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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대왕바위 앞 해안가에는 전국에서 온 불교 신도들이 용왕제 행사의 일환으로 물고기 방생을 하면서 소원을 비는 곳이다. 또한 무당들도 와서 굿을 올리는데 이곳이 영험하여 최영장군처럼 투구 쓰고 갑옷 입은 문무대왕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여기 대왕바위는 해변에서 약 200m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자연바위로 신라 최초 화장을 하여 동해용 된 사적 제158호인 문무대왕 수중릉(水中陵)이다. 동해용이 된 문무대왕에게 많은 불교신도들이 소원을 빌었고 무당들은 영험한 기를 받으려고 여기를 찾았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대왕바위 앞 해안가에는 유달리 갈매기가 많다.

68171일 지략가이자 삼한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대왕(재위기간 : 6616~ 6817, 201개월)이 승하하였다. 문무대왕의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 이였다. 어머니는 문명 왕후이며, 김유신 장군의 누이였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태종 원년(654)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곧 태자로 책봉되었다. 태자 때부터 삼한통일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660년 백제 정벌 전쟁 때는 태종 무열왕을 대신하여 신라군을 직접 지휘하였다. 661년 태종 무열왕이 죽자 신라 제30대 왕이 되었고 676년 대동강 이남 땅을 장악하여 삼한 통일의 과업을 성취하였다.

 주목할 것은 문무대왕의 능으로 신라 최초 불교식 화장을 하였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수중릉이다. 이후 화장을 한 신라왕은 34대 효성왕, 37대 선덕왕, 51대 진성여왕이며 진성여왕은 화장 후 동해바다에 산골(散骨)하여 능이 없다. 그리고 38대 원성왕은 화장 후 매장을 했기 때문에 괘릉이라는 능이 있다. 문무대왕은 말년에 병환으로 세상 떠나기 전 불교 법식으로 화장하고 장례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별세 후 10일 지나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을 하였고(이화소장 : 以火燒葬) 다음 해 5월 이곳 봉길 바닷가 바위섬에서 장골(藏骨)하여 10개월간의 장례 여정을 마쳤다.

신라 최초 화장을 하여 동해용 된 사적 제158호인 문무대왕 수중릉(水中陵)

문무대왕의 수중릉 여부는 과거 학계에서 문무왕의 장례가 산골이냐, 장골이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에 71년대 신라오악조사단과 KBS 역사스페셜에서 문무대왕릉의 진위여부를 조사하였고 그 결과를 보면, 문무대왕릉은 큰 네 개의 암초에 십자가 모양의 물길(3.5m)이 동, , , 북으로 형성되어 있고 십자가 모양의 중앙에는 웅덩이 모양이 형성되어 있고 거북이 등 모양의 바위(길이 3m, 2.2m)가 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물길은 동쪽에서 물이 들어와서 서쪽으로 물이 나가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KBS 역사스페셜 조사 때 동쪽 입구를 막고 양수기로 배수를 한 후 상세 조사를 해보니, 거북이 등 모양 바위는 암반 위에 평평하게 자리 잡아 둘 사이에 공간 없고 부장품 또한 없었다. 웅덩이의 수심은 1.5m이고 네 개의 암초는 하나의 암반 위에 형성되었고 거북이 등 모양 바위 또한 이 암반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였다. 여기서 인위적으로 작업을 한 흔적은 거북이 등 모양 바위 주위 사면은 정으로 다듬었고, 서쪽으로 빠지는 출구도 낮게 깎았고 거북이 등 모양 바위는 이동하여 남북방향으로 자리 잡아 눕히었다. 즉 화장 후 문무대왕의 유골을 장골하기 위해 동해 바위섬 일부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였다. 문무대왕릉의 위치 근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2 만파식적(萬波息笛)과 문무대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본 이견대(利見臺) 위치를 통해 알 수 있다.

문무대왕 별세 후 10일 지나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을 하였고(이화소장 : 以火燒葬) 다음 해 5월 이곳 봉길 바닷가 바위섬에서 장골(藏骨)하여 10개월간의 장례 여정을 마쳤다.
문무대왕릉의 평면도와 실측도 : 바닷물의 출입과 중앙에 있는 거북이 등 모양의 바위를 실측적으로 보여준다. 화장 후 문무대왕의 유골을 장골하기 위해 동해 바위섬 일부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였다.

그럼 문무대왕의 화장터는 어디 일까?

일제강점기 1930년대말 조선고적연구회 명의의 보고서에 낭산 배반동 능지탑터를 화장지 유적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1969년부터 197911년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의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배반동은 옛 부터 대문(大門)터라고 불러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장장소인 고문외정(庫門外庭)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능지탑은 197810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791125일에 공사 완료한 모습이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낭산 경주 배반동 낭산에 위치하고 있는 능지탑(陵旨塔)
1969년부터 1979년 11년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의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으로 판단되고 배반동은 옛 부터 대문(大門)터라고 불러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장장소인 고문외정(庫門外庭)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낭산(狼山)은 신라시대부터 신이 내려와 거닐던 숲이라 하여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받았다. 그리고 낭산을 위에서 보며 형상이 이리처럼 생겼다하여 이리 狼字에 낭산(狼山)이라고 불렀다. 낭산 주변에는 선덕여왕릉, 문무대왕이 호국사찰로 건립한 사천왕사터, 왕실 원복 사찰인 황복사터, 신문왕릉 등이 있다.

사천왕사터 당간지주 옆 벌판에 있는 동귀부와 서귀부
사천왕사터 서귀부(도로변)
마치 살아있는 거북을 연상케한다.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문무대왕비가 사천왕사터의 서귀부에 있는 비임을 확인되었고 서귀부 방향은 능지탑을 바라보는 북쪽방향 인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향으로 바뀌어졌다문무대왕비에는 앞면에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및 백제평정에 관한 내용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 및 비문의 명이 새겨있다.

선상에서 본 문무대왕릉

문무대왕은 왜 화장을 하여 용이 되려고 하였을까?

그것은 통일신라초기 왕권강화이다. 성골에서 진골 金氏 무열왕권의 정당화와 통일신라시대 전제왕권 확립이다. 이전 성골 시대를 살펴보면 신라왕실의 권위와 호국을 상징하는 보물인 신라삼보(新羅三寶)가 있었다. 황룡사 장육상(皇龍寺 丈六像), 천사옥대(天賜玉帶), 황룡사 구층목탑으로 모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진흥왕이 조성한 황룡사 장육상,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왕이 된 진평왕 이 천사(天使)에게 받은 옥대, 신라 최초 여왕인 선덕여왕이 나라 위기 때 완공한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즉 문무대왕은 왕즉룡, 사후에 통일신라 진골왕권의 수호용이 된 것이고 더불어 만파식적을 아들 신문왕에게 전달하여 왕권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왜의 침입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초기에 침입이 33회로 주로 3, 4, 5월이며 문무왕대에 없었고 문무왕 이후 왜는 신라에 조공을 바치고 우호적 이였다. 왜는 삼국통일 전개 과정에서 백강전투에서 백제의 지원군이 출현하였고 패배 이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권 제6 신라본기 제 6 문무왕 ()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 왕후이며,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고, 유신의 누이였다. 유신의 맏누이가 꿈에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두루 펴졌다. 그녀는 꿈을 깨고난 후에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동생은 장난삼아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라고 말하고, 꿈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우리 집이 마침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고 말하고, 춘추와 함께 집으로 왔다. 그는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을 꿰매도록 하였다.

그러나 맏누이 보희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그녀의 수수한 화장과 경쾌한 의복, 그리고 어여쁜 얼굴은 눈이 부시는듯하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곧 혼인을 청하여 혼인식을 올렸다. 그녀는 바로 임신하여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를 법민이라 하였다. 왕비는 자의왕후이니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영휘 초에 당 나라에 갔을 때, 고종이 대부경 벼슬을 주었다. 태종 원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태자로 책봉되었다. 현경 5년에 태종이 당 나라 장수 소정방과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 7 문무왕 ()

가을 71,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속설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다. 왕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만하였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현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 왕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봉길 지명 유래는 慶州 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鳳吉"이라 부르다가 조선 말기부터 奉吉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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