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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은 루이 14세가 17세기말 베르사유로 궁권을 옮기기 전 까지 사용되었던 궁궐로써 800년 동안 증축공사의 결과가 현재의 모습이다. 1970년대까지 경제부처와 미술관으로 나누어 사용되었는데 1981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전체가 박물관으로 변경, 사용되었다. 6만㎡의 전시실은 리슐리외관, 숼리관, 드농관 등 3곳으로 나뉘며 발권장소인 지하층을 포함하여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11개 분야로 방대하여 전부를 감상하려면 일주일 정도가 소요된다.

최초의 루브르는 12세기말 늑대로부터 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해 필리프 오귀스트가 축조하였다. 이름의 유래는 늑대를 뜻하는 라틴어 Lupus, 즉 프랑스어 Loup에서 유래가 된 것이다. 당시에는 망루를 지키는 문지기 숙소와 감옥에 불과하였는데 14세기부터 궁궐로써 확장을 거쳐 거듭나게 되었다. 궁궐이 베르사유로 옮긴 후부터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사무실과 유명 예술가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혁명 때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압수한 재물 660여점을 전시하기 위해 1793년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어다. 이후 계속된 정비와 확장을 통해 나폴레옹 3세 섭정기간 때인 1880년에 마무리가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 정문에 위치하고 있는 유리 피라미드는 1981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에 의해 지어졌고 건축가 이오 밍 페이의 작품으로 1989년에 완공되었다. 피라미드의 정사각형 바닥면에서 꼭짓점까지의 높이는 21.64m, 603개의 마름모와 70개의 삼각유리로 95톤의 철근이 지지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는 박물관 안내소와 유무인 발권장소가 있다.
총 5개의 층과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리슐리외(루이 13세 때 재상) 관, 쉴리(앙리 4세 때 재상) 관, 드농(루브르 박물관 초대 관장) 관이다.

 

암사슴과 함께 있는 사랑의 여신 아르테미스. 일명 베르사유의 다이아나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한 농부에 의해서 에게 해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었고 당시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샤를 프랑스와 드 리파르도가 루이 18세에게 바쳤다. 기원전 130 ~ 100년 당티오슈가 제작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331년 ~ 323년에 제작 된 헬레니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이다. 기울어진 날개의 각도, 왼쪽 다리의 위치, 바람이 불어 여신의 다리를 휘감는 듯한 옷의 표현은 조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각상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15세기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가 유다 산골의 즈가리아 집에 있는 엘리사벳을 만나는 것을 그린 작품이다. 고령으로 임신한 엘리사벳이 무릎을 꿇고 마리아에게 존경을 표하는데 마리아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사벳의 어깨를 짚으며 그녀의 행동을 만류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뒤에 서 있는 두 여자는 마리아 야코비와 마리아 살로메이고 마리아 야코비는 배가 부풀었고 마리아 살로메는 두 손을 모았다.
화면배경에는 개선문과 항구도시 전경이 보이는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는 개선문은 승리의 문, 항구는 구원의 기항지를 의미하는 메타포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은 1503년에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피렌체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이다. 중앙에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 여인이 마라아의 모친 성 안나이다. 어머니의 무릅에 앉아있는 성모 마리아는 양의 등을 타려는 아기 예수를 양과 떼어놓으려고 하고 있다. 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희생양의 상징으로서, 마리아의 행위는 아들을 험난한 운명으로부터 막고 싶은 모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 안나의 머리를 정점으로 하여 삼각형의 오른편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어린 양으로 구성 된 피라미드 구도다.
스푸마토 기법은 윤곽선을 뚜렷하게 그리지 않고 희미하고 뿌옇게 그리는 기법으로서, 인물이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주는 효과가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라노 귀족 부인의 초상”은 15세기에 밀라노에서 그린 작품이다.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도발적인 눈, 꽉 다문 입, 밖에서 들어온 반사 된 빛까지 고스란히 담은 정교한 눈동자의 이 여인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요소다. 이 작품에는 손이 그려져 있지 않고 손 부분이 파라페토라고 불리는 난간으로 가려져 있는데 당시 이탈리아 화가들이 인물에 현실감과 공간감을 불어넣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요소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바위산의 성모”는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작품으로 1483년 밀라노의 산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1485년에 완성한 것으로 밀라노에서 제작한 첫 작품이다. 성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을 하던 중 세례자 요한을 만났다는 전설을 그린 것으로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순간을 묘사한 작품이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천사와 예수가 피라미드 구도로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1503년 비단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가 그녀의 초상화를 다빈치에게 부탁해서 그린 작품이다. 모나는 이탈리어로 부인을 뜻하고 리자는 이름이다. 프란체스코가 작품료를 지불하지 않아 다빈치가 1519년 사망하기까지 그가 가지고 있었고 사망 후 그의 제자에게 남겼다.
피라미드 구도 속에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의 여인이 팔걸이의자에 몸에 살짝 의자에 앉아 있다. 모나리자의 원본은 관리차원에서 지하 아틀리에에 보관되어 있고 전시관에 걸린 작품은 최첨단 기법으로 그려낸 복제품이다.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

로렌조 로토의 “간통한 여인과 예수”는 16세기 작품으로 이소케팔리아 원칙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소케팔리아 원칙은 다수의 등장인물로 짜이는 역사화의 구성에서 사람들의 머리 높이를 균등하게 맞추는 방식이다. 간음한 여인과 손바닥을 펴서 군중의 공격에 대한 저지, 만류, 반대하는 예수와 노란 옷을 입은 늙은 율법학자를 전면 중앙에 하나로 묶고, 손가락을 치켜들고 모세의 율법을 들먹인 남자, 병장기류를 든 군인 등 여인의 처벌을 요구하거나 예수의 반응을 떠보는 주변 무리를 묶어서 두 그룹 사이에 긴장감 넘치는 대치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1814년 나폴레옹의 여동생 캐롤린 뮈라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다. 오달리스크는 터키어 오달릭(odalik)에서 유래한 말로, 규방의 여인을 뜻한다. 여인의 나체를 극도로 미화한 작품으로 나폴레옹 제국의 멸망으로 인해 주문자로부터 값을 치르지 못해 화가의 손에 남겨졌다. 앵그르의 스승은 자크 루이 다비드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었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 은 나폴레옹의 대관식 3개월 전인 1804년 9월 황제로부터 직접 청탁을 받아 그린 작품으로 2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하였다. 1804년 7월 국민투표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나폴레옹이 아내 조세핀에게 직접 황관을 씌워 준 후 본인은 스스로 양손으로 황관을 썼다. 전통적인 대관식에는 교황이 황관을 씌워주는데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황관을 쓰는 쪽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뒤쪽에 앉아 단지 축복하는 손짓만 하고 있다. 대관식 당시 조세핀은 마흔이 넘어 는데 우아한 여인으로 묘사되었다.
황관을 받는 인물은 그의 처남이자 나폴리 국왕인 뮈리이고 조세핀의 두 시녀 뒤의 선 다섯 여인들은 나폴레옹의 여형제들로 첫 번째 여인이 데리고 선 사내아이는 나폴레옹과 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 나폴레옹 샤를이다. 황관을 받는 인물 뒤의 그림 중앙에 앉아 있는 여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는 1783년 루이16세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신고전주의의 첫 작품으로 출장 전 호라티우스 형제를 묘사한 작품이다. 기원전 669년경에 로마와 알바(Albains)의 전쟁에서 싸웠던 사돈관계의 두 가문의 아들들, 즉 로마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와 알바의 큐라티우스 가문의 세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그림의 왼쪽은 호라티우스 형제의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세 자루의 칼을 주면서 제국을 위한 죽음이나 전쟁의 승리를 맹세하게 있고 오른쪽은 고통스러워하는 큐라티우스로 시집 갈 누이 카밀라, 큐라티우스에서 시집온 아내 사비나 그리고 어린 손자를 감싸 안고 있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다.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은 1819년 작품으로 1816년 7월 2일 영국에서 프랑스로 반환된 세네갈의 생루이 섬에 정착하기 위해 약 400명을 태운 군함 메두사호가 좌초되어 13일 동안 표류하였고 15명만 구조된 비극적인 사건을 그렸다.
작품은 생존자들이 13일간의 표류 뒤 수평선 멀리 구조선을 발견하는 순간을 묘사하였다. 먼 곳에서 지나가는 배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인물들과 무릎에 놓인 죽은 아들을 애도하는 아버지, 뗏목 가장자리에 곧 파도에 떠내려갈 듯한 시체들 등 피라미드 구도다.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1850년도 유화 작품으로 1800년 봄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하여 제2차 이탈리아 원정 때 나폴레옹 보나파트트의 모습이다. 말 대신 노새를 타고 알프스 설산 그랑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모습으로 추위를 막기 위하여 회색 코트를 입었으며 차갑고 힘겨워하는 분위기로 실제 모습에 가깝도록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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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目島)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에 있는 무인도로 모양이 물고기 눈처럼 생겼다고 하여 부르게 되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도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명칭이 춘도(椿島)로 바뀌었는데 청산해야 할 일제잔재이다. 일본에서는 동백나무를 한자로 춘(椿)자를 쓰는데 갑자기 생기는 불행한 일을 춘사(椿事)라고 한다.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경주 양북 동해천(東海川)을 대종천(大鐘川)으로 바꾼 것처럼 목도(目島), 동백도(冬柏島)를 춘도(椿島)로 바꾼 것이다.

목도는 면적은 약 15047, 둘레는 440m으로 동해안 섬 중 유일한 상록수림(常綠樹林)으로 동백나무, 후박나무, 사철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으로 절경을 이루어서 1962127일에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대섬(竹島)이라고도 불렀고 신라 때에는 대나무를 길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주민들이 대나무 화살을 만들어 나라에 바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나무는 점점 사라지고 동백나무·후박나무 등 각종 상록수림이 그 자리를 메웠다.

1970, 80년대 울산 최고의 동백꽃 관광지로 꽃피는 봄이면 붉은 동백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고 45인승짜리 배 두 척이 운항했다. 그러나 점차 섬 생태계가 훼손되자 1992년부터 안식년제를 도입하면서 현재까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언젠가 생태계가 복원되어 개방되기를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목도를 소재로 한 대중가요도 있다. 가수 하춘화(河春花)197345에 부른 목도는 내 고향이다. 1970년대 울산이 농어촌에서 산업 도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향이 공장부지로 편입되어 고향을 떠나는 이주민들의 망향과 실향의 정서를 노래로 담고 있다.

 17세기 이곳 방도리(方島里)는 울산도호부 청량면 목도리 목도포구로써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1693년과 16962회에 걸쳐 독도로 출발한 포구이다. 이들은 독도를 지키기 위해 독도에서 돗토리현까지 건너가 싸웠다. 안용복은 이곳 목도 세거 광주 안씨 출신이다. 박어둔은 충청도 이산현(논산시 노성면) 소론명가 출신으로 증조부는 가선대부(2) 박잉석, 조부는 통정대부(3) 박국생이며 아버지는 정병 박기산이다. 조부 박국생이 1646(인조 24) 3월 그 지방의 유탁(柳擢)과 한양의 권대용(權大用)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하여 고향 이산현에서 살수가 없게 되자 울산으로 이사 왔다.

방도리(方島里)는 사방(四方)의 방()과 목도(目島)의 도()를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다. 방도리에서 어부와 인어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동백도설화(冬柏島說話)라 하여 용왕의 딸인 인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어부에 대한 보은담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마음씨 착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보니 그물에 인어가 들어 있었다. 다른 어부들은 인어를 팔아 돈을 벌 수 있다고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 어부는 인어가 불쌍해 풀어 주자고 하였다. 이 어부는 다른 어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어를 구해 주고 다른 어부들로부터 매를 맞고 쓰러졌다.

어부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부는 용궁에 있었다. 인어는 용왕의 딸이었다. 인어는 자신을 구해 준 어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용궁으로 데려 온 것이다. 용궁에서 다시 만난 인어는 용왕에게 어부와 인간 세상에 나가 살겠다고 하였고 용왕은 딸을 위해 울산의 온산에 섬을 만들었다. 육지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하는 소리와 함께 물길이 하늘 높이 치솟으며 바다로부터 섬이 솟아올라와 지금 모양의 목도가 되었다. 이후 섬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갔다.

 현재 목도는 쌍용정유공장에 둘러싸여 외롭게 홀로 떠 있다. 낚시꾼들이 가끔씩 찾아 와서 외로움을 달래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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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산(日光山)은 일광면 삼성리에 있는 산으로 안산암의 암주(岩柱)로 되어 있고, 일광 신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해발 385m로 그리 높지 않고 비교적 완만하나 정상부 주변부터는 약간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의 형상은 종을 엎어놓은 듯한 종상형이고 산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면 경관이 뛰어나며 일광 바다가 아늑하게 보인다.

일광산 정상에서 바라보 보면 펼쳐지는 일광 앞 바다

임도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인근 주민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주 찾는 산이다. 또한 MTB 동호회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읍지에는 아침 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이라고 하여 일광산이라고 하며 기장 향교가 기장읍 교리로 옮기기 전에 는 향교의 주산이었다.

남쪽으로 바라도 본 LCT와 해운대 장산

일광산(日光山)에 오르는 방법에는 임도를 이용하는 것과 소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소로를 이용하는 것이 운치가 나고 산행하는 맛이 난다. 가장 빨리 정상까지 가는 방법은 횡거사까지 차로 와서 주차 한 후 걸어가면 30분이면 도착한다. 그러나 임도의 경사가 심해 운전 할 때 주의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방법은 백두사에서 출발하여 좌측과 우측에 조성 된 임도 또는 소로를 따라 올라간다.

일광면 백두사
백두사 좌측 임도에 있는 안내표지판
백두사 좌측에 조성 된 임도와 소로 입구
소로에서 만난 정3품 비석(증 통정대부 김해김씨지묘)

소로를 따라 산행을 하면 유난히 다양한 바위를 자주 만난다. 아무래도 산행의 묘미는 흙과 바위의 산세를 감상하고 꽃과 나무의 생명력을 느끼는 것일 것이다. 차성가(車城歌) 삭출금부(削出金芙) 일광산은 만장봉(萬丈峯) 높았는데~그 옛날 높고 높은 산봉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
일광산 정상 표지석
멀리 보이는 고리원자력발전소
하산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횡금사 방향을 안내하는 표지판
좌측 임도로 하산 때 만나는 휴게장소
백두사와 예지골못 갈림길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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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옛길은 산성산과 일광산 사이 기장읍 서부리 용소골에 있는 계곡 길이다. 용소골 지명은 옛날 이곳에서 용이 났다고 하여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 골짜기는 청강천 상류계곡에 해당되고 하류에는 둑을 막아 만든 용소골저수지가  있고 주변은 용소웰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기장초등학교 자리에는 옛날에 기장 동헌이 있었는데 동헌에서 남으로 큰 길을 만들고, 길의 동쪽은 동부동(東部洞), 서쪽은 서부동(西部洞)이라 하였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서부동 일부가 서부리로 되었다,

용소윌빙공원 입구에서 바라본 산성산(성산)
용소웰빙공원 입구. 직진방향으로 저수지와 나란히 조성 된 길을 따라가면 기장 옛길 이정표를 만난다.

기장 옛길은 신라 갑화양곡현(505년)에서 비롯하여 이전 선사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넘나들던 유서 깊은 길이자 기장의 관문길이다. 옛날 용소 계곡 길의 상류 지역은 험한 바윗길로서 사람이나 우마차의 통행이 어려워 잔도(棧道)를 만들어 이용하였다. 이 옛길은 지역 주민들의 나들이 길이자 양산, 동래, 김해를 비롯하여 멀리 서울을 내왕하던 관리와 백성, 그리고 장꾼, 보부상, 남사당 등 많은 사람들이 넘나들었고 대한제국 말기까지 존속된 길이였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2년 동래~기장간의 신작로 개설로 자연히 폐도 되었다. 최근 기장군에서는 이 옛길(약 200m)을 문화유적지 차원에서 보존 및 관리해 왔고 잔도(棧道)도 재현시켰다.

부산포항고속도로 교각 밑에 세워진 기장 옛길 안내 표지판
최근 기장군에서는 이 옛길(약 200m)을 문화유적지 차원에서 복원한 기장 옛길 입구

기장 옛길을 답사하기 위해서는 산성산 또는 성산 북쪽에 위치한 용소웰빙공원에 찾아오면 된다. 용소웰빙공원 입구에서 직진방향으로 저수지와 나란히 조성 된 길을 따라가면 부산포항고속도로 교각 밑을 지나다 되는데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막과 밭을 만난다. 5분 정도 걸어가면 기장 옛길 표지석을 마주하게 된다. 짧은 구간의 한적한 옛길을 거닐다 보면 조선시대 기장에서 군수 및 현감을 지낸 이해륜(李海崙), 엄신영(嚴信永), 손영희(孫永禧), 손경현(孫慶鉉), 오영석(吳榮錫), 송재우(宋載遇), 이경우(李敬佑) 등 7명이 1751년부터 이임으로 떠날 때 계곡 수 좌측 바위와 길 우측 바위에 이름을 새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중 엄신영(嚴信永)과 손경현(孫慶鉉)은 시랑대에도 각석(刻石)을 하였다.

맨 먼저 볼 수 있는 각석은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으로 계곡 수 건너편 바위에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을 새겼다.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

맨 먼저 볼 수 있는 각석은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으로 계곡 수 건너편 바위에 행(行) 군수(郡守) 이해륜(李海崙)을 새겼다. 1897년 6월에 기장 군수로 부임해 왔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남아 있다. 여기 군수(郡守)는 기장이 기장현에서 1894년 갑오개혁이 단행되고 1895년(고종32년) 2차 개혁 때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부(東萊觀察府)가 되었고 그 아래 군이 되었을 때다.

다음 바위에는 엄신영(嚴信永)의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이 새겨져 있다.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

다음 바위에는 엄신영(嚴信永)의 행(行)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이 새겨져 있다. 군수(郡守) 엄신영(嚴信永)은 1905년에 부임하였고 시랑대 바위에 엄신영 제우영(嚴信永 弟宇永)’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904년 4월에 세워진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와 1904년 10월에 세워진 유애불망비(遺愛不忘碑)가 남아 있다.

손영희(孫永禧)의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가 새겨져 있는 바위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

연이어 손영희(孫永禧)의 행(行)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가 새겨져 있고 군수(郡守) 손영희(孫永禧)는 1901년 8월에 부임하여 1903년에 이임하였다. 전임은 중추원 의관이었다.

계곡 수 좌측 바위에 새겨진 마지막 각석은 손경현(孫慶鉉)의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

계곡 수 좌측 바위에 새겨진 마지막 각석은 손경현(孫慶鉉)의 현감(縣監) 손경현(孫慶鉉)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다. 기장 부임 전 손경현(孫慶鉉)은 홍문관 교리로 1894년 9월에 현감(縣監)에 부임하여 1895년 11월에 이임하였고 이곳 시랑대의 글귀와 절경을 본 후 주변 바위에 세 글자 학사암(學士岩)과 시(詩)를 남겼다. 그리고 『기장현 읍지』 형성조에 의하면 “기장 현감 과 홍문관 교리를 지낸 손경현이 놀러 와서 학사암(學士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5년 5월에 세워진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남아 있다.

옛길을 거닐다 보면 길가 안내 표지판에는 여근석(女根石)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바위 형상을 따서 여근석이라고 부른데 지형변경으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신앙(性信仰) 즉 성기숭배신앙(性器崇拜信仰)은 신석기시대 이후 형성된 것으로 개인적인 목적은 기자(祈子)나 기복(祈福)이고 국가나 공동체 집단의 목적은 다산(多産)과 풍년, 풍어, 마을의 평안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유교의 영향으로 남호선호사상과 칠거지악에 의해 여인들의 고통과 아픔이 여근석(女根石)에 남아있으리라 생각된다.

옛길 우측에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바위에 있는데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와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이다.

옛길 우측에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바위에 있는데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와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이다.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은 1892년 10월에 부임하여 1895년 11월에 이임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3년에 세워진 생사단(生祀壇)과 애민구해불망비(愛民捄海不忘碑)가 남아있다.

현감(縣監) 오영석(吳榮錫)과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의 각석

현감(縣監) 송재우(宋載遇)는 무관으로 1751년 9월에 부임하여 1753년 6월에 사직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휼민선정 만고불망비(恤民善政 萬古不忘碑)가 남아 있다.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 영세불망(永世不忘)

군수(郡守) 이경우(李敬佑)는 1895년 5월에 부임하여 1896년 9월에 이임하였고 동부리 공덕비군(東部里 功德碑群)에 1896년 9월에 세워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남아 있다.

산성산의 야경
용소웰빙공원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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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자 앤소니 퀀 주연의 영화 노트르담의 곱추의 배경이 된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고딕의 대표 양식으로 시테섬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과 함께 중세 고딕 양식의 3대 성당에 포함되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1,302년 필리프 4세 때 삼부회가 개최되었고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렸다. 또한 1,804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드골이 프랑스 해방을 축원하며 국가를 불렸고 프랑스 전 대통령 미테랑의 장례식도 치러졌다. 그리고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2019415일 오후 650분경 대성당 지붕에서 발생한 화재(火災)로 탑과 그 주변의 지붕이 붕괴되었고 화재는 약 10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프랑스 국민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성은 매우 커서 화재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재 재건 및 복구 중이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4년까지 복구를 완료 하겠다고 한다. 2017년 파리 여행 때 노트르담 대성당 추억을 돌이켜 본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왼쪽 문으로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다.

1160년 파리의 부주교였던 쉴 리가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기 위해 짓기 시작하여 200년이라는 공사 기간을 거쳐 1363년에 완공되었다. 노트르담의 뜻은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로자스 바로 앞 3명의 조각상은 가운데가 성모 마리아이고 좌우에는 아담과 이브인데 성당 정면의 모든 조각과 장식들이 이 조각상에 경의를 표하는 구도로 설계되었다. 성모 마리아,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아래에는 28명으로 이루어진 제왕들이 떠받치고 있다. 가고일(gargoyle)을 비롯하여 성당 처마에 달려 있는 다양한 낙수받이 조각상 또한 보는 이의 흥미를 자극시킨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가운데 문은 최후 심판의 문, 왼쪽 문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성녀 안나 각각 조각되어 있다. 성당내부는 성경 내용을 주제로 조각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이 특히 뛰어나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뒤쪽은 예쁜 화초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어 여행으로 지친 몸을 조용히 다독거리기에 좋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또 다른 볼거리는 푸앵 제로(Point Zero)이다. 노트르담 정문에서 앞으로 약 50m 떨어진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디종까지 거리는 310km이다. 푸앵 제로의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가 현재 푸앵 제로의 위치다.

푸앵 제로(Point Zero)는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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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돌 기념하기 위해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에 의해 파리 만국 박람회 때 만들어졌다. 현재 프랑스의 유료 관광 명소 1위이다.
에펠탑은 1930년대 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324m. 무게 10,000톤으로 1964년에 프랑스 국가유산, 199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에펠탑을 만들 당시에는 문학가 모파상을 비롯한 보수 지식인들은 파리의 품격과 격조를 떨어뜨린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탑이 완공되고 관광객에게 개장했을 때, 유럽 각 국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5개월 만에 2천만 명이나 이르렀고 반대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에펠탑에는 전당대가 1층 전망대(57m), 2층 전망대(116m), 꼭대기 전망대(276m) 등 3곳이 있다. 2층 전망대에는 기념품 Shop, 레스토랑 등 있는데 여기 레스토랑을 이용하려면 3~4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당연히 꼭대기 전망대에서 보아야만 파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꼭대기 전망대(276m)에서 바라 본 파리시내와 세느강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계단을 이용하면 바로 올라 갈수 있는데 “Stair Only”라고 표기 된 계단을 이용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에펠탑의 진면목은 밤에 있다. 낮에는 경쾌한 모습이지만 밤에는 아름답지 못해 화려하다. 마치 밤을 깨우는 전령사 같다. 3만개가 넘는 전구와 스포트라이트 조명은 새벽 1시까지 탑을 밝히는데 저녁 7시부터는 정시마다 5분간 플래시 조명이 별처럼 반짝인다.

밤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에펠탑

특히 파리 야경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세느강 유람선을 타면 더욱 기억에 남는 파리가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유람선이 바토무슈 크루즈다. 유람선 코스는 앵발리드와 앵발리드 다리, 알렉상드로 3세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등 시작으로  오르세 미술관, 시테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끝으로 시테 섬을 돌아서 콩시에르주리 왕궁 등 지나서 바토무슈 크루즈 선창장에 도착한다. 다양한 다리도 많이 볼 수 있어 파리 야경을 만끽할 수 있다.

바트무슈 유람선 선착장
유람선에서 바라 본 에펠탑
알렉상드로 3세 다리. 세느 강에 있는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다. 1892년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을 체결 할 때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3세 이름의 따서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기념으로 만들어 졌다.
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은 루이14세 때 지어진 궁전으로 지금은 프랑스 하원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
노트르담 대성당
콩시에르주리 왕궁은 프랑스 초기 왕들의 왕궁으로 프랑스 혁명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퐁뇌프 다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앙리3세 때 짓기 시작하여 앙리4세 때 완공되었다.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의 배경이 된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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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산에서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보리사(배반동 산 66-2)는 비구니 사찰로 三國史記에 헌강왕릉(憲康王陵)과 정강왕릉(定康王陵)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곳에 8세기 불상인 보물 제136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보리사는 三國史記기록 이전부터 있었으며, 9세기에도 사찰은 존속해 있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보리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공사로 창건 당시의 가람 형태를 알 수 없다.

보리사 대웅전
보리사 삼성각과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

보리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경주 남산에서 신체, 광배, 대좌 모두를 갖추고 있는 불상으로 통일신라 중기를 대표하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재(石材)는 광배석 1, 신체석 1, 대좌 4(지대석 1, 상대복련좌 1, 간주 1, 하대앙련좌 1)로 총 6매의 별석(別石)으로 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은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조여래좌상의 육계(肉髻)는 이중(二重)으로 표현된 나발(螺髮)이 덮여있는데 머리와 얼굴 경계의 윤곽이 매우 뚜렷하다. 적당한 살이 오른 얼굴은 다소곳이 아래를 향한 눈과 미소를 머금은 입 등과 함께 평온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운 표정을 한 부처의 모습이다.  비대하지 않은 단정한 신체는 목에 삼도가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서 옷 주름은 층 단(層 段)을 이루며 신체 각 부위를 감싸고 있.

나룻배 모양의 광배(光背)는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이중주형(二重舟形)으로 만들어 졌다. 광배의 내부 문양은 연꽃, 보상화(寶相華) 등 화문(花紋)과 화염문(火焰紋) 그리고 화불(化佛) 등으로 꾸며져 있다. 본존의 신체에 따라 굵은 선이 이중으로 돌려졌는데 선과 함께 큼직한 보상화 등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선의 외부에는 불꽃 모양의 화염문, 내부에는 6구의 화불과 화문이 장식되었고 광배 상단 끝에도 하나의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의 뒤 모습을 보면 상단이 반파(半破)되었음 알 수 있다. 최근 보존처리하여 복원되었다.

화불(化佛)과 화불사이에는 연꽃과 당초가 새겨져 있고 본존의 신체에 따라 굵은 선이 이중으로 돌려졌는데 선과 함께 큼직한 보상화 등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대좌는 지대석 위에 복판연화대좌(複辦蓮華臺座)를 놓았고 그 위는 팔각받침을 3단으로 마련한 후 우주(隅柱)가 각출된 팔간 간주(竿住)를 세운 후 앙련(仰蓮)의 상대석(上臺石)을 얹어 놓은 구조이다. 이 상대석 역시 아래에서 간주와 만나는 부분에는 2단의 팔각 받침석을 마련했는데, 앙련(仰蓮)의 연화문은 단판(單瓣)이면서 중층(重層)으로 각출시켜 넉넉하게 마련하였다.

석가여래좌상은 수인을 보면 항마촉지인으로 석가여래로 불 수 있는데 광배 뒷면에 약사여래를 조성하였기 아미타여래로도 볼 수도 있다. 사방불을 조성한 바위를 보면 약사여래 맞은편에 아미타여래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석공만이 알 수 있으리.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에 얕은 돋새김(양각)과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 마멸이 심하여 얼굴 등의 세부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불상 높이 1.3m로서 연화문이 이중(二重)으로 된 앙련연화대좌 위에 여래상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머리에 육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져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얼굴은 둥글다. 얇은 법의는 신체를 드러내 보여주며, 수인은 왼손에 둥근 약합(藥盒)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석조여래좌상과 거의 동일하게 조각했으나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외곽의 화염문은 어렴풋이 보인다.

정리되지 않은 석재가 모퉁이에 쌓여있다.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93)

보리사 주차장에 있는 안내표지판
마애불좌상 찾아가는 길. 마애불좌상은 보리사에서 남쪽 미륵골 기슭을 따라 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애불좌상은 보리사에서 남쪽 미륵골 기슭을 따라 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는 넓적한 반원형으로 높이와 폭은 약 2.4m이다. 바위를 감실형(龕室形)으로 광배를 움푹하게 파서 부조(浮彫)했는데 신체 높이는 1.2m이며 어깨 너비는 60이다. 바로 앞에는 제단석이 놓여 있다.

보리사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93호)
마애불좌상 바로 앞에는 제단석이 놓여 있다.

머리는 낮은 육계로 표현되었고 두 귀는 옷깃에 닿을 듯 내려왔고 삼도가 있는 목은 짧다. 살이 올라 퍼진 얼굴은 사각에 가깝고 궁()눈썹에 가는 눈, 넓적한 코와 꽉 다문 입술 등의 표정 속에는 친근한 표정을 느낄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수인은 옷 주름이 덮고 있어 알 수 없으며 결가부좌한 하체 역시 상체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덮여 있다. 대좌는 3잎의 중판연화가 앙련(仰蓮)인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조성연대는 석가여래좌상 보다 후대로 보고 있으며 통일신라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좌상을 조성한 바위뒤 끝부분에는 홈이 파여져 있는데 조성 당시 추가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것 같다.
마애불좌상에서 바라 본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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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 탑골 신인사지(神印寺址, 배반동 산69번지)에는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마애조상군이 있다. 또는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옆에는 옥룡암(玉龍庵)이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이 부근에서 神印寺라 새겨져 있는 기와명문을 발견했다고 하여 신인사지로 전해지고 있다. 마애조상군 남면에서 많은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옥룡암 앞 안내표지판. 탑골은 길이가 약 2km로서 동남산에서는 두번째로 긴 계곡이다. 탑골마을에서 개울을 거슬러 약 40m쯤 들어가면 옥룡암이라는 절이 있고 절 뒤에 부처바위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옥룡암 입구.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신인종의 창시자인 명랑법사가 당나라 수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에서 오색비단을 이용하여 절 모양을 만들고 풀로써 동, , , , 중앙의 오방신장을 만들어 신인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한 것처럼 사천왕사지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 신인사에서도 바위에 사방불(四方佛) 즉 마애조상군을 조성하고 창건하여 삼한통일을 위해 문두루비법을 또한 하였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수법을 보아 제작연대도 7세기중엽으로 판단된다.

마애조상군, 부처바위와 삼층석탑

마애조상군은 바위의 동, , , 북 사방(四方)에 여래(부처)를 새겨 조성하였기 때문에 사방불암(四方佛巖)이라고 하고 이곳 마을에서는 부처바위라고 부른다. 신라시대 사방불암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도 다양하다. 1988년 마애불상군에 대한 탁본 및 실측조사를 하여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탑상 등 35구가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고 200610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되어 총 37구가 새겨져 있다. 만다라(蔓茶羅)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 된 한 폭의 불화를 보는 느낌인데 밀교의 불경 내용을 요약한 삽도그림 변상도(變相圖)인 것 같다.

부처바위에 새겨진 상()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는 것, 연꽃잎이 넓게 표현된 것, 신라시대 불교 초기의 모습인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모습, 아미타여래의 눈이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낸 것, 상현좌를 한 것, 금강역사가 금강저를 들고 무장한 것 등 이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 북면

부처바위 북측 입면도

부처바위 중 가장 높은 높이 9m, 6m의 북면 바위에는 여래 1, 2, 비천(飛天) 2, 사자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다가장 눈에 띤 것은 탑으로 9층탑과 7층탑의 목탑이다. 9층탑은 기단부(基壇部)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2m, 너비 2.m이고 탑신부(塔身部)의 1층 탑신에는 출입문이, 2층부터는 창문이 2개씩 있다. 옥신(지붕)의 층이 올라갈수록 추녀의 넓이와 옥신의 높이는  조금씩 축소되어 3m 높이에서 삼각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옥신의 추녀 끝마다 풍경이 달려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높이가 2m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등 있다.

부처바위 북면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7층탑도 층수만 다를 뿐 모양이나 조각수법은 동탑과 유사하다. 신라 때 새겨진 이 탑들을 통하여 몽고군의 침입 때 불타 없어진 황룡사 9층 목탑(645)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9층탑과 7층탑 사이 위쪽 중앙에는 연화대좌 위에 좌상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가 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을 표시한 듯 옷자락에 두 손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수인은 알 수 없다. 둥근 두광은 햇살 같은 연꽃을 새겨서 밝고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연화대좌는 꽃잎이 네 개로 되어있는데 두 개의 꽃잎은 날개처럼 뻗어 있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준다.

9층목탑과 석가여래
9층목탑의 풍경
석가여래와 천개
7층목탑과 훔사자

여래 머리 위에는 부처의 권위를 표현코자 햇빛을 가려주는 천개가 있는데 보통 절 법당 안에서 볼 수 있다. 마름모를 한 줄로 투각한 넓은 천개 위에 두 겹으로 연꽃잎을 장식하였고, 밑으로는 헝겊으로 접은 수실을 늘인 다음 포장을 늘여 놓았다. 이 또한 바위를 통해 신라시대 천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9층 목탑과 7층 목탑 앞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데 불국정토를 지키는 성스러운 짐승이다. 9층탑 앞 사자는 입을 벌리고 오른쪽 발은 힘차게 땅을 딛고 왼발은 들어 올렸으며, 꼬리는 깃발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 날리고 있다. 목에 털이 없어 암사자로 보인다. 7층탑 앞 사자는 입을 다물고 오른발을 들고 있으며, 꼬리가 아주 복잡하다. 목에 긴 털이 많아 숫사자로 보인다. 입을 벌린 사자는 아사자라 하고 입을 다문 사자는 훔사자라 하는데,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음과 양을 합친 모든 세계를 부처님이 다스린다는 뜻이다.

9층목탑 아래 아사자
7층목탑 아래 훔사자

천개 위로 비천(飛天) 두 구가 날고 있는데 아름다운 천녀들이 하늘을 날면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는 모습이다.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천개 위로 비천(飛天) 두 구가 날고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 서면

부처바위 서측 입면도

높이 6m, 6m의 서면 바위에는 여래 1, 비천 2, 수목 2구 등 5구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좌 위에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 神樹가 늘어져 있고 왼쪽에는 대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있다. 약사여래는 네모에 가까운 갸름한 머리에 자그마한 육계가 솟아 있고, 귀는 어깨에 닿아 있으며, 가는 눈은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길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근엄한 표정이다머리에 비해서 조금 작은 몸체는 반듯하고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평행으로 놓여 있고 두 손은 선정인 같은데 옷자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두광은 연주문으로 둥글게 연꽃을 새기고 그 가장자리에 구슬을 늘어뜨려 있고 두광 주위에는 화연문모양으로 불길이 새겨져 있어 화려하다.

약사여래

여래 위에 있는 비천상은 피리를 불면서 날아가고 있고 여래 왼쪽의 비천상은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어렵다.

약사여래 위의 비천상으로 마멸이 심하다.
약사여래 왼쪽의 비천상으로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 동면

부처바위 동측 입면도
2006년 10월 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된 위치

북쪽으로부터 첫 번째 바위 면에는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가 있다. 머리 위에 나지막한 육계가 솟아있고, 눈은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내고 있다.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이중으로 새겨져 있고 두광의 외곽은 연주문(連珠紋)으로 둘러져 있다. 두 팔은 경사를 이루면서 연결되어 삼각형에 가까운 몸체를 이루고 있다. 풍성한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편안하게 놓여 있다. 여래 왼쪽에는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연꽃에 앉아 있는데 양 어깨에는 천의가 덮여져 있고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 합장하고 얼굴은 여래를 향하고 있다. 또한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첫번째 바위의 삼존불과 가릉빈가, 비천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보살 아래에는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인 경우 중앙의 주불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이나 또는 주불에 따라 좌우에 여래를 배치한다. 여기서는 왼쪽에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배치됨에 따라 오른쪽은 대세지보살로 여겨진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

이 외에 여래 둘레와 위에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다는 상상의 새 가릉빈가 1,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 6구가 새겨져 있는데 꽃을 뿌리며 혹은 꽃 접시를 들고 혹은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찬미하는 모습들이다. 비천들의 옷자락은 춤을 추며 나부끼니 같이 생동감이 있다.

아미타여래 오른쪽 위의 가릉빈가와 비천
관세음보살 위쪽의 비천 3구
왼쪽 끝부분의 비천

두 번째 바위 면에는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이 있고, 왼쪽에도 스님이 있는데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그리고 맨 위쪽에도 비천상이 있는데 이 또한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
2006년 10월 9월에 발견 된 스님상이나 식별이 안된다.

세 번째 바위 면은 높이 4m 가량 되는 기둥바위인데 동쪽을 바라보며 삼지창을 든 신장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역사상으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안 된다. 초기에는 맞은편에도 돌기둥이 있어 금강역사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초기 옛날에는 이곳이 절의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지창을 든  금강역사이나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 남면

부처바위 남측 입면도
마애조상군, 부처바위 남면에서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높이 2.72m, 6.06m의 남면 바위는 가운데가 갈라져서 두 개의 벽면으로 병풍처럼 놓여 있는데 여래 1, 보살 2, 스님 2, 수목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바위 앞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왼쪽 바위에는 큰 연화대좌 위에 여래가 결가부좌 하여 앉아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앉아 있다. 옷자락이 무릎 아래로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를 하고 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알 수가 없다. 둥근 두광에는 햇살처럼 연꽃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과 수목인 보리수나무
보리수나무

좌우 협시 보살들은 연꽃송이에 앉아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다. 오른쪽 보살과 달리 왼쪽 보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깨가 여래 쪽으로 기울여진 자세다. 두 보살의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그 방향을 알 수 없는데 보살들의 두광이 갸름하게 타원형으로 되어 있어 얼굴을 여래 쪽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존불 왼쪽에는 보리수나무가 있다.

오른쪽 바위 중앙 아랫부분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좌상이 새겨져 있는 스님이 있는데 선정에 든 것 같다. 얼굴은 갸름하고 몸체는 작은 편이며 무릎은 넓어 편안해 보인다.

좌상을 하여 선정에 든 스님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오른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스님 상을 가리고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한눈에 허리가 매우 잘록함을 느낄 수 있고 마애상과는 시대적 차이가 뚜렷하다. 대석(臺石)과 신체석(身體石) 2개로 이루어졌는데 전체 길이는 2m, 방형 대석의 높이 25, 길이 1.3m이다. 대석에는 발만 새기고 발목 이상은 한 돌로 신체석에 조각하였다. 제작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입상

얼굴은 윤곽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파손되었고 광배 상단 역시 유실되었으나, 신체는 거의 완전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수인은 좌상에만 나타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왼손은 배 위에 오른손은 허벅지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게 표현하였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풍성하고 허리는 가늘다. 가는 허리에서 곡선을 그리며 풍성한 엉덩이를 이룩하고 기둥 같은 두 다리로 선은 이어진다. 두 팔에 새겨진 옷주름들도 근육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얼굴, 가슴, 엉덩이, 허리는 여성적이고 팔은 남성적이다.

통견인 법의는 볼륨감 있는 신체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줄 정도로 얇은 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지역 마을에서는 여래의 왼손이 배에 대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안산불(安産佛)로 신앙되어 왔고 여기서 기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여인들이 찾았다고 한다.

석조여래입상에서 정면으로 12m 밖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이 자연바위 위에 남아있다. 크기는 230, 너비 185, 높이 60, 간공 지름 15, 간공 깊이 12이다. 석등 바로 동남쪽에 삼층석탑이 서있고 삼층석탑과 삼존불 사이에 큰 바위들이 가로로 놓여 있는데, 그 중간 바위벽면에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이 남쪽으로 앉아 합장하고 있다.

자연바위 위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서 있는 석탑인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고 새긴 솜씨도 둔박하여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낙수면 모서리에 추녀마루가 새겨져있고 그 끝머리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여기에 풍경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높이가 4.5m밖에 안 되는 작은 탑이나 높은 언덕 위에 솟아 있으므로 멀리서도 보인다. 이에 이곳 동네사람들은 이 계곡을 탑골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옥룡암(玉龍庵)과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

이육사 문학관(경북 안동) 자료에 의하면 이육사가 1936(32)1942(38)에 경주 옥룡암에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육사는 1936년에 8월에 오랜 감옥 생활로 쇠약해진 몸을 옥룡암에서 잠시 휴양하였고 이때 84일에 신석초에게 엽서를 썼는데 720일 서울을 떠나 대구를 거쳐 29일 포항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8월에 옥룡암으로 온 것이다. 이육사에게 옥룡암을 소개 한 이는 고암 박곤복(경주 건천읍 화천리 출신)으로 당시 욕룡암 주지 스님과 잘 아는 사이였다. 고암 박곤복은 육사보다 8살이나 많았지만 육사를 각별하게 대했다. 19427월에 폐질환으로 이육사는 다시 옥룡암을 찾아 요양을 하였다. 그는 옥룡암에 3개월 정도 머물 예정이었으나 백형 이원기의 타계로 서둘러 귀향하였다. 

20047월에 옥룡암에서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육사의 미발표 시조 2편이 발견되었다. 이육사와 신석초는 형제처럼 가까이 지낸 이로 알려져 있다.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

뵈올가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태워 안 젓으니

리별에 []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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