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파에 바다가 얼었다. 어디일까? 주인공은 다대포해수욕장이다. 얇은 수심, 기수지역, 긴 모래사장의 조합이이라서 가능한 것 같다. 삭막한 코로나와 추운 겨울날씨 속에서도 나름의 기분전환을 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특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다대포해수욕장은 낙동강 하구 최남단에 위치한 해수욕장으로 길고 넓은 백사장과 고운모래와 얇은 수심으로 여름이면 피서객들에게서 인기가 많다. 낙동강물이 바닷물과 만나서 평균수온이 21도로 따뜻하고 수심이 300m 거리 바다까지 1.5m로 물놀이하기가 좋다. 또한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어 대중교통이용에도 좋다.
여름 해수욕장 이용할 때 가끔 너울성 파도가 생기는 관계로 해안에서 너무 떨어지는 것은 삼가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수심이 얕아도 중간 중간 웅덩이가 있어 염두에 두고 물놀이하면 당황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4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으킨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16세기 일본에서는 다도가 유행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차를 좋아하여 다회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이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군의 장수들은 수많은 조선의 도공과 사기장, 칠기장 같은 장인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또한 장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젊은 남녀를 끌고 가서 전쟁 노예로 삼아 상업적 이익을 취했다. 왜란 7년 동안 일본은 조선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큰 만행과 악행을 저질렀다.
일본에 끌려 간 다양한 장인의 수는 기록에 따라 다르며,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10만 ~ 20만 명, 일본 쪽에서는 5만 ∼ 6만 명으로 보고 있으나, 장인 외의 사람들도 일본에 끌려가서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하니 전체 인원은 파악하기가 어렵다. 참으로 천인공노할 짓을 일본이 하였다.
왜란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참담한 현장 중 하나가 죽성리 왜성(또는 두모포 왜성)이다. 이 왜성에서 도공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이 왜선을 통해 일본에 끌려 간 것이다. 이곳에는 서답골, 또는 세답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왜란 당시 전국에서 끌려온 수많은 도공들이 왜선에 타기 전 억류생활 하면서 빨래를 했다고 하여 세탁골이라 불리었다.
두호마을 뒷산 산정에 위치한 죽성리 왜성
1593년(선조 26)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30여개의 성을 쌓고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전으로 조선을 굴복시키려 하였다. 이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근접한 구릉을 택하고 수송, 연락관계 등을 고려하여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축성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죽성리 산 52-1일대의 죽성리 왜성은 이들 왜성 중 하나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인원 3만3000명 동원하여 축성한 것으로 인근 기장읍성과 두모포 진성 성벽 돌을 사용하였다. 이 왜성은 죽성포(두모포)만 서쪽의 서답골을 끼고 있는 두 개의 구릉을 중심으로 남쪽 높은 구릉(해발 64m)에 본성을 쌓고 북쪽 낮은 구릉(해발 45m)에 본성 방어를 위한 외성(지성)을 두른 형태다. 여기에 다시 본성과 외성의 서쪽 성벽 밖에 너비 7m 이상 구덩이(해자)를 길게 파 방어망을 강화했다.
죽성리 왜성 본성으로 올라가는 계단죽성리 왜성 본성(해발 64m)왜국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슬픔과 한이 맺힌 초목과 바위
성벽은 주로 화강암을 써서 70도 정도 경사지에 비스듬히 쌓았는데, 총 면적 2,600평에 둘레가 약 960m이고 성벽 높이는 약 4m이며 3단으로 축조했다. 외성 일부 구간에서는 수직으로 축조 된 성벽이 나타나는데 이는 기존의 두모포 진성과 연결시킨 것이다. 즉 기존 조선 수군 두모포 진성을 활용한 것이다. 죽성리 왜성은 청강천(죽성천)의 자연지형과 해자를 통해 북서쪽의 외곽 방어망을 강화하고 동쪽으로는 죽성만 포구를 감싸 안은 해안요새인 것이다. 이 성은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부르고, 왜란 중에는 울주군 서생포성(西生浦城)과 울산 학성(鶴城), 그리고 증산왜성(부산포성)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유히 동해로 흐르는 청강천(죽성천)
죽성천(竹城川), 청강천(淸江川)은 양달산(286m) 동쪽 산록에 있는 연곡저수지 일대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유입하는 강으로 청강이라는 이름은 냇물이 너무 맑아 붙인 이름이다. 청강천을 장강(長江)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물이 맑아 물밑에 있는 돌조차 이끼 하나 끼지 않고 하얗게 되어 있다고 하여 ‘백설청강(白石淸江)’이라고 하였다.바닷가에서 본 청강천 동해구왜란 당시 도공들이 왜국으로 끌려갔던 죽성포(두모포)
죽성 지명은 이곳에 있던 성곽과 이곳에 죽이 많이 자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곳에는 신라토성, 두모포 진성의 석축성(石築城)과, 또 임진왜란 때의 석축성인 왜성(倭城)이 있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두모포는 현에서 동쪽 5리에 있고 수군만호(萬戶)가 수비하고 있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두모포영은 수군만호가 있고 중종 5년(1510)에 설치하였다.” 라는 내용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기장현이 폐현되면서 두모포 만호영은 동래부 부산(釜山)으로 이전하였다. 죽성이 행정지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이다.
죽성리 왜성 본성에서 본 두호마을 전경
현재 죽성리 왜성 입구는 철문에 의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다. 땅 소유자인 신앙촌(천부교)에 대하여 기장군이 소송을 진행 중이다. 사유는 신앙촌이 문화재에 대하여 현상 변경을 하였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부산은 여타 광역시 보다 관할 내 산이 많고 사연 또한 다양하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는 대륙침략과 한반도 병참기지화와 이를 위한 자원수탈 목적으로 국토의 산을 유린하였고 무차별 광산을 개발하였다. 부산지역의 산 또한 예외가 없었고 금과 구리 채굴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였고 황령산, 금련산, 백양산, 이기대, 기장군 달음산 등이 도륙을 당한 산이다. 특히 이기대 구리광산은 폐광유출수로 인한 중금속 오염이 심각하였다.
황령산은 퇴적암, 금련산은 화산암으로 암석구성이 되어 있고 당시 황령산 및 금련산 일대는 구리 및 아연 제련소도 있었다. 황령산은 금을 채굴하였고 금련산은 구리를 채굴하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지금은 폐광되어 막혀있거나 묻혀 버렸지만 80년대까지는 폐광 갱도가 여름철 피서장소로 인근 주민들이 사용하였다.
우암사에서 바라 본 전경
이곳 우암사는 폐광 된 갱도2곳을 매입하여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사찰 입구 진입로의 경사가 매우 가파르다. 겨울에는 빙판길이 우려 되어 차량이용하기가 어렵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안전할 것 같다. 첫 번째 맞이하는 우미사의 갱도 사찰은 두 번째에 비하여 길이가 길다. 갱도 곳곳에 불교용품으로 사찰을 장식하였고 마지막 부분에는 불상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실제 갱도 끝은 아니고 단지 안전을 위한 방법인 것 같다. 두 번째 갱도 사찰은 길이는 짧지만 끝 부분은 넓고 분위기는 첫 번째에 비해 경건함과 숙연함을 많이 느껴진다. 다만 소원성취 돌이 있어 아쉽다.
첫 번째 갱도 사찰 입구두 번째 갱도 사찰 입구
무엇보다도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 자원수탈 일환으로 이러한 갱도 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제징용을 당하였고 가혹한 노동착취를 시달렸는지 여기서 그분들의 고통을 가늠 해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본성은 침략과 지배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이곳 망미1동 광산촌 마을은 당시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여 조성 된 마을로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현재는 100여 가구 200여명으로 대부분 노인들이 살고 있는 산동네다. 금련산 중턱 가파른 곳에 위치한 관계로 집들이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고 골목길 또한 좁다. 그렇지만 원색의 지붕 색깔과 산 아래 자연 환경과의 어울림이 조화를 이루어 전체 마을모습은 정겹고 아늑하다.
송정 옛길은 장산 자락의 신곡산을 가로지르는 해운대와 송정을 잇는 1km 고갯길이다. 신곡산은 해발 230m로 장산자락의 야트막한 산으로 새롭게 정비한 옛길 초입에 진입하면 송정으로 가는 방향과 청사포로 가는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송정으로 가는 길은 능선을 넘으면 경사가 가파르고 흙길과 포장길이 교차로 이어지니 다소 아쉽고 청사포 가는 길은 흙길이고 울창한 나무와 더불어 산책하기가 매우 좋다.
송정터널과 부산환경공단 해운대 사업소 사이에 있는 송정옛길 입구
송정터널과 부산환경공단 해운대 사업소 사이에 있는 송정옛길 입구에는 메타스퀘어가 좌우로 장대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어 가족단위, 연인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가을에는 풍경이 뛰어나서 웨딩촬영 등 사진애호가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최근 부산환경공단에서 공사 중 발생하는 먼지를 차단하기 한쪽 방향을 파란색 차단막이 설치되어 있어 아름다움이 감소되어 안타깝다.
신곡산은 오랫동안 군사지역으로 민간인 출입이 통제 되었던 이유로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고 등산로 내지 산책로 또한 잘 정비되어 있어 이용하기가 아주 좋다. 군데군데 옛 흔적도 느끼면서 삼림욕과 함께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폐탄약사를 보수하여 새롭게 단장된 쉼터
부산은 전쟁이 발생하면 마지막 후방지역이라서 여타 지역처럼 군사보호시설이 많다. 신곡산 또한 한국전쟁 이후 1952년에 총탄, 포탄, 로켓탄 등 탄약을 보관하는 육군군수사령부 산하 병기탄약사가 신곡산 일대에 지어졌고 전시와 훈련에 탄약을 보급하였다.
철거되고 흔적으로 남은 철조망
1952년 6월 16일 탄약을 적재하던 노무자라가 탄약 야적장에 담뱃불을 던진 것이 원인이 되어 탄약고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주민 5~6명이 폭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당시 폭발 모습은 버섯 모양의 불꽃과 거대한 낙하산과 같은 불꽃, 수천만 개의 붉은 꽃송이가 일어났고 폭발 위력은 대단하여 사고 발생지 3km 떨어진 곳 까지 파편이 날아갔다.
철거 되어 쓸쓸한 모습의 군사시설철거 된 중대 주둔지 막사 입구
병기탄약사는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로 인하여 1998년 대전으로 옮기면서 폐쇄되었다. 초입에 위치한 송정옛길 기억쉼터는 이후 폐탄약사로 2008년 송정 일대 군부대 지역이 민간인에게 개방되었고 2020년 보수작업을 거치면서 지금은 쉼터의 모습으로 갖추었다.
송정 방향의 등산로
송정 방향으로 가는 길에 만난 쉼터송정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본 전경송정 방향으로 가는 포장 된 길폐쇄 된 군 헬기장은 등산객의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기장군 달음산 자락 아래 일광면 원리에는 20채의 집에 47가구가 살고 있는 광산마을이 있다. 마을 바로 상공에는 부산·포항 고속도로 고가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달음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가 마을을 가로질러 시원한 멋을 내고 있어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조용한 산촌마을을 연상케 하는 광산마을마을 바로 상공에는 부산·포항 고속도로 고가도로가 마을을 관통하고 있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다달음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수가 마을을 가로질러 시원한 멋을 내고 있다 .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일본 회사이름인 스미토모(住友)의 광산기업 계열사인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가 국내 자원약탈 목적으로 구리광산을 개발 및 운영 했던 곳이다. 스미토모는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같이 일본의 3대 기업집단(재벌)이자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다. 일광(日光)의 일본식 발음 ‘닛코’를 따서 ‘닛코광산’으로 부르기도 했고 식민지 조선 내 5대 구리 광산 중 하나였다.
그리고 구리광산개발에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하고 구리 채광작업에는 휴일도 없이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장안읍으로 가서 군사훈련까지 받았었다. 당시 일광광산(닛코광산)의 노무자는 200명 정도로, 가까운 일광과 좌천 등지에서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의 일본인 관리자 청사
우리나라에 구리광산이 처음 생겨서 생산 된 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354년 전인 헌종 재위 9년(1668년 1월 19일) 경남 거제도이다. 헌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거제지역에서 구리가 생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리가 나지 않다가 지금 비로소 생산된 것이다.」
여기서 채굴된 구리 등은 곧장 좌천역으로 옮겨져 열차에 실렸다. 당시 좌천역에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는 시설인 급수탑이 선로 옆에 있었다. 옛 좌천역은 1934년 12월 16일 해운대와 좌천을 잇는 동해남부선이 개통되면서 문을 열었다. 1935년 12월에는 좌천과 울산, 1936년 12월 울산과 경주 선로가 추가로 개통됐다.
1934년에 지어진 옛 좌천역사은행나무 세 그루가 옛 좌천역사를 지키고 있다.좌천역 주변의 옛 모습마을공동 우물사람들의 마음은 늘 같다.
해방 후 간헐적으로 이어오다가 70년대에 점차 채산성이 떨어져 폐광되어 구리광산 마을기능은 상실하였다. 지금은 한국광해관리공단에서 폐광산 입구에서 유출되는 수질을 정화하기 위한 광해방지시설을 설치하고 있어 폐광산 입구를 볼 수가 없다.
한국광해관리공단에서 폐광산 입구에서 유출되는 수질을 정화하기 위한 광해방지시설을 설치하고 있어 폐광산 입구를 볼 수가 없다 .
달음산(고도 588m)은 정관면과 일광면 원리와의 경계를 이루며 기장 8경 가운데 제1경이 되는 명산이다. 산정은 주상절리로 형성된 취봉과 옥녀봉으로 되어 있다. 북쪽 산록에서 좌광천, 남쪽에서는 일광천이 발원하고 옛날에는 달이 뜨는 산이라는 뜻의 월음산(月陰山)이라고도 하였다. 『기장현읍지』에서는 취봉산(鷲峰山)이라고 적혀 있는데 옛 기장 사람들은 추봉산 또는 축봉산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의 주거하는 집 형태는 천편일률적으로 아파트다. 재건축, 재개발하면 무조건 고층 아파트를 짓는다. 이러한 아파트 중 부산에서 아름다운 아파트가 있다. 바로 망미주공 테라스동 아파트다. 망미주공 아파트는 연제구 연산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2038세대 총 23동으로 1986년 11월 준공하였다. 테라스동 아파트는 1층 단독형 4개동, 107동 ~ 110동으로 구성되어 있고 언덕 경사를 활용한 도심 속의 전원주택이다.
테라스동 아파트의 주변 자연환경 또한 아름답다. 오랜 된 나무와 숲속 연못의 어울림은 마치 자연휴양림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15년 5월 재건축이 확정되어 이 아름다운 아파트는 시한부 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라지게 될 테라스동 아파트를 바라보며 우리나라 주거형태도 테라스동 아파트로 보편화되기를 바랄뿐이다.
테라스동 아파트에 위치하고 있는 연못
망미(望美) 지명은 배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배산의 기슭에는 성황당(城隍堂)이 있고, 신주(神主)는 배미산(盃美山) 산신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이 산을 배미산 또는 잘미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현재의 수영동과 망미동사이의 산을 망산(望山)이라고 한다. 망미동은 망산의 ‘망(望)’자와 배미산의‘미(美)’자가 합쳐서 된 명칭으로 풀이된다. 또한 망미동은 수영성북문밖에 위치하고 있어 수영의 수사가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望拜)를 들어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혹은 고려의종 때에 귀양 온 정서(鄭敍)가 북쪽을 바라보며[望] 임금[美]에게 절을 했다는 뜻에서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 등이 있다.
육의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3호)은 조선중기 무신 최계종(崔繼宗)이 말년을 보낸 조선후기 가옥이다. 동경잡기에는 다음과 같이 육의당에 대한 내용이 있다. 「부의 동쪽 30리 토상호(吐上湖)가에 있다. 아름다운 경치는 또한 하나의 별천지이다. 현감 최계종이 지은 것이다」 육의당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 이를 옛적에는 토상호(吐上湖)라 불렸던 것 같다. 이 저수지 중심으로 둑을 쌓고 마석산(磨石山) 아래 안쪽에는 촌락이 형성되어 있고 바깥쪽에는 논농사를 하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석산(磨石山)은 높이 531m로 산 정상에 있는 바위가 맷돌처럼 생겨 일명 맷돌산, 뺏돌산이라 부른다.
경주시 외동읍 제내리에 위치한 육의당 전경현판에는 육의당, 석호정사라고 적혀있고 좌우에는 영쌍창이 보인다.
최계종(1570년 ~ 1647년)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승(慶承), 호는 육의당(六宜堂)이다. 인조 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때 숙부 최봉천(崔奉天), 형 최진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여 서생포(西生浦) 수군첨절제사를 거쳐 남포현감(藍浦縣監)에 제수되었으나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西宮幽閉) 사건 때 벼슬을 거역한 죄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풀려나 이곳 제내(堤內)에 그의 호를 딴 육의당을 지어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육의(六宜)는 돌을 다듬어 단을 쌓고 꽃을 심어 사시와 조석으로 알맞게 즐긴다는 뜻이다.
육의당 앞에 위치한 저수지로서 이름은 토상호라 생각된다.
육의당은 1619년(광해군 11)에 세워진 후 4차례 걸쳐 중수하였다. 현재 후손인 최해구씨가 소유, 관리하고 있다. 건물의 정면 4칸, 측면은 1칸이지만 측면 기둥 간격이 다소 넓다. 안쪽 대청과 온돌방사이의 경계벽에는 사이 기둥을 두어 안에서는 마치 2칸처럼 보이게 한 점이 특이하다. 아담한 규모에 영쌍창을 비롯하여 창호형식이 눈길을 끈다. 영쌍창은 창문틀 가운데 설주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양쪽에 외여닫이문을 쌍창처럼 설치한 것이다. 문보다 창의 기능이 강조된형식이다. 건물 정면 2개의 현판에는 육의당과 석호정사(石壕精舍)라고 적혀있다.
제내 마을의 드 넓은 평야로 사로국 때는 중요한 곡창지대로 생각된다.
이 곳 마을 이름은 '제내(堤內)', '돌매', '토상촌(吐上村)', '석동(石洞)'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앞의 토성계(土城谿)에 못을 막고부터 '제내(堤內) 안'이라 불렀고, 해방 후부터 '제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제내(堤內)는 순우리말 못 안 또는 줄 못 안에 대해 한자의 뜻을 따서 표기한 것이다. 줄 못은 줄이라는 풀이 많은 못이라는 뜻이다.
외동(外東)의 지명은 『동경잡기』에 도음방도에서 하신까지가 외방(外坊)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현재의 외동읍보다는 범위가 좁다. 『해동지도』(경주)에 조선 후기 사료에 외방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1905년에 동쪽 방향의 면 중 바깥쪽에 있다는 뜻 의 외동면(外東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부산에서 일몰 풍광이 뛰어난 곳 중 한곳이 사하구 다대포의 몰운대이다. 서해바다를 느끼게 하는 다대포 해수욕장은 근처 을숙도와 더불어 바닷가 해안도로 라인 풍광이 아름답다. 또한 다대포는 부산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지질탐사를 하는 탐사객의 발길이 잦다.
수심이 얕고 넓은 백사장이라서 인기 많은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 초입부터 울창한 소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몰운대(沒雲臺, 부산시 기념물 제27호)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부산 다대포 몰운대 까지 370km에 이르는 낙동 정맥의 끝자락이고 금정산지의 끝자락이 대한해협으로 유입하여 형성된 곳으로 16세기까지 몰운도(沒雲島)라 부르는 섬이었다.
이후 낙동강의 퇴적물로 다대포육지와 연결되어 육계도가 되었다. 남쪽 끝은 해식애와 해식동이 발달되어 있고 배후인 육지는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다대포해수욕장 같은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생겼다. 몰운대 지명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선조40년 동래부사 이춘원이 몰운대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다대(多大)라는 이름을 답달(畓達), 다다라(多多羅), 다다라(多多良)에서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부산의 지명 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었다. 다대항은 2001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 응원단을 실은 만경호가 입항한 곳으로 다대진이라고도 불렸다.
다대포는 신라시대 부터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임진왜란이후 경상좌도 7진(부산, 다대, 서평, 포이, 개운, 두모, 서행) 중 의 하나로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더 중요시되어 2배의 병선을 보유하고 있다. 태종 7년(1407년) 궁궐(한양)에서 바라볼 때 경상도를 좌우로 나누어 낙동강 동쪽을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로 불렸다.
대동여지도 : 동래대동여지도 : 다대포와 몰운대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에는 영(營)을 설치하였는데 다수의 육군인 경우는 병영(兵營)을, 수군인 경우는 수영(水營)을 설치 및 운영하였고 주로 성곽 형태로 되어 있다. 이를 지휘하는 직위는 병영은 병마절도사(병사), 수영은 수군절도사(수사)로 품계는 각각 종2품, 정3품이다.
경상좌도 해안 방어를 지휘한 좌수영의 위치는 동래현 부산포이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 1592년 동래남촌(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겼고 1636년(인조14년) 감만이포(勘蠻夷浦, 감만1동)로 옮겼다. 1652년(효종 3년) 동래남촌으로 다시 옮긴 후 1895년(고종 23년) 영이 폐지 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경상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거제이며 1604년(선조37년) 고성(통영)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라좌도 좌수영의 위치1479년(성종 10년)는 여수이며 전라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1377년 고려 우왕3년 무안(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 된 후, 1440년(세종 22년) 무안에서 해남(황원관)으로 옮겼고 1465년(세조 11년)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였다. 충청도 수영의 위치는 보령(오천항)이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수군통제사 또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으로 1593년(선조 26년)에 생긴 직제이다. 초대 수군통제사는 이순신장군으로 지휘하는 통제영(統制營), 통영(統營)의 위치는 1593년(선조26년) 한산도에 두었다가 임진왜란 끝난 후 1604년(선조 37년) 통영(두룡포)로 옮겼다.
몰운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
다대포 객사 회원관(懷遠館,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3호)은 조선후기 다대 첨절제사영의 부속 건물이고첨절제사의 품계는 종3품이다. 다대포 객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건하였다가 1825년(순조 25)에 마지막으로 중수했다. 다대초등학교(다대1동) 내에 있던 것을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원형 그대로 이전 복원하였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전청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 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으나 다대포 객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벽이 없는 전청만 있다.
조선시대 행정편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관아인 경직관아(京職官衙)와 지방 행정시설인 외직관아(外職官衙)로 구성되어 있다. 외직관아는 전국 8개도와 아래에 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 등을 두었고 각 도의 관찰사 아래에는 부윤(府尹), 부사, 목사, 군수, 현령 등의 행정계통 관리조직과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군사조직으로 되어있다.
8개도에는 중앙에서 관찰사를 파견하고 이들이 집무를 수행하는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부른다. 감영은 관찰사(觀察使). 판관(判官), 도사(都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8개도아래의 여러 행전단위를 읍치(邑治)라고 부르며 읍치는 대개 읍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읍치에는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역행정을 총괄하는데 지방관의 집무 및 생활의 공간을 통칭하여 동헌(東軒)이라고 하고 중심건물이 동헌 정청이다. 내아(內衙)는 지방관의 사적공간이다.
몰운대 내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에는 정운공 순의비(부산시 기념물 제20호)가 있다. 이 비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으로 출전하여 왜의 군함 500척과 싸워 크게 승리한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한 녹두만호 정운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798년(정조 22년)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왔을 때 세운 것이다. 만호의 품계는 종4품이며, 첨사는 정3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