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경주 함월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기림사는 유서 깊은 사찰이자 지금까지 법통이 이어지고 있는 천년 고찰이다. 달을 머금고 있는 산인 함월산에 자리 잡고 있는 기림사는 선덕여왕 12(643)에 천축국(天竺國;인도)에서 온 승려 광유가 임정사(林井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이후 원효대사가 중창(重創)을 하면서 인도 2대 정사인 기원정사(祇園精舍)의 기(), 죽림정사(竹林精舍)의 림()자를 합쳐 기림사(祇林寺)라고 개명(改名)하였다.

2000년대 기림사

삼국유사 기이 편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 따르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바다 이견대(利見臺)에서 동해용으로부터 대나무와 옥대를 얻고 감은사에서 하루 밤을 지낸 후 돌아오는 길에 기림사 서쪽냇가(용연폭포)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최소 신문왕(682때 기림사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림사는 광복 전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절로 불국사 등 60여개 말사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으나 불국사가 복원되어 대대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사세가 역전하여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로 되었다

함월산 기림사 일주문

옛날부터 기림사 경내·외에는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샘물이 있어 오정수(五井水) 또는 오종수(五種水)라 하여 다섯 곳에 샘이 있었고 물맛이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맛볼 수 있는 샘이 없다. 오종수(五種水) 종류와 내용을 살펴보면 명안수(明眼水)라 하여 눈이 밝아진다는 물, 오탁수(烏啄水)라 하여 기림사 동편 큰 바위 아래의 물로 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 장군수(將軍水)라 하여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물, 감로수(甘露水)라 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은 물, 마지막으로 화정수(和靜水)라 하여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물이 있었다.

일주문 초입

이렇게 물맛이 좋은 이유는 기림사가 위치한 양북면 일대가 규조토가 많이 생산되는데 이 규조토가 물의 정수 역할하기 때문이라고 지질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오탁수(烏啄水)라 하여 기림사 동편 큰 바위 아래의 물로 맛이 좋아 까마귀도 쪼아 먹었다는 물로 위치는 알수가 없다.

기림사 오른쪽에 흐르는 천은 호암천(虎岩川)으로 양북면 호암리의 성황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동리에서 대종천에 합류하는 하천이다.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 가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이곳 기림사까지는 수레를 타고 왔고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띄어 감은사까지는 대종천 뱃길을 이용하여 갔었다. 호암(虎岩)은 순우리말 이름인 범 바위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기림사 오른쪽에 흐르는 호암천(虎岩川)
신문왕이 문무대왕릉에 가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이곳 기림사까지는 수레를 타고 왔고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띄어 감은사까지는 대종천 뱃길을 이용하여 갔었다.

풍수가에 의하면 기림사 터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즉 거북이가 물을 마시는 형국의 명당자리이기 때문에 몽고침입, 임진왜란 등 전란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환경덕분에 기림사에는 보물이 4점이나 있다. 건칠보살좌상(보물 제415), 대적광전(大寂光殿, 보물 제833), 소조비로자나 삼존불(보물 제958), 비로자나불 복장전적(腹藏典籍, 보물 제959) 등 있다. 특히 흙, 종이, , 나무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불상이 있어 볼거리가 풍성하다.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깨죽나무

천왕문 왼쪽 석축아래 오종수(五種水) 중 물을 먹거나 눈을 씻으면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明眼水)가 있다. 1990년대까지 물이 고여 있었으나 지금은 물이 말라버렸다. 소나무 뿌리 때문에 눈이 맑아진다는 견해도 있다.

천왕문
천왕문 왼쪽 석축아래의 명안수(明眼水)

천왕문 좌우에는 불법승을 해치는 나쁜 무리인 마구()를 제압하고 있는 사천왕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구() 복장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있어 왜구임을 알 수 있다. 그 만큼 당시 왜구는 해악한 무리이고 주민들을 많이 괴롭혔다. 마구()는 사찰마다 형태와 착용복장이 다른데 일반적으로 추풍령이북은 몽고와 만주족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천왕(四天王)고대 인도신화시대부터 사방을 지키는 호세신(護世神)으로 귀족 혹은 귀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나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는 동안에 차츰 험상궂은 무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불교에 흡수되면서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 아래 동서남북의 4를 지배 하면서, 佛法을 수호하며 중생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호법신 역할을 하고 있다.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받들고 밑으로는 팔부중(八部衆)을 거느리고 있다.

경전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0권에는 국가가 위태로울 때 사천왕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가장 대표적인 호국경전이다사찰에서는 천왕문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탑의 사방 동. . . 북을 수호하는 신장으로도 조성 되었다. 또한 외호신장이라고도 하여 불국정토의 외막 을 맡아보는 역할을 하며 동방은 지국천, 서방 광목천, 남방 증장천, 북방 다문천이다.

천왕문 좌우에는 불법승을 해치는 나쁜 무리인 마구(니)를 제압하고 있는 사천왕이 조성되어 있는데 마구(니) 복장을 살펴보면 일본 전통 속옷인 훈도시를 입고 있어 왜구임을 알 수 있다.

북방 다문천(多聞天)은 부처의 도량을 잘 지키며 부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신장으로 왼손에는 탑 또는 비파를 들고 있고 피부색은 의 흑색이다. 서방 광목천(廣目天)죄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고통을 느끼게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道心을 일으키게 하는 신장으로 오른손에는 푸른 용, 왼손에는 붉은 여의주를 들고 피부색은 의 백색이다.

남방 증장천(增長天)은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서 만물을 소생하게 하고 덕을 베푸는 신장으로 비파를 타고 있고 피부색은 의 적색이다. 동방은 지국천(持國天)은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며 인간을 보살피고 인간들의 국토를 지키는 신장이다. 왼손에는 칼,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고 왼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으며 피부색은 의 청색이다.

기림사의 특징 중 하나가 진남루(鎭南樓)다. 맞배지붕에 앞면 7칸, 옆면 2칸의 긴 건물로 임진왜란 때 승병의 지휘본부로 사용된 누각인데 지금은 누각의 형태가 아니고 18세기 중반에 중창(重創), 변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남(鎭南)은 남쪽을 진압한다는 뜻인데 남쪽은 왜구를 의미한다. 기림사 유물에 전적, 나팔, 목패 등이 있어 호국 사찰임을 이해할 수 있다.

천왕문을 지나 보이는 진남루
맞배지붕 익공양식의 앞면 7칸, 옆면 2칸 진남루(鎭南樓)
현재 진남루 일부를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겹처마 익공양식의 진남루
진남루와 응진전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에 안산암(安山岩)으로 만들어진 높이 3m의 아담한 삼층 석탑이 있다. 통일신라말기 석탑으로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는 2층 기단으로 각 층은 한 개의 통돌로 2층 기단은 2개의 우주와 1개의 탱주를 새겨서 조성하였다. 탑신부는 한 개의 통돌로 3층을 조성하였고 각 탑신석은 2개의 우주를 새겼고 옥개받침은 4단을 만들었다.

응진전과 삼층석탑

기림사 3층 석탑은 일반 석탑과 다르게 기단부와 탑신부에 이끼가 많이 있는데 이유는 옛날 오종수(五種水) 중 장군수(將軍水)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장군수를 메워버리게 된 이야기는 2가지가 전해진다. 하나는 자리에 석탑이 조선시대에 이 곳 물을 먹고 난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뒤에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는 이야기가 하나고 또 다른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때 이 물을 먹고 장수가 되어 독립투사가 나올 것이란 생각에 일제가 우물을 메웠다는 이야기다. 고요한 밤에 탑에 귀를 대고 있으면 탑 아래 우물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응진전은 맞배지붕의 정면5칸의 다포양식의 조선후기 건축물이다. 500명의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나한상을 자세히 보면 돌로 만든 석불인 것으로 알 수 있다. 소위 불석(佛石)으로 하여 함월산에 있는 돌로 사암 계통의 부드러운 재질로서 조각이 쉽고 석재를 두부 자르듯이 결에 따라 자를 수 있어 옛 부터 불상 조각에 많이 사용해 왔던 돌이라고 한다.

함월산 불석(佛石)으로 만든 나한상
응진전의 다포

약사전 앞에는 1기의 목탑터가 있다. 가운데 심초석(11×11×11cm)이 있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 목탑이 언제 소실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목탑이 단탑인 경우와 쌍탑인 경우에 따라 가람의 주 출입방향을 판단 할 수 있다. 목탑이 단탑이면 응진전 중심으로 동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고 쌍탑이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방향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쌍탑이 있는 사찰이 많아서 기림사가 쌍탑일 가능성도 한번 정도 생각해볼 일이다.

목탑터
가운데 심초석이 있고 정면, 측면 각 3칸의 터가 온전히 남아 있다.
기림사의 목탑터가 단탑이면 응진전 중심으로 동쪽에서 올라오는 경우이다

약사전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옆면 1칸의 다포양식의 건축물로 160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효종 5(1654)에 중창되었고 숙종 4년 중수했다. 주불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로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주는 부처로써 7세기 중엽부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때 유행했던 부처이다. 보통 손에 약그릇 또는 보주를 들고 있으나 기림사 약사여래불에게는 없다.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 월광보살로 이마나 보관에 해, 달 또는 손에 해, 달을 들고 있다

맞배지붕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옆면 1칸 약사전
주불은 약사여래불(약사유리광여래)이고 좌우 협시보살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제833호로 맞배지붕의 겹처마에 정면 5칸, 옆면 3칸의 다포양식의 건축물이다. 창건이후 6차례 다시 지어졌다. 이중 5번째는 1629년(인조7)에 지어졌고 마지막으로 1786년 경주 부윤 김광묵에 의해 지어져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단청은 색깔이 바래어 지나긴 긴 세월을 알려주고 다포공포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조각예술은 정갈함과 함께 고풍스러운 멋을 풍긴다. 또한 법당 출입문의 살문이 솟을 꽃살문인데 간결하고 아름답다.

보물 제 833 호로 맞배지붕 겹처마에 정면 5 칸 , 옆면 3 칸 다포양식의 대적광전(大寂光殿)
법당 출입문의 살문이 솟을 꽃살문인데 간결하고 아름답다.

내부는 4개의 고주(高柱) 외에 따로 2개의 측면 고주를 세워 넓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하다. 그리고 빗천장과 우물 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대적광전의 다포

대적광전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인 삼존불 즉 비로자나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규조토)으로 만든 소조불로 보물 제958호다. 규조토는 그 성질이 물을 머금으면 흙 반죽이 되나 마르면 돌처럼 딱딱 해지는데 이 성질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었다. 만든 시기는 임진왜란 직후이다.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은 아미타불, 오른쪽은 석가모니불

상체는 장대하나 하체는 빈약하게 느껴지며, 네모난 얼굴에는 강인한 표정이 엿보인다. 대적광전에 삼존불이 조성되면 일반적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 왼쪽 노사노불, 오른쪽 석가모니불이 일반적인 구도다. 특이하게 기림사 대적광전에는 노사노불 대신에 아미타불이 조성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의 복장에서 불경(, 목판본과 사경)이 발견되었는데 비로자나불 복장전적(腹藏典籍)이라고 부른다. 보물 제959호로 제작 시기는 고려 11세기부터 조선 17세기로 고려시대 목판본(木版本), 사경(寫經)과 조선시대 목판본(木板本)이다. 전적(典籍)이 발견된 것은 1986. 9. 6 새벽 문화재 절도범들이 대적광전에 침입하여 비로자나불의 뒷부분을 파괴하여 복장유물을 꺼내어 도주하는 것을 잡아서 유물을 되찾았다.

왼쪽의 탱화는 기림사 삼불회도로 김림사의 창건설화를 표현하고 있다.
내부는 4 개의 고주(高柱) 외에 따로 2 개의 측면 고주를 세워 넓은 공간을 구축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하다 ; 그리고 빗천장과 우물 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

관음전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11면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1986년 우리나라가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기념으로 열린 불교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다.
11면 관세음보살은 밀교의 관점에서 본 관세음보살상으로 제도하는 중생들의 형태에 따라 11가지의 얼굴모습을 나타낸다. 좌면(3)은 분노 상으로 악한 중생을 꾸지람하여 악으로부터 구하려는 상이고 우면(3)은 백아 상으로 착한중생에게 더욱 정진을 권하는 상이며 정면(3)은 자비 상으로 선한 중생에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칭찬하는 상이다. 그리고 뒷면(1)은 대폭소상으로 착한중생, 악한중생 모두를 포섭하는 아량을 베푸는 상이고 맨 위(1)는 아미타여래이다.

관음전
관음전에는 은행나무로 만든 11면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밀교의 관점에서 본 관세음보살상이다.

삼천불전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각 천불씩 조성되어 있는데 주불 석가모니는 한지로 1990년대에 제작되었다. 삼성각에는 독성신인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데 석가모니처럼 스승 없이 홀로 도를 이룬 분으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분으로 육당 최남선은 단군으로 보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나반존자를 십육나한을 대표하는 빈두로존자로 파악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이 입멸한 후 이 세상에 머물며 다음 세상의 미륵불이 나실 때까지 중생을 구제하라는 부촉을 받았다고 한다.

삼천불전
과거, 현재, 미래의 각 천불씩 조성되어 있는데 한지로 1990년대에 제작되었다.
독성신인 나반존자가 모셔져 있는 삼성각

기림사 명부전은 우리나라에서 영험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이곳에서 조상제사를 모시는 이가 많다.

명부전
화정당
절에서 조성하여 만든 화정당 앞의 화정수(和靜水)
범종루
사물인 운판, 목어, 범종, 법고(북)
목어

기림사 성보박물관 입구에는 불두와 광배가 심하게 훼손된 불령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불령고개 길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 방형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오른 손은 무릎위에 놓고 왼손은 배 앞에 놓은 것으로 법의는 통견식이고 양 어깨를 걸쳐 내려와 두 무릎을 덮었으며 가슴에는 군의의 매듭이 보인다. 방형대좌의 하대는 복련, 중대는 안상 그리고 상대는 앙화를 조각하였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불령 석조여래좌상

기림사 성보박물관에는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으로 높이 91cm인 관세음보살반가상이 있다. 대좌의 글귀에 연산군 7(1501)으로 되어 있어 제작연대로 추정하고 있다. 건칠불이란 진흙으로 속을 만들어 삼베나 종이를 감고 그 위에 진흙가루를 발라 묻힌 다음 속을 빼어 버리고 옻칠을 입힌 속이 빈 소상이다.

보물 제415호인 건칠보살좌상

머리에는 당초문을 새긴 보관을 썼고 얼굴은 남성적이며 냉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목에는 화려한 장식의 목걸이를 하고 있어 눈에 띈다. 왼발은 대좌 위에 얹고 오른발은 대좌 밑으로 내렸으며,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을 약간 뒤로하여 대좌를 짚고 앉아 있는 모습이 편안하고 자연스럽다자세는 경주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과 비슷하다.
이 밖에 석조치미, 불석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 명부전에 봉안되는 사자로써 죽은 사람의 죄를 적은 기록을 지옥세계에 전달하는 직부사자와 죽은 사람의 집에 가서 죽은 사람을 살피거나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감재사자 등 있다.

용마루 양쪽 끝에 설치하는 석조치미로 사찰의 규모 추측할 수 있다.
불석으로 만든 석조여래좌상
직부사자도
감재사자도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매월당(梅月堂) 영당(影堂)이 있는데 김시습(金時習)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남산 용장사 경내에 오산사를 지었으나 고종5년(1868)에 훼철되었다. 고종 15년(1878) 경주유림이 경주부윤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고 1998년 경주시에서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이르렀다.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은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雪岑)이며 조선 초기 문인으로 생육신 중 한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난 그는 유, 불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과 뛰어난 문장력으로 수많은 시와 저서를 남겼다. 생후 8개월에 글 뜻을 알았고 3세에 능히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5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일 중용하리란 약속과 함께 비단을 하사받기도 했다. 그의 이름인 시습은 논어의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매월당 ( 梅月堂 )  영당 ( 影堂 )

과거준비로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하던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대권을 잡은 소식을 듣자 보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관서, 관동, 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時四遊錄)에 그때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다. 31세 되던 세조 11년 봄에 경주 남산 금오산 용장사에서 37세 까지 성리학과 불교에 대하여 연구하는 한편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다.

김시습 ( 金時習 )&amp;nbsp; 영정

37세에 서울 성동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환속하는 한편 결혼도 했다. 벼슬길로 나아갈 의도를 갖기도 했으나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품고 다시 관동지방으로 은둔, 방랑을 하다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의 일기로 병사하여 일생을 마쳤다.
삼국유사 2권 기이(紀異) 2편 만파식적(萬波息笛)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닷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五色)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기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