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시당(今是堂)과 백곡서재(栢谷書齋)는 밀양강변(밀양시 활성로 24-184)에 있는 고택으로 조선 명종 때 문신 금시당 이광진(今是堂 李光軫 : 1513~1566, 여주 이씨)이 만년에 관직에서 은퇴하여 학문과 수양을 닦으며, 여생을 보내기 위해 1566년(명종 21년) 창건한 별서(別墅)이다. 별서(別墅)는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이다.
금시당(今是堂)이란 이광진(李光軫)의 호인데 지금(今)이 옳다(是) 라는 뜻을 담고 있는 금시(今是)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는 중국 당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의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 :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그른 줄을 깨달았다)”라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다.
금시당 정원에는 이광진(李光軫)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수령은 420년 높이 22m, 둘레 5.1m로 밀량시의 보호수이다.
이광진(李光軫)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옥당(翰林玉堂), 각조 랑관(各曹 郞官),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과 집의(執義), 사유(師儒)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올라 명망이 높았다. 금시당 이광진은 별업을 조성한 그 해에 별세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근재 이경홍(謹齋 李慶弘)이 선친의 유지를 이어 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강학소(講學所)로 사용했다.
금시당(今是堂)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서 1743년(영조 19년)에 그의 5대손인 교남처사 백곡 이지운(嶠南處士 栢谷 李之運:1681~1763)이 이를 복원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금시당의 10대손 무릉옹 이종원(武陵翁 李鍾元)과 11대손 만성 이용구가 문중의 뜻을 모아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해체하고 크게 중수한 후의 모습이다.
금시당(今是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익공양식의 집으로, 평면은 좌측부터 마루 2칸,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마루 좌측면과 후면 및 온돌방 배면에 쪽마루를 달아냈다.
백곡서재(栢谷書齋)는 금시당 동쪽에 위치한 서재 건물로 금시당(今是堂)을 복원한 이지운(李之運)을 추모하기 위해서 이지운의 6대손인 만성 이용구(晩醒 李龍九)가 주관하여 그의 호인 백곡(栢谷)을 이름으로 삼아 1860년(철종 11년)에 새로 지었다.
백곡서재(栢谷書齋)는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익공양식의 집으로, 평면은 정면 좌측부터 온돌방 2칸, 마루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 온돌방의 천장은 우물반자이고 마루의 귀서까래는 선자연으로 장식하였으며, 대들보와 선자연 등에 태극문양을 그려 놓았다.
밀양강(密陽江)은 밀양시의 일대를 관류하는 하천으로 상동면 옥산리에서 청도천과 동창천이 합류하는 하천으로 밀양 시내를 지나 삼랑진읍 삼랑진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유역의 경관이 뛰어나 강변에 영남루(嶺南樓)와 아랑각(阿娘閣) 등 명소가 있다.
밀양시(密陽市)는 『삼국지』에 의하면 변한12소국 중의 하나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지리지』에는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지방 제도 정비와 더불어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995년(고려 성종 14)에 밀성군을 밀주(密州)로 승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276년(고려 충렬왕 2) 삼별초군에 호응하였다는 이유로 귀화부곡으로 강등되어 계림부(경주)에 예속하였고, 그 뒤에 밀성현(密城縣)으로, 다시 밀성군(密城郡)을 거쳐 밀양부(密陽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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