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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몰 풍광이 뛰어난 곳 중 한곳이 사하구 다대포의 몰운대이다. 서해바다를 느끼게 하는 다대포 해수욕장은 근처 을숙도와 더불어 바닷가 해안도로 라인 풍광이 아름답다. 또한 다대포는 부산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지질탐사를 하는 탐사객의 발길이 잦다.

 

수심이 얕고 넓은 백사장이라서 인기 많은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 초입부터 울창한 소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몰운대(沒雲臺, 부산시 기념물 제27)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부산 다대포 몰운대 까지 370km에 이르는 낙동 정맥의 끝자락이고 금정산지의 끝자락이 대한해협으로 유입하여 형성된 곳으로 16세기까지 몰운도(沒雲島)라 부르는 섬이었다.

이후 낙동강의 퇴적물로 다대포육지와 연결되어 육계도가 되었다. 남쪽 끝은 해식애와 해식동이 발달되어 있고 배후인 육지는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다대포해수욕장 같은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생겼다. 몰운대 지명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선조40년 동래부사 이춘원이 몰운대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다대(多大)라는 이름을 답달(畓達), 다다라(多多羅), 다다라(多多良)에서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부산의 지명 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었다. 다대항은 2001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 응원단을 실은 만경호가 입항한 곳으로 다대진이라고도 불렸다.

다대포는 신라시대 부터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임진왜란이후 경상좌도 7(부산, 다대, 서평, 포이, 개운, 두모, 서행) 중 의 하나로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더 중요시되어 2배의 병선을 보유하고 있다. 태종 7(1407) 궁궐(한양)에서 바라볼 때 경상도를 좌우로 나누어 낙동강 동쪽을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로 불렸다.

대동여지도 : 동래
대동여지도 : 다대포와 몰운대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에는 영()을 설치하였는데 다수의 육군인 경우는 병영(兵營), 수군인 경우는 수영(水營)을 설치 및 운영하였고 주로 성곽 형태로 되어 있다. 이를 지휘하는 직위는 병영은 병마절도사(병사), 수영은 수군절도사(수사)로 품계는 각각 종2, 3품이다.

경상좌도 해안 방어를 지휘한 좌수영의 위치는 동래현 부산포이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 1592년 동래남촌(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겼고 1636(인조14) 감만이포(勘蠻夷浦, 감만1)로 옮겼다. 1652(효종 3) 동래남촌으로 다시 옮긴 후 1895(고종 23) 영이 폐지 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경상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거제이며 1604(선조37) 고성(통영)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라좌도 좌수영의 위치1479(성종 10)는 여수이며 전라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1377년 고려 우왕3년 무안(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 된 후, 1440(세종 22) 무안에서 해남(황원관)으로 옮겼고 1465(세조 11)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였다. 충청도 수영의 위치는 보령(오천항)이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수군통제사 또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으로 1593(선조 26)에 생긴 직제이다. 초대 수군통제사는 이순신장군으로 지휘하는 통제영(統制營), 통영(統營)의 위치는 1593(선조26) 한산도에 두었다가 임진왜란 끝난 후 1604(선조 37) 통영(두룡포)로 옮겼다.

몰운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

다대포 객사 회원관(懷遠館,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3)은 조선후기 다대 첨절제사영의 부속 건물이고 첨절제사의 품계는 종3품이다. 다대포 객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건하였다가 1825(순조 25)에 마지막으로 중수했다. 다대초등학교(다대1) 내에 있던 것을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원형 그대로 이전 복원하였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전청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으나 다대포 객사는 정면 3, 측면 2, 팔작지붕의 벽이 없는 전청만 있다.

조선시대 행정편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관아인 경직관아(京職官衙)와 지방 행정시설인 외직관아(外職官衙)로 구성되어 있다. 외직관아는 전국 8개도와 아래에 부, 대도호부, , 도호부, , 현 등을 두었고 각 도의 관찰사 아래에는 부윤(府尹), 부사, 목사, 군수, 현령 등의 행정계통 관리조직과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군사조직으로 되어있다.

8개도에는 중앙에서 관찰사를 파견하고 이들이 집무를 수행하는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부른다. 감영은 관찰사(觀察使). 판관(判官), 도사(都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8개도아래의 여러 행전단위를 읍치(邑治)라고 부르며 읍치는 대개 읍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읍치에는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역행정을 총괄하는데 지방관의 집무 및 생활의 공간을 통칭하여 동헌(東軒)이라고 하고 중심건물이 동헌 정청이다. 내아(內衙)는 지방관의 사적공간이다.

몰운대 내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에는 정운공 순의비(부산시 기념물 제20)가 있다. 이 비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으로 출전하여 왜의 군함 500척과 싸워 크게 승리한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한 녹두만호 정운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798(정조 22)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왔을 때 세운 것이다. 만호의 품계는 종4품이며, 첨사는 정3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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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산은 철마면 연구리, 이곡리와 일광면 용천리에 위치한 해발 361m의 나지막한 산이다. 특히 이 산 자락 미동마을에는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아홉 산 숲」 이 있어 가족단위, 연인들, 유치원 및 초등학생 단체 등 방문하여 숲을 느끼고 생태체험을 하는 곳으로 인기가 많다. 또한 영화 <군도>, <협녀>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아홉산 숲 입구. 입장료는 어른, 아이(5세부터) 동일하게 5,000원이고 숲 체험은 10,000원으로 다소 비싸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남평 문씨 문의순 ( 文義洵 ) 이 ‘ 고사리를 보며 즐긴다 ’ 는 뜻으로 지은 관미헌 ( 觀薇軒 )

 

특히 이곳 아홉 산 숲대나무의 이름은 맹종죽(孟宗竹)으로 일본에서 들어 온 대나무로 높이는 보통 10~20m이며 직경은 20Cm 로 대나무 중 가장 굵다. 그리고 피톤치드 효과가 뛰어나 코로나19 따른 몸과 마음의 피로감을 해소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또한 맹종죽은 효를 상징하는 대나무로써 눈물로 하늘을 감동시켜 죽순을 돋게 했다는 고사 성어 맹종설순 (孟宗雪筍)의 주인공이다.

중국 춘추삼국시대 효성이 지극한 맹종(孟宗)에게 오랜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한겨울 대나무 죽순이 먹고 싶다고 하여 눈이 쌓인 대밭으로 갔지만 대나무 순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나무 순을 구하지 못한 맹종은 눈물을 흘렸고 그 때 하늘이 감동하여 눈물이 떨어진 그 곳에 눈이 녹아 대나무 죽순이 돋아났다. 그때 하늘이 내린 이 죽순을 끓여 마신 어머니는 병환이 말끔하게 나으셨다는 맹종설순 (孟宗雪筍)의 내용이다.

아홉 산 숲은 임진왜란 이후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처음 정착한 후, 400년 동안 숲을 조림, 육림을 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고 2004년 산림청에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었다.

숲의 총 면적은 520,000(15만평)으로 맹종죽 편백, 삼나무, 은행, 리기다소나무, 상수리, 밤나무 등 인공림과 참나무, 산벛나무, 층층나무, 수령 100~300년 되는 금강송 등을 포함한 천연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남평 문씨 문의순(文義洵)고사리를 보며 즐긴다는 뜻으로 지은 관미헌(觀薇軒)입구에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입장료는 어른, 아이(5세부터) 동일하게 5,000원이고 숲 체험은 10,000원으로 다소 비싸다.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다.

미동마을의 미동(薇洞)은 고사리 골을 의미하고 옛 이름은 고사리 밭, 즉 미전(薇田)이라 한다. 옛날 이 마을에서는 부뚜막에서도 고사리가 난다고 할 만큼 고사리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한다. 철마에서는 매년 10월경 한우불고기 축제를 하는 만큼 유명하여 한우 불고기집이 많다. 그래서 마을 입구부터 한우 불고기집이 있다. 마을 앞쪽에는 철마천이 흐르며 북쪽에는 곰내재라는 고개가 있고 이를 관통하는 곰내 터널이 있어 정관읍에 쉽게 갈수 있다. 또한 고개 마루에는 절경을 자랑하는 홍연 폭포가 있다.

 

철마의 지명은 면에서 가장 높은 철마산(605m)에서 비롯되었는데 옛날 이곳에 홍수가 발생했는데 이때 동해에 사는 용마라는 용이 나타나 물을 빼주었고 물이 없어진 뒤 용마가 움직이지 못해 그만 철로 굳어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어 지명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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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연화리에 있는 용왕단은 바닷가 높은 암반 위에 조성 된 하얀 정각으로 지붕에는 백탑모양을, 네 모서리에는 용두가 장식되어 있다. 이 용왕단에 모신 용왕은 도교의 영향을 받은 인자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여는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용왕의 모습이다. 이 용왕단은 해광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41년 해광 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오면서 큰 불사를 일으키면서 그 때 조성되었다. 당시 대규모 불사가 현재 사찰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소원성취 기도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방문객들

해광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로서 약 100년 전 김목암 거사(居士)가 창건하였고 당시 돌담을 쌓고, 초가로 네 칸의 법당을 지어 바다에서 인양한 목조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절 이름을 해불암이라 짓고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1974년 법당에 모신 목조 불상이 바닷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었던 것을 보존 처리를 하지 않았던 연유로 불상 표면이 크게 훼손되어 법당 뒤 언덕에 묻고, 절 이름도 해광사로 바꾸었다.

해광사 앞 공터는 캠핑장이 조성되어 주말에는 캠핑을 즐기는 인파로 가득하다

지금 이곳에는 소원성취를 이루고자 잠시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일몰, 일출을 출사하는 사진애호가들이 즐겨 찾고 입구 공터는 캠핑장이 조성되어 있어 주말에는 캠핑을 즐기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용왕단으로 가는 길에는 무당굿으로 인한 쓰레기가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또한 주변 바위 낙서가 무척 심하여 아름다운 풍광에 상처를 주고 있다.

소원성취를 하고자 기도하는 내용이 참으로 다양하여 쓴 웃음이 나온다.

이 지역은 정확하게 전하는 설화는 없으나 옛날 기장에 유배 온 친구를 찾아온 선비 5명이 절경에 취해 술을 마시며 가무를 즐기고 시를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오랑대가 전해지고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해광사 자리 또는 용왕단 우측에 있는 군 경계초소 자리로 추측된다.

바위에는 낙서가 가득하고 전방에는 해안경계초소가 보인다.

동양에서 용은 기린, 거북, 봉황과 함께 4()의 하나이며 박쥐 날개에 하늘을 날며 불을 뿜는 서양의 용과는 달리 동양의 용은 구름을 날개삼아 날아다닌다. 이러한 용을 사찰에 가면 법당의 기둥, , 처마 밑, 닫집, 계단 소맷돌, 범종 등 장식으로 된 용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뱀을 신격화한 용신(龍神)이었는데 불교의 성립과 함께 불교에 수용되어 불법과 사찰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 되었다.

용왕단 가는 길이 정겹다.

특히 불교에서 용은 불법수호, 정법구현, 경전봉안, 부처님 수호 등이며 불교 경전 불본행집경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깨우침을 얻은 후 맨 먼저 귀의한 신도가 용왕이었고 인연승호경에 의하면 용왕이 여자로 변신하여 기원정사로 가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용왕은 용궁 속에 경전을 봉안하고 있으며, 화엄경은 용수보살이 용궁에 있던 것을 꺼내어 세상에 유포시킨 것이고 부처님이 세상에 날 때 두 용왕이 부처님의 몸을 씻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정각을 이룰 때 비를 막아주었다고 한다.

용왕단에서 본 대변항

구체적으로 불교의 용은 천왕팔부중의 하나이며 천, ,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니라, 마후라가를 말한다. 또한 불교경전 묘법연화경서품(序品)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들으러 온 참석자들 중에는 여덟 용왕이 있었으니 난타용왕, 발란타용왕, 사가라용왕, 화수길용왕, 덕차가용왕이며 각각 여러 백천 권속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기장군 장안읍 척판암에 있는 용왕각으로 내륙지방에 있는 용왕각은 대부분 주위에 샘이나 우물이 있다.

용의 순수 한글 이름은 미르이며 현재 우리 나라에서 전해지는 용의 출생지는 인도에서 온 불교적인 용, 중국의 도교나 유교에서 온 용, 그리고 이 땅의 순수 토종용이다. 종합적으로 용의 역할을 보면 호법, 수신(水神), 호국, 예시예언자, 등이다용의 모습 및 외형에 관한 기록은 중국 뇌운문광아에 잘 묘사되어 있어 낙타머리에 사슴뿔, 토끼눈, 소귀, 뱀, 조개 배, 잉어바늘, 호랑이발, 매 발톱을 갖고 있고 입가에는 긴 수염이 있으며 비늘의 수는 81개로 되어있다.

경주시 외동읍 원원사지 용왕각으로 내부에는 우물이 있다.

그리고 용의 아홉 아들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무거운 것을 들기 좋아해서 돌비석 기단에 조각되는 비희, 높은 곳을 좋아해서 전각의 지붕이나 비석의 이수에 장식되는 이문, 소리가 우렁차서 범종의 용뉴에 새겨지는 포뢰, 힘이 있어서 옥문에 장식되는 폐안, 놀기 먹기를 좋아해서 식기나 반상기에 새겨지는 도철, 물을 좋아해서 다리 기둥에 새겨지는 공하, 살생을 좋아해서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새겨지는 애차, 불을 좋아해서 불대좌나 용좌에 새겨지는 산예, 나비나 나방처럼 생겨서 방문의 문고리 등에 새겨지는 초도 등이 있다고 한다.

경주시 외동읍 원원사지 용왕각 안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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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와 기장군의 경계에 위치한 구곡산(九谷山, 해발 434m)은 해운대 좌동에 위치한 산으로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산으로, 일명 아홉산 이라고도 부른다. 일반적으로 장산을 등산하면 장산 억새밭과 더불어 구곡산이 등산코스에 포함되는 산이다.

산 정상은 나무에 에워싸여서 풍광과 조망을 볼 수가 없다. 특히 이 산을 해운대 지역에서 보면 골이 깊게 진 모습은 볼 수 없고, 장산 양운폭포 위 애국지사 강근호를 모신 모정원에서 바라보면 구곡산 봉우리가 거북의 머리모양으로 보인다.

구곡산 지명에 대한 유래는 기장군 철마면 안평마을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한 장수가 두 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그 손가락 사이로 9개의 골이 생겨서 구곡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해운대에는 부산, 울산, 양산을 방호하는 담당부대가 인근 산자락에 주둔하 고 있어 다양한 등산 코스를 추진함에 있어 제한을 받고 있다. 장산 정상을 비롯하여 구곡산 산행 초입 제한 또한 그러하다.

이에 해운대 좌동은 대부분 군사보호구역에 속해 있었으나 1993년 이후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해제되었다. 좌동(左洞)이라는 지명은 춘천천의 좌측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고 2003년 신시가지 조성이후 좌14동으로 분동되었다.

장산마을에서 본 구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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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州)인 로드 아일랜드 주(Rhode Island State)는 1524년 이곳을 처음 밟은 이탈리아 탐험가 베라차노(Verrazzano)가 그리스의 “로도스 섬(The Island of Rhodes)”과 크기가 비슷하다고 해서 “로드 아일랜드”라고 불렀다. 그 후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이곳의 흙이 붉다고 해서 로데(Rode, Red)라고 불렀다.

종교적인 이유로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매사추세츠 주)에서 쫓겨난 퀘이커교도들과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대거 몰려왔다. 1763년 유대인들이 세운 투로 교회(the Touro Synagogue)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회당이 있다. 1763년 5월 4일 맨 먼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이곳이 대서양가에 위치하고 있어 공식별명이 “대양 주(the Ocean State)”이다. 주도는 프로비던스(Providence)이다.

이후  19세기 부자들, 뉴욕 은행원이나 사업가들이 여름휴양을 보낸 뉴포트가 있다. 지금도 Belle-vue Ave에는 호화로운 저택과 식민지 풍의 건물이 남아 있고 요트와 음악축제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서양을 마주 보고 있는 19세기 뉴포트 호화별장(Mansions)은 뉴포트 컨트리 보존협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브레이커스(Breakers), 로즈 클리프(Rose cliff), 마블하우스(Marble House), 킹 스코트(Kings cote), 일름(Elms), 샤토 쉬르 메르(Chateau-sur-Mer) 등의 별장이 있다.

별장을 구경하려면 우선 Ticket을 구매해야 입장이 되는데 Ticket 종류에는 5개 별장을 구경할 수 있는 통합 Ticket, 브레이커스 별장에다 추가 별장을 볼 수 있는 Ticket, 브레이커스 별장만 보는 Ticket 그리고 다른 별장을 보는 등이 있다. Ticket 값은 좀 비싸다.

뉴포트의 대표 별장은 역시 브레이커스다. 시간 일정 때문에 브레이커스와 로즈클리프만 보기로 했다. 1895년에 지어진 궁전 같은 브레이커스는 70개의 방이 있고 코넬리우스의 밴드빌트2세를 위해 지은 건물이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따르고 있다. 로즈 클리프는 뉴포트에서 가장 큰 무도실을 갖추고 있고 베르사유의 그랑 트리아농을 닮았다.

별장관련 클리프 워크(Cliff Walk) 산책로를 걸으면 해안 따라 지어진 뉴포트 별장과 대서양의 푸른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클리프 워크(Cliff Walk) 산책로 구간은 Memorial Blvd와 베일리스 비치(Bailey’s beach)사이로 구간거리는 3.5마일이다. 뉴포트 별장 위치는 베일리스 비치와 가깝다.

뉴포트 맨션을 출발하여 포트 아담스 주립공원 도착 전 만난 해변

축제 장소로 유명한 포트 애덤스(Fort Adams) 주립공원은 1800년대 중반에 지어진 포트 애덤스 요새를 중심으로 한 공원이다. 공원에서는 재즈, 포크 등 다양한 음악축제가 열리고 소풍 및 일광욕을 즐기는 곳이다. 때 마침 자동차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는데 개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차를 전시하고 있었다. 사진에 담으려고 촬영 양해를 구하니 흔쾌히 승낙하였는데 본인 자동차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하였다. 역시 미국은 자동차 나라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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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소리 떠난 송정마을

동네 한바퀴/부산광역시 2020. 1. 5. 18:31 Posted by 추야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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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은 단연 해운대해수욕장이다. 이에 뒤지지 않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송정에 있는 송정해수욕장이다. 송정에는 사시사철 여행객이 찾는 송정해수욕장을 비롯하여 석양과 일몰을 즐기기에 좋은 죽도공원이 있고 구덕포 광어골에는 맛 집과 카페들이 해안선 따라 즐비하게 있으며 야경 또한 아름답다.

동해남부선 폐구간 트레킹코스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하다. 기적소리가 멈춘 송정역에는 현재 환경개선 작업이 진행 중이다. 특히 역사건물에는 40년대 건축양식 중 하나인 아르누보 양식을 가진 건축물도 있어 영화촬영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송정(松亭)이란 지명은 본래 갈개 또는 가래포(加來浦), 가을포(加乙浦)라고 불렀다. 갈개는 갈대의 지방 방언으로 갈대가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으로 전하며, 가래포의 가래는 갈대의 사투리이다. 가을포는 가래포의 차음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을포를 송정으로 부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곳의 세거 씨족인 광주 노씨(光州盧氏)가 해송림이 울창한 언덕에 정자를 지은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하고, 또 하나는 죽도(竹島) 앞 거북 바위에 서 있는 일송정(一松亭)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이 나무는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섬의 바위 위에서 수백 년 동안 자라 마을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으나, 6·25 전쟁 당시 주둔한 영국군이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면서 고사하였다고 한다.

송정 마을[송정동]의 명확한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기장현의 9포 중 제일 포구인 가을포(加乙浦)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이 속한 지역은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 기장현 남면 송정방으로 기록되어 있다.

1880(고종 17) 기장현의 전부와 양산군의 일부가 동래군으로 편입되며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로 되었으나 기장군읍지(機張郡邑誌)[1899]에는 다시 기장군 남면 송정리로 나타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동래군 기장면 송정리 송정 마을이 되었다.

1963년 부산시가 부산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해운대출장소에 편입되어 송정리 송정 마을이 되었고, 1966년 송정리가 송정동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부터 5개년에 걸쳐 토지구획 정리 사업을 시행한 송정천 일대 늪지 매립으로 대규모 택지가 조성되며 마을의 북쪽이 개발되었다. 1980년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 부산 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며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 송정 마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때 명창 선우일선이 부른 송정의 노래가 다음과 같으며 대한팔경의 노래가사를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헤 광어골 열두골은 골마다 기염(氣焰)이요

다리돌(청사포와 구덕포 경계 바다 속의 바위) 바라보니 여름의 나그네라

에헤야 좋구나 좋다. 에헤야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에헤 대섬(죽도)에 일본송(一本松)은 못 보면 한이 되고

섬 위에 돋는 달은 볼수록 찬란하네.

에헤야 좋구나 좋다. 에헤야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에헤 간진암(오륙도 쪽으로 바다 속에 있는 바위) 열두봉은 봉마다 기암이요

우뚝 선 망덕봉은 평온을 지켜주네

에헤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아

명승의 송정이 자랑이로구나.」

망덕봉은 해운대 송정동과 기장읍을 경계하고 있는 봉우리다. 고종 때 충신이던 흠재 노영경 대감이 태어날 때 그의 모친이 이 산 정상에 보름달이 뜨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망덕봉이라 하였다 한다. ()은 보름달을 뜻하기도 한다. 이 산은 봉우리가 말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멍두산, 망아지머리산, 마두봉이라 불리고 있다. 송정과 기장 지역에는 노영경 대감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개발로부터 살아난 송정해수욕장과 송정항

기장군과 경계에 있는 송정해수욕장은 도회적이고 화려한 해운대해수욕장에 비해 아담하고 순수한 아름다운 해수욕장이다. 요즘 서핀을 타는 젊은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 송정해수욕장 모습을 가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1968년 부산직할시는 5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송정해수욕장을 어항으로 만들기 위한 3차 공사를 시행하였다. 방파제 기초 조성사업인 석축 공사가 죽도에서 해수욕장 중심부를 향해 약 30%쯤 진행되고 있었을 때, 당시 송정동에 거주하던 모 기관장인 김낙희 라는 분이 이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어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속적으로 반대한 결과 공사를 중단시키고 어항은 동쪽(죽도공원 뒤편)으로 옮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지금 규모의 아름다운 송정해수욕장 가지게 되었다.

소금배가 지나갔던 송정천(松亭川)

해운대구 송정동과 기장군 기장읍 당사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송정천은 장산 동편 앵림산에서 발원되어 동해바다로 유입되고 있다. 옛날에는 강폭이 넓고 수심도 깊어서(일제 강점기 때 측량된 지적도에는 강폭이 약 200m 이상 되는 것 같다.) 큰 배가 오르내릴 수 있었고, 앞바다에서 소금배가 하구에서 상류까지 짐을 싣고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강 중간 당사리 앞쪽 강변에는 천석바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옛날 천석의 소금을 가득 싣고 장사꾼들을 태운 큰 배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이곳 강으로 대피하였으나 사나운 태풍과 폭우로 끝내 이 천석바위 근처에서 뒤집히고 장사꾼 들은 강물에 빠졌다.

사람들은 격류에 떠내려가던 중 강가에 있는 이 바위에 걸려 구조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천석의 소금 배를 구출하였다 하여 이 바위를 천석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나무가 많아서 지어진 죽도(竹島)와 죽도공원

죽도라는 지명은 현재는 공원 일대에 대나무가 많이 없지만 예전에는 경상 좌수영의 전시용(戰時用) 화살이 제조될 정도로 많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현재 죽도의 모습은 송정천에서 내린 모래로 바다가 메워져 육지와 이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육지와 떨어진 섬 이였다.

죽도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197147일 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일몰 감상하기 좋은 장소로 유명하다.

1940년대 역사 건축양식을 가진 송정역사(驛舍)

송정역은 194012월 건립된 역사(驛舍)로써 70년 역사를 간직한 목조단층 기와지붕 형태의 건물로 전체적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건축사적 보존 가치가 매우 높다. 철제 창고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띠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크고 2006124일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302호로 지정되었다.

바닷가에 위치한 동해남부선 송정역은 지금은 세월의 뒤안길에서 기적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19341216일 역원을 배치하지 않은 간이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194151일 송정역이 준공되자, 동년 61일 보통 역으로 승격되었다. 19767월에는 차급화물 업무가 중지됐다.

또한 송정역은 해운역과 기장역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철에는 피서객 이 몰리는 곳이였다.  최근에는 송정역 주변이 각종 영화 촬영 장소로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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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4년 영국인 탐험가 존 스미스가 지금의 매사추세츠 주, 로드아일랜드 주, 코네티컷 주, 버몬트 주, 뉴햄프셔 주, 메인 주 등 여섯 주를 뉴잉글랜드라고 명명하였다. 뉴잉글랜드는 지리적으로 서쪽으로는 애팔래치아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대서양과 접해 있다.

워싱턴 산을 비롯하여 소나무, 전나무 등 숲이 장관을 이루어 가을이 특히 아름답다. 미국의 철학자, 시인,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1817~1862)의 월든(Walden)의 배경인 월든 호수(Walden Pond)와 오두막(Site Of Thoreau’s Cabin)이 콩코드에 있다.

대서양과 인접하여 바다가재, 조개, 굴 등 해산물이 풍부하고 대합과 감자, 우유로 만든 클램 차우더(Clam Chowder) 등 해산물 음식이 유명하다. 큰 사이즈의 바다가재도 마트에서 비싸지 않는 가격으로 쪄서 팔기 때문에 숙소에서 먹을 수 있다. 옛 생각에 한국 Costco에서 클램 차우더(Clam Chowder) 통조림을 사서 먹었는데 예전 맛이 아니었다.

특히 바다가재는 많이 잡히는 여름에 가장 싸다. 보스턴에 있는 마트에 가면 품질 좋은 소고기와 유제품을 구입할 수 있고 스테이크 용 소고기는 맛이 아주 좋다. 뼈도 저렴하게 구입하여 곰국으로 요리해서 먹으면 또한 좋고 우유와 요구르트 류 또한 맛이 좋다.

1819세기 뉴잉글랜드는 교육, 상업, 의술 등 발달하였고 제조업으로는 조선업, 면방직, , 신발, 기계류를 생산하는 대형 공장이 즐비했다. 또한 고래잡이를 비롯한 어업도 유명했다. 지금은 금융, 보험, 컴퓨터, 소프트웨어, 생물공학, 관광이 주요 산업이다.

전통적으로 뉴잉글랜드 지역 주민은 수줍음이 많고 소박하다. 이런 점은 말수가 적고 검소한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여행객 입장에서는 신중함과 쌀쌀함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사실은 약간 점잖은 스타일이라 생각하면 된다.

미국의 지명에는 캠브리지, 옥스퍼드, 맨체스터, 리치몬드, 런던, 우스터, 포츠머스 등 유독 영국 지명이 유난히 많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미지의 땅 신대륙에 도착한 식민지 개척자들이 본능적으로 고국의 지명을 붙였고 영국과 비슷한 풍경이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도 영국 지명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제임스타운이나 엘리자베스 빌, 리치몬드처럼 왕, 여왕이나 공작이름을 딴 지명도 있다.

심지어 이름뿐 아니라 특성까지 공유한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대학 도시 케임브리지와 매사추세츠 주 하버드 대학과 MIT 공대이다.

뉴잉글랜드의 중추이자 역사의 도시 보스턴(Boston)

보스턴은 뉴잉글랜드 중 인구가 가장 많은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역사의 도시이자 주도이다. 매사추세츠 주(Massachusetts State) 이름은 인디언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거대한 산이 있는 곳(great mountain place)”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영국의 두 번째 식민지로 원래 이름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Massachusetts Bay Colony)였다. 그래서 만(灣, Bay) 주(州), 또는 옛 식민지(the old colony state)라고 불리며 드물게 콩을 먹는 주(the Bean-Eating State)라 불리기도 했다.

 미국 첫 공립학교인 보스턴 라틴 스쿨이 1635년에 건립되고 1년 후에 하버드 칼리지가 생겼다. 최초 13개 식민지에서 발간한 신문도 1704년 보스턴에서 첫 선을 보였다. 또 보스턴은 독립전쟁 당시 영국 통치에 대항한 중심지였다. 1770년 보스턴 차사건, 1775년 벙커 힐 전투는 자유를 위한 대표적인 투쟁의 사례로 남아있다.

 

오늘날 보스턴 권역은 미국 교육을 견인해 나가는 곳이다. 전자공학, 생물공학, 의학 그리고 금융은 보스턴의 교육 자원이 배출한 중요 사업이며, 예로부터 보스턴은 미국에서 지식인 사회의 리더 역할을 맡아왔다.

예전에는 서울에서 보스턴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가 없어 중간 경유지에서 환승하여만 보스턴에 갈 수 있었다. 그 당시 여행에서는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경유지 중 시카고 오해어 공항에서 환승하여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으로 보스턴에 도착하였다.

보스턴은 렌터카로 운전하기가 무척 힘들다. 좁은 일방통행도로가 많고 주차하기가 힘들며 주차료마저 비싸다. 그래서 시내 여행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좋으며 매사추세츠 항만교통공단(MBTA)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이때 지하철 표시를 T로 나타내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항상 느끼는 것이 깔끔하고 깨끗한 우리나라 지하철이 최고라는 것이다. 대다수 국민이 이용하고 필수적인 시설은 민간 기업이 아닌 국가가 관여하는 것이 국민이 생활하기가 좋은 나라이다.

관광차량을 이용하는 방법은 Boston Duck Tours트롤리 투어있다. Boston Duck Tours2차 세계대전 때 쓰이던 수륙양용 차, 일명 오리차를 타고 수로와 육로로 보스턴 관광을 하는 것이 있고 트롤리 투어는 시티 투어 버스처럼 보스턴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그리고 도보로 여행하는 것도 좋다.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 자유의 길이라고 불리는 여행코스로 식민지 시대와 독립전쟁 시기의 주요 유적지 16곳을 두 줄의 붉은 벽돌 길로 조성한 것으로 벽돌 길을 따라 도보로 미국 건국 역사 여행을 하는 것이다. 보스턴 코먼 공원에서 출발하여 찰스 타운에 있는 USS Constitution 호 까지 여정으로 총 2.5마일(4km)거리다.

보스턴 코먼 공원은 1634년에 조성 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공원내에는 보스턴 학살 기념비와 남북 전쟁 전사자 기념비가 있다USS Constitution 호는 1797년에 건조되어 현재 미 해군이 보유한 군함 중 가장 오래 된 군함이며 Old Iron sides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보스턴에는 명문 하버드 대학과 메사추세츠 공과 대학(MIT)이 케임브리지에 있다. 하버드 Square 중심으로 약 3만 명의 대학생이 젊음의 도시로 이끌어 가고 주변에는 서점, 카페가 즐비하며 거리 공연도 볼 수 있다. 또한 주변 찰스 강에는 매년 10월 대학 조정 선수들이 경기를 하고 무료 야외 공연도 있어 대학도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에 창립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대학이며 케네디를 비롯한 6명의 대통령과 33명의 노벨상 수상자 등 인물들을 배출해 낸 곳으로 1500의 부지에 400개 이상의 건물이 있다.

MIT1861년에 창립되어 공학, 이학, 건축학, 인문과학분야에서 수많은 공적을 쌓았으며 유능한 과학자를 배출해 낸 세계 제일의 공과대학이다546의 부지에 80개 이상의 건물이 있다.

오늘날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대부분의 대학은 본래 각 종파의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으며 하버드대학(1636)은 퓨리턴 성직자, 프린스턴 대학(1701)은 장로교 성직자, 월리엄 메리 대학(1747)은 영국 국교도 성직자 육성을 위해 각각 설립되었다.

보스턴 미술관은 세계 4대 미술관 중 하나이다. 사실 미국에 있는 미술관이지만 미국 관련하여 볼 것은 빈약하며 주로 그리스·로마 미술, 인상파 미술 등 유럽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대 이집트 문명이 흥미롭고 재미가 있었다. 일반인용 입장권을 구입하면 30일 이내에 2번사용 가능하다.

매사추세츠 주 의사당은 마치 이슬람 사원을 연상케 하는 금빛 돔형의 건물로 1789년에 지어졌다. 의사당 내에는 독립전쟁에 관한 물건들과 플리머스 식민지사 등의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여행객과 예술가들의 메카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

반도인 Cape Cod는 보스턴에서 가장 가까운 휴양지이고 반도 길이가 65마일이다. 가장 오래 된 마을 샌드위치(Sandwich), 유서 깊은 건물이 많은 두 번째 큰 마을인 팰머스(Falmouth)와 우즈홀(Woods Hole)이 있고 해안선, 연못, 습지 등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채덤(Chatham)에서 프로빈스타운(Provincetown)까지 국립해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프로빈스타운은 Cape Cod의 끝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술로 유명한 마을이다. 모래 위 산책과 해변 숲을 자전거 타기에 좋다. 1620년 필그림이 신대륙 땅에 맨 처음 발을 내딛은 곳이 바로 또한 이곳이다. 여기서 그들은 5주 동안 머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Commercial St에서 여장남자와 동성애자들의 화려한 축제가 있고 게이들의 활동도 많다. 여행 당시, 게이 둘이 2인용 자전거를 화려하게 꾸며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마치 신혼여행 하는 모습 같았다.

Cape Cod Boat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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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로써 시자체가 왕릉을 비롯하여 문화유산으로 묻혀 있어 마치 노천 박물관과 다름없다. 안압지, 계림, 황룡사지 주변에는 계절에 따라 청보리, 유채 등의 아름다운 색채가 고즈넉한 문화유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또한 형형색색 맛 집과 카페 등으로 구성 된 황리단길은 젊은이들에게 경주를 찾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추령 터널을 통해 동해안을 향해 국도로 이동하면 푸른 평야와 감은사지, 동해구에서의 문무대왕암을 지나 남쪽 울산방향으로 가면 조그만 어촌항인 읍천항을 찾는다. 이곳은 바위가 해변에 너무 많아 항구역할이 힘 드는 지형에도 불구하고 1종 항구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어민들은 미역, 전복으로 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다.

이곳에서 주상절리를 감상하려면 파도소리 길을 이용하는데 이 길은 산책길로 읍천항에서 하서4리 진리항까지 1.7km구간이 되는 해안 길로 몽돌길, 야생화길, 등대길, 데크길 등 해안 환경을 고려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고 제주도, 울릉도 못지 않는 주상절리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해안가에 철책선이 있어 주상절리를 볼 수가 없었는데 경주시가 이를 2012925일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하였고 관광 상품화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 발전시켰다.

주상절리(柱狀節理)의 한자는 기둥 , 모양 , 마디 , 다스릴 로 기둥모양으로 쪼개진 돌을 형상화한 것으로 주로 화산지형에서 볼 수 있다. 양남의 주상절리는 신생대 제3기의 에오세(5400만 년 전)에서 마이오세(460만 년 전) 사이에 경주와 울산 해안지역 일대의 활발했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10m가 넘는 정교한 돌기둥들이 1.7에 걸쳐 분포해 있으며, 주름치마, 꽃봉오리, 부채꼴 모양의 특이 주상절리를 비롯한 수평 방향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발달되어 있다.

지하의 기반암이 녹아 형성된 마그마는 지표로 나오면서 빠르게 식는다. 반 액체 상태인 마그마는 고체가 되는 과정에서 부피가 수축한다. 이때 수축면의 중심에서 각 꼭짓점의 거리가 동일한 육각형 모양의 절리가 만들어 지는데, 이것이 지표에 노출되어 기둥처럼 떨어져 나가면 비로소 주상절리가 탄생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상절리의 발달에는 마그마의 급격한 냉각이 필수라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하에서 1,000도 가열된 마그마가 지표 밖으로 분출되어야 하므로 결국 주상절리의 발달은 분출암의 대표주자인 화산암과 관련 깊다.

양남면(陽南面)은 경주 동남쪽 동해변에 위치한 면으로 북쪽으로는 양북면, 서쪽으로는 외동읍, 남쪽으로는 울산광역시의 북구, 동쪽으로는 동해에 접해 있다. 신라시대에는 신라6부의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에 속하며 영역으로 상서지(웃섯골), 하서지(아랫섯골), 내아가 기록되어 있다. 하서지는 현재의 양남면 하서리 일대를, 내아는 나아리 일대를 가리킨다. 『동경잡기』에는 현재의 양남면과 양북면 및 감포읍 지역이 동해변(東海邊)이라는 1방으로 기록되어있다.

진리항은 진리마을에 있는 항구로 신라시대에는 밤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율포(栗浦)라 불렸다고 하고 신라 눌지왕 때 충신 박제상이 왕명으로 왕자를 구하러 왜로 떠날 때 여기서 출범했다고 한다. 그 후 마을로 통하는 길이 없어 나룻배로 길을 건넜다고 나루 진(), 마을 리()를 합하여 진리(津里)라 이름 붙여졌다.

율포는 박제상이 왜로 출발한 항구로 그 위치가 논란이 되고 있는데 1989년 석굴암 연구회에서 울산 정자항을 율포라 여기고 유포석보 주변에 박제상 발선처비를 세웠다. 삼국유사 권제1 2 기이(紀異) 내물왕과 김제상에는 율포 바닷가로만 명시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진리항을 포함하고 있는 하서리(下西里)는 동해해변가의 온화한 기온에 옥토를 가진 농어업 겸업의 환경 좋은 마을이다. 신라 초기 육촌 중 배씨 세력지역으로 한기부(漢祇部)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에 해당되며 시조는 기타(祇陀)로 이곳을 입주, 개척한 후 하서지(下西知)라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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