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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일몰 풍광이 뛰어난 곳 중 한곳이 사하구 다대포의 몰운대이다. 서해바다를 느끼게 하는 다대포 해수욕장은 근처 을숙도와 더불어 바닷가 해안도로 라인 풍광이 아름답다. 또한 다대포는 부산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지질탐사를 하는 탐사객의 발길이 잦다.

 

수심이 얕고 넓은 백사장이라서 인기 많은 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 초입부터 울창한 소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몰운대(沒雲臺, 부산시 기념물 제27)는 강원도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부산 다대포 몰운대 까지 370km에 이르는 낙동 정맥의 끝자락이고 금정산지의 끝자락이 대한해협으로 유입하여 형성된 곳으로 16세기까지 몰운도(沒雲島)라 부르는 섬이었다.

이후 낙동강의 퇴적물로 다대포육지와 연결되어 육계도가 되었다. 남쪽 끝은 해식애와 해식동이 발달되어 있고 배후인 육지는 모래해안이 발달하여 다대포해수욕장 같은 아름다운 해수욕장으로 생겼다. 몰운대 지명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선조40년 동래부사 이춘원이 몰운대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다대(多大)라는 이름을 답달(畓達), 다다라(多多羅), 다다라(多多良)에서 변하여 생긴 이름으로 부산의 지명 중 그 유래가 가장 오래되었다. 다대항은 2001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북한 응원단을 실은 만경호가 입항한 곳으로 다대진이라고도 불렸다.

다대포는 신라시대 부터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임진왜란이후 경상좌도 7(부산, 다대, 서평, 포이, 개운, 두모, 서행) 중 의 하나로 부산진과 함께 다른 진보다 더 중요시되어 2배의 병선을 보유하고 있다. 태종 7(1407) 궁궐(한양)에서 바라볼 때 경상도를 좌우로 나누어 낙동강 동쪽을 경상좌도, 서쪽을 경상우도로 불렸다.

대동여지도 : 동래
대동여지도 : 다대포와 몰운대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에는 영()을 설치하였는데 다수의 육군인 경우는 병영(兵營), 수군인 경우는 수영(水營)을 설치 및 운영하였고 주로 성곽 형태로 되어 있다. 이를 지휘하는 직위는 병영은 병마절도사(병사), 수영은 수군절도사(수사)로 품계는 각각 종2, 3품이다.

경상좌도 해안 방어를 지휘한 좌수영의 위치는 동래현 부산포이고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다. 1592년 동래남촌(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겼고 1636(인조14) 감만이포(勘蠻夷浦, 감만1)로 옮겼다. 1652(효종 3) 동래남촌으로 다시 옮긴 후 1895(고종 23) 영이 폐지 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경상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거제이며 1604(선조37) 고성(통영)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라좌도 좌수영의 위치1479(성종 10)는 여수이며 전라우도 우수영의 위치는 1377년 고려 우왕3년 무안(당곶포)에 수군이 처음 설치 된 후, 1440(세종 22) 무안에서 해남(황원관)으로 옮겼고 1465(세조 11)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하였다. 충청도 수영의 위치는 보령(오천항)이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수군통제사 또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종2품으로 1593(선조 26)에 생긴 직제이다. 초대 수군통제사는 이순신장군으로 지휘하는 통제영(統制營), 통영(統營)의 위치는 1593(선조26) 한산도에 두었다가 임진왜란 끝난 후 1604(선조 37) 통영(두룡포)로 옮겼다.

몰운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광

다대포 객사 회원관(懷遠館,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3)은 조선후기 다대 첨절제사영의 부속 건물이고 첨절제사의 품계는 종3품이다. 다대포 객사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건하였다가 1825(순조 25)에 마지막으로 중수했다. 다대초등학교(다대1) 내에 있던 것을 1970년에 현재의 자리로 원형 그대로 이전 복원하였다.

객사는 조선시대 관아건물로서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임금을 상징 하는 궐자를 새긴 위패)를 보관하고, 고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를 드린 곳이며, 행정업무와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객사구조는 일반적으로 궐패를 모시는 전청 또는 주사(主舍)와 좌우 한 단계 낮은 건물인 동서 익랑, 또는 익사(翼舍)로 되어 있으나 다대포 객사는 정면 3, 측면 2, 팔작지붕의 벽이 없는 전청만 있다.

조선시대 행정편제는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관아인 경직관아(京職官衙)와 지방 행정시설인 외직관아(外職官衙)로 구성되어 있다. 외직관아는 전국 8개도와 아래에 부, 대도호부, , 도호부, , 현 등을 두었고 각 도의 관찰사 아래에는 부윤(府尹), 부사, 목사, 군수, 현령 등의 행정계통 관리조직과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등 군사조직으로 되어있다.

8개도에는 중앙에서 관찰사를 파견하고 이들이 집무를 수행하는 곳을 감영(監營)이라고 부른다. 감영은 관찰사(觀察使). 판관(判官), 도사(都事)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8개도아래의 여러 행전단위를 읍치(邑治)라고 부르며 읍치는 대개 읍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읍치에는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역행정을 총괄하는데 지방관의 집무 및 생활의 공간을 통칭하여 동헌(東軒)이라고 하고 중심건물이 동헌 정청이다. 내아(內衙)는 지방관의 사적공간이다.

몰운대 내 민간인 출입통제지역에는 정운공 순의비(부산시 기념물 제20)가 있다. 이 비는 1592년 이순신 장군의 우부장으로 출전하여 왜의 군함 500척과 싸워 크게 승리한 부산포해전에서 순절한 녹두만호 정운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798(정조 22) 8대손 정혁이 다대첨사로 왔을 때 세운 것이다. 만호의 품계는 종4품이며, 첨사는 정3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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