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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주(양남면·양북면·감포읍)지역 동해구의 문화유적답사 3각 포인트는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이견대(利見臺). 이 중 감포읍(甘浦邑) 대본리 해안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견대(利見臺)는 특히 사진애호가들이 일출 사진을 즐겨 찾는 곳이다. 맞은편에는 폐교된 대본초등학교가 있으며 이견대 아래는 바닷가와 인접한 횟집이 즐비하게 있고 좀 더 안쪽으로는 대본항이 있다. 이견대의 이름은 주역(周易)''비용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6825월 신문왕(神文王)이 이곳에서 동해용으로 부터 흑옥대(黑玉帶)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아들 신문왕이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수레를 타고 추령(楸嶺, 고도310m)고개를 넘어야 한다. 추령고개는 경주시의 동쪽에 있는 북천의 발원지인 황룡동과 대종천의 발원지인 양북면 장항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름은 가래나무 추()’고개 령()’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서낭당이 있어 서낭재라고도 불렀다. 경주시내와 동해안의 양북면·감포읍지역을 연결하는 최단코스이자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4번 국도가 추령을 지나가게 건설되었다. 1998년에 추령터널이 개통되면서, 현재는 단풍구경을 위한 드라이브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신문왕이 탄 수레가 추령고개를 넘어 용연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기림사에 도착하여 앞에 흐르는 대종천 지류인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타고 본류인 대종천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을 것이다. 호암천(虎岩川)은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의 성황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동리에서 대종천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호암(虎岩)은 순우리말 이름인 범바위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안동리에서 대종천을 만난 배는 동해방향인 하류를 따라 감은사 선착장에 도착하여 감은사에서 하루정도 묵으면서 여독을 풀었을 것이다. 다음날 감은사 뒤편 연화산 능선을 따라 이곳 이견대에 도착하여 부왕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며 제를 지냈을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의 효심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축성의 연대는 감은사와 문무대왕릉이 완공되는 시기로 추정되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 발굴 때 건물지(建物址) 초석이 확인되어 이를 근거로 새로이 건립한 것이다. 이견대의 내부에 걸려있는 <利見臺記>에 의하면 신라五嶽조사단의 발굴로 문무대왕 해중릉이 대왕암으로 고증되면서 역사의 부침 속에 잊혀진 채 기우단(祈雨壇)이나 역원(譯院)으로 쓰였던 이곳 이견대도 함께 중건되었다는 내력을 전하고 있다.

이견대 관련 내용을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2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면 다음과 같다.

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 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감포의 이름은 지형이()’자처럼 생겨서 만들어졌다는 설, 감은포라 부르다자가 생략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둘 다 확실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마을의 순우리말 이름대부분이 한자의뜻이나 소리를 따서 기록하였다는 점에 기초하면, 감포리에 있는 순우리말이름인 감디 또는 감딧골과 물가를 의미하는가 합하여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감포리(甘浦里)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특히 감포항은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항구의 발달에 유리한 지형을 하고 있어 어항으로 발달하였다.

이견대(利見臺) 위치 진위 논란

이견대 위치에 대한 진위 논란의 발단은 황수영 박사가 불교신문(2002. 4. 30)에 기고한 佛跡逸話 경주 이견대칼럼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1961년 감은사지 발굴 이후로 인접한 이견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965년 오악조사를 계기로 이견대지를 본격적으로 탐사하게 되었다. 당시 이견대의 위치를 현재의 이견정(利見亭) 뒤쪽에 있는 산 위로 비정하는 주장과, 대본리 해변가로 보는 의견이 있었다. 산상설은 경주 유적에 밝은 최남주 선생이 주장하였고, 해변설은 마을의 노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일단 촌로들의 말을 따라 그들이 말하는 지역을 1주일 동안 시굴해 보았다. 그 결과 비록 몹시 교란되기는 했으나 분명한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이 자리를 이견대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자리는 조선시대의 역원(驛院)터일 뿐 신라시대의 이견대는 아닌 듯하다.

1965년의 시굴 직후 나는 일단 이견정의 위치를 발굴지로 비정하기는 하였으나 삼국유사등의 문헌에 보이는 축성(築成)’의 자취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개운치 못하였다. 그래서 그 뒤로도 부근의 해안가를 두루 둘러보았으나 여전히 그 자취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95년 가을 예전에 최남주 선생이 말하던 산 위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곳은 대본초등학교 뒷산으로, 현재의 이견정에서 국도를 건너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내가 이 지역을 새삼스레 주목한 것은 최남주 선생의 말 외에 문무대왕릉 관리인인 김도진씨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말이 현재는 없어졌으나 옛날에는 대본부락에서 감은사로 넘어 가는 길이 이 산으로 해서 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인도로 산 위에 올라가 보았는데, 과연 약 4500평의 너른 대지가 있고 그 삼면에 인공으로 축석된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근에 신라시대 와편이 보였고, 또한 커다란 민묘와 석비 1기가 있었다. 석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비문 가운데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이기도 하였다. 이곳이 과연 고문헌에 보이는 이견대인지는 발굴 등의 정밀조사가 있어야 하겠으나, 한 눈에 동해구가 조망 되는데다가 서쪽으로는 감은사로 통하는 옛길의 존재도 짐작되었다. 이렇게 되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동해의 문무왕릉을 참배한 뒤 만파식적을 얻은 다음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는 행적과도 일치된다. 그러므로 이곳이 이견대일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이견정 자리는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칼럼의 핵심은 현재 이견대의 자리는 조선시대 역원인 이견원 자리인 것이다. 즉 이견대 내부에 걸려있는 <利見臺記>에 현재 자리가 기우단(祈雨壇)이나 역원(譯院)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기록한 배경을 술회한 것이다. 역원(驛院)조선 시대에 도성과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및 통신제도로써 도로로 연결된 중요한 곳에 역과 원을 설치해 왕명이 지방에 신속히 전달되도록 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제도이다. 역(驛), 원(阮)은 30리(11km)마다 설치하여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는 등 공무를 집행하는 관리들의 숙소와 교통 편의(말 제공 및 교환)를 제공하는 곳으로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한 관련 하에 설치되기 때문에 흔히 역원이라 일컬었다

현재 이견대 맞은편 대본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고 학교 뒤편 길을 따라 뒷산을 올라보면 넓은 평지와 함께 묘가 여러 개 있고 이 중 한 묘의 묘비에는 이견대 5(1.5m) 주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석축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고 마을에서는 뒷산을 뜸북재라고 부르는데 소로가 있어 감은사지는 물론이고 양북면 사무소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동해의 절경에 한 폭의 그림 같다.

이견대 맞은편 폐교 된 대본초등학교 뒤편 길을 따라 뒷산을 올라가는 중 바라본 문무대왕릉
뒷산(뜸북재) 정상 초입
뒷산(뜸북재) 주변 축성의 흔적

 

뒷산(뜸북재) 정상을 올라보면 넓은 평지와 함께 묘가 여러 개 있다.
이 중 한 묘의 묘비에는 이견대 5자(약 1.5m) 주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뒷산(뜸북재) 정상에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동해의 절경에 한 폭의 그림 같다.

옛 문헌 중 이견대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퇴계 성리학의 맥을 이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1541~1596)은 농암 이현보의 증손으로 그의 경주(동경) 여행기인 동경유록(東京遊錄)에는

1587418일 신라시대 감은사 터이다. 동쪽 산 한 줄기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와 한쪽 모퉁이에서 끊어지는데, 깎아지를 듯 서있는 바위는 높이가 십여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단청(丹靑)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이른바 이견대(利見臺). 동헌에 앉아 둘러보니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드넓게 넘실거렸다. 또 남쪽 포구에 바위가 솟아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물결 가운데 우뚝 하였으니, 이른바 대왕암이다.

상기 문헌의 기록으로 이견대 위치를 유추해 보면 평지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어 뜸북재 민묘가 있는 주변이 이견대 위치로 합당하다고 여겨지고 현재 이견대(利見臺)는 이견원(利見阮)으로 공무를 띤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주요도로에 설치된 관청으로 판단된다.

양북면 봉길리에서 바라본 대본초등학교 뒷산(뜸북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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