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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 탑골 신인사지(神印寺址, 배반동 산69번지)에는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마애조상군이 있다. 또는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옆에는 옥룡암(玉龍庵)이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이 부근에서 神印寺라 새겨져 있는 기와명문을 발견했다고 하여 신인사지로 전해지고 있다. 마애조상군 남면에서 많은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옥룡암 앞 안내표지판. 탑골은 길이가 약 2km로서 동남산에서는 두번째로 긴 계곡이다. 탑골마을에서 개울을 거슬러 약 40m쯤 들어가면 옥룡암이라는 절이 있고 절 뒤에 부처바위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옥룡암 입구.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신인종의 창시자인 명랑법사가 당나라 수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에서 오색비단을 이용하여 절 모양을 만들고 풀로써 동, , , , 중앙의 오방신장을 만들어 신인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한 것처럼 사천왕사지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 신인사에서도 바위에 사방불(四方佛) 즉 마애조상군을 조성하고 창건하여 삼한통일을 위해 문두루비법을 또한 하였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수법을 보아 제작연대도 7세기중엽으로 판단된다.

마애조상군, 부처바위와 삼층석탑

마애조상군은 바위의 동, , , 북 사방(四方)에 여래(부처)를 새겨 조성하였기 때문에 사방불암(四方佛巖)이라고 하고 이곳 마을에서는 부처바위라고 부른다. 신라시대 사방불암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도 다양하다. 1988년 마애불상군에 대한 탁본 및 실측조사를 하여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탑상 등 35구가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고 200610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되어 총 37구가 새겨져 있다. 만다라(蔓茶羅)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 된 한 폭의 불화를 보는 느낌인데 밀교의 불경 내용을 요약한 삽도그림 변상도(變相圖)인 것 같다.

부처바위에 새겨진 상()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는 것, 연꽃잎이 넓게 표현된 것, 신라시대 불교 초기의 모습인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모습, 아미타여래의 눈이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낸 것, 상현좌를 한 것, 금강역사가 금강저를 들고 무장한 것 등 이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 북면

부처바위 북측 입면도

부처바위 중 가장 높은 높이 9m, 6m의 북면 바위에는 여래 1, 2, 비천(飛天) 2, 사자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다가장 눈에 띤 것은 탑으로 9층탑과 7층탑의 목탑이다. 9층탑은 기단부(基壇部)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2m, 너비 2.m이고 탑신부(塔身部)의 1층 탑신에는 출입문이, 2층부터는 창문이 2개씩 있다. 옥신(지붕)의 층이 올라갈수록 추녀의 넓이와 옥신의 높이는  조금씩 축소되어 3m 높이에서 삼각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옥신의 추녀 끝마다 풍경이 달려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높이가 2m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등 있다.

부처바위 북면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7층탑도 층수만 다를 뿐 모양이나 조각수법은 동탑과 유사하다. 신라 때 새겨진 이 탑들을 통하여 몽고군의 침입 때 불타 없어진 황룡사 9층 목탑(645)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9층탑과 7층탑 사이 위쪽 중앙에는 연화대좌 위에 좌상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가 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을 표시한 듯 옷자락에 두 손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수인은 알 수 없다. 둥근 두광은 햇살 같은 연꽃을 새겨서 밝고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연화대좌는 꽃잎이 네 개로 되어있는데 두 개의 꽃잎은 날개처럼 뻗어 있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준다.

9층목탑과 석가여래
9층목탑의 풍경
석가여래와 천개
7층목탑과 훔사자

여래 머리 위에는 부처의 권위를 표현코자 햇빛을 가려주는 천개가 있는데 보통 절 법당 안에서 볼 수 있다. 마름모를 한 줄로 투각한 넓은 천개 위에 두 겹으로 연꽃잎을 장식하였고, 밑으로는 헝겊으로 접은 수실을 늘인 다음 포장을 늘여 놓았다. 이 또한 바위를 통해 신라시대 천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9층 목탑과 7층 목탑 앞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데 불국정토를 지키는 성스러운 짐승이다. 9층탑 앞 사자는 입을 벌리고 오른쪽 발은 힘차게 땅을 딛고 왼발은 들어 올렸으며, 꼬리는 깃발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 날리고 있다. 목에 털이 없어 암사자로 보인다. 7층탑 앞 사자는 입을 다물고 오른발을 들고 있으며, 꼬리가 아주 복잡하다. 목에 긴 털이 많아 숫사자로 보인다. 입을 벌린 사자는 아사자라 하고 입을 다문 사자는 훔사자라 하는데,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음과 양을 합친 모든 세계를 부처님이 다스린다는 뜻이다.

9층목탑 아래 아사자
7층목탑 아래 훔사자

천개 위로 비천(飛天) 두 구가 날고 있는데 아름다운 천녀들이 하늘을 날면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는 모습이다.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천개 위로 비천(飛天) 두 구가 날고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 서면

부처바위 서측 입면도

높이 6m, 6m의 서면 바위에는 여래 1, 비천 2, 수목 2구 등 5구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좌 위에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 神樹가 늘어져 있고 왼쪽에는 대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있다. 약사여래는 네모에 가까운 갸름한 머리에 자그마한 육계가 솟아 있고, 귀는 어깨에 닿아 있으며, 가는 눈은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길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근엄한 표정이다머리에 비해서 조금 작은 몸체는 반듯하고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평행으로 놓여 있고 두 손은 선정인 같은데 옷자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두광은 연주문으로 둥글게 연꽃을 새기고 그 가장자리에 구슬을 늘어뜨려 있고 두광 주위에는 화연문모양으로 불길이 새겨져 있어 화려하다.

약사여래

여래 위에 있는 비천상은 피리를 불면서 날아가고 있고 여래 왼쪽의 비천상은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어렵다.

약사여래 위의 비천상으로 마멸이 심하다.
약사여래 왼쪽의 비천상으로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 동면

부처바위 동측 입면도
2006년 10월 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된 위치

북쪽으로부터 첫 번째 바위 면에는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가 있다. 머리 위에 나지막한 육계가 솟아있고, 눈은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내고 있다.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이중으로 새겨져 있고 두광의 외곽은 연주문(連珠紋)으로 둘러져 있다. 두 팔은 경사를 이루면서 연결되어 삼각형에 가까운 몸체를 이루고 있다. 풍성한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편안하게 놓여 있다. 여래 왼쪽에는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연꽃에 앉아 있는데 양 어깨에는 천의가 덮여져 있고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 합장하고 얼굴은 여래를 향하고 있다. 또한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첫번째 바위의 삼존불과 가릉빈가, 비천
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보살 아래에는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인 경우 중앙의 주불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이나 또는 주불에 따라 좌우에 여래를 배치한다. 여기서는 왼쪽에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배치됨에 따라 오른쪽은 대세지보살로 여겨진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

이 외에 여래 둘레와 위에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다는 상상의 새 가릉빈가 1,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 6구가 새겨져 있는데 꽃을 뿌리며 혹은 꽃 접시를 들고 혹은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찬미하는 모습들이다. 비천들의 옷자락은 춤을 추며 나부끼니 같이 생동감이 있다.

아미타여래 오른쪽 위의 가릉빈가와 비천
관세음보살 위쪽의 비천 3구
왼쪽 끝부분의 비천

두 번째 바위 면에는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이 있고, 왼쪽에도 스님이 있는데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그리고 맨 위쪽에도 비천상이 있는데 이 또한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
2006년 10월 9월에 발견 된 스님상이나 식별이 안된다.

세 번째 바위 면은 높이 4m 가량 되는 기둥바위인데 동쪽을 바라보며 삼지창을 든 신장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역사상으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안 된다. 초기에는 맞은편에도 돌기둥이 있어 금강역사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초기 옛날에는 이곳이 절의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지창을 든  금강역사이나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 남면

부처바위 남측 입면도
마애조상군, 부처바위 남면에서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높이 2.72m, 6.06m의 남면 바위는 가운데가 갈라져서 두 개의 벽면으로 병풍처럼 놓여 있는데 여래 1, 보살 2, 스님 2, 수목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바위 앞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왼쪽 바위에는 큰 연화대좌 위에 여래가 결가부좌 하여 앉아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앉아 있다. 옷자락이 무릎 아래로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를 하고 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알 수가 없다. 둥근 두광에는 햇살처럼 연꽃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과 수목인 보리수나무
보리수나무

좌우 협시 보살들은 연꽃송이에 앉아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다. 오른쪽 보살과 달리 왼쪽 보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깨가 여래 쪽으로 기울여진 자세다. 두 보살의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그 방향을 알 수 없는데 보살들의 두광이 갸름하게 타원형으로 되어 있어 얼굴을 여래 쪽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존불 왼쪽에는 보리수나무가 있다.

오른쪽 바위 중앙 아랫부분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좌상이 새겨져 있는 스님이 있는데 선정에 든 것 같다. 얼굴은 갸름하고 몸체는 작은 편이며 무릎은 넓어 편안해 보인다.

좌상을 하여 선정에 든 스님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오른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스님 상을 가리고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한눈에 허리가 매우 잘록함을 느낄 수 있고 마애상과는 시대적 차이가 뚜렷하다. 대석(臺石)과 신체석(身體石) 2개로 이루어졌는데 전체 길이는 2m, 방형 대석의 높이 25, 길이 1.3m이다. 대석에는 발만 새기고 발목 이상은 한 돌로 신체석에 조각하였다. 제작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입상

얼굴은 윤곽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파손되었고 광배 상단 역시 유실되었으나, 신체는 거의 완전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수인은 좌상에만 나타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왼손은 배 위에 오른손은 허벅지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게 표현하였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풍성하고 허리는 가늘다. 가는 허리에서 곡선을 그리며 풍성한 엉덩이를 이룩하고 기둥 같은 두 다리로 선은 이어진다. 두 팔에 새겨진 옷주름들도 근육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얼굴, 가슴, 엉덩이, 허리는 여성적이고 팔은 남성적이다.

통견인 법의는 볼륨감 있는 신체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줄 정도로 얇은 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지역 마을에서는 여래의 왼손이 배에 대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안산불(安産佛)로 신앙되어 왔고 여기서 기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여인들이 찾았다고 한다.

석조여래입상에서 정면으로 12m 밖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이 자연바위 위에 남아있다. 크기는 230, 너비 185, 높이 60, 간공 지름 15, 간공 깊이 12이다. 석등 바로 동남쪽에 삼층석탑이 서있고 삼층석탑과 삼존불 사이에 큰 바위들이 가로로 놓여 있는데, 그 중간 바위벽면에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이 남쪽으로 앉아 합장하고 있다.

자연바위 위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서 있는 석탑인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고 새긴 솜씨도 둔박하여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낙수면 모서리에 추녀마루가 새겨져있고 그 끝머리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여기에 풍경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높이가 4.5m밖에 안 되는 작은 탑이나 높은 언덕 위에 솟아 있으므로 멀리서도 보인다. 이에 이곳 동네사람들은 이 계곡을 탑골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옥룡암(玉龍庵)과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

이육사 문학관(경북 안동) 자료에 의하면 이육사가 1936(32)1942(38)에 경주 옥룡암에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육사는 1936년에 8월에 오랜 감옥 생활로 쇠약해진 몸을 옥룡암에서 잠시 휴양하였고 이때 84일에 신석초에게 엽서를 썼는데 720일 서울을 떠나 대구를 거쳐 29일 포항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8월에 옥룡암으로 온 것이다. 이육사에게 옥룡암을 소개 한 이는 고암 박곤복(경주 건천읍 화천리 출신)으로 당시 욕룡암 주지 스님과 잘 아는 사이였다. 고암 박곤복은 육사보다 8살이나 많았지만 육사를 각별하게 대했다. 19427월에 폐질환으로 이육사는 다시 옥룡암을 찾아 요양을 하였다. 그는 옥룡암에 3개월 정도 머물 예정이었으나 백형 이원기의 타계로 서둘러 귀향하였다. 

20047월에 옥룡암에서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육사의 미발표 시조 2편이 발견되었다. 이육사와 신석초는 형제처럼 가까이 지낸 이로 알려져 있다.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

뵈올가 바란 마음 그 마음 지난 바램

하로가 열흘같이 기약도 아득해라

바라다 지친 이 넋을 잠재올가 하노라

잠조차 없는 밤에 []태워 안 젓으니

리별에 []든 몸이 나을 길 없오매라

저달 상기 보고 가오니 때로 볼가하노라

193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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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남산의 오산골과 국사골 사이에는  탑말”  또는 탑촌(塔村)” 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형식을 달리하는 삼층석탑이 동·서에 나란히 서 있다. 동 삼층석탑은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 삼층석탑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탑의 조성 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옛날부터 오산골 어귀 일대를 피리(避里) 또는 피촌(避村)으로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 때부터 행정구역 이름이 남산리로 되는 까닭에 이들 탑을 남산리(남산동) 쌍탑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절터이름도 남산사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 동, 서 삼층석탑 동쪽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양기못이라고 부른다. 옛 기록에는 양피못((讓避堤)이라고 적혀있다. 이에 삼국유사 피은(避隱) 염불사(念佛師)에 의거하여 절터 이름은 양피사지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사금갑에 나오는 서출지가 이곳 양피못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이 서출지로 바뀌어졌다.

왼쪽이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동 삼층석탑이고 오른쪽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는 서 삼층석탑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서 360()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피리촌(避里村)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양피(讓避)’와 같은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에 나오는 피촌(避村)’도 모두 같은 마을을 가리킨다.

민장사(敏藏寺)는 삼구유사 제3권 탑상(塔像) 敏藏寺에 등장하는 사찰로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745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관음신앙과 관련된 곳으로 판단된다. 상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금리(盃金里)의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삿꾼을 따라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 이 절은 민장각간(敏藏角干)이 집을 내놓아 절로 삼은 것이다.)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7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기도드렸더니 장춘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널판 쪽을 타고 오()나라 해변에 가서 닿았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저를 데려다가 글에서 농사일을 짓게 했습니다. 고향에서 온 듯한 이상한 스님이 은근이 위로하고 저를 데리고 동행하는데, 앞에 깊은 개천이 있어서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뛰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우리 말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살펴보니 벌써 여기 와 있었습니다. 초저녁 때(佯時) 오나라를 떠났는데 여기에 이른 것은 겨우 술시 초(戌初))였습니다.고 하였다.

곧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 745) 4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소식을 듣고 절에 밭을 주고 또 재물과 폐백을 바쳤다.

삼국유사의 두 기록을 살펴볼 때, 염불사의 창건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염불 스님의 입적 이후, 그 초상을 민장사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염불사와 민장사는 동 시기에 존재했으며, 천보 4년에 민장사 관음보살의 기적과 관련된 기록으로도 염불사의 창건연대는 745년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8세기 초 ~ 중엽 경에 염불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민장사의 경우 민장각간이 자택을 희사하여 사찰로 바뀐 점을 고려한다면 염불사는 8세기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현재 염불사지로 추정되는 곳은 오산골 어귀 일대로 양피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경주시 남산동 1130번지 일원(면적 : 2,175)에 해당되며 2003년과 2008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21금당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서 삼층석탑은 일찍이 무너졌지만 부재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서 발굴조사 후 2007613일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9116일에 동, 서 석탑 복원작업을 완료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염불에 대하여 알려진 내용은 없으나 삼국유사 5권 피은(避隱)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를 보면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염불은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동, 서 석탑사이에 있는 석등연화하대석과 기타 석재들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동 삼층석탑

동 삼층석탑은 이형탑(異型塔) 범주로 분류될 수 있는데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탑이다. 노반(露盤)까지 남아 있어 그 원형(原型)을 확인할 수 있다.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인 지대석(地臺石)을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지대석일부는 지하에 묻히고 지상에는 15가량 노출되었다.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는 잘 다듬은 돌 여덟 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상하 각 네 개 씩 배치하였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몸돌사이에는 3단의 괴임석을 다듬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세 개를 사용하여 3층을 만들었다. 1층 지붕돌은 5단의 옥개받침을 두었고, 낙수면은 7단의 계단형으로 되어있다. 지붕돌의 처마선 모퉁이부분은 앙곡(仰曲)을 표현하지 않고 일직선의 수평을 두었다. 각 모퉁이에는 풍탁(風鐸)을 매어 달기 위한 구멍이 상하로 뚫려 있다. 2층 지붕돌은 5단의 옥개받침, 낙수면은 6, 3층 지붕돌은 4단의옥개받침, 낙수면은 4단을 두어 체감율을 크게 하였다.

상륜부(相輪部)의 노반석 윗면은 2단의 역계단 모양으로 다듬었고, 노반석 중앙에는 찰주를 세우기 위한 구멍이 관통되어 있는데 3층 지붕돌까지 뚫려 있다. 찰주구멍은 노반 중간을 지나면서 점차 병목같이 좁아져 있다. 지붕돌 낙수면에 나타난 계단형 모형은 전탑(塼塔)에서 그 유사성(類似性)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경주지역에서 유사한 석탑은 서악동(西岳洞) 3층 석탑이 있다. 단지 서악동 3층 석탑의 경우 1층 탑신에는 문비형(門扉形)으로 새겨 마련하고 문비입구 좌우에 인왕상(仁王像)1()씩 배치한 점만 차이가 있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긴 서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은 2층 기단의 면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신장(神將)이라 하면 수미산 위에 사는 모든 신들을 통틀어 말하며,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 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으로 종류로는 금강역사(인왕상), 팔부신장(팔부중상), 십이신장(십이지신상) 등이 있다. 우리나라 신장신앙의 기원은 삼국 초기 불교가 전래될 때 함께 시작되었다고 추측되고 현존하는 예를 볼 때는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팔부신중과 십이지신상이 탑에 조각으로 나타난 것은 8세기 이후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은 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으로서 석가모니 10대 제자와 함께 부처의 설법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는데 무장을 한 모습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들도 갖가지다. 원래는 고대인도 신들로 악마나 구신에 해당하지만, 석가에게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재구성되었다종류는 천, , 야차, 아수라, 건달바, 긴나라, 가루라, 마후라가 등 이다.

왼쪽부터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아수라와 건달바
왼쪽부터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천과 가루라

기단부(基壇部)는 지대석과 2층 기단으로 되어있다.  1층 기단은 2단 괴임이 있는 갑석이 2개로 조립되었는데, 지대석과 면석은 한 돌로 조성되어 있다. 모퉁이에 우주(隅柱), 가운데에 탱주 2가 모각되어 있다. 2층 기단은 모퉁이에는 우주(隅柱), 중앙 탱주사이의 면석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2단 괴임이 있는 갑석과 갑석부연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개로 구성되어 있고 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세 개를 사용하여 3층을 만들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지붕돌의 옥개받침은 각 층마다 5()으로 되어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 전각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 처마면 밑 양쪽 모서리에는 풍탁을 매어달 수 있도록 구멍이 있다상륜부(相輪部)의 노반석은 1로 만들었으며 외형상 동탑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기단부 면석에 팔부신중을 새긴 삼층석탑은 경주지역에서 창림사지 3층 석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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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남산 불곡(佛谷, 부처골)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보물 제198)은 자연바위를 파서 감실을 만든 후 조성한 불상으로 흔히 감실부처 또는 할매부처라고 부른다. 이 감실부처의 조성연대는 7세기(1300~1400년 전)로 감실불(龕室佛)의 원조이자 석굴사원의 시초이고 선덕여왕 재위기간(632 ~ 647)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남천로를 따라 도지동 탑골 마애불상군을 지나면 만나는 이정표

부처골(佛谷)은 남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 감실여래좌상으로 인해 계곡명이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원래 3곳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감실여래좌상이 있는 절터를 제외한 나머지 2곳은 흔적이 거의 없다.

부처골 감실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

감실 부처는 자연바위를 파서 조성한 불상으로 그 감실 좌, 우와 앞뒤로 큰 바위인 화강암군(花崗巖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과 바위의 가구(架構)흔적으로 불상 앞과 뒤의 2곳에 약간의 공간에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감실부처의 본 절터는 이곳의 약 30m 아래 오른편 길목 어귀에 있다. 지형을 이용해 쌓은 자형 축대로 2()으로 확인되었고 밑 축대의 높이는 1.2m, 위 축대 높이 2m, 길이는 12m이다.

감실부처의 본 절터로 감실부처의 약 30m 아래 오른편 길목 어귀에 있다. 지형을 이용해 쌓은 ㄱ자형 축대로 2단(段)으로 확인되었고 밑 축대의 높이는 1.2m, 위 축대 높이 2m, 길이는 12m이다.

불상이 조성(造成)된 바위는 자연암반 중 제일 두툼한 바위를 이용하여 높이 2.3m, 너비 3.5m, 깊이 0.9m의 굴을 파서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내부에 불상을 조성했다. 조각 수법으로는 불상 얼굴은 높은 부조(浮彫)로 하고 신체와 대좌는 낮은 부조로 1.5m 높이로 조성하였다. 앞으로 다소곳이 숙여진 신체는 그 표정이 조용한 주변과 어우러져 명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과 바위의 가구(架構)흔적으로 불상 앞과 뒤의 2곳에 약간의 공간에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두에서 머리에 두건을 귀까지 덮고 쓴 것으로 보면 보살이 되고 소발(素髮)의 머리로 귀를 덮어 어깨 위로 흐르는 것으로 보면 여래의 모습이다. 둥근 얼굴에 내려감은 눈, 얌전한 입술에 깊이 판 입가 등으로 부드럽고 우아하고 내면적인 미소이나 한편으로 엄숙함과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정적인 분위기도 연출되고 있다.

신라시대 불교가 초기에 전파 될 때 대부분 불상은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평민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다신라화랑의 미소년 모습, 한국 여인, 자애로운 어머니, 할머니 모습 등으로 보여 지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각이 진 어깨는 넓게 결가부좌한 무릎과 함께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앞가슴은 사각형으로 표현되었고, 무릎을 덮은 옷 주름은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두 손은 모아서 소매 속에 넣고 배 앞에 대고 있어 수인 형태는 파악되지 않으나 선정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릎은 낮고 수평적이며 오른발이 유난히 크다. 법의와 대좌 및 주위에 붉은 색 흔적이 있어 조성 당시 채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감실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 동짓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붉은 햇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감실부처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때가 동짓날 오전 중에 보는 것이 가장 잘 보이는데 특히 오전 10~ 11시경 햇빛이 부처님 얼굴에 비칠 때의 모습은 자비로운 표정의 동안을 볼 수가 있다.

1986여름 어느 날 용왕(龍王)이 찾아온 길(용왕(龍王)이라는 책을 쓰는 장곡천(長谷川)라는 일본인이 감실불상(龕室佛像)을 찾아 왔다이유는 감실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였다. 옛날부터 일본 사람들은 설날보다 동짓날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낮이 자꾸 짧아져가다가 동짓날부터 낮이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서 있는 신사(神社)와 절이 많다고 한다. 확인 해 본 결과 감실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 동짓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붉은 햇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그는 장항리사지(獐項里寺止) 대좌(臺座)와 골굴암 불상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앉아 있다고 한다. 또한 문무대왕암(文武王陵)도 동짓날 해 뜨는 방향에 문무대왕을 모신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마애여래좌상의 조성에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신라 성골왕실에서는 왕즉불 사상을 지배자의 권위를 신성화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덕만공주의 성골 여왕 왕위계승에 대한 염려와 반발을 차단위한 방편으로 진평왕 말년에 마치 하늘이 덕만공주를 장래의 왕으로 인정했음을 나타내는 신기한 표적처럼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석가모니 이전에 출현했다는 소위 과거칠불의 가람 터가 신라 땅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보통의 남성 부처님상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듯한 한국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고고한 기품을 갖추고도 인자함과 넉넉함이 보이는 30~40대 초반 여인의 모습인 것이다.

감실 부처는 자연바위를 파서 조성한 불상으로 그 감실 좌, 우와 앞뒤로 큰 바위인 화강암군(花崗巖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

감실부처는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미륵삼존불), 윤을곡 삼존불과 함께 고신라를 대표하는 화랑형 애기미륵으로 부른다. 또한 동짓날 해 뜨는 방향 위치와 고부조의 조각 , 채색여부, 부처와 보살 여부 등 다양한 수수께끼와 신비로움을 현재 남겨 놓고 있다.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 (경주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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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자락 남산동에 수백 년 된 배롱나무와 연꽃 그리고 정자가 어울러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117)라고 불리는 신라시대 연못이 있다. 특히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7~ 9월과 연꽃이 피는 7~ 8월에는 장관을 이루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며 꼭 찾는 곳이다. 서출지에 있는 정자는 이름은 이요당(二樂堂)으로 팔작지붕의 정면 3, 측면2칸의 자형 건물로 조선 현종 5(1664) 풍천 임씨 임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 석조기둥을 사용하여 최대한 연못 가까이 세웠기 때문에 정자가 마치 연못에 떠있는 같이 보인다.

늦가을날 서출지의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의 이름 유래는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과 관련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21대 소지왕(炤智王) 또는 비처왕(毗處王) 즉위 10(戊辰, 488) 정월 15일남산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亭)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그중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하였다.

이때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기사가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남산 동쪽 기슭 壤避寺村) 이 못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잃어 버려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봉투를 기사(騎士)에게 건네줘 그것을 돌아와 왕에게 올렸다.

왕이 봉투를 살펴보니 겉봉에 이 봉투를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하여 봉투를 뜯지 않았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하여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떼어 내용을 보니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 고 적혀 있었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발각되어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왔다 하여 못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놓는데, 까마귀를 위함이다. 그리고 매년 정월 십이지일(十二支日) 중 첫 돼지날(上亥日), 첫 쥐날(上子日), 첫 말날(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피하여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怛忉)라고 하였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 이루어졌다. 사금갑(射琴匣)을 통하여 불교 공인 이전부터 왕실에서는 불교를 믿고 궁궐 내에 절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랑세기에 의하면 소지왕(炤智王)에게는 부인이 2명 있는데 정비 선혜부인과 후비 벽화부인이다. 여기에 등장한 궁주는 선혜부인이고 중은 묘심이다. 벽화부인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미모가 출중했으며 소지왕이 5009월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했을 때 후비로 맞이했고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 살 이였다. 2개월 후 11월에 소지왕은 생을 마감했다. 벽화부인은 섬신공 파로와 벽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남동생은 화랑의 시조인 위화랑이다.

소지왕은 20대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웠고, 겸손함과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즉위 9(487)에 각 지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개척하였다. 또한 즉위 12(490)에는 도읍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킴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 확립하려했다. 또한 고구려 침입에 대비하여 즉위 15(493)에 백제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힘든 상황은 가뭄, 우박 등 천재지변과 고구려, , 말갈 등의 외침이었다. 말년에는 경국지색의 벽화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 그의 치세에 흠결 이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에 벽화와의 만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2년 봄 3,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여름 4,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가을 9, 왕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 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 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겨울 11, 왕이 별세하였다.

연꽃이 피는 7월 ~ 8월의 서출지와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은 강원도 강릉에도 있다. 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진평왕 때 무월랑이라는 풍류남아가 강릉에 고을살이로 왔고, 그때 강릉 땅에 연화라는 젊은 처녀가 있었다. 연화와 무월랑이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무월랑이 경주로 되돌아가서 헤어졌을 때, 연화가 키운 잉어가 대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하여 서출지 또는 양어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요당지(二樂堂池)에게 서출지 자리를 빼앗긴 양피제(讓避堤)

삼국유사사금갑에 나오는 피촌(避村), 피리사촌(壤避寺村)은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8 염불사(念佛師)에 따르면 양피사지(讓避寺) , 서 삼층석탑 옆에 있는 양피저수지가 바로 서출지(書出池)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 이요당지(二樂堂池)가 서출지(書出池)로 바뀌어졌다.

양피사지(讓避寺) 동 삼층석탑과 산수당(山水堂)
산수당과 양피저수지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이요당(二樂堂)서출제(書出堤)에 대하여 지()와 제()로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요당(二樂堂)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임적(任勣)이 지은 객당(客堂)이다. 앞쪽은 연못을 대하고 있는데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인하여 누정(樓亭)을 지었다. 그 위에 올라가 보면 완연히 물 가운데 서있는 것 같다. 연못에 연꽃을 가득 심어 놓았는데 가을이면 무성하게 피어 만 떨기의 붉은 꽃이 찬란히 난간까지 비친다.

서출제(書出堤)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양피저수지이자 서출제

양피저수지 옆에는 풍천 임씨(豊川 任氏) 소유의 산수당(山水堂)이 있다. 산수당은 풍천 임씨(豊川 任氏) 후손들이 1941년에 지어진 것을 2007년에 5칸 팔작지붕으로 증축했다. 3월에는 벚꽃, 7~ 10월에는 연꽃, 배롱나무 꽃이 절경을 이루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풍천 임씨(豊川 任氏) 시조는 임온(任溫)으로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이다. 임온의 6세손 임주(任澍)1275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이자 원나라 황녀인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여 대장군을 지내고 풍천(豐川)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풍천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다. 임적은 풍천 임씨 19세손이다.

산수당과 양피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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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곡(列岩谷, 새갓골) 마애불상(磨崖佛像,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119번지)은 2007년 5월 22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근처 석불좌상 복원을 위해 주변을 조사하다가 발견되었다. 석불좌상의 축대 아래쪽에서 축대 상부로 출입하던 당시의 동선(動線)이 불분명하여 이를 조사하기 위해 축대 중심으로 주변을 면밀히 살피다가 발견한 것이다.

새갓골주차장에서 약 700~800m를 소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마애불상과 석불좌상을 만날수있다.

당시 석불좌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져 있으며, 30°정도 경사진 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면을 바닥으로 향한 채 엎어져 있었고 왼쪽 다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흙에 덮인 상태였던 것을 한 달 동안 흙을 파냈다. 마애불상이 발견되기 전 이곳은 잡목들이 많이 우거지고 등산로에서 떨어진 경사진 곳으로 사람들의 접근이 없었다.

마애불상 발견 당시 모습

학계에서는 마애불상 얼굴이 풍화된 흔적이 거의 없어 마애불상이 제작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현 위치에서 앞으로 그대로 넘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에서 바로 세웠을 때 1,300년 전 당시 마애불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보호각이 마애불상을 둘러싸고 있다

마애불상이 위치한 곳은 산 사면과 능선에 노두(露頭)가 발달되어 있으며, 이러한 노두에서 풍화되어 떨어져 나온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너덜겅을 이루고 있다. 다행스럽게 넘어졌을 때 돌출되어 있는 마애불상 머리카락(나발)이 돌에 먼저 닿으면서 손상이 없었고 불상의 허벅지 부분과 머리 부분만 암반과 괴석(塊石)에 닿아 마애불상을 지탱하고 있다. 돌과 얼굴과의 거리는 5cm이다.

마애불상은 화강암(약 250×190×620㎝, 무게 약 80톤)의 한 면을 고부조(高浮彫)한 것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460㎝, 발아래 연화대좌가 100㎝로, 전체 높이가 560㎝에 이르는 대형 마애불이다.

육계(肉髻)가 높고 민머리[소발(素髮)]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펴고 있어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옷 주름 간격이 넓어져 9단을 형성하면서 발목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두발은 발끝이 밖으로 향하게 벌리고 있으며, 연화대좌는 5장의 앙련(仰蓮)을 얕게 조각하였다.

스케치한 마애불상

특히 이 마애불상에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이다.
한 가지는 귀가 발제선(髮際線: 머리털이 난 끝선)에서 어깨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며,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 불상의 수인(手印)으로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라 하여 한 손바닥으로 밖으로 해서 어깨높이까지 올리고, 다른 손바닥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는 수인이다.
그런데 여기 마애불상은 왼쪽 손등을 바깥으로 하여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가슴 위에 얹었으며, 오른손 역시 손등이 밖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감싼 채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복부에 대고 있는 특이한 형식의 수인이다. 마지막은 마애불상이 약 4등신(等身)으로 몸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크게 표현되어 있어 예불하는 사람이 마애불을 우러러 볼 때의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열암곡 마애불은 8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화령 삼존불, 배리 삼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루속히 1,300년 전 신라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마애불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본다.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케 하는 열암곡(列岩谷) 석불좌상(石佛坐像)
열암곡 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경주시와 함께 보수·정비계획에 따라 2007년 4월부터 발굴조사와, 정비 및 복원을 마친 결과, 2009년 1월 29일 높이 4m, 남향(南向)으로 정좌한 장대한 모습으로 갖추었다. 본래 열암곡 석불좌상은 8~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에 상대, 중대, 하대를 갖춘 3단 대좌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이후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불상은 도괴되어 불두(佛頭)는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광배(光背)는 불상 뒤편으로 넘어져 크게 파손되었고 중대석(中臺石)은 결실되고 없으며 상대석도 깨어져 일부분이 없었고 하대석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복원 전 초기 모습
정비 및 복원 전 모습

2005년 10월 9일 우연히 남산을 답사하던 한 시민에 의해 불두가 극적으로 발견된 후, 이를 계기로 발굴조사, 정비 및 복원이 시작 되었다. 또한 2005년 11월 20일 상대석 일부분도 시민이 발견하였다. 석불좌상의 불두, 깨진 광배 및 하대석 편(片)들에 대한 접합 복원 그리고 대좌 부재 중 유실된 중대석(中臺石)을 신재(新材)로 만들어 재현하였다.

열암곡   석불좌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3 호 )

대좌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 한 몸돌로 되어 있는 3단의 팔각 연화대좌(蓮花臺座)이다. 떨어져 나간 불두는 보존처리 후 불신(佛身)에 접합하고 10여 조각으로 깨진 광배는 구조 보강 작업을 거쳐 완전하게 접합하였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아우르는 거신광(擧身光)으로서 연화문(蓮華文), 화불(化佛)과 불꽃무늬(火焰文) 새김 등으로 하였고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으며 몸체의 양감과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진 법의 차림새 및 조각수법 등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열암곡은 경주 남산의 고위봉(해발 494m)과 봉화대봉(해발 476m), 천왕지봉(해발 433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들에 의해 형성된 여러 골짜기 중 하나이다. 이 중에서 백운암으로 향하는 백운계가 본류이며, 백운계 오른편으로 열암곡, 양조암곡, 심수곡이라는 세 개의 골짜기가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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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서생면 용연길 160에는 버려진 자동차, 자전거, 오토바이 등 폐 고철을 이용한 정크아트작품을 야외에 전시하고 있는 Fe01 카페를 만날 수 있다. 카페 이름이 특이한데 의미는 철의 원소기호인 ‘Fe와 정크아트 작품의 첫 번째 공간이라는 뜻으로 숫자 01이라고 한다. 철은 정크아트의 원자재 의미인 것 같다.

석양 때의 카페 Fe-01

‘junk’는 폐품·쓰레기·잡동사니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 활용한 미술작품을 정크아트라고 한다. 전통적 의미의 미술이나 갖가지 폐품을 만들어내는 현대도시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으로 현대미술의 특징 하나로 1950년대 산업 혁명과 함께 활성화되었다.

카페 Fe01 안내도
1층 카페 입구
카페 Roof

현대도시의 파괴되고 버려진 폐품을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한편으로는 자원 보존을 강조하는 의미로 녹색환경의 개념을 강조하는 의미를 띠기도 한다.

앞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에는 햄버그와 아프리카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뒤에 있는 건물에는 지역 청년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 전시공간에 전시 된 작품은 카페 대표이자 설치예술가인 김후철의 작품이다. 카페 옆 공장에서 4년여의 준비기간을 가졌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트랜스포머, 아이언맨, 건담, 공룡, 프로데터, 에일리언, 범블비, 미니어즈, 태권브이 등 다양하다. 원래 공장은 부산인데 작업 활동에 따른 소음 발생 민원으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갤러리 1층 공간에는 김후철 대표가 아프리카 가봉에서 수집한 유물을 상시전시 하고 있고 뒤 건물에는 향후 지역 청년 작가들을 위한 기획전과 대관 전시를 한다고 한다.

김후철 대표는 부산 출신으로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 가봉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돌조각을 배웠고 조각과 창작활동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정크아트 작품 활동하기 전에는 쥬얼리 제작과 유통 사업을 하여 금전적인 성공을 하였다.

김후철 대표가 아프리카 가봉에서 수집한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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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랑(林浪) 해수욕장의 멋은 월호추월(月湖秋月)이라!

임랑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월래와 고리원자력발전소

예로부터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바다에 떠오르는 달을 월호(月湖)라 하고 그 월호에서의 가을 달맞이가 경승(勝景)이라 하였고 병풍처럼 펼쳐진 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조각배를 타고 달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던 곳으로 차성팔경 중 하나가 임랑해수욕장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옛 문헌에서는 동산(東山) 위에 달이 떴으니 월호(月湖)에 선유(船遊)한다 라고 예찬하였다.

임랑해수욕장은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임랑천)이 유입하여 모래톱을 형성하면서 생긴 해수욕장으로 모래사장 길이가 1km이다. 예전에는 백사장 주변이 노송으로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었고 좌광천이 맑아 쏘가리 천렵(川獵)을 했다고 한다. 현재는 정관 신도시로 인하여 수질이 좋지는 않고 송림도 많이 사라졌지만 요즈음 문화에 맞는 볼거리와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임랑교 아래 정관에서 흘러온  좌광천의 모습
임랑해수욕장 방파제 사이를 지나  동해로 유입하는 좌광천
임랑교 상부
임랑교에서 바라 본 좌광천

임랑해수욕장은 울주군 서생면과 경계를 두는 기장군 장안읍에 위치하고 있는 해수욕장으로 여름철이면 피서객이 많이 찾는 해수욕장이다. 특히 최근에는 캠핑 붐으로 인해 사계절 내내 여행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또한 부산 갈맷길의 출발점이기에 중년의 부부, 중장년층 단체 관광객 등 트레킹을 찾는 이들과 정관과 임랑 사이에 흐르는 좌광천을 따라 달리는 MTB 및 사이클 동호회 인으로 분주하고 역동적인 해수욕장이다.

청암 박태준 기념관

여행에 여유가 있다면 기업가이자 정치가인 청암 박태준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도 솔솔한 재미가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고향이 임랑이고 생가가 여기에 있다. 임랑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기념관에서 60 ~ 7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적 상황, 시대모습 그리고 포항제철(포스코) 창립, 성장과정을 엿 볼 수 있다.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의 젊음 때의 모습
기념관 옆에 위치하고 있는 박태준 전 회장의 생가
임랑해수욕장 민박주변의 골목길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잔에 파도를 감상하고자 하면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를 찾는 곳도 좋을 듯하다. 카페 이름 "꽃밭에서는" 그녀가 불렸던 노래 제목이다. 최근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애잔한 심금을 울리는 노래 안개”는 정훈희와 송창식이 듀엣으로 불렀던 노래로서 최근 방문객의 발길이 잦다. 사실 정훈희는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가수로 몇 차례 국제음악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Garden Flowers(꽃밭에서)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 임계안(林溪岸) 뒷산에 왜적들이 성을 쌓고 이 성을 임성(林城)이라 하였는데 그 후 유(), (), (), (), ()씨 등이 정착하여 이들 다섯 성씨가 본 마을의 숲이 울창하고 물결이 아름답다 하여 수풀 임()자와 물결 랑()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임랑(林浪)의 옛 이름은 임을랑(林乙浪)’이며 임랑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마을에 숲이 우거지고 바다 물결이 아름다워, ‘수풀 림()’ 자와 물결 랑()’ 자를 따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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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해발 469m)은 기장군 장안읍 명례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이름은 삿갓 모양의 3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나란히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산은 옛날부터 영험한 산이라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고 그러면 비가 내려 해갈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영험한 산이 명당으로 인식되어 암장(暗葬)을 하기도 했다. 대동여지도에 삼각산은 원적산(양산 천성산)에서 백운산을 거쳐 이어지는 줄기로 바다로 유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을 따라서 가다가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데 보통 2곳에서 올라간다. 능선에 도착한 후에는 동쪽 방향으로 해서 삼각산 정상으로 이동한다. 아래의 등산코스로는 소요시간이 3시간 30분정도 걸린다.

장안사 주차장 박치골 임도, 트레킹 로드 석은덤 삼각산 전망바위 장안사 주차장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불광사 약수터는 장안사산장 옆 소로 길을 따라 가면 계곡아래에 있는 약수터를 만날수 있다.
반딧불이 공원 입구
반딧불이 공원에는 방문객을 위한 산책 길을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로 조성하였다.

삼각산 등산로는 박치골 따라 조성 된 길로 매우 잘 되어있다. 길 폭도 넓으며 바닥은 초입부는 포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다. 특히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지나가는 객에게는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장안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맞이하는 것이 장안사산장 뒤 계곡아래에 있는 불광산 약수터이다. 안내문이 없어 놓치기 쉽다. 약수 한 바가지 들이 키고 나서 길을 재촉하여 가다 보면 반딧불이 공원을 만난다. 반딧불이 공원은 산책을 위해 계곡 따라 일부 구간을 Deck 길을 조성하였다.

조성된 길을 따라 보면 높이 뻗은 큰 감나무를 길에서 자주 접하는데 보는 이에게 풍요로움과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굽이굽이 절경 속에 길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석은덤까지 갈 수 있다. 가히 팔기산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길이다. 병산마을 방향으로 가기 전 동쪽방향 능선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여 동쪽으로 이동한다. 산길이 양호하지는 않다.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까마귀 떼도 만나고 길 바닥에는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어 자칫 미끄러져 넘어지 지기가 쉽다.

등산로에서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가는 첫 번째 갈림길 입구이다.
두 번째 갈림길로  좌측으로 빠져 산길을 이용하여 삼각산 능선까지 올라갈수있다. 이곳부터 비포장 된 흙길이다.
이곳 갈림길에서 좌측 길로 계속 석은덤까지 올라간다.

삼각산 정상에는 2개의 정상 표지석이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다. 잠시 가파른 길을 지나서 완만한 능선 길을 계속 가다 보면 장안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바로 아래는 천길 절벽이다. 조심하여 전방 절경을 감상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부터 장안사 화장실 뒤편까지 경사가 80도가 되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을 완주해야 한다. 추락사고가 우려되는 곳으로 삼각산 산행의 절정이 여기 하산길이다.

삼각산 정상에는 정상 표지석이 2개가 있는데 흰색 바탕의 표지석과 검정색 바탕의 표 지석이 각각 따로 연이서 다른 곳에서 세워져 있다. 이중 흰색 바탕의 정상 표지석
삼각산 정상에서 본 전경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장안사 원경
장안사 주차자에서 바라 본 전망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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