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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암 석굴사원에서 바라본 경관

미타암은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써 천성산 원적봉 8부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천애의 자연과 더불어 조망과 비경이 웅장하고 수려하다. 웅상, 덕계, 서창을 한눈에 조망을 할 수 있고 대운산, 달음산 등 인근 명산을 볼 수가 있다. 구름이 깔린 날씨 일 때는 가히 천상의 낙원인 것 같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도 깨달음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이런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을까?

그리고 미타암의 석굴사원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하던 석굴 사원 조영의 한 단면을 살필 수 있고 통일신라 8세기 중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998호인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있어 극락왕생과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처로서 영험하다고 알려져 있어 여타 지역의 불교 신도들도 많이 찾는다. 특히 국보 제82호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 719)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어 신라 아미타신앙의 전개 과정과 불교 고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발길이 잦다.

또한 이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은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나오는 포천산이 웅상읍의 천성산으로 추정되고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서방 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 비구가 수도하던 석굴에 모셔진 불상으로 판단되어 더욱 그러하다.

미타암으로 가는 길은 국도 7호선에서 덕계와 서창의 중간 지점에 있는 양산시 웅상읍 주진마을로 가야한다. 주진마을은 지형이 배[] 형국이고, 옛날에 해일이 일면 나룻배를 매어 놓았다하여 주진(舟津)이라고 표기하였다고 한다. 이곳 주진저수지를 지나 천성산 임도를 이용하여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화장실과 천성산 안내문이 있는 첫 주차장을 만나고 여기서 미타암 가는 산길을 이용하거나 또는 지나서 화엄사 주차장에서부터 산길을 따라 미타암까지 가는 2가지 길이 있다. 미타암 가는 산길은 매우 가파른데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미타암 가는 산길은 매우 가파른데 소요시간은 약 20분 정도이다.
미타암 초입에서 객을 맞이하는 부처님

미타암에 도착하여 둘러보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꽃이 만발한 화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준다. 장대한 나무 또한 높은 기상과 지난 옛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다. 휴식공간에는 커피, 숭늉, 사탕 등 무척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일반객에게 이용하기에 준 사찰에 감사할 따름이다.

미타암에 도착하여 둘러보면 매우 깨끗하고 단정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꽃이 만발한 화분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해 준다.
장대한 나무 또한 높은 기상과 지난 옛 세월을 보여주는 것 같다.

미타암은 646(선덕여왕 15)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원효대사가 창건한 89암자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920(경명왕 4)에 지공대사가 중창하였고 1376(우왕 2)에 중창했으며, 1888(조선 고종 25)에 다시 정진(正眞)이 중창하였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1861~1937]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깨끗한 경내 안을 대웅보전과 옥불전을 지나서 계단을 따라 걸어가면 천애의 절벽 아래 비석 군을 만나고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이 봉안 된 석굴사원(미타굴)을 마주하게 된다. 석굴사원은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천연 동굴에 인공을 가해 조성한 것으로 길이 30m, 3~5m, 높이 2~3m이다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은 높이가 205cm로 입구에서 9m 정도 들어간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대웅보전
옥불전
미타암에는 일반 절에서 볼 수 없는 옥불전이 있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의 선사상을 부흥시킨 경허(鏡虛)의 제자 혜명(慧明)[1861~1937]이 주석했으며, 현재 그의 비석이 남아 있다.

 불상(佛像), 광배(光背), 대좌(臺坐)가 모두 한 돌로 조각되었으며 시원스럽고 넓은 어깨의 당당한 체구에 정면관을 취하고 있는데 여러 점에서 경주 감산사(甘山寺) 석조아미타불입상(石造阿彌陀佛立像)과 유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즉 머리의 큼직한 육계와 어깨까지 내려온 긴 귀, 풍만하면서도 우아한 상호(相好)는 물론 왼손을 몸에 곧바로 내리고 오른손은 가슴에 댄 모습, 그리고 둥근 어깨선과 평판적인 가슴 및 대좌 위에 직립한 자세 등의 신체적 특징은 모두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의 양식을 이어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통견(通肩)의 대의(大衣)는 부드러운 주름을 형성하며 전신을 감싸고 있고, 양 팔을 걸쳐 지그재그 모양으로 내려간 옷자락은 발목에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특징들은 모두 감산사 불상과 직결되는 동일한 양식이지만 옷 주름이나 띠 매듭 표현 같은 세부기법에서는 경직된 면이 드러나고 있어 시대 하강에 따른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전체적인 윤곽이나 3조선으로 이루어진 두광, 신광의 구분, 그 구획 안의 꽃무늬 배치, 그리고 외연부의 화염문(火焰文) 등 역시 감산사 불상 광배와 유사한 모습이다.

미암타은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써 천성산 원적봉 8부 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어 천애의 자연과 더불어 조망과 비경이 웅장하고 수려하다. 웅상, 덕계, 서창을 한눈에 조망을 할 수 있고 대운산, 달음산 등 인근 명산을 볼 수가 있다.

대좌는 2단의 원형연화문대(圓形蓮花文帶)와 그 아래의 사각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4각의 각 면에는 2구씩의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연판(蓮瓣) 안에 꽃무늬가 새겨진 연화좌(蓮花坐)의 모습은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의 것과 거의 같다. 이렇게 이 불상은 세부표현에서 다소 이완된 면을 보이지만, 불신뿐만 아니라 광배와 대좌까지 모두 감산사 불상과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구름이 깔린 날씨 일 때는 가히 천상의 낙원인 것 같다. 신라시대 고승 원효대사도 깨달음과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이런 훌륭한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였을까?

 주목할 것은 이 석불이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나오는 포천산(布川山) 석굴로 비정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

「삽량주(歃良州)의 동북쪽 20리가량 되는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는데 석굴(石窟)이 기이하고 빼어나 마치 사람이 깍아 만든 것 같았다. 성명이 자세치 않은 다섯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여기에 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면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기 몇 십 년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머물러 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 왔다. 절의 중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 버리더니 큰 광명을 내비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중이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을 치루(置樓)라 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다.」

화엄사 주차장에서 위로 30m 정도 가면 1992년 혜문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봉안하고 건립한 화엄사 적멸보궁을 볼 수 있는데 꽃 창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곳 또한 오래 전 작은 토굴에서 시작하였고 수려한 산세와 감로수가 유명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또한 불교 신도들의 기도처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1992년 혜문스님이 석굴 암벽 속에서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석가모니 불상을 발견하였는데 복장 속에서 진신사리 6과와 부적 다라니경, 항마진언 등이 나왔었다. 그리고 복장 속에서 발견 된 글을 보면 1856년에 월석우해, 운거공시 두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복장 속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화엄사 주차장에서 위로 30m 정도 가면 1992년 혜문 스님이 진신사리 6과를 봉안하고 건립한 화엄사 적멸보궁을 볼 수 있는데 꽃 창살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천성산(千聖山, 고도 : 921m)은 원적산(圓寂山), 원효산(元曉山), 소금강산(小金剛山) 등으로 알려졌다. 북쪽의 정족산에서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왔고 산 북사면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내원사가 위치하며 그 주변이 가지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양산)진산은 원적산(圓寂山)이다.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부르며,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료에는 원적산으로 기재되어있다. 한편 조선지지자료의 하북면에 천성산, 웅상면 소주동과 상북면 대석동에 원적산이 기재되어 있으며, 조선지형도(양산)에 원효산(元曉山)과 천성산으로 분리·표기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을 봉우리에 따라 분리해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시에서는 과거 원효산(921m)이라고 부르던 것을 천성산제1(주봉), 천성산(812m)이라 부르던 것을 천성산 제2봉으로 정정했다. ‘천성산(千聖山)’ 지명은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1,000명의[] 스님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성인이[] 되게 한 곳이라는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해우소 가는 길에서

 

나이 드신 할아버지 및 할머니를 위한 만든 모노레일로 화엄사 주차장에서 승차하여 올 수 있는 수송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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