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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경주분지의 남쪽에 위치하고 신라시대 불교유적의 보고(寶庫)이자 영산(靈山)이다. 7세기 초를 시작으로 신라가 국운을 다하는 10세기 초엽까지 끊임없이 사원이 건립되었고 고려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하나둘씩 쇠락의 길을 걸어 왔다. 현재 불상 118구, 탑 96기, 절터 147곳이 남아 있고 최대 절터는 용장사지이다. 신라시대 220개 사찰 중 약 70%가 남산에 있었다.

봉화골 칠불암 가는 길에 진달래꽃들이 산행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남산은 해발 494m로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남북길이가 8km, 동서 폭은 4km이고 동남산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지형이고 서남산은 경사가 급한 형태이다. 또한 남산은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악산으로 35개 내외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칠불암(七佛庵)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봉 동쪽 봉화골 기슭에 자리 잡고 있고 동남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터진 골짜기라서 계곡이 깊은 곳이다. 통일전(統一殿)에서 출발하면 약 3.5㎞로 1시간가량 소요된다.

절 이름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것은 1930년대 이후에 이곳에 암자를 새로 짓고 나서부터다. 이곳에   8세기 초, 통일 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7구의 마애불로 남아 있어 칠불암이라 했다 한다. 통일신라시대 당시 절 이름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실전(失傳)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사□사(四□寺)라는 명문이 있었다 하니 혹시 사불사(四佛寺)는 아니었는지 추정할 뿐이다.

칠불암 초입에서 만나는 시누대와 오솔길

칠불암(七佛庵)의 마애불상군은 남산에 있는 통일신라의 마애불상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르고 장대한 규모 그리고 석경(石經)의 파편(破片) 존재와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막새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큰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석경(石經)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등 불교의 경전을 화강암에다 새긴 것으로, 창림사지(昌林寺址)에서도 발견되었고 주로 불전 내부의 벽체를 장엄하게 위해 사용한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서 장식 된 석경을 볼 수 있으며 이곳 칠불암이 석경 사용의 기원이 된 곳이다.

칠불암의 석경 파편

 

칠불암 초입 계단 왼쪽에 있는 약수터는 경주지역 향토사학자들에 의하면 『三國遺事』, 「紀異」第一, 〈書出池〉條의 기록으로 미루어, 488년 정월 15일에 炤知王이 행차하고자 하였던 天泉亭의 ‘天泉’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三國遺事』, 「紀異」第一, 〈書出池〉條 기록의 488년 정월 15일 炤知王이 행차하고자 하였던 天泉亭의 天泉으로추정하고 있는 칠불암 약수터

칠불암 터는 동향하고 있는데 서쪽으로는 하늘에 닿을 듯이 거대한 암봉(巖峰)을 배경으로 하고, 경사가 가파르고 험한 동쪽과 북쪽의 능선상은 절 터를 마련하기 위해 석축을 쌓았다. 석축은 북쪽에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15∼16단으로 높이는 8m이다. 동쪽은 잡목과 무너진 흙더미로 덮여 있어 정확한 절 규모를 확인하기 어렵다. 남북 16.40m, 동서 13m의 대지(臺地) 위에 서쪽에는 3단으로 층계를 이룬 2m 높이의 석축을 쌓아 불전(佛殿)을 마련하였다. 불전의 서쪽 끝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반원형(半圓形) 바위가 놓여 있는데 동향(東向)한 부분에 삼존불이 부조(浮彫)되어 있고 삼존불 바위면에서 동쪽으로 석주(石柱)가 서 있는데 각 면마다 여래상을 새긴 사방불(四方佛)이 있다.

특히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의 배면(背面)과 측면(側面)에는 목조건축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방형공(方形孔)이 있는데 배면의 경우 윗부분에는 7개, 아래 부분에는 4개 아래위로 각 2개소씩 있고 측면은 남쪽에 4개, 북쪽에는 1개가 있다. 그리고 사방불에도 위에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북쪽과 남쪽 두 곳이 있어 삼존불과 사방불이 놓여 있는 불전은 목조로 된 건물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불전 남쪽이 출입구로 생각된다. 따라서 삼존불과 사방불이 있는 불전은 벽면을 석경으로 구축하고 지붕은 가구(架構)한 반 석굴(半石窟) 형식(形式)으로 추정된다.
인도 굽타 양식의 마애삼존불
마애삼존불 중 본존불은 석가불상으로 추정되고 높이 5m, 너비 8m로 된 반원형 바위 면에 동향(東向)하여 높은 부조(浮彫)로 새겨져 있으며, 두 겹으로 핀 넓은 연꽃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다. 우견편단(右肩編袒)에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있는데, 항마촉지인의 경우 통일신라기인 8세기 초 새로이 유행하기 시작하는 수인이다. 불두(佛頭)는 소발(素髮)의 머리위에 육계(肉髻)가 끈으로 동여맨 듯이 나타나 있으며, 코는 파손된 것을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삼존불과 사방불 중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본존불의 왼쪽 협시보살은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으로, 본존불 대좌의 복련대(覆蓮帶) 꽃잎과 같은 모양의 연화대좌 위에 서서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집어 가슴 앞에 올려들고 오른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보살은 몸을 약간 틀고 허리를 굽힌 삼곡(三曲)자세이며 얼굴과 시선이 본존상을 향하고 있다. 머리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을 하고, 왼쪽 어개에서 비스듬히 내려온 승기지(僧祗支)는 가슴을 감싸고 있으며 남은 자락이 아래로 물결을 그리며 흘러 내렸다. 두 어깨에는 보발(寶髮)이 덮여 있고 목에는 영락(瓔珞)이 걸려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과판(銙板)이 달린 띠로써 동여매고, 흘러내린 치마 자락은 발등을 덮고 양 옆으로 퍼지면서 가느다랗게 주름잡아 처리하였다. 넓은 천의(天衣)는 어깨에 걸쳐 두 팔을 감싸며 양 옆으로 흘러 내렸고 팔목에는 팔찌가 장식되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 중 본존불 석가불상과 오른쪽 협시보살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 사방불 중 북면의 세간왕불상(世間王佛像)과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오른쪽 협시보살은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으로 추정되며 복련꽃 대좌 위에 서서 오른손에는 보상화(寶相華)를 들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천의자락을 잡고 있다. 얼굴은 본존상 방향으로 반쯤 돌리고 있으며, 머리에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된 관을 썼고 두 어깨는 보발로 덮여 있다. 목에는 영락을 하고 있으며, 승기지(僧祗支)가 비스듬히 가슴을 감싸고 왼쪽 어깨에 걸쳐 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치마 주름 위를 끈으로 매었다. 어개에 걸친 천의가 두 팔을 감싸고 아래로 흘러내린 것과 발등을 덮고 있는 옷자락이 양 옆으로 퍼지면서 주름잡고 있는 모습 그리고 팔목에 간단한 팔찌가 끼어져 있는 것과 머리 뒤에 무늬 없는 보주형의 두광이 배치된 것 등은 오른쪽 보살상과 같다.
본존불과 보살상들은 두광(頭光)만 보주형(寶珠形)으로 각기 처리하였으며, 신광(身光)의 경우는 달리 표현하지 않고 바위 면을 그대로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칠불암 마애불은 우리나라 촉지인(觸地印) 여래좌상(如來坐像)의 시원형식(始原形式)으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고 촉지인의 수인과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걸친 대의의 착의법(着衣法), 그리고 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챗살 모양으로 삐쳐 나온 옷자락의 형식 등은 이후의 석굴암 본존불에서 완전한 정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탄력성 넘치는 육체미를 통한 생명력의 구현으로 한 조형미는 인도 굽타양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이다. 약간 모나면서 딱 벌어진 어깨와 잘록한 허리로 인해 신체의 건장함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위엄 어린 표정의 네모진 얼굴은 약간 이국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신체 구조이다. 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챗살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게 삐쳐 나온 옷자락의 모습이나 연꽃 대좌의 연꽃잎이 두 겹으로 맞붙은 형태도 인도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협시보살 역시 양발을 옆으로 벌린 어정쩡한 자세에, 조각이 다소 투박하지만 가슴에 대각선 방향으로 걸친 천의(天衣)의 한 쪽 끝이 뒤로 돌려졌다가 다시 앞으로 늘어진 형태는 인도적인 요소이다.
사방을 평정하여 삼한통일로 천하의 주인임을 표방한 사방불(四方佛)
사방불(四方佛) 가운데 동면(東面) 약사불상(藥師佛像)은 밑으로 쳐진 복련과 앙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왼손은 약 그릇을 들어 무릎 위에 놓고 오른 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집어 가슴에 올려 설법인(說法印)을 표시하고 있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 육계가 솟아 있다. 불의(佛衣) 깃 사이로 길게 드러나 보이는 앞가슴에 비스듬히 승각기가 가려져 있고 옷끈 매듭이 부챗살 모양으로 드러나 보인다. 무릎을 덮고 흘러내린 옷자락이 대좌의 윗부분을 덮고 있다. 두광은 무늬 없는 보주형으로 삼존불과 같이 처리하였다.

삼존불 중 본존불 석가불상과 왼쪽 협시보살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사방불 중 동면의 약사불상 ( 藥師佛像 )과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서면(西面)의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은 불신(佛身)만 부조(浮彫)로 조각하였으나 연화대좌는 선각(線刻)으로 표현되었다.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집어 가슴 앞에 올리고, 왼손은 엄지와 셋째․넷째․다섯째 손가락을 굽히고 둘째손가락만 펴서 무릎 밑으로 내린 설법인상(說法印像)을 하고 있다. 불의(佛衣) 깃 사이로 드러난 앞가슴에 승각기가 보이며 동여맨 옷끈은 저고리 옷고름처럼 매듭을 지었다. 왼쪽 팔에 걸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왼쪽 무릎 위에 얹혀 있는 오른발 끝을 덮고 있어 발은 일부만 드러나 있다. 머리 뒤의 두광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원형처럼 보인다.
남면(南面)의 보생불상(寶生佛像)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두 손은 서면의 불상과 같이 설법인을 표시하고 있다. 결가부좌를 하고 앉은 발은 흘러내린 옷자락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단정히 솟아 있다. 두광은 무늬가 없는 보주형으로 되어 있다.

삼존불과 사방불 중 남면의 보생불상(寶生佛像)

북면의 세간왕불상(世間王佛像)은 서쪽의 아래 부분이 결실된 까닭에 가장 좁은 면이다. 따라서 불상도 동쪽 윗면에 조그맣게 나타나 있다. 복련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설법인하는 모습과 무늬가 없는 보주형 두광으로 장엄된 것 등은 다른 상들과 같은 형태이다. 그러나 다른 불상들과는 달리 앞가슴의 승각기 아래로 보이는 옷근은 매듭을 지었고 두 무릎 위에는 두 발이 나타나 있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역시 주름이 잡혀서 연화대좌 위를 덮고 있다.
입방체형(立方體形)의 사방불은 사방을 평정하여 삼한통일로 통일신라를 이룩한 것을 천하에 표방한 것으로 이후 성행하는 석탑 사방불의 선구작으로, 네 면의 여래상은 수인과 앉은 자세, 연화좌의 형태가 서로 유사하다.

구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암 마애관음보살
칠불암 불전(佛殿) 오른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암반 사이로 약 150m 정도 오르면 봉화대봉(烽火臺峰, 476m) 정상과 신선암 마애관음보살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암반으로 형성된 절벽위로 가다 바위를 돌면 마애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절벽 아래로 보이는 칠불암이 마치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지는데 약 40m 정도의 거리이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부속 암자였을 것으로는 짐작되지만, 근래까지 이곳에 신선암(神仙庵)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므로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으로 부르고 있다.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 만나러 가는 길에서 만난 풍광

절벽 위 중앙에 거대한 바위가 동쪽과 남쪽으로 전망 있게 위치하며, 그 바위 동쪽 암반에 난간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공(石孔) 6개소가 있다. 중앙에 놓인 바위의 남면에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부조(浮彫)로 나타내었다. 보살상 전면의 공간은 2∼3m 정도로 협소하며 그 앞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보살상이 조각된 바위 면은 비가와도 불상이 젖지 않도록 윗부분이 조금 앞으로 나오게 경사를 지어 깎아내고 그 아래로 보주형 광배를 감실(龕室) 모양으로 조성했다. 아울러 보살상 위에는 가로 1.54m, 세로 10.5㎝, 깊이 6㎝의 홈이 마련되어 있는데 창양 또는 바위 아래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보살상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관음보살상은 옷자락으로 덮여 있는 의자 위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설법인을 표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구름을 타고 속계(俗界)로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크게 들어 올리고 둘레는 삼면두식(三面頭飾)으로 장식을 하였다. 장식을 동여맨 끈은 머리 좌우에서 매듭을 짓고, 그 자락이 두 귀의 언저리로 흘러내려 두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다. 두 귀에는 귀걸이가 달려 있고 목에는 구슬목걸이가 걸려 있다. 두 어깨 위에는 연꽃송이로 장식된 수발(垂髮)이 덮여 있는데 수발에 연꽃을 장식한 것은 다른 불상에는 볼 수 없는 경우이다.

오른손에는 보상화(寶相華) 가지를 들었고 왼손에는 설법인을 표시하여 왼쪽 가슴에 들었으며, 중지와 넷째 손가락을 굽혀 엄지와 마주잡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여 들었다. 손목에는 팔찌가 끼여 있으며 손과 손 사이로 승각기 자락이 보인다. 허리에는 치마끈이 매어지고 그 자락의 의자 위로 흘렀는데 왼쪽 발은 그 자락 위에 편안히 얹어 놓고 오른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 걸터앉아 있는 유희좌(遊戱坐)의 자세로서 구름 속에서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뒤에는 신광과 두광을 둥글게 선각으로 나타내었고 얇은 감실은 그대로 주형(舟形) 광배(光背)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히유희좌의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불보살상으로는 이 보살상이 유일하다.

봉화골은 동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가장 깊은 골짜기로 계곡의 명칭은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 시기부터 칠불암 동남쪽의 봉화대봉(烽火臺峰, 476m)에 있던 봉화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봉화대는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산(高位山, 490m)과 인접한 까닭에 ‘고위산 봉수’로 불렸다.
1940(소화 15) 경주 남산 칠불암과 신선암의 모습
일제 강점기 때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을 본 일본인 小場恒吉 氏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탑에 있어서도 기원을 대륙에서 받아서 이것을 표현하고 장식할 때는 오직 신라 독특의 취향을 표시하였기에 수에서 받아 수를 잊었고 당을 본떠서 당을 떠난 것에 신라의 불교예술은 어디까지나 신라문화 소산으로서의 생명을 볼 수 있다. 신라탑의 형식은 오늘 중국에서 볼 수 없고 특히 방형층탑의 균세의 미는 중국의 대탑에서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는 신라의 층탑은 당식의 직사가 아니며 신라의 예술적 두뇌에서 창안된 것이라 하겠고 저 조상에서 본 바와 같은 원인에 의해 남북조 혹은 수당의 불교예술도 한토에 들어서서는 한인의 것이 되어서 신라예술로 화한 사실을 증명 할 수 있으니 유쾌하다. 」

칠불암 삼존불과 사방불

그리고 1929년 조선총독부가 남산일대에 사방공사를 시행하려 할 때, 일본인 교수 黑板勝美는 공사를 최소 5년 연기를 요청하면서, 경주남산 유적의 우수성을 조선총독부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 나는 반도 유수의 고적을 보존할 수 있어 조선통치 상 문화적 시설에 광채를 더함에 多大할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
「생각건대 경주는 오늘 홀로 조선의 경주가 아니라 일본의 경주이며 또 세계에 알려진 명승이 되었다. 年年雲集하는 내외인의 증가는 이 같은 사실을 여실히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경주를 위해 특히 남산의 장래를 우려하는 바이다」라 했다.

신선암 매애관음보살상

경주 남산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문화적 우수성을 일본 지식인도 간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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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대표적인 축제 중 하나가 처용문화제이다. 명성과는 걸맞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처용암과 주변 환경이다. 인근 산업공단 공해영향인지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고 적막하다. 그 옛날 동해용과 일곱 아들이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던 곳이라고는 무색하게 한다. 처용암은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207000규모의 바위섬으로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 해변에서 약 150m 떨어진 외황강 하구에 있다. 현재 황성동 일대는 울산 미포국가산업단지와 인접해 있다처용암 이름은 동해용과 그 아들이 나타난 바위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처용암과 관련되는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2권 기이(紀異)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알 수가 있다.

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재위 875-886)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하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어느 날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東海) ()의 조화이오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의 용은 기뻐해서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官職)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남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이제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 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라 했다. 또는 이 절을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이후 신라 사람들은 처용의 춤과 노래는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疫神)을 쫓아내는 힘이 있다고 판단하여 역신을 쫓기 위해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이고, 특별한 날 처용의 탈을 만들어 쓰고, 처용이 역신을 쫓을 때 추었다는 춤을 추었다. 처용무(處容舞)는 고려시대를 이어 조선시대 국가 행사에서도 재연되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처용희(處容戱) 편을 살펴보면 매년 섣달그믐밤이면 창경궁과 창덕궁에서 처용희를 하였고 창경궁에서는 기악(妓樂), 창덕궁에서는 가동(歌童)을 하였으며 새벽까지 노래와 춤을 하였는데 이는 사귀(邪鬼)를 물리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제현의 시에 조개 같은 이와 붉은 얼굴로 달밤에 노래하는데, 솔개같은 어깨에 붉은 소매가 봄바람에 춤춘다.라고 묘사하였다.

현재 학계에서 처용랑(處容郞)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며 하나씩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아라비아인이라는 견해

  - 경주 괘릉(원성왕릉)의 무인석을 보면 우람한 체격에 높은 코, 파마를 한 듯한 턱수염 등 아라비아인 모습에 가깝고        당시 신라에서 당으로 가 는 바닷길은 울산인근 포구 → 남해안 → 서해안 흑산도 → 당(중국)이다. 그리고 9세기           이슬람 문헌에 「중국의 동쪽에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        은 좋은 환경 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버리곤 한다.」라고 기록되어있음

2. 신라말기 지방 호족의 아들이라는 설

  - 중앙의 골품 귀족정권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처용의 상경으로 정략결혼 등 지방에 대한 포섭 견제하려 하였으      나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반영한 것이고 당시 서라벌을 도덕성을 상실한 퇴폐적이고 병든 도시로 상징하고        있음

3. 향가연구에서 승려나 용으로 보는 견해

4. 의무주술사(醫巫呪術師)로 보는 견해

5. 귀족문화에 대항하는 지방문학이라는 견해

6. 화랑도로 보는 견해

7. 선신(善神)인 용신(처용)과 악신(惡神)인 역신(疫神)의 설화로 보는 견해

8. 신라 하대 유명한 가면극 배우로써 임금의 총애를 받던 배우이라는 견해

9. 해(日)의 신으로 보는 견해

집단이주로 사라진 세죽(細竹)마을은 70년대 외황강 상류에 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면서 공해로 말미암아 주민이 살 수 없는 공해지역으로 변해 1990년대부터 다운동으로 집단이주 시작하여 1999년에 완료하였다.

울산공업도시 개발이전 세죽마을은 외황강 하구의 수산물 집산지로 횟집과 상점이 즐비하였다. 수산물 중 아나고(붕장어)와 꼬시래기(망둥어)가 유명했다. 특히 꼬시래기(망둥어)는 일본으로 수출될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당시 이곳 바닷가 사람들은 남창장에 해산물을 팔고 생활필수품을 구했다.

지금 세죽나루 선착장은 선박 몇 척만 보이는 작고 낡은 콘크리트 선착장이지만 예전에는 목심장이라 불리던 5일장 열리는 온산읍 방도리와 맞은편 처용리로 오가던 뱃길과 목도(동백섬)로 가는 유람선 뱃길이 있었다. 특히 목도는 동백꽃이 유명하여 동백섬으로 부르며 조선시대에도 명성이 자자하여 지방 수령들이 개운포에서 동백섬으로 뱃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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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도 여타 도시처럼 아름다운 풍광이 만발하여 밀양팔경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만어산(萬魚山, 고도 700m) 운해(雲海). 이곳 9부 능선에 위치한 만어사(萬魚寺)에서 새벽녘이나 봄비 내리는 날에는 운해(雲海)가 주변 천지를 뒤덮어 마치 백두대간 장관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맑은 소리 울리는 경석(磬石)이 유명하다.

만어사는 가야국 46년 김수로왕 때 창건되었고 고려 명종 1180년에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만어사의 대웅전, 범종각, 미륵전은 근래에 지어졌지만 절 마당에 고려중기 삼층석탑(보물 제466)이 있어 고색창연한 사찰 모습을 대변해주고 있다.

만어사 미륵전 아래 산비탈에는 너비 100m, 길이 500m 규모의 너덜지대, 암괴류가 있는데 마치 물고기들이 무리지어 입질하는 모습이자 강물처럼 흘러가는 모습이다. 이곳 돌들을 만어석(萬魚石)이라고 불리는데 동해의 물고기들이 변한 것이라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암괴류는 3만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섬록암, 반려암,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는 거무스름하고 둥근 편이다. 이 바위를 두드리면 종소리처럼 맑은 소리가 난다하여 경석(磬石)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화강암 성분 차이에 따른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경석은 국악기 중 타악기인 편경(編磬)과 특경(特磬)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돌이다. 옥돌이라고도 한다. 편경은 궁중제례악에 사용되는 돌로 된 유율 타악기로 자 모양의 돌 16개를 두 단으로 된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 악기이다. 특경은 편경과 달리 자 모양의 돌 1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놓고 치는 악기이다. 초기에는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세종 7(1425) 경기도 남양에서 경()이 발견되어 국내에서 제작되었다. 남양 이외에 평안도 성천과 함경도 단천에서도 채취, 생산되는데 남양 경돌 품질이 가장 좋다고 한다.

어산불영(魚山佛影)어산(魚山)에 서린 부처님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삼국유사에서 관련 내용을 정리하면,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 때 이 나라의 옥지라는 연못에 살던 독룡과 만어산에 살던 나찰녀(불교에서 말하는 사람 잡아 먹는 귀신)가 서로 사귀면서 번개와 우박을 내려 4년 동안 농사를 망쳤다.

수로왕이 주술로써 이들의 악행을 막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여 이들에게 오계를 받게 하였다. 이때 동해의 수많은 고기와 용들이 불법에 감동을 받아 만어산으로 모여들어 돌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의 만어사 앞의 어산불영이다. 이 바위는 두드리면 맑은 쇳소리를 내었다. 특히 서북쪽의 큰 바위는 용왕의 아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전하는데, 멀리서보면 부처의 모습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그 모습이 사라진다고 한다.

경내 미륵전에는 미륵바위(미륵불상)으로 불리는 높이 5m 크기의 자연석 바위가 있는데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은 마치 부처님 가사(袈裟)와 같다. 미륵전은 최근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지었다. 이 미륵바위는 사명대사 표충비처럼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한국전쟁, 4.19혁명 등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면 바위표면에서 땀을 흘렸다고 하다.

미륵전으로 가는 길

미륵전 옆에는 소원을 빌며 쌓아올린 돌탑 무더기가 있는 바위의 아래쪽 틈에 작은 샘이 있는데, 이 샘물은 낙동강의 조수에 따라 물 높이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는 너덜지대(암괴류) 아래에 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최근 노출 된 미륵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미륵전을 지었다

제작연도가 고려 중기인 삼층석탑은 절이 자리한 위치와는 떨어져 있으나 석탑의 뒤편에 건물터로 보이는 널찍한 대지가 있어 이곳이 본래의 법당터로 여겨진다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에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으나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탑의 바닥돌이 드러나 있고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상태이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어 정돈된 모습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 어산불영(魚山佛影)

<고기(古記)>에 이렇게 말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이것은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어를 말한 것이다)이니, 그 곁에 가라국(呵囉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가 바로 수로왕(首露王)이다. 이때 국경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고 못 속에는 독룡(毒龍)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나찰녀(羅刹女) 다섯이 있어서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그런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五穀)이 익지 못했다. 왕은 주문(呪文)을 외어 이것을 금하려 했으나 금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說法)한 뒤에 나찰녀(羅刹女)는 오계(五戒)를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때문에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마침내 화()하여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났다.”(이상은 <고기古記>에 있다).

또 상고해 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 1180)는 곧 고려 명종(明宗) 11년인데 이때 비로소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임금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말했다. “이 산 속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訶羅國) 부처의 영상(影像)과 서로 같은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계의 옥지(玉池)인데 여기에도 역시 독룡(毒龍)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구름 기운이 일어나서 산마루에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나는 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影像)의 서북쪽에 반석(盤石)이 있어 항상 물이 괴어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袈裟)를 빨던 곳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상은 모두 보림(寶林)의 말인데, 지금 친히 와서 모두 참례(參禮)하고 보니 또한 분명히 공경하고 믿을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골짜기 속의 돌이 전체의 3분의 2는 모두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서 혹은 보이기도 하고 혹은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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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암 석굴사원에서 바라본 경관

미타암은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써 천성산 원적봉 8부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천애의 자연과 더불어 조망과 비경이 웅장하고 수려하다. 웅상, 덕계, 서창을 한눈에 조망을 할 수 있고 대운산, 달음산 등 인근 명산을 볼 수가 있다. 구름이 깔린 날씨 일 때는 가히 천상의 낙원인 것 같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도 깨달음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이런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을까?

그리고 미타암의 석굴사원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던 석굴 사원 조영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고 통일신라 8세기 중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998호인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있어 극락왕생과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처로서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어 여타 지역의 불교 신도들도 많이 찾는다. 특히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 719)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어 신라 아미타신앙의 전개 과정과 불교 고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발길이 잦다.

또한 이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은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나오는 포천산이 웅상읍의 천성산으로 추정되고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가 수도하던 석굴에 모셔진 불상으로 판단되어 더욱 그러하다.

미타암으로 가는 길은 국도 7호선에서 덕계와 서창의 중간 지점에 있는 양산시 웅상읍 주진마을로 가야한다. 주진마을은 지형이 배[] 형국이고, 옛날에 해일이 일면 나룻배를 매어 놓았다하여 주진(舟津)이라고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곳 주진저수지를 지나 천성산 임도를 이용하여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화장실과 천성산 안내문이 있는 첫 주차장을 만나고 여기서 미타암 가는 산길을 이용하거나 또는 지나서 화엄사 주차장에서부터 산길을 따라 미타암까지 가는 2가지 길이 있다. 미타암 가는 산길은 매우 가파른데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미타암 가는 산길은 매우 가파른데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미타암 초입에서 객을 맞이하는 부처님

미타암에 도착하여 둘러보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꽃이 만발한 화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준다. 장대한 나무 또한 높은 기상과 지난 옛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다. 휴식공간에는 커피, 숭늉, 사탕 등 무척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일반객에게 이용하기에 준 사찰에 감사할 따름이다.

미타암에 도착하여 둘러보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꽃이 만발한 화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준다.
장대한 나무 또한 높은 기상과 지난 옛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다.

미타암은 646(선덕여왕 15)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920(경명왕 4)에 지공대사가 중창하였고 1376(우왕 2)에 중창했으며, 1888(조선 고종 25)에 다시 정진(正眞)이 중창하였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1861~1937]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깨끗한 경내 안을 대웅보전과 옥불전을 지나서 계단을 따라 걸어가면 천애의 절벽 아래 비석 군을 만나고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이 봉안 된 석굴사원(미타굴)을 마주하게 된다. 석굴사원은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천연 동굴에 인공을 가해 조성한 것으로 길이 30m, 3~5m, 높이 2~3m이다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은 높이가 205cm로 입구에서 9m 정도 들어간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대웅보전
옥불전
미타암에는 일반 절에서 볼 수 없는 옥불전이 있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1861~1937]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불상(佛像), 광배(光背), 대좌(臺坐)가 모두 한 돌로 조각되었으며 시원스럽고 넓은 어깨의 당당한 체구에 정면관을 취하고 있는데 여러 점에서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즉 머리의 큼직한 육계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상호(相好)는 물론 왼손을 몸에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은 가슴에 댄 모습, 그리고 둥근 어깨선과 평판적인 가슴 및 대좌 위에 직립한 자세 등의 신체적 특징은 모두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부드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전신을 감싸고 있고, 양 팔을 걸쳐 지그재그 모양으로 내려간 옷자락은 발목에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특징들은 모두 감산사 불상과 직결되는 동일한 양식이지만 옷 주름이나 띠 매듭 표현 같은 세부기법에서는 경직된 면이 드러나고 있어 시대 하강에 따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전체적인 윤곽이나 3조선으로 이루어진 두광, 신광의 구분, 그 구획 안의 꽃무늬 배치, 그리고 외연부의 화염문(火焰文) 등 역시 감산사 불상 광배와 유사한 모습이다.

미암타은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써 천성산 원적봉 8부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천애의 자연과 더불어 조망과 비경이 웅장하고 수려하다. 웅상, 덕계, 서창을 한눈에 조망을 할 수 있고 대운산, 달음산 등 인근 명산을 볼 수가 있다.

대좌는 2단의 원형연화문대(圓形蓮花文帶)와 그 아래의 사각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각의 각 면에는 2구씩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연판(蓮瓣) 안에 꽃무늬가 새겨진 연화좌(蓮花坐)의 모습은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의 것과 거의 같다. 이렇게 이 불상은 세부표현에서 다소 이완된 면을 보이지만, 불신뿐만 아니라 광배와 대좌까지 모두 감산사 불상과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구름이 깔린 날씨 일 때는 가히 천상의 낙원인 것 같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도 깨달음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이런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을까?

 주목할 것은 이 석불이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나오는 포천산(布川山) 석굴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

「삽량주(歃良州)의 동북쪽 20리가량 되는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는데 석굴(石窟)이 기이하고 빼어나 마치 사람이 깍아 만든 것 같았다. 성명이 자세치 않은 다섯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여기에 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면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기 몇 십 년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머물러 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 왔다. 절의 중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 버리더니 큰 광명을 내비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중이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을 치루(置樓)라 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다.」

화엄사 주차장에서 위로 30m 정도 가면 1992년 혜문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봉안하고 건립한 화엄사 적멸보궁을 볼 수 있는데 꽃 창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곳 또한 오래 전 작은 토굴에서 시작하였고 수려한 산세와 감로수가 유명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또한 불교 신도들의 기도처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1992년 혜문스님이 석굴 암벽 속에서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석가모니 불상을 발견하였는데 복장 속에서 진신사리 6과와 부적 다라니경, 항마진언 등이 나왔었다. 그리고 복장 속에서 발견 된 글을 보면 1856년에 월석우해, 운거공시 두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복장 속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화엄사 주차장에서 위로 30m 정도 가면 1992년 혜문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봉안하고 건립한 화엄사 적멸보궁을 볼 수 있는데 꽃 창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천성산(千聖山, 고도 : 921m)은 원적산(圓寂山), 원효산(元曉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으로 알려졌다. 북쪽의 정족산에서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왔고 산 북사면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내원사가 위치하며 그 주변이 가지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양산)진산은 원적산(圓寂山)이다.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부르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료에는 원적산으로 기재되어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의 하북면에 천성산, 웅상면 소주동과 상북면 대석동에 원적산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양산)에 원효산(元曉山)과 천성산으로 분리·표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을 봉우리에 따라 분리해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시에서는 과거 원효산(921m)이라고 부르던 것을 천성산제1(주봉), 천성산(812m)이라 부르던 것을 천성산 제2봉으로 정정했다. ‘천성산(千聖山)’ 지명은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1,000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성인이[] 되게 한 곳이라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해우소 가는 길에서

 

나이 드신 할아버지 및 할머니를 위한 만든 모노레일로 화엄사 주차장에서 승차하여 올 수 있는 수송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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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말사 중 하나인 극락암은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시바세계를 무대로 멋지게 살아라.」라는 법어로 유명한 근·현대의 선승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이 주석한 암자로 유명하다.  1968년 이후 경봉스님이  홍예(虹橋), 조사각(祖師閣), 단하각(丹荷閣), 수세전(壽世殿) 등, 가람 전체를 크게 중수하였다.

1927년 11월 20일 삼경 「삼소굴」에서 경봉스님이 확철대오(確撤大悟)의 대도(大道)를 성취 하였는데 방안의 촛불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자성(自性)을 깨닫고는 기쁨 마음에 문을 박차고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시, 서, 화, 선, 차까지 두루 갖춰 오절로 불리었던 경봉스님은 「기껏 살아봐야 백년을 더 사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니 언제나 쾌활하고 낙관적인 기분으로 활기찬 생활을 해야 한다.

지금껏 생활해 온 모든 사고방식과 생활 관념에 잘못이 있으면 텅 비워 버리고 바르고 참되고 활발한 산 정신으로 살아가야한다」라고 말씀하셨다. 1982년 7월 17일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하시며 열반에 들었다.

경봉스님이 입적 할 당시, 이 지역에는 가뭄이 발생하여 농사를 짓는 데 큰 어려움을 있었다. 그러나 다비를 마친 후에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가뭄이 해소되었다고 한다.


극락암의 핫 플레이스가 2곳이 있다. 하나가 극락영지와 홍예로 이곳은 사진촬영하려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사계절이 제각각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단하각(丹荷閣)으로 소원성취를 위해 찾는 중장년층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극락암은 1344년(충혜왕 복위 5)에 창건됐으며, 창건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소실 된 법당들을 1758년(영조 34)에 지홍대사(智弘大師)가 중창하였다. 고종 30년(1893)에 무량수각을 중건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삼소굴(三笑窟), 무량수각, 수세전(壽世殿), 설법전(說法殿)과 영월루(暎月樓), 조사각(祖師閣)과 원광제(員光齊), 단하각(丹荷閣), 등 있다. 극락암은 수덕사 전 방장 원담스님, 은해사 전 조실 일타스님, 해인사 원로 도견스님, 화엄사 전 주지 도광스님 등 제방의 조실스님들이 모두 이곳에서 정진하는 등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호국선원이다.

극락암의 일주문인 여여문

극락영지는 극락암 앞 연못으로 통도팔경 중 제5경이고 영축산의 산봉과 산록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연못과 담장이 넝쿨 로 감싸인 홍예는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봄에는 한그루의 벚나무에서 꽃이 피고, 여름에는 수련 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단풍 물든 영축산이 잠기고 겨울이면 맑은 하늘 구름이 노닐고 가는 곳이다. 극락영지의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홍교(虹橋)인 극락교는 극락세상으로 가기 위해 건너는 다리로 경봉스님이 71세 때인 1962년 만들었다.

극락영지는 극락암 앞 연못으로 통도팔경 중 제5경이고 영축산의 산봉과 산록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극락암에는 조선 말기에 제작된 지름 85.5~85.8㎝ 크기의 청동반자(靑銅飯子)가 있다. 옆면에 반원형의 고리 두 개가 붙어 있어 반자를 고정시키고 있고 범어[梵語] ‘옴’자를 돋을새김(음각)의 새겨 총 44개의 ‘옴’ 자 원형문으로 2열 배열하여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서방 정토에 극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옴마니반메훔」를 육자대명주(六字大明呪)라 하여 여섯 자를 새기고 있다.

극락암 청동반자

앞면 중앙에는 돋을새김의 태극원문 당좌(撞座)가 있고 오른쪽 방향에는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 ‘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 왼쪽 방향에는 ‘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이라는 글이 주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작시기와 대한제국 황실의 수복(壽福)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뒷면에는 직경 65㎝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앞면 중앙에는 돋을새김의 태극원문 당좌(撞座)가 있고 오른쪽 방향에는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왼쪽 방향에 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이라는 글이 주조되어 있다.
순비저하수제년(淳妃邸下壽齊年), 영친왕저하수제년(英親王邸下壽齊年), 대황제폐하만만세(大皇帝陛下萬萬歲)
황태자비전하수제년(皇太子妃殿下壽齊年),&nbsp;황태자전하천천세(皇太子殿下千千歲)
옆면에 범어[梵語] 옴자를 돋을새김(음각)의 새겨 총 44개의 옴자 원형문으로 2열 배열하여 새겨져 있다.
옆면에 반원형의 고리 두 개가 붙어 있어 반자를 고정시키고 있고 뒷면에는 직경 65㎝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설법전(說法殿)이자 영월루(暎月樓)는 법회장소이며 달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즐기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광무3년(1899)에 건축되었고 1967년 경봉스님 때 단청을 하였다. 설법전 현판과 주련은 경봉스님 글씨이고 영월루 현판은 석재 서병오 글씨이며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청남 오제봉의 글씨이다.

설법전(說法殿)이자 영월루(暎月樓)는 법회장소이며 달그림자가 비치는 모습을 즐기는 누각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광무3년(1899)에 건축되었다.

수세전(壽世殿)은 인간의 수명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도교의 칠성신앙이 불교화한 것으로 1820년 대 양산 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고종 황실의 명복이나 황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할 목적으로 세운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1967년 7월 경봉스님이 단청 보수를 하였다.

수세전(壽世殿)은 1820년 대 양산 군수가 왕명을 받들어 고종 황실의 명복이나 황족의 무병장수를 기원할 목적으로 세운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삼소굴(三笑窟)은 맞배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경봉스님이 36세부터 91세로 입적하기까지 50년을 생활을 했던 곳이다. 경봉스님의 영정은 불교화가 김범수가 그렸다. 본래 이 건물은 순조 31년(1831)에 영봉 스님이 토굴로 지었고 이후 영봉헌으로 불리다가 철종 6년(1855) 봉흡 스님이 보수하였다. 1927년 경봉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한 후 「삼소굴」로 바뀌었고 삼소(三笑)는 깨달음의 웃음을 의미한다. 삼소굴 현판은 대구출신 팔능거사(八能居士) 석재 서병오 글씨이며 방장(方丈) 현판은 경봉스님의 글씨이다.

삼소굴 경봉스님의 영정
삼소굴(三笑窟)은 맞배지붕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경봉스님이 36세부터 91세로 입적하기까지 50년을 생활을 했던 곳이다.
고양이와 삼소굴 안내문
삼소굴 뒷편의 산수유나무
산수유 열매
삼소굴 마루에 낮잠을 자는 고양이. 이곳 극락암에는 고양이들을 쉽게 만날수 있다.

조사각(祖師閣)이자 원광제(員光齊)는 33분의 조사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9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1955년 극락선원 조실이었던 경봉스님이 건립하였다. 지금은 선원으로 경봉스님의 유품을 보관하고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다. 매년 음력 10월 30일 역대조사의 뜻을 기리는 추모대재를 봉행 할 때 일반인에게 개방한다. 현판 원광제(員光齊)는 석재 서병오의 글씨로 원광은 경봉 스님의 호이다. 호쾌대활(好快大活)은 추사 김정희, 무진장(無盡藏)은 경봉 스님 글씨이다.

조사각(祖師閣)이자 원광제(員光齊)는 33분의 조사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9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1955년 극락선원 조실이었던 경봉스님이 건립하였다.

단하각(丹荷閣)은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으로 정면1칸, 측면1칸의 팔작지붕으로 극락암에서 가장 작은 건물로 1955년에 경봉스님 때 지었다. 나반존자 소상(塑像)은 신상균氏 작품이다. 이곳 나반존자는 영험하다하여 주변 여러 지역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다.

영축산(靈鷲山)은 북쪽 신불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로 형성 된 산으로 취서산(鷲棲山, 鷲栖山), 축서산, 영취산으로도 불리고 양산시와 울산광역시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가지산도립공원 內 산으로 영남 알프스 구봉 중 하나로 고도는 1,081m 이다. 산 모양이 독수리 머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영취산이고 독수리가 깃들다, 독수리가 산다하여 취서산이다. 산 이름은 인도의 영축산과 닮아 유래하였는데 본래 영축산은 인도의 옛 마가다국에 있는 산으로 삭가모니가 “법화경”을 설한 곳으로 유명하다.

『세종실록지리지』(양산)에“취서산(鷲棲山)은 군의 북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취서산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료에도 취서산(鷲棲山, 鷲栖山)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통도사 일주문에는 「영축산 통도사」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찍부터 영축산이라고도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2001년 취서산, 축서산, 영축산, 영취산 등으로 부르던 산을 영축산으로 정식 고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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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말사 중 하나인 비로암은 극락암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암자로 고려 충목왕 원년(1345) 영숙(靈淑)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선조 11(1578) 태근(太釿)대사가 중건하였고 이후 원명화상이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비로암 전경에는 정족산, 천성산으로 형성 된 큰 능선과 백련암, 옥련암을 품고 있는 작은 능선이 앞, 뒤가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영취산 자락에 위치한 암자이기에 가능한 경관이다. 종무소 옆 샘물은 영축산 암능을 타고 내려온 석간수로 산정약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샘물은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찾는 이가 많다. 소위 영축산 정기를 담고 있어 몸과 마음 치유에 좋다고 한다.

  비로암 전경에는 정족산, 천성산으로 형성 된 큰 능선과 백련암, 옥련암을 품고 있는 작은 능선이 앞, 뒤가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영취산 자락에 위치한 암자이기에 가능한 경관이다.

 비로암의 서쪽에 발달한 계류(溪流)에 형성된 폭포로 소리가 일품이라 하여 통도팔경 중 제3경인 비로폭포가 있다. 영축산에서 발원되는 비로천에서 생성된 폭포로 유량이 풍부했던 예전에는 낙수 소리가 비로암과 영축산의 계곡을 삼킬 만큼 우렁찼다고 한다.

종무소 옆 샘물은 영축산 암능을 타고 내려온 석간수로 산정약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샘물은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찾는 이가 많다. 소위 영축산 정기를 담고 있어 몸과 마음 치유에 좋다고 한다.

조선 후기 불화(佛畵) 연구에 귀중한 비로암 탱화(毘盧庵幀畵)

비로암에는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비롯하여 극락탱화, 칠성탱화, 비로암에는 산신탱화, 독성탱화, 조왕탱화8점의 불화(佛畵)를 가리키는 귀중한 탱화가 있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1899(고종 36) 비구 주화(周華) 등이 주도하여 조성한 후 비로암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현재 8점 중 3점은 비로암, 나머지 5점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봉안되어 있다.

이들 탱화는 주제가 다양하고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시대 불교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 주는 가로로 긴 그림인 가로구도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중간 색조의 차분한 색감보다 원색에 가까운 색깔이 사용되었다.

석가모니후불탱화는 크게 삼세불화(三世佛畵)와 독존도(獨尊圖)로 나뉘는데, 비로암 대웅전의 석가모니후불탱화는 독존도에 해당한다. 크기는 가로 165, 세로 128이고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불화의 구도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상을 두고 좌우를 각각 2단으로 나누어 아래쪽에는 두 사람의 보살, 위쪽에는 석가모니불 좌우에 가섭과 아난 두 명의 제자, 바깥쪽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였다.

석가모니의 피부는 황색으로 채색하였으며 계주(髻珠)와 정상계주(頂上髻珠)는 붉은색 바탕에 흰색 선으로 바림하였다. 광배(光背)는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둥글게 표현하였고 테두리는 흰색 선으로 처리하였으며, 그 안에 군청색과 붉은색 2조의 선으로 원을 만들었다. 두광은 안쪽을 녹청색을 칠하였으며, 신광은 안쪽에 녹청색·황색·군청색·붉은색 띠를 차례대로 배열하여 빛을 형상화하였다.

석가모니 협시보살은 아래쪽 보살들의 경우 두광은 흰색 테두리 안을 녹청색으로 처리하였고 신광은 붉은색을 발랐고, 위쪽 보살들은 두광과 신광 모두 안쪽을 녹청색으로 처리하였다. 가섭과 아난은 녹청색의 두광만 표현하였다. 보살들은 모두 의자에 앉은 모습인데 오른쪽 다리는 내리고 왼쪽 다리는 올린 유희좌(遊戱座)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섭과 아난 두 제자는 손을 가슴에서 모아 합장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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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筬山)이며 산성산(山筬山) 정상부의 모습

기장군 기장읍 서부리에 있는 성산(筬山, 368m)은 정상부에 기장산성(機張山城)이 있어 산성산(山筬山)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안내도, 이정표, 정상석에도 산성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산(筬山)의 이름은 기장의 풍수 형국과 관련 있다. 즉 기장(機張)이 베틀[織機]을 차려[] 놓은 형국이라 하여 붙은 이름으로 풍수상으로 옥녀 직금형(玉女織錦形)[옥녀가 비단을 짜는 모습]으로 성산(筬山)은 베틀 바디[]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옥녀는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여인이고 절세의 미인인 동시에 풍요와 다산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각지에 옥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들이 적지 않은데 이들은 절세의 미인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남녀합궁의 뜻으로 등장한다. 옥녀는 본디 도교에 등장하는 인물로 옥황상제와도 관련이 깊다. 경남 거제의 옥녀봉에 관해 옥항상제의 옥녀가 내조암 약수터에서 내려와 사슴과 더불어 놀다가 목욕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옥녀는 선녀와 같은 존재로 보인다.

산성산 정상에서 보이는 달음산

산은 높지 않으나 해운대 장산과 기장 산성산 구간의 등산 코스는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유명하며 소요시간은 약 4시간 30분 ~ 5시간 정도이다. 아늑한 능선과 더불어 반야, 반송, 안평을 바라다 볼 수 있고 철탑 임도를 따라 가는 길은 의외의 키 큰 장대한 참나무와 소나무를 만나는데 정다운 길동무로 손색이 없다.

산성 정상부는 평지로 넓고 대변 바다 풍광을 볼 수 있고 원두막과 벤치가 있어 등산객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북쪽 방향으로는 으로는 안평 저수지 가는 길이고 바로 하산을 하면 대라리 보명사로 내려온다. 대라리 에서 정상까지의 등산길은 경사가 심해서 쉬엄쉬엄 올라가는 것이 좋다. 또는 임도를 활용하는 것도 가파른 경사에 도움이 된다.

산성산 정상에서 바라 본 대변항

옛날 오래전부터 산성산(山筬山) 밑에 참샘(지하에서 솟는 자연수)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목마를 때 이 참샘 물을 마셨다 한다. 그리고 참샘 주변에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있었고 일반인도 용왕제를 올리기도 했다. 아쉽게도 1970년대 저수지공사로 매몰되어 버렸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야철지(治鐵址)가 있어 철 제련소가 있었다고 한다.

산성산 정상에 설치 된 이정표

산성 정상부에는 기장산성(機張山城)으로 알려진 삼국시대에 축조 된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으로 기장군에서 조사된 성곽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산성이다. 현재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일부가 남아 있다. 이곳 산성은 왜구에 대한 해안 감시를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등산로에서 남문지(南門址)으로 알려진 곳에 무너진 성벽을 볼 수 있다. 또한 보명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등산로도 성벽을 볼 수 있다. 원두막 옆에는 평면 원형의 집수지가 있는데 남해안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직경은 약 14m, 깊이 2~3m 정도로 만수(滿水) 시에는 물이 흘러넘치도록 동서 방향으로 고랑이 나 있다. 정수지에서 약 50m 아래 지점 바위틈에는 샘이 있다. 2012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정상부에는 건물지와 남문지가 확인되었다.

정상부 원두막 옆에는 평면 원형의 집수지가 있는데 남해안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직경은 약 14m, 깊이 2~3m정도로 만수 ( 滿水 )시에는 물이 흘러넘치도록 동서 방향으로 고랑이 나 있다

성벽은 북쪽이 가장 높고 서쪽과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775m, 성벽의 너비는 5m 내외로, 상부에 증축(增築)된 것으로 보이는 2m 너비의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성벽은 안쪽과 바깥쪽 모두를 석축으로 쌓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잔존 성벽의 높이는 외벽이 1~3m 정도이고 내벽은 양호한 곳이 약 2.5m 정도로 그 내부는 돌로 채워져 있다. 성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우며 증축(增築)된 성벽은 대체로 20×30㎝에서 40×65㎝의 화강암을 잔돌 끼워 쌓기로 축조하였다. 그러나 하부의 초축(初築) 성벽은 55×23 크기의 석재로 틈이 없이 쌓았으나 대부분 허물어진 상태이다.

 부속 시설로 성문은 개방 형식으로, 좌우 성벽을 안쪽으로 중첩되게 쌓아 외부에서 쉽게 안쪽을 볼 수 없게 하였는데 북서쪽과 동남쪽 계곡에서 각각 한 개씩, 남서쪽에서 한 개, 모두 3곳이 확인되었다. ()는 동벽과 북벽이 이어지는 성벽의 바깥에 증축된 것으로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굴곡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 성벽과 동벽과 북벽이 만나는 외곽에 건호(乾濠)[물이 채워지지 않은 마른 해자]가 설치되었는데, 남쪽의 경우 성벽에서 5m 정도 거리를 두고 너비 10m의 완만한 U 자형으로 되어 있고, 북벽이 만나는 지점도 비슷한 규모이다.

산성산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은 보명사 방향과 서부리 용소웰빙공원 방향이 있다. 보명사와 용소웰빙공원과의 도보 소요 시간은 20분 정도다. 하산함에 있어 여유가 있으면 용소월비공원으로 내려와서 공원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산성산 안내에 따른 두 갈래길로 소로와 임도
용소웰빙공원 산책로에서 산성산 출발길
보명사 앞에서 산성산으로 가는 초입길
용소웰빙공원 부산포항고속도로 고가대교 아래에서 출발하는 곳
산성산 안내도
공원 내 산책로
공원 내 용소골저수지
용소골저수지 둑과 전망대
출렁다리에서 본 용소골저수지
상부의 고가도로는 부산포항고속도로
용소웰빙공원입구에서 바라 본 산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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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읍성을 만나는데 보통 바다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주로 복원된 읍성을 마주보게 된다. 읍성은 해적, 즉 왜구로부터 고을을 방어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행정기능과 군사기능을 겸하고 있다. 고려말에 처음 읍성을 축성했고 읍성 내부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거주하고 읍성 밖에는 지역주민이 거주했다. 읍성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조선총독부의 계획에 따라 해체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훼손되고 철거 된 자리에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시설부지로 활용되었고 군 및 읍사무소, 경찰서, 등기소 등이 건립됐다. 그리고 해방 후 도시화와 도로개설, 무관심 등으로 사라졌다. 현재 경주읍성, 언양읍성, 장기읍성, 낙안읍성, 고창읍성, 해미읍성, 홍주읍성 등이 남아 있다.
평산성(平山城)인 기장읍성의 위치는 토성(土城)인 기장읍 교리 일대와 석성(石城)인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이다. 현재 읍성의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이 동부리 기장초등학교 주변과 서부리 일대이다. 기장초등학교 주변은 공덕비군(功德碑群)과 더불어 나름 옛 멋이 남아 있고 서부리 일대는 복원되어 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기장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죽성리 왜성을 축성하면서 필요한 돌을 기장읍성을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동부리 일대에는 동헌과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사라졌다. 교리 일대의 읍성(古邑城)은 고려 우왕(禑王:1374∼1388년)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어 관아가 모두 불에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읍성이다.

석성(石城)인 동부리 주변에는 동헌과 우물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기장초등학교를 지으면서 허물어 사라졌다.
기장초등학교 주변은 읍성과 더불어 공덕비군(功德碑群)이 있어 나름 옛 멋이 남아 있다.
기장군에 산재해 있는 공덕비 36기를 1972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 곳에는 관찰사비 7기, 수군절도사비 1기, 어사비 1기, 현감비 14기, 군수비 5기, 아전비 2기, 객사건성비 1기, 교량건성비 1기, 교량개축 등 2기, 기타 3기 등 있다.
기장 죽성리 두호마을에서 발생한 조운선 양곡 절도의 원만한 해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기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이도재 생사단비가 여기에 있다. 생사단이란 고향 출신의 수령이 부임한 경우, 이의 탄생지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을 가리킨다.
비의 재질은 석재이고 비석 머리는 둥글고 받침돌은 없다. 비의 앞면에는 비의 제목 '수사 이공도재 생사단(繡史李公道宰生祀壇)' 이라 되어 있고,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來何暮兮 天必佑之 百弊咸正 千秌永祀]'라고 적혀 있다. 뒷면에는 '광서 계미년[1883] 봄에 세우다[光緖癸未春立]'라고 적혀 있고 건립자에 관한 기록은 없다. 비의 크기는 높이 92.5㎝, 너비 36㎝, 두께 13㎝이다.
비의 재질이 화강암이 아닌 철로 된 공덕비.
귀부를 가진 공덕비

일반적으로 읍성의 내부에는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외부에는 사직단(社稷壇), 문묘(文廟)와 같은 제사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읍성은 군사기능을 겸하고 있는데 평시에는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다가 유사시에 성 내로 들어와 방어를 한다.
왕 또는 국가를 상징하는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闕牌(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와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정청(正廳)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 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학교건물과 관청 건물로 사용되었다.
수령의 근무처인 동헌은 간혹 객사 정청과 같이 쓰이나 객사와 나란히 배치 되어있다. 주로 장방형의 평면에 마루방과 온돌방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 많다. 수령의 숙소이자 안채인 내아(內衙), 내사(內舍), 서헌(西軒)이 있다. 부속 건물로 지방출신 인물들의 자문기관인 향사당(鄕士堂), 향청(鄕廳), 군사업무를 보는 군관청, 도둑을 잡는 등 치안을 보는 토포청, 아전, 6방이 집무하는 작청, 등 있다.
읍성의 위치는 군사 방어목적과 백성생활을 위해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지형에 각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발달한 곳에 자리 잡았다. 따라서 구릉지와 평탄지를 일부씩 포함하여 축조 된 평산성(平山城)이다.

서부리 일대 기장읍성은 복원되어 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기장읍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죽성리 왜성을 축성하면서 필요한 돌을 기장읍성을 사용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성벽은 고려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나 조선시대에는 주로 돌로 쌓은 석성이고 성을 쌓을 때 내부는 비탈이나 경사로 처리하고 외부 성벽만 쌓는 편축성(片築城)과 평지에서 내외·부 모두 쌓는 협축성(挾築城)이 있다. 특히 돌을 쌓아 올릴 때 밑쪽은 밑돌보다 윗돌을 약간 들여쌓는 퇴물림 쌓기와 반대인 내쌓기가 있다.
성벽 방어를 위해 성벽위에 낮은 담장을 올린 여장(女墻)도 갖추기도 하고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직사각형 또는 반원형의 구조물 치(稚), 치의 일종으로 성벽 모서리 부분에 설치한 각루(角樓), 성벽의 주변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낸 해자(垓字) 등 있다.
성문은 성벽에 개구부를 내 출입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홍예문이 많다. 문비, 즉 문짝은 목재판문으로 제작하여 바깥쪽에는 철엽을 씌어 화공 등에 대비하였고 홍예문 위에는 목조로 누각으로 설치 한 문루를 지어 장수의 지휘소 기능과 적을 감시하는 기능을 겸하였다. 또한 성문 보호를 위해 성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한 이중 성벽인 옹성과 성문에 좌우에 설치한 치(稚)인 적대가 있다.

기장읍성 주변 골목길에서 본 돌담

『문종실록(문종실록)』에 “기장현 읍성은 주위가 1,527척(척), 높이가 11척이고, 여장(녀장)의 높이는 2척이며, 적대가 6개소, 문 3개소인데 옹성이 있고, 여장이 383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1개소인데 판 깊이가 20척이고 물의 깊이는 1척이며, 성밖의 방천(방천)에서 성을 뚫고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어 저수하였는데 깊이는 1척이며, 해자(해자)는 아직 파지 않았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통하여 읍성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으나 적대가 6개이고, 옹성이 돌려진 성문이 3개소이며, 여장이 383개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는 읍성을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50보(步)이며 성내에 못과 우물이 각각 하나씩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각종 읍지(邑誌)에는 읍성이 석축으로 둘레가 3,197척이고 성 높이가 12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리 일대의 읍성(古邑城)은 고려 우왕(禑王:1374~1388년)때 왜구의 침입으로 함락되어 관아가 모두 불에 전소되었다. 이후 다시 축조된 것이 동부리, 서부리, 대라리 일대의 읍성이다.
교리근린공원 내 기장읍성은 부경문물연구원에서 2012년 지표 및 표본조사와 2014년 정밀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건물지를 확인하였고 청자류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장의 옛 이름은 갑화량곡(甲火良谷)이고 별호(別號)는 차성(車城)이다. 갑화량곡은 "큰 마을" 이라는 의미로 옛 지명에 갑(甲)은 “크다”의 뜻이고, 화(火)는 "불" "벌"로서 곧 마을이나 성을 뜻한다. 기장이라는 지명은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는 옥녀직금설로 기장은 옥황상제의 옥녀가 이곳에 내려 와서 베틀(織機)을 차려서(張) 비단을 짜고 (織錦) 물레질(紡車)을 한 곳(城)이기 때문에 베틀 기(機)와 베풀 장(張)으로서 기장(機張)이라 하였고, 둘째로 대읍성설(大邑城說)은 “갑화량곡”과 같이 큰 마을이라는 의미다.
삼국시대 기장지역은 지증왕 6년(505) 거칠산국(居漆山國)의 갑화량곡(甲火良谷)에서 동래군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으로 개편되었고, 신문왕 때(685)에 9주 5소경의 군현제 개편시 삽양주에 편입되었다. 그리고『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장은 원래 갑화랑곡현(甲火良谷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 12월 양주(良州)관내 동래군 기장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속오군을 지휘, 통솔한 기장 장관청(機張 將官廳)
기장 장관청은 조선 후기 동남해변을 지키던 기장 지역의 속오군을 지휘·통솔하기 위해서 파견된 군·장관들이 사용하던 집무소이다. 당초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에 지붕은 팔작지붕이었으나 건립된 후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형이 이루어졌고, 특히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면서 외관은 정면 8칸, 측면 2칸으로 크게 변형되었으며, 기와는 누수를 막기 위해 시멘트를 덮어서 지붕 윤곽만 겨우 드러난 상태였다.

건물 내부에 대한 조사 결과 대들보, 서까래, 도리, 기둥 등 주요한 구조부재 등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2013년~2014년에 걸쳐 전면 해체 보수를 실시하였고,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835년(헌종 5)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장 장관청은 동래부의 장관청(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8호)과 함께 전국적으로도 남아 있는 사례가 드문 관아 건물이다. 조선 중기 이래의 간소한 굴도리식 건물로써 건축사적으로 크게 주목될 뿐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도 뛰어나며, 조선 후기 부산 및 기장 지역 관아 건축의 양상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건축 유구(遺構)로 우리나라 동남해안의 전략 요충지였던 기장군의 역사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2008년 12월 16일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보존되어 오다가 건물의 중요성 및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3월 18일 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승격되었다.

장관청에서 본 서부리일대 기장읍성
기장읍성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부산시 지정 근대건조물로써 지붕의 기와형태가 일본식 구조이다
기장역 주변 한국철도공사가 소유하는 건물로써 과거 관사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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