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자 앤소니 퀀 주연의 영화 『노트르담의 곱추』의 배경이 된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고딕의 대표 양식으로 시테섬에 위치하고 있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과 함께 중세 고딕 양식의 3대 성당에 포함되는 노트르담 대성당은 1,302년 필리프 4세 때 삼부회가 개최되었고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렸다. 또한 1,804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드골이 프랑스 해방을 축원하며 국가를 불렸고 프랑스 전 대통령 미테랑의 장례식도 치러졌다. 그리고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경 대성당 지붕에서 발생한 화재(火災)로 탑과 그 주변의 지붕이 붕괴되었고 화재는 약 10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프랑스 국민에게 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성은 매우 커서 화재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현재 재건 및 복구 중이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24년까지 복구를 완료 하겠다고 한다. 2017년 파리 여행 때 노트르담 대성당 추억을 돌이켜 본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왼쪽 문으로 성모 마리아가 조각되어 있다.
1160년 파리의 부주교였던 쉴 리가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기 위해 짓기 시작하여 200년이라는 공사 기간을 거쳐 1363년에 완공되었다. 「노트르담」의 뜻은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킨다. 길이 127m, 너비 48m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원안에 꽃을 그려 넣은 로자스(rosace)를 중심부로 상단에는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사각기둥의 탑과 하단에는 3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의 로자스 바로 앞 3명의 조각상은 가운데가 성모 마리아이고 좌우에는 아담과 이브인데 성당 정면의 모든 조각과 장식들이 이 조각상에 경의를 표하는 구도로 설계되었다. 성모 마리아,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아래에는 28명으로 이루어진 제왕들이 떠받치고 있다. 가고일(gargoyle)을 비롯하여 성당 처마에 달려 있는 다양한 낙수받이 조각상 또한 보는 이의 흥미를 자극시킨다.
하단의 출입문 3개 중 가운데 문은 최후 심판의 문, 왼쪽 문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은 성녀 안나 각각 조각되어 있다. 성당내부는 성경 내용을 주제로 조각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이 특히 뛰어나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뒤쪽은 예쁜 화초로 정원이 가꾸어져 있어 여행으로 지친 몸을 조용히 다독거리기에 좋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또 다른 볼거리는 푸앵 제로(Point Zero)이다. 노트르담 정문에서 앞으로 약 50m 떨어진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서 디종까지 거리는 310km이다. 푸앵 제로의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가 현재 푸앵 제로의 위치다.
푸앵 제로(Point Zero)는 바닥에 있는 표지판으로 파리와 유럽 각 도시간의 고속도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점이다. 기원은 중세 시대 죄수들이 대주교관의 문 앞에서 공개 참회를 했던 장소였다.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돌 기념하기 위해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에 의해 파리 만국 박람회 때 만들어졌다. 현재 프랑스의 유료 관광 명소 1위이다. 에펠탑은 1930년대 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324m. 무게 10,000톤으로 1964년에 프랑스 국가유산, 199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에펠탑을 만들 당시에는 문학가 모파상을 비롯한 보수 지식인들은 파리의 품격과 격조를 떨어뜨린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탑이 완공되고 관광객에게 개장했을 때, 유럽 각 국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5개월 만에 2천만 명이나 이르렀고 반대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에펠탑에는 전당대가 1층 전망대(57m), 2층 전망대(116m), 꼭대기 전망대(276m) 등 3곳이 있다. 2층 전망대에는 기념품 Shop, 레스토랑 등 있는데 여기 레스토랑을 이용하려면 3~4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당연히 꼭대기 전망대에서 보아야만 파리의 모습이 그려진다.
꼭대기 전망대(276m)에서 바라 본 파리시내와 세느강
승강기를 이용하여 에펠탑 전망대에서 파리를 조망하고자 한다면, 1~2개월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현장에서 1~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계단을 이용하면 바로 올라 갈수 있는데 “Stair Only”라고 표기 된 계단을 이용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에펠탑의 진면목은 밤에 있다. 낮에는 경쾌한 모습이지만 밤에는 아름답지 못해 화려하다. 마치 밤을 깨우는 전령사 같다. 3만개가 넘는 전구와 스포트라이트 조명은 새벽 1시까지 탑을 밝히는데 저녁 7시부터는 정시마다 5분간 플래시 조명이 별처럼 반짝인다.
밤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에펠탑
특히 파리 야경을 감상하고자 한다면 세느강 유람선을 타면 더욱 기억에 남는 파리가 될 것 같다. 대표적인 유람선이 바토무슈 크루즈다. 유람선 코스는 앵발리드와 앵발리드 다리, 알렉상드로 3세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등 시작으로 오르세 미술관, 시테 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끝으로 시테 섬을 돌아서 콩시에르주리 왕궁 등 지나서 바토무슈 크루즈 선창장에 도착한다. 다양한 다리도 많이 볼 수 있어 파리 야경을 만끽할 수 있다.
바트무슈 유람선 선착장유람선에서 바라 본 에펠탑알렉상드로 3세 다리. 세느 강에 있는 다리 중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다. 1892년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을 체결 할 때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3세 이름의 따서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기념으로 만들어 졌다.팔레 부르봉 왕궁과 콩코르드 다리. 팔레 부르봉 왕궁은 루이14세 때 지어진 궁전으로 지금은 프랑스 하원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오르세 미술관노트르담 대성당콩시에르주리 왕궁은 프랑스 초기 왕들의 왕궁으로 프랑스 혁명 때 감옥으로 사용되었다.퐁뇌프 다리.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앙리3세 때 짓기 시작하여 앙리4세 때 완공되었다. 영화 "퐁 뇌프의 연인들"의 배경이 된 다리이다.
동남산에서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큰 보리사(배반동 산 66-2)는 비구니 사찰로 『三國史記』에 헌강왕릉(憲康王陵)과 정강왕릉(定康王陵)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이곳에 8세기 불상인 보물 제136호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보리사는 『三國史記』기록 이전부터 있었으며, 9세기에도 사찰은 존속해 있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보리사는 여러 차례에 걸친 공사로 창건 당시의 가람 형태를 알 수 없다.
보리사 대웅전보리사 삼성각과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
보리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경주 남산에서 신체, 광배, 대좌 모두를 갖추고 있는 불상으로 통일신라 중기를 대표하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재(石材)는 광배석 1매, 신체석 1매, 대좌 4매(지대석 1매, 상대복련좌 1매, 간주 1매, 하대앙련좌 1매)로 총 6매의 별석(別石)으로 되어 있다.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은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대좌 높이 1.22m이다.
석조여래좌상의 육계(肉髻)는 이중(二重)으로 표현된 나발(螺髮)이 덮여있는데 머리와 얼굴 경계의 윤곽이 매우 뚜렷하다. 적당한 살이 오른 얼굴은 다소곳이 아래를 향한 눈과 미소를 머금은 입 등과 함께 평온하면서도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운 표정을 한 부처의 모습이다. 비대하지 않은 단정한 신체는 목에 삼도가 있으며 수인은 항마촉진인을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서 옷 주름은 층 단(層 段)을 이루며 신체 각 부위를 감싸고 있다.
나룻배 모양의 광배(光背)는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이중주형(二重舟形)으로 만들어 졌다. 광배의 내부 문양은 연꽃, 보상화(寶相華) 등 화문(花紋)과 화염문(火焰紋) 그리고 화불(化佛) 등으로 꾸며져 있다. 본존의 신체에 따라 굵은 선이 이중으로 돌려졌는데 선과 함께 큼직한 보상화 등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선의 외부에는 불꽃 모양의 화염문, 내부에는 6구의 화불과 화문이 장식되었고 광배 상단 끝에도 하나의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의 뒤 모습을 보면 상단이 반파(半破)되었음 알 수 있다. 최근 보존처리하여 복원되었다.
화불(化佛)과 화불사이에는 연꽃과 당초가 새겨져 있고 본존의 신체에 따라 굵은 선이 이중으로 돌려졌는데 선과 함께 큼직한 보상화 등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대좌는 지대석 위에 복판연화대좌(複辦蓮華臺座)를 놓았고 그 위는 팔각받침을 3단으로 마련한 후 우주(隅柱)가 각출된 팔간 간주(竿住)를 세운 후 앙련(仰蓮)의 상대석(上臺石)을 얹어 놓은 구조이다. 이 상대석 역시 아래에서 간주와 만나는 부분에는 2단의 팔각 받침석을 마련했는데, 앙련(仰蓮)의 연화문은 단판(單瓣)이면서 중층(重層)으로 각출시켜 넉넉하게 마련하였다.
석가여래좌상은 수인을 보면 항마촉지인으로 석가여래로 불 수 있는데 광배 뒷면에 약사여래를 조성하였기 아미타여래로도 볼 수도 있다. 사방불을 조성한 바위를 보면 약사여래 맞은편에 아미타여래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석공만이 알 수 있으리.
마애약사여래좌상(磨崖藥師如來坐像)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에 얕은 돋새김(양각)과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 마멸이 심하여 얼굴 등의 세부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불상 높이 1.3m로서 연화문이 이중(二重)으로 된 앙련연화대좌 위에 여래상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머리에 육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져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얼굴은 둥글다. 얇은 법의는 신체를 드러내 보여주며, 수인은 왼손에 둥근 약합(藥盒)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 높이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다. 광배는 석조여래좌상과 거의 동일하게 조각했으나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외곽의 화염문은 어렴풋이 보인다.
정리되지 않은 석재가 모퉁이에 쌓여있다.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93호)
보리사 주차장에 있는 안내표지판마애불좌상 찾아가는 길. 마애불좌상은 보리사에서 남쪽 미륵골 기슭을 따라 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마애불좌상은 보리사에서 남쪽 미륵골 기슭을 따라 50m 가량 오르면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는 넓적한 반원형으로 높이와 폭은 약 2.4m이다. 바위를 감실형(龕室形)으로 광배를 움푹하게 파서 부조(浮彫)했는데 신체 높이는 1.2m이며 어깨 너비는 60㎝이다. 바로 앞에는 제단석이 놓여 있다.
보리사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 유형문화재 제193호)마애불좌상 바로 앞에는 제단석이 놓여 있다.
머리는 낮은 육계로 표현되었고 두 귀는 옷깃에 닿을 듯 내려왔고 삼도가 있는 목은 짧다. 살이 올라 퍼진 얼굴은 사각에 가깝고 궁(弓)形 눈썹에 가는 눈, 넓적한 코와 꽉 다문 입술 등의 표정 속에는 친근한 표정을 느낄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수인은 옷 주름이 덮고 있어 알 수 없으며 결가부좌한 하체 역시 상체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덮여 있다. 대좌는 3잎의 중판연화가 앙련(仰蓮)인 상태로 표현되어 있다.
조성연대는 석가여래좌상 보다 후대로 보고 있으며 통일신라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좌상을 조성한 바위뒤 끝부분에는 홈이 파여져 있는데 조성 당시 추가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것 같다.마애불좌상에서 바라 본 들판
경주남산 탑골 신인사지(神印寺址, 배반동 산69번지)에는 보물 제201호로 지정된 마애조상군이 있다. 또는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이라고도 부른다.바로 옆에는 옥룡암(玉龍庵)이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학자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가 이 부근에서 神印寺라 새겨져 있는 기와명문을 발견했다고 하여 신인사지로 전해지고 있다. 마애조상군 남면에서 많은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옥룡암 앞 안내표지판. 탑골은 길이가 약 2km로서 동남산에서는 두번째로 긴 계곡이다. 탑골마을에서 개울을 거슬러 약 40m쯤 들어가면 옥룡암이라는 절이 있고 절 뒤에 부처바위와 삼층석탑이 서 있다.옥룡암 입구.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신인종의 창시자인 명랑법사가 당나라 수군을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에서 오색비단을 이용하여 절 모양을 만들고 풀로써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방신장을 만들어 신인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한 것처럼 사천왕사지를 바라보고 있는 이곳 신인사에서도 바위에 사방불(四方佛) 즉 마애조상군을 조성하고 창건하여 삼한통일을 위해 문두루비법을 또한 하였으리라 추정된다. 또한 바위에 새겨진 조각수법을 보아 제작연대도 7세기중엽으로 판단된다.
마애조상군, 부처바위와 삼층석탑
마애조상군은 바위의 동, 서, 남, 북 사방(四方)에 여래(부처)를 새겨 조성하였기 때문에 사방불암(四方佛巖)이라고 하고 이곳 마을에서는 부처바위라고 부른다. 신라시대 사방불암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내용도 다양하다. 1988년 마애불상군에 대한 탁본 및 실측조사를 하여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 탑상 등 35구가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고 2006년 10월 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되어 총 37구가 새겨져 있다. 만다라(蔓茶羅)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 된 한 폭의 불화를 보는 느낌인데 밀교의 불경 내용을 요약한 삽도그림 변상도(變相圖)인 것 같다.
부처바위에 새겨진 상(像)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는 것, 연꽃잎이 넓게 표현된 것, 신라시대 불교 초기의 모습인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모습, 아미타여래의 눈이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낸 것, 상현좌를 한 것, 금강역사가 금강저를 들고 무장한 것 등 이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북면
부처바위 북측 입면도
부처바위 중 가장 높은 높이 9m, 폭 6m의 북면 바위에는 여래 1구, 탑 2구, 비천(飛天) 2구, 사자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다. 가장 눈에 띤 것은 탑으로 9층탑과 7층탑의 목탑이다. 9층탑은 기단부(基壇部)가 이중기단으로 높이 2m, 너비 2.m이고 탑신부(塔身部)의1층 탑신에는 출입문이, 2층부터는 창문이 2개씩 있다. 옥신(지붕)의 층이 올라갈수록 추녀의 넓이와 옥신의 높이는 조금씩 축소되어 3m 높이에서 삼각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옥신의 추녀 끝마다 풍경이 달려있다. 상륜부(相輪部)는 높이가 2m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등 있다.
부처바위 북면
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7층탑도 층수만 다를 뿐 모양이나 조각수법은 동탑과 유사하다. 신라 때 새겨진 이 탑들을 통하여 몽고군의 침입 때 불타 없어진 황룡사 9층 목탑(645)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9층탑과 7층탑 사이 위쪽 중앙에는 연화대좌 위에 좌상을 하고 있는 석가여래가 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선정인을 표시한 듯 옷자락에 두 손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정확한 수인은 알 수 없다. 둥근 두광은 햇살 같은 연꽃을 새겨서 밝고 생기가 넘치는 것 같다. 연화대좌는 꽃잎이 네 개로 되어있는데 두 개의 꽃잎은 날개처럼 뻗어 있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느낌을 준다.
9층목탑과 석가여래9층목탑의 풍경석가여래와 천개7층목탑과 훔사자
여래 머리 위에는 부처의 권위를 표현코자 햇빛을 가려주는 천개가 있는데 보통 절 법당 안에서 볼 수 있다. 마름모를 한 줄로 투각한 넓은 천개 위에 두 겹으로 연꽃잎을 장식하였고, 밑으로는 헝겊으로 접은 수실을 늘인 다음 포장을 늘여 놓았다. 이 또한 바위를 통해 신라시대 천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9층 목탑과 7층 목탑 앞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데불국정토를 지키는 성스러운 짐승이다. 9층탑 앞 사자는 입을 벌리고 오른쪽 발은 힘차게 땅을 딛고 왼발은 들어 올렸으며, 꼬리는 깃발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 날리고 있다. 목에 털이 없어 암사자로 보인다. 7층탑 앞사자는 입을 다물고 오른발을 들고 있으며, 꼬리가 아주 복잡하다. 목에 긴 털이 많아 숫사자로 보인다. 입을 벌린 사자는 ‘아사자’라 하고 입을 다문 사자는 ‘훔사자’라 하는데, 닫힌 세계와 열린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음과 양을 합친 모든 세계를 부처님이 다스린다는 뜻이다.
9층목탑 아래 아사자7층목탑 아래 훔사자
천개 위로 비천(飛天)두 구가 날고 있는데 아름다운 천녀들이 하늘을 날면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꽃을 뿌리는 모습이다.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천개 위로 비천(飛天) 두 구가 날고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서면
부처바위 서측 입면도
높이 6m, 폭 6m의 서면 바위에는 여래 1구, 비천 2구, 수목 2구 등 5구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좌 위에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 神樹가 늘어져 있고 왼쪽에는 대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있다. 약사여래는 네모에 가까운 갸름한 머리에 자그마한 육계가 솟아 있고, 귀는 어깨에 닿아 있으며, 가는 눈은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길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데 근엄한 표정이다. 머리에 비해서 조금 작은 몸체는 반듯하고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평행으로 놓여 있고 두 손은 선정인 같은데 옷자락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두광은 연주문으로 둥글게 연꽃을 새기고 그 가장자리에 구슬을 늘어뜨려 있고 두광 주위에는 화연문모양으로 불길이 새겨져 있어 화려하다.
약사여래
여래 위에 있는 비천상은 피리를 불면서 날아가고 있고 여래 왼쪽의 비천상은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어렵다.
약사여래 위의 비천상으로 마멸이 심하다.약사여래 왼쪽의 비천상으로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의동면
부처바위 동측 입면도2006년 10월 9월에 바위 동면에 비천상과 스님상이 추가로 발견된 위치
북쪽으로부터 첫 번째 바위 면에는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아미타여래가 있다. 머리 위에 나지막한 육계가 솟아있고, 눈은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져 화사한 웃음을 나타내고 있다.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이중으로 새겨져 있고 두광의 외곽은 연주문(連珠紋)으로 둘러져 있다. 두 팔은 경사를 이루면서 연결되어 삼각형에 가까운 몸체를 이루고 있다. 풍성한 두 무릎은 연화대좌 위에 편안하게 놓여 있다. 여래 왼쪽에는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연꽃에 앉아 있는데 양 어깨에는 천의가 덮여져 있고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 합장하고 얼굴은 여래를 향하고 있다. 또한 둥근 두광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첫번째 바위의 삼존불과 가릉빈가, 비천아미타여래와 관세음보살
보살 아래에는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삼존불인 경우 중앙의 주불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이나 또는 주불에 따라 좌우에 여래를 배치한다. 여기서는 왼쪽에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는 보살이 배치됨에 따라 오른쪽은 대세지보살로 여겨진다.
여래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여래를 향하여 염불하는 모습
이 외에 여래 둘레와 위에는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몸을 하고 있다는 상상의 새 가릉빈가 1구,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 6구가 새겨져 있는데 꽃을 뿌리며 혹은 꽃 접시를 들고 혹은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찬미하는 모습들이다. 비천들의 옷자락은 춤을 추며 나부끼니 같이 생동감이 있다.
아미타여래 오른쪽 위의 가릉빈가와 비천관세음보살 위쪽의 비천 3구왼쪽 끝부분의 비천
두 번째 바위 면에는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이 있고, 왼쪽에도 스님이 있는데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그리고 맨 위쪽에도 비천상이 있는데 이 또한 육안으로는 식별이 안 된다.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앉아있는 스님2006년 10월 9월에 발견 된 스님상이나 식별이 안된다.
세 번째 바위 면은 높이 4m 가량 되는 기둥바위인데 동쪽을 바라보며 삼지창을 든 신장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역사상으로 추정되나 마멸이 심하여 식별이 안 된다. 초기에는 맞은편에도 돌기둥이 있어 금강역사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초기 옛날에는 이곳이 절의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지창을 든 금강역사이나 식별이 안된다.
사방불암(四方佛巖), 부처바위남면
부처바위 남측 입면도마애조상군, 부처바위 남면에서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발견되어 이곳에 목조건축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높이 2.72m, 폭 6.06m의 남면 바위는 가운데가 갈라져서 두 개의 벽면으로 병풍처럼 놓여 있는데 여래 1구, 보살 2구, 스님 2구, 수목 2구 등 7구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바위 앞에는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왼쪽 바위에는 큰 연화대좌 위에 여래가 결가부좌 하여앉아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이 앉아 있다. 옷자락이 무릎 아래로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는상현좌를 하고 있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알 수가 없다. 둥근 두광에는 햇살처럼 연꽃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과 수목인 보리수나무보리수나무
좌우 협시 보살들은 연꽃송이에 앉아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있다. 오른쪽 보살과 달리 왼쪽 보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깨가 여래 쪽으로 기울여진 자세다. 두 보살의 얼굴은 마멸이 심하여 그 방향을 알 수 없는데 보살들의 두광이 갸름하게 타원형으로 되어 있어 얼굴을 여래 쪽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존불 왼쪽에는 보리수나무가 있다.
오른쪽 바위 중앙 아랫부분에 얕은 감실을 파고 그 안에 좌상이 새겨져 있는 스님이 있는데 선정에 든 것 같다. 얼굴은 갸름하고 몸체는 작은 편이며 무릎은 넓어 편안해 보인다.
좌상을 하여 선정에 든 스님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오른쪽 바위에 새겨져 있는 스님 상을 가리고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한눈에 허리가 매우 잘록함을 느낄 수 있고 마애상과는 시대적 차이가 뚜렷하다.대석(臺石)과 신체석(身體石) 2개로 이루어졌는데 전체 길이는 2m, 방형 대석의 높이 25㎝, 길이 1.3m이다. 대석에는 발만 새기고 발목 이상은 한 돌로 신체석에 조각하였다. 제작연대는 8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입상
얼굴은 윤곽이 거의 안보일 정도로 파손되었고 광배 상단 역시 유실되었으나, 신체는 거의 완전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수인은 좌상에만 나타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왼손은 배 위에 오른손은 허벅지 앞에 가지런히 놓아두게 표현하였다. 어깨는 넓고 가슴은 풍성하고 허리는 가늘다. 가는 허리에서 곡선을 그리며 풍성한 엉덩이를 이룩하고 기둥 같은 두 다리로 선은 이어진다. 두 팔에 새겨진 옷주름들도 근육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얼굴, 가슴, 엉덩이, 허리는 여성적이고 팔은 남성적이다.
통견인 법의는 볼륨감 있는 신체의 특성을 그대로 살려줄 정도로 얇은 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지역 마을에서는 여래의 왼손이 배에 대고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안산불(安産佛)로 신앙되어 왔고 여기서 기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여인들이 찾았다고 한다.
석조여래입상에서 정면으로 12m 밖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이 자연바위 위에 남아있다. 크기는 230㎝, 너비 185㎝, 높이 60㎝, 간공 지름 15㎝, 간공 깊이 12㎝이다. 석등 바로 동남쪽에 삼층석탑이 서있고 삼층석탑과 삼존불 사이에 큰 바위들이 가로로 놓여 있는데, 그 중간 바위벽면에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이 남쪽으로 앉아 합장하고 있다.
자연바위 위에 석등(石燈)을 세웠던 흔적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
삼층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서 있는 석탑인데, 옥개받침이 3단으로 되어 있고 새긴 솜씨도 둔박하여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낙수면 모서리에 추녀마루가 새겨져있고 그 끝머리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여기에 풍경을 달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높이가 4.5m밖에 안 되는 작은 탑이나 높은 언덕 위에 솟아 있으므로 멀리서도 보인다. 이에 이곳 동네사람들은 이 계곡을 탑골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옥룡암(玉龍庵)과 민족 저항시인이육사
이육사 문학관(경북 안동) 자료에 의하면 이육사가 1936년(32세)과 1942년(38세)에 경주 옥룡암에 찾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옥룡암은 1924년 박일정 스님에 의해서 창건됐다고 한다. 옥룡암이라고 불린 것은 옛날 이곳에 푸른색 옥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암자의 명칭이 불무사(佛無寺)로 변경됐지만 옥룡암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육사는 1936년에 8월에 오랜 감옥 생활로 쇠약해진 몸을 옥룡암에서 잠시 휴양하였고 이때 8월 4일에 신석초에게 엽서를 썼는데 7월 20일 서울을 떠나 대구를 거쳐 29일 포항에 도착하여 머물다가 8월에 옥룡암으로 온 것이다. 이육사에게 옥룡암을 소개 한 이는 고암 박곤복(경주 건천읍 화천리 출신)으로 당시 욕룡암 주지 스님과 잘 아는 사이였다. 고암 박곤복은 육사보다 8살이나 많았지만 육사를 각별하게 대했다. 1942년 7월에 폐질환으로 이육사는 다시 옥룡암을 찾아 요양을 하였다. 그는 옥룡암에 3개월 정도 머물 예정이었으나 백형 이원기의 타계로 서둘러 귀향하였다.
2004년 7월에 옥룡암에서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육사의 미발표 시조 2편이 발견되었다. 이육사와 신석초는 형제처럼 가까이 지낸 이로 알려져 있다.
경주 동남산의 오산골과 국사골 사이에는 “탑말” 또는 “탑촌(塔村)” 이라고 불리는 마을에 형식을 달리하는 삼층석탑이 동·서에 나란히 서 있다. 동 삼층석탑은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 삼층석탑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탑의 조성 시기는9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옛날부터 오산골 어귀 일대를 피리(避里)또는 피촌(避村)으로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 때부터 행정구역 이름이 남산리로 되는 까닭에 이들 탑을 남산리(남산동) 쌍탑으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절터이름도 남산사터로 알려져 있다.
이곳 동, 서 삼층석탑 동쪽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양기못이라고 부른다. 옛 기록에는 양피못((讓避堤)이라고 적혀있다. 이에 삼국유사 피은(避隱) 염불사(念佛師)에 의거하여 절터 이름은 양피사지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유사』 사금갑에 나오는 서출지가 이곳 양피못인데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이 서출지로 바뀌어졌다.
왼쪽이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동 삼층석탑이고 오른쪽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는 서 삼층석탑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제8 염불사(念佛師)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그 마을에 절이 있는데 피리사(避里寺)라 했다. 그 절에 이상한 중이 있었는데 성명은 말하지 않았다. 항상 아미타불을 외어 그 소리가 성(城) 안에까지 들려서 360방(坊) 17만호(萬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이 낭랑하기 한결같았다. 이로써 그를 이상히 여겨 공경치 않는 이가 없었고, 모두 그를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 그가 죽은 뒤에 소상(塑像)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 안에 모시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했으니 마을 이름을 따서 얻은 이름이다.」
피리촌(避里村)은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양피(讓避)’와 같은 뜻이다. 또한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에 나오는‘피촌(避村)’도 모두 같은 마을을 가리킨다.
민장사(敏藏寺)는 삼구유사 제3권 탑상(塔像) 敏藏寺에 등장하는 사찰로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745년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관음신앙과 관련된 곳으로 판단된다. 상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금리(盃金里)의 가난한 여자 보개(寶開)에게 장춘(長春)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바다의 장삿꾼을 따라다녔는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민장사(敏藏寺 - 이 절은 민장각간(敏藏角干)이 집을 내놓아 절로 삼은 것이다.)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7일 동안 정성을 다하여 기도드렸더니 장춘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동료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널판 쪽을 타고 오(吳)나라 해변에 가서 닿았습니다. 오나라 사람들이 저를 데려다가 글에서 농사일을 짓게 했습니다. 고향에서 온 듯한 이상한 스님이 은근이 위로하고 저를 데리고 동행하는데, 앞에 깊은 개천이 있어서 스님은 저를 겨드랑이에 끼고 뛰었습니다. 정신이 희미한 가운데 우리 말소리와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살펴보니 벌써 여기 와 있었습니다. 초저녁 때(佯時) 오나라를 떠났는데 여기에 이른 것은 겨우 술시 초(戌初))였습니다.」 고 하였다.
곧 천보(天寶) 4년 을유(乙酉 : 745년) 4월 8일이었다. 경덕왕(景德王)이 이 소식을 듣고 절에 밭을 주고 또 재물과 폐백을 바쳤다.』
삼국유사의 두 기록을 살펴볼 때, 염불사의 창건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염불 스님의 입적 이후, 그 초상을 민장사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염불사와 민장사는 동 시기에 존재했으며, 천보 4년에 민장사 관음보살의 기적과 관련된 기록으로도 염불사의 창건연대는 745년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최소한 8세기 초 ~ 중엽 경에 염불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민장사의 경우 민장각간이 자택을 희사하여 사찰로 바뀐 점을 고려한다면 염불사는 8세기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현재 염불사지로 추정되는 곳은 오산골 어귀 일대로 양피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경주시 남산동 1130번지 일원(면적 : 총 2,175㎡)에 해당되며 2003년과 2008년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2탑 1금당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동·서 삼층석탑은 일찍이 무너졌지만 부재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서 발굴조사 후 2007년 6월 13일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9년 1월 16일에 동, 서 석탑 복원작업을 완료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염불에 대하여 알려진 내용은 없으나 삼국유사 5권 피은(避隱)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를 보면 정토신앙(淨土信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따라서 염불은 관음신앙과 정토신앙이 관련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동, 서 석탑사이에 있는 석등연화하대석과 기타 석재들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동 삼층석탑
동 삼층석탑은 이형탑(異型塔) 범주로 분류될 수 있는데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탑이다. 노반(露盤)까지 남아 있어 그 원형(原型)을 확인할 수 있다.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인 지대석(地臺石)을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지대석일부는 지하에 묻히고 지상에는 15㎝가량 노출되었다.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는 잘 다듬은 돌 여덟 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상하 각 네 개 씩 배치하였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몸돌사이에는 3단의 괴임석을 다듬었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세 개를 사용하여 3층을 만들었다. 1층 지붕돌은 5단의 옥개받침을 두었고, 낙수면은 7단의 계단형으로 되어있다. 지붕돌의 처마선 모퉁이부분은 앙곡(仰曲)을 표현하지 않고 일직선의 수평을 두었다. 각 모퉁이에는 풍탁(風鐸)을 매어 달기 위한 구멍이 상하로 뚫려 있다. 2층 지붕돌은 5단의 옥개받침, 낙수면은 6단, 3층 지붕돌은 4단의옥개받침, 낙수면은 4단을 두어 체감율을 크게 하였다.
상륜부(相輪部)의 노반석 윗면은 2단의 역계단 모양으로 다듬었고, 노반석 중앙에는 찰주를 세우기 위한 구멍이 관통되어 있는데 3층 지붕돌까지 뚫려 있다. 찰주구멍은 노반 중간을 지나면서 점차 병목같이 좁아져 있다. 지붕돌 낙수면에 나타난 계단형 모형은 전탑(塼塔)에서 그 유사성(類似性)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경주지역에서 유사한 석탑은 서악동(西岳洞) 3층 석탑이 있다. 단지 서악동 3층 석탑의 경우 1층 탑신에는 문비형(門扉形)으로 새겨 마련하고 문비입구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1구(軀)씩 배치한 점만 차이가 있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긴서 삼층석탑
서 삼층석탑은 2층 기단의 면에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노반석(露盤石)만 남아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신장(神將)이라 하면 수미산 위에 사는 모든 신들을 통틀어 말하며, 불법(佛法)을 옹호하고 불경(佛經)을 수지 독송(受持讀誦)하는 사람들을 외호하는 신으로 종류로는 금강역사(인왕상), 팔부신장(팔부중상), 십이신장(십이지신상) 등이 있다. 우리나라 신장신앙의 기원은 삼국 초기 불교가 전래될 때 함께 시작되었다고 추측되고 현존하는 예를 볼 때는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팔부신중과 십이지신상이 탑에 조각으로 나타난 것은 8세기 이후다.
팔부신중(八部神衆)은 법을 수호하는 8종의 신으로서 석가모니 10대 제자와 함께 부처의 설법을 호위하는 역할을 하는데 무장을 한 모습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들도 갖가지다. 원래는 고대인도 신들로 악마나 구신에 해당하지만, 석가에게 교화된 뒤 불법을 수호하는 선신으로 재구성되었다. 종류는 천, 용, 야차, 아수라, 건달바, 긴나라, 가루라, 마후라가 등 이다.
왼쪽부터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아수라와 건달바왼쪽부터 팔부신중(八部神衆) 중 천과 가루라
기단부(基壇部)는 지대석과 2층 기단으로 되어있다. 1층 기단은 2단 괴임이 있는 갑석이 2개로 조립되었는데, 지대석과 면석은 한 돌로 조성되어 있다. 모퉁이에 우주(隅柱), 가운데에 탱주 2조가 모각되어 있다. 2층 기단은 모퉁이에는 우주(隅柱), 중앙 탱주사이의 면석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2단 괴임이 있는 갑석과 갑석부연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개로 구성되어 있고 몸돌(탑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이 각각 돌 하나로 세 개를 사용하여 3층을 만들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지붕돌의 옥개받침은 각 층마다 5단(段)으로 되어있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 전각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 처마면 밑 양쪽 모서리에는 풍탁을 매어달 수 있도록 구멍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의 노반석은 1개로 만들었으며 외형상 동탑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기단부 면석에 팔부신중을 새긴 삼층석탑은 경주지역에서 창림사지 3층 석탑이 있다.
경주 동남산 불곡(佛谷, 부처골)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보물 제198호)은 자연바위를 파서 감실을 만든 후 조성한 불상으로 흔히 감실부처 또는 할매부처라고 부른다. 이 감실부처의 조성연대는 7세기(약 1300~1400년 전)로 감실불(龕室佛)의 원조이자 석굴사원의 시초이고 선덕여왕 재위기간(632 ~ 647)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남천로를 따라 도지동 탑골 마애불상군을 지나면 만나는 이정표
부처골(佛谷)은 남산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 감실여래좌상으로 인해 계곡명이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원래 3곳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감실여래좌상이 있는 절터를 제외한 나머지 2곳은 흔적이 거의 없다.
부처골 감실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
감실 부처는 자연바위를 파서 조성한 불상으로 그 감실 좌, 우와 앞뒤로 큰 바위인 화강암군(花崗巖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과 바위의 가구(架構)흔적으로 불상 앞과 뒤의 2곳에 약간의 공간에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감실부처의 본 절터는 이곳의 약 30m 아래 오른편 길목 어귀에 있다. 지형을 이용해 쌓은 ㄱ자형 축대로 2단(段)으로 확인되었고 밑 축대의 높이는 1.2m, 위 축대 높이 2m, 길이는 12m이다.
감실부처의 본 절터로 감실부처의 약 30m 아래 오른편 길목 어귀에 있다. 지형을 이용해 쌓은 ㄱ자형 축대로 2단(段)으로 확인되었고 밑 축대의 높이는 1.2m, 위 축대 높이 2m, 길이는 12m이다.
불상이 조성(造成)된 바위는 자연암반 중 제일 두툼한 바위를 이용하여 높이 2.3m, 너비 3.5m, 깊이 0.9m의 굴을 파서 감실(龕室)을 마련하고 내부에 불상을 조성했다. 조각 수법으로는 불상 얼굴은 높은 부조(浮彫)로 하고 신체와 대좌는 낮은 부조로 1.5m 높이로 조성하였다. 앞으로 다소곳이 숙여진 신체는 그 표정이 조용한 주변과 어우러져 명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과 바위의 가구(架構)흔적으로 불상 앞과 뒤의 2곳에 약간의 공간에 당시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두에서 머리에 두건을 귀까지 덮고 쓴 것으로 보면 보살이 되고 소발(素髮)의 머리로 귀를 덮어 어깨 위로 흐르는 것으로 보면 여래의 모습이다. 둥근 얼굴에 내려감은 눈, 얌전한 입술에 깊이 판 입가 등으로 부드럽고 우아하고 내면적인 미소이나 한편으로 엄숙함과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정적인 분위기도 연출되고 있다.
신라시대 불교가 초기에 전파 될 때 대부분 불상은 천진난만하고 친근감 있는 평민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양하다. 신라화랑의 미소년 모습, 한국 여인, 자애로운 어머니, 할머니 모습 등으로 보여 지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각이 진 어깨는 넓게 결가부좌한 무릎과 함께 안정된 구도를 이루고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앞가슴은 사각형으로 표현되었고, 무릎을 덮은 옷 주름은 상현좌(裳懸座)를 이루고 있다. 두 손은 모아서 소매 속에 넣고 배 앞에 대고 있어 수인 형태는 파악되지 않으나 선정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릎은 낮고 수평적이며 오른발이 유난히 크다. 법의와 대좌 및 주위에 붉은 색 흔적이 있어 조성 당시 채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감실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 동짓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붉은 햇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감실부처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일 때가 동짓날 오전 중에 보는 것이 가장 잘 보이는데 특히 오전 10시 ~ 11시경 햇빛이 부처님 얼굴에 비칠 때의 모습은 자비로운 표정의 동안을 볼 수가 있다.
1986年 여름 어느 날 「용왕(龍王)이 찾아온 길(용왕(龍王)の來た道」이라는 책을 쓰는 장곡천(長谷川)라는 일본인이 감실불상(龕室佛像)을 찾아 왔다. 이유는 감실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였다.옛날부터 일본 사람들은 설날보다 동짓날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낮이 자꾸 짧아져가다가 동짓날부터 낮이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서 있는 신사(神社)와 절이 많다고 한다. 확인 해 본 결과 감실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어 동짓날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붉은 햇빛이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그는 장항리사지(獐項里寺止) 대좌(臺座)와 골굴암 불상이 동짓날 해 뜨는 방향으로 앉아 있다고 한다. 또한 문무대왕암(文武王陵)도 동짓날 해 뜨는 방향에 문무대왕을 모신 것일 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마애여래좌상의 조성에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신라 성골왕실에서는 왕즉불 사상을 지배자의 권위를 신성화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덕만공주의 성골 여왕 왕위계승에 대한 염려와 반발을 차단위한 방편으로 진평왕 말년에 마치 하늘이 덕만공주를 장래의 왕으로 인정했음을 나타내는 신기한 표적처럼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에서는 석가모니 이전에 출현했다는 소위 과거칠불의 가람 터가 신라 땅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보통의 남성 부처님상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듯한 한국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있다. 고고한 기품을 갖추고도 인자함과 넉넉함이 보이는 30~40대 초반 여인의 모습인 것이다.
감실 부처는 자연바위를 파서 조성한 불상으로 그 감실 좌, 우와 앞뒤로 큰 바위인 화강암군(花崗巖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
감실부처는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미륵삼존불), 윤을곡 삼존불과 함께 고신라를 대표하는 화랑형 애기미륵으로 부른다. 또한 동짓날 해 뜨는 방향 위치와 고부조의 조각 , 채색여부, 부처와 보살 여부 등 다양한 수수께끼와 신비로움을 현재 남겨 놓고 있다.
경주 남산 자락 남산동에 수백 년 된 배롱나무와 연꽃 그리고 정자가 어울러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서출지(書出池, 경주시 남산1길 17)라고 불리는 신라시대 연못이 있다. 특히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7월 ~ 9월과 연꽃이 피는 7월 ~ 8월에는 장관을 이루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며 꼭 찾는 곳이다. 서출지에 있는 정자는 이름은 이요당(二樂堂)으로 팔작지붕의 정면 3칸, 측면2칸의 ㄱ자형 건물로 조선 현종 5년(1664년) 풍천 임씨 임적이라는 사람이 지었다. 석조기둥을 사용하여 최대한 연못 가까이 세웠기 때문에 정자가 마치 연못에 떠있는 같이 보인다.
늦가을날 서출지의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의 이름 유래는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사금갑(射琴匣)과 관련 있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21대 소지왕(炤智王) 또는 비처왕(毗處王) 즉위 10년(戊辰, 488) 정월 15일에 남산 기슭에 있는 천천정(天泉亭)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나타나서 그중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보시오」하였다.
이때 왕이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까마귀를 따르게 했다. 기사가 남쪽 피촌(避村; 지금의 남산 동쪽 기슭 壤避寺村) 이 못에 이르러 보니,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이것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잃어버려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 노인이 못 속에서 나와 봉투를 기사(騎士)에게 건네줘그것을 돌아와 왕에게 올렸다.
왕이 봉투를 살펴보니 겉봉에 「이 봉투를 떼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떼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은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떼어 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하여 봉투를 뜯지 않았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 하여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떼어 내용을 보니 「 금갑(琴匣)을 쏘라(射琴匣]) 」고 적혀 있었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匣)을 쏘았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內殿)에서 분향수도(焚香修道)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발각되어 두 사람을 사형(死刑)에 처했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왔다 하여 못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놓는데, 까마귀를 위함이다.그리고 매년 정월 십이지일(十二支日) 중 첫 돼지날(上亥日), 첫 쥐날(上子日), 첫 말날(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피하여 함부로 출입하지 않았다. 이언(俚言)에 이것을 달도(怛忉)라고 하였다. 』
신라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 이루어졌다. 사금갑(射琴匣)을 통하여불교 공인 이전부터 왕실에서는 불교를 믿고 궁궐 내에 절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랑세기에 의하면 소지왕(炤智王)에게는 부인이 2명 있는데 정비 선혜부인과 후비 벽화부인이다. 여기에 등장한 궁주는 선혜부인이고 중은 묘심이다. 벽화부인은 당시 신라 사회에서 미모가 출중했으며 소지왕이 500년 9월 날이군(경북 영주)에 행차했을 때 후비로 맞이했고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 살 이였다. 2개월 후 11월에 소지왕은 생을 마감했다. 벽화부인은 섬신공 파로와 벽아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남동생은 화랑의 시조인 위화랑이다.
소지왕은 20대 자비왕의 맏아들로 어릴 때부터 효성스러웠고, 겸손함과 타인을 공경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즉위 9년(487)에 각 지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개척하였다. 또한 즉위 12년(490)에는 도읍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장을 열어 각 지역의 물자를 유통시킴으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 확립하려했다. 또한 고구려 침입에 대비하여 즉위 15년(493)에 백제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힘든 상황은 가뭄, 우박 등 천재지변과 고구려, 왜, 말갈 등의 외침이었다. 말년에는 경국지색의 벽화에 마음이 사로잡힌 것이 그의 치세에 흠결 이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 소지 마립간에 벽화와의 만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2년 봄 3월, 왜인이 장봉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용이 금성 우물에 나타났다. 서울 사방에 누런 안개가 끼었다.
가을 9월, 왕이 날이군에 행차하였다. 이 군에 살고 있는 파로라는 사람에게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벽화라고 하였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인데 실로 일국의 미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비단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채색비단을 덮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진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니 얌전한 어린 소녀였다. 왕은, 이는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이 대궐에 돌아오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왕은 두 세 차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집으로 찾아가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어느 날은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왕이 노파에게 물었다.
「오늘날 백성들은 국왕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노파가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소. 왜냐 하면, 내가 듣건대 왕은 날이군에 사는 여자와 관계하면서 자주 평복을 입고 다닌다 하오. 무릇 용의 겉모습이 고기와 같이 생겼다면 어부의 손에 잡히는 것이라오. 지금의 왕은 만승의 지위에 있는데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니 이런 사람이 성인이라면 누가 성인이 아니겠소?」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부끄러워하여, 즉시 남모르게 그녀를 맞이하여 별실에 두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연꽃이 피는 7월 ~ 8월의 서출지와 이요당
서출지라는 연못은 강원도 강릉에도 있다. 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진평왕 때 무월랑이라는 풍류남아가 강릉에 고을살이로 왔고, 그때 강릉 땅에 연화라는 젊은 처녀가 있었다. 연화와 무월랑이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무월랑이 경주로 되돌아가서 헤어졌을 때, 연화가 키운 잉어가 대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하여 서출지 또는 양어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
이요당지(二樂堂池)에게서출지 자리를 빼앗긴 양피제(讓避堤)
『삼국유사』 사금갑에 나오는 피촌(避村), 피리사촌(壤避寺村)은 삼국유사 4권 피은(避隱) 제8 염불사(念佛師)에 따르면 양피사지(讓避寺) 동, 서 삼층석탑 옆에 있는 양피저수지가 바로 서출지(書出池)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이요당이 있는 연못, 이요당지(二樂堂池)가 서출지(書出池)로 바뀌어졌다.
양피사지(讓避寺) 동 삼층석탑과 산수당(山水堂)산수당과 양피저수지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이요당(二樂堂)과 서출제(書出堤)에 대하여 지(池)와 제(堤)로 구분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요당(二樂堂)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다. 그 고을 사람 임적(任勣)이 지은 객당(客堂)이다. 앞쪽은 연못을 대하고 있는데 돌을 쌓아 층계를 만들고 인하여 누정(樓亭)을 지었다. 그 위에 올라가 보면 완연히 물 가운데 서있는 것 같다. 연못에 연꽃을 가득 심어 놓았는데 가을이면 무성하게 피어 만 떨기의 붉은 꽃이 찬란히 난간까지 비친다.
서출제(書出堤) 금오산동쪽 기슭에 있다. 경주부 동쪽으로 15리 떨어진 곳이며 논에 17섬의 볍씨를 뿌린다.
양피저수지이자 서출제
양피저수지 옆에는 풍천 임씨(豊川 任氏)소유의 산수당(山水堂)이 있다. 산수당은 풍천 임씨(豊川 任氏) 후손들이 1941년에 지어진 것을 2007년에 5칸 팔작지붕으로 증축했다. 3월에는 벚꽃, 7월 ~ 10월에는 연꽃, 배롱나무 꽃이 절경을 이루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풍천 임씨(豊川 任氏) 시조는 임온(任溫)으로 중국 소홍부 자계현 사람이다. 임온의 6세손 임주(任澍)가 1275년 고려 충렬왕의 왕비이자 원나라 황녀인 제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여 대장군을 지내고 풍천(豐川)을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풍천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다. 임적은 풍천 임씨 19세손이다.
열암곡(列岩谷, 새갓골) 마애불상(磨崖佛像,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119번지)은 2007년 5월 22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근처 석불좌상 복원을 위해 주변을 조사하다가 발견되었다. 석불좌상의 축대 아래쪽에서 축대 상부로 출입하던 당시의 동선(動線)이 불분명하여 이를 조사하기 위해 축대 중심으로 주변을 면밀히 살피다가 발견한 것이다.
새갓골주차장에서 약 700~800m를 소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마애불상과 석불좌상을 만날수있다.
당시 석불좌상에서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져 있으며, 30°정도 경사진 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면을 바닥으로 향한 채 엎어져 있었고 왼쪽 다리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흙에 덮인 상태였던 것을 한 달 동안 흙을 파냈다. 마애불상이 발견되기 전 이곳은 잡목들이 많이 우거지고 등산로에서 떨어진 경사진 곳으로 사람들의 접근이 없었다.
마애불상 발견 당시 모습
학계에서는 마애불상 얼굴이 풍화된 흔적이 거의 없어 마애불상이 제작 된 후 얼마 되지 않아 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현 위치에서 앞으로 그대로 넘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상태에서 바로 세웠을 때 1,300년 전 당시 마애불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현재 보호각이 마애불상을 둘러싸고 있다
마애불상이 위치한 곳은 산 사면과 능선에 노두(露頭)가 발달되어 있으며, 이러한 노두에서 풍화되어 떨어져 나온 암석들이 부분적으로 너덜겅을 이루고 있다. 다행스럽게 넘어졌을 때 돌출되어 있는 마애불상 머리카락(나발)이 돌에 먼저 닿으면서 손상이 없었고 불상의 허벅지 부분과 머리 부분만 암반과 괴석(塊石)에 닿아 마애불상을 지탱하고 있다. 돌과 얼굴과의 거리는 5cm이다.
마애불상은 화강암(약 250×190×620㎝, 무게 약 80톤)의 한 면을 고부조(高浮彫)한 것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460㎝, 발아래 연화대좌가 100㎝로, 전체 높이가 560㎝에 이르는 대형 마애불이다.
육계(肉髻)가 높고 민머리[소발(素髮)]이며, 타원형의 얼굴에는 오뚝하게 솟은 코와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펴고 있어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아래로 내려올수록 옷 주름 간격이 넓어져 9단을 형성하면서 발목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두발은 발끝이 밖으로 향하게 벌리고 있으며, 연화대좌는 5장의 앙련(仰蓮)을 얕게 조각하였다.
스케치한 마애불상
특히 이 마애불상에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이다. 한 가지는 귀가 발제선(髮際線: 머리털이 난 끝선)에서 어깨에 이를 정도로 매우 크며,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다. 또 한 가지는 불상의 수인(手印)으로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라 하여 한 손바닥으로 밖으로 해서 어깨높이까지 올리고, 다른 손바닥은 아래로 늘어뜨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는 수인이다. 그런데 여기 마애불상은 왼쪽 손등을 바깥으로 하여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가슴 위에 얹었으며, 오른손 역시 손등이 밖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감싼 채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하복부에 대고 있는 특이한 형식의 수인이다. 마지막은 마애불상이 약 4등신(等身)으로 몸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크게 표현되어 있어 예불하는 사람이 마애불을 우러러 볼 때의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한 것이다. 열암곡 마애불은 8세기 후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화령 삼존불, 배리 삼존불, 석굴암 본존불로 이어지는 신라 불상의 큰 흐름을 이어가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루속히 1,300년 전 신라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마애불상을 온전히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본다.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케 하는 열암곡(列岩谷) 석불좌상(石佛坐像) 열암곡석불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경주시와 함께 보수·정비계획에 따라 2007년 4월부터 발굴조사와, 정비 및 복원을 마친 결과, 2009년 1월 29일 높이 4m, 남향(南向)으로 정좌한 장대한 모습으로 갖추었다. 본래 열암곡 석불좌상은 8~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에 상대, 중대, 하대를 갖춘 3단 대좌 위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이후 누군가에 의해 파괴되었다. 불상은 도괴되어 불두(佛頭)는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광배(光背)는 불상 뒤편으로 넘어져 크게 파손되었고 중대석(中臺石)은 결실되고 없으며 상대석도 깨어져 일부분이 없었고 하대석은 부분적으로 파손된 상태였다.
복원 전 초기 모습정비 및 복원 전 모습
2005년 10월 9일 우연히 남산을 답사하던 한 시민에 의해 불두가 극적으로 발견된 후, 이를 계기로 발굴조사, 정비 및 복원이 시작 되었다. 또한 2005년 11월 20일 상대석 일부분도 시민이 발견하였다. 석불좌상의 불두, 깨진 광배 및 하대석 편(片)들에 대한 접합 복원 그리고 대좌 부재 중 유실된 중대석(中臺石)을 신재(新材)로 만들어 재현하였다.
열암곡   석불좌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13 호 )
대좌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 한 몸돌로 되어 있는 3단의 팔각 연화대좌(蓮花臺座)이다. 떨어져 나간 불두는 보존처리 후 불신(佛身)에 접합하고 10여 조각으로 깨진 광배는 구조 보강 작업을 거쳐 완전하게 접합하였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아우르는 거신광(擧身光)으로서 연화문(蓮華文), 화불(化佛)과 불꽃무늬(火焰文) 새김 등으로 하였고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으며 몸체의 양감과 자연스럽게 늘어뜨려진 법의 차림새 및 조각수법 등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열암곡은 경주 남산의 고위봉(해발 494m)과 봉화대봉(해발 476m), 천왕지봉(해발 433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능선들에 의해 형성된 여러 골짜기 중 하나이다. 이 중에서 백운암으로 향하는 백운계가 본류이며, 백운계 오른편으로 열암곡, 양조암곡, 심수곡이라는 세 개의 골짜기가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