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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에서 삼릉입구 사이에 삼불사와 망월사라는 근대에 창건된 절이 있는데 이곳에 선방사지(禪房寺址)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이 있다.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선방곡(禪房谷) 입구 기슭에 파손된 채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과 같이 복원하였다. 세 구가 모두 가까운 곳에 흩어져 있었고, 기본양식이 모두 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조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망월사 입구
망월사 금강역사

1926년 유적 주변에서 乾符六年禪房寺塔鍊治內記라 음각한 탑지석이 발견되어, 선방사지(禪房寺址) 삼존여래상으로 불리기도 하고 삼릉계와 포석계(鮑石溪)의 중간 골짜기를 선방곡(禪房谷)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금 삼불사(三佛寺)라는 작은 절이 있는 자리가 선방곡(禪房谷) 1사지이고 신라시대 선방사지(禪房寺址)가 있었다는 곳으로 전하고 있다. 현장에는 보물 제63호로 지정된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와 삼불사(三佛寺) 뜰에 있는 석탑(石塔) 부재만 남아 있다.

삼불사 입구

삼불사(三佛寺) 동쪽은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의 보호각을 건립하기 위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198711월에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까지 약 1개월간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 자리를 중심으로 주변 외곽 지역을 1차 발굴 조사하였고, 19881월에 2차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주변 건물지에 시대차이가 있음이 밝혀졌고,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또는 그 이후의 건물지가 확인 되었다.

선방곡(禪房谷) 제1사지 석재유구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 종교적 신비까지 풍기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이다. 동남산 부처골의 마애여래좌상, 장창곡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생의사 미륵삼존불 또느 삼화령 애기부처)과 함께 신라(삼국 시대) 조각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이 풍화에 의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1988년에 기와지붕을 씌운 보호각이 건립되었다.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으로 중앙은 아미타불, 왼쪽은 대세지보살, 오른쪽은 관세음보살

중앙의 본존불은 아미타불상으로 높이 2.6m로 연화대좌는 없는 상태에 평면의 기단석 위에 서 있고 머리카락은 나발(螺髮)이며 육계가 3단으로 된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광배는 전신광배로 불상과 한 돌로 세워져 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뺨을 부풀게 하고 턱은 완강하게 처리하여 힘과 활력을 나타내었다. 눈은 눈두덩을 부풀게 하고 눈을 가늘게 처리함으로써 눈웃음을 짓게 하였으며, 양쪽 뺨을 한껏 부풀게 하고 입을 꾹 다물면서 양가를 깊게 파서 미소가 얼굴 가득히 흘러넘치게 하였다. 코는 큼직한 삼각형이며 귀는 어깨에 닿고 있지만 끝이 깨어져 형태가 분명하지 못하다.

아미타불은 광배는 전신광배로 불상과 한 돌로 연화대좌가 없는 평면의 기단석 위에 서 있다

상체는 우람한 면을 과시하지만 하체는 불분명한 다리의 윤곽 등으로 빈약하게 보여 불균형을 이룬다. 어깨의 팽팽한 윤곽 외에 가슴 등은 평평하며 다리의 볼륨이 약간 표현된 것은 주목된다.

목은 짧은 편으로 삼도(三道) 표현은 보이지 않고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손 모양(手印 : 약속을 손 모양으로 표시)은 통인(通印)으로 왼손은 팔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손바닥을 정면을 향하도록 편 시여원인(施與願印 : 소원을 들어주리라),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 위로 향해 치켜든 시무외인(施無畏印 : 두려워 하지마라)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손 모양(手印 : 약속을 손 모양으로 표시)은 통인(通印)으로 왼손은 시여원인(施與願印 : 소원을 들어주리라),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 : 두려워 하지마라)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는데, 오른쪽 어깨로 가사 자락을 약간 덮고 있고 팔에 걸친 옷자락도 짧고 묵중하게 내렸으며, 그 밑으로 광배에 해당하는 면 전체에 걸쳐 옷자락이 덮어져 내려갔다. 가슴에서 발목까지는 U자형의 옷 주름 다섯 가닥이 표현되었는데, 모습은 굵은 요철형의 띠로서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아미타불의 뒷 모습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 아이 같은 표정과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대세지보살상으로 높이 2.3m로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새겨진 이중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삼존 가운데 가장 조작이 섬세하며, 더 장식적이다. 얼굴은 둥글고 눈은 가느스름하여 눈에 웃음이 서려있다. 코는 삼각으로 짧고 입술은 조금 큰 편인데 양가가 깊게 패어져 두 뺨에 언덕을 이루면서 꾸밈없는 웃음이 넘쳐흐른다. 턱은 자그마하여 관음보살상과는 대조적이다.

대세지보살은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이 새겨진 이중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머리에는 관대(冠帶)를 두르고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정면 두식에는 큰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둥근 두광의 테두리에는 두 줄의 선을 돌리고 두광 안에는 5구의 화불(化佛)과 보상화(寶相花)가 새겨져 있다. 화불 또한 원형(圓形)의 두광(頭光) 광배를 가지고 있다. 

세 줄로 된 목걸이 앞에 큰 꽃 한 송이가 달려 있고 허리를 감은 군의(裙依)의 자락이나 동여맨 끈이 드리워져 있는 모습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두 어깨에 걸친 천의(天依)는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연꽃을 들고 있는 왼쪽 팔에 걸쳐 아래로 흘러 내렸고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천의 자락은 배 아래로 드리워져서 원을 그리며 영락 자락을 잡고 있는 오른손 팔에 걸쳐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대세지보살의 뒷 모습

대세지보살상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두 어깨에서부터 발등 가까이까지 드리워진 구슬과 꽃으로 장식된 굵은 영락이다. 보살상은 이러한 장식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중국 수나라 보살상 장식으로 유행되던 것으로 이 불상들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또 이 보살의 양쪽 허리에서 드리워져 있는 댕기장식도 삼국시대 미륵반가상과 같은 모습이다.

오른쪽의 보살은 관세음보살상으로 또한 높이 2.3m로 연화대좌가 없는 평면의 기단석 위에 서 있다. 삼존 가운데 수법이 다소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두상 광배를 하고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는 관대(冠帶)를 두르고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한 보관을 쓰고 있는데 두식의 중앙에는 화불을 장식하였다.

관세음보살은 연화대좌가 없는 평면의 기단석 위에 서 있다.

머리 양쪽에는 끈이 나비 날개처럼 매듭을 짓고 그 나머지 자락은 두 귀 언저리로 흘러내려 어깨에 덮여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었고 가슴에는 승기지(僧祇支)가 비스듬히 가려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 또는 정병(淨甁)을 잡고 있다보병(寶甁), 또는 정병(淨甁)으로 괴로운 사람을 구하겠다는 보살의 약속을 의미하는데 이렇게 물건으로 약속을 표시하는 것을 계인(契印)이라고 한다.

허리를 감은 군의(裙依)자락은 발등을 덮었고 양 어깨에 걸친 천의는 배 아래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양 팔에 걸쳤다가 다시 아래로 굽이쳐 흘러내렸다발은 아미타불상처럼 모가 졌으나 오른쪽 다리가 수직으로 되어있고 왼쪽다리는 약간 휘어져있어 휴식하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뒷 모습

전체적으로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을 보면 넓적한 얼굴엔 명랑하고 천진한 웃음을 머금고 있고 도톰한 눈 두덩이와 빰에는 화사함이 피어난다. 몸은 아기처럼 거칠고 뭉툭하지만 부드러우면서 정교한 것이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생의사 미륵삼존불, 삼화령 애기부처)를 연상케 한다.

1988년에 풍화에 의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기와지붕을 씌운 보호각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26년의 조사에 의하면 석조여래삼존입상(石造如來三尊立像)의 북동쪽 20m 지점에 석탑의 하층 기단석 1, 상층 기단석 일부와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인 3층옥개석 1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자리에서 동쪽으로 300m 떨어진 언덕에도 층급받침이 3단인 옥개석 2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이 두 군데의 석탑 부재들은 삼불사(三佛寺) 대웅전 옆으로 옮겨져 1개의 탑으로 복원되었다.

삼불사(三佛寺) 석탑으로 높이 6m의 소탑(小塔)이다.

3층 옥개석의 1변 길이가 95.5cm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전체높이는 6m 정도의 소탑(小塔)이다. 그런데 이 탑지(塔址) 부근에서 乾符六年己亥五月十五日 禪房寺塔練治133) 內記佛舍利二十三 金一分惠重入 銀十五分道如入節 上和上忠心 第二志萱 大伯士 釋林典 道如 維乃 志空으로 음각한 탑지석(塔誌石)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만약 이 기록이 2기의 석탑 중 어느 한곳의 석탑에 봉납한 것이었다면 헌강왕(憲康王)(879)에 두 석탑 중 하나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자리가 선방사(禪房寺)였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지만, 지금 실물이 전하고 있지 않고 탁본(拓本)이나 사진도 알려진 적이 없다.

배동(拜洞), 배리(拜里)의 유래는 신라 때 늙은 재상이 부모의 제삿날에 아는 스님을 통해 스님 한 분 소개받았는데 초라하고 불결한 행색이었다. 늙은 재상은 그를 매우 푸대접하고 업신여기자 스님은 가만히 소맷자락에서 사자를 꺼내어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올라 가버렸다. 이때 자기의 경솔했음을 깨달은 늙은 재상은 밤새 엎드려 빌었고 사람들은 이를 비꼬아 이 동네를 절 잘하는 동네, 곧 배리(拜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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