모에게 알려서 속히 그 논을 돌려주도록 해 주십시오.

또 제가 세상에 있을 때에 참기름을 상 밑에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도 이불 틈에 감추어 둔 것이 있습니다. 법사께서 부디 그 기름을 가져다가 불등(佛燈)에 불을 켜고, 그 베는 팔아 경폭(經幅)으로 써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황천에서도 또한 은혜를 입어 제 고뇌(苦惱)를 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율이 말했다. “그대의 집은 어디 있는가.” “사량부(沙梁部) 구원사(久遠寺) 서남쪽 마을입니다.” 선율이 이 말을 듣고 곧 떠나서 도로 살아났다.

그 때는 선율이 죽은 지 이미 열흘이 되어 남산 동쪽 기슭에 장사 지냈으므로 무덤 속에서 사흘 동안이나 외치니, 지나가던 목동(牧童)이 이 소리를 듣고 절에 가서 알렸다. 절의 중이 와서 무덤을 파고 그를 꺼내니 선율은 그 동안의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여자의 집을 찾아갔는데 여자는 죽은 지가 15년이나 되었으나 참기름과 베는 완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선율이 여자가 말한 대로 명복을 빌어 주니 여자의 영혼이 찾아와서 말한다. “법사의 은혜를 입어 저는 이미 고뇌를 벗어났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감동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반야경(般若經)>을 서로 도와서 완성시켰다. 그 책은 지금 동도(東都) 승사서고(僧史書庫) 안에 있는데 매년 봄과 가을에는 그것을 펴서 전독(轉讀)하여 재앙을 물리쳤다.

부럽도다. 우리 스님 좋은 인연 따라,

영혼이 돌아와서 옛 고향에서 노니시네.

부모님이 나의 안부(安否) 물으시거든,

나 위해서 빨리 그 논을 돌려주라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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