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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월 대보름날이면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대왕바위 앞 해안가에는 전국에서 온 불교 신도들이 용왕제 행사의 일환으로 물고기 방생을 하면서 소원을 비는 곳이다. 또한 무당들도 와서 굿을 올리는데 이곳이 영험하여 최영장군처럼 투구 쓰고 갑옷 입은 문무대왕 형상이 나타난다고 한다여기 대왕바위는 해변에서 약 200m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자연바위로 신라 최초 화장을 하여 동해용 된 사적 제158호인 문무대왕 수중릉(水中陵)이다. 동해용이 된 문무대왕에게 많은 불교신도들이 소원을 빌었고 무당들은 영험한 기를 받으려고 여기를 찾았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대왕바위 앞 해안가에는 유달리 갈매기가 많다.

68171일 지략가이자 삼한통일을 이룩한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대왕(재위기간 : 6616~ 6817, 201개월)이 승하하였다. 문무대왕의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 이였다. 어머니는 문명 왕후이며, 김유신 장군의 누이였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태종 원년(654)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곧 태자로 책봉되었다. 태자 때부터 삼한통일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660년 백제 정벌 전쟁 때는 태종 무열왕을 대신하여 신라군을 직접 지휘하였다. 661년 태종 무열왕이 죽자 신라 제30대 왕이 되었고 676년 대동강 이남 땅을 장악하여 삼한 통일의 과업을 성취하였다.

 주목할 것은 문무대왕의 능으로 신라 최초 불교식 화장을 하였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수중릉이다. 이후 화장을 한 신라왕은 34대 효성왕, 37대 선덕왕, 51대 진성여왕이며 진성여왕은 화장 후 동해바다에 산골(散骨)하여 능이 없다. 그리고 38대 원성왕은 화장 후 매장을 했기 때문에 괘릉이라는 능이 있다. 문무대왕은 말년에 병환으로 세상 떠나기 전 불교 법식으로 화장하고 장례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별세 후 10일 지나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을 하였고(이화소장 : 以火燒葬) 다음 해 5월 이곳 봉길 바닷가 바위섬에서 장골(藏骨)하여 10개월간의 장례 여정을 마쳤다.

신라 최초 화장을 하여 동해용 된 사적 제158호인 문무대왕 수중릉(水中陵)

문무대왕의 수중릉 여부는 과거 학계에서 문무왕의 장례가 산골이냐, 장골이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이에 71년대 신라오악조사단과 KBS 역사스페셜에서 문무대왕릉의 진위여부를 조사하였고 그 결과를 보면, 문무대왕릉은 큰 네 개의 암초에 십자가 모양의 물길(3.5m)이 동, , , 북으로 형성되어 있고 십자가 모양의 중앙에는 웅덩이 모양이 형성되어 있고 거북이 등 모양의 바위(길이 3m, 2.2m)가 한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물길은 동쪽에서 물이 들어와서 서쪽으로 물이 나가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KBS 역사스페셜 조사 때 동쪽 입구를 막고 양수기로 배수를 한 후 상세 조사를 해보니, 거북이 등 모양 바위는 암반 위에 평평하게 자리 잡아 둘 사이에 공간 없고 부장품 또한 없었다. 웅덩이의 수심은 1.5m이고 네 개의 암초는 하나의 암반 위에 형성되었고 거북이 등 모양 바위 또한 이 암반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였다. 여기서 인위적으로 작업을 한 흔적은 거북이 등 모양 바위 주위 사면은 정으로 다듬었고, 서쪽으로 빠지는 출구도 낮게 깎았고 거북이 등 모양 바위는 이동하여 남북방향으로 자리 잡아 눕히었다. 즉 화장 후 문무대왕의 유골을 장골하기 위해 동해 바위섬 일부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였다. 문무대왕릉의 위치 근거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2 만파식적(萬波息笛)과 문무대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본 이견대(利見臺) 위치를 통해 알 수 있다.

문무대왕 별세 후 10일 지나 고문외정(庫門外庭)에서 화장을 하였고(이화소장 : 以火燒葬) 다음 해 5월 이곳 봉길 바닷가 바위섬에서 장골(藏骨)하여 10개월간의 장례 여정을 마쳤다.
문무대왕릉의 평면도와 실측도 : 바닷물의 출입과 중앙에 있는 거북이 등 모양의 바위를 실측적으로 보여준다. 화장 후 문무대왕의 유골을 장골하기 위해 동해 바위섬 일부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였다.

그럼 문무대왕의 화장터는 어디 일까?

일제강점기 1930년대말 조선고적연구회 명의의 보고서에 낭산 배반동 능지탑터를 화장지 유적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1969년부터 197911년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의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으로 판단되었다. 또한 배반동은 옛 부터 대문(大門)터라고 불러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장장소인 고문외정(庫門外庭)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현재 능지탑은 197810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9791125일에 공사 완료한 모습이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낭산 경주 배반동 낭산에 위치하고 있는 능지탑(陵旨塔)
1969년부터 1979년 11년간 삼산오악학술조사단의 능지탑(陵旨塔) 발굴 조사 때 유구 중심부 지하에서 땅이 까맣고 불에 탄 흔적 발견하여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 당시 신문왕 때 부왕의 화장터를 기념, 보존하기 위해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능지탑이 세워진 것으로 판단되고 배반동은 옛 부터 대문(大門)터라고 불러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화장장소인 고문외정(庫門外庭)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능지탑의 다른 이름으로 연화탑(蓮華塔)이라고 불렀는데 상부 옥개부분에 복련의 연꽃 조각한 돌 장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낭산(狼山)은 신라시대부터 신이 내려와 거닐던 숲이라 하여 신유림(神遊林)이라 하여 신령스러운 산으로 숭앙받았다. 그리고 낭산을 위에서 보며 형상이 이리처럼 생겼다하여 이리 狼字에 낭산(狼山)이라고 불렀다. 낭산 주변에는 선덕여왕릉, 문무대왕이 호국사찰로 건립한 사천왕사터, 왕실 원복 사찰인 황복사터, 신문왕릉 등이 있다.

사천왕사터 당간지주 옆 벌판에 있는 동귀부와 서귀부
사천왕사터 서귀부(도로변)
마치 살아있는 거북을 연상케한다.

경주국립박물관에 있는 문무대왕비가 사천왕사터의 서귀부에 있는 비임을 확인되었고 서귀부 방향은 능지탑을 바라보는 북쪽방향 인데 일제강점기 때 철도공사에 따라 남향으로 바뀌어졌다문무대왕비에는 앞면에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및 백제평정에 관한 내용이,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 및 비문의 명이 새겨있다.

선상에서 본 문무대왕릉

문무대왕은 왜 화장을 하여 용이 되려고 하였을까?

그것은 통일신라초기 왕권강화이다. 성골에서 진골 金氏 무열왕권의 정당화와 통일신라시대 전제왕권 확립이다. 이전 성골 시대를 살펴보면 신라왕실의 권위와 호국을 상징하는 보물인 신라삼보(新羅三寶)가 있었다. 황룡사 장육상(皇龍寺 丈六像), 천사옥대(天賜玉帶), 황룡사 구층목탑으로 모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난 진흥왕이 조성한 황룡사 장육상,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왕이 된 진평왕 이 천사(天使)에게 받은 옥대, 신라 최초 여왕인 선덕여왕이 나라 위기 때 완공한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즉 문무대왕은 왕즉룡, 사후에 통일신라 진골왕권의 수호용이 된 것이고 더불어 만파식적을 아들 신문왕에게 전달하여 왕권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왜의 침입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초기에 침입이 33회로 주로 3, 4, 5월이며 문무왕대에 없었고 문무왕 이후 왜는 신라에 조공을 바치고 우호적 이였다. 왜는 삼국통일 전개 과정에서 백강전투에서 백제의 지원군이 출현하였고 패배 이후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권 제6 신라본기 제 6 문무왕 ()

문무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법민이며,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 왕후이며,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고, 유신의 누이였다. 유신의 맏누이가 꿈에 서형산 꼭대기에 올라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흘러 나라 안에 두루 펴졌다. 그녀는 꿈을 깨고난 후에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동생은 장난삼아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라고 말하고, 꿈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우리 집이 마침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고 말하고, 춘추와 함께 집으로 왔다. 그는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을 꿰매도록 하였다.

그러나 맏누이 보희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앞에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그녀의 수수한 화장과 경쾌한 의복, 그리고 어여쁜 얼굴은 눈이 부시는듯하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곧 혼인을 청하여 혼인식을 올렸다. 그녀는 바로 임신하여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를 법민이라 하였다. 왕비는 자의왕후이니 파진찬 선품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영휘 초에 당 나라에 갔을 때, 고종이 대부경 벼슬을 주었다. 태종 원년에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이 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태자로 책봉되었다. 현경 5년에 태종이 당 나라 장수 소정방과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때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 7 문무왕 ()

가을 71,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따라 동해 어구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속설에 전하기를 왕이 용으로 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그 바위를 대왕석이라고 불렀다. 왕은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을 만났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마침내 원근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주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여, 백성들은 자기의 집을 편하게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사라지게 하였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만하였다.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가는 데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현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어기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어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나의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 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 왕의 북산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겠는가? 위 왕의 서릉에는 동작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 만사를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역사서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나의 혼백을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 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숨을 거둔 열흘 후, 바깥 뜰 창고 앞에서 나의 시체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 변경의 성과 요새 및 주와 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요,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고, 원근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그 뜻을 알게 하라. 다음 왕이 이를 시행하라!”

봉길 지명 유래는 慶州 崔氏가 이 마을을 개척할 때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鳳吉"이라 부르다가 조선 말기부터 奉吉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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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주(양남면·양북면·감포읍)지역 동해구의 문화유적답사 3각 포인트는 감은사지, 문무대왕릉, 이견대(利見臺). 이 중 감포읍(甘浦邑) 대본리 해안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이견대(利見臺)는 특히 사진애호가들이 일출 사진을 즐겨 찾는 곳이다. 맞은편에는 폐교된 대본초등학교가 있으며 이견대 아래는 바닷가와 인접한 횟집이 즐비하게 있고 좀 더 안쪽으로는 대본항이 있다. 이견대의 이름은 주역(周易)''비용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6825월 신문왕(神文王)이 이곳에서 동해용으로 부터 흑옥대(黑玉帶)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아들 신문왕이 이곳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서라벌에서 수레를 타고 추령(楸嶺, 고도310m)고개를 넘어야 한다. 추령고개는 경주시의 동쪽에 있는 북천의 발원지인 황룡동과 대종천의 발원지인 양북면 장항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이름은 가래나무 추()’고개 령()’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서낭당이 있어 서낭재라고도 불렀다. 경주시내와 동해안의 양북면·감포읍지역을 연결하는 최단코스이자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4번 국도가 추령을 지나가게 건설되었다. 1998년에 추령터널이 개통되면서, 현재는 단풍구경을 위한 드라이브 코스로 이용되고 있다.

신문왕이 탄 수레가 추령고개를 넘어 용연폭포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기림사에 도착하여 앞에 흐르는 대종천 지류인 호암천(虎岩川)에서 배를 타고 본류인 대종천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을 것이다. 호암천(虎岩川)은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의 성황현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안동리에서 대종천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호암(虎岩)은 순우리말 이름인 범바위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안동리에서 대종천을 만난 배는 동해방향인 하류를 따라 감은사 선착장에 도착하여 감은사에서 하루정도 묵으면서 여독을 풀었을 것이다. 다음날 감은사 뒤편 연화산 능선을 따라 이곳 이견대에 도착하여 부왕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며 제를 지냈을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의 효심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축성의 연대는 감은사와 문무대왕릉이 완공되는 시기로 추정되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대 발굴 때 건물지(建物址) 초석이 확인되어 이를 근거로 새로이 건립한 것이다. 이견대의 내부에 걸려있는 <利見臺記>에 의하면 신라五嶽조사단의 발굴로 문무대왕 해중릉이 대왕암으로 고증되면서 역사의 부침 속에 잊혀진 채 기우단(祈雨壇)이나 역원(譯院)으로 쓰였던 이곳 이견대도 함께 중건되었다는 내력을 전하고 있다.

이견대 관련 내용을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 2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보면 다음과 같다.

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 성은 김씨(金氏)이다. 개요(開耀) 원년(元年) 신사(辛巳; 681) 7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東海) 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이렇게 말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倭兵)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처음 창건(創建)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왕위(王位)에 올라 개요(開耀) 2(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金堂) 뜰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으니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遺言)으로 유골(遺骨)을 간직해 둔 곳은 대왕암(大王岩)이고, 절 이름은 감은사(感恩寺)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고 했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飡)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속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물에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는데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상히 여겨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 혹은 춘일春日)을 명하여 점을 치게 했다. “대왕의 아버님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진호(鎭護)하고 계십니다. 또 김유신공(金庾信公)도 삼삼천(三三天)의 한 아들로서 지금 인간 세계에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聖人)이 덕()을 함께 하여 이 성을 지킬 보물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만일 폐하께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여 그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나가 그 산을 바라보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산 모양은 마치 거북의 머리처럼 생겼는데 산 위에 한 개의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는데 이튿날 점심 때 보니 대나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데, 천지(天地)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며 7일 동안이나 어두웠다. 그 달 16일에 가니 용 한 마리가 검은 옥대(玉帶)를 받들어 바친다. 왕은 용을 맞아 함께 앉아서 묻는다.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용이 대답한다. “비유해 말씀드리자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오니, 성왕(聖王)께서는 소리로 천하를 다스리실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부시면 온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 속의 큰 용이 되셨고 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 하여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보내시어 나로 하여금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五色) 비단과 금()과 옥()을 주고는 사자(使者)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때 산과 용은 갑자기 모양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왕이 감은사에서 묵고 17일에 지림사(祗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太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와서 하례하고는 천천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玉帶)의 여러 쪽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말한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이 쪽 하나를 떼어 물에 넣어 보십시오.” 이에 옥대의 왼편 둘째 쪽을 떼어서 시냇물에 넣으니 금시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이내 못이 되었으니 그 못을 용연(龍淵)이라고 불렀다.

왕이 대궐로 돌아오자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천존고(月城天尊庫)에 간직해 두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敵兵)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國寶)로 삼았다. 효소왕(孝昭王) 때에 이르러 천수(天授) 4년 계사(癸巳; 693)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서 돌아온 이상한 일로 해서 다시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자세한 것은 그의 전기(傳記)에 실려 있다.

감포의 이름은 지형이()’자처럼 생겨서 만들어졌다는 설, 감은포라 부르다자가 생략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둘 다 확실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마을의 순우리말 이름대부분이 한자의뜻이나 소리를 따서 기록하였다는 점에 기초하면, 감포리에 있는 순우리말이름인 감디 또는 감딧골과 물가를 의미하는가 합하여 한자의 소리와 뜻을 따서 감포리(甘浦里)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특히 감포항은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항구의 발달에 유리한 지형을 하고 있어 어항으로 발달하였다.

이견대(利見臺) 위치 진위 논란

이견대 위치에 대한 진위 논란의 발단은 황수영 박사가 불교신문(2002. 4. 30)에 기고한 佛跡逸話 경주 이견대칼럼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1961년 감은사지 발굴 이후로 인접한 이견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965년 오악조사를 계기로 이견대지를 본격적으로 탐사하게 되었다. 당시 이견대의 위치를 현재의 이견정(利見亭) 뒤쪽에 있는 산 위로 비정하는 주장과, 대본리 해변가로 보는 의견이 있었다. 산상설은 경주 유적에 밝은 최남주 선생이 주장하였고, 해변설은 마을의 노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일단 촌로들의 말을 따라 그들이 말하는 지역을 1주일 동안 시굴해 보았다. 그 결과 비록 몹시 교란되기는 했으나 분명한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이 자리를 이견대로 지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자리는 조선시대의 역원(驛院)터일 뿐 신라시대의 이견대는 아닌 듯하다.

1965년의 시굴 직후 나는 일단 이견정의 위치를 발굴지로 비정하기는 하였으나 삼국유사등의 문헌에 보이는 축성(築成)’의 자취를 찾지 못한 것이 못내 개운치 못하였다. 그래서 그 뒤로도 부근의 해안가를 두루 둘러보았으나 여전히 그 자취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95년 가을 예전에 최남주 선생이 말하던 산 위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곳은 대본초등학교 뒷산으로, 현재의 이견정에서 국도를 건너면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내가 이 지역을 새삼스레 주목한 것은 최남주 선생의 말 외에 문무대왕릉 관리인인 김도진씨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말이 현재는 없어졌으나 옛날에는 대본부락에서 감은사로 넘어 가는 길이 이 산으로 해서 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인도로 산 위에 올라가 보았는데, 과연 약 4500평의 너른 대지가 있고 그 삼면에 인공으로 축석된 자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부근에 신라시대 와편이 보였고, 또한 커다란 민묘와 석비 1기가 있었다. 석비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인데, 비문 가운데 이견대(利見坮)’라는 글자가 보이기도 하였다. 이곳이 과연 고문헌에 보이는 이견대인지는 발굴 등의 정밀조사가 있어야 하겠으나, 한 눈에 동해구가 조망 되는데다가 서쪽으로는 감은사로 통하는 옛길의 존재도 짐작되었다. 이렇게 되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동해의 문무왕릉을 참배한 뒤 만파식적을 얻은 다음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는 행적과도 일치된다. 그러므로 이곳이 이견대일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의 이견정 자리는 조선시대에 설치되었던 역원인 이견원(利見院)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칼럼의 핵심은 현재 이견대의 자리는 조선시대 역원인 이견원 자리인 것이다. 즉 이견대 내부에 걸려있는 <利見臺記>에 현재 자리가 기우단(祈雨壇)이나 역원(譯院)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기록한 배경을 술회한 것이다. 역원(驛院)조선 시대에 도성과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및 통신제도로써 도로로 연결된 중요한 곳에 역과 원을 설치해 왕명이 지방에 신속히 전달되도록 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한 제도이다. 역(驛), 원(阮)은 30리(11km)마다 설치하여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는 등 공무를 집행하는 관리들의 숙소와 교통 편의(말 제공 및 교환)를 제공하는 곳으로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한 관련 하에 설치되기 때문에 흔히 역원이라 일컬었다

현재 이견대 맞은편 대본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었고 학교 뒤편 길을 따라 뒷산을 올라보면 넓은 평지와 함께 묘가 여러 개 있고 이 중 한 묘의 묘비에는 이견대 5(1.5m) 주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석축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있고 마을에서는 뒷산을 뜸북재라고 부르는데 소로가 있어 감은사지는 물론이고 양북면 사무소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동해의 절경에 한 폭의 그림 같다.

이견대 맞은편 폐교 된 대본초등학교 뒤편 길을 따라 뒷산을 올라가는 중 바라본 문무대왕릉
뒷산(뜸북재) 정상 초입
뒷산(뜸북재) 주변 축성의 흔적

 

뒷산(뜸북재) 정상을 올라보면 넓은 평지와 함께 묘가 여러 개 있다.
이 중 한 묘의 묘비에는 이견대 5자(약 1.5m) 주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뒷산(뜸북재) 정상에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면 동해의 절경에 한 폭의 그림 같다.

옛 문헌 중 이견대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이며 퇴계 성리학의 맥을 이은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 1541~1596)은 농암 이현보의 증손으로 그의 경주(동경) 여행기인 동경유록(東京遊錄)에는

1587418일 신라시대 감은사 터이다. 동쪽 산 한 줄기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와 한쪽 모퉁이에서 끊어지는데, 깎아지를 듯 서있는 바위는 높이가 십여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단청(丹靑)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이른바 이견대(利見臺). 동헌에 앉아 둘러보니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드넓게 넘실거렸다. 또 남쪽 포구에 바위가 솟아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물결 가운데 우뚝 하였으니, 이른바 대왕암이다.

상기 문헌의 기록으로 이견대 위치를 유추해 보면 평지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어 뜸북재 민묘가 있는 주변이 이견대 위치로 합당하다고 여겨지고 현재 이견대(利見臺)는 이견원(利見阮)으로 공무를 띤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주요도로에 설치된 관청으로 판단된다.

양북면 봉길리에서 바라본 대본초등학교 뒷산(뜸북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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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중반 문화유산답사가 유행하였고 모 출판사의 경주문화유적 안내책 표지에 장엄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으로 장식하였다. 이로 인해 감은사지와 추령고개 넘어 동해구(東海口)로 가는 왕의 길은 경주문화유산답사 방문객에게는 필수 방문코스가 되었다. 감은사지는 해발 240m의 나지막한 연대산(蓮臺山)에서 서남쪽을 향해 뻗은 지맥(支脈)용당산(龍堂山)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종천변(大鐘川邊)의 평지보다 9m정도 높은 지점에 있다. 그리고 절터가 위치한 마을은 속칭 탑곡(塔谷) 또는 탑동네로 부른다.

또한 풍수지리측면에서 살펴보면 대종천 하구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대종천(大鐘川) 양옆의 용당리, 봉길리 일대 산들이 용의 이빨에 해당되고 감은사지 삼층석탑 2기는 용의 이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어금니 또는 송곳니에 해당되니 신라 서라벌로 침입하려는 왜구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종천은 양북면 장항리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감은사지를 지나 동해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예전에는 봄이면 이곳 동해구에서 어린 뱀장어와 은어가 바다에서 대종천으로 올라왔었다. 대종천의 유래는 1238년(고려 고종 25)에 몽골군의 약탈로 황룡사 9층목탑 등이 완전히 불타 없어질 때, 몽골군이 49만근의 장항리 절터의 대종을 가져가려 배에 싣고 대종천에 띄우자 폭풍우가 불어 가라앉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실제로 대종천과 관련된 조선시대 기록을 찾기 어렵다. 하천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 『대동지지』, 『동여도』, 『대동여지도』에는 동해천(東海川)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해천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동해면에 있는 내라는 뜻이며, 일제강점기 시대에 들어 이 하천에 전해지는 전설을 따서 대종천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하루속히 대종천을 원래 이름인 동해천으로 정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동해천을 대종천으로 바꾼 것은 식민사관의 일환으로 실행된 식민사학의 타율성론(반도사관), 지정학적으로 반도국가인 한국 역사는 대륙과 해양세력, 즉 중국과 일본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었다는 사학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친일잔재청산이 곧 일제 식민사관과 식민사학이다.

감은사지의 창건은 신라 30대 문무대왕이 왜구의 상륙지점인 동해구에 부처의 힘을 빌러 왜구를 막겠다는 뜻으로 국찰을 착공하였고 사찰이름은 진국사(鎭國寺)로 불렸으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재위21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진국은 진호국가의 준말로 왜구를 물리치려는 의미인 욕진왜병(欲鎭倭兵)의 뜻과 잘 맞는다.

이후 신라 31대 그의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感恩寺(은혜를 느끼는 절, 또는 은혜에 감사하는 절)로 개명하였고 사명을 고친 이유는 대왕의 별세 후 동해구 바다에 장사 지냈기에 대왕의 은혜에 감축(感祝)하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또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로 생각된다.

감은사지 선창장으로 신문왕이 감은사지에 오기 위해 서라벌에서 수레를 타고 출발하여 추령고개를 넘어 기림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었다. 당시에는 대종천의 수위가 지금 보다 1m10cm 높았고 배를 이용하였다.

감은사지 관련 역사 문헌을 들여다보면 삼국유사 만파식적조(萬波息笛條) 기록에는 제31(31) 신문대왕(神文大王)의 휘()는 정명(政明)이며 성()은 김씨(金氏)로서 개요 원년(開耀 元年) 신사(辛巳) 七月七日에 즉위(卽位)하였고 아버지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하여 동해변(東海邊)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創建)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만파식적조하(萬波息笛條下)의 주()에 인용(引用)되어 있는 󰡔감은사 사중기(感恩寺 寺中記)󰡕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하여 이 사찰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붕어(崩御)하여 해룡(海龍)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여 개요開耀 二年(唐 高宗 年號, A.D.682)에 공사를 마쳤다. 금당 밑의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도록 하나의 구멍을 내었으니 이 구멍으로 용이 금당으로 들어와 서리게 하였다. 대개 왕이 내린 유조(遺詔)로써 뼈를 묻은 곳을 大王岩이라 하였고, 절의 이름을 感恩寺라 하였다. 뒤에 용의 현형을 본 곳을 利見臺라 이름 지었다

또한 왕력조(王曆條)에는 제30대 문무왕이 신유년(辛酉年, A.D. 661)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으며, ()은 감은사 앞 東海 中에 있다고 적혀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 21년조(文武王21年條)에는 가을 71일 왕이 죽자 시호를 문무라 하고 군신(群臣)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東海口)의 대석(大石)위에 장사하였으며, 속전(俗傳)에는 왕이 변하여 용이 되었다하니, 이에 그 돌을 가리켜 대왕암(大王岩)이라 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혜공왕(惠恭王) 12(A.D 777)과 경문왕(景文王 4(A.D 864)에는 각각 한 차례씩 왕이 직접 감은사로 행차하여 동해를 바라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 외에 성덕대왕 신종에 보면, 역관(役官)의 직명에 해당하는 󰡔검교감은사사(檢校感恩寺使)󰡕라는 명문이 있다.

조선 초기 예종(睿宗) 때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는 감은촌(感恩村) 혹은 감은리(感恩里라는 지명이 언급되어 있어서 이때에는 이미 감은사가 폐사(廢寺)되었던지, 아주 미미한 상태로 간신히 그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 성종(成宗) 때 편찬 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불우조(佛宇條)에는 감은사 부동오십리(感恩寺 府東五十里)’라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이후 경주부(慶州府)에서 간행 된 동경잡기(東京雜記) 불우조(佛宇條)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때까지는 어떤 형태이든 감은사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정조초(正祖初)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의하면 당시에 폐사(廢寺)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감은사가 반드시 폐사(廢寺)되었다기보다는 국가시책에 영향을 받아 지명화(地名化)한 기록으로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며, 존재의 미미함에 비추어 중요시하지 않은 까닭으로 불우(佛宇)로만 남겼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고대(古代)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된 것은 탑()이었다. 탑이 금당보다 높은 격에 있다는 것은 기단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지금까지 조사한 유적에서는 탑기단이 금당 기단보다 한 층씩 높게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같은 가람에서 금당이 단층기단(單層基壇)이면 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이고, 금당이 이중기단(二重基壇)이면 탑은 삼중기단(三重基壇)인 것이다.

초기(初期) 사찰(寺刹에서는 부처님의 사리(舍利)가 봉안되어 있던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부처의 형상이 금당으로 옮겨지고 나서는 탑의 규모가 차츰 작아지고 양식도 약화되는 반면, 부처를 안치한 금당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커진 것으로 보인다. 감은사는 통일직후에 가람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초기에서 중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에 해당하므로 아직은 탑이 건물에 비하여 크게 쇠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감은사지 배치도

우리나라 고대 사원의 가람배치(伽藍配置) 형식은 남쪽으로부터 중문(中門), (), 금당(金堂), 강당(講堂)의 순서로 남북 일직선상에 나란히 배치하는 단탑식 가람(單塔式 伽藍)과 금당 전면(金堂 前面)에 탑을 양쪽으로 배치하는 쌍탑식 가람(雙塔式 伽藍)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탑을 중심으로 3면에 금당을 배치하는 일탑삼금당식 가람(一塔三金堂式 伽藍, 분황사, 황룡사)이라는 특수한 형식도 있다. 또한, 미륵사지처럼 중문과 탑, 금당을 하나의 구역으로 하여 일원(一院)을 구획하고, 이렇게 구획된 3개소의 원을 횡으로 병렬한 삼원식 가람(三院式 伽藍)이라고 하는 매우 독특한 가람배치도 있다.

감은사의 가람배치는 금당 이탑(金堂 二塔)의 쌍탑식으로서 통일신라시대에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성행하였던 가람배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文武王 11(A.D.671)에 창건된 망덕사(望德寺)同王 19(A.D.679)에 창건된 사천왕사(四天王寺)가 그 始原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이후에는 불국사, 천군리절터 등이 대표적인 유적에 속한다. 통일신라 초기에 세워진 망덕사와 사천왕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木造 雙塔이 세워졌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후에 재료적으로 변형이 나타난 첫 번째 石造 雙塔이 바로 감은사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는데 모두 82점의 각종 석재로 이루어져 있어 목조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상하층기단 각 면에 우주와 탱주를 배치하고 탑신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한 것과 옥개받침을 층급으로 표현하고 옥개 낙수면은 층급이 없는 경사를 이루고 있는 점, 전각에서 반전이 뚜렷한 점 등 목조건축양식을 모방한 것이다.

석탑의 재질은 화산재가 쌓여서 만들어진 응회암이고 二重基壇 밖에 탑구(塔區)를 돌려 三重基壇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서 塔區를 제외한 이중기단은 감은사 창건 이후의 한국 석탑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規範)을 이루는 전형(典型)을 보여주고 있다. 지표(地表)에서 노반(露盤)까지의 높이는 9.85m인데, 노반 위의 상륜뷰(相輪部)는 없어지고 3.49m 높이의 철제 찰주(鐵製 擦柱)만 남아 있다. 찰주의 높이까지 합하면(전체 높이 13m) 국내의 현존하는 탑 중에서 가장 큰 석탑이다.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감은사지 서 삼층석탑

금당은 정면 5, 측면 3. 기단은 2중 기단으로 되어 있고 초석 아래에는 특이한 석조유구(石造遺構)가 있어 건물바닥 밑에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두기 위하여 마련된 것으로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구조이다. 이것은 문무왕이 화한 동해 大龍이 금당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하였다는 寺中記의 내용과 일치한다.

금당터 초석 아래 석조유구(石造遺構)의 공간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상징적인 龍穴이자 건축적으로 공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일종의 환기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당터 초석 아래의 특이한 석조유구(石造遺構)의 공간은 三國遺事에 인용된 寺中記排金堂砌下東向開一穴, 乃龍之入寺旋統之備에서 金堂砌下(금당의 섬돌 아래)으로 향한 구멍을 한군데 열어 둠으로써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상징적인 龍穴이자 건축적으로 공기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일종의 환기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당이 이중기단으로 구성된 건물터를 살펴보면 고구려 지역에서는 평양 청암리 폐사지가 있으며, 백제 지역에서는 부소산성의 건물터와 절터, 금성산의 절터, 정림사터, 미륵사 금당터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지역에서는 황룡사 금당터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주목할 것은 2점의 태극무늬 장대석으로 한 점은 1959년도 1차 발굴조사 시, 금당지 기단 동남모서리 전면에서 발견된 것이고, 다른 한 점은 1979~1980년도에 걸쳐 이루어진 2차 발굴조사 시, 곽외 남측 석축 앞 연못에서 출토된 것으로 용도는 內部 佛壇 周圍에 깔아 받친 地臺石으로 추정하는 견해와 금당의 용혈입구 구성 등에 사용된 석조부재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이견대의 명칭이 주역』의 비룡재천(飛龍在天) 이견대인(利見大人) 에서 취해졌던 것처럼, 감은사지 출토 장대석의 태극무늬 역시 주역에서 취해진 것으로 그 배경이 학계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태극무늬가 새겨진 장대석

중문은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 3칸에 모두 문이 달려 있고 문과 연결되는 계단이 3칸 전 후면에 모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문 앞 낭떠러지에는 중문으로 이어지는 큼직한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당은 정면 8, 측면 4칸 건물일 것으로 추정되고 강당 정면을 8칸의 등 간격으로 분할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의 가람에서 강당에 흔히 사용된 기둥배치 방식으로 후대에는 정면 5, 측면 4칸으로 바뀐다.

강당좌우의 건물배치는 각각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는 경우와 회랑을 배치하여 연결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감은사지 강당은 좌우에는 별도의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다가 후대에 회랑형 건물로 바뀌었음을 확인되었으며 강당 좌우에 독립된 건물을 배치한 예는 황룡사터와 황룡사서편 폐사지에서 각각 확인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강당 양쪽에 독립된 건물이 배치되었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회랑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아니면 가람의 평면이 정방형이나 정방형에 가까운 평면일 때는 독립된 건물이 배치되고, 남북으로 긴 장방형 평면일 때는 회랑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회랑은 동북 회랑이 모두 접속되어 있었으며, 익랑(翼廊)이 금당의 양쪽에 마련되어 있다. 즉 회랑안쪽 중심에 위치한 금당 양쪽에는 翼廊이 있다. 회랑(廻廊)은 남회랑, 동회랑, 서회랑, 동익랑, 서익랑 등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伽藍 南北中心線을 기준으로 東西로 나누었을 때, 각각 하나의 기단으로 처리된 2개소의 회랑으로 大別된다. , 동회랑을 비롯하여 중문 동쪽의 동남회랑, 금당 동쪽의 동익랑이 하나의 통합된 기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동쪽이 F자를 180도 회전한 모양이고 서쪽은 F자의 아래위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 되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남회랑은 중문 동서쪽으로 각각 10칸씩, 모두 20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으며, 동회랑과 서회랑은 남회랑과 접속되는 칸을 포함하여 각각 20칸의 도리칸인데, 南端으로부터 12칸째 도리칸에서 금당 좌우의 동서익랑이 직각으로 연결되어 각각 7칸의 도리칸으로 되어 있다翼廊은 금당 좌우에서 동회랑과 서회랑에 직각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으로 길게 놓인 회랑을 말하며, 일부에서는 中廻廊이라고도 한다.

감은사지를 답사를 하면 반드시 탑마을(동네) 뒷산인 용당산(龍堂山)에서 이견대까지 답사를 하여야 감은사지 답사가 마무리가 된다. 가는 길은 마을 뒤편에 난 소로를 따라 20분 정도 가면 용당산(龍堂山) 동편 끝자락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면 그 옛날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

탑마을에 세워진 이견대 길안내 이정표
마을 뒤편에 난 소로를 따라 20분 정도 가면&nbsp;용당산(龍堂山) 동편 끝자락을 맞이하게 되는데 여기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다보면 그 옛날 신문왕의 마음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이곳 마을에서는&nbsp;용당산(龍堂山) 동편 끝자락을 뜸북재로 부른다.

 

양북면 봉길와 대본리 사이 대종천을 건너게 하는 대본다리

 

멀리 보이는 동해의 문무대왕릉과 대종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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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烽火山)은 해발 132.6m로 온산읍 강양리 산 66번지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 강양마을에서 바라다보면 2개의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쪽 봉우리 아래는 저수지가 있어 낚시꾼이 가끔씩 찾고 있고 남쪽 봉우리에는  조선 전기에 축조 된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가 있다.

특히 봉화산은 19744월부터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 육성을 위해 온산산업 기지개발 조성으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우봉마을, 당월마을 등 주민들이 떠나가는 모습과 환경오염에 의해 발생한 소위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진 공해병(公害病)인 온산병(溫山病)에 걸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봉화산은 1974년 4월부터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 육성을 위해 온산산업 기지개발 조성으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우봉마을, 당월마을 등 주민들이 떠나가는 모습과 환경오염에 의해 발생한 소위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진 공해병(公害病)인 온산병(溫山病)에 걸린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우봉마을은 223세대 1,433명이 거주하였고 봉화산의 생김새가 소의 형상과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복어잡이 어획량이 국내최고로 유명한 어촌마을이며 해안가의 거북바위가 유명하였다. 그리고 당월마을은 335세대 1,975명이 거주하였고 예전에는 당포마을로 불렸으며 상어잡이 유명한 어촌마을이였다.

하산봉수대에서 바라본 화학공업단지로 변한 우봉 및 당월마을
하산봉수대 가는 길에서 바라본 우봉마을 바닷가 모습.&nbsp;우봉마을은 223세대 1,433명이 거주하였고 봉화산의 생김새가 소의 형상과 같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복어잡이 어획량이 국내최고로 유명한 어촌마을이며 해안가의 거북바위가 유명하였다.

강양(江陽)’은 회야강(回夜江) 어귀에 있는 햇볕이 잘 들어오는 마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한문 표기에서 ()’은 산의 남쪽, 강의 북쪽을 뜻하므로 회야강의 북쪽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봉화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산(下山)이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 정조(正祖) 때는 바다에서 볼 때 강()의 입구라서 강구(江口)라고 하였다.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를 가기 위해서는 우봉리 바닷가 방향으로 봉화산 기슭에 위치한 금어사를 향하는 가파른 도로 따라 올라가서 도착한다. 그리고 사찰의 좌측 밭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하산 봉수대에 만날 수 있다. 유의할 것은 자동차를 몰고 오면 사찰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도로변에 세워야한다.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를 가기 위해서는 우봉리 바닷가 방향으로 봉화산 기슭에 위치한 금어사를 향하는 가파른 도로 따라 올라가서 도착한다. 그리고 사찰의 좌측 밭을 가로질러 오솔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면 하산 봉수대에 만날 수 있다. 유의할 것은 자동차를 몰고 오면 사찰 주차장이 마땅치 않아 도로변에 세워야한다.
봉화산은 낮은 해발에도 불구하고 수목이 아름답다. 하산 봉수대 가는 길은 그지 없이 아름답다.
금어사 주지 스님께서 매년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 가는 길을 깔끔히 정리하신다.

 

금어사(金魚寺)는 주지 지월(智月)스님이 3년간 300만배를 수행한 사찰로 유명하다. 자정부터 새벽5시 까지 200배를 표시하는 바둑돌로 절한 숫자를 계산하며 하루 평균 2700배를 수행하였다. 지월스님이 속명은 김상봉으로 경남 진주 출신이다. 1980년 중반 폐결핵을 앓으며 부처님 가호로 물리친 뒤 불교를 만났고 1995년 부산 군수사령부 군무원으로 재직 중 지도법사를 수계, 1996년 구례 화엄사로 출가했으며 만나는 사람에게 세 번의 절을 하는 스님으로 유명했다. 이곳 우봉리에는 2001년 정착하여 금어사를 지었고 당시 미이주 40가구의 어린이 10명에게 수학, 영어 등 가르치는 등 선행을 실천하였다.

하산 봉수대는 부산 간비오 봉수(干飛烏烽燧)에서 시작된 봉화를 서울 목멱산[남산] 봉수로 전달하는 노선에 있는 다섯 번째 연변 봉수(沿邊烽燧)로써 문헌에 나타난 것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이며, 이후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고, 1895(고종 32) 전국 봉수 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울산군 소속의 하산 봉화(下山烽火)는 북쪽으로 가리 봉화(加里烽火)2317보의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어사 주지 스님께서 매년 하산 봉수대(下山烽燧臺) 가는 길과 하산 봉수대 주변을 직접 낮으로 깨끗이 정리 하신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는 울산군 소속의 하산 봉수는 군의 남쪽 50리에 소재하며 서쪽으로 이길곶 봉수(尒吉串烽燧), 동쪽으로 가리산 봉수(加里山烽燧)와 연결된다고 적혀 있다. 즉 남쪽의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이길 봉수(爾吉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쪽의 남구 남화동의 가리 봉수(加里烽燧)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비교적 평탄한 산정에 남북장축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현재 연대(煙臺)와 호() 등의 유구가 남아 있다. 불을 지폈던 연대의 아래는 방형(方形)으로, 위는 원형(圓形)으로 만들었다. 연대는 흙과 돌을 섞어 만들었으며, 남아 있는 높이는 3.5m 정도이다. 북동쪽이 무너져 정확한 둘레는 알기 어렵다. 'U'자형으로 판 방호벽은 북쪽에서만 뚜렷하게 확인되는데 너비가 5m 가량이다.

강양 해안길(강양 - 우봉)에서 바라 본 명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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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도시 울산에는 옛 부터 군사적으로 전략요충지로써 조선시대의 성곽유적인 경상좌도수군절제사영성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성(慶尙左道兵馬節度使營城)이 있다. 특히 왜와 거리상으로 가까운 지역으로, 고려 말·조선 초 이후 지속된 왜구의 침탈에 대비하여 해안 지방의 철저한 방어선이 필요했다. 이곳 개운포성지 남쪽으로는 외황강 하류를 접하고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 이런 입지 조건이 일찍부터 수군이 주둔할 수 있게 했고 조선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과 경상좌도 수군 절제사영(慶尙左道水軍節制使營)의 진·영성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개운포성지 표지석과 우측에 보이는 환경처리시설 굴뚝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태종 7년의 최초 기록을 통해 보면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수군과 관련된 기지가 이곳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1425)에 개운포에 만호진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세조(世祖) 5, 1459년에 좌수영이 개운포로 이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개운포성은 용도와 목적, 규모의 변화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몇 번의 증·개축과 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최초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영성(營城)으로 사용된 시기는 조선 전기 세종 5(1459)부터 선조 25(1592)까지 이며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자기들은 개운포성의 사용시기인 15세기 초17세기에 제작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기록상의 성 운용시기와 부합된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온산만 처용암 옆을 오가는 뱃길은 천 년 전 신라 헌강왕의 눈길이 머문 곳이고, 조선초기에는 지금으로 치면 해군사령부(개운포영성)의 군함이 정박하던 곳이다. 개운포 8경의 하나인 전함홍기(戰艦紅旗)로 도열한 군함의 붉은 깃발이 아름답고 하여 붙여졌다.

오늘날 개운포성터는 황량하고 쓸쓸하지 못해 마치 폐허처럼 변해 있다. 지난 강 건너편에 온산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섰고 마을 뒤에는 울산시 환경처리시설이 있어 뿜어대는 악취로 숨쉬기조차 곤란하다. 성안 주민들은 지금 두 세 가구만 남아 있고 외지로 떠났다. 부근의 하개마을과 염전은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석유화학단지 개발로 없어졌고, 선수마을을 비롯한 세죽, 성외 등의 마을도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운동으로 집단 이주하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

현재 개운포성을 돌아보면 성안 대밭과 남문 터 좌우 긴 석축만이 옛 성터임을 말해준다. 남문 터를 지나 들어가 북문 터까지 이어지는 S자형의 길은 본래 성안 길이 아니고 고압선 전신주 설치를 위해 한전 측이 넓힌 길이다. 예스런 멋은 없지만 이 길로 북문 터 가까이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성안마을의 옛 정취는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 밖에서 외성을 따라 돌아보면 전체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개운포성지 남쪽 성벽 주변

임진왜란 이후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이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으로 옮겨가고 그 장소에는 효종(1656) 때 전선소(戰船所)가 설치되었다. 당시 학성공원 아래 있던 전선창이 옮겨왔다. 전선창은 군선을 건조하는 시설을 뜻하고 일명 선소(船所)’라고 하였다. 성안 마을 웃각단 아래각단 등이 철거되기 전 선수마을이라고도 불리었다. ‘선수선소에서 전이된 발음이다. 군사 전략거점에서 지원병참시설로 그 기능을 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선창도 1895(고종 32) 수군 해산 때 문 닫게 되었다.

개운포성은 강변에 솟은 야산의 골짜기를 감싸며 구릉부를 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으로 둘레는 1,270m 면적은 102,919정도이다.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북문지, 동문지, 서문지, 4곳의 성벽, 남쪽과 북쪽에 해자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으며 바깥 쪽에 해자[도랑]를 둘렀다. 돌로 쌓은 성벽은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덩이를 세워 구조적으로 안정되게 하였는데, 이러한 축조 방법은 울산 경상좌도병영성, 언양읍성 등 울산 지역의 성에서는 흔히 보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남쪽 성벽과 해자

성벽 관련 주요 시설물로는 체성, 문지, 치성, 옹성, 수로 시설, 해자 등이 있고 건물지도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최대 너비는 4.0~4.7m, 잔존 최대 높이는 2.4m 정도다. 동문지의 경우 1회 중축한 것이 확인되었다. 만호진성이 수영성으로 바뀌면서 중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문지 주변에 기와편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상부에 누각이 있었을 것이다. 성벽 축조는 기초 부분을 판 다음 3~4단의 할석으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기단석을 눕혀서 쌓았다. 기단석 끝에서 20정도 물려서 대석으로 세워쌓기를 하고 2단은 눕혀서 쌓았다. 내벽은 작은 할석으로 다지고 상부에는 흙을 여러 겹 쌓았다.

성벽 주변과 성 내부는 밭농사로 인해 경관과 성체 훼손이 심하다. 하루속히 시에서 매입하여 복원이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운포성의 문은 동···4개의 문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출입을 위한 문은 동문과 북문으로 확인되었다. 동문은 성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 구조는 외측에 반원형의 옹성이 협축 방식으로 축조되어 있고 문지의 내측에는 확돌 2개가 입구부를 사이에 두고 대칭되게 확인되었다. 옹성은 남쪽 체성의 기단석에 잇대어 쌓은 형태이고 축조방법은 체성과 동일하다. 옹성의 면석은 체성의 면석에 비해 큰 편이다.

동문지 방향의 성벽
동문지 방향의 성벽 흔적

해자는 남쪽, 북쪽을 비롯하여 성벽 전체를 둘러싸고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남문지)해자는 체성과의 이격 거리가 약 500이고 해자의 폭은 450, 최대깊이는 110내외이다. 북쪽(북문지) 해자는 자연 경사면을 이용하여 일정 깊이의 토사를 파내어 외성을 축조함으로 해자의 깊이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축조되어있다. 체성에서 약 1015m 이상 떨어져 있으며 폭은 10m 정도이고 깊이는 600이상이다.

동문지에서 바라본 외황강과 공단모습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1997109일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고 개운포(開雲浦)’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기이편의 처용랑 망해사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헌강왕 5[879] 3월 기록에 보인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울주 고을 포구에 와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서 길을 잃었는데, 일관이 말하기를 동해용의 조화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절을 세워 주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서 개운포라고 이름 지었다고 적고 있다.

동문지와 북문지 사이의 치성
북문지
북문지와 서남지 사이의 치성
추정 서문지에서 바라본&nbsp;영서곶(營西串)
추정 서문지 가는 길
추정 서문지와 남체성 사이

개운포성지(開雲浦城址) 남쪽 강가에서 서쪽 끝으로 가면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이 있다. 개운포영성(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성) 서쪽 곶으로 동해에서 외황강으로 침입하는 적선을 감시하거나 개운포영성을 방어하는 곳이다.

영서곶(營西串) 또는 영시끝
영서곶(營西串)에서 본 외황강과 개운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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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4월부터 온산산업 기지개발로 정든 고향을 등져야했던 온산면 10개 법정리와 19개 행정마을의 주민 2,804세대 1만 3,000여명 이주민(실향민)을 위해 울주군 온산읍 화산리 화산근린공원(화산리 869 외 3필지) 정상에 온산이주민 망향비를 2010년 8월 31일 세웠다. 화산근린공원 망향비는 높이 8.5m, 폭 2.5m의 망향비와 함께 대리석을 좌대로 한 동판에 19개 마을의 사진과 유래가 새겨진 전시물이 조성됐다. 전시물은 동판으로 새겨진 마을 전경과 관련 설명으로 이물질 등이 묻어 있어 주기적으로 관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온산국가산업공단이라 답해야 한다.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북한이라면 언젠가 통일이 되어갈 수라도 있으련만, 차라리 우리들 고향이 수몰되었다면 잠수하여 볼 수라도 있을 것을」 먕향의 노래비의 일부로 이주민들 아픔의 깊이가 배어나는 망향의 노래이다.

울산공업도시로의 서막
울산은 1962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어 공업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울산공업단지, 온산공업단지 등의 공업 단지를 조성하고 공업용수 공급을 위한 댐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정공업지구의 사업은 정유, 비료, 화력 발전소, 제철 제강 등이었다. 같은 해 9월에 울산정유공장 기공식 이후 울산시 전역과 대현면 상남동 외 5개 동을 범위로 하는 울산도시계획구역이 지정되었다. 구역은 총 면적 176.04㎢로 주거 지역, 상업 지역, 공업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따른 후속으로 5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집과 삶의 터전을 공장과 댐에게 내어 주었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어 실향민이 되었다. 그리고 이주민들이 옮겨 갈 택지가 이주 전에 완성되지 않아, 택지 조성이 완료될 때까지 월세 방을 전전해야 하였다. 아울러 택지 분양금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보상금이 적어 결국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주와 공업 단지 조성 역시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아서 주민들이 공장과 공장 사이에 끼이거나, 공장들에 포위되어 고립된 채 생활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불편을 겪어야만 하였다. 게다가 공장으로 인한 각종 공해에 시달리면서 질병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온사이주민 망향비에서 바라본 온산공업단지

울산공업지구 조성은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주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석유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기로 하였으나 석유 화학 계열의 공장 유치가 부진해서 공업 단지의 절반 정도에 지역 원주민이 그대로 거주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울산공업단지 31.40㎢의 면적 중 44%인 13.97㎢에 6,090가구 2만 7000명의 주민이 이주하지 못하고 그대로 살고 있어 울산공업단지 내 모습이 말 그대로 공장 반, 사람 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장 울타리로 길이 막히고 진동, 소음, 폐수, 분진 등 각종 공해로 생활에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역 주민과 공장은 1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결국 정부는 1979년부터 이주 보상비를 지급하는 등 5개년 계획을 통해 울산공업단지 내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발전 그리고 어두운 그림자
울산의 또 다른 대규모 공업 단지인 온산공업단지도 마찬가지였다. 온산공업단지는 1974년에 조성하였다. 구리, 아연, 알루미늄 등 비철 금속 산업을 육성해서 석유 화학 제품의 기초 원료 생산을 위해 울산공업단지와 인접한 온산면[현 온산읍] 일대에 조성하였다. 19개 마을이 공장에 터를 내주고 사라졌으며, 1만 3000여 명의 주민이 이주해야 하였다.

그러나 이주 대책에는 문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이주 단지를 건설해서 주민들을 완전히 이주시킨 뒤 공업 단지를 만들어야 하였지만,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계획 없이 공장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즉, 공업 단지에 입주를 희망하는 공장들이 토지를 개별적으로 매입해 아무 때나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민가와 공장, 농지와 공장이 뒤섞이면서 전체 1만 4000여 명의 주민 중 이주한 사람은 17%인 1,80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만 2000명의 주민들은 공장과 공장 사이, 혹은 공장 한 가운데 외딴섬처럼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염에 노출된 주민들 사이에 온산병(溫山病)이 발병하면서 정부는 공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16개 마을 주민 1만여 명을 집단 이주시켰다. 온산공업단지 조성으로 인한 두 번째 이주였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주민들이 원한 이주는 아니었지만, 두 번째 이주는 몸과 마음 모두 상처를 남긴 이주가 되었다. 온산 지역 주민들은 공장과 공해에 쫓겨 온산공업단지에서 2㎞ 떨어진 덕신지구로 이주하게 되면서 공해 실향민이 되었다. 생활의 터전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생활, 생계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채 이주가 진행되면서 이들은 또 다른 병인 이주병(移住病)을 앓게 되었다.

울산의 동쪽 해변 마을은 온전히 보존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서생면, 정자, 방어진, 장생포 해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업 단지가 마을을 밀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화강과 외황강(外煌江) 하구 마을 또한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던 미포만(尾浦灣)과 전하만(田下灣)의 절경은 현대중공업 건설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붉은 동백꽃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던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 목도는  드넓은 온산공업단지와 온산항에 둘러싸였다.
공장이 늘어나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대기에 배출된 공해 물질로 인해 환경오염이 심화되면서 이로 인한 피해 또한 점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산업화 초기에는 환경오염으로 입는 피해보다는 성장의 논리가 중시되었다. 경제적 부와 풍요를 얻은 만큼 환경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1970년을 넘어서면서 벼의 잎이 노랗게 시들어 가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수확량이 줄기 시작하였고, 공업 단지 인근 해역에서 물고기나 조개, 미역, 전복 등이 폐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농작물의 피해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점차 심해지면서 환경오염의 피해가 사람에게까지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공해로 인한 질병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바로 온산병이다. 온산병의 발생은 환경의 중요성과 오염의 심각성을 울산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3년부터 온산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관절이 아프다거나 신경통 증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통증을 느끼는 부위는 허리·다리·전신·팔·어깨 등의 순서로 나타났으며, 피부병과 눈병을 동반하기도 하였다. 1985년 온산공업단지 인근의 주민 1,000여 명이 전신 마비 현상을 보이면서 온산병이 한국판 이타이이타이병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온산병이 공해병(公害病)이 아니라고 공식 부인함으로써 논란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마침내 정부가 온산병은 환경 요인의 탓이라고 발표하면서 2,000가구 1만여 명의 피해 주민의 이주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온산병의 구체적인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가 노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층까지 원인 모를 통증과 증세를 보이는 등 공해로 인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받게 되면서 울산의 공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온산 지역 주민들은 온산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이주를 경험한 바 있는데, 온산병으로 인해 다시 이주하게 되어 이주의 고통을 두 번이나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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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827m)은 경주시 건천읍(乾川里) 방내리(芳內里)와 내남면(內南面) 비지리(飛只里)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경주에서 가장 높고 단석산 일대는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산세가 뛰어나고 경치가 좋아 등산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진달래군락지로 유명하여 인근 조래봉(657m)과 더불어 등산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관광명소로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과 김유신을 비롯한 화랑들이 수도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신선사 마애불상군이 있어 고신라 불교미술전공자와 미륵 신앙연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자주 찾는다. 단석산은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였고 백제군이 지리산을 넘어 함양, 청도로 거쳐 경주로 들어오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신라에서는 국방의 요충지였다.

 등산일정은 방내리 방내지 인근 천주암 주차장에 차를 주차 후 등산을 시작하여 목적지 단석산 등정 후 입암산 방향으로 하산하여 백석암을 거쳐 백석마을 도착하여 택시를 타서 다시 천주암으로 가는 일정이다. 5시간 30분 소요된다.

상세 등산코스는 방내리 천주암 기둥바위 전망바위 진달래 능선 전망바위, 전망대 안부 단석산 비지고개 입암산 백석암 화천리 백석마을이다.

천주암 입구. 입구 우측에 있는 소로가 단석산 등산로이다.

천주암을 출발하자마자 소위 깔딱 고개를 만나는데 계단을 따라 기둥바위를 지나 진달래 능선까지 두 차례나 맞이했다. 무척 힘든 코스다. 다행히 전망바위 또는 전망대로 불리는 넓은 바위를 만나 휴식과 더불어 바라본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한다. 간단한 간식을 먹은 후 출발하니 금방 도착할 것 같은 단석산 정상은 안부를 지나 드디어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상에는 인증 샷과 정상 파티를 즐기는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보였다.

천주암을 출발하자마자 소위 깔딱 고개를 만나는데 계단을 따라 기둥바위를 지나 진달래 능선까지 두 차례나 맞이했다. 무척 힘든 코스다.
진달래 능선에서 만난 전망바위 또는 전망대로 불리는 넓은 바위에서 휴식과 더불어 바라본 풍광은 가히 절경이라 등산의 맛을 느끼게 한다.
백석마을 갈림길 안내판을 보고 정상이 가까이 있음을 알게된다.
단석산 정상석과 김유신이 칼로 자른 바위가 있다.

 

막걸리로 정상주 한잔과 점심을 해결 한 후 하산하기 위해 화천리 백석마을로 발길을 옮겼다. 입암산과 백석암 구간은 길이 가파르고 등산길인지 동물들이 지나는 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백석암에 도착하니 그곳 보살님이 암자에 있는 동안 등산객을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봉지커피를 얻어 마신 후 백석마을 향해 출발했다. 다시 한 번 가파른 길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가 백석암에 오르는 분을 위해 지팡이를 만들어 공양을 하였다.

입암산과 백석암 구간은 길이 가파르고 등산길인지 동물들이 지나는 길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이 많았다.
백석암에 도착하니 그곳 보살님이 암자에 있는 동안 등산객을 보지 못했다고 놀라워했다. 봉지커피를 얻어 마신 후 백석마을 향해 출발했다.
부처님오시는날을 준비하는 백석암
백석암에서 바라본 풍광
다시 한 번 가파른 길이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곳에 누군가가 백석암에 오르는 분을 위해 지팡이를 만들어 공양을 하였다.
산수유 열매
산수유 나무
반가운 평지 길 좌우에 산수유나무가 멋들어지게 있어 지나가는 객의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산수유 나무꽃이 피면 이 길을 걷고 싶다.
백석마을 가까운 곳에는 산딸기가 즐비하였다.
뽕나무의 오디열매

반가운 평지 길 좌우에 산수유나무가 멋들어지게 있어 지나가는 객의 여독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백석마을은 산딸기 재배를 많이 하는 것 같고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백석(白石)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가다 냇가에 꽃이 많다고 하여 꽃내라고 불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하며, 350년 전 밀양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뒷산에 흰 돌이 많다고 하여 백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백석마을 풍경

다행히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방내리 천주암을 향했다. 가는 도중 택시기사 분에게 이번 산행코스를 물어보니, 이곳 현지인들도 힘든 코스라 많이 이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단석산 산행은 소중한 추억이 돼버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단석산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하며, 경주중심지의 서쪽 23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신라의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神劍)을 얻어 월생산의 석굴 속에 숨어들어가 검술을 수련하려고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 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고 하였다.” 는 일화도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진평왕 건복 28년 신미년(611)에 공의 나이 17세에 고구려·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쳐들어온 적을 평정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몸을 깨끗이 하고는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중악을 월생산 또는 단석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석산에 대한 이와 같은 설화는 이후의 경주지리지에 지속적으로 기록된다.

건천리(乾川里)는 마을 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어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방내리(芳內里)는 단석산에 둘러싸인 품이 마치 방안에 있는 것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방내(房內)'라고 불렀다고 하고 단석산 속에서 꽃다운 화랑들이 수련을 하였다고 하여 '방내(芳內)'가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화천리(花川里)는 지형이 곶으로 되어 곶내, 고내, 고천이라 하였고 다른 이야기로는 골짜기에 꽃이 만발하여 꽃내라 부르다가 뒤에 화천(花川)으로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남면(內南面)은 옛날부터 경주부의 남쪽 안에 있다 하여 내남南面)이라 했고 비지리(飛只里)는 마을 앞에 학산이 있는데 이 산이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해서 날비()자와 다만지()자를 따서 비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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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불광산(佛光山, 659m)에 위치한 척판암은 673년(문무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장안사(長安寺)와 함께 창건하였다. 척반암에 가는 방법은 장안사 주차장에서 산길을 도보로 가면 20 ~ 30분 소요되고 포장 된 도로로 자동차로 가면 5분이 걸린다. 백련암에서 도보로 가는 산길을 이용하면 15분이 소요된다. 산길은 소로를 따라 걸어가는 나름의 맛이 있고 자동차를 이용하면 크고 장대한 수림 속을 감상할 수가 있다.

산길을 도보로 척판암으로 가는 경우 초입의 안내판
산길로 가면 맞이하는 척판암 천왕문

척판암(擲板庵)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원효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 중 중국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에서 예불을 하고 있는 1천여 명의 승려들에게 위급한 사태를 알리고자 소반에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는 여덟 자를 적어서 운제사(雲際寺) 대웅전까지 하늘 높이 힘껏 던진 곳이라 하여 척판암(擲板庵)이라고 하였다. 위급한 사태라는 것은 종남산(終南山)의 운제사(雲際寺) 대웅전 대들보가 썩어서 막 무너지려고 하는 것을 원효가 보고 소반을 던졌고 던져진 소반은 운제사의 대웅전 앞뜰 위에서 윙윙거리며 공중에 맴돌았다. 막 예불을 마친 승려들은 이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려고 모두가 재빨리 대웅전 앞뜰로 나왔다. 이때 굉음과 함께 대웅전이 폭삭 무너지고 공중을 맴돌던 소반도 땅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승려들은 땅에 떨어진 소반에 적힌 글자를 보고는 자기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신라의 원효임을 알게 되었다.

1천여 명의 승려들은 이로 인하여 길을 떠나 양산군 천성산 석굴에 있던 원효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원효의 오묘한 법문과 가르침을 받고서 모두 성인(聖人)이 되었으며, 모두가 끝내 이곳에서 열반을 하였는데 열반한 육신은 그대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산은 1천 명의 성인들이 나왔다는 뜻으로 천성산(千聖山)이라 하였고 천성산 바위들은 그 성인들의 변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척판암은 창건 이후의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1938년에 경허(擎虛)가 중수한 후 장안사의 부속 암자로 있다가 최근에 독립하였다.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천왕문, 척판암, 용왕당, 극락전, 산신각 등으로 구성 되어 있고 암벽 밑에 위치해 경내가 좁은 편이다.  ‘척판암(擲板庵)’이라는 현판이 있는 불전에는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과 근래 조성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극락전과 용왕전은 2010년 건립하였고 독성각 또한 최근에 건립하였다.

척판암(擲板庵) 현판이 있는 불전에는 조선 시대에 조성한 아미타여래 좌상과 근래 조성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온화한 인상에 미소를 짓고 있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척판암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석불로 높이가 37.5㎝로 당시 각 지역마다 작은 크기로 제작하여 소규모의 불전에 봉안하였다. 척판암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바닥 면에 복장공(腹藏孔)이 있고 범어가 적힌 한지로 막았으며 복장물(腹藏物)은 도난을 당해 없고 1996년에 개금 불사를 하면서 복장물을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2008년 4월 2일에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머리의 형태는 육계(肉髻)와 머리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으며, 검은 모발을 칠하지 않은 채 도금한 색깔 그대로 정상 계주(頂上髻珠)를 표현하였다. 머리 중앙에는 흰색과 홍색의 원호를 넣은 중앙 계주(中央髻珠)를 표현하였다. 양손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무릎 위에 올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고 어깨와 무릎이 좁으며, 고개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를 입고 있으며, 승각기(僧脚崎)는 표현하지 않고 가슴 아래에서 두 줄의 평행 띠로 하의인 군의(裙衣)를 묶고 있다. 전체적으로 신체의 비율이 맞지 않아 안정적인 형태를 이루지 못하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를 짓고 있는 상호(相好)는 비교적 온화한 인상을 준다.
신체에 비해 비교적 큰 방형의 얼굴, 대의를 입고 있는 모습과 배 부분에서 두 줄의 평행 띠로 군의를 묶은 모습 등에서 전형적인 조선 후기 불상 조각에서 나타나는 도식적이고 딱딱한 옷 주름 표현을 볼 수 있다. 또한 석조 재질에서 볼 수 있는 양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얹은 모습, 발과 옷 주름 표현이 두껍고 세밀하게 조각되지 못한 점 등에서 조각적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용왕전
1972년 경운이 3층 석탑을 세우고 부처 사리 5과를 봉안하였다.
멀리 보이는 대운산
극락전
극락전 앞 극락교
자동차를 이용하여 5분이면 도착하는 주차장에서 보이는 산신각 안내판
큰 바위 중간에 조성한 산신각

원효대사(617~686년)는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을 학자이자 사상가이다. 파계와 이적을 보인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고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은 설씨이고 원효는 법명이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에는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여권이나 된다. 특히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고승이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작이다.
또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고 종파주의적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다. 그것을 오늘날 화쟁(和諍)사상이라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 곧 귀일심원(貴一心源)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는 일심(一心)사상 그리고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뜻의 무애(無㝵)사상과 함께 원효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동차로 포장 된 도로로 척판암까지 도착하려면 5분이 걸린다.
백연암 앞에서 척판암 가는 안내판
자동차로 척판암 가는 중에 만나는 백련암 입구와 낮잠자는 백구 모습

 

백련암 지나서 만나는 안내판

불광산(佛光山)은 팔기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8개나 되는 봉우리를 올라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불광산의 명칭 유래에서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불광산은 북동쪽으로 대운산(大雲山), 남동쪽으로는 삼각산(三角山) 줄기와 이어져 장안읍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대운산과 이어지는 북동쪽 기슭에서는 대운천(大雲川)이 북동쪽으로 흐르고, 삼각산과 이어지는 남쪽 기슭에서는 장안천(長安川)이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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